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사랑의 김수근 건축가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의 고문실(누가 봐도 고문실로 쓰일 수 밖에 없다는...)을 알고 설계(독재정권에 협조)했다는 설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뉜다.

건축 전공자와 비전공자로 나뉘는지 모르지만 정신과 의사 한스 요아힘 마즈가 말했듯 우리가 어떤 이의 진술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진술 대상 이상으로 진술자의 성향이나 가치관이란 말을 되새기게 된다.

그리고 이를 인간이 은유를 사용해 사건을 새로 쓰는 즉 의미를 부여하는 예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궁금하다.

조선사를 배우다 보니 그 중 하나인 왕릉에 관심이 많이 간다. 왕릉의 형태(단릉, 쌍릉, 합장릉, 삼연릉, 동봉삼실릉, 동원이강릉, 동원상하릉)도 흥미롭다.

김수근 이야기를 했지만 제 20대 임금 경종과 계비인 선의왕후가 묻힌 쌍릉인 의릉(㦤陵)도 이야기거리가 있다. 하나의 이슈로 수렴될 수도 있는 이야기이다.

서울 석관동에 소재한 의릉은 선의왕후의 ‘의‘를 이름으로 삼은 능이다. 옛 중앙정보부 강당이 능 울타리 안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의릉 내의 옛 중앙정보부 강당도 수수한 건축물이라는 말과 심미성 높은 건축물이라는 엇갈린 평을 받는다.

조선사 공부를 하면서 거듭 느끼는 것은 우리 옛 건축물들이 인문적 가치를 담아 자연친화적이고 비압도적인 정신을 표현하는 것들이라는 점이다.

시험 하루를 앞둔 이 시점에도 이런 가외의 것들에 관심을 두는 나의 공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란 생각을 하는 오후이다.

쇼스타코비치의 재즈 모음곡 중 왈츠가 신을 내는, 정오를 넘긴 이 시각.

고양 덕양구의 서삼릉에 회묘(懷墓)란 이름의 묘에 묻힌 폐비 윤씨가 문득 생각난다.

그의 쓸쓸한 삶을 한번쯤 가서 보고 싶다. 글쓰는 사람으로서 신경증이 있을 뿐이라던 롤랑 바르트를 따라 조선사 그리고 능을 배우는 사람으로서 책임감이 있기 때문이라 하면 지나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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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릉(宣靖陵)에서 본 제수진설도(祭需陳設圖) 사진을 톡방에서 받았는데 음식 이름들이 명확하지 않다. 낯선 이름이고 정확해야 하기에 도서관에서 찾아 보았는데 왕릉 책에 없어 선정릉 관리사무소에 전화해 메일로 사진을 받았지만 이 역시 불분명하다.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의 저자 이정근 선생님께 연락했더니 태조 이성계의 능인 건원릉 등이 있는 동구릉 사무소에 부탁해보라 하신다. 사진으로 받는 자료는 선정릉에서 받은 것과 다르지 않을 듯 해 연락하지 않았다.

 

선정릉에서는 진설도가 포함된 소책자를 무료 배포한다고 하니 가볼까? 시험 하루를 남겨둔 내일, 그럴 수 있을까? 가을 벌초를 하러 산에 오르는 기분으로? 아니면 눈부신 진설을 상상하며? 조선을 배우는 시간은 혼(魂)과 백(魄), 묘(廟)와 능(陵)과 원(園)과 묘(墓) 즉 죽음 아니 그 이후 된 신(神)들을 배우는 시간이라 할 수 있다. 매력(魅力)이란 말에도 귀신을 뜻하는 단어(귀: 鬼)가 들어 있다. 북촌에서 본 회화나무의 회(槐)에도 귀(鬼)가 선명하다. 귀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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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시 낭송회 참여해 신용목 시인의 ‘제일(祭日)‘을 읽고 이야기도 많이 하고 또 듣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즐겁게 놀다가 잘 돌아왔습니다.

어쩌면 시를 읽는 것보다 낭송 후 이야기를 나누고 음식을 먹는 것이 하이라이트일 것입니다.

시 낭송회이기에 시인, 소설가, 문학담당기자 등 문학계 인사들이 오신 것은 특별할 것이 없지만 건축 관련 영화를 제작하고 있는 분,

프로파일러(범죄심리 분석가) 출신의 연극배우 등은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질문이 많은 저는 건축 관련 영화를 제작하시는 분께는 건축학도들이 종묘를 찾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프로파일러를 몇년 하다보니 왠만큼 흉악한 사건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고 말투는 공격적(취조하듯)이 되고 감정의 소모는

심해지더라는 말을 한 연극배우에게는 니체는 괴물을 상대하다가 괴물이 되지 않게 조심하라는 말을

했고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반쯤 괴물이 되지 않고 어떻게 괴물을 상대하겠는가, 란 말을 했는데 두 말 중 어떤 것이 맞는다고 생각하시느냐는 물음을 던졌습니다.

제 건축 질문에는 건축학적 가치가 있어 건축학도들이 종묘와 병산서원을 자주 찾는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프로파일링 관련 질문에는 둘 다 맞는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럴 것입니다. 괴물을 상대하면 어느 정도는 그런 모습을 닮게 되기 때문에 니체가 괴물을 상대하다가 괴물이 되지 않게 조심하라는 말을 한 것이겠죠.

참 단파 라디오 아시죠? 30 ~ 300Mhz의 주파수대역을 가지는 라디오이죠. 조선 왕릉은 10리 이상 100리 이내의 거리에 있었지요. 썰렁한가요?

단파 라디오는 비상사태시 마지막으로 쓸 수 있는 국제통신수단이랍니다. 단파 라디오 수신기를 갖춘 분들은 방송을 들었음을 인증하는 QSL 카드를 주고 받지요.

단파 라디오는 아니지만 제 재미없는 톡 글에 열심히 QSL카드(댓글)을 보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이은경 선생님과 이명아 선생님은 제 어제 글이 재미있다고 말씀해주셨지요. 영광입니다. 웃으며 살아야겠지요.

제가 좋아하는 고생물학자인 고(故) 스티븐 제이 굴드는 파리가 되어서라도 가서 듣고 싶은 모임으로 몇몇 사상의 거장들이 가진 모임을 들었습니다.

벤저민 프랭클린과 토마스 제퍼슨/ 레닌과 트로츠키/ 뉴턴과 핼리(핼리혜성의 그 핼리)/ 다윈과 토머스 헉슬리 등이 만난 곳들입니다.

특히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 철학자 데이비드 흄, 과학자 제임스 와트가 사교모임에서 토론을 벌인 곳은 빼놓을 수 없다고 하지요.

굴드처럼 부러워할 곳이 있지만 우리 단톡방을 보면 굳이 그런 부러움을 가질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참 앞에서 말씀드린 연극배우는 프로파일러를 하다가 갖게 된 트라우마 같은 것을 연극으로 치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문화유산해설일도 자기치유의 하나로 볼 수 있을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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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벽이 병풍처럼 둘러 싸인 프랑스의 카르투지온 봉쇄수도원을 이야기한 조용미 시인의 ‘침묵지대‘란 시를 최근 읽었습니다.

먼 이국을 아니 어쩌면 영성을 동경하게 하는 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시인이 말한 병풍은 병풍석이라 불리는, 왕 또는 왕비가 잠든 능침(陵寢)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돌과 뉘앙스가 사뭇 다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장명등(長明燈) 불빛을 오래 밝혀다오/ 자줏빛 남빛 깃을 단 소렴금 대렴금으로/ 나를 꽁꽁 묶어다오/ 고복(皐復)일랑 하지 말아다오.... ˝란 종생기(終生記)를 쓴 조용미 시인.

그는 아마도 왕릉이라도 연구한 듯 합니다. 최근 종묘(宗廟)에 다녀왔습니다. 신주를 모신 종묘와 시신을 안장한 왕릉의 차이를 표면을 보는 것으로는 식별할 수 없지만 조만간 왕릉 나들이를 실행하도록 해야할 것 같습니다.

마종기 시인이 ‘제3강의실‘에서 인체해부실습장을, 자신에게 ˝술을 가르쳐주고, 다시 그 속에서 시를 써주고, 종/ 교를 준, 내 미래의 친구들이 누워 있는 곳.˝이라 표현한 것을 왕릉에 적용한다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카톨릭, 하면 저는 에디트 슈타인 생각을 먼저 합니다. 현상학자 후설의 제자이자 하이데거의 동료였던 현상학/ 심리학자 출신으로 유대교에서 카톨릭으로 개종한 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순교한 분입니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그는 세속에서의 생활이 카톨릭의 봉쇄 카르멜 수녀회에서의 생활보다 더 고독했다고 말합니다. 제게 에디트 슈타인은 철학의 한 분파인 현상학 전공자로 우선 인식됩니다.

물론 그가 수도자였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당분간(?) 그는 철학이라는 세속 학문과 종교, 영성의 신령 사이에서 저로 하여금 길을 잃지 않게 해줄 스승으로 제 옆에 있을 것입니다.

한 철학자는 ˝후설의 현상학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태어날 때부터 강제로 주입되어 신학교에까지 가게 만든 기독교(카톨릭 프로테스탄트)의 신과 그에 따른 신앙을 버리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현상학을 공부한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였다가 막스 셸러라는 현상학자를 통해 카톨릭 사상과 만난 에디트 슈타인과 그 철학자의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란 의문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의미로운 주(主)의 날 보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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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사직동 J 시인의 집에서 열리는 시 낭송회에 참여하게 된 나에게 의미 있는 글이 한편 다가왔다.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은 소장(所藏) 시집수를 기준으로 시를 사랑하는지 아닌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80여 권의 시집을 가지고 있는 나도 최근 시를 가까이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시를 가까이 하지 못했지만 나는 최근 이혜미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인 ‘뜻밖의 바닐라’를 구입했고 시집 몇 권을 신청했다.

그리고 시에 대한 감각을 되찾으려는 생각에 지난 5년 전 쓴 시 감상 후기를 한편 찾아도 보았다.

바로 사직동 J 시인의 시를 읽고 쓴 후기인데 이 글에서 나는 “대체로 일상과 신변 및 마음의 변화를 잘 감지해 글로 옮기는 시인들을 보면 나보다 더 가깝게 여겨질 때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J 시인이 바로 그런 경우가 아닐까 싶다.˝는 말을 했다.

어떻든 내가 접한 글에서 가장 관심있게 읽은 부분은 시인들이 처한 가난에 대한 부분이었다. 시인이 가난하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사실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시집 만권이 팔려야 인세가 700만원이라는 이야기이니 너무 형편이 나쁜 출판 사정에 관한 이야기라 해야 옳다.

언급한 필자에 의하면 시인들은 4 ~ 5년에 시집 한 권을 낼 수 있고 원고료가 일년에 100만원 정도이니 시만 써서는 최저생계비 근처에도 못 간다는 것이다.

내일 열리는 시 낭송 모임의 회비는 2만원인데 J 시인이 직접 저녁 식사와 간단한 차(茶) 정도를 준비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이름이 덜 알려진 시인들을 돕기 위한 차원의 와인 판매도 이뤄진다고 한다.(앞서 시인의 가난이란 말을 했지만 이름이 덜 알려진 시인이라는 표현이 낫다 싶다.)

칸트가 대상의 아름다움에 대해 민감함을 보이는 성격으로 규정해 인간의 능력으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성을 가진 능력으로 인식되게 한 것이 예술적인 감성이지만 나는 내 시 읽기의 동기를 아름다움에 대한 순수한 감상 차원의 것이라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보다 기독교 상담학자인 오경숙 님이 ‘쓰기 치유’란 책에서 말한 것처럼 시가 허락하는 치유적 힘에 대한 관심 차원의 것이라 하고 싶다.

술을 마시지 못하지만 와인도 구입하게 될 것 같다... 좋은 기회를 얻었으니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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