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개의 철학 지도 - 나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인문학적 밑그림
김선희 지음 / 지식너머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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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담론 및 정치사를 철학적 관점으로 조명하는 김선희 교수의 책이다. 여덟 개의 질문에 답을 해나간 책이다. 왜 우리는 유토피아를 꿈꾸는가? 왜 우리는 청년을 이야기하는가? 왜 우리는 고통스러운가? 왜 우리는 웃음을 추구하는가? 왜 우리는 결국 집으로 돌아오는가? 우리에게 우정이란 무엇인가? 왜 인간은 자기 고백을 남기는가? 왜 우리는 공부하는가? 등이다.

 

모두 만만하지 않은 질문들이다. 내게는 왜 인간은 자기 고백을 남기는가? 왜 우리는 공부하는가? 등이 크게 관심을 끈다. 각 챕터에 주요 철학자들의 이름이 거론되어 있다. 가령 왜 우리는 웃음을 추구하는가?에는 헤라클레이토스, 아리스토텔레스, 임마누엘 칸트, 프리드리히 니체, 앙리 베르그송,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 움베르토 에코, 장자, 호이징하 등이 거론되어 있다.

 

유토피아를 다룬 장에서 저자는 유토피아의 유형을 셋으로 나누었다. 천년왕국, 아르카디아, 유토피아 등이다. 유토피아는 섬으로 묘사되는 특징이 있다. 외부와 단절되었다는 점에서 섬이지만 이는 닫힌 공간이기에 디스토피아가 될 수 있다. 저자는 철학적 주제이자 철학적 제안으로서의 유토피아는 과연 과학, 정치, 도덕이 조화를 이룬 세계가 가능한가라는 고전적인 질문 위에서 시작된다고 전제하며 수많은 유토피아가 디스토피아가 되지 않으려면 이 철학적 제안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라 말한다.

 

왜 우리는 청년을 이야기하는가?에서 인상 깊은 부분은 자기를 향유하고 삶의 중심에 자신을 두는 것은 어쩌면 미성숙의 특권, 청춘의 상징과 같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식으로 자기 안에 머무는 것이 전부라면, 그래서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면 그것은 청춘이 아니라 어린아이에 가깝다는 말이다. 자기 안에 머물다가 밖으로 나온 사람은 루소 말대로 제2의 탄생을 이룬 사람이고 성공이 아닌 성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일 것이다.

 

왜 우리는 고통스러운가?에서 우리는 그리스 비극이 극 형식을 의미할뿐 그 자체로 슬프고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접하게 된다. 중요한 사실은 그리스 비극은 거대한 운명, 개인이 뒤엎을 수 없는 커다란 운명과 불완전한 인간의 대결을 다룬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 대결 속에서 발생한 엄청난 고통을 이기고 승리에 도달하는 방법을 다룬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스 비극에서 주인공들은 운명에 의해 망가지는 존재이지만 그 운명에 무작정 끌려가는 존재는 아니다. 저자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말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나는 아파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말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대단히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해석일 수 있지만 우리의 삶은 고통을 견디는 시간과 고통을 잊고 있는 시간, 고통을 보류하는 시간, 그리고 겪은 고통을 해석하는 시간의 묶음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passion이란 단어가 있다. 이 단어는 수난(受難)과 열정(熱情)을 함께 의미한다. 고통은 수난당하는 것이지만 그렇기에 모종의 결단을 촉구하는 듯 하다. 저자는 수전 손택의 ’타인으의 고통‘을 이야기한다. 손택은 카메라를 총에 비유했다. 총의 비유는 카메라가 살아있는 존재를 대상화하고 고통받는 타인을 사물화하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카메라에 담긴 타인의 고통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라 나와 상관없는 하나의 외적인 대상이 된다.

 

저자는 사진에 담긴 고통받는 타자들은 단순히 일회적인 연민의 대상으로 추상화되기 쉽다고 말한다. 고통받는 사람들은 내가 소비하는 일회적 상품이 될 가능성이 높다. 어떤 사람이 프레임에 포착되는 순간 이미 연출되고 조작되고 선별되고 구성된 이미지로 환원된다.(109 페이지) 타인의 고통을 관음하고자 하는 심리의 바탕에는 그 고통에 대한 나의 무관함, 그리고 그 고통에 대해 내가 확보한 안전한 거리가 깔려 있다.(110 페이지)

 

스토아철학자 세네카는 연민이란 원인을 보지 않고 감정적으로 사건을 대하는 태도, 감정적으로 타인을 대하는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원인을 보더라도 연민의 마음은 생길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연민받은 대상은 수치를 느낄 것이다. 저자는 어떤 고통에도 나의 책임이 일부 있을 것이라고 전제하며 고통과 비극이 나의 조건이기도 하며 이를 이겨내고 극복하는 힘 역시 온전히 나에게만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비극과 고통을 바라보는 출발점이어야 할 것이라 말한다.

 

왜 우리는 웃음을 추구하는가?에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웃음을 중요한 철학적 주제로 정의한 것을 알 수 있다. 희극 즉 코메디는 어원적으로 술의 신이자 방랑과 격정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위한 가장행렬(광란의 축제)을 의미하는 데서 온 말이다. 저자는 우리사회에 인신공격과 감정적 손상을 동반하지 않는 웃음이 얼마나 될까요라고 묻는다.

 

저자에 의하면 풍자는 적대자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고 그 대상에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다. 해학은 자기 약점에 대한 부정을 바탕으로 한다. 상대에 대하여 감정이입을 하거나 상대를 연민하면 웃을 수 없다. 웃음의 대상과 감정적으로 연결될 때 우리는 웃음을 거두게 된다. 저자는 불교적으로 느껴지는 말을 한다. 자신에게 닥친 비극마저 드라마의 관객 같은 자리에서 볼 수 있고 그냥 남의 일로 받아들이면 나의 비극은 희극으로 바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나의 삶을 비극적이라 느낀다면 그것은 아마도 남의 삶에 대해서만큼 나에게 거리를 두지 못했기 때문”일지 모른다는 말을 할 수 있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모든 경계를 허물고 근원적 일자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예술로 보았다. 니체는 진정한 그리스 예술은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의 조화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질서 잡힌 체계를 향한 통제의 힘들(대낮의 힘들)이 디오니소스적인 것들에 질서와 빛을 부여한 뒤 진정한 예술성 즉 비극성이 깨졌다고 보았다.(131 페이지)

 

고통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 후의 긍정, 고통을 통과한 이의 명랑성이 진정한 명랑성이라 할 수 있다. 놀이하는 인간을 의미하는 호모 루덴스란 개념이 있다. 호이징하가 한 말이다. 오로지 그 자체의 기쁨을 위해 하는 행위들이 놀이다. 놀이는 그 자체로 자유로워야 하며 일상적 삶과 구분되어야 한다.(137 페이지)

 

놀이는 반복 속에서 새로움을 만드는 생성의 힘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자연의 생성 과정을 우연성이 지배하는 자유로운 전개과정으로 보며 그것을 놀이라 표현했다.(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황금용에 대해 낙타는 순종하고 사자는 반항하지만 어린아이는 그것을 가지고 논다고 본 니체에게 세계는 선과 악을 넘는 신성한 놀이다.

 

왜 우리는 결국 집으로 돌아오는가?에서는 집에 관한 이야기가 다루어졌다. 한국사회에서 집은 개인이 입은 가장 큰 옷이자 물질로 치환된 자아(自我)다.(157 페이지) 저자는 자기 곁에 영원히 머물기를 바라는 바다의 님프 칼립소를 뿌리치고 고향으로 돌아간 오디세우스에 대해 이야기한다. 신화의 세계에서 정주와 이동은 단순히 공간의 변화가 아니라 한 사람의 영혼의 변화, 지적 능력까지 포함하는 영혼 전체의 성숙과 관련된다.(167 페이지)

 

변화 자체가 하나의 질서이지만 이 변화는 무한한 확장이거나 양적 증가가 아니라 매번 국면의 전환으로 나타난다. 도가적 사유에서 순환은 같은 자리를 빙빙 도는 원형적 순환이 아니라 리듬의 전환으로 보아야 한다.(171 페이지) 우주는 기계적으로 작동하지 않기에 인간이 쉽게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변화와 운동에는 근본적으로 질서와 리듬이 있어서 인간은 이를 예측하고 해석해 나쁜 국면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다.

 

그래서 주역은 나쁜 운명을 바꿔줄 신비한 점서가 아니라 부정적 국면을 견디기 위한 예측과 해석을 제공하는 책이다.(173 페이지) 파르메니데스는 변화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개념이라 생각했다. 그에 의하면 변화는 우리의 감각 때문에 생기는 가상(假象)에 불과하다. 이 부분에서 영지주의자들의 가현설(假現說)을 생각할 수 있다.

 

파르메니데스는 모든 것이 계속 변한다면 우리는 그것에 이름을 붙이거나 하나의 이론을 만들 수 없으며 그래서 진정한 사유는 감각에 포착되는 변화가 아니라 오직 이성에서 사유되는 고정 관념뿐이라 여겼다.(175 페이지) 저자는 사람들이 잡 노마드, 21세기 유목민 등의 말에서 밝은 미래를 보는 것 같다고 말한다.(182 페이지) 저자는 어떻게 하면 고착되지 않을 것인가.

 

어떻게 이동의 낭만성을 자각하고 부유를 벗어날 것인가 등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 철학 공부를 하는 이우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우정이란 무엇인가?에서는 우정의 의미가 집중 다루어졌다. 우정은 한 순간에 영혼이 열리면서 시간성을 초월할 수 있는 사랑과 달리 오랜 시간 동안의 관계로 이루어진 시간성의 산물이다.(190 페이지)

 

중요한 사실은 18세기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서 우정론이 유행한 배경이 마테오 리치와 관련 있다는 점이다. 공자는 친구를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것을 진정한 우정이 아니라 생각했다. 공자는 곧은 사람, 성실한 사람, 들은 것이 많은 사람을 이로운 벗으로 보았다. 공자는 서로 성장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아니라면 사귀지 말라고 말한다. 스피노자는 파문당한 후 렌즈를 연마했다. 아는 고급 기술이었다. 비루하고 구차한 삶을 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정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스피노자다. 그는 이성에 따르는 사람을 자유인, 정서나 속견에 이끌리는 사람을 노예인으로 정의했다. 저자는 자유인은 자족적인 존재라면 그런 이에게 공동체란 아무런 의미도 없지 않을까? 라고 묻는다. 스피노자는 자유인은 공동체를 초월하는 존재라 말했다. 자유인의 모든 행동은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파생된다.

 

물론 스피노자는 자유인은 공동체 내부에서 다른 사람들과 우정으로 연결되기에 힘쓴다고도 말했다. 스피노자는 능동적 인간 즉 강한 인격의 사람은 다른 사람을 증오하거나 멸시하거나 조롱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스피노자에게 신은 세계에 내재하는 존재기에 자신과 관련된 우주 만물을 사랑하는 것이 신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왜 인간은 자기 고백을 남기는가?에서는 자화상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자화상은 화가들이 붓으로 쓴 자서전 같은 것이다. 그림은 현재의 사실적 기술이 아니라 화가가 세상과 대면하는 방식, 세상에 드러내고 싶거나 드러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담고 있다.(227 페이지) 저자는 자신을 그리는 행위는 자신에 대해 쓰는 것과 차원이 같은 것이라 말한다. “나는 왜 나를 잊지 않고, 흘려 보내지 못하고 기록하는가?” 근대에 이르러 자신을 자각하게 되었다. 개인이라는 자각이 역사적으로 부상한 이후에 자화상이 나왔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근대적 개인은 성찰하고 계획하는 인간이고 시간적으로 미래를 향해 현재를 기획하는 존재다. 왜 우리는 공부하는가?에서 저자는 우리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이유를 근본에서부터 다시 생각한다. 동아시아에서는 지적 학습만이 아니라 자기를 변화시키는 모든 실천적 노력을 모두 공부라고 한다. 저자는 다양한 지적 전통을 하나로 규정하려는 시도만큼이나 경계해야 할 것이 과학을 유일한 기준으로 보려는 시도라고 말한다.

 

청출어람이란 말이 있다.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남을 의미하지만 실제 맥락은 조금 다르다. 청출어람은 학문의 효과를 말하는 말이다. ’순자‘ 권학편에 나오는 말이다. 순자는 자기를 바꾸는 힘을 학문으로 정의한다. 공자는 다양하게 배우되 마음의 의지나 지향은 단단하고 두텁게 하고 더 나아가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 절실히 탐구하되 이를 일상의 현실적 차원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진정한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공자에게서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신분이 아니라 능력을 통해 세상의 중심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능력은 자신의 책임을 다하면서 타인을 사랑할 줄 아는 도덕적 능력이다. 공자는 능동적이고 도덕적인 주체를 군자라 불렀다. 타고난 신분으로서의 군자가 아니라 자기 이익에만 관심을 갖고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을 내버리는 사람은 소인이라 불렀다.

 

리(理)는 사물의 구성 원리일뿐 아니라 그 자체가 도덕적 가치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신의 본성에 리(理)를 부여받아서 이루어진 존재다. 저자는 성적에만 올인하고 성공을 위해 매진하는 숨막히는 사회에 우려의 시선을 보낸다. ’8개의 철학 지도‘는 철학은 근본적인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작업임을 알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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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와 감리교 전통의 여성들
이정미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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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는 18세기 영국의 가장 탁월한 신학자이자 사회개혁가, 실천적 페미니스트였다. 웨슬리는 감리교부흥운동을 통해 근대 여성 해방운동의 역사적 초석을 마련한 인물이다. 웨슬리는 1787년 10월 멘체스터 감리교 연회에서 공식적인 여성 설교자로서의 출현을 승인했다. 감리교의 여성해방운동은 북미 성결주의 운동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정미의 책 ‘존 웨슬리와 감리교 전통의 여성들’은 감리교 전통의 열 명의 여성을 다룬 책이다. 첫 번째 인물은 감리교의 어머니 수잔나 웨슬리다. 웨슬리는 어머니 수잔나를 통해 여성의 능력에 대한 산 교훈을 얻었다. 수잔나는 아들 웨슬리의 사상 형성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미쳤다. 수잔나는 웨슬리가 감리교인이 되기 오래전부터 이미 감리교인이었다.

 

웨슬리가 감리교 운동 속에서 여성 리더십을 인정하고 공식적인 여성 설교자들을 승인한 것은 어머니 수잔나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여성을 통해 일하신다는 사실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인물은 존 웨슬리의 영적 후원자 셀레나 헤이스팅스다. 웨슬리나 감리교회에 대한 책을 읽을 때 유의해야 할 것은 영국국교회(성공회)와 감리교의 관계다.

 

지난 2017년 보도이지만 영국 감리교와 성공회가 18세기 이후 200년 이상 갈라져온 교회 역사를 통합하는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사실 웨슬리는 성공회 사제였다. 세 번째 인물은 감리교 여성 설교자의 원형인 메리 보산퀫 플레처다. 네 번째 인물은 감리교 최초의 비공식 여성 설교자 사라 크로스비다.

 

다섯 번째 인물은 감리교 운동의 재정적 후원자인 레이디 맥스웰이다. 이 분은 플록의 부유한 남작부인으로서 주일학교의 설립자이며 헌팅턴의 셀레나 백작부인과 함께 웨슬리를 비롯한 많은 감리교 지도자들의 영적 카운슬러였다. 레이디 멕스웰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소속이었다. 그녀가 감리교회에 입회한 것은 1764년으로 이 해에 웨슬리와 레이디 맥스웰이 처음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여섯 번째 인물은 파운데리 신도회의 엘리자베스 리치 몰티모어다. 이 분은 웨슬리와 함께 순회설교여행(itinerant preach trip)을 하면서 자신의 은사를 십분 발휘해 많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게 했다. 일곱 번째 인물은 감리교의 여성 순회설교자 헤스터의 앤 로우 로저스다. 이 분은 이사야 40장 본문(“내 백성을 위로하라“)을 설교를 통해 듣고 감흥을 얻었다.

 

여덟 번째 인물은 공식적인 여성 설교자 사라 말렛이다. 감리교 역사상 처음으로 멘체스터 연회에서 공식적 여성 설교자로서 승인을 받은 인물이 사라 말렛이다. 당시는 여성은 교회 내에서 잠잠하라는 성경(고린도전서 14장 34, 35절)을 근거로 여성들의 설교를 허락하지 않던 시대였다. 1786년 웨슬리가 사라와 면담을 통해 그녀의 소명(하나님으로부터 들은 설교하라는 말씀)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임을 확증했다. 아홉 번째 글은 메리 테프트와 여성 설교자 임명에 관한 감리교회의 반대에 대한 글이다.

 

마지막 열 번째 글은 페베 팔머(Phoebe Palmer; 1807 - 1874)와 성결주의 운동이란 글이다. 페베 팔머는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란 구절(디모데전서 2장 12절)을 이렇게 해석했다. 여성이 가르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금지한 것은 남자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 교회 질서를 거스르는 행위이며 여성이 공중에게 가르치는 것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라고.

 

그러면서 그녀는 만일 바울이 여성의 가르침을 전적으로 금했다면 사도행전 18장 26, 27절이 증거하는 사례 즉 브리스길라가 아볼로에게 예수의 복음을 가르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또한 팔머는 성경의 여성 선지자들 가운데 이스라엘 사사 시대의 드보라와 아론의 누이 미리암, 예언자 훌다 및 초대교회의 신실한 동역자인 유오디아와 신디케 등의 주목할 만한 여성 지도자들의 실례를 들면서 여성 사역에 대한 적극적 지지와 후원을 호소했다.

 

팔머는 성경적 근거에서 설교와 예언은 분리할 수 없는 복음서이며 그런 단서는 오순절 사건의 성령 강림의 역사에 있다고 강조했다. 팔머는 “오순절에 성령의 은사와 권능이 무시될 수 있는 기사입니까? 마가의 다락방에서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그의 제자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에 힘쓸 때 예수의 부활하심을 맨 먼저 증거한 여자 증인들도 그들과 함께 회개하며 탄원의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에 이르기까지 천사의 입술로부터 그러한 계시를 들었고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세상의 만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권한을 위임받은 여자 사도들이 아닙니까?“라고 말했다.

 

팔머가 여성 목회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핵심 성구로 든 구절은 사도행전 2장 3, 4절이다.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팔머는 미국에서 제2차 대각성운동이 전개되는 시기에 여성의 참정권과 금주에 대해 캠페인을 벌인 동역자 프랜시스 우리라드와 함께 노예 해방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마지막 순서로 언급된 페베 팔머는 인상적인 인물이다. 성경 해석에도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한 인물이기도 하다. 페베 팔머는 바로 가부장적인 전통으로 뭉친 교회에서 참으로 의미심장한 구절을 들어 멋진 해석을 해낸 인물이다.

 

두 가지 말을 인용하고자 한다. 모두 하이젠베르크가 한 말이다. ”역사가 가르쳐주는 것은 어느 이론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그 이론이 일관성이 있다거나 명확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론을 더 다듬고 그 진위여부를 가리고자 하는 일에 참여해보겠다는 희망에서인 것이라고 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보자는 바람이며 이것 때문에 우리는 과학의 길을 혼자 더듬어 가는 것이다.“(‘입자, 인간, 자연에 대한 단상’ 16 페이지)라는 말이 그 하나다. 

 

”과학의 역사는 비단 발견과 관찰의 역사뿐만 아니라 개념의 역사이기도 하다.“(같은 책 23 페이지)는 말이 다른하나다. 과학이란 말을 기독교로 바꾸어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성경을 더 다듬고 그 진위여부를 가리는 일이 필요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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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내용 숙지(熟知)를 위해 워밍업 차원의 글을 쓰고 나니 머리가 아프다. 물론 머리가 아픈 것은 생각을 무리하게 이어갔기 때문이다. 어떻든 시급하지 않은 글을 쓴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최근 들은 바에 의하면 아마존에서는 잘 모르면서 질문하지 않고 모른 체 하는 것(자신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는 것, 무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이 가장 어리석은 짓이라고 한다.

 

생각을 정리해야 하는 상황일뿐 무지함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은 아니기에 여유로울 때 정리, 기록해도 되는데 무리했다. 컨디션을 조절하는데 알라딘에 올린 김선희 교수의 ‘서학, 조선 유학이 만난 낯선 거울’ 리뷰에 댓글이 달렸다. “같은 저자의 ˝마테오 리치와 주희, 그리고 정약용˝도 정말 좋습니다 ㅎㅎ” 감사하다.

 

이 말을 듣고 책 서핑을 한다. 내가 읽고 서평을 쓴 김 교수님의 책은 세 권이다. ‘서학, 조선 유학이 만난 낯선 거울’, ‘나를 공부할 시간’, ‘동양 철학 스케치 2’ 등이다. 곧 ‘동양 철학 스케치 1’, ‘8개의 철학 지도’, ‘실實, 세계를 만들다’ 등을 구입할 것이다.(‘마테오 리치와 주희, 그리고 정약용‘은 절판이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허비는 결코 아니다. 곧 가다듬고 준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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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번역가로부터 국내 저서는 번역서에 비해 수준이 떨어진다는 말을 들었다. 공감한다. 독자의 수준이나 문제의식이 높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저자의 역량 부족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많은 우리 저서가 상당 수준의 역량을 보이지만 외국 저서가 보이는 치밀함과 시의적절함과 끈질김에 기반한 깊이 등을 따라가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을까 싶다.

 

내가 눈여겨 보는 것은 일본 저서들의 약진이다. 최근 박문호 박사께서 추천한 두 권의 지구과학 책 가운데 한 권이 가와하타 호다까의 ‘지구 표층 환경의 진화’다. 인상적이라는 평을 듣기에 부족함이 없는 책이라고 한다. 히메노 켄지, 니시자와 타츠오, 세키 노부코 공저의 ‘재미 있는 흙 이야기’는 검색을 통해 알게 된 책이다.

 

이 책에서 눈에 띄는 챕터들은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 등의 지질연대는 어떻게 정해지는가’, ‘달에는 정말 흙이 없을까’, ‘지형학, 지질학, 토양학, 지반공학 등 비슷한 분야가 있는데 차이점은 무엇인가’ 등이다. 지구와 달리 달에 산, 구릉, 평야, 해저 등이 없는 이유를 물과 공기로 인상 깊게 설명한 모쿠다이 구니야스의 ‘그림으로 배우는 지층의 과학’도 주목할 만한 책이다.(설명 자체보다 쉽게 생각하기 어려운 작은 것에 ‘착안; 着眼‘한 안목이 돋보인다 하겠다.)

 

물 즉 수(水)란 말이 나왔으니 이 단어와 짝으로 쓰이는 유(流)란 말도 생각하게 된다. 유(流)는 음미하기 좋은 글자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유수지위물야; 流水之爲物也 불영과불행; 不盈科不行)는 맹자(孟子)의 말이 인상 깊게 다가온다.

 

이 구절에 나오는 과(科)란 말은 과학(科學), 과거(科擧) 등에 쓰이는 말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루, 웅덩이 등 잘 알려지지 않은 뜻도 가지고 있다. 유수지위물야 불영과불행이란 말은 흐르는 물은 앞다투려고 하지 않는다는 유수부쟁선(流水不爭先)이라는 노자(老子)의 말보다 훨씬 자연스럽다.

 

유수부쟁선은 물은 흐르더라도 앞다투려 하지 않는다고 번역해야 한다. 호수처럼 잔잔하게 멈춰 있는 물은 당연히 부동(不動)의 평형 상태 즉 선두를 다투는 경쟁심을 보이지 않지만 흐르는 물도 그렇다는 말이다.(유수부쟁선은 식견이 좁은 말이다. 곧 설명하겠다.)

 

여담이지만 부동의 평형상태라고 하니 양자역학에서 무(無)를, 공간은 존재하지만 질량이 없는 빈 공간으로 정의하는 사실이 떠오른다. 그들은 그래서 진공에서도 순간적으로 에너지가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에 한 기독교인 물리천문학자는 ”그렇다면 공간은 어디에서 기원했는가?“라고 물었다. 어떻든 유수부쟁선이란 말을 거론하는 사람들은 막히면 돌아가는 것까지 물의 미덕으로 거론한다.

 

하지만 나는 이 말에 ‘홍수를 본 적이 있는가?’란 물음을 던지고 싶다. 엄청나게 모여 흐르는 물은 무섭게 서로 앞서려고 경쟁하고 그런 물은 돌아가지 않고 모든 것을 넘어 간다. 물은 때로 엄청난 도약(파도)을 한다. 거품이라 하지만 물은 물이다.

 

이곳 한탄강 지질공원에서는 한탄강을 메우며 흐르던 용암이 임진강으로 역류했다는 말을 한다.(가스통 바슐라르가 술을 불의 물이라고 한 것이 생각난다. 그렇다면 용암은 초고도의 불의 물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역류라는 말은 쉽게 접할 수 있는 말도 아니고 옳은 말도 아니다. 조건이 되면 물은 어디로든 간다.

 

노자가 간과한 것은 앞 다투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잔잔하고 평화로운 물 역시 조건이 되지 않아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진정으로 역류라는 말을 쓰려면 사람이 의도적으로 역방향의 조작을 가했을 때라야 할 것이다. 역류시켰다고.

 

유(流)는 한번 흘러간 물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유배를 뜻한다. 2천 5백리 강진 귀양형에 처해진 정약용은 18년만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3천리 흑산도 귀항형에 처해진 정약전은 그러지 못했다.(강효백 교수 페이스북) 상투적이지 않은 말로 흐름의 비유를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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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조금씩 기독교와 가까워지고 있다. 아현성결교회, 약현성당, 서소문 공원 및 서소문 성지역사박물관, 감리교 신학대학 등이 주요 코스인 서소문 역사 탐방 때문인 것이 첫 번째 이유다. 물리천문학자 우종학 교수의 ‘과학 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을 읽었고 지금은 지질학 박사 이진용 교수의 ‘지질학에서 하나님을 만나다’와 박남희, 이부현 등의 ‘처음 읽는 중세철학’을 읽고 있다.

 

이진용 교수의 책은 ‘과학 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의 문제의식을 잇는 책이라 생각한다. '처음 읽는 중세철학’에서는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서양 중세기에 녹여낸 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정초한 안셀무스, 토마스 아퀴나스, 존 둔스 스코투스 등 기독교와 불가분의 철학자들을 만날 수 있다. 서소문 준비 과정에서는 조선시대 네 차례 가톨릭 박해(신유, 기해, 병오, 병인) 사건을 정리할 수 있었다.

 

김선희 교수의 ‘서학, 조선 유학이 만난 낯선 거울’을 통해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얻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이 반드시 개혁적이거나 반성리학적 혹은 탈주자학적인 것은 아니다‘, ’조선 유학자들 가운데 가장 적극적으로 성리학을 비판한 사람으로 알려진 정약용도 성리학의 토대인 이기론의 이론적 함의와 그 영향력을 제한하고자 한 것이지 주희의 학문 전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었고 성리학의 핵심 주제들과 완전히 다른 이론을 전개한 것도 아니었다‘, ’당시 천주교를 종교적으로 수용한 사람들의 경우에도 유학을 완전히 떠났다고 하기 어렵다‘는 점 등이다.

 

전희준의 ’기독교 교파 한눈에 보기‘도 좋았다. 이 책을 통해서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차이, 미국 북감리교회와 남감리교회의 차이 등에 대해 알았고 베드로와 반석(磐石)에 얽힌 사연(페트로스와 페트라, 헬라어와 아람어의 차이)을 만났다. 다음달 코스에서 이런 문제의식을 이어갈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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