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시인의 먼 곳에서부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다시 몸이 아프다// 조용한 봄에서부터/ 조용한 봄으로/ 다시 내 몸이 아프다먼 곳에서란 말은 공자의 능근취비(能近取譬)를 비튼 능원취비(能遠取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능근취비란 가까운 것을 비유하여 먼 것에 이르는 것, 내 처지로부터 남의 처지를 유추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능원취비는 먼 것을 비유하여 가까운 것에 이르는 것, 남의 처지로부터 내 처지를 유추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김수영은 왜 아프다는 말을 했을까? 통하면 아프지 않고 통하지 않으면 아프다는 통즉불통 불통즉통(通卽不痛 不通卽痛)이란 동의보감의 말이 있지만 여기서는 적용할 말은 아닌 듯 하다.

 

감응하기에 아프다는 말을 하는 것일까? 드라마 다모아프냐? 나도 아프다.”란 대사처럼? "중생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一切衆生病 是故我病)”유마경(維摩經)‘의 말처럼?

 

그렇다면 이 경우 아프다는 것은 몸이 아닌 마음이 아픈 것이겠지만 마음이 아프면 몸도 아픈 것이고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아픈 것임을 해아리면 굳이 나눌 일은 아닌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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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마시며/ 한이나 시인(2007년 출간 능엄경 밖으로 사흘 가출수록 시)

 

마음의 불을 끄고 춘설차 한 잔을 마시네 찻잎에서 우러나 물드는 찻물을 보네 누가 찻잔 속에 들어가 제 몸의 속살까지 물들이며 향기로 오나 옛 그림 속 오월의 차나무 잎, 우러나오는 그 가슴의 그리움을 마시리 찻잔 속에 뜨는 달을 노래하리 그대와 나 사이, 끊을 수 없는 생각으로 내리는 봄눈 머뭇거리며 눈발로 흩날리네

 

녹차 한잔/ 고옥주 시인(1991년 출간 나무 나무수록 시)

 

그대에게 녹차 한잔 따를 때 내 마음이 어떻게 그대 잔으로 기울어 갔는지 모르리. 맑은 마음 솟구쳐 끓어 오를 때 오히려 물러나 그대 잔을 덥히듯 더운 가슴 식히리. 들끓지 않는 뜨거움으로 그리움 같은 마른 풀잎 가라앉혀 그 가슴의 향내를 남김없이 우려내야 하리. 그대와 나 사이 언덕에 달이 뜨고 풀빛 어둠 촘촘 해 오니 그대여, 녹차 한잔 속에 잠든 바다의 출렁임과 잔잔한 온기를 빈 마음으로 받아 드시게.

 

한이나 시인의 차를 마시며’, 고옥주 시인의 녹차 한잔에 화답(和答)해 쓴 시 같다.. 두 시 모두 단아하고 고운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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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君子)는 마음이 평탄하고 물로 쓸어내린 등 시원하다˝ 원문이 군자탄탕탕(君子坦蕩蕩)인 이 표현의 출처는 ‘논어‘이다.

이 표현과 조선 중종 때의 선비 소쇄옹(瀟灑翁) 양산보(梁山甫; 1503 - 1557)의 소쇄(瀟灑)란 말의 연관성이 궁금하다.

소쇄는 맑고 깨끗하다는 의미이다. 양산보는 별서(別墅) 정원인 소쇄원(瀟灑園)으로 유명한 분이다.

지난 주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1493 - 1564)의 집터에서 청송당(聽松堂)과 겸재가 그린 청송당 그림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청송은 소나무 소리를 듣는다는 의미이다. 당시 나는 송풍회우(松風檜雨)란 말도 했었다. 이 말은 찻물 끓는 소리를 소나무에 바람 불고 전나무에 비내리는 것에 비유한 청허(淸虛) 휴정(休靜; 서산대사) 스님의 표현이다.

양산보와 성수침은 기묘사화(1519년) 때 스승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 - 1520)의 참담한 죽음을 목도하고 세상에 대해 두려움과 환멸을 느껴 정계에서 물러나 칩거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김수영 시인의 ‘격문‘이란 시에 이런 표현이 있다. ˝땅이 편편하고/ 집이 편편하고/ 하늘이 편편하고/ 물이 편편하고/ 앉아도 편편하고/ 서도 편편하고/...어머니가 감탄하니 과연 시원하고/ 무엇보다도/ 내가 정말 시인이 됐으니 시원하고..˝
이 말도 군자탄탕탕과 관련이 있다. 아무래도 오늘의 주제는 맑음이다. 시원함에 맑음이 포함되었는지 모르지만.

찻물 끓이는 소리 대신 찻물 끓는 듯 고요하고 맑은 가브리엘 포레의 피아노곡집인 녹턴을 들으며 고요함과 맑음에 대해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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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茶山) 선생 관련 자료를 검색하다가 함순례 시인의 법당 가서 눕고 싶은 날’(2017121일 불교평론 수록)이란 글을 뒤늦게 찾아 읽었다.

 

하동 평사리문학관 레지던스 입주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필자는 법당에 들어가면 눕고 싶다고 운을 뗀 뒤 만약 실제로 자신이 법당에 벌렁 드러눕는다면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 것이고 스님은 어떤 표정을 지으실 것이며 등등을 생각하게 되고 결국 그런 충동이 일 때마다 숭산 스님의 책 부처님 손바닥에 재를 털면에 나오는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는 말을 한다.

 

책의 내용인 즉 어떤 남자가 담배를 피우면서 선원(禪院)에 들어와 부처님의 얼굴에 연기를 불어 대고 부처님의 손바닥에 재를 털자 주지 스님이 당신 미쳤소? 왜 부처님께 재를 털고 있소?” 하고 꾸짖었고 이에 그 남자는 우주 모든 것이 부처인데 그러면 어디에 재를 털겠습니까?”란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주지 스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나갔으니 이런 경우 주지 스님은 어떻게 그 남자를 가르쳐야 옳았겠는가?’ 하는 물음이다.

 

이 물음에 자신이 주지 스님이었다면 그 남자를 한대 후려쳤을 것이라 답한 사람도 있었다.

 

숭산 스님의 답은 아무 말 하지 말고 그 남자에게 재떨이를 내놓아야 한다는 것으로 가만히 있는 것은 올바른 용심(用心)이 아니기에 담뱃재는 재떨이에 떨어야 한다는 걸 말없이 보여주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나라면 먼저 우주 모든 것이 부처라는 극히 관념적인 말이 어디서 유래했는지 물을 것이고 모든 것이 부처인데 왜 이름을 다 다르게 부르는지도 물을 것이고 그 남자 말대로 모든 것이 부처라면 담배를 든 손가락에서 가장 가까운 자신(이라는 부처)의 손바닥에 재를 떨지 굳이 멀리 있는 부처님이라는 부처의 얼굴에 재를 떨고 연기를 불어댈 필요가 있는가, 물을 것이다.

 

숭산 스님의 지론이 궁금하다. 모든 것이 부처라는 말은 숭산 스님의 지론인가? 아닌가?

 

궁금한 것은 모든 존재가 부처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모든 존재는 부처라는 완료형으로 바꾸어 말하는 이유이다.

 

숭산 스님의 가르침은 그 남자에게 말없이 바른 길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방편이지만 석연치 않다.

 

덜 깬 중의 특성은 그가 덜 깨쳤다는 것을 모르는 바 그는 법당을 지나다가 본존불에 침을 뱉을 수 있고(“부처가 원래 있었더냐?”) 방장(方丈: 불교의 종합수도원인 총림의 최고 책임자) 스님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네가 무엇이냐? 너는 없는 것이다.”라며 대갈일성으로 깨우침을 줄 수 있는 바 그가 그 깨침의 환각에서 벗어나는 것은 쉰 밥을 퍼먹고(그에게는 쉰 밥/ 성한 밥의 구별이 헛되므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난 다음부터라는 도정일 교수의 책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의 한 챕터(‘문학적 신비주의의 두 형태’)가 생각난다.

 

도정일 교수의 결론은 은유의 인식 기능 자체가 아닌 은유 장르의 무차별적 확대가 도달하는 신비주의의 폐해를 경계하자는 것이다.

 

과학도 은유의 한 형태라 말해진다. 임동빈 교수는 한갓 화학물질인 유전자에 무슨 이기심이 들어 있으며 우리의 생활방식인 문화에 무슨 유전자가 살고 있겠냐고 말하며 그것들을 현란한 은유라 칭한다.(20131118일 숭실대신문 수록 '은유로서의 과학')

 

두루뭉실한 유사성을 날카로운 차이를 통해 비판하는 것이 합리주의의 핵심이라는 글(이정우 교수 지음 '가로지르기' 131 페이지)을 떠올리게 된다.

 

두루뭉실하지 않은 새롭고 독창적인 은유를 만드느라 골몰하는 사람들을 그리며 날카로운 과학자이자 시인이었던 바슐라르의 책을 읽고 싶은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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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易)을 가지고 말하려는 자는 그 풀이를 숭상하고, 행동하려는 자는 그 변화를 숭상하고, 기술적 응용을 원하는 자는 그 상(象)을 숭상하고, 미래를 예견하려는 자는 그 점(占)을 숭상한다..

이것이 바로 주역(周易)이 말하는 네 가지 도(道)이다. 나는 어떤 경우인가?

전형적으로 들어 맞지는 않지만 나는 풀이를 숭상하는 사람 즉 이론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다.

허수경(許秀卿) 시인의 시집 ‘혼자 가는 먼 집‘을 주역의 괘로 풀이한 적이 있다. 그때 활용한 것이 소축(小畜) 괘와 이(頤) 괘이다.

소축(小畜)은 리(履)와, 이(頤)는 대과(大過)와 짝을 이룬다.(小畜은 굴레를 씌워 길들이는 원리, 履는 놓아주어 이행하게 하는 원리, 頤는 먼저 내실을 다지는 길, 大過는 큰 과오를 감수하는 길이다.)

주역의 괘들은 이렇듯 대대(待對; 짝)로 구성되었다. 나에게 관심거리로 다가오는 것은 이(頤) vs 대과(大過)이다.

관심거리로 다가오기보다 마음 아프게 다가온다고 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왜 아픈가?

내실을 다진 삶도 큰 과오를 감수하며 행동한 삶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차라리 내실도 다지며 과오도 감수하며 실행하는 길을 가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 말하는 바 가르치며 성장하듯, 육체와 정신, 감성과 이성이 명확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듯(강남순 교수 지음 ‘배움에 관하여‘ 323 페이지), 이론과 실천, 이해와 변혁이 상호 대립되는 것이 아니듯(김영민 교수 지음 ‘신 없는 구원 신 앞의 철학‘ 70 페이지) 내실 다지기와 감행(敢行)은 상호 대립적인 것이 아니다.

현장에서 배우고 이론으로 현장을 상상하는 길을 갈 수 있고 또 그래야 하리라.

이렇게 나는 ‘주역‘에서 마음에 드는 구절을 자신의 괘로 삼을 것을 제안하는 강병국 저자의 ‘주역독해‘란 책을 읽고 새해 첫 날 나의 길을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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