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식 선생님의 신간 ‘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 출간 기념 북토크 소식이 들려왔다.(3월 19일 19시 30분. 통의동 목련원)

‘나의 서양 음악 순례’를 읽고 윤이상 선생님과 서경식 선생님을 디아스포라로 정의한 리뷰를 쓴 지난 2011년의 기억이 스친다.

목련원은 경복궁 영추문(迎秋門) 앞에 자리한 황두진 건축가의 집이다.

이탈리아, 하면 괴테와 스탕달을 생각할 수 있다. 괴테가 이탈리아를 여행한 것은 1786년에서 1788년 사이이다.

1817년 스탕달은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이런 글을 썼다. “나는 예술 작품이 주는 천상의 느낌과 격정적인 감정이 교차하는 최고의 감동을 느꼈다.”
스탕달은 ˝산타크로체 성당을 나오며 생명력이 모두 고갈된 것처럼 기진맥진해져서 마치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느끼며 길을 걸었다.“고 썼다.

이로부터 스탕달 신드롬이란 말이 생겨났다. 거대한 예술관이나 자연의 아름다움 앞에서 너무 감탄한 나머지 절망과 두려움 등의 감정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서경식 선생님은 ”아아, 이탈리아. 나를 항상 지치게 만드는 이탈리아.“란 말을 했다.

스탕달 신드롬이라고 하기에는 그렇고 어떤 의미일까? 목련, 3월의 밤, 북토크, 이탈리아, 서경식, 영추문 앞..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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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X() 골짜기를 배경으로 한 한무숙 작가의 유수암(流水庵)‘에는 청수암(淸水庵)과 유수암이라는 두 암()이 나온다. 암이라는 같은 이름을 쓰지만 청수암은 암자이고 유수암은 고급 요정이다.

 

청수암은 구름머리 아낌없이 버려 깎고 번뇌를 끊어 오직 불제자로서 도를 닦는 이승(尼僧)이 사는 암자이며 유수암은 청수암에서 끊어버린 그 번뇌에 얽히며 오히려 그것을 극채색으로 펼쳐보이는 화류가(花柳家) 고급 요정이다.

 

저자는 대비되는 두 암을 이야기하며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란 말로 성()과 속()은 결국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임을 환기시킨다. 색은 결국 공허하고 공은 빈 것이기에 색도 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성모마리아 상을 반쯤 우려낸 게 아닐까 싶게 보살의/ 맵시라지만 눈매 고운 기생의 뒤태를 에두르고 어딘/ 지 성모마리아의 맘씨마저 서렸다고 표현한 유종인 시인의 입상(立像) - 길상사에서란 시가 생각난다.

 

의아한 것은 유수암에서 독경 소리가 흘러나오는 의외의 상황이 펼쳐진다는 점이다. 작가는 진경(陳慶)이라는 주인공을 노류장화의 헛꽃으로 대하지 않고 한 음영(陰影) 짙은 인격으로 쓰고자 했다고 말한다.(’수필집 열 길 물속은 알아도참고)

 

한무숙 작가를 한국의 버지니아 울프라고 말한다. 그러나 두 작가는 수렴하는 부분이 거의 없다고 해야 할 듯 하다. 울프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주로 쓴 모더니즘 작가이고 우울증과 신경쇠약 등으로 자살한 작가이다.

 

굳이 말하자면 한무숙 작가가 보인 못나고 어리석고 가여운 존재들, 특히 여성들에 대한 연민이 울프의 페미니즘에 수렴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낙화유수의 줄임말인 유수는 쇠잔영락을 상징하고 행운유수의 그 유수 즉 일정한 형태 없이 늘 변하는 것을 비유하기도 한다.

 

교묘하게 다의적인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올해가 작가 탄생 100주년이다. 이번 주 수요일 작가에 대해 알아보고 다음 주 수요일 문학관을 간다. 워밍업을 위해 읽기에는 무거운 작품, 그래도 읽어야 할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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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체질이 내 관심사로 갑자기 자리잡았다. 류마티즘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했던 도올 선생이 8체질 체계 창시자인 한의사 권도원 박사로부터 치료받고 완치된 후 ˝내가 만난 신은 단 두 사람이 있다. 그 하나가 모차르트요, 또 하나가 권도원이다.˝란 말을 했다. 이 사실이 더할 수 없이 흥미를 자극한다.

권도원 박사가 체질을 구약 창세기의 구절과 연관지어 설명한 기사를 읽었다. 오전에 8체질 전문가께 전화했더니 배울 생각은 없냐고 물으신다.

사실 나는 자신이 없는 사람이다. 3월 12일로 미팅 날짜를 잡았다. 내 관심사와 매치되는 어떤 강의를 함께 들은 후 체질 측정을 해주시겠다고 해 그러자고 했다.

무슨 강의인지 묻지 않은 것은 내 관심사와 관련이 있는데다가 모르는 채 맞이하는 시간이 흥미로울 것 같아서였다.

체질과 구약 창세기를 관련지은 기사에 이어 예수께서 천기는 읽지만 시대의 조류에 무관심한 사람들(바리새인?)을 위선자라 질타한 신약의 구절을 읽었다.

건강과 정치, 사회현실이라는 두 이슈에 대해 모두 성경에서 시사받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민중신학과 해방신학이 아닌 성경(신약)만 있는 그대로 읽어도 예수는 이미 사회비판적인 분이자 불의를 간과하지 않은 존재임을 알 수 있다.

혼돈과 도착(倒錯), 거대한 불의를 미워 하는 것만으로도 의미는 있다. 물론 그 이후가 관건이다. 올곧은 정신으로 정의의 편에 동참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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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alee 2018-03-04 16: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8체질에 관심이 많은 일인입니다. 책 추천 부탁합니다.교육은 무슨 교육을 받으셨나요? 궁금합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8-03-04 16:27   좋아요 0 | URL
네. 지금 읽고 있는 책이 정윤규 선생의 ‘8체질 건강 기적‘입니다. 교육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http://cafe.naver.com/ecmnaturopathy/회원입니다. 이 카페에 가입하시면 정통 권도원 8체질 교육울 체계적으로 받으실 수 있습니다.
 

완인상덕(玩人喪德), 완물상지(玩物喪志).. 사람을 함부로 대하면 덕을 잃고, 물건에 빠지면 뜻을 잃는다는 뜻.

글감을 찾기 위해서이지만 스마트폰에 빠져 아까운 시간을 허비할 때가 종종 있는 내가 새길 말이 아닐 수 없다.

책을 읽지 못하고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 이상으로 마음을 차분히 들여다보는 시간을 뺏기는 것이 문제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전통 유가(儒家) 입장에서는 시 짓기는 여기(餘技)로 받아들여졌다. 깊이 빠져서 할 일은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의미이다.

그들에게 시 짓기가 여기였다면 본령은 자기수양이었다. 그런데 16세기 호남의 문인들은 그런 정신으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지나치지 않다면이란 전제하에 시 짓기는 물론 물건에 관심을 두거나 탐승(探勝)하는 것도 괜찮다고 본 것이다.

16세기 호남 문인이라면 담양 소쇄원(潚灑園)의 주인공 양산보, 역시 담양 식영정(息影亭)의 주인공 임억령 등이 생각난다.

좋은 누정의 주인들이었다. 적어도 400년 이상 전의 문인들이지만 책을 읽으면 쉽게 마음이 통할 것 같다.

‘숨은 듯 있는 별서(別墅)의 앵두나무 두 그루 사이에서 오래 서 있고 싶은 까닭을 어디에 물어야 할지‘란 말을 한 조용미 시인의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이란 시를 읽는다.

한 앵두나무는 가득, 다른 앵두나무는 듬성듬성 꽃을 피운 별서. 농막이 딸린 정원인 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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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정, 선비문화의 산실 조선의 사대부 9
우응순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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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정(樓亭)은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의미한다. 누각보다 간소한 형태가 정자이다. 저자는 현재의 시각에서 조선시대 누정의 존재와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곳에서 생산된 시조, 가사, 한시 등의 누정 문학을 다시 거론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누정은 사대부 남성들의 공간이었다. 물론 여행중인 평민, 여성들도 이용했을 것이다.

 

()는 어원적으로 중첩하여 지은 집으로 당()과 만드는 방식이 비슷하지만 당에 비해 높이가 높다는 특징을 지녔다. ()은 머무른다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멀리 여행하는 사람이 잠시 멈추어 쉬는 곳이다. 정사(亭榭)의 사는 높은 언덕 또는 대() 위에 건립한 집을 말한다.

 

누각이 왕족이나 사대부층의 유흥 및 사회를 위한 격식을 갖춘 공간이었다면 정자는 평민과 여행자들의 휴식과 만남의 장소였다. 누정은 대부분 배산임수(背山臨水)에 위치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누정의 위치는 물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어 어떤 누정이든 그 주변에 못<: )>이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남원 광한루(廣寒樓)와 함흥 칠보정(七寶亭)은 못 위에 세운 누정이다.

 

누정은 정자라는 점에서 충남 이남에 분포한 모정(茅亭)과 비슷하지만 모정은 주로 농경지를 배경으로 한 소박한 정자이다.(32 페이지) 편액(扁額)은 흔히 현판(懸板)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가로로 걸기 때문에 횡액(橫額)이라고도 하며 글씨를 세로로 쓰기도 한다.(: 띠 모, : 이마 액)

 

정자는 때로 다른 이름의 편액이 걸리는 경우가 있다. 정철이 담양이 세웠다는 송강정은 죽록정(竹綠亭)이라는 편액이 같이 걸려 있다. 이는 송강정 아래 죽록평야를 끼고 흐르는 송강을 죽록천이라고도 부른 데서 생긴 이칭이다. 양양의 하조대(河趙臺)는 이곳을 찾은 하륜과 조준의 성에서 따온 이름이다.

 

달성의 삼가헌(三可軒)을 비롯, 괴산의 애한정(愛閑亭)과 피세정(避世亭), 담양의 면앙정(俛仰亭), 송강정(松江亭) 등은 각각 박성수(朴聖洙), 박지겸(朴智謙), 조신(曺紳), 송순(宋純), 정철(鄭澈) 등의 호를 누정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누정에 얽힌 고사는 주로 중국의 이야기이지만 우리나라의 이야기에서 가져온 명칭도 있다. 조선조 효종은 북벌계획이 무산되자 그것을 한탄하여 해는 저무는데 갈 길은 멀다는 뜻의 일모도원(日暮途遠)이라 했는데 송시열이 이 이야기에서 괴산 모원루의 이름을 지었다. 서울 종로 세검정(洗劍亭)은 인조반정 때 김류(金瑬), 이귀(李貴) 등이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칼을 씻어 칼집에 넣었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이름이다.(44 페이지  

 

누정은 유흥상경(遊興賞景)의 기능을 가졌다. 누정은 시단(詩壇)의 모임 장소가 되었다. 유흥상경의 흥취가 시적으로 표현되면 그것이 곧 누정시가 되었으니 누정시단이 형성되었다. 누정에서는 학문을 연마하고 토론하며 인륜의 도를 가르치고 계승했다. 벼슬을 그만두고 은퇴한 사대부들은 고향에 누정을 짓곤 했다. 누정에서는 씨족끼리의 종회나 마을사람들의 동회 또는 각종 계 모임을 가졌다.

 

누정은 활쏘기 수련장 구실을 하는 등 체력 연마의 장소로 활용되었다. 누정은 한 고을의 문루(門樓)로 방어 기능이 있었다.(문루는 궁문, 성문, 지방 관아 따위의 바깥문 위에 지은 다락집이다.) 누정은 이 밖에 별장, 전쟁 때의 지휘 본부, 재실(齋室), 치농(治農) 및 측후(測候) 시설로도 활용되었다.

 

누정에서 창작된 한시를 누정제영(樓亭題詠)이라 한다. 누정이 시문의 산실이 된 까닭은 누정이 풍광이 좋은 경승지에 건립된 데다가 누정 건립에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들이 대부분 시문을 즐기던 식자층으로 그들이 교유한 사람들 대부분 학자이며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 고명한 학자이며 이름난 시인이었던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는 무등산 밑 소쇄원(瀟灑園)의 주인 양산보와 사돈지간으로 깊은 교유의 정을 나누었다. 식영정(息影亭)의 주인이었던 임억령(林億齡)도 식영정을 중심으로 20곳의 경치 좋은 구역을 선택하여 이름을 붙이고 식영정 20영의 누정시를 남겼다.

 

누정에는 어제시(御製詩)가 많은 것도 특징이다. 누정문학에는 한시로 된 누정시문 이외에 시조와 가사 등 국문시가가 다수 남아 있다. 누정제영은 고도의 창작 역량이 없으면 짓기 어려웠다. 전통적인 유가(儒家)의 입자에서는 시는 여기(餘技)이므로 깊이 빠져서 할 일이 아니라 틈틈이 취미로 하는 재주나 소일거리에 불과하다. 따라서 시 창작에 몰두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으로 자기 수양에 저해된다는 완물상지(玩物喪志)의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서경(書經)을 출처로 하는 완물상지는 완인은 덕을 잃고, 완물(玩物)은 지를 잃는다는 말에서 나왔다. 사람을 함부로 대하면 덕을 잃고 사물에 빠지면 심지(心志)를 잃는다는 경계의 의미이다. 하지만 16세기 호남의 문인들은 심미적 욕구의 자연스러운 표출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었다. 지나치게 과도하지 않다면 작시에 대한 애착과 관심은 물론 경물에 심미적으로 몰입하는 모습도 어느 정도 허용되었다.(68, 69 페이지)

 

누정은 작가의 현실공간과 이상 공간 사이의 경계 역할을 했다는 특징이 있다. 인위로 조성된 공간이지만 의미적 지향은 세속을 벗어난 탈속적 성격이 강한 것이다. 누정은 세속과 탈속, 현실과 이상이 서로 뒤섞이고 길항(拮抗)하는 점이지대의 공간이다.(71 페이지) 누정은 연대(聯隊)의 공간이기도 하다.

 

지식인들은 각박한 정치현실을 피해 산수가 아름다운 자연을 찾았다. 거기서 정신적 위안을 찾고 위대한 자연의 이치를 배우는 삶의 방식을 추구했다.(83 페이지) 누정제영을 의례적이고 상투적으로 즉흥 창작하는 관행이 지양되고 높은 수준의 작품성을 추구하는 분위기가 마련되었다. 누정문학에 대한 인식이 여기(餘技)가 아니라 문학적 진지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으며 적어도 그러한 분위기 내지 공감대가 폭넓게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과정에서 완강한 주자학적 문학관의 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문인 학자들이 등장했고 그들이 산수미에 심미적으로 몰입하고 자유분방한 호기를 발휘하는 새로운 시풍을 시도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87 페이지)

 

3지역별 주요 누정과 누정문학 관련 자료편에서는 서울, 영남, 호남, 강원 지역의 대표 누정들을 만날 수 있다. 경회루, 압구정, 세검정, 보신각, 팔각정(이상 서울),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이상 영남), 담양 면앙정, 남원 광한루(이상 호남), 삼척 죽서루, 강릉 경포대(이상 강원) 등이다.

 

저자는 조선의 누각과 정자가 지녔던 다양한 기능이 근대화 과정에서 휴식의 공간으로 산정되어 인식되고 지금은 관광의 일정에서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고 말한다.(150 페이지)

 

누각과 정자에 참 많은 인물, 사연, 의미, 배경이 얽혀 있음을 알게 된 것이 소득이다. 조선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이기에 한문을 많이 아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 것도 그렇다. 시사(詩社)라는 말을 음미하게 된다. 기록하지 않았지만 경회루를 설명하며 주역의 중천건괘를 인용한 부분, 완물상지, 여기(餘技)와 주자학적 질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부분에 대한 설명 글 등이 인상적이었다.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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