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 풀지 말고 실험해 봐 - 신기한 실험으로 수학과 친해지기 수학, 풀지 말고 실험해 봐 1
라이이웨이 지음, 김지혜 옮김 / 미디어숲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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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으로 어려운 수학을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책에서 소개된 열다섯 개의 실험들은 사람들의 흥미와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들이다. 케이크의 크기를 측정하는 실험, 맨홀 뚜껑에 관한 실험, 그림자로 높이를 측정하는 방법,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삼각형에 관한 실험, 직선으로 꽃을 그리는 방법에 대한 실험, 신기한 뫼비우스 띠에 대한 이야기, 타원으로 하는 게임, 다 먹을 수 있는 초콜릿에 관한 실험 등이다.

 

삽화가 친절하게 그려져 있고 제시한 실험을 단계별로 친절하게 보여주는 장점이 있다. 본문에 이런 주목할 말이 있다. “아무리 많은 실험을 한다고 해도 불확실성은 여전하다. 하지만 증명을 한 번 하면 100% 확실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39 페이지) 이 말은 과학의 경우 백만 번 실험을 해서 이론에 맞는 데이터가 나왔다 해도 바로 다음 번에 이론에 맞지 않는 데이터가 나올 가능성이 있는데 그렇다고 영원히 실험만 할 수도 없고 수학은 모든 것이 머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개념이어서 한 번 증명하면 끝이란 말로 추가 설명할 수 있다.

 

맨홀 뚜껑이 둥근 것은 일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하는 따뜻한 배려가 담긴 결과다. 프랙탈 이야기를 하자. 1. 종이 한 장을 준비하고 구석에 1.5cm 직선을 그린다. 컴퍼스를 직선에 맞춰 1.5cm 폭으로 반경을 만들고 종이에 원을 그린 후 원주 위에 점 하나를 기준으로 다시 원을 그려 두 번째 원을 완성한다. 2.1단계에서 두 원의 교점을 원의 중심으로 하여 아래위로 두 개의 원을 그린다. 3. 2단계에서 왼쪽 위와 왼쪽 아래의 교점을 원의 중심으로 하여 두 개의 원을 그린다. 4. 3단계에서 왼쪽에 있는 새로운 교점을 원의 중심으로 하여 원을 그린다. 그러면 한 가운데 여섯 개의 긴 꽃잎이 연결된 꽃이 나온다. 5. 꽃을 계속 크게 그려 보자. 그림에 표시된 여섯 개의 점을 원의 중심으로 하여 원을 여섯 개 더 그린다. 6. 그리고 그림에 새로 표시된 6개의 점을 원의 중심으로 하여 6개의 원을 계속 그려 나간다. 지금까지 총 몇 개의 원을 그렸는지 세어보자. 7. 다음 그림과 같이 그림의 정중앙을 원의 중심으로 하여 더 큰 원을 그려 모든 작은 원을 감싸 보자. 이 큰 원의 반지름은 작은 원의 몇 배가 될지 생각해보자. 8. 큰 원의 반지름을 반지름으로 1단계부터 7단계까지 반복한다. 바깥으로 원을 한 바퀴 더 그린 후 도형을 색칠해 가면 예쁜 꽃 한 송이를 얻을 수 있다.

 

저자는 “산골짜기 계곡에 갇혀도 재능있는 사람은 난관을 극복하고 재능을 발휘하여 상황을 벗어난다. 재능이 없다면 계속 산골짜기에 머물든지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수학이라는 강력한 도구가 있다. 다리를 하나 놓기만 하면 건너갈 수 있다. 다리를 놓는 과정은 분명히 힘들다. 하지만 수학이라는 다리를 놓는 도구가 있다면 누구나 깊은 계곡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51 페이지) 수학이라는 다리를 놓는 도구는 실험이다.

 

프랙탈은 정교한 구조를 가졌고 전체 또는 부분적으로 형태가 있고 전통적인 기하학과는 차이가 있다. 자기유사성을 가진다. 즉 서로 다른 수준에서 같은 구조를 찾을 수 있다. 원형 외에도 잘 구르는 특별한 도형이 있다. 뢸로 삼각형이다. 꼭짓점은 3개로 같지만 변이 곧은 선이 아니라 호(弧) 모양이다. 정삼각형을 상상하여 세 꼭지를 고정시킨 후 삼각형 안쪽에서 세 변을 밖으로 밀어낸 형태다. 세 꼭짓점 사이의 거리는 같지만 삼각형은 약간 통통한 모양이다. 이것이 뢸로 삼각형이다.

 

맨홀 덮개는 대부분 원형이지만 뢸로 삼각형의 맨홀 덮개를 사용하는 곳도 있다. 뢸로 삼각형은 독일의 기계공학자 프란츠 뢸로(Franz Reuleaux; 1829~1905)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뢸로 삼각형 모양의 바퀴도 어느 부분에서나 폭이 일정하기 때문에 거의 흔들림 없이 굴러갈 수 있다. 뢸로 삼각형은 중세 말기 고딕 양식의 성당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다빈치가 그린 세계지도에도 사용되었고 현대 건축물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직선으로 꽃을 그려보는 실험은 더욱 흥미롭다. 앞뒷면 구분 없이 하나의 면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입체인 뫼비우스 띠는 신기하다. 본문에 뫼비우스 띠의 원리를 이용해 베이글을 자르는 방법이 제시되어 있다.

 

로저 펜로즈 이야기는 진지하게 읽을 부분이다. 블랙홀이 넓은 의미에서 상대성 이론의 직접적인 결과임을 수학적으로 증명한 펜로즈는 어릴 적 계산이 아주 느렸으나 관찰력이 좋은 선생님의 영향으로 자신감을 얻었다. 그 분이 얼마나 오랫동안 계산하든 다 괜찮다고 말해준 결과다. 에셔가 펜로즈 삼각형을 보고 영감을 얻어 폭포와 계단 오르내리기 등을 만들었다. 떨어진 물이 물레방아를 통해 다시 뒤쪽의 수로로 향한다. 수로를 따라가면 처음의 장소로 다시 돌아온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

 

펜로즈의 삼각형은 3차원의 세계를 2차원의 평면에 그린 삼각 막대기다. 역시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삼각형이다. 수학은 속도가 아니라 깊이다. 사고는 계산이 아니다. 종이에 구멍을 뚫으면 펼쳐지는 마술도 흥미진진하다. 마지막 말이 더욱 인상적이다. 수학의 본질은 자유로움에 있다는 칸토어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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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지질(地質) 해설사로부터 지질은 주관적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증거 없는 학문이라는 말을 들었다. 사실 내가 들은 말은 지질은 카더라 학문이라는 말이다. 주관적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증거 없는 학문이라는 말은 내가 순화해 전달하는 말이다. 카더라는 ~ 한다고 하더라의 사투리 발음이다. 정확한 근거가 부족한 소문을 추측해 사실처럼 전달하는 학문이라는 말이다.

 

참 충격이다. 그 이유는 그 분의 발언이 너무도 뜬금 없기 때문이고 내가 그 분의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루가 지난 시점에서 이런 글이나마 쓸 수 있어 다행이다. 어떻든 나는 그 분에게 어설프게도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라는 물음을 던지지 못했다. 그리고 "근거 없이 말해지는 지질 사례를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는지요?"란 말도 하지 못했다.

 

지질해설을 하는 분이 지질은 카더라 학문이라는 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런 말을 하는 분은 타자(他者)라 불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말함으로써 나 같은 학인(學人)으로 하여금 부족함을 돌아보게 하고 공부의 기회를 갖게 하는 이방인 즉 경계의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 자리하는 분이라는 의미다. 오래 전 즐겨 읽던 책을 찾아보니 이런 구절이 눈에 띈다.

 

“대중은 말 자체가 함축하듯이 특수하게 개념화된 언표들을 사용하는 집단이 아니다. 대중은 특수한 개념들이 분화하기 이전의 차원, 인간됨의 가장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차원 속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하는 존재이다. 즉 대중은 감성적 언표의 수준에서 삶을 영위한다. 감성적 언표는 비반성적 수준의 언표”(이정우 지음 ‘가로지르기’ 108 페이지)라는 말이다.

 

과학은 무엇일까? 사실 나는 과학이란 말을 많이 써왔고 지금도 그렇지만 그런 습성을 감안하면 그 의미는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생각해보지 않았으니 이상하다. 당연히 반성할 일이다. 내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증거와 논리를 기반으로 해 자연세계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하는 방식이 과학이다. 유명한 과학 철학자 칼 포퍼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날 가능성 즉 반증(反證) 가능성이 있는 것을 과학이라 설명했다.

 

반증 가능성이 있다의 반대는 당연히 반증 가능성이 없다란 말이다. 이 말은 검증할 수 없다는 말이다. 가령 영혼이 있다는 말은, 믿음의 대상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과학이 진지하게 연구 대상으로 삼을 사안은 아니라는 말이다. 김범준 교수는 과학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라는 말을 했다. 과학은 아스라이 윤곽만 보이는 진리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긴 항해라는 것이다.

 

물리학자 출신의 과학 저술가인 일본의 다케우치 가오루는 “백만 번 실험을 해서 이론에 맞는 데이터가 나왔다 해도 바로 다음 번에 이론에 맞지 않는 데이터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실험만 할 수도 없다.”는 말로 과학과 수학의 차이를 설명했다. 수학은 모든 것이 머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개념이어서 한 번 증명하면 끝이지만 과학은 정밀한 실험에 의해 반증(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될 가능성이 남아 있다.(‘과학은 if’ 108 페이지)

 

다윈 진화론을 열렬히 변호해 다윈의 불독이라 불렸던 토마스 헉슬리는 이런 말을 했다. "객관적 사실 앞에 아이처럼 낮춰 앉아라. 모든 선입관을 버리겠다는 각오를 다져라. 어디로 간들, 어떤 나락에 다다른들 겸손한 마음으로 대자연을 따르라.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배울 수 없다.“

 

과학 저술가 스티븐 버트먼은 초기 그리스인들이 지질학의 역사를 신화적 관점에서 바라보았던 것과 달리 그리스 최초의 철학자들은 신화의 안개에 이성의 햇살을 비추는 동시에 지구의 창조를 사실주의적으로 새롭게 설명했다고 말한다. 과학은 애초에 자연철학이었다. 본가인 철학에서 분가해 나온 학문이 과학이다. 과학은 분과학문(分科學問)의 줄임말이다.

 

기원전 6세기 후반의 사상가 크세노파네스와 헤라클리토스 등은 언덕 꼭대기에서 화석으로 변한 조개 껍데기를 발견하고 지구 표면이 항상 지금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라 가정하며 지중해가 땅으로 덮였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라 유추했다.(‘세상의 과학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중 지리학과 지질학 부분; 194 페이지)

 

이것이 바로 과학이다. 지질학의 창시자는 니콜라우스 스테노(스웨덴 이름으로는 닐스 스텐센; 1638 - 1686)다. '프로드로무스’란 저서를 통해 그는 네 가지 지질학 원리들을 정립했다. 1) 누증의 법칙, 2) 퇴적암 법칙, 3) 고유 수평성의 원리, 4) 측면 연속성의 원리 등이다.(캐서린 쿨렌 지음 ‘천재들의 과학 노트’ 참고) 카더라를 말한 것이 아니라 원리를 쳬계화한 것이다. 나는 물론 니콜라우스 스테노의 관점과 현재 지질학의 원칙인 동일과정의 법칙, 지층누증의 법칙, 천이(遷移)의 법칙, 부정합의 법칙, 관입의 법칙 등의 관계를 알지 못한다.

 

앞서 말한 지질해설사는 과학을 무엇이라 생각하는 것일까? 백의리층을 영어로 Baekeuiri layer라고 설명하는 전문가가 있고, Baekeuiri formation이라고 설명하는 전문가도 있다. Baekeuiri formation이라고 하는 전문가는 layer는 형태에 초점을 맞춘 용어이고 formation은 축적된 시간 즉 연대에 따른 결과에 초점을 맞춘 용어라는 말을 한다. 나는 설명판에 기록된 대로 백의리 포메이션이라 해야 옳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재인폭포가 평강 오리산 등지에서 흘러온 용암에 세 번 노출된 뒤 오늘에 이르렀다고 말하는 전문가가 있고 두 번 노출된 뒤 오늘에 이르렀다고 말하는 전문가가 있다. 지질에서의 이런 어긋남 또는 이해되지 않는 점은, 내가 아직 내공이 부족해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과학이란 것이 오류와 착오와 함께 다루어지는 학문이어서인지 그런지 꽤 많다. 앞에서 언급한 지질해설사는 혹시 이런 어긋남(상위; 相違)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인가?

 

그 분은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내용을 접했을 때 생각을 거듭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전문가에게 문의하거나 책을 찾아 보는 수고로운 과정을 치렀을까? 나는 그 분이 지질의 모든 내용이 ”카더라”라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하고 “그런 잘못된 내용은 해설사들뿐 아니라 전문가들도 받고 전하는 것은 아닌가요?“라고 물었다. 이에 그 분은 수긍하며 다만 전문가들은 잘못된 내용을 더 자연스럽고 교묘하게 설명하는 방식에 능한 사람이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그 분은 곧 있을 수업(授業)을 지질 전문가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렇다면 그 분은 근거가 불분명한 말을 해설사들보다 더 교묘하게 치장하고 꾸미는 기술에 능한 전문가들로부터 교육을 받겠다는 것인가? 어쩌면 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말하는 분의 대응 가치도 없는 주장에 필요 이상으로 진지하게 반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 투척한 넌센스도 내게는 해명해야 할, 그래서 공부의 밑거름으로 삼아야 할 데이터(문제로서 주어진 것)가 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문제적 발언일수록 더욱 근본 차원의 쟁점을 생각하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 그 분은 마음에 들지 않는 해설사들이 던진 두서 없고 ”틀렸다고 할 수조차 없는“ 엉터리 말을 듣고 만부당한 말을 하는 해설사들이 있다고 하는 대신 지질은 카더라 식의 학문이라는 말을 한 것일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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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에 지쳐서인지 한 권을 진득하게 읽지 못하고 이것 조금, 저것 조금 하는 식으로 책을 읽고 있다. 분야도 지질, 역사, 물리, 사회과학, 생태 등으로 하나가 아니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생각을 다시 정리하는 중에 만들고 있는 분탕(焚蕩; 아주 야단스럽고 부산하게 소동을 일으키는 짓)의 행위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비효율의 낭비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런 과정들을 통해 새로운 생각 거리들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내일은 지난 15일 근무한 백의리층에 다시 가게 되었다. 지난 근무 때에는 고고학 전공자와 나눈 대화로 얻은 바가 있었고 주위의 나무도 눈여겨 보았다.

 

눈에 띄는 책들을 순서에 개의치 않고 보고 있고 주위의 나무와 꽃들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것이 요즘 내 일과라 할 수 있다. 내 행보가 “빛이 들지 않는 지평의 바깥, 그 어둠 속에 있는 것“(이진경 교수 지음 ‘예술, 존재에 휘말리다’(104 페이지)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굳이 말할 수는 없다.

 

‘예술, 존재에 휘말리다’는 지난 봄 2/ 3 정도 읽다가 덮어 두었던 책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가 ‘인간에 대한 오해’에서 한 말을 음미한다. 우리가 역사의 사소한 이야기거리에 빠져드는 것은 그것들이 우리 존재의 원천이기 때문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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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자리‘라는 책을 계기로 존 버든 샌더스 홀데인, 스티븐 제이 굴드 등의 이름을 다시 확인한다. 홀데인은 신은 딱정벌레와 별에 대해 과도한 애정을 가진 것 같다고 말한 것으로 유명한 생물학자다. 이 에피소드를 근거로 하면 홀데인을 재기 넘치는 과학자로만 보는 것도 무리가 없겠다. 하지만 과학적 유토피아를 그린 ’다이달로스. 과학과 미래‘라는 책의 저자이기도 한 그는 공동체 지향의식이 강한 과학자였다.

 

김우재 교수는 '과학의 자리‘에서 과학과 인문학이라는 이분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귀기울일만한 주장을 했다. 하지만 인문학 진영에서 자연과학을 소홀히 하는 문제는 많이 거론한 반면 자연과학 진영에서 인문학을 소홀히 하는 문제는 상대적으로 덜 언급한 점은 아쉽다.

 

책에서 거론된 ’과학이 만드는 민주주의‘의 저자 해리 콜린스와 로버트 에번스는 목을 180도 돌릴 수 있는 부엉이처럼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모두 바라볼 수 있는 과학자들을 진정한 과학지식인으로 정의했다. 인문학적 메시지를 반영해 해설하려는 지질해설사를 보고 펄쩍 뛰었다는 한 지질학 박사가 생각난다. 그 분에게 “과학과 인문학이라는 이분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과학의 자리‘의 메시지를 들려주고 싶다.

 

'과학의 자리'와 관련해 인상적인 점은 책이 어렵다는 기자의 푸념에 “그건 내가 독자를 존중하기 때문이다...편향적인 인문주의 전통에 매몰된 학자들은 책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한 저자의 대응이다. 나 역시 주위 사람들을 존중해 어려운 이야기도 꺼리지 않고 전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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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포성, 임진강 주상절리, 좌상바위 가는 버스를 확인했다. 당포성과 임진강 주상절리는 81번 버스, 좌상바위와 베개용암은 포천 가는 56번 버스, 백의리층은 고문리 가는 56번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지질공원은 아니지만 호로고루와 경순왕릉, 고랑포구 역사공원에 가려면 83번 버스를 타면 된다. 당포성에 별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호로고루도 생각했다.

 

고구려 시대에 두 성이 천문대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것은 내 막연한 생각이다. 김일권 교수의 ‘고구려 별자리와 신화’를 참고할 만하다.(당포성, 호로고루 두 성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 천문의 일반적 이야기를 참고해야겠다는 의미다.)

 

천문 이야기를 했지만 지난 해 영월에 갔을 때 본 별마루 천문대가 내가 간 첫 천문대다. 그간 실제로 별을 보는 것보다 천문 이론(그렇다고 많이 아는 것은 결코 아니다.)을 익히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 한계 안에서 관심 두는 별 이야기에 집중할 것이다. 가끔 하늘을 보는 것으로 별 관측을 대신할 것이다.

 

조 던클리의 ‘우리 우주’를 마저 읽어야겠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앞으로 몇 년 동안 우리는 분명히 충돌하는 블랙홀이나 중성자별에서 오는 신호를 더 많이 관측하여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는 조만간 보이지 않는 암흑물질 입자가 정말로 무엇인지 알아내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앞으로 몇 년 이내에 우주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은하들을 보게 되기를 기대한다. 이런 발견들은 훌륭한 새 망원경들과 계속 발전하고 있는 컴퓨터 성능 덕분에 가능해지고 있다. 다음 10년을 위해 준비되고 있는 망원경들은 모든 파장의 빛뿐만 아니라 중력파까지 관측할 것이고 넓은 하늘 전체뿐만 아니라 특정한 천체들을 높은 정밀도로 관측할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그 날에 망원경으로 새로운 관측을 한 사람의 글을, 때로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스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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