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숨에 읽는 바울 - 바울의 역사와 유산에 관한 소고
존 M. G. 바클레이 지음, 김도현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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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Paul)은 작은 이라는 의미다.(76 페이지) 하지만 그는 기독교 신학에서 참으로 큰 인물이다. 베토벤이 바흐는 시내가 아니라 바다라고 한 것을 연상하게 한다. 음악학자 폴 뒤 부셰는 바흐는 시내가 아니라 동유럽 방언으로 순회음악가라 설명했다.

 

바울은 순회 수공업자였다.(15 페이지) 그뿐 아니라 그는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쉴 새 없이 움직였던 선교사였다.(26 페이지) 바울은 최저 생활을 한 사람이었다.(60 페이지) 존 바클레이의 ‘단숨에 읽는 바울’은 150여 페이지의 분량에 담을 수 있는 핵심적인 내용들을 담은 알찬 책이다.

 

이 책의 독자들은 바울에 대해서뿐 아니라 기독교 일반, 그리고 서양 철학 및 역사를 함께 아우르는 눈을 가질 수 있다. 바울은 그냥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인물이고 단 하나의 그림에 담거나 단 한 가지 방식으로 해석하기에는 너무나 모호한 인물이다.(84 페이지)

 

또한 바울은 대단한 논쟁가였다.(73 페이지) 갈라디아서 연구로 철학 박사가 된, 신약학 교수인 저자는 믿을 만한 일곱 성경을 분석 대상으로 삼아 이야기를 전개해 나갔다. 데살로니가 전서, 고린도 전서, 고린도 후서, 갈라디아서, 빌레몬서, 빌립보서, 로마서다. 이 성경은 모두 바울이 쓴 편지들이다.

 

바울과 관련된 것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편지뿐이다.(31 페이지) 바울의 권위는 의심받기도 했고 자신이 세운 교회에 의해 도전을 받기도 했다.(34 페이지) 동료 신자들 사이에서 바울을 의심하고 싫어하며 반대했던 자들이 적지 않았다.(73 페이지) 물론 저자는 바울의 성격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그의 열정적이고 개성 있는 글솜씨에 매료되곤 한다고 말한다.(46 페이지)

 

모든 역사적 판단은 다툴만한 여지가 있다. 당연히 바울 서신의 저작설에 관한 다툼도 지난 200여년에 걸쳐 학자들간에 꾸준히 있어 왔다. 상황 대응적이었던 바울은 조직신학자라기보다 실천신학자에 가까웠다.(33 페이지) 바울의 편지들은 체계적으로 작성된 논문집이 아니었기 때문에 같은 용어도 각기 다른 문맥에서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91 페이지)

 

그의 편지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전제들을 담고 있어서 그 행간을 해석자들이 메워야 할 때가 있다.(91 페이지)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 운동과 맞닥뜨렸을 때 그는 두 가지 이유에서 격분했다. 이미 로마인들에 의해 십자가형을 당한 하찮은 반역자로 정평이 난 예수에 관한 충격적 주장(부활, 하나님의 아들)과 예수 운동이 비유대인들을 영입하여 그들을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취급한 배경 때문이다.(21 페이지)

 

길리기아 속주의 다소(터키 남동부) 출신인 바울은 유대인 지성인이자 자칭 바리새인이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소요를 일으킨다는 명목하에 로마 당국자들에게 체포되었다.(27 페이지) 바울이 처형당한 것은 60년대 즉 50을 넘긴 나이였을 것이다. 죄목은 반란죄 또는 치안을 어지럽힌 것이다.(28 페이지)

 

‘단숨에 읽는 바울’은 바울의 고투(苦鬪)와 감정들을 알게 하는 책이다. 하지만 로마 문명의 전복이라는 큰 사건의 의미를 알 수 있게 한다는 데에 책의 중요성이 있다. 바울이 활동했던 도시들은 이미 확장세를 타고 있던 로마 제국에 편입되어 있었다.(63 페이지)

 

의외인 점은 바울의 신학은 교육을 받은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 비해 철학적으로 덜 헬레니즘화되었다는 말(51 페이지)이다. 바울의 언어는 여러 철학적인 관점과 조화를 잘 이룰 정도로 적응력이 뛰어나며 구원 및 이에 따른 인간의 자아실현에 관한 그의 이해는 스토아학파, (신) 플라톤주의 혹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헤겔 혹은 실존주의 철학자 등에 의해 다양한 철학적 옷이 입혀졌다.(97, 98 페이지)

 

오독인지 모르나 바울은 양가적이었던 것 같다. 그 자신 미혼이었던 바울은 미혼을 옹호하는 신학적, 실천적 주장을 다양하게 전개했지만 결혼을 반대하거나 부추기지는 않았고(66 페이지) 예수를 못 박아 죽인 이 세대의 통치자들을 폄하하기도 하고 예수를 이 세상의 모든 권력을 능가하는 권력을 지닌 우주의 주님으로 높였으나 로마서를 기록할 때에는 이 세상의 권세에 복종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70 페이지)

 

바울은 자신이 받은 소명은 독립적인 것이라 생각했다.(74 페이지) 바울은 종교를 바꾸지 않았다. 즉 개종하지 않았다.(22, 23 페이지) 바뀐 것은 그의 생각이지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는 바울의 개종 이야기란 말을 한다,(76 페이지)

 

바울의 편지는 이해하기 어렵고, 성경의 지위를 가진 권위 있는 글이고, 해석상 논란의 여지가 많고, 그렇기에 구원 자체가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90 페이지) 바울이 그리스도가 율법의 텔로스가 되신다고 했을 때 그 의미는 무엇일까? 텔로스는 마침을 의미하기도 하고 완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바울은 자신이 역사의 마지막 세대에 살고 있다고 믿었다.(95 페이지) 바울은 죄라는 용어로 위법 행위는 물론 불순한 세력까지 지칭했다.(96 페이지) 저자는 흥미로운 말을 한다. 본문을 해석하는 사람은 모두 각자의 관심사와 정황, 개성을 본문에 투영하는데 심지어는 자신들의 전제들을 본문이 깨뜨려주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그렇다.(98 페이지)

 

오늘날의 바울 해석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다. 그는 로마서 7장에 매료당했다.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한다는 구절이다. 은혜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급진적 해석들은 가능하긴 하지만 필수적인 바울 읽기는 아니었고 성경의 다른 본문들과 상당한 긴장을 초래했다.

 

그가 생을 마감할 시기에 이르러서는 심지어 그를 흠모하던 사람들 중에서도 그가 너무 극단적으로 나아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후대 신학자들은 때로는 그의 일부 극단적인 결론에 대해 자신의 지지를 거두어들이기도 했다.(109, 110 페이지)

 

마르틴 루터가 성경의 권위를 그리스도교의 다른 모든 권위 위에 올려놓았지만 신구약 성경 모두를 해석할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해준 것은 바로 바울의 편지들이었다. 바울의 독신주의 조언을 결혼보다 성적 순결을 우선순위에 놓는 것으로 이해한 오랜 해석 전통에 대항하면서 루터는 자신의 수도승 서약을 파기하고 수녀와 결혼해 여러 명의 자식을 낳았으며 결혼과 가정의 소박함을 향유했다.(119, 120 페이지)

 

루터는 영적 서열 없이 오히려 삶 전체를 신성한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저자는 비록 이론적으로는 개신교의 관점에서 성경 전체를 읽는다곤 하지만 다른 나머지 성경에 비해 바울의 편지들이 기형적으로 우위를 차지했던 것도 사실 부인하기 어렵다고 말한다.(124 페이지)

 

놀라운 사실은 바울이 한 번도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표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자칭 유대인이었다.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당대에 고안된 것이다. 바울의 유산은 서로 엄청나게 다른 해석을 모두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모호하다.(130 페이지)

 

유럽의 반유대주의가 성장한 데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바울에 대한 해석도 신학적 원인 중 하나다, 저자는 바울은 앞으로도 계속 논란이 많은 1세기의 목소리로 남아 있을 것이라 말한다.(137 페이지)

 

저자는 말을 참 잘한다. 가령 바울이 어떤 이들을 매료시킬 수 있다면 또한 그는 급진적인 사회를 추구하는 이들을 실망시킬 수도 있다(143 페이지)는 말을 보라. 아이러니한 것은 바울의 편지들이 18세기에서 19세기 사이에 걸쳐 진행된 노예 문제 논쟁에서 양 진영에 의해 원용되었다는 점이다.(143 페이지)

 

노예제도 옹호자들은 주님이신 예수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범사에 주인에게 복종하라는 말을 인용했고 반대자들은 바울이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면서 그를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고 묘사한 구절을 원용했다.

 

바울은 나름대로 장단점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생각은 우리가 기대하는 바대로 자유, 평등, 관용 등과 같은 가치와 항상 부합하지는 않는다,(150 페이지) 모든 정체성을 그리스도께 속함이라는 숭고하고 유일한 선(善) 아래 두면서 상대화시키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오로지 현재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결과만을 초래한다.

 

저자는 사람들에게 잊히는 것보다 논란의 대상이 되는 편이 훨씬 낫다고 말한다. 바울의 본문들은 충분히 열려 있다. 다시 말하지만 얇은 분량에 핵심적인 내용들을 담아낸 내공과 글 솜씨가 대단하다. 바울에 대한 애정보다 비판적 지지를 하는 데 마음이 갈 것 같다. 물론 애정을 위해 읽은 책이 아니라 비판하기 위해 읽었는데 지지의 마음이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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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 대한 권리 - 도시의 주인은 누구인가 우리시대 리커버
강현수 지음 / 책세상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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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수의 ‘도시에 대한 권리’는 전 세계적으로 진보적 도시 정책의 핵심 의제가 되어 가고 있는 개념인 도시에 대한 권리에 대해 다룬 책이다. 이는 특정 도시 공간을 이용할 권리가 누구에게 있는가를 두고 벌어지는 이해 충돌을 해결할 수 있는 개념이다.

 

1968년 68 운동이 프랑스를 휩쓸던 시기에 (68 운동의 진원지인 낭테르 대학의 교수였던) 앙리 르페브르의 ‘도시에 대한 권리’라는 책에서 처음 제기된 도시에 대한 권리는 도시에 거주하는 주민 누구나 나이, 성별, 계층, 인종, 국적, 종교에 관계 없이 도시가 제공하는 편익을 누릴 권리, 도시 정치와 행정에 참여할 권리, 자신들이 원하는 도시를 스스로 만들 권리에 대한 개념이다.

 

우리에게는 아직 많이 낯선 개념이다. 르페브르는 지금의 사회를 도시사회로 보고 논의를 풀어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촌 대신 도시에 모여 살고 있다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 사람들의 존재 방식, 사고 방식, 행동 방식이 도시적으로 바뀌었고 도시가 아닌 농촌까지도 도시 사회가 되었기에 도시와 농촌의 물리적 구분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르페브르는 마르크스가 규정한 자본주의적 생산력과 생산 관계 사이의 모순이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도시 성장을 통해 극복되었다고 보았다. 르페브르는 1) 도시에서 자본의 이윤을 위해 봉사하는 교환 가치가 사람들의 사회적 필요를 담고 있는 사용 가치를 압도하고 있으며, 2) 거주의 의미가 단순히 거주처의 의미로 축소되고 있으며, 3) 당시 프랑스 사회에는 중요한 도시 문제를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안목이 부족하다고 보았다.

 

르페브르에게 도시는 다양한 도시 거주자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교환가치보다 사용가치와 연관되는 일종의 집합적 작품이었다. 르페브르는 작품은 사용 가치이고 제품은 교환가치로 정의하며 도시를 제대로 활용하는 것 즉 거리와 광장, 건축물, 기념물을 제대로 활용하는 것이 축제라고 보았다.

 

도시에 대한 권리는 도시가 시민들이 서로 만나고 삶을 즐길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객관적 필요에서 비롯된다. 도시 공간을 재산 즉 시장에서 교환될 수 있는 상품으로 보는 개념은 전유의 권리와 대립된다. 전유의 권리란 공간에 접근하고, 공간을 점유하고 사용할 권리, 사람들의 필요에 부합하는 새로운 공간을 창출할 권리를 포함한다.

 

르페브르는 도시에 대한 권리를 통해 도시 생활이 변혁되고 나아가 사회가 변혁되며 시간과 공간도 변혁된다고 보았다. 르페브르는 사람들이 도시 중심부로부터 배제되고 도시 공간이 기능별, 계층별로 격리/ 단절되는 현상을 비판했다.

 

르페브르의 도시에 대한 권리 개념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참여의 권리다. 교환 가치보다 사용가치, 사유 재산권보다 전유의 권리를 강조하는 도시에 대한 권리는 자본주의의 핵심 논리에 대항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진행되는 도시 프로젝트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인정하면서 그 속에서 가능한 개혁을 추진하는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다. 유엔 산하 기구인 유네스코와 유엔 해비타트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운동이 대표적이다.

 

현재 인정받고 있는 도시에 대한 권리는 소수의 정치적, 경제적 엘리트들에게 한정되고 있다. 하비, 퍼셀 등은 르페브르의 도시에 대한 권리가 완전히 실현되려면 사회관계의 근본적 변혁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중요한 점은 도시에 대한 권리는 개인적 권리 즉 자유주의적 권리로 해석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빈곤, 사회적 배제, 도시 폭력을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 점령하라 운동(월가를, 여의도를...)이 도시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지만 지향하는 바는 몇 가지 점에서 겹친다. 점령하라 운동은 도시의 중심부 공간이나 상징 공간을 물리적으로 점령하는 운동이다. 그 운동은 사람들이 함께 토론하며 사회적 이슈에 대한 생각을 나누는 운동이기도 했다.

 

인종, 종교, 성별, 연령, 국적, 문화, 성적 취향 등의 차이로 인해 주류 사회에서 배제되는 개인과 집단들에 대한 권리가 도시에 대한 권리에 포함된다.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가장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은 도시에서 쫓겨나지 않을 권리다.

 

권리란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거나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투쟁을 통해 진화, 발전해온 것이다. 근대적 인권 선언의 효시인 1789년 프랑스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서는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후 다른 나라와의 전쟁을 거치면서 프랑스에서는 인간의 권리 즉 인권이 자국민들 즉 프랑스 국민의 자격을 갖춘, 프랑스 시민권을 부여받은 사람들에게만 보장되었다.

 

같은 국민이라도 빈곤층, 여성 등은 재산이 있는 남성들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받지 못했다. 각 국가에서 모든 국민이 보편적인 시민권을 부여받은 것은 노동운동, 여성운동 등 사회 각 계층의 투쟁이 시작되고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였다. 사적 소유의 권리를 불가침의 권리인 자연권 즉 인권으로 인정함으로써 인권이란 자본을 소유하고 사적 소유의 자유를 추구하는 부르주아의 권리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생각이었다.

 

도시 단위에서 권리 주장이 유용한 것은 왜일까? 인본주의 지리학자 투안(Yi ? Tuan)은 사람들이 공간을 더 잘 알게 되고 공간에 자신의 가치를 부여함에 따라 공간이 장소가 된다고 보았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가치를 부여하는 곳 즉 장소들은 균질하지 않고 각기 다르다. 도시가 강조되는 것은 현대인의 일상생활의 장소가 도시이기 때문이다. 도시는 실천 운동의 장소다.

 

막스 베버가 강조한 것처럼 서양 역사에서 도시의 중요한 특징은 정치적 자율성이다. 유럽의 역사에서 도시가 중세의 봉건적 구조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인간들을 배출한 장소였기 때문에 시민의 의미는 도시 거주자에서 자유와 권리를 가진 주체적 인간으로 변형되었다. 그리고 근대적 의미의 국민국가가 형성되면서 시민이란 말은 근대 국가의 국민을 의미하는 것으로 확장되었다.

 

도시 문제로 발현되지 않는 세계 문제는 별로 없다. 도시는 세계의 문제가 집중되는 장소이자 그 문제가 해결되는 장소다. 여성주의자 아이리스 영은 타인에게 동화되기보다 낯선 사람들을 인정하고 차이에 대해 개방적인 비억압적 도시에서 이상 사회를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세계화 시대에 차이성은 소멸될 우려가 높다. 그래서 장소의 차별성이 경쟁무기가 된다. 세계화 시대에도 특정 장소에 기반을 둔 도시나 지역의 역할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커지고 있다.

 

르페브르가 말한 도시란 물리적 공간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도시적 생활양식을 상징한다. 그가 말한 도시에 대한 권리란 기존 도시에 대한 권리가 아니라 미래 도시에 대한 권리이며 전통적 의미의 도시에 대한 권리가 아니라 도시와 농촌 사이의 게층적 구분이 사라지는 도시 사회에 대한 권리다.

 

도시에 대한 권리가 미래 도시에 대한 권리라는 말은 우리사회의 도시에 대한 권리 억시 현재 존재하는 실정법상의 권리를 넘어서는 새로운 권리를 꿈꾸는 상상력을 요구한다. 르페브르는 도시 거주자들뿐 아니라 도시 이용자들도 도시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좋은 의미이지만 상당히 추상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구체적이고 복잡한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여성주의적 비판, 호모 사케르를 등한시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 등이 제기되지만 도시에 대한 권리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2009년 용산 참사는 유엔이 심각한 인권 침해 사례이기에 하지 말라고 거듭 경고한 강제 철거 관행이 촉발한 참사였다. 저자는 전면 철거 재개발은 인권에 대한 엄청난 침해라고 규정한다.

 

도시에 대한 권리 중 하나가 주민들의 참여권이다. 1989년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시작된 주민 참여 예산 제도는 세계 각지로 급격히 퍼져나갔다. 68 운동 당시 가장 유명했던 구호는 “모든 권력을 상상력에게.”였다.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적 조건 즉 현재의 물질적, 제도적 조건과 각 주체들이 지닌 가능성과 역량을 고려한 상상력은 미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다.

 

정당한 논리나 도덕적 가치가 없는 권리 주장은 기득권층의 특권 주장과 다를 것이 없다. 자이메 레르네르의 도시 침술이 도시에 대한 권리와 부합한다. 큰돈을 들이는 대규모 프로젝트 대신 작은 비용으로 침을 놓듯 작은 변화를 주어 영향을 확산시키는 방식이 도시 침술(urban acupuncture)이다.

 

도시에 대한 권리 주장에 대한 가장 큰 걸림돌은 정당한 권리 주장과 부당한 특권 요구를 명쾌하게 구분할 수 없는 모호한 지점들이 무수히 존재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도시들은 총체적 삶의 터전이 아니라 거주지에 불과하다.

 

제인 제이콥스는 도시는 모든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리고 모든 사람에 의해 만들어질 때만이 모든 이에게 뭔가를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도사에 대한 권리는 인권보다 더 구체적일 수 있다. 내가 도시에 대한 권리에 대해 갖는 관심은 간헐적으로 도시(특히 서울)를 이용하는 사람으로서 갖는 관심이다. 나는 서울이 걷기 좋은 도시, 문화유적이 잘 보존되는 도시, 도시에 대한 권리가 잘 지켜지는 도시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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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몽암(禁夢庵)은 영월읍에 자리한 암자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유배 중이던 단종이 금중(禁中)에 꿈을 꾸고 창건하였으므로 금몽암이라 하고 원당(願堂)으로 삼았다.”고 썼다. 금중이 무엇일까? 한자 사전에는 궁궐 안, 궁중이라 나와 있다. ‘금중에’라는 말은 이상하다. 사전대로 궁궐 안 즉 장소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금중에서라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금중 시절에라고 하든지. 하지만 단종은 유배 중이었으니 당연히 궁궐에 있지 않았다. '금중에서'라는 말도, '금중 시절에'라는 말도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금중에 대한 꿈을 꾸고라 해야 맞다.

 

탁효정의 원당, 조선 왕실의 간절한 기도처‘에 의하면 ’조선불교통사‘에 단종이 왕이었을 때 이름 모를 절에 있는 꿈을 꾼 뒤 영월에 내려와 꿈에서 본 절과 똑같은 절이 있어 매우 놀랐다는 내용이 있다. 지덕암이란 이름의 암자였는데 단종은 그 이름을 궁궐(’금중; 禁中’)에 있을 때 꿈꾼 절이라는 의미에서 금봉사라 고쳤다.

 

*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전화해 시정을 요구했더니 바로 고쳤다. “유배 중이던 단종이 금중(禁中)에 꿈을 꾸고 창건..”이란 말을 “단종이 금중(禁中)에서 꿈을 꾸고 창건..”이라 고친 것이다. 그러나 단종이 왕이었을 때 이름 모를 절에 있는 꿈을 꾼 뒤 영월에 내려와 꿈에서 본 절과 똑같은 절이 있어 매우 놀랐다고 고치면 더욱 좋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아쉽다. 그나저나 고치기 전의 글을 캡쳐해 두지 않았는데 그렇게 빨리 고칠 줄 몰랐다. 의문의 1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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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당, 조선 왕실의 간절한 기도처
탁효정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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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당(願堂)은 무언가를 간절히 발원하는 집을 의미한다. 원당이 있는 사찰을 원당 사찰 또는 원찰(願刹)이라 한다. 왕실의 불교 신앙은 조선 시대 불교가 존속할 수 있는 큰 버팀목이었다. 원당은 유교에서 중시하는 효의 심성을 담은 공간이었으며 왕실의 간절한 소원을 발원하는 곳이었다.

 

저자는 사찰의 역사를 기록해놓은 사지(寺誌)가 믿기 어려운 부분이 많지만 그 이야기 속에서 진짜 역사를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역사학자의 몫이라고 말하고 싶다고 말한다. 왕실을 중심으로 연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유독 왕실 구성원들에 관한 기록만이 다수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부분에서 책의 제목이 ‘원당, 조선 왕실의 간절한 기도처’라는 것이 이해가 된다. 왕실 원당이라고 하지 않은 것이 이해된다는 의미다. 책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졌다. 조선 전기의 원당과 조선 후기의 원당이다, 석왕사(釋王寺)는 조선 왕실 원당의 1번지다. 이 사찰은 이성계가 무학대사를 만난 곳이다.

 

우왕은 미약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최영 딸을 왕비로 맞이했고 정치 기반을 만회하기 위해 요동 정벌이라는 강수를 선택했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단행했다. 당시 무학대사는 토굴에 머물며 이성계의 영달을 축원하는 기도를 올렸다. 신덕왕후 강씨는 방원과 특별히 가까웠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돌아올 당시 볼모로 잡혀 있던 강씨와 방번, 방석 형제를 구출해낸 것도 방원이었다. 강씨는 방원의 사병들을 몰수해 군사권을 약화시킨 데 이어 신권정치를 꿈꾸는 정도전과 손을 잡고 방원의 정치력을 축소시켰다.

 

강씨의 뒤에는 고려의 구 귀족 세력이 포진하고 있었고 정도전의 영향력도 대단해 방원은 별다르게 손을 쓸 수 없었다. 흥천사는 이성계가 세운 사찰이다. 육조거리 끝 지점이었다.(서울시의회 자리) 정릉은 영국 대사관 자리에 있었다. 1차 왕자의 난으로 이성계는 방번, 방석, 이제(李濟; 사위.. 경순공주의 남편) 등을 잃었다.

 

이성계는 홀로 남은 막내딸 경순공주를 살리기 위해 비구니가 되게 했다. 공주의 머리를 깎을 때 태상왕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이제는 한때 이성계를 죽이려던 이인임의 조카다. 이버지는 이인립이다. 이런 집안이 결혼 관계를 맺은 것은 강씨의 주도에 의해서였다.

 

윤이, 이초가 명나라로 가 이인임을 이성계의 아버지라고 거짓으로 아뢰었다. 이색·조민수를 지지했던 윤이, 이초가 이성계 정권을 붕괴시켜달라고 주원장한테 간청했다.) 함흥차사 사건이 있다. 태종의 명으로 박순이 태조를 알현하기 위해 함흥으로 갔다가 태조의 화살을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이지만 이는 실은 신덕왕후의 친척이자 태조의 측근으로 동북면에서 군사를 일으킨 조사의(趙思義)의 난을 조사하기 위해 동북면에 파견되었다가 죽임을 당한 사건이다.

 

태종은 정릉을 성북구 정릉동으로 이장했고 정릉의 석물들을 청계천의 돌다리(광통교)로 만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밟고 지나가게 했다. 선조대에 신덕왕후 복원 논의가 제기되었을 당시 아무도 정릉의 위치를 몰라 곤욕을 치렀다. 신덕왕후가 복권된 것은 현종 10년(1669년) 송시열의 건의에 의해서였다. 내원당은 조선 왕들 중 불교를 가장 싫어했던 태종이 세운 원당이다.

 

태종은 아들 세종에게 자신이 죽으면 절대로 자신 무덤 근처에는 절을 세우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을 정도다. 그런 태종이 창덕궁 안에 신의왕후의 초상화를 모시기 위한 인소전(仁昭殿)을 지으며 부속 불당을 지었다. 어머니 신의왕후 한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였다. 신의왕후는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죽었기에 왕비였던 적이 없었다.

 

태조가 신덕왕후의 막내 아들 방석을 세자로 삼은 것은 조선의 첫 번째 왕비는 신덕왕후이기에 그의 소생이 조선왕조의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로 인해 신의왕후 소생인 정종과 태종은 생모 추숭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신의왕후를 정실부인으로 높이고 신덕왕후를 후첩으로 강등시키면 자연히 자신들은 적자가 되고 방간과 방석은 첩의 자식이 되는 것이었다.

 

태종은 이성계가 살아 있는 한 신덕왕후를 첩으로 만들 수 없었기에 그 보완책으로 생모를 추숭한 것이다. 대자암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산(大慈山)에 있었던 조선 전기의 암자다. 막내 아들 성녕대군의 죽음으로 더 이상 바랄 것도, 버릴 것도 없게 된 원경왕후 민씨가 아들 묘 옆에 지은 암자다.(소헌왕후는 아들 안평대군을 시동생 성녕대군의 양자로 보냈다.

 

후에 수양대군은 안평의 죄목으로 양어머니 창녕 성씨와의 간통을 들었다.) 세종은 재위 초 철두철미한 유교 군주였다. 조선 불교가 결정적 타격을 입은 것은 세종의 36사 정비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세종은 재위 후반부터 불경을 읽기 시작했고 만년에는 노골적으로 불교를 신앙했다.

 

세종이 가장 열심히 읽은 경전은 능엄경이었다. 내불당은 세종이 독재적(?)으로 지은 궁궐 내 사찰이다. 소헌왕후는 원래 왕비로 간택된 여자가 아니었다. 왕과 거리가 먼 충녕대군과 결혼했다가 남편이 덜컥 왕이 되어 왕비가 된 경우다. 세종은 억울하게 죽은 장인 심온을 복권시킬 수 없었지만 아들 문종은 할 수 있었다. 다음 대이기 때문이었다.

 

세조는 청송 심씨 가문 자제들을 특채로 등용해 명분 사대부 집안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했다. 조선 전기에 왕의 후궁들이 머리를 깎을 때마다 대신들이 문제삼으면 왕들은 선왕의 후궁들이 선왕의 명복을 비는데 내가 어찌 왈가왈부하겠는가란 대답을 했다. 인수궁과 자수궁은 조선 후기까지 계속 비구니원으로 남았다. 자수궁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으나 광해군이 재건했다.

 

인수궁은 이방원의 잠저였다. 선왕의 후궁들이 출가하는 유습은 중국에서 유래했다. 영응(永膺) 대군 집안의 원당은 아차산 범굴사가 유일하다. 양주 아차산의 영응대군 묘는 홍릉 터로 낙점이 된 탓에 경기도 시흥시 군장리로 옮겨졌다. 조선 여성들이 남자에게 예속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중반 이후 딸의 재산 상속권이 박탈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조선 전기에 왕실 여성들은 사찰에 가면 장 100대를 친다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에 그녀들에게 족쇄를 채우는 가장 효과적 방법은 승려와 스캔들이 났다고 뒤집어 씌우는 것이었다. 월산대군 부인(의경세자 며느리)은 조카 연산군과 간통한 사이로 알려졌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 연산군이 어의까지 보낼 정도로 중병을 앓던 52세 여성이 임신을 했다는 주장은 매우 의심스럽다. 월산대군 부인 박씨의 임신설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그녀의 친동생 박원종이 중종반정의 핵심 세력이었다는 점이다. 박원종에게 자신의 누나가 연산군을 친아들처럼 키웠다는 사실이나 연산군이 박씨를 극진하게 대우했다는 사실은 반정공신으로서 매우 불리한 요소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자신의 입지를 마련하기 위해 누나가 연산군으로부터 치욕스런 일을 당해 목숨을 끊었다고 각색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론이 학자들 사이에서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더구나 박씨는 불사에 매우 열심이었다. 왕실 여성들의 추문은 좁게 보면 여성과 불교에 대한 마녀사냥이라고 할 수 있지만 넓게 보면 유불(儒佛) 이데올로기가 교체하는 격변기의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단종은 태어난 지 하루만에 생모 현덕왕후 권씨를 잃고, 왕위에 오른 후에는 친어머니 같았던 할머니 혜빈 양씨를 버려야 했다. 단종의 할아버지 세종의 후궁 혜빈은 금성대군과 손을 잡고 수양대군 세력을 계속 견제했다. 혜빈이 유배형을 받던 날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고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2년 후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를 갔다.

 

금몽암(禁夢庵)은 단종의 원당이다.(궁궐 즉 ‘궁금; 宮禁‘에 있을 때 꿈 꾸었던 절이라는 의미.) 금몽암은 태백산 기슭에 자리한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절이다. 앞에서 보면 ㄱ자형 건축물인데 뒤에서 보면 ㄷ자형 건축물이다. 세조 시대는 매우 위험하고 불안한 공포정치기였다.

 

세조의 대표적 불사는 원각사 창건이었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사찰이다. 절 이름이 원각사인 것은 효령대군이 회암사에서 실행한 법회가 원각법회였기 때문이다. 세조의 증손자인 연산군은 원각사를 기생들의 숙소인 연방원으로 만들었다. 동학사의 숙모전(肅慕殿)은 김시습이 사육신과 단종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충신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키기 위해 김시습은 설잠(雪岑)이라는 법명의 스님이 되었고 전국을 방랑하며 수많은 설화와 전설, 아름다운 시를 남겼다. 단종 비 정순왕후와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가 죽은 남편의 명복을 빌거나 속세에 대한 미련이 없어 출가했다는 해석은 매우 단편적이다.

 

이들이 비군가 된 근원적 이유는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왕의 부인으로 또는 왕의 딸로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정순왕후는 홀로 남아 비구니가 되었다.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는 남편 정종을 따라 순천으로 유배를 갔다. 경혜공주는 남편 정종이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능지처참을 당한 후 유복자를 데리고 한양으로 돌아와 비구니가 되었다.

 

선왕의 후궁들은 비구니가 된 이후에도 궁궐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살던 궁을 불당으로 개조해 살았다. 이들은 여전히 내명부 소속이어서 비구니가 되었을지언정 후궁으로서의 지위는 고스란히 유지했다. 이에 비해 남편이 역적으로 몰려 집 안 전체가 몰락한 여성들은 정 업원이라는 사찰로 들어갔다.

 

남편이 대역죄로 귀양 가거나 사사 되면 나머지 가족들도 사형을 당하거나 관노로 전락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정업원 비구니로 출가를 하게 되면 역적의 부인이라 해도 관노로 끌려가지 않았다. 단종 비 정순왕후는 조선시대 왕비들 가운데 유일하게 비구니가 된 인물이다.

 

해주 정씨 고문서 꾸러미에서 발건된 정순왕훙의 분재기에 의하면 정순왕후는 정업원에서 출가한 뒤 은사인 정업원 주지 이씨에게서 물려받은 인창방(창신, 숭인동) 집에서 살았다. 오늘날 정업원 구기비(舊基碑)가 있는 곳이다. 원래 정업원은 창덕궁 인근에 있었다. 연산군이 정업원 비구니들을 모두 쫓아내고 그 일대를 사냥터로 만들었다.

 

인수대비의 냉혹한 지성은 아들을 단단한 군주로 만들었지만 손자를 잔인한 폭군으로 전락시켰다. 인수대비가 창건한 정인사는 현재 남아 있지 않고 절터조차 불분명하다. 덕종과 예종의 능 가까이에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지금의 서오릉 내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연산군은 생모의 죽음을 알고도 10년이 지나서야 끄집어냈다. 폐비의 죽음은 훈척세력을 제거할 좋은 구실이었다. 연산군 시대는 어느 때보다 언론이 발달한 시기였다. 성종이 자신과 세조를 왕으로 만들어준 훈신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재야의 사림들을 대거 중용했으나 말년에 이르러 사림의 발언권은 성종조차 통제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연산군은 폐비를 왕비로 추숭해 제헌(齊獻)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회묘를 회릉으로 승격시키는 한편 능 인근에 위치한 연화사를 능침사찰로 삼았다. 왕권을 견제하는 사림(무오사화)과 훈척(갑자사화) 세력을 몰아낸 연산군은 이후 광적으로 사냥과 여성에 몰두했다. 재위 12년만에 중종반정이 발발함으로써 연산군의 폭정은 끝이 났다.

 

궁궐 내의 암살 요소들은 내명부 손아귀에 있었다. 친모가 대비 자리에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왕의 반대 세력이 궁궐 나인을 매수해 암살을 시도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반면 대비나 대왕대비가 왕의 반대편에 있는 경우 그 확률은 매우 높았고 이런 처지의 왕들이 단명했음은 역사가 증명한다. 태실을 봉안한 사찰에도 원당을 설치했다.

 

임꺽정이 활약한 황해도 지역은 문정왕후의 친정붙이들이 수령으로 파견되어 극심한 가렴주구를 행한 곳이다. 평안도 평성의 안국사는 임란 당시 의주로 도망가던 선조가 잠시 머물렀던 사찰이다. 안성 칠장사는 인목대비가 아들(영창대군)과 아버지(김제남)의 위패를 모신 원당이다. 인조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아버지를 추숭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했다.

 

스스로 왕의 적통으로 탈바꿈하고자 한 것이다. 원종 추숭 문제가 제기되자 조정 신하들은 반대했다. 성리학에서 중요한 것은 혈통보다 종통이었다. 봉릉사(奉陵寺)는 정원군의 묘를 수호하던 고상사를 김포 금정산으로 옮긴 뒤 이름을 바꾼 사찰이다. 봉릉사는 사실 허울뿐인 훈장이었다.

 

봉릉사는 능침사라는 격상된 칭호가 아닌 조포사(造泡寺)로 불렸다. 두부를 만드는 절이라는 의미다. 조선 후기 유학자들이 왕실 원당을 격하해 부른 호칭이다.(두부는 이동이 어려워 왕릉 수호 사찰에서 매번 공급했다.) 인선왕후 장씨는 효종의 정비(正妃)다.

 

시흥 법련사는 인선왕후가 아버지 장유를 위해 지은 원당이다. 안양 삼성산 삼막사는 소현세자빈(민회빈 강씨; 愍懷嬪 姜氏)의 원당이다. 소현세자의 아들 경안군의 원당은 순천 송광사다. 도봉 내원암은 조귀인의 원당이다. 성남 봉국사는 현종이 두 딸(명선공주, 명혜공주)을 위해 지은 원당이다. 각황전은 숙빈 최씨가 자신의 기도처였던 화엄사에 시주해 지은 전각이다,

 

영조는 파주 보광사를 소령원의 수호 사찰로 지정했다. 기로소는 정 2품 이상의 관직을 역임한 70세 이상의 친목 기구로 왕과 함께 연회를 열며 회원간 화친하는 곳이다. 조선 시대에 기로소에 입소한 왕은 태조, 숙종, 영조, 고종 등 넷뿐이다. 기로소에도 원당이 있었다.

 

사도세자를 경종의 궁인들 손에 크게 한 영조의 의도는 자신의 떳떳함을 드러내보이는 데에 있었다. 하지만 소론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사도세자는 열 살 때 아버지 영조에게 경종을 죽였냐고 물었고 영조는 새파랗게 질려 아들에게 독설을 퍼부었다.

 

용주사 호성전은 사도세자의 원당이다. 의빈 성씨는 정조가 유일하게 스스로 선택한 여자였다. 북한산 승가사는 효창원의 조포사다. 효창원은 정조가 의빈 성씨에게서 얻은 아들 문효세자가 묻힌 곳이다. 남양주 내원암은 수빈 박씨의 기도처였다. 수빈 박씨는 순조의 생모다.

 

충남 예산 보덕사는 왕기 서린 명당을 내준 부처님에게 감사함을 표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이 남원군 묘가 바라보이는 언덕에 세운 사찰이다. 여주 대법사는 명성황후 민씨의 어머니 이씨가 부처님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지은 사찰이다. 순정효황후는 대각사의 용성 스님에게 대지월(大地月)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대각사 신도였던 최 상궁과 엄 상궁이 자신들이 모시던 황후를 용성 스님에게 소개한 것이다. 대각사는 최 상궁이 사저를 보시해 조성한 절이다. 옹성 스님의 한글 역경 사업은 왕실 여성들의 보시에 힘입은 결과 이루어졌다. 순정효황후는 용성 스님에게 법명과 계를 받고 비구니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했다. 강릉 백운사에는 순정효황후의 마지막 상궁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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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 - 착한 그림, 선한 화가
공주형 지음 / 예경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공주형의 ‘착한 그림, 선한 화가 박수근’은 박수근이 아내가 된 김복순씨에게 한 청혼을 착한 청혼이라고 표현하는 대목으로부터 시작된다. 공주형은 박수근론으로 박사가 되었고 일간지 신춘문예 미술평론 당선자로 미술평론을 하고 출강하고 있다.

 

박수근 화백은 1965년 52세로 “천국이 가까운 줄 알았는대 멀어, 멀어..”란 말을 유언처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박수근은 경기도 포천 교회 묘지에 묻혔다가 고향 양구로 옮겨졌다. 박수근은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리고 싶어 한 화가였다. 박수근은 미군들에게 초상화를 그려주고 모은 돈으로 어렵게 창신동 집을 마련했다.

 

타계할 때까지 박수근의 그림에서 가장 중요하게 등장한 색은 흰색이었다. 박수근은 미국인 후원자였던 마거릿 밀러(Margaret Miller; 주한 미 대사관 문정관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흰색을 자주 언급했다. 박수근의 그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나무다. 석가에게 보리수가 있었고 뉴턴에게 사과나무가 있었듯 박수근에게는 느릅나무가 있었다.

 

화가를 꿈꾸었지만 어린 수근에게는 마땅한 화구가 없었다. 그래서 수근은 뽕나무 가지를 태워 직접 목탄을 만들기도 했다. 양구 보통학교 언덕에 있던 느릅나무를 보고 박수근은 훌륭한 화가를 꿈꾸었다. 초등학교가 학력의 전부인 박수근은 상심의 나날을 보냈다. 그런 박수근의 상심을 달래준 사람들이 해외의 인물들이었다.

 

밀러 부인은 박수근에게 “서울 화단에서 작가들과 경쟁하는 일이 힘들다는 사정은 알고 있지만 당신이 결국 앞서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낙심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언젠가 유명한 인물이 되리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썼다.

 

박수근은 후에 국전 심사위원이 되어 자신이 국전에서 정실(情實) 인사 때문에 떨어졌음을 알았다. 박수근은 국전 심사를 맡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생존의 전쟁이 시작된 그해 수근은 혜화동에서 화방을 운영하던 이상우의 주선으로 미군 범죄수사대에서 일을 시작했다.

 

수근은 페인트칠하는 노무자 대우를 받고 일했다. 178cm의 키에 건장한 체구를 가진 수근은 부두 노동을 하기도 했다. 이후 수근은 신세계 백화점의 미군 피엑스로 일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 수근은 미군들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렸다. 아내는 박수근에게는 흰쌀로 정성껏 지은 밥을 내놓았지만 나머지 가족들에게는 피난민에게 배급되는 옥수수와 보리쌀로 지은 밥을 내놓았다.

 

박수근이 태어난 1914년은 최초의 근대식 미술교육을 받은 이들이 외국 유학에서 돌아와 서양화를 처음 소개하고 한국 최초의 미술단체인 서화협회가 발족하는 등 서양화가 이 땅에 뿌리 내리던 때였다. 12살 소년 박수근은 밀레(장프랑수아 밀레; 1814 - 1875)의 '만종(1857 - 1859년 사이 그림)'을 본 뒤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했다고 한다.

 

그런데 살바도르 달리(1904 - 1969)는 평화롭고 경건한 분위기의 그림 '만종'이 실은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농민 부부가 눈물의 기도를 올리는 슬프고도 무서운 그림이라고 주장했다. 1932년 만종을 관람하던 한 정신이상자가 갑자기 칼로 그림을 찢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후 미술관에서는 그림 복원작업을 계획하고 그림의 훼손 전 상태를 알기 위해 X선 촬영을 시도했다.

 

그 결과 감자 바구니 아래 관으로 추정되는 작은 나무상자가 그려져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밀레 생존 당시 프랑스는 1840년대의 대기근, 1857년에서 1858년까지 이어진 경제공황 탓에 도심 노동자와 농민들의 삶이 매우 어려웠다.)

 

사람들은 사회주의자로 오해받으면서까지 피폐한 농촌의 모습을 그대로 담으려 했던 밀레가 장례식 장면을 그리려 했지만 사회적 반향을 고려해 감자바구니로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추측했다. 나무관 하나만으로는 그림 전체에 대한 해석을 바꿀 수 없다고 주장하며 새로운 해석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다.

 

1940년대 박수근은 평양에 있었다. 춘천 시절부터 인연을 맺은 미요시(三吉)가 평남도청 사회과장으로 이직하면서 마련해준 일자리 때문이었다. 그즈음 박수근은 흠모하던 이중섭도 만났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대한 관심이 촉발된 것도 그때였다.

 

박수근은 받을 돈을 재촉하지 못하고 남에게 받은 것은 버스표 한 장이라도 꼭 갚았다. 가난한 화가 박수근의 그림 속 주인공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박수근은 생전에 인정받지 못한 화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타계 직전까지 그림을 단 한 점도 팔지 못한 것은 아니다.

 

박수근 그림에 관심을 가진 이들은 외국인들이었다. 마거릿 밀러, 마리아 핸더슨, 실리아 짐머맨 등이 박수근의 후원인들이었다. 박수근 그림은 생전에 이해받지 못했다. 박수근은 “나더러 똑같은 소재만 그린다고 평하는 사람이 있지만 우리의 생활이 그런데 왜 그걸 모두 외면하려 하는가“라고 말했다. 박수근은 소도 그렸다.

 

1957년 박수근은 국전 낙선을 계기로 시작된 음주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반복은 세상과 타협할 줄 몰랐던 수근이 세상의 이해를 구하기 위한 가장 떳떳한 수단이었고 수근이 그리고자 했던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에 다가가기 위한 가장 그다운 방법이었다.

 

수근은 이렇게 청혼했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고는 붓과 팔레트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주시지 않겠습니까?“

 

박수근의 아내는 춘천여고를 졸업한 후 철원무진공사의 직원과 금화군의 수의사에게서 청혼이 들어왔지만 가난한 화가를 택했다. 수근은 종종 예술적 한계에 부딪혔다. 두 살 아래의 이중섭을 존경의 의미를 담아 형이라 불렀다. 수근은 바탕칠도 대충 하지 않았다. 수근이 처음부터 그림에 특유의 마티에르를 표현한 것은 아니었다. 박수근의 바위 질감을 느끼게 하는 화강암의 효과를 나타내는 두꺼운 마티에르는 거칠지만 소박하다.

 

이 화풍의 시작은 박수근이 경주 남산의 자연풍경에 심취되어 화강암 속 마애불과 석탑에서 본인만의 작품 기법을 연구한 후 완성한 일명 ‘화강암 표면 같은 우툴두툴한 질감’의 마티에르'였다.(이코노미톡 뉴스 수록 기사 ‘박수근의 우툴두툴한 마티에르, 알고 보니 경주 마애불과 석탑이 원천’) 고향 양구의 화강암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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