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나 과제 마감에 쫓기는 중에 관련 없는 책을 읽고 서평까지 쓰려는 이상한 버릇이 또 나타나고 있다. 바쁜 중에도 당장 필요하지 않은 책을 읽을 수 있지만 서평까지 쓰려는 것은 아무래도 지나친 듯 하다. 읽다 보면 쓰지 않을 수 없지만 읽기보다 쓰기가 더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경황 없을 때에는 자제해야 할 욕심이다. (서평을) 쓰고 싶은 책은 며칠만에 다 읽은 정승연의 ’세미나책‘이다.

 

과제 마치면 책만 읽게 될 시간들이 올 것이라 믿지만 어긋난다. 다른 과제, 다른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오랜 만에 알라딘에서 내 리뷰를 읽고 구매에 도움을 받은 사람이 보낸 thanks to link를 두 건 받았다. 우에노 치즈코의 ’논문 쓰기의 기술‘, 니시나리 카츠히로의 ’선천적 수포자를 위한 수학‘ 등이다. 책 값의 1%에 해당하는 120원, 150원을 각각 받은 것이지만 기분 문제다. 오늘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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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박이문 교수는 “과장된 평가로 이미 나이 든 나를 빠리로 유혹하고 논문 지도교수와 그곳 작가들을 소개해주고 고통스럽지만 보람있는 지적 방랑의 길로 이끌어주셨던 교수 겸 문학평론가 故 R. M. Alberes 선생님을 생각하면서”라는 말을 했다. 나는 스스로 과한 평가로 어딘지 모를 목적지로 나 자신을 끌고 올라가는 것이라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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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개용암을 출발해 백의리층을 향해 가는 중에 윤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서울 모 숲해설 교육기관에서 함께 수업을 듣는 사람들 중 서울의 최 ** 선생님이 내게 전화를 해도 받지 않더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래요? 란 말을 하고 말았다. 일행이 있었기 때문이고 길게 말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통화 후 나를 돌아보니 지난 1년 사이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 몇을 차단하는 데에 참 과감했다는 생각이 든다. 머뭇거리기 잘하고 정 많은 내 성향을 감안하면 스스로도 의외다 싶을 정도다. 내가 차단한 세 사람은 필요할 때만 전화하거나 겉과 속이 다르게 나를 이용하려고 한 사람들이다.

 

문제는 나는 그럴 만해 그들을 차단하고 친구목록에서 잘라냈지만 그런 일이 몇 건 일어나다 보니 내가 지나치게 빡빡하거나 융통성이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난감함이 든다는 점이다. 아직 사회화가 덜 되어서인지 모르지만 나는 욕심과 안하무인적 태도로 덕(德)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을 몹시 경멸한다.

 

내가 연천의 비기독교 신자 지질해설사 가운데 최고로 깨끗한 분이라고 하신 한 선생님은 나를 정확히 꿰뚫어 본 것이다. 정치인들만이 부도덕하고 탐욕스런 것이 아니라 내 주위 사람들 가운데서도 부도덕하고 탐욕스러운 사람들이 꽤 있다.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그에 맞게 점점 더 사람을 속이고 남을 무시하고 자신만이 옳다고 여길 사람들이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란 말을 읊조려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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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권의 책을 연결해 하나의 의미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나갈 수 있겠다 싶다. 김상환 교수 외 지음 '이야기의 끈'과 오민선 지음 '시작도 끝도 없는 모험, 그림 동화의 인류학'이 그들이다. 이현 지음 '동화 쓰는 법', 닉 채터 지음 '생각한다는 착각'도 그럴 것이다. 권택영 교수의 '감정 공부'도 그러할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오민선의 책이 인류학적 해답을 준다는 점이다. 그것은 자신을 동화인류학자라 표현하는 그의 이력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닉 채터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말로 유려하게 설명하고 정당화할 수 있다. 그러한 설명 중 질문을 던질 때마다 더 많은 언어적 설명과 정당화가 쏟아져 나올 것이다. 하지만 얼마나 길게 이어지든 간에 이러한 언어적 흐름을 분석해 보면 그저 느슨하게 연결된 파편의 연속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이 부분은 "인간은 안식처가 있는 덕분에 이야기를 주고 받게 된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주고 받는 능력 덕분에 적절한 안식 공간을 조성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의 힘'의 논조와도 공명한다.

 

'이야기의 끈'을 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용도로 고른 책이 '이야기의 끈'의 문제의식을 이어나가게 해주는 점도 신기하다. 우리가 생각과 행동, 행위를 설명하기 위한 과정은 창작의 과정이라는 닉 채터의 주장과 함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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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사상가 발터 벤야민은 이야기꾼을, 삶이라는 심지를 조용히 타오르는 이야기의 불꽃으로 완전히 연소(燃燒)시키는 사람으로 보았다. 이 이야기꾼론이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렇게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이야기꾼과 비슷한 해설사는 어떤가?

 

제주 지질공원 해설사 장순덕 님의 경우를 보자. 50년간 해녀로 살아온 이 분은 땅 위의 지질 현상을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물질 하며 본 익숙한 해저지형 이야기로 그 부분에 생소한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당당히 해설사가 되었다.

 

어떤 분야에든 입문하고 나면 시간을 보낸 만큼 저절로 실력이 느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성장은 꾸준하고 효율적인 노력의 산물이다. 진부함에 대한 반감 또는 새로움에 대한 동경도 필요하다. 말로 하는 일은 현장에서 몸을 움직이며 하는 일과 달리 위험하지 않고 체력을 많이 요구하지도 않기에 애쓰지 않아도 문제될 것이 없다.

 

문제는 그러다 보면 국자가 국맛을 모르듯 맹탕 해설사가 된다는 점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연수(年數)의 의미는 없다.100년을 해설한들 나아지겠는가? '삼국지'에 사별삼일(士別三日) 괄목상대(刮目相對)란 말이 있다. 선비와 헤어져 삼일이 지나면 눈을 비비고 다시 보게 된다는 말이다.

 

아무나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다. 괄목상대의 주인공은 못 되어도 나중에 시작한 사람에게 뒤지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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