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린다. 지난 수요일 심우장(尋牛莊)에 간 날에도 이 만큼 비가 내렸었다.

만해 백일장 참가를 일주일 앞두고 답사(踏査)차 간 것이었지만 나는 결국 백일장 참가를 내년으로 미루고 말았다.

그래도 준비를 위해 평전을 읽었고 심우장을 둘러싼 성북동의 달동네스러움을 확인했고 몇 건의 댓글을 받았으니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지난 해 12월 29일 해설사 수업 시간에 한양도성 순례를 마치고 혜화문 앞에서 심우장 인근까지 동료 몇 사람과 함께 걸어 점심을 먹었었다.

이 기억 때문에 아프다. 왠일일까? 한용운도 나도 모두 정신분석해야 할 사연을 가진 것인가?

만해를 처음부터 정신분석적 대상으로 보고 읽은 것은 아니지만 정신과 의사 김종주 박사의 책(‘이청준과 라깡’ 303 페이지)에서 나는 중요한 단서를 얻었다.

“만해의 성격은 충족되지 못한 의존적 욕구와 무의식에 억압된 적개심으로 표현되는 구강 성격과 항문 성격의 혼합된 형태로 보인다.”는 글이다.

위대한 글을 쓰는 작가는 결국 큰 억압을 이긴 콤플렉스적 존재일까?

내가 받은 댓글 가운데는 “외부는 그토록 전사(戰士)적인데, 시에서는 그토록 아니마적”이기에 독특하다는 글이 압권(壓卷)이라 할 수 있다.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글이 좋은 글이 아니겠는가.
평전에서 김삼웅 선생은 만해가 사로잡힌 동학군을 처형하고 혹독하게 취조한 아버지로 인해 극심한 정신적 고통과 죄책감에 시달렸고 그 아버지 콤플렉스가 여성주의적 성향으로 전이되었다는 말을 했다.

되살리기 싫지만 광인(狂人) 왕 영조(英祖)도 친여성적인 만큼 남자들과 바람직한 관계를 맺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핏 스친다.

어쩌면 내가 스피노자를 탐독하는 것은 이성(理性)의 힘을 누구보다 신뢰하고 관계 속에서 발견하는 기쁨을 자유(自由)로 보고 적극적 감정인 기쁨을 강조한 그의 철학과 내가 정확히 반대되는 자리에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성적이지 못하고 관계 속에서 서툴고 수동적인 정념에 좌우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 위대한 스피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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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3월이다. 새해는 아니지만 새해가 되면 마음에 새기곤 하던 한 스님의 다짐을 되새겨본다.
˝새해에는 시간을 아끼면서 살아가도록 하자....가차 없이 자신을 일깨우고 인간으로서의 관용과 서른이 넘은 남자로서의 기품을 닦아가도록 하자.

선(禪)에 더욱 정진하도록 하자. 인간으로서의 고독을 이해하며 받아들이고 죽음이 목전에 있음을 항상 잊지 말고 되새겨야 한다.˝

일지 스님(1959 - 2002)이 산문집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에서 한 말이다. 이를 보며 스피노자(1632 - 1677)의 회심(回心)을 생각한다.

스피노자와 일지 스님 모두 사십대 중반에 타계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스피노자가 이 세계의 덧없음과 공허함을 보고 물질 추구에 전념하던 삶과 급격히 단절한 뒤 영원과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의 길을 걸었다면 일지 스님은 망각과 가난의 이유를 깨닫고 자신에 대한 무자비한 비정함을 배웠다.

스피노자와 붓다를 이성주의자이자 합리주의자로 규정(성회경 지음 ‘스피노자와 붓다‘ 43 페이지)한 글이 있다.

이 글을 보며 생각하는 것은 스피노자와 일지 스님이 공명하는 부분이다.

스피노자와 일지 스님은 세상의 허무에 주목하고 구원의 길을 모색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스피노자가 이성의 힘을 강조했다면 일지 스님은 자칭 불교인문주의자였다.

허무와 공허에 민감했던 일지 스님이 말하는 바 의상(義湘) 대사 역시 스피노자, 일지 스님과 같은 길을 걸은 분이다.

일지 스님은 의상 대사의 ‘백화도량 발원문‘을 일러 인간의 깊은 숙업과 번뇌를 누구보다도 깊이 깨닫고 있는 니힐리스트의 절망과 고독이 검은 잉크처럼 묻어나고 있다고 표현한다.

물론 일지 스님에 의하면 의상 대사의 글의 이면에는 신앙과 해탈에의 염원이 숨겨져 있다.(‘월정사의 전나무 숲길‘ 28 페이지)

절망과 고독을 느낀다고 모두 신앙심을 갖지는 않으니 대단한 것이다.

스피노자를 담백하고 자연스러운 인품을 지녔던 생활인, 강도 높은 작업과 지적 훈련으로 인해 검소한 삶을 살다가 간 은둔의 철학자로 설명한 한 철학자의 글도 생각하게 된다.(로저 스크러턴 지음 ‘스피노자‘ 32 페이지)

마음이 자주 외부 요인에 흔들릴 때 생각하는 것은 정념(情念)으로부터의 자유와 역량(力量;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 힘과 기량)을 향한 자유를 강조한 스피노자의 철학이다.

지난 주 수요일 처음 들은 시인 특강에 참여한 것은 시(詩)를 써 등단이라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시를 익히면 내가 발휘할 수 있는 자유의 폭이 커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올해는 시(詩), 스피노자, 문화해설에 전념하는 원년(元年)이 될 것이다.

이런 다짐을 하는 지금이 내게는 원단(元旦; 설날 아침이란 말 말고 어떤 일을 처음 시작하는 날이란 뜻도 있는 단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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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수요일 들은 이승희 시인의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란 강의 가운데 한 가지 가르침이 기억에 남아 있다.

시란 다르게 보는 능력과 그렇게 본 것을 다르게 표현하는 능력이 있어야 쓸 수 있는 장르라는 것이다.

시인의 열강을 들으며 나는 passion이란 단어를 생각했다. 이 단어는 열정(熱情)으로 풀이할 수도 있고 정념(情念)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

차이는 열정은 능동적인 뉘앙스의 말이란 점이고 정념은 수동적 뉘앙스의 말이라는 점이다.

준비하고 임하는 분(강연자)은 열정을 전하는 위치에 서지만 듣는 사람들의 경우 강연자의 준비에 맞먹는 간절함과 수용(受容) 의지를 갖추지 못하면 강의 시간은 겪어나가는 것이란 의미의 정념의 시간이 될 수 밖에 없다.

2017년의 매월 마지막 수요일에 열리는 이 강의 시리즈는 남은 시간들 모두가 주옥 같은 시간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 ‘문화가 있는 날 시인 특강‘은 일상에서 시의 소재를 어떻게 건져올리고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등을 가르쳐주는 참 고마운 강의가 아닐 수 없다.

큰 감사의 마음을 느낀다. 문제는 가르치는 분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일이리라. 이 부응은 백지의 사막을 홀로 건너는 힘겨운 시간들을 보내야 가능한 것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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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적으로 상상하라!

페미니스트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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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열풍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어떤 세계를 만들어갈 것인지를 그려보아야 할 때입니다. 페미니스트 유토피아에서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지,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은 어떻게 가능해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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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유토피아

내일, 당신이 살고 싶은 그곳

리아 페이-베르퀴스트·정희진 외 지음|김지선 옮김


* 김지양(플러스 사이즈 모델), 김하나(브랜드라이터), 은하선(섹스칼럼니스트), 이진송(계간홀로편집장), 정희진(여성학·평화학 연구자), 최서윤(월간잉여편집장), 최은영(소설가) 필자로 참여했다.



더 많이 원한다.
우리는 이 간단한 말을 입 밖에 내기가 참 어렵다. 여자라서, 
더 많이 원하도록 허락받지 못해서. 
음식, 권력, 섹스, 사랑, 시간……. 우리가 이런 것들을 갈구하면 
게걸스럽다느니 이기적이라느니 헤프고 대책 없고 어리석다느니 하는 욕을 먹는다. 
덜 원하고 덜 배고파하는 게 우리한테는 ‘합리적’이란다. 
이렇게 한참 살다 보니 이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그렇게 말하게 된다. 
여성 혐오가 우리의 상상력까지 짓밟는 지금, 
우리가 어떻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안할 수 있을까? 
페미니즘이 한창 뜨고 있지만, 아직 우리는 내일 필요할 것을 생각하기는커녕 
당장 위기에서 숨 돌릴 틈도 없다. 
가부장제와 끊임없이 술래잡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무슨 재주로 그런 큰 꿈을 꾸겠는가? 
지금 당신의 손에 들린 이 책은 바로 이런 의문들을 불쏘시개 삼아 태어났다. 
에세이, 이야기, 시, 시각예술 등을 망라한 작품 64편은 
당신의 페미니즘을 위한 창조적 상상력을 먹여 살릴 양식이다. 
당신이 꿈꾸는 페미니즘에 우리가 불을 지필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가 다 함께 야심만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욕심쟁이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머리말 중에서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실 서평단을 모집합니다. (5명)


* 서평단 신청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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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집 인원: 5명

- 모집 기간: 2월 24일 ~ 3월 2일

- 당첨자 발표: 3월 3일 금요일 예정 (휴머니스트 서재 공지)

- 도서 발송: 발표 게시물 비밀댓글로 당첨자 정보 취합 후 일괄 발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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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스피노자를 좋아하게 된 배경이나 이유가 있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물론 미지의 것으로 보이는 남녀간의 호감도 헤아려보면 이유가 있으니 철학자를 좋아하는 데 이유가 없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나는 어쩌면 스피노자 사상의 핵심인 신 즉 자연(神 卽 自然) 사상에 깊은 호기심을 가졌을 수도 있고 한 점의 군더더기도 없는 그의 담백한 성품에 매료되었을 수도 있다.

복잡하고 군더더기가 많은 감정들 사이에서 길을 잃기 잘하는 내가 스피노자에게서 느끼는 가장 큰 부러움은 인간의 감정을 기쁨과 슬픔이라는 두 가지 감정으로 분류한 그의 명쾌함이다.

물론 스피노자는 결코 평탄한 인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숱한 고난을 이겨낸 의지의 인물이었다. 그의 성(姓)이 ‘고통스러운 곳으로부터‘를 의미하는 포르투갈어 에스피뇨자(espinhosa)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상당히 시사적이다.

스피노자 전문가인 스티븐 내들러(Steven Nadler)에 의하면 스피노자 안에서 철학과 과학을 통해 세상의 더 넓은 지식을 찾으려는 욕구를 깨어나게 한 것은 교육에 대한 관심과 유대 공동체에서의 종교적 삶에 대한 불만족, 그리고 지적 호기심만이 아니다.

스피노자로 하여금 더 넓은 지식을 찾게 한 것은 평범한 직업이 가져다주는 허무함에 대한 깊은 의식, 그리고 진리에 대한 욕구였다.(‘철학을 도발한 철학자 스피노자‘ 211 페이지)

스피노자를 수행자와 같은 인물로 대하는 시선이 있는 만큼 신비와 은둔의 철학자로 대하는 시선도 있는 듯 하다.

주지의 사실인지 모르지만 스피노자는 지극히 합당한 이성(理性)의 눈을 가진 철학자였다. 그의 사랑론에 그런 점이 잘 드러난다.

스피노자는 성적 매력에만 이끌리는 것을 욕정으로, 경제적 매력에만 이끌리는 것을 예속으로 규정한 철학자였다.

스피노자는 상대의 일부가 아닌 완전하고 큰 전체에 주목하는 사랑의 필요함을 역설했다. 이는 부분 대상이 아닌 인격적 전체를 사랑할 것을 강조하는 정신분석적 가르침(‘헬조선에는 정신분석‘의 한 필자인 정지은 교수)과 상통한다.

일과 사랑, 진리, 그리고 그것들 모두를 아우르는 삶이란 무엇일까? 실현되기 어려운 것(칼레파 타 칼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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