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茶山) 선생 관련 자료를 검색하다가 함순례 시인의 ‘법당 가서 눕고 싶은 날’(2017년 12월 1일 불교평론 수록)이란 글을 뒤늦게 찾아 읽었다.
하동 평사리문학관 레지던스 입주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필자는 법당에 들어가면 눕고 싶다고 운을 뗀 뒤 만약 실제로 자신이 법당에 벌렁 드러눕는다면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 것이고 스님은 어떤 표정을 지으실 것이며 등등을 생각하게 되고 결국 그런 충동이 일 때마다 숭산 스님의 책 ‘부처님 손바닥에 재를 털면’에 나오는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는 말을 한다.
책의 내용인 즉 어떤 남자가 담배를 피우면서 선원(禪院)에 들어와 부처님의 얼굴에 연기를 불어 대고 부처님의 손바닥에 재를 털자 주지 스님이 “당신 미쳤소? 왜 부처님께 재를 털고 있소?” 하고 꾸짖었고 이에 그 남자는 “우주 모든 것이 부처인데 그러면 어디에 재를 털겠습니까?”란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주지 스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나갔으니 이런 경우 ‘주지 스님은 어떻게 그 남자를 가르쳐야 옳았겠는가?’ 하는 물음이다.
이 물음에 자신이 주지 스님이었다면 그 남자를 한대 후려쳤을 것이라 답한 사람도 있었다.
숭산 스님의 답은 아무 말 하지 말고 그 남자에게 재떨이를 내놓아야 한다는 것으로 가만히 있는 것은 올바른 용심(用心)이 아니기에 담뱃재는 재떨이에 떨어야 한다는 걸 말없이 보여주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나라면 먼저 “우주 모든 것이 부처”라는 극히 관념적인 말이 어디서 유래했는지 물을 것이고 모든 것이 부처인데 왜 이름을 다 다르게 부르는지도 물을 것이고 그 남자 말대로 모든 것이 부처라면 담배를 든 손가락에서 가장 가까운 자신(이라는 부처)의 손바닥에 재를 떨지 굳이 멀리 있는 부처님이라는 부처의 얼굴에 재를 떨고 연기를 불어댈 필요가 있는가, 물을 것이다.
숭산 스님의 지론이 궁금하다. 모든 것이 부처라는 말은 숭산 스님의 지론인가? 아닌가?
궁금한 것은 모든 존재가 부처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모든 존재는 부처라는 완료형으로 바꾸어 말하는 이유이다.
숭산 스님의 가르침은 그 남자에게 말없이 바른 길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방편이지만 석연치 않다.
덜 깬 중의 특성은 그가 덜 깨쳤다는 것을 모르는 바 그는 법당을 지나다가 본존불에 침을 뱉을 수 있고(“부처가 원래 있었더냐?”) 방장(方丈: 불교의 종합수도원인 총림의 최고 책임자) 스님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네가 무엇이냐? 너는 없는 것이다.”라며 대갈일성으로 깨우침을 줄 수 있는 바 그가 그 깨침의 환각에서 벗어나는 것은 쉰 밥을 퍼먹고(그에게는 쉰 밥/ 성한 밥의 구별이 헛되므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난 다음부터라는 도정일 교수의 책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의 한 챕터(‘문학적 신비주의의 두 형태’)가 생각난다.
도정일 교수의 결론은 은유의 인식 기능 자체가 아닌 은유 장르의 무차별적 확대가 도달하는 신비주의의 폐해를 경계하자는 것이다.
과학도 은유의 한 형태라 말해진다. 임동빈 교수는 한갓 화학물질인 유전자에 무슨 이기심이 들어 있으며 우리의 생활방식인 문화에 무슨 유전자가 살고 있겠냐고 말하며 그것들을 현란한 은유라 칭한다.(2013년 11월 18일 숭실대신문 수록 '은유로서의 과학')
두루뭉실한 유사성을 날카로운 차이를 통해 비판하는 것이 합리주의의 핵심이라는 글(이정우 교수 지음 '가로지르기' 131 페이지)을 떠올리게 된다.
두루뭉실하지 않은 새롭고 독창적인 은유를 만드느라 골몰하는 사람들을 그리며 날카로운 과학자이자 시인이었던 바슐라르의 책을 읽고 싶은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