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할 수 있을까 - 인류 고전 15권에 묻고 스스로 답하다
박병기 지음 / 인간사랑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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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할 수 있을까'는 칸트의 세 물음(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을 연상하게 하는 명제이다. 이 명제를 제목으로 한 박병기 교수의 책은 '인류 고전 15권에 묻고 스스로 답하다'란 부제를 가졌다.

 

저자는 '금강경', '수심결(修心訣)' 등의 책들은 자신과 올바른 관계 맺기의 관점으로, '꾸란', '니코마코스 윤리학', '윤리형이상학 정초' 등의 책들은 다른 사람 및 공동체와 관계 맺기의 관점으로,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 노자 '도덕경', '장자' 등의 책들은 일상을 넘어 다른 존재와 관계맺기 등의 관점으로 분류했다.

 

고전 읽기는 삶으로부터의 거리두기의 의미를 갖는다. 저자는 고전과 가까워지려면 내 안의 보편적 지향 즉 삶의 의미 물음을 꺼내드는 것을 통해 가능하다고 전제한 뒤 그 물음은 매우 추상적이어서 삶과 무관해 보이지만 인간으로서 자신을 정면으로 마주하고자 할 때 반드시 만나야 할 뿐만 아니라 이미 만나고 있는 친근한 것이기도 하다고 결론짓는다.

 

세 챕터로 구성된 책의 각각이 관계맺기(자신과, 다른 사람 및 공동체와, 일상을 넘어 다른 존재와)이거니와 이 부분에서 생각나는 말이 하나 있다. 바로 파스칼의 말이다. 인간의 모든 불행의 근원은 홀로 조용히 방에 머물 수 없다는 것이란 말이다. 조용히 방에 머무는 것은 자아 성찰을 의미한다.

 

인간은 자신의 부끄러움, 욕망, 불안 등을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 관계 맺기에 실패하면 다른 사람 및 공동체, 더 나아가 다른 초월적 존재와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관계 맺기의 중요성은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전이(轉移)라는 개념을 통해 알 수 있다.(자세한 설명 생략)

 

자기와의 바른 관계 맺기는 삼가는 마음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공동체 및 다른 존재들을 헤아리고 포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일반적인 독해와 저자 특유의 독해가 반영된 '우리는 어떤 삶을 만날 수 있을까'를 읽음으로써 훌륭한 인류의 고전들과 만나는 방법을 제시받게 된다.

 

행복한 일이지만 그렇게 제시받은 방법을 참고하며 해당 고전들을 또는 다른 고전들을 직접 읽어야 하는 과제 앞에 서게 된다. 저자는 '금강경'을 이야기하며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등 깨달음의 네 단계는 순차적으로 도달하는 것이기보다 어느 순간에 문득 도달하는 것으로 본다.(34 페이지)

 

'금강경'은 소유와 관련된 모든 상()의 허망함을 일깨우는 책이다. 저자는 세상을 바라보는 창()을 갖는 것을 상()을 세우는 것으로 본다. 수다원은 세상의 흐름을 뛰어넘은 사람을 의미하거니와 저자는 수보리에게 보내는 부처의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이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계속 지켜볼 수만은 없다는 일상의 작은 깨침을 출발점으로 삼아 세상의 흐름을 정확하게 바라보고자 노력하면서 그 노력을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을 향하는 친절과 미소와 실천으로 연결시켜갈 수 있다면 이미 우리는 수다원에서 아라한에 이르는 수행의 과정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을 한다.(39 페이지.. ‘금강경은 부처와 수보리라는 제자 사이의 대화로 이루어진 책이다.)

 

문득 깨침<돈오(頓悟)>과 지속적인 닦음<점수(漸修)>을 수레의 두 바퀴에 비유한 목우자(牧牛子) 지눌 스님의 수심결(修心訣)’을 설명하며 저자는 깨침을 얻는 과정에서는 스승 즉 선지식과의 관계가, 닦음의 과정에서는 도반과의 관계맺기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을 한다.

 

저자에 의하면 마음먹기는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하는 출발점이자 귀결점이다.(49 페이지) 깨침은 마음먹기에 크게 의존하지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인정하지 않는 나에게 저자의 통찰은 반가운 마음을 갖게 한다. 저자는 이율곡의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설명하며 일상에서 한 발 물러나 자신의 마음을 성찰하고 이익이나 자리만을 위해 맹목적으로 달려가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는 윤리의 중요성을 제시한다.(60, 61 페이지)

 

나는 저자가 시민 윤리의 핵심을 의로움과 이익 사이의 균형 잡기로 풀이하는 것을 보며 공자가 말한 군자는 그 균형 잡기에 성공한 사람이 가는 길이라 생각한다.(의로움과 이익 사이의 균형은 공자의 논어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제시된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윤리학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두드러진 삶의 유형을 향락적인 삶, 정치적인 삶, 관조적인 삶으로 정의했다.(93 페이지) 이 챕터에서 저자가 이런 말을 한다. 우리 사회에서 윤리는 대체로 부담스럽고 답답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한편 완전히 무시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는.(95 페이지)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들에게 잘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이 우정과 정의임을 강조한다.(‘니코마코스윤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들에게 건넨 가르침을 모은 책이다.) 우정과 정의는 각자에게 맡겨지는 시민윤리를 넘어 필요한 공공의 영역을 위해 필요한 덕목이다.(98 페이지)

 

저자는 칸트의 윤리형이상학 정초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우리 사회에서 윤리에 관한 단 하나의 정의(定義)를 만나는 일은 불가능하지만 이미 통용되는 규범의 차원, 그것과 연계되면서도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마음 속 열망의 차원은 윤리라는 말이 사용되는 맥락에서 일관성 있게 관찰되는 두 차원이라 말한다.(103 페이지)

 

전자는 도덕(道德), 후자는 윤리(倫理)라 불리지만 엄격한 것은 아니다. 칸트는 맹자처럼 인간의 본성 속에 통제하기 어려울 만큼 강렬한 본능적 욕구와 희미(稀微)한 선의지가 함께 존재한다고 보았다.(106 페이지) 칸트가 말한 준칙(準則)은 주관적인 것, 가언명령(假言命令)이고 법칙은 당위적인 것, 정언명령(定言命令)이다.(107 페이지)

 

칸트의 정언명법은 실현 가능성을 회의하게 하지만 그럼에도 유한한 삶 속에서 진정한 의미 물음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109 페이지) 저자의 글을 통해 우리는 고전은 시대적 한계와 역사적 의미를 동시에 갖는, 끊임없이 현재적 해석이 이루어져야 하는 텍스트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 요소 요소에서 우리 현실과 연계시켜 고전을 설명하는 비근한 방법을 제시한다. 윤리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우리 사회의 도덕적 이중성을 고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는 마광수 교수 이야기를 하고 플라톤의 국가를 이야기하며 아비투스와 상징폭력을 이야기한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를 이야기한다. 법꾸라지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런 저자는 도덕경편에서 노자의 부드러운 음성은 우리 일상 속에서 과장되고 왜곡된 모습을 하고 있는 강함과 단단함의 허상을 직시할 수 있게 하는 죽비(竹篦)라 말한다.(191, 192 페이지)

 

저자는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을 이야기하며 한강(韓江) 작가의 채식주의자의 한 구절을 이야기하고, 목우자(牧牛子)라 불린 지눌(知訥) 스님의 수심결을 이야기하며 자신이 어릴 적 경험한 소 치는 이야기를 전하기도 한다. 근취저신(近取諸身) 즉 가깝게는 자기 몸에서 진리를 찾는다는 주역 계사전의 구절을 생각하게 한다. 물론 저자의 문제의식은 근취저신과 대대(待對)인 원취저물(遠取諸物) 즉 멀리는 만물에서 진리를 찾는 데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고전을 읽는 것 자체가 목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서 출발하자고 말한다.(205 페이지) 필요한 것은 우리 일상에서 직면하는 철학적 물음을 회피하지 않는 태도이다. 저자는 고전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읽으려 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자신의 문제 상황 즉 화두(話頭)와 만날 수 있는 구절이나 행간을 중심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207 페이지)

 

저자는 고전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 노력이 시민이 지녀야 할 기본 자세 중 하나라 말한다. 이 부분에서 시민이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된다. 채효정 저자에 의하면 국민은 정치적 존재가 아니고 시민은 정치적 존재이다.(‘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223 페이지)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일상의 도도한 흐름에 온전히 내맡기지 않는 거리 유지의 자세를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금강경을 이야기하며 세상의 흐름을 뛰어넘은 사람인 수다원을 말한 저자의 의도를 떠올리게 된다. 비판적 성찰의 자세, 지금 여기에 답을 찾고 먼 미래, 근원적인 것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치열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발심(發心)과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은 고전 읽기에도 적용되는 덕목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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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도봉 문화 유산 코스(벽초 홍명희 집터, 고하 송진우 집터, 가인 김병로 집터, 위당 정인보 집터, 간송 전형필 가옥, 연산군 묘역, 김수영 문학관, 함석헌 기념관)를 순례(식사 포함 10시 30분 - 14시)하고 시간을 내어 종로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러 책 두 권(박이문 교수의 ‘둥지의 철학‘, 임동확 시인의 ‘누군가 간절히 나를 부를 때‘)을 산 뒤 다시 함석헌 기념관 유리 온실에서 수요일의 락(樂) 읽기 모임을 가졌다.(18시 30분 - 20시)

매월 마지막 수요일에 갖기로 한 이 낭독 모임은 오늘이 첫날이었다. 오늘 모임에서 낭독한 글은 함석헌 선생님의 ‘씨알의 설움‘이었고 참석자는 모두 일곱 명이었다.(생각 외로 성황이어서 좋았다.)

오늘 읽은 내용들 둥 문질빈빈(文質彬彬)이란 말로 설명할 글이 있어서 반가웠다.

산 책 가운데 이런 구절을 읽고 한동안 그 뜻을 음미하며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철학은 과학적 이론이나 서술처럼 세계의 객관적 재현이 아니라 상상적 산물인 소설 즉 픽션에 가깝다.. ‘주역‘, ‘도덕경‘, ‘중용‘과 같은 중국 고전의 저자들의 세계관이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헤겔, 니체, 베르그송, 화이트헤드, 콰인, 사르트르, 메를로 - 퐁티 등 서양 철학사를 빛낸 철학자들의 세계관들도 엄밀히 따지고 보면 그냥 우주, 자연의 거울이 아니라 앞뒤가 서로 맞아 떨어지는 방대한 하나의 소설, 한 편의 시와 같은 언어로 구성된 세계라는 픽션 즉 언어적 구조물들 가운데의 몇 가지 대표적 예들에 불과하다.˝(‘둥지의 철학‘ 44 페이지)

‘주역‘이 그렇듯 다른 철학 체계도 언어로 구성된 세계 즉 픽션이라는 말이다. 관건은 얼마나 일관되고 체계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는가, 이리라.

문제(?)는 ‘주역‘의 특이성이다. 이 책은 일관성 있는(때로 종잡을 수 없는) 픽션이되 예측과 관련된 책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오늘 낭독 모임에서 나는 보르헤스가 한 ˝말은 흐르고 글은 남는다는 격언은 말이 하루살이처럼 덧없이 사라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말에 비해 글이 항구적이며 죽어 있다는 것. 말은 빠르고 가벼운 것, 플라톤의 말처럼 빠르고 신성한 것이다. 흥미로운 일이지만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은 모두 말로 가르친 스승들이었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흐른다‘는 의미를 소통으로 풀었다.

오늘은 이렇게 하루가 갔다. 내일은 더 짜임새 있는 준비의 시간을 갖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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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 나를 흔들다 - 매혹과 혼돈의 메시지 64
이지형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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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인문학의 저자이기도 한 이지형은 내게 지난 201661일 발행된 Skeptic(월간)음양오행과 사주편에 실린 두 글 가운데 한 글의 필자로 기억된 분이다. ‘음양오행이라는 거대한 농담, 위험한 농담이란 제목부터 흥미로운 이 글에서 필자는 음양론의 현실적 화신(化身)으로 추앙받는 주역(周易)은 무의미한 음양 막대기 6개씩의 조합과 유학자들의 사유가 자의적으로 결합된 무질서한 텍스트이며 적어도 태양 지구 달이라는 천문학적 시스템에 근거를 두고 구축된 음양론보다 훨씬 조악한 이론 체계에 해당한다는 말을 했다.(119 페이지)

 

또한 합리적인 근거를 찾기 어려운 전근대의 이론 체계를 인문학과 지식의 새로운 형식으로 격상시키려 시도하고 있다는 점을 부정적으로 본다고 말했다.(126 페이지) 지난 해 5매혹과 혼돈의 메시지라는 부제를 가지고 나온 주역, 나를 흔들다에서 저자는 주역을 우리가 주목하지 않던 세상으로 열린, 잊고 지내던 우리들의 내면을 들추어주는 64개의 창, 아주 멀리서 우리에게 불어오는 가을바람으로 정의했다.

 

책의 부제인 매혹과 혼돈에 대해 저자는 주역은 느릿느릿 이런저런 점사들을 던지다가 어느 한순간 예상치 못한 매혹의 메시지를 내던지지만 그 순간의 매혹은 닫히고 다시 어눌하고 모호한 말들이 펼쳐진다는 말로 설명했다. 미니 태블릿 PC 크기의 라지’(가로 12.5cm, 세로 20.5cm) 크기를 가진 240여 페이지의 책에 64괘가 차례로 등장한다.(정상 크기는 가로 15cm, 세로 22.5cm이다.)

 

64괘의 시작은 건괘 위에 건괘가 자리한 중천건(重天乾)이고 마지막은 감괘 위에 리괘가 자리한 화수미제(火水未濟)이다.(건은 하늘, 곤은 땅, 감은 물, 리는 불, 손은 바람, 태는 연못, 간은 산, 진은 번개를 상징한다.)

 

왜 중천건인가? 그것은 건괘 위에 건괘가 (거듭: )왔기 때문이다. 왜 화수미제인가? 물을 상징하는 감괘 위에 불을 상징하는 리괘가 자리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첫 챕터의 제목을 살다 보면 최소한 64개의 상황으로, 마지막 챕터의 제목을 걱정하지 않는다로 설정했다.

 

저자는 불리하지 않으면 유리하고, 유리하지 않으면 불리하고의 관점을 갖지 않기를 주문하며 주역이 신비하고 난해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어느 쪽이든 삶의 상황이 최소 64개는 된다는 주역 설명이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편견도 한몫 한다고 말한다.(15 페이지)

 

곤괘 위에 곤괘가 자리한 중지곤괘를 보자. 가장 아래부터 1) 서리를 밟으면 곧 얼음이다, 2) 곧고 모나면서 크다, 배우지 않아도 불리할 것이 없다, 3) 빛을 품어 곧다, 큰일을 할 때 이름은 없어도 끝은 없다, 4) 주머니를 여미듯 하면 허물도 없고 명예도 없다, 5) 황색 치마를 입으면 길하다, 6) 용이 들에서 싸우는데 그 피가 검고 누렇다 등의 설명이 붙는다.

 

저자는 이를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점사(占辭)들을 곤이라는 괘 이름 아래 모아놓다 보니 이런 일이 생긴 것이라 말한다.(17 페이지) 일관성이라고는 없는 혼란스러운(자의적인, 연결성이 없는) 설명이다. 저자는 자신이 주역에 유일하게 높은 점수를 주는 부분은 그 연결성도 없는 자의적인 것들을 꾸리고 조합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로부터 찾는다.(18 페이지)

 

저자는 여덟 개의 요소(8 X 8= 64)로 세상을 보는(파악하겠다는) 사고방식을 아름다운 착각이라 말한다. 저자는 그냥 닥치는대로 환경에 적응하다보니 지금의 내가 뒨 것이라며 일이 이루어지는 방식이 원래 그렇다는 말을 덧붙인다.(25 페이지)

 

저자는 위에 산이, 아래에 물이 자리한 산수몽괘의 설명 중 한 번 점치면 알려준다. 두 번 세 번 물으면 모독이다. 알려주지 않는다.”는 구절을 설명하며 선택의 가치를 믿어야 한다는 메시지라고 강조한다. 차선이든 차차선이든 자신의 선책을 밀고 나가면 대부분 무언가 이뤄진다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주역은 점이나 치는 책을 넘어 계도하려 하고 송나라의 성리학자들은 음양과 주역 64괘에 우주의 원리를 통째 연계시키려 했다.(38 페이지)

 

주역 편찬자들의 갖다 붙이기는 상상을 절하는 수준이다.(40 페이지) 저자는 주역 이해의 관건은 질서 속에 감추어진 무질서를 간파하는 것이라 말한다. 질서는 강박이고 환상이라 말한다.(44 페이지) 저자는 사주의 현란한 기법, 주역의 파란만장한 괘와 효의 스펙트럼도 알고 보면 모두 구라이고 마음 약한 사람을 현혹하는 잡문들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요체는 지난 일을 보살피고 다가올 일을 살피는 것이 가장 정확한 천기누설이란 점이다.(64 페이지)

 

주역은 난세의 책이다. 주나라 문왕이 감옥 안에서 64괘를 만들었다. 문왕은 주나라를 창건하고 은나라의 폭정을 뒤엎기 전 은의 주왕에 의해 세상과 격리된 채 감옥에 살았었다.(66 페이지) 주역은 염려와 근심의 한복판에서 태어난 책이다.(67 페이지) 주역은 은, 주 교체기의 혁명적 상황을 담고 있고 점사에 그런 전운(戰雲)이 완연하다.(147 페이지) 주역은 난세의 책이기에 뒤집힘을 긍정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건이 아래에, 곤이 위에 있는 지천태를 혁명과 변화의 괘로 보는 것이다.(지천태는 소통의 괘로 읽히기도 한다.) 물론 평안을 지향한다.

 

주역의 괘들이 저마다 여섯 개의 효를 늘어놓으며 펼쳐대는 얘기들은 어느 한 방향으로 흐르는 법이 없다. 산화 비(山火 賁) 괘의 경우 주역의 드라마는 아름다움에 대한 경계에서 드러난다.(100 페이지; * ; 클 분, 꾸밀 비) 저자는 주역은 본질적으로 음양의 조합이 아니라고 말한다. 주역은 근본적으로 점사들의 조합이라는 것이다.(102 페이지) 아무리 좋은(나쁜) 괘라도 여섯 번째 효에서 나쁜(좋은) 점사로의 반전을 통해 경계와 의심을 놓지 말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정도가 구성의 일관성이다.(103 페이지)

 

점사와 무관하게 막대 모양 자체로 의미를 갖는 예외적인 경우가 있다. 산지박괘와 지뢰복괘다. 전자는 아랫쪽 다섯 개의 음의 막대 위로 양의 막대 하나가 위태롭게 걸쳐져 있는 형국이다. 지뢰복괘는 양의 막대 하나가 자신을 덮은 음의 막대 다섯 개를 전복시킬 태세다.(103 페이지) 곤궤 아래에 진괘가 자리한 지뢰복괘는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는데 새로운 시작이 가능함을 알리는 부활의 괘이다.(107 페이지)

 

지뢰복의 상서로운 양기를 발견하려면 어둠과 좌절과 막막함을 견뎌야 한다.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엿보았다고 흥분하거나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 아직 가냘프기에 지극히 조심스러워 해야 한다.(108 페이지) 동지(冬至)는 해가 길어지는 날이어서 반전 즉 지뢰 복의 상징이기도 하다.(109 페이지) 진괘 위에 간괘가 자리한 산뢰이괘는 말을 삼가고 음식을 절제할 것을 가르치는 괘이다.(117 페이지)

 

저자는 점사에 따라붙는 주역의 해설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관심 둘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119 페이지) 저자는 주역 해설자들이 64괘를 상하경으로 나눈 뒤 주역의 세계가 이중적이라 말하며 상경(上經)은 천도(天道), 하경(下經)은 인도(人道)를 다룬다고 설명하는 것은 한마디로 웃기는 이야기라 말한다.(131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64괘의 구분은 무질서한 것이다.

 

64괘의 구성 원칙을 굳이 뽑아낸다면 짝을 이루는 두 개의 음양 배열을 위아래로 뒤집은 형식이라는 것과 도입부에 건()괘와 곤()괘를 배치하고 마지막에 일의 완성<기제(旣濟)>과 미완성<미제(未濟)>를 뜻하는 괘를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 정도다.(132 페이지) 저자는 주역을 상하경으로 나누는 것은 쓰레기 같은 발상이라 말한다.(133 페이지)

 

주희(朱熹)는 불교가 유학을 무너뜨리려던 상황을 유학(儒學)이 불교를 접수하는 상황으로 180도 역전시킨 학자이다. 그런 그도 주역 점을 따른 적이 있다. 주역의 메시지를 따른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와 사유를 포기한다는 의미이다.(143 페이지) 세상의 변수는 인간의 능력 이상이다.

 

주역의 괘 하나는 여섯 개의 효()로 이루어지는데 그 중 여섯 번째 효는 괘의 전체 의미와 반대일 때가 많다. 괘가 긍정적이면 효가 부정적이고 괘가 부정적이면 효가 긍정적이다.(170 페이지) 주역은 우주만물을 설명해보겠다는 야심의 체계다.(182 페이지)

 

()이란 단어를 택화혁괘에서 만난다. 이 단어는 무언가를 바꾸는 것 이전에 털과 가죽을 뜻했다. ()가 나무나 구슬의 결이었다가 이치를 뜻하는 것으로 바뀌었듯. 점은 바람이지만 미래에 대한 의혹과 불신의 이면이기도 하다. 때를 맞이해 호변(虎變)하고 표변(豹變)하는 이에게 불안과 공포는 없다.(198 페이지) 혁괘 다섯 번째 양효에 대인호변(大人虎變)이란 메시지가 있다. 미점유부(未占有孚)라는 말도 있다. 점치지 않아도 믿음이 있다는 의미이다.

 

주역은 원래의 점사들을 후대 유학자들의 해설이 감싸 안는 구조다. 열 개의 날개 즉 십익(十翼)이란 멋진 이름이 붙은 해설이다. 하지만 이 십익은 멋지지 않고 몹쓸 때가 더 많다. 저자는 반론이 있을 수 있겠지만이란 단서를 단 뒤 유학은 고도의 처세이고 그 처세의 테크닉을 군자연(君子然)으로 포장하고 있기 때문이라 말한다.(202 페이지)

 

저자는 주역의 매력은 마구 들떠 있는 누군가에게 찬물을 확 끼얹는 데 있지 않을까, 라 말한다.(212 페이지) 주역과 공자의 관계도 빼놓을 수 없다. 공자는 평생 결실을 얻지 못하고 떠돌다가 돌아와 주역의 해설을 썼다.(216 페이지) 저자는 다른 것 없다며 다만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이 운명이라 말한다.(233 페이지) 주역 64괘가 그렇다. 없는 것<()>과 있는 것<()> 여섯 개가 수시로 만남과 이별을 거듭하며 건()으로부터 미제(未濟)까지 숱한 상황을 만들어냈다.(245 페이지)

 

저자는 계사전(繫辭傳)은 너무 추상적이고 뜬구름 잡는 것 같지만 낙천지명(樂天知命) 고불우(故不憂)라는 말은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걱정하지 않는다, 이 한 마디를 나누고 싶었다는 저자.(246 페이지) ’주역, 나를 흔들다는 인상적인 책이다. 다른 주역 해설서를 읽도록 하자. 논란이 될 요소들이 있지만 흥미롭게 읽었다. 다른 책들을 읽고 비교하며 내 길을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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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8-02-28 15: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지형 님 ‘강호인문학‘이 좋아서 이 분 책 몇권 더 읽었었는데,
다른것들은 ‘강호인문학‘만큼은 아니었습니다.

이 책 들인지는 좀 됐는데, 이런 저런 이유에서 순위에서 밀려나 있었는데,
님의 귀하고 좋은 리뷰를 보니 저도 읽고싶어집니다, 불끈~(__)

벤투의스케치북 2018-02-28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러시군요.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강호인문학을 읽지 못했습니다. 한번 찾아 읽고 싶습니다..
 

일제 강점 초기에 계연수(桂延壽)란 인물이 편찬했다는 한국상고 역사책인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진위 논쟁이 극단적이다.

이 책의 ‘단군세기(檀君世紀)에 오성취루(五星聚婁) 현상이 기록되어 있다.(’환단고기’는 ‘삼성기(三聖紀)’, ‘단군세기(檀君世紀)’, ‘북부여기(北夫餘紀)’, ‘태백일사(太白逸史)’ 등 네 책으로 구성된 책이다.)

기원 전 1733년 관측된 오성취루는 금성 목성, 토성, 수성, 화성이 일직선으로 늘어선 현상을 말한다.

길게 서술할 수 없지만 이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사실임이 확인되었다.(미국 프린스턴 대학 천체물리학 이학박사를 지낸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의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참고)

천문학자 박석재 박사는 오성취루 같은 천문현상을 임의로 맞추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개천기’ 참고)

오성취루 같은 천문 현상을 기록했다는 것은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게 하는 요소이다.

전용훈 교수는 전통시대 천문학은 국가천문학이었다고 말한다. 전용훈 교수는 그렇기에 역법과 천문의 두 분야 모두 제왕(혹은 국가)의 허가를 얻은 사람들만 수행할 수 있었고 관련된 모든 시작과 활동은 국가 운영에 기여해야 했다고 덧붙인다.(‘정조와 정조 이후’ 수록 ‘천문학사의 관점에서 정조 시대 다시 보기’ 중에서: 91 페이지)

여담이지만 환단고기의 환(桓)이란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굳셀 환, 빛날 환 등의 의미가 있고 머뭇거릴 환이라는 의미도 있는 글자이다.

내 어릴 적 이름이 태환(泰桓)이었다. 나는 이름대로 살고 있는가? 굳세지도 빛나지도 못하고 다만 머뭇거리기는 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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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고전) 읽기로 우울증도 극복하고 일자리도 얻은 한 분이 고전 공부를 어렵게 여기는 것은 혼자 하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라는 취지의 말을 하는 것을 어제 들었다.

아침에는 오늘 자신이 누리는 편안한 삶은 선조님의 고단한 노력과 희생 덕분이고 자신이 공부해 얻어내는 삶의 결실 또한 온전히 자신 것이 아니라는 한 페친의 글을 읽었다.

선조들의 공부 덕에 우리가 노력하지 않고 많은 것을 알고 깨닫을 수 있는 것이고 지금 나의 공부는 힘들더라도 후학들에게 자산으로 남을 것임을 인식하고 어렵더라도 보람을 가지고 힘든 시간들을 이겨내야 한다는 다짐이 담긴 글이라 생각한다.

두 글은 페북은 활발한 이슈 토론의 장이라는 생각을 하는 나에게 성찰의 기회를 주는 글들이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나도 정치, 사회 문제에 관심이 있지만 주된 관심은 실존적 문제에 닿아 있기에 정치, 사회적 이슈를 올리는 분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표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정치사회적 이슈에 표면적 관심이 있을 뿐 깊이 관여하기에는 성향과 실력이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을 한다.

언급한 한문 연구자의 말을 참고한다면 사실 내가 잘 알지 못하고 쓰지 못하는 분야의 글을 자주, 그리고 멋지게 올리는 분들을 보며 부러움을 느끼기보다 공부거리를 얻고 생각할 기회를 얻는다고 생각해 다행으로 여기는 것이 맞다.

마흔 살이 넘으면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을 마흔이 되기 전에 자신의 삶은 스스로 해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로 듣는다.

주역도 단 한번이지만 ‘혁(革)‘괘에서 ‘대인은 점칠 필요가 없다‘는 말을 했다.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나도 젊어서 몇 차례 도인이라는 사람, 수행자라는 사람, 무당 등을 각 한 차례씩 찾았었다.

그런데 나이가 드니 그러고 싶은 때가 몇 번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스스로 ‘책임지지 못하는/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삶을 드러내는 격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 패를 상대에게 모두 드러내 보이는 것과 다름 없다. 이렇게 말하면 그렇게 점집에 가지 못하는 대신 주역을 공부하는 것이냐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내 주역 공부는 점을 치기 위한 용도가 아니다.

어떻든 페북을 하면 내 알량한 정신의 현주소를 모두 드러내보이는 것 같아 불편하기도 하다.

점집에 가서 내 현 상황을 고백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글 잘 쓰는 분들이 많아 위축되지만 그 분들이 평소 기울이는 관심의 양과 질을 생각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든 글쓰기는 쉬운 일이 아님을 생각하자. 그리고 부러워하기보다 내가 능하지 못한 부분을 채워준다고 생각하고 고맙게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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