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이 용이하지 않을 경우 한편으로는 난해한 학문이라는 딱지를 붙이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학습자의 준비 부족 혹은 열성 부족(수십 번이고 되씹어 생각해야 할 것)을 탓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지적 자질을 의심하게 된다. 별로 큰 능력도 없으면서 철저한 이해를 원하는 성향의 학생이 일차적인 좌절을 겪게 된다. 달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따라가는 사람에게는 별 문제가 없지만 굳이 달을 보겠다는 사람에게는 절망이다. 나는 만년에 이르면서도 여전히 달을 보겠다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에 나오는 내용이다. 조금 길지만 양자역학을 대하는 자세에 대한 참고할 만한 글이어서 인용했다. 물론 양자역학만이 아니라 학문 일반을 대하는 자세에 적용해도 좋을 이야기다. 장회익 교수는 공부하는 사람을 달을 가리키는 손만 보려는 사람과 "굳이" 달을 보려는 사람으로 나누어 비유한 뒤 별로 큰 능력도 없으면서 철저한 이해를 원하는 성향의 학생이 일차적인 좌절을 겪고 굳이 달을 보겠다는 사람은 절망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장회익 교수는 자칭 만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달을 보겠다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분이다. 이를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지질공원에 대해 공부(또는 해설)하는 데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려는 사람과 굳이 달을 보려는 사람의 이원적 대립(binary opposition)이 적용된다. 장회익 교수는 별로 큰 능력도 없으면서 철저한 이해를 원하기에 좌절을 겪는 학생 단계는 오래 전 넘어선 분이다. '만년에 이르러서도 굳이 달을 보기를 소망하는' 분이다.

 

장회익 교수의 분류에서 달을 보려는 이유 때문에 좌절을 겪거나 절망을 느끼는 사람은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상징폭력을 겪는 사람이다. 상징폭력이란 선학(先學)들이 이루어놓은 지식의 장(場)에 진입해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그들이 이루어놓은 성과로부터 연구를 시작해야 하기에 감수할 수 밖에 없는 후학들이 겪는 고통이고 언어로 이루어진 상징공간에 진입해 그 장(場)에서 중요하다고 설정된 내기물이 연구할 만하다고 믿는(오인하는) 사람들이 감수하는 고통이다.

 

부르디외의 말과 장회익 교수의 말을 종합하면 달을 보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달은 아무런 흥미도 유발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장회익 교수의 말은 오컴의 면도날을 조금 변형해 생각하게 한다. 경제성의 원리라 불리는 오컴의 면도날은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불필요한 가정을 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원리다. 이를 변형하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려는 사람은 쉬운 내용만 다루고 조금 더 깊이 있는 내용은 고려하지 않는 태도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어쩌면 의문 자체를 갖지 않는 사람이라 할 수도 있겠다.

 

사실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의문이 들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의문을 갖지 않은 채 편하고 쉬운 내용만 전하려는 사람이 분명 있다. 해설계에 특히 지질해설계에서도 그런 일은 빚어진다.

 

브레너의 빗자루란 개념을 생각하기로 하자. 분자생물학자 시드니 브레너에 의해 고안된 이 개념은 탁월한 아이디어나 명쾌한 통찰을 지녔다고 믿는 사람은 일단 용감하게 발표하고 나서 해결되지 않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내용은 브레너의 빗자루를 이용해 양탄자 아래로 쓸어넣으면 된다는 것이다.(에른스트 페터 피셔 지음 '슈뢰딩거의 고양이' 참고) 이 역시 변형하면 해설하는 사람은 끊임 없이 의문을 가지고 기존의 개념이라도 색다르게 설명할 아이디어를 갖게 될 경우 기존 지식과 어긋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새롭게 가다듬어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최근 某 지질해설사와 대화를 하고 생각이 많아졌다. 그는 자신은 과학(책)을 읽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지질(해설)에 굳이 새로운 과학 내용이 필요하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관건은 조금 더 나은 기법을 찾아내는 것이고 과학 지식을 추가해 설명에 반영하는 것이다. 지질 책은 물론이고 여타 과학 책에서도 얼마든지 새롭게 생각하고 기법과 내용으로 삼을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조금 관념적일 수 있지만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의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를 읽으며 내가 이해한 이야기를 먼저 하도록 하겠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사물은 느린 사건이다. 빠름과 느림은 상대적이란 의미다. 이를 재인폭포에 적용하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각자 재인폭포가 관심을 끄는 이유에 대해 생각한 바가 있을 것이다. 내가 구상하는 설명(카를로 로벨리의 책을 쉽게 풀어 하는 설명)은 언급하지 않겠다.

 

어떻든 이제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로 다시 돌아가자. 먼저 말할 것은 부르디외가 말하는 상징폭력은 선학(先學)들의 지식(知識)으로부터 연구를 시작해야 하는 까닭에 그 개념에 익숙해져야 하므로 빚어지는 어려움이다. 이는 뉴턴이 말한 거인의 어깨와 관련이 있는 말이다. 즉 자신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섰기에 성과를 낼 수 있었다는 뉴턴의 말과 관계 있다는 뜻이다. 장회익 교수는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를 대비했다.

 

‘스피노자의 뇌’(원어는 Looking for Spinoza’)의 저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스피노자의 서재를 방문해서 본 스피노자의 많지 않은 책에 대해 그가 필요로 했던 책은 미니멀리즘이 무색할 정도라는 말을 했다. 흥미로운 점은 스피노자의 서재 방명록에 아인슈타인이란 이름이 올랐다는 사실이다. 아인슈타인이 스피노자의 서재를 다녀간 것은 1920년이다.

 

스피노자의 많지 않은 책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데카르트의 책이다. 스피노자는 뉴턴과 함께 데카르트로부터 영향을 받은 두 지적 거인이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를 다르게(창조적 배반?) 계승했다. 뉴턴 역시 데카르트에 빠져 있었지만 맹목적인 신봉자가 되지는 않았다. 그는 데카르트에게서 적당히 떨어져 그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뉴턴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데카르트의 동시대 학자들의 이론을 폭넓게 공부했기 때문이다.

 

그런 동시대 학자들 중 한 사람이 가상디다. 물질의 본질을 외연(外延)으로 본 데카르트에게 공간과 물질은 구분이 불가능하고 전체 우주는 물질로 가득찬 플레넘(물질로 충만한 공간)이었다면 가상디에게 우주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원자라는 입자'가 진공 속을 날아다니는 공간이었다.(박민아 지음 ‘뉴턴 & 데카르트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거인’ 참고) 곁가지이지만 세상 만물이 그렇듯 우리 몸 역시 거의 대부분(99. 999%) 텅 빈 원자로 구성되었기에 우리는 그 빈 공간을 뚫을 수 있으리라 생각할 법하지만 원자의 외곽을 구성하는 전자 사이의 전기적 반발력 때문에 빈 공간과 다름 없는 우리가 역시 빈 공간이나 다름 없는 벽을 뚫지 못한다는 말을 하게 된다.

 

스피노자는 몸과 마음을 별개의 것으로 본 데카르트와 달리 몸과 마음의 일원론을 제시했다. 장회익 교수는 스피노자에 의거해 “양자역학 이전에는 위치공간과 운동량공간을 서로 독립적인 두 공간으로 보았지만 양자역학을 이해하면서 이것이 한 공간의 두 측면임이 밝혀진 것”이란 말을 한다. 스티븐 내들러는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인간 내에 있는 정신과 신체 상태간의 상관관계는 독립된 두 계열간의 외적 관계가 아니라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펼쳐지는 하나의 계열이라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신체가 ‘베임‘ 하고 울리면 정신은 ’아픔‘ 하고 울리고 정신이 ’팔을 움직임‘ 하고 울리면 신체는 ’팔이 움직임‘ 하고 울린다는 흥미로운 말을 덧붙인다.(’에티카를 읽는다‘ 246 페이지) 신승철은 스피노자의 평행론을 이야기한다. 스피노자의 평행론을 잘 살펴보면 꼼짝 안 할 때의 마음이 감정이라면 움직일 때의 마음은 정동(情動)이라는 것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꼼짝 안 할 때의 마음인 감정은 망상과 같아 일시적이고 돌발적으로 찾아와 머릿속에서 공회전한다.(’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 147 페이지)

 

요즘 오랜만에 양자역학에 다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는 내가 지난 3월 중순 문을 연 경기도 연천 전곡의 달달(달리는 달팽이) 서점에서 가장 먼저 구입한 책이다. 이 서점은 내게 사랑방 같은 의미 공간이다. 책을 주문하고 오기를 기다렸다가 도착했다는 연락이 오면 가서 받아 대화를 하는 의식(儀式; Officium) 같은 일이 펼쳐지는 곳이다. 작은 서점이 아니라면, 그리고 운영자가 함께 지질해설을 하는 분이 아니라면 가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든 그랬지만 처음으로 산 그 책을 꽂아두고만 있다가 양자역학에 대한 관심 재점화 덕에 집어든 것은 여름이 다 저물어 가는 8월 15일 이후의 일이다. 장회익 교수의 책은 근대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스스로를 스승으로 삼아 자신만의 세계를 완성시킨 이들과 그들의 학문을 ‘심학십도(尋學十圖)’의 형식으로 정리해 지성사의 흐름을 조망한 책이다. 심학십도란 이율곡의 성학십도(聖學十圖)와 불가의 심우도(尋牛圖)를 조합한 말이다.

 

2007년 나온 최종덕 교수와의 대화집인 ‘이분법을 넘어서’에서 장회익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과연 알고 가르치느냐 하는 점을 지속적으로 반추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모른다는 것을 자각하고 자기 지식을 새로 짜나가야 해요....학문을 다시 짜야 해요. 우회로를 버리고 직선으로 뚫어야 해요. 핵심만 명명백백하게 드러내는 방법을 강구해야지요.”(41, 42 페이지) 앞 부분에서 말한 굳이 달을 보려는 사람, 그 과정에서 절망도 느끼는 사람이 감내하는 길이다. 그리고 그 길은 내가 말한 조금 더 나은 기법과 과학 지식을 추가해 설명에 반영하는 길과도 통한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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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 로벨리. 이탈리아의 물리학자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모든 순간의 물리학’, ‘첫번째 과학자, 아낙시만드로스’ 등을 쓴 작가다. 찰스 코켈의 ‘생명의 물리학’을 주문하고 책이 오기를 기다리는데 저 책들을 주문하고 싶어진다.

 

‘생명의 물리학’을 주문한 것은 생명의 꾸러미, 생명의 가장자리, 생명의 부호, 물; 생명의 액체 등의 챕터 때문이다. 어떻든 이렇게 오랜만에 물리학에 집중하게 된 것은 왜일까? 박문호 박사의 강의(뇌과학, 현대물리학, 지질학)가 한 계기가 되었다.

 

낮에 박문호 박사의 특강(2019년 프로그램)을 통해 리 스몰린의 ‘양자 중력의 세 가지 길‘과 전기한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등을 기본으로 한 내용을 들었다. 박 박사는 무한 대신 한계, 연속 대신 불연속, 실재 대신 관계를 키워드로 제시했다.

 

실재 대신 무엇일까요?란 질문에 나는 인연(因緣) 또는 연기(緣起)를 생각했다. 그러나 답은 관계였다. 같은 맥락의 말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연기는 불교적인 뉘앙스가 강하다. 집에 돌아와 강승환의 ‘불교에서 본 우주’를 펼쳤다.

 

꽤 오래 전 사서 1/3 정도의 분량만 읽고 지금껏 시간만 보낸 책이다. 이제 그 책을 읽을 차례가 된 듯 하다. 저자는 지리학을 전공한 분이다. 불교의 우주관과 현대과학의 첨단 우주론을 접목한 책이라는 설명이 눈에 들어온다.

 

물론 책을 처음 접했을 때도 그 요점에 주목해 책을 구입한 것이었다. 물리학(자의적이지만 천문학까지 포함)은 철학적인 면이 강한 분야다. 나에게는 이런 분야가 적격이다. 읽을 책이 쌓였다. 몇 달 틀어박혀 책만 읽고 싶으나 현실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런 점이 미덕이고 매력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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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기계 vs 생각하지 않는 인간 - 일과 나의 미래, 10년 후 나는 누구와 어떻게 일해야 하는가?
홍성원 지음 / 리드리드출판(한국능률협회)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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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와 인간의 대결은 흥미로운 일일까? 궁금하면 ‘생각하는 기계 vs 생각하지 않는 인간’을 읽으면 된다. 사실 답은 명약관화하지 않을까? 점점 생각하지 않는 인간으로 하여금 생각하는 기계에 맞서 이길 수 있도록 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는 산업화를 넘어 놀라운 기계들이 등장하는 시대가 우리에게 기회가 될지 새로운 분열과 고통의 시간이 될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인간은 기계와의 경쟁에서 승리할 것인가? 패배할 것인가? 현재 내가 하는 일의 본질은 무엇이고 미래의 기계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 나의 미래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어떤 능력을 갖춰야 하는가? 생각하는 힘을 위해 우리가 일상에서 준비하고 실천할 것은 무엇인가? 등의 질문이 중요하다. 저자는 이제 책은 내용을 전달하는 도구가 아닌 행간의 의미와 다양한 가치를 생각하게 하는 매개라 말한다.

 

과학자 에드워드 프레드킨은 우주의 탄생, 생명의 출현, 인공지능의 출현을 세 가지 위대한 사건으로 보았다. 인간에게는 인공지능이 구현해내지 못하는 메타인지 능력이 있다.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생각하는 능력을 갖추었다는 의미다.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은 인간과 기계가 벌인 대결의 5라운드다. 사회학자 조지 리치가 만든 말 가운데 맥도날드화가 있다. 이는 사회가 효율성, 측정 가능성, 예측 가능성, 통제성 등에 의해 움직인다는 의미다. 현대는 기계의 인간화가 진행중이다. 지능형 로봇, 휴머노이드, 사이보그, 로봇 사피엔스 등이 등장한 지 오래다.

 

1890년대 말똥 대위기 사건이 런던, 뉴욕 등에서 일어났다. 말은 짐을 나르는데 열 사람 이상의 몫을 하고 속도도 빠르다. 하지만 말은 차지하는 공간과 먹어치우는 식량 문제 말고도 배설물을 양산하는 문제의 주인공이었었다. 그런데 이 난제는 자동차가 만들어짐으로써 해결되었다. 기술이 이긴 것이 아니라 말이 일자리를 빼앗긴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늘날 기계의 발달로 인간이 일자리를 잃는 것을 연상하게 하는 부분이다.

 

저자는 기술은 상상보다 느리다고 말한다. 인공 지능 분야의 대가 토비 월시는 인공 지능의 발달을 4단계로 나누었다. 1단계는 약한 인공 지능, 2단계는 일반 인공 지능, 3단계는 초지능, 4단계는 강력한 인공 지능이다. 저자는 일자리 감소도 없을 것이라 말한다. 저자는 무섭게 변하는 기술 발전에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기보다 낯설지만 새로운 길을 찾는 기쁨을 맛보라고, 가지 않을 수 없고 거부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말한다.

 

이는 당신이 미래의 주인공이 되는 길이라는 것이다. 신기술이란 결국 기존 분야에서 조금 달라지는 것일뿐이라 말한다. 눈에 띄는 말은 감성이 공감을 이끈다는 말이다. 최근 뇌과학 분야에서 강조되는 것이 감성임을 감안하면 타당한 말이다. 공감과 배려는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졌다.

 

현대의 일터에서 요구하는 창의성은 에디슨이나 갈릴레이처럼 세상을 뒤집는 발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늘 아래 새것을 만들어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조직이나 구조 속 창의성의 본질은 무심코 지나간 것을 새롭게 해석하고 새로운 의미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기존의 많은 창의적인 작품에서 공통 패턴을 찾아내고 모방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면 된다.

 

저자는 직관의 의미를 강조한다. 직관이란 본질을 꿰뚫어 큰 그림을 보는 힘의 원천이다. 개인의 감인 직감과 다른 직관은 순간에 발현될 수도 있고 오랜 기간의 숙고 끝에 나올 수도 있다. 호모 파베르는 도구를 다루는 인간을 의미한다. 이 단어를 처음 만든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인간은 도구 외에 자신을 만드는 능력을 가진 존재로 보았다.

 

생각의 힘은 정보의 양에 따른 지식이 아니라 생각을 운용하는 지혜에서 나온다. 지식은 기존 정보에 좌우되고 지혜는 기존 정보들을 새롭고 독창적으로 활용하는 데서 나온다. 어느 정도의 아니 충분한 정보가 필요하지만 그것을 새롭게 배치하고 연결하고 낯설게 바라보는 능력이 관건이다.

 

현대 사회의 패러독스 가운데 하나는 사고와 정보의 패러독스다. 이는 정보량이 늘어날수록 점점 더 사고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생각하는 힘을 단련하기 위해서는 정보를 줄이고 사유 행위를 늘려야 한다. 시대에 맞는 인간으로 거듭 날 필요가 있다. 사고력이 관건이다. 생각에도 근력이 필요하다.(저자는 스마트폰은 유용하지만 그것은 집중력과 사고 능력을 떨어뜨린다고 말한다.) 책에 무한 신뢰를 보내자. 책에는 세상을 바꿀 힘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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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0년, 열하로 간 정조의 사신들 - 대청 외교와 『열하일기』에 얽힌 숨겨진 이야기 서가명강 시리즈 16
구범진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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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과 조선은 사대자소(事大字小) 관계였다.(‘자; 字’에는 자애롭게 보살핀다는 의미가 있다.) 1619년 사르후 전투,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이 있었다. 사르후 전투는 조선이 대명(對明) 전쟁을 선포한 후금을 칠 군사를 파견하라는 명의 압박에 못 이겨 강홍립 군대를 파견한 전투를 말한다. 강홍립은 투항했다. 광해군이 적당히 싸우는 척 하고 돌아오라는 밀지를 내렸다는 말은 전체 파병 수 13000 중 희생자가 8, 9천이니 설득력이 없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실현하지 못한 바람에 불과하다. 파병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정묘호란은 조선이 아닌 조선 서북부의 명군을 공격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저자는 홍타이지의 칭제(稱帝)식에서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를 완강하게 거부한 조선 사신들을 흙탕물을 끼얹은 것이라 표현했다.(32 페이지) 병자호란은 이 흙탕물 사건을 일으킨 조선을 응징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꿇어앉을 궤)

 

고려는 조공 대상을 여러 차례 바꾸었다. 한족이 세운 송나라,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 한족이 세운 명나라,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 등이다. 연천 미산면에 고려 4왕(태조, 현종, 문종, 원종)과 16공신을 모신 숭의전이 있다. 16공신을 모신 곳이 배신청(陪臣廳)이다.(陪; 모실 배) 배신(陪臣)이란 신하를 모셨다는 의미보다 제후의 신하가 천자에 대하여 자기를 일컫는 말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대보단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원병을 파견한 명나라 황제 만력제에 대한 제사를 거행하기 위해 창덕궁 후원에 설치한 제단이다. 저자는 1704년에 세워진 대보단이 보통 조선이 명나라에 대한 사대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상징하는 시설로 여겨지지만 명 황제의 후손이 아닌 조선의 임금이 명 황제의 제사를 모시는 것은 명의 회복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전제로 한 행동이었다고 말한다. 즉 조선이 명나라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과거의 존재로 정리했다는 것이다.

 

1704년은 명나라가 무너진 1644년 이후 60년이 지난 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청나라 6대 황제 건륭제가 재위한 60년은 조선의 영조, 정조 재위기와 거의 겹치는 시기다. 1780년 건륭제는 자신의 칠순 생일(만수절; 萬壽節)을 대경(大慶; 큰 경사)으로 기념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는 수사적 표현이었다. 건륭제는 자신의 생일(음력 8월 13일)을 열하의 피서산장에서 지냈다.

 

당시 가을 사냥은 황제의 연례행사였다. 가을 사냥을 연례행사화한 첫 황제는 강희제였다. 목란위장(무란웨이창)은 사슴 사냥을 가리키는 만주어 muran을 음차한 목란(木蘭)과 관설(官設) 수렵장인 위장(圍場)의 합성어다.(圍는 사냥하다, 포위하다, 에워싸다는 의미다.) 면적은 1만 제곱킬로미터로 경기도 정도의 크기였다. 이 안에 72곳의 사냥터가 있었다.

 

1780년은 정조 재위기였다. 진하(進賀)란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신하가 군주에게 특별히 축하의 뜻을 밝히는 것을 의미한다. 박명원(박지원의 8촌형)이 열하의 건륭제의 칠순 만수절 하례에 참석하게 되었다. 조선의 진하 특사 파견은 건륭제도 기대하지 않았던 이례적 성의 표시였다.(진하 특사 파견은 의무가 아니었다.)

 

베이징이 아니라 열하에서 잔치를 연 것은 천연두와 관련이 있다. 건륭제는 천연두 면역이 없는 몽골 등의 왕공 귀족을 위해 매년말 베이징으로 오는 대신 팔월 중순 자신의 생일에 맞춰 열하로 오게 했다. 진하사, 사은사는 되도록 가까운 종친이나 부마를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다. 적당한 종친을 찾을 수 없었던 정조는 부마 가운데 금성위 박명원, 창성위 황인점을 선택했다.(박명원은 정조의 고모 화평옹주의 남편이었다. 황인점은 영조의 딸 화유옹주의 남편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정조의 고모부였다.)

 

정조는 ’열하일기‘를 꼭 집어 비판했다.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통속적인 글들과 비슷한 문체를 구사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조선 사신단은 외교 사절의 성격만을 띤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대상(隊商)과 다를 바 없었다.(88 페이지)

 

베이징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원래 청나라의 수도는 선양(瀋陽)이었다. 1644년 명나라의 수도 베이징이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 반란군에게 함락되고 숭정제가 자살한 기회를 타 청나라는 베이징을 점령하고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겼다. 이 사건을 청의 입관(入關)이라 한다. 천하제일관이라 불렸던 만리장성 동쪽 끝의 산해관 안쪽으로 들어왔다는 의미다.(68 페이지)

 

압록강을 건너 선양까지는 옛날 거리 단위로 540리에 불과했으나 베이징까지는 무려 2000리가 넘었다.(69 페이지) 원래 박명원 일행이 목적한 곳은 베이징이었다. 박명원 일행이 베이징에 도착하자 베이징 예부에서 이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건륭제는 조선에서 만수절을 축하하는 사신이 도착했으면 곧장 열하로 보냈어야지 왜 그곳에 붙잡아두느냐고 역정을 내면서 당장 열하로 보내라는 명령을 내렸다.(162 페이지)

 

이때 사신들이 베이징을 떠나면서 이 사실을 서울에 장계(狀啓)로 알렸다. 수행 무관 중 몇 명을 뽑아 역관과 함께 사신의 장계를 들고 먼저 귀국하는 사람들을 선래군관(先來軍官)이라 한다.(163 페이지) 저자는 박명원 일행이 베이징을 떠나며 서울로 보낸 장계를 9월 17일 장계라 칭한다.(164 페이지)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박명원의 이 장계는 당일인 9월 17일 서울에 도착했다.(편찬자의 실수다.) 건륭제는 칠순 잔치를 열하에서 벌일 계획을 세우고 박명원 일행이 서울에서 출발할 무렵 이미 베이징을 떠나 줄곧 열하에 머물고 있었다.(161, 162 페이지)

 

청나라는 베이징과 열하 간에 매우 신속하고 효율적인 연락 체계를 운영하고 있었다. 1년에 몇 달씩이나 베이징을 떠나 있었음에도 황제가 정무를 처리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정도였다. 박명원 일행은 금불 사건을 겪었다. 황제의 진노에 따라 허둥지둥 열하에 도착한 박명원 일행은 황제의 명을 칭하는 예부 관원들의 요구를 이기지 못하고 판첸을 만난 자리에서 판첸이 준 금불을 받는다. 판첸 라마라 하는 판첸은 티베트 불교에서 달라이 라마에 버금가는 종교적 권위를 지닌 전생활불(轉生活佛)이다.(251 페이지)

 

황제의 명이라고만 하고 왜 만나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을 듣지 못한 박명원은 모든 것을 황제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박명원은 성균관 유생들의 규탄에 직면했다. 배불(排佛)의 나라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박명원은 황제가 정조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으로 금불을 선사한 것이라 생각했지만 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우연의 산물이었을뿐이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 판첸과의 불상 관련 일을 자세하고 치밀하게 기록(해명)했다. 이 책 곳곳에는 봉불지사(奉佛之使)라는 비난의 표적이 된 박명원을 변호하는 내용이 숨어 있다. 저자는 박지원이 강조한 내용들이 정말 그해 8월 11일에 그가 직접 목도한 바에 근거한 것이었을까?란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박지원이 공식 수행원 신분도 아닌 자제군관의 하나였음을 고려하자. 1780년 이후 3년만인 1783년 정조는 박명원을 동지겸사은사행의 정사로 임명했다. 그러나 박명원은 부담을 느끼고 명령을 거두어줄 것을 요청했다.

 

1790년 정조는 건륭제 팔순 진하(進賀) 특사를 보냈다. 정사는 창성위 황인점, 부사는 서호수였고 박제가도 포함되어 있었다. 1784년 박명원은 영조에게 존호를 올리기 위해 설치된 상호도감의 제조(提調) 중 하나로 임명되었다.

 

’열하일기‘가 문학적으로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참신한 문체의 책이라지만 문학적 감별 능력은 없고 그저 문장의 의미를 파악하기도 벅찬 역사학도의 입장에서는 무엇을 보고 새로운 문체라 하는지 알 모르겠다(152, 153 페이지)고 한 저자는 문학 작품으로서 ’열하일기‘의 가치는 오히려 단순한 여행 견문록에 머물지 않는다고 평하며 다만 ’열하일기‘를 사료로 취급할 때에는 저자의 집필 의도를 염두에 두면서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결론짓는다.(260 페이지) ’열하일기‘에 오류가 있지만 그것은 학자적 양심을 버리면서까지 사실을 왜곡한 것이 아니다.

 

정조는 대청(對淸)외교에 전에 없던 정성을 기울였다. 1780년 정조의 건륭 칠순 진하 외교는 예외적 우연이 아니다. 정조는 사신 파견에 수반되는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누차에 걸쳐 사은사를 특파했다.(275 페이지) 조선과 청은 사대와 자소의 관계를 맺었기에 조선이 성의 표시를 할 때마다 청 또한 그에 상응하는 우대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291 페이지) 건륭제는 1780년 열하를 무대로 칠순 만수절 이벤트를 거행했다.

 

건륭제는 이 자리에 두르베트, 우량하이, 토르구트, 회부의 무슬림 벡, 금천 지역의 토사 등을 참석하게 했다. 이들은 모두 건륭 연간에 이르러 비로소 청에 완전히 복속된 집단이나 지역의 수장들이다. 천자 건륭제에게 이들을 대거 한자리에 모은 칠순연은 자신이 평생 이룬 업적을 상징하는 이벤트였다. 이를 외번필집(外藩畢集)이라 한다. 건륭제는 조선에만 사상 초유의 특은을 베푼다는 혐의가 일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즉 모두에게 골고루 혜택을 베푼다는 일시동인의 원칙을 확고하게 지키는 모양새를 갖추면서 3대 연회의 문호를 외국 사신들에게 개방했다.(325 페이지)

 

저자는 1663년 겨울 청나라에서 파견한 칙사가 서울에 왔을 때 홍문관 수찬 김만균이 칙사 접대 업무를 맡긴 왕(현종)명을 거역한 사건을 이야기한다. 그의 조모는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가 함락될 때 오랑캐에게 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자결한 분이다. 부모가 죽으면 3년상을 치르고 조부모가 죽으면 1년상을 치르는 것처럼 관계가 멀어지면 사의에 입각한 도덕적 의무의 강도도 약해져야 한다는 논리에 따라 김만균은 파직되었으나 후에 주자를 인용하면서 복수오세설을 주장한 송시열로 인해 김만균에 대한 처벌을 주장한 사람이 오히려 파직을 당했다.

 

저자는 영조는 병자호란의 치욕을 겪은 인조의 4대손이지만 정조는 6대손이라는 말을 한다. 굳이 복수오세설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관계가 멀어지면 사의에 입각한 도덕적 의무의 강도도 약해져야 하고 시실 그렇겠지만 김만균의 경우 병자호란으로부터 30년 정도 지난 시점이었고 당사자가 조모였으니 원한을 모두 떨쳐버릴 수 없지 않았을까? 영조는 4대손이고 정조는 6대손이어서 차이가 났다고 보기는 어려운 듯 하다.

 

저자는 1776년 25세의 젊은 나이로 등극한 정조가 마주친 것은 청나라의 전무후무한 성세(盛世)라고 말한다. 시대가 바뀐 것이다. ’열하일기‘를 더 깊이 이해하려는 의도는 물론 정조에 대한 관심 때문에 접한 구범진의 책은 열하일기를 소재로 사대자소, 존주대의 등의 이야기를 들려준 참신한 책이다. 열하일기의 배경을 알 수 있었으니 이제 문제의식을 박지원의 ’연암집‘으로 이어가야 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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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배우는 지질학 1 쉽게 배우는 학문 1
성종규 지음 / 잼난인연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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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반지름은 6,400km다. 이를 저자는 지구 중심까지는 6,400km라고 표현했다. 반면 그것을 알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겨우 10km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그것을 알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 10km라니? 인간은 6,400km인 지구 반지름의 0.15%인 10km 정도를 알아냈을뿐이라 하면 좋을 것을...

 

지각은 암석으로, 암석은 다양한 광물로 이루어졌다. 가장 비중이 큰 산소부터 규소, 알루미늄, 철, 칼슘, 나트륨, 칼륨, 그리고 가장 작은 마그네슘에 이르는 주요 8 원소들이 지각을 이룬다. 1순위인 산소 두 원자와 2순위인 규소 한 원자로만 이루어진 광물이 차돌이라 불리는 석영이고 이 가운데 특징을 가진 결정형으로 보석으로 사용되는 것을 수정이라 한다.

 

저자는 암석, 광물, 지질학을 쉽게 배우는 지름길은 작은 돌 하나라도 천천히 아주 자세히 관찰해 보는 것이라 말한다. 다이아몬드는 ’정복되지 않은(untameable)‘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adamas에서 왔다. 금강석이 들어 있는 암석을 킴벌라이트, 램프로아이트라 한다.

 

다이아몬드는 고압과 고온(1500에서 2000도에 이르는)에 의해 만들어지기에 우리나라에서는 발견하기 매우 어렵다. 암석을 이루는 광물을 조암광물이라 한다. 석영, 정장석, 사장석, 흑운모, 각섬석, 휘석, 감람석 등이 주요 조암광물이다. 화강암, 섬록암, 반려암은 심성암이고 유문암, 안산암, 현무암은 화산암이다.

 

마그마는 특별한 환경에서만 만들어진다. 현무암은 녹색 편암, 각섬암 단계를 거쳐 에클로자이트가 된다. 열점(熱點; hot spot)은 맨틀 내부의 특정 위치에 고정되어 있으며 주위보다 온도가 높아 마그마가 형성되어 화산활동이 일어나는 곳이다.

 

“마그마는 암석의 일부가 녹은 것이다. 녹는 지역의 암석을 감람암이라고 한다.”(33 페이지) 이 문장(두 번째 문장)도 이해하기 어렵다.(내 내공 부족 탓이겠지만...) 설명이 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유동성 마그마가 지층 속에 침입하여 굳는 현상을 관입이라 한다.

 

지하에서 그대로 식는 현무암질 마그마는 반려암이 되고 안산암질 마그마는 섬록암이 되고 유문암질 마그마는 화강암이 된다. 지표로 나와 식는 현무암질 마그마는 현무암이 되고 안산암질 마그마는 안산암이 되고 유문암질 마그마는 유문암이 된다. 유문암질 용암은 현무암질 용암에 비해 점성이 크다.

 

안산암질 용암은 현무암질 용암과 유문암질 용암의 중간 정도의 성질을 갖는다. 그래서 어떤 때는 흘러나오고 어떤 때는 폭발한다. 암석에서 끊어진 것이 어긋나면 단층이라 하고 금만 나 있으면 절리라 한다. 주상절리는 용암이 급하게 식을 때 만들어진다. 주로 현무암에서 나타나지만 유문암이나 안산암에서도 나타난다.

 

하나의 용암이 흘러서 생긴 주상절리의 경우 대개 기둥 모양의 상부와 하부가 자리하고 그 사이에 경사가 져 있으며 기둥 굵기가 기둥 모양의 것에 비해 가는 엔타블러쳐가 있다. 저자는 판이 1년에 약 10cm 움직일 경우 산출되는 초당 0.000003mm라는 지극히 느린 속도가 과연 지진을 일으킬까 묻는다.

 

저자에 의하면 지진은 땅의 순간적인 변형에 의해 생긴다. 단순히 충돌하기 때문에 지진이 발생한다면 지진은 항상 발생해야 한다, 판에 쌓이는 변형력이 한계를 넘을 경우 어느 부위가 깨지거나 뒤틀리며 에너지를 내놓는 현상이 지진이다.

 

바닷물, 나무뿌리 등은 암석의 풍화(암석이 물리적 작용이나 화학적 작용으로 인해 점차 토양으로 변해가는 현상)를 일으키는 대표 요인이다. 풍화에 강한 부분은 침식(깎여나감)이 더디고 약한 부분은 빠르다. 궁금한 것은 흙이 되는 것을 토화(土化)라 하지 않고 왜 풍화(風化)라 했는가, 이다.

 

침식 정도가 다른 것을 차별침식이라 한다. 산 정상에 따로 솟은 바위 덩어리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절리를 따라 나무나 풀이 자라고 풍화가 된다. 풍화된 부분의 흙이 없어지면 크고 둥근 바위가 정상부에 홀로 또는 무더기로 나타난다. 이런 지형을 토르라 한다.

 

벌레가 파먹은 것 같은 구조의 바위를 타포니라고 한다. 강물이나 바닷물은 암석을 침식시킬 수 있고 암석 알갱이를 이동시킬 수 있다. 암석 알갱이는 강이나 바다의 바닥에 퇴적되기도 한다. 모래가 쌓이는 곳은 계속 모래만 쌓이고 석회질 물질이 쌓이는 곳은 석회질 물질만 쌓인다. 계속 쌓이면 위의 퇴적물이 누르는 힘으로 인해 물이 빠져나감에 따라 더욱 단단해진다.

 

물속에 녹아 있던 석영, 방해석, 점토광물, 철 등의 광물질이 퇴적물 알갱이를 붙여주는 접착제 역할을 한다. 이로써 퇴적물은 암석이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바위를 퇴적암이라 한다. 점토암 중 퇴적된 방향으로 납작하고, 납작하게 잘 부서지는 암석을 셰일이라 하고 덩어리진 모습의 점토질 암석을 이암(泥巖)이라 한다.

 

석회질 물질이 퇴적된 것을 석회암이라 한다. 한때 바닥이 갈라진 모습이 드러나는 퇴적 구조를 건열(乾裂)이라 한다. 얕은 물에서 찰랑거리는 물이 만들어낸 퇴적 구조를 연흔(漣痕)이라 한다. 비스듬하고 층리와 비슷해 편의상 사층리(斜層理)라 하고 그렇기에 거짓 위자를 써서 위층리(僞層理)라 한다.

 

자갈, 사암, 이암 등 무거운 것에서 가벼운 것 순서로 쌓인 것을 점이층리(漸移層理)라 한다. 드물게 순서가 반대인 경우도 있다. 과거에 살았던 생물의 유해나 흔적이 돌로 변하거나 돌에 새겨진 것을 화석이라 한다. 과학자들은 화석의 연구를 통해 지구사를 밝힌다.

 

절리(節理), 단층(斷層), 습곡(褶曲)은 암석에 작용한 힘을 기억하고 있다. 한꺼번에 두 방향의 절리가 만들어진 것을 공액(共; conjugate) 절리라 한다.(액은 멍에 액이다.) 스타이롤라이트(stylolite)도 있다. 톱날 같은 구조를 말한다.

 

정단층은 바깥쪽으로 서로 멀어지는 힘이 작용했을 경우 절리면을 따라 한쪽이 벌어지는 형태의 단층이다. 역단층은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미는 힘이 작용했을 경우 절리면을 따라 한쪽이 밀려 올라간 형태의 단층이다. 수직 이동 없이 수평 방향으로 이동이 일어난 단층을 주향이동단층이라 한다. 암석층이 끊어져서 생긴 틈에 암석이 채워진 것을 암맥(dike), 광물이 채워진 것을 광맥(vein)이라 한다.

 

지층이 휜 것을 습곡이라 한다. 온도와 압력의 변화에 견디기 위해 암석도 변한다. 암석을 이루는 광물들이 서로 얽혀 있는 형태가 바뀌거나 더 안정된 광물로 변하거나 원래의 암석의 형태와 조직이 바뀌는 것을 변성작용이라 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바위를 변성암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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