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끈 - 서사적 사고 내러티브 총서 1
김상환 외 지음 / 이학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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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란 무엇인가? 패러다임과 내러티브의 관계는 어떤가? 등을 알 수 있는 상당히 매력적인 책이다. "인간은 안식처가 있는 덕분에 이야기를 주고 받게 된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주고 받는 능력 덕분에 적절한 안식 공간을 조성할 수 있게 되었다."는 구절이 많은 것을 말해준다. 내러티브 패러다임 연구단을 대신해 쓴 김상환 철학자의 글이다.

 

내러티브 패러다임이란 말은 흥미롭다. 이 두 항목은 심리학자 제롬 브루너가 두 가지로 분류한 사고의 양식을 이르는 말이다. 패러다임 양식은 논리적 추론과 과학적 검증을 바탕으로 하는 추상적이고 탈맥락적인 사고로서 지식을 주체 밖에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로서 간주한다.

 

내러티브 양식은 경험의 구체성과 개별성을 존중하는 맥락 의존적인 사고로서 경험을 조직하고 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지식을 생성하는 마음의 작용에 주목한다.(45, 46 페이지) 내러티브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모든 매체와 형식을 의미하는 서사(敍事)를 지칭한다. 서사는 시간성을 기본으로 한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사건과 변화가 일어나야 스토리라 할 수 있다.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은 이질적인 것들을 종합하여 통일성과 연속성을 창안하는 일이다. 모든 인간은 그러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어 서사적 존재라 불린다. 인간은 날마다 조각난 경험들의 전후 맥락을 찾아내어 그것들 사이의 관련성을 부여하고 개별적인 상황과 사건들을 결합하여 이야기를 만들며 살아가고 있다.

 

부단히 이야기를 만드는 인간의 서사화 행위는 혼돈스러운 세상에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안정감과 안도감을 얻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과도 맞닿아 있다. 서사 이전의 사실 그 자체라는 것은 아무런 형태도, 특성도, 의미도 없다.(71 페이지) 타인의 삶에 대한 우리의 서사적 이해는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어딘가 틀렸을지 모르고 혹시라도 그렇다면 그의 이야기는 언제든 다시 쓰일 수 있어야 한다.(51 페이지) 이 구절을 접하니 한 심리상담가의 이야기를 연상하게 된다.

 

“내가 어떤 모습이든 타인은 결국 나를 오해하기 마련입니다. 저 또한 타인을 제 방식으로 오해할 것이고요. 각자 방식으로 제멋대로 생각합니다. 딱 그 사람 마음 크기만한 관대함으로 나를 보려 할 겁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비난이 두려워 이상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게 아니라 기꺼이 이상한 사람으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괜찮고 멀쩡한 사람인지 타인에게 해명할 게 아니라 자기만의 세계를 잘 구축해서 자기 확신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을 때 타인 때문에 흔들리지 않고 마음을 단단하게 지켜낼 수 있습니다.”(김혜령 지음 ‘내 마음을 돌보는 시간’ 참고)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한다는 말이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폴 리쾨르는 서사적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고정되고 균열 없는 실체인 자기 동일적 정체성이 아닌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해체되는 정체성을 말한다. 리쾨르는 이야기를 시간 속에서 이질성을 띠며 파편화된 것들을 하나로 묶는 끈으로 보았다.(70 페이지)

 

중요한 점은 나의 이야기는 온전히 나만의 것일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 각자의 이야기는 매순간 타인들의 이야기와 얽혀 있고 내 삶의 여러 단면은 내 가족, 친구들, 동료들의 이야기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족 치료사 및 정신보건 사회복지사인 마이클 화이트와 데이비드 엡스턴이란 이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이야기 치료의 창시자다.

 

이들은 이야기의 은유를 통해 인간의 심리 구조와 발달 과정을 이해하는 서사 심리학의 관점을 가족 치료에 도입했다. 한 사회의 지배적 담론을 그대로 내면화한 상태에서 자기 이야기를 그 틀에 끼워 맞추게 되면 자신의 삶을 병적이거나 결핍된 이야기나 부정적 정체성을 서술하는 이야기로 구성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내담자는 자기 삶의 이야기에 대한 전문가임을 인정하고 치료자 자신은 전문가가 아닌 협력자의 위치에 서고자 한다. 마이클 화이트는 인생에 대한 우리의 서술은 살아가는 그대로의 인생을 나타내거나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직접적으로 구성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런 관점을 구성주의라 한다. 이야기하는 행위가 실재를 창조한다는 의미다.

 

인간은 식욕, 성욕에 버금가는 서사적 충동의 지배를 받는다. 김상환의 글이 인상적이다. 김상환은 서론에 이어 '서사의 힘과 한계', '글쓰기의 단계와 창의적 사고의 논리' 등의 글을 썼다. 서사를 배우고 실행하는 능력이 없다면 정서라는 것도 없다. 라캉은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라는 말을 했다. 이는 욕망이 언어의 세계 속에서 학습되는 것이란 의미다.

 

이야기는 감정을 유발하는 장치일뿐 아니라 감정을 학습하고 해석하는 장치다. 우리는 아이 시절부터 이야기를 통해 감정과 그에 관련된 가치를 배우고 믿는다는 의미다. 특정한 가치 질서나 도식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희로애락의 감정이 일어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를 해석할 때는 로고스가 리듬, 도식 등과 가까워진다. 이때 로고스는 요소들을 특정한 관계 속에 분절하는 것, 존재자 일반에 특정한 무늬나 결 혹은 질서를 가져오는 것에 해당한다.(82 페이지)

 

로고스의 동사 레게인(legein)은 원래 모으기, 수집하기, 수확하기 등을 의미했다. 하나로 모으되 부분들의 차이와 그 관계가 모두 드러나도록 펼쳐놓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손으로 하는 행위이지만 동시에 말로 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서사는 주관적이고 편향적인 특성 덕분에 사물의 주관적 본질을 드러내는 데 있어 무한한 가능성을 발휘할 수 있다.

 

고유한 장점은 극복된 단점인 경우가 많다. 루터에 의하면 일신교냐 다신교냐는 것은 종교의 본질이고 신앙은 주관적 본질이다. 애덤 스미스가 가시적 재화라는 경제의 본질에 대해 설정한 상품 생산에 투입된 노동시간은 경제의 주관적 본질이다. 공자는 유가 윤리의 객관적 본질인 예(禮)에 상대되는 인(仁)이라는 주관적 본질을 가르쳤다.

 

서사적 언어의 탁월성은 사물의 주관적 본질을 얼마나 순화된 형태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88 페이지) 주관적 본질은 그것과 관계하는 주체의 체험을 전제한다. 좋은 이야기일수록 이야기하는 사람의 존재감이 구체적으로 느껴진다. 벤야민에 의하면 이야기꾼이란 그의 삶의 심지를, 조용히 타오르는 그의 이야기의 불꽃에 의해 완전히 연소시키는 사람이다.(‘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참고)

 

논리적 언어는 일반화를 꾀한다. 개체에서 특수성을 제거하고 공통의 요소를 추출하여 보편적인 규칙을 찾는다. 서사적 언어는 개체의 특수성을 보존하면서 보편성에 이른다. 논리적 언어는 무시간적이고 상황 독립적인 사태를 그린다. 서사적 언어는 진리의 시간성과 상황성, 정상적 질서의 위기와 곤경의 통과, 주체의 주관적 체험과 상승적 변형을 그린다.

 

신정아와 최용호는 ‘인류세 스토리텔링‘을 이야기한다. 인류세란 인간종이 너무나 강력해진 나머지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지구 전체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힘을 갖게 된 시대를 말한다. 인류세 스토리텔링은 그간 배경에 있던 존재적 파국이라는 설정을 전경화한다.

 

윤성우는 인간은 생각이나 사유를 통해 나의 존재를 확증하는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 나를, 자아를, 자기를, 주체를 찾아간다는 논의를 소개한다. 이 논의는 한나 아렌트, 폴 리쾨르, 앨러스터 매킨타이어, 찰스 테일러의 대동소이한 주지(主旨)다.

 

아렌트에 의하면 인간의 실존적 특성은 죽을 수밖에 없는 사멸성이지만 동물과 달리 오직 생식(生殖)을 통해서만 자신의 불멸적 삶을 보장받지 않고 자신의 각자성을 드러내는 말과 행위를 함으로써 생물학적으로 사라진 후에도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긴다.(135 페이지) 알랭 바디우는 사건에 사로잡힌 주체들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세상의 질서, 그 핵심을 진리라 부른다.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참과는 다르지만 진리 개념의 일상적인 용법과 통하는 데가 있다. 진리는 우리에게 사물의 참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사물의 참모습은 수많은 ’맞지만 무의미한‘ 말들을 뚫고 나와 우리를 관통하는 어떤 것이다. 우리는 때로 그 한마디를 위해 수많은 잡담의 늪을 건넌다.(163 페이지)

 

벤야민은 이야기를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달되며 전달자에 의해 조금씩 변하는 것으로, 소설을 완결되고 닫힌 텍스트로 보았다. 한 사람이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전할 때 그는 자기 안에서 거르고 다듬고 키운 이야기를 전한다. 그가 전하는 이야기는 자신의 것이 아닐지라도 그의 삶이 녹아 있다.(166 페이지)

 

이야기는 반복되면서 전달된다. 반복은 변화를 부른다. 이야기는 반복의 예술이다. 이재환이 언급한 ’과학적 사고와 서사적 주체; 데넷을 중심으로‘는 흥미롭다. 데넷은 대니얼 데넷이다. 그는 데카르트가 말한 변하지 않는 정신을 데카르트 극장이라 부른다. 그는 우리는 뇌에 기능적 최고봉이나 중추 지점이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생각은 무해하고 손쉬운 길이 아니라 나쁜 습관이다.(180 페이지)

 

그가 제시한 개념은 무게중심이다. 무게중심이라는 이론가의 허구가 물리적 대상의 행동을 더 잘 이해하는 데 유용한 허구인 것처럼 무게중심으로서의 자아 개념도 유용하다. 원자 또는 그보다 작은 입자나 세계 속에 존재하는 어떤 물리적 요소가 아닌 무게중심은 질량도 없고 색깔도 없다. 시간 - 공간적인 위치를 제외하고는 물리적 성질이 전혀 없다.

 

무게중심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한다. 무게중심이 변하는 것처럼 자아도 변한다. 데넷은 우리 의식으로 들어오는 외부 세계 정보들은 우리 뇌의 여러 곳에서 병렬적으로 처리되기에 인간의 의식은 파편적이고 비연속적이다. 그러면 정보들이 병렬적으로 처리되는데 뇌의 각 부분에 전달되는 정보들은 어떻게 하나의 의식처럼 만들어지는 것일까?

 

데넷은 이 부분에서 스토리텔링을 이야기한다. 우리의 뇌는 많은 정보를 가공하여 원고/ 초고를 쓰고 이것들을 편집해 매끄러운(것으로 보이는) 하나의 의식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소설가다. 데넷은 하나의 의식의 흐름이 되도록 편집하는 그런 단 한 명의 나는 없고 동시에 다중의 원고가 편집되어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나 즉 자아라는 말을 했다.

 

나를 만드는 이야기가 항상 편집되는 것처럼 우리 삶의 이야기 역시 항상 다시 쓰이고 편집된다. 자아를 구성하는 의식이 편집된 이야기인 것처럼 우리 삶의 이야기도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사건들을 재해석하여 살아온 인생을 이야기로 구성한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수정하는 과정을 통해 모순적이고 불연속적인 개별 사건들, 돌발적으로 발생하는 사건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편집함으로써 인생 이야기의 통일성과 일관성을 만들어낸다.

 

거미가 거미줄을 치는 능력이 있고 비버가 댐을 만드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인간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다. 이재환은 무게중심이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그 자체로 사물을 넘어지지 않게 하는 장소를 일컫는 말이라면 자아 역시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넘어지지 않게 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188 페이지)

 

장태순은 자기에 대한 앎은 하나의 해석이며 이야기를 하나의 특권적 매개체로 삼는다고 말한다. 매개체가 되는 이야기에는 역사적 이야기뿐 아니라 허구의 이야기도 해당된다. 이를 통해 자기에 대한 해석은 위인전처럼 역사적 허구 또는 허구적 역사의 지위를 갖는다.(197 페이지) 브라이언 보이드는 인간은 고유한 메타 표현 즉 이야기 능력을 타고 났다고 주장한다. ’

 

이야기의 탄생‘의 저자 윌 스토어에 따르면 영화와 소설 같은 허구적 이야기가 인간에게 재미를 주는 것은 이야기의 기원이 원시시대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227 페이지) 최소한의 이탈 원칙이란 것이 있다. 현실에 대한 지식이 소설에 대한 사실의 평가에 유사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의미고 무조건 하늘 아래 없던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하는 것이 창의적인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231 페이지)

 

인간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유한하며 불완전한 세계다. 그렇기에 이야기의 적극적 수용자는 주어진 이야기를 소비하는 데서 그칠 것이 아니라 그 세계에서 빈칸을 찾아내고 재해석과 재구성의 과정을 거쳐 제3의 이야기를 창작할 수 있는 창의성을 함양하게 된다. 이야기는 어떤 예술 장르보다 개인 및 사회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기에 창의성 역시 기본적으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해. 집단의 심연에 대한 고민을 전제로 삼아야 한다.

 

김상환의 '글쓰기의 단계와 창의적 사고의 논리'는 현란한 글이다. 창의성은 천부적 재능일 수 있지만 평범한 인간에게 그것은 학습을 통해 획득해야 할 어떤 것이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다 보면 머릿속의 내용이 저절로 넘쳐 좋은 글이 된다고 믿는 사람은 평생 조야한 문장밖에 쓸 수 없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내용에 걸맞은 표현의 형식을 찾는 것이다. 주어진 내용을 정확하게 표현할 뿐 아니라 때로는 아름답게, 때로는 극적으로, 때로는 내면적 울림의 효과를 가져오도록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진부함에 대한 반감이다. 진부함에 대한 반감은 새로움에 대한 동경과 짝을 이룬다. 새로운 것은 기괴하거나 일탈적인 것이 아니다. 이전의 것과 다르되 모범이 될 만한 것이 새로운 것이다. 익히고 배워서 자기 것으로 하고 싶은 욕망을 불려일으키는 것이다.(236, 237 페이지)

 

김상환은 지층, 습곡과 변동, 용암의 분출 등의 말을 한다. "습관은 일정한 시기의 문화적 생태를 떠받치는 두꺼운 지층으로 굳어지기도 한다. 위대한 창조는 그 묵직한 습관의 지층에 습곡과 변동을 일으키는 용암의 분출과 같다." 김상환이 용암 폭발이라 하지 않고 분출이라 한 이유는 무엇일까? 새로운 것을 기괴하거나 일탈적이라 하지 않은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바다.

 

폭발은 마그마가 급격하게 치솟는 것이고 (열하) 분출은 갈라진 틈을 비집고 천천히 나오는 것이다. 글쓰기는 습관이되 습관의 왕국을 다시 상징의 왕국으로 만들어가는 습관이다.(238 페이지) 글을 쓴다는 것은 가장 알맞은 표현을 찾기 위해 이미 쓴 글을 다시 고쳐 쓰는 것이다.(239 페이지)

 

'성숙의 세 단계와 창의적 사고'에서 김상환은 정신분석에 대해 논한다. 정신분석은 주체 생산의 조건인 예속화를 오이디푸스콤플렉스의 통과로 설명한다. 이 콤플렉스를 통과하기 전의 어린아이는 백지상태가 아니라 무정부상태에 놓여있다. 생각은 창의적이기 이전에 합리적이어야 한다. 합리적일 수 있기 위해 생각은 먼저 특정한 체계의 규칙에 자발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성숙의 첫째 단계는 체계 내적 사고의 단계다. 두번째 단계는 체계 간 사고의 단계다. 체계 간 사유는 변증법적 사유를 요구한다. 변증법적 사유는 논증적이기보다 서사적이다. 김상환은 공자의 아는 자, 좋아하는 자, 즐기는 자를 언급한다. 아는 자와 좋아하는 자는 체계 내적 사유의 주체에 해당한다. 즐기는 자는 특정 체계를 조직하는 이항 대립의 질서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면서도 무질서로 전락하지 않는다.

 

과학이든 예술이든 새 시대를 여는 위대한 창조의 배후에는 배타적인 것처럼 보이는 두 유형의 사고가 함께 한다. 김상환은 니체의 낙태, 사자, 어린아이와 라캉의 소외, 분리, 환상을 이야기한다. 라캉이 말한 분리는 체계 간 사고와 유사하다. 진정한 의미의 즐기는 자는 어떤 형이상학적 통찰 속에 환상을 통과하는 주체, 환상의 한계를 알면서 자기의 고유한 욕망의 대상을 향유하는 주체다.(265 페이지)

 

라캉이 말하는 소외는 체계 내적 사고에 해당한다. 아이가 특정한 체계의 규칙에 편입되어 일관성을 띤 주체(공자의 아는 자, 니체가 말한 낙타)로 태어나는 과정이다.(259 페이지) 라캉이 말한 분리의 주체는 자신이 속한 체계(대타자)의 불완전성을 발견할 때 시작된다. 모든 문제에는 복수의 답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때, 나아가 답이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때, 그때 체계는 어떤 결여나 틈을 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사는 시간을 거치며 일어난 사건의 기술이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지속적이다.(292 페이지) 해석(학)적이라는 말은 텍스트 또는 텍스트와 유사한 것이 있어서 그것을 통해 누군가가 어떤 의미를 표현하려고 했고 그것으로부터 누군가가 의미를 읽어내려고 한다는 뜻이다. 이는 텍스트가 표현하는 것과 의미하는 것이 같지 않음을 함축하며 어떤 표현의 의미를 하나로 결정할 수도 없음을 의미한다.(294 페이지)

 

이재환은 근대적 자아와 탈근대적 자아 사이에 서사적 자아를 설정한 철학자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를 소개한다. 근대적 자아는 인간의 정체성이 사회, 역사, 문화에 의해 영향을 받고 구성되기에 다원적이고 유동적이라 생각한다. 탈근대적 자아는 비합리적이고 파편화된 자아다. 서사적 자아는 자신의 삶에서 일관성과 통일성을 추구하는 합리적 존재다. 서사적 자아는 이야기, 서사를 통해 태어난다.

 

서사적 사고 능력은 문학, 역사, 과학에서 활용되는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고 그 이야기를 자신의 삶에 통합시켜 삶을 하나의 일관적이고 통일성 있는 이야기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357 페이지) 매킨타이어는 이야기를 통해 가치의 충돌로 인한 분열 속에서도 통일성 있는 자아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358 페이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이해 가능하고 설명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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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2021-09-20 18: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번 읽어보고 싶은 매력적인 책이네요. 좋은 책을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벤투의스케치북 2021-09-20 1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감사합니다 다헁입니다
 

두꺼운 지층, 습곡과 변동, 용암 분출 등등.. 이 용어들은 어딘가에서 접한 글이다. 그 어딘가는 지질학 책이 아닌 ’이야기의 끈‘이란 책이다. 여러 필자가 함께 쓴 이 책의 서론에서 김상환 교수는 죽간(竹簡)을 끈으로 엮은 모양을 나타내는 책(冊) 자체에 끈이 있다는 말을 한다.

 

나는 이 책을 ‘아리아드네의 실’ 또는 경(經)줄(세로줄)과 위(緯)줄(가로줄)을 염두에 둔 채 잡았다. 큰 울림으로 다가온 글은 단연 김상환 교수의 글이다. ‘글쓰기의 단계와 창의적 사고의 논리’에서 필자는 글쓰기는 습관이되 습관의 왕국을 다시 상징의 왕국으로 만들어가는 습관이라 말한다.(238 페이지)

 

습관은 일정한 시기의 문화적 생태를 떠받치는 두꺼운 지층으로 굳어지기도 한다. 위대한 창조는 그 묵직한 습관에 습곡과 변동을 일으키는 용암의 분출과 같다. 문제는 그런 분출이 일어나는 조건과 논리적 형식을 추려내는 데 있다.(244 페이지)

 

필자가 폭발이 아닌 분출이란 말을 꺼낸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 자신의 글에서 찾을 수 있다. 새로운 것을 기괴하거나 일탈하는 것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새로운 것은 이전의 것과 다르되 모범이 될 만한 것이면 된다.(237 페이지) 폭발은 기괴하거나 일탈하는 것과, 분출은 이전의 것과 다르되 모범이 될 만한 것과 대응한다.

 

“문학적 글쓰기, 시적 글쓰기는 일상어의 수풀에서 말을 따와서 일상과는 다른 세계로 가져간다.”(245 페이지) 이곳에 은유가 등장한다. 일상어의 수풀이라는 말이다. 김광현 건축가의 책 ‘건축, 모두의 미래를 짓다’에 나오는 스페인 코르도바의 메스키타에 열주(列柱)의 숲이 있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승효상 건축가는 고대의 신전이나 왕궁 혹은 기념탑이나 광장 등 여행 안내서에 빠짐 없이 등장하는 곳 대신 그곳 사람들의 삶이 눅진히 녹아 있는 거주지의 골목길 풍경에서 늘 큰 감동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런 그가 말하는 핵심은 달리 있다. 그는 코르도바의 메스키타에서 충분한 보상을 받았지만 그곳 골목길을 탐색하며 그 속에 기록된 수없이 많은 역사들과 만나고 헤어지면서 삶이 완성한 건축의 아름다움, 그 일상의 미학을 만끽했다고 한다.(‘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참고)

 

메스키타(Mezquita)는 내가 즐겨 듣는 스페인 아트록 그룹 이름이기도 하다. 메스키타 같은 대 건축물이든 삶의 진실이 실린 소박한 골목길이든 여행객이 되어 즐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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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문고에서 메일이 왔다. 교보아트스페이스에서 김수영 시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시그림전을 연다는 내용의 글이다. 시인 탄생 100주년인 내년(2022년)을 미리 준비하는 차원이다. 나는 엉뚱하게도 시인의 ‘격문(檄文)’을 읽는다. 격문이란 급하게 여러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 각 곳에 보내는 글을 의미한다. 나는 동의(動議)할 것이 많은 사람인 듯 하다.

 

‘격문(檄文)’은 “땅이 편편하고/ 집이 편편하고/ 하늘이 편편하고/ 물이 편편하고..”로 시작하는 시다. 그런데 편편하다는 편평(扁平)하다의 비표준어다.(오류를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다.) 편평하다는 장소나 물건이 넓고 평평하다는 의미다. 아, 그러고 보니 아직도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생각난다. 멀리 갈 것 없이 내 주위에도 있다. 내 주위에 ‘평평한 지구 학회(Flat Earth Society)’에 가입했거나 동조하는 사람이 있다니...

 

평평한 지구 학회에 가입한 사람들에 대해서까지 말할 필요 없이 나는 내 주위의 사람을 인상파라 말하고 싶다. 인상(印象) 즉 느낌으로 이성(理性)을 무시하거나 무장해제한 사람들이기에 인상파(印象派)고 축적된 과학 공부의 내공 없이 인천상륙작전(仁川上陸作戰)하듯 중간에 자신들이 필요한 부분만을 위주로 과학 공부를 한 사람들이기에 인상파(仁上派)다. 아, 수준을, 이성의 능력을 인상(引上)시켜야 할 사람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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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 읽는 건축 이야기 - 인류와 건축의 역사에 관한 흥미로운 탐색
후지모리 데루노부 지음, 한은미 옮김 / 이순(웅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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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후지모리 데루노보(藤三照信)는 건축가다. 그런 그가 건축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책(‘인문학으로 읽는 건축 이야기’)의 시작이 특별하다. 인류 이야기가 길게 나열되어 있다. 구석기, 신석기 이야기가 그것이다. 인류는 농경 생활 이전에 사냥 생활을 했다. 만일 사냥 생활만 했다면 집이나 건축물은 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냥 생활에서 이동은 필수다. 토기와 간석기(마제석기)는 중요 발명품이다. 점토를 구운 토기를 발명함으로써 식생활에 큰 변화가 생겼다. 굽기, 밥 짓기 등이 가능해졌다. 250만년전에 인류가 처음으로 손에 넣은 뗀석기(타제석기)는 흑요석처럼 상당히 딱딱하면서도 잘 쪼개지는 유리질의 화강암 석재로 진화했으나 그것으로는 나무의 표면 등을 깎아낼 수 있었던 반면 벌목용으로는 한계가 있었다.(일부 흑요석은 오늘날의 수술용 칼인 메스보다 잘 들었다.)

 

그래서 간석기가 발명되었다. 간석기로 큰 나무를 벨 수 있을까 의심스럽지 않은가? 실험 고고학에 의하면 간석기는 철제 도끼의 1/ 4의 성능을 가졌다.(철도끼로 15분 걸리는 것을 간석기로는 60분이 걸린다는 의미.) 부드러운 돌도끼는 딱딱한 돌 이상으로 빨리 나무를 벨 수 있다는 의미다. 간석기를 사용한 시기는 뗀석기를 사용한 구석기 시대와 대비되어 신석기 시대로 불린다.

 

간석기는 농경 및 목축과 밀접하다. 신석기 시대가 시작된 지 2천년이 지나 농경시대가 열렸다. 식량 확보면에서 농경은 수렵을 압도했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발명품인 농업은 평소 감자를 캐거나 열매를 주워오던 여자들이 발명했다. 나무를 베기 위해 발명한 간석기가 농업에도 유용하게 쓰였다. 농업으로 인해 큰 변화가 도래했다. 이동하지 않아도 되었고 식량을 장기적으로 저장할 수 있게 되었다.

 

간석기에 힘입어 인류는 숲을 개발하고 농업 발달을 가속화했다. 임시 거처인 움막 대신 움집을 만들었다. 농경이 시작되었어도 수렵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저자는 신석기 시대 집의 출현함으로써 인간의 자기 확인 작업이 강화되었다고 말한다.(43 페이지)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를 원시시대라 한다. 당시 신(神)은 필수적이었다.

 

구석기 시대에 지모신이 있었다. 구석기 시대 대지를 의식한 지모신앙과는 정반대로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을 강하게 의식한 신앙이 신석기 시대에 출현했다. 농경이 핵심이다. 농경은 씨를 제때 뿌려야 수확이 가능한 방식이다. 우물쭈물하면 한 해를 망치는 것이다. 태양도 중요했다. 천수답(天水沓)이란 말이 있다. 이때 천(天)은 기후를 말하고 특히 가장 중요한 태양을 의미했다.

 

생명 현상의 에너지는 모두 태양으로부터 온다. 태양이라는 남성적인 절대신을 농업을 통해 발견한 것은 지모신적인 여성들이었다. 신석기 시대에 출현하는 거식 건축물과 늘어선 돌기둥은 태양을 향해서 만들어졌다. 절대성과 유일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거대하게, 또 태양에 다가갈 만큼 높게 만든 것이다.

 

농경과 수렵이 병행되었듯 태양신앙과 지모신앙이 병행되었다. 지모신앙이 건물의 내부를 만들었다면(장식했다면) 태양신앙은 외관(外觀)을 만들었다. 이 두 신앙이 만나 (주거가 아닌 또는 주거와 구별되는) 건축이 탄생했다. 신석기 시대에 인간의 집이 태어났고 신의 거처가 생겨났다. 주거는 개인의 것이지만 건축은 신과 사회의 것이다. 건축은 만들어짐으로써 오히려 인간의 의식을 조직화했다.

 

주거는 그 곳에 사는 사람이 자신을 확인하는 도구였고 건축은 사회 구성원들이 우리를 확인하는 도구였다. 신석기 시대에 탄생한 신전이라는 이름의 건축 외관의 특성을 가장 순도 높게 나타내는 것이 입석(立石)이다. 건축 외관은 입석에서 시작되었다. 입석이 천문대로 사용된 건축물이라는 말이 있긴 하다.

 

저자는 영향력을 가진 사람의 장례 예식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이 틀림 없다고 말한다.(69 페이지) 다만 신석기 시대에 시작해 청동기시대로 진행하면서 태양을 향해 왕의 혼을 발사하던 당초 목적이 잊히고 태양을 숭배하는 장소로 바뀌었을 가능성은 있다. 입주(立柱)는 태양의 움직임을 강력하게 의식해서 세워진다.

 

신석기 시대가 끝나고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면서 세계 각지에는 크고 작은 여러 국가가 성립하게 되고 그중에서도 나일강,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 황하 등 네 개의 큰 강 유역에는 청동기라는 신기술과 문자, 관개(灌漑)에 의한 대규모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거대한 국가가 출현한다.

 

4대 문명의 건물에는 이렇다 할 공통점이 눈에 띠지 않는다, 청동기, 문자, 대규모 농업은 공통되지만 그런 힘에 의해 얻어진 부를 투자해서 건물이 만들어질 때는 정치와 종교, 나라마다 구할 수 있는 재료가 각기 달라서 건물이 다르게 지어졌다. 저자는 자신의 책이 전례 없는 책이라고 말한다. 한쪽으로 치우친 책이라는 의미다.

 

저자는 인류 건축의 역사는 시발점인 원시시대와 종점인 현대에는 다양성이 없고 지구 어디를 가도 같은 풍경인데 반해 시발점과 종점 사이의 건축물은 각 나라, 각 지역만의 특성과 다양성으로 넘쳐나서 부풀어올라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을 읽은 데에는 사연이 있다. 김광현의 ‘건축, 모두의 미래를 짓다’에 나오는 “인류는 수렵 시대에 지모신을 섬겼으나 청동기 시대에는 태양신을 섬겼다. 지모신에게는 공물을 바쳤으나 태양에게는 의미가 없어 하늘을 향해 기둥을 세웠다.”는 구절로 인해서다. ‘인문학으로 읽는 건축 이야기’에 관련 이야기가 있지만 일부에 한한다. 물론 ‘인문학으로 읽는 건축 이야기’가 먼저이고 김광현의 ‘건축, 모두의 미래를 짓다’가 나중이다. 다른 곳에서 관련 자료를 찾아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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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 전문가인 강호숙 박사님의 '여성이 만난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공감한 부분도 많았다. 무엇보다 기존의 권위적이고 편협한 남성의 성경해석으로는 바람직한 대안을 얻을 수 없음을 알았다. 실존적인 부분과 관련해 내게 지침이 되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지금껏 살아 오면서 때로는 남이 인정해주지 않아 서럽고 섭섭한 적도 많았지만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을 사모하여 마음을 접고 또 접었다는 저자의 고백이 그것이다. 나야말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 받는 것에 민감하게 살아온 사람이다.

 

하지만 그냥 나 홀로 묻고 모색하며 만족하는 삶을 상수로 둔 채 비상시적으로 얻는 피드백과 격려에 기뻐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을 사모했다고 하나 나는 아직 그런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신이 없으면 동무가 있어야 한다는 니체의 말이 생각난다.

 

이 말을 수용하면 내게 필요한 존재는 무엇보다 동무라는 말을 할 수 있다. 단 나에게도 동무들이 몇 있다. 감사하고 미안하게도 그들은 격려와 지지, 진솔한 조언으로 나를 붙잡아 주고 있다. 하지만 신에게 하듯 때를 가리지 않고 고백하고 질문할 수는 없다. 그것이 문제다.

 

물론 내가 원하는 바가 아무 때나 누구에게나 말하고 물으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런 실존적 소통을 소망할 때는 언제일까? 문제가 풀리지 않아 힘든 때이다. 내 처지가 어떻든 책으로부터 영감과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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