세 개의 atom 이야기...

 

1. 철학.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는 말은 파르메니데스의 말이다. 이는 동어반복이 아니라 있음 즉 유()는 가능하고 무()는 불가능하다는 말이다.(이정우 지음 세계철학사 1’ 128 페이지) 파르메니데스의 사유는 원자 즉 atom이란 단어의 배경을 생각하게 한다.

 

atom은 쪼갤 수 없다는 의미인데 만일 쪼갤 수 있다면 결국 무가 남을 것이고(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이는 무에서 무엇인가가 생긴다는 이야기가 된다. 즉 아포리아이다. 그래서 이 아포리아를 피하기 위해 atom이란 개념이 설정된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변화를 부정한다. 파르메니데스에 의하면 이 세계는 진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허상이다.(장우석 지음 수학 철학에 미치다.’ 참고)

 

2. 물리학..

 

일본의 물리학자 미치오 가쿠는 물리학자들은 원자로 만들어졌기에 물리학자의 활동은 스스로를 이해하려는 원자의 움직임이란 말을 했다. 문제는 인간이 원자로 이루어졌지만 원자의 거대 집합체인 인간은 원자와 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닐지, 하는 점이다.

 

3. 정치..

 

더는 쪼갤 수 없다는 의미의 원자(물론 저 단어가 생겼을 당시와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나뉘고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나뉘고..)는 정치적 의미도 갖는데 이는 가장 비정치적인 것에서 정치적 의미가 담긴 개인이라는 개념이 도출된 것을 의미한다.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것은 사회적으로는 다른 것으로 대체되지 않는 것 즉 개인이다. 즉 자유로운(지배 세력에 대해 자유를 요구하는) 개인이란 개념이 탄생한 것이다.('김월회, 안재원 지음 '고전의 힘, 그 역사를 말하다' 참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조선 태조 이성계의 (개명한) 이름은 단(旦). 주(周)나라 무왕의 동생으로서 아들이 노나라 제후가 됨으로써 노나라 시조로 받들어진 주공(周公)의 이름도 단(旦).

태조(太祖) 또는 시조(始祖)이니 시작을 뜻하는 아침 단(旦)을 이름으로 쓴 것으로 보임.

이 경우 피휘(避諱)와 무관한 것인가? 주공은 원래 즉 노나라의 시조로 받들어지기 전부터 이름이 단이었는가?(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최초의 몸이면서 집인 콩꼬투리
덜 여문 날들을 다독이느라 푸른 물이 들었을 손
그 손이 인기척도 없이 방문을 닫는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
나는 닫힌다, 한 철

엄경희 교수의 ‘은유‘를 읽다가 그가 어찌나 매혹적으로 시를 탐하게 하는지 감탄. 가방에 함께 넣어둔 이은규 시인의 ‘다정한 호칭‘에 수록된 ‘애콩‘이란 시를 읽는다.

닫히고 싶은 마음을 일깨우는 시. ˝이렇게 한 계절/ 더 피 흘려도 좋다˝는 한강 시인의 ‘새벽에 들은 노래‘보다 희망적이고 밝은 시..아침 전철이 감동으로 넘실거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지난 달 수요 락() 읽기’(매월 마지막 수요일 1830– 20. 함석헌 기념관)에서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을 읽었다. 주위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에 걸쳐 묵묵히 나무를 심어 황무지를 옥토로 일구어낸 주인공을 보며 나는 조에 부스케를 떠올렸다는 말을 했다.

 

조에 부스케(Joë Bousquet: 1897 - 1950)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18년 한 전투에서 척추에 총탄 관통상을 입고 불구가 된 채 남은 생을 책으로 둘러싸인 서재에서 보낸 프랑스의 시인이다.

 

부스케는 실추된 빛이지만 다행히도 잘 잊어버리는 빛인 사물들의 비밀을 알기 위해 나는 상처받았다.”는 말을 했다.(‘달몰이참고) 내가 부스케의 에세이집인 달몰이를 읽은 것은 7년 전인 2011년으로 당시 나는 인용한 그의 글이 목적론적이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리뷰를 썼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인지 지금은 생각이 변했다.

 

최근 김월회, 안재원의 고전의 힘, 그 역사를 읽다를 읽었다. 이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공자를 성인으로 치켜세우다 보니 그가 제자를 교육할 때 즐겨 활용한 ()’, ‘()’, ‘()’도 중시되었고 그가 죽간을 이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닳아 끊어질 정도로 봤다던 ()’과 손수 편찬한 춘추(春秋)’도 더불어 추숭되었다는 것이다.

 

'()' '주역(周易)'의 내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어서 흥미롭거니와 이후 유가(儒家)들은 경()에 지고지순의 가치가 담긴 책이라는 의미의 전()자를 결합시켰고 한무제 때 공자의 학설을 제국 유일의 최고 이념으로 정립하는 작업이 진행됨에 따라 경은 귀하고 신성한 책으로 거듭났다.

 

()이 처음부터 섬김의 대상이었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바 주역(周易) 역시 불변의 경전으로 신성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을 할 수 있다. 어떻든 경전 신성화 작업으로 인해 내 삶은 육경(六經)의 주석.”이라는 언설이 생겨나기까지 했다.

 

경전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경전을 위해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저자들이 말한 대로 나는 경전이 옳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중세 유럽의 기독교적 사유와 많이 비슷하다.

 

그렇다면 실추된 빛이지만 다행히도 잘 잊어버리는 빛인 사물들의 비밀을 알기 위해 나는 상처받았다.”는 부스케의 말은 어떤가? 유가와 중세 유럽의 기독교의 경우 도그마와 이데올로기로 기능했기에 부정적이었다면 조에 부스케의 경우는 새로운 사유를 자극하기에 긍정적이다.

 

기승전공자로 받아들여질지 모르지만 이런 가운데 예()에서 노닐고 논어(論語)에서 노닌다는 공자의 말은 얼마나 혁명적인가?란 생각을 하게 된다. 관건은 어떻게 고전들과 더불어 잘 놀 수 있을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호모 루덴스(homo ludens)적 삶을 사는 한 방편을 체화할 수 있으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우울하고 슬픈 날이었다. 여섯 차례로 준비, 계획했던 하나의 일정이 취소되었고 한 차례 가질 동기 모임은 참석 인원이 적어 일정을 조정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각자 맡은 역할과 처지 때문에 동기들이 다 모일 날을 도출하지 못하는 것은 아쉬운 상황이다.

하지만 바람직한 일일 수도 있다. 그 만큼 바쁘고 역동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제행무상을 슬퍼할 수도 있지만 모두에게 공평한 진리이니 순응의 지혜를 도출해낼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떻든 한용운 시인의 ‘님의 침묵‘ 가운데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란 구절을 음미하고 있던 중에 일정 취소 소식을 들었다.

문제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기는 쉬워도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잘 믿게 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나는 위로 받아야 할 사람의 심경도 헤아릴 여유가 나에게 있음을 감사한다.

오늘 허수경 시인의 암투병 소식도 들었다. 나는 줄곧 비슷한 연배의 시인인 그의 시를 애송해왔다.
˝무를 수도 없는 참혹˝이란 구절 때문인지 그의 투병은 더욱 마음이 쓰인다.

요즘 나는 상대를 많이 위로하고 있다. 나를 위로하기 위해 하는 행동의 일환일 수 있다.

취소된 일정은 다른 것을 준비하는 것으로 대신할 생각이다. 좀더 충실하고 철저한 공부를 하자.

오늘은 시인들의 시집을 해설할 때 예외 없이 두 번 이상 정독한다는 조재룡 교수를 보며 많은 것을 느낀 하루이기도 하다.

해피 엔딩이란 말을 조심스럽게 떠올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