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노트
이상우 지음 / (주)이상미디랩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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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저지른 실수로부터 배워 나가는 매우 고통스러운 방법이 가장 좋은 투자(投資) 방법이다.”..필립 피셔(Philip Fisher; 1907~2004)의 말이다. 워런 버핏이 꼽은 두 스승 중 한 명이다. 성장주 투자의 아버지라고 한다. 훌륭한 기업을 매수해 장기 보유하는 워런 버핏의 전략이 바로 필립 피셔로부터 온 것이다. 유튜브로 주식 강의를 하는 이상우 씨의 책 ‘투자 노트’는 특이한 책이다.

 

이런 생각들을 정리하고 책을 펼치니 다시 필립 피셔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다른 사람의 투자 방식을 그대로 복제한 것이 아니라면 어떤 투자 철학도 하루 아침에, 아니 한두 해 정도의 짧은 시간에 완성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말에 이어지는 말이 “자신이 저지른 실수로부터 배워 나가는 매우 고통스러운 방법이 가장 좋은 투자(投資) 방법이다.”란 말이다.

 

저자는 세상에 잃어도 되는 돈은 없다는 말을 한다. 저자는 지난 18년간 주식시장에 머물면서 놀라울 정도의 수익도 경험해 보았고 마음이 무너지는 실패 역시 경험해 봤지만 언제나 꿋꿋하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되어 준 건 매일매일 손으로 써내려가며 몸에 익힌 투자의 감각과 다져진 훈련이었다고 말한다.

 

하루 10분의 습관으로 투자노트를 기록하고 시장을 점검하는 훈련을 통해 비로소 지속 가능한 투자자의 삶을 살 수 있음을 확신한다고 말한다. 책을 넘기니 2021년을 분기별로 나누고 각 월마다 주요 일정을 정리해 놓았다. 가령 3분기 중 9월은 독일총선이고 9일은 한국 선물, 옵션 동시 만기일이라 적혀 있다. 26일이 독일 총선이니 9월 독일총선이란 말은 그 달의 가장 큰 이슈를 말하는 것일 테다.

 

치밀하고 꼼꼼하게 우리나라뿐 아니라 외국의 정치와 경제 등 이슈를 주식투자, 그리고 노트 작성과 연결짓도록 했음을 알 수 있다. 투자노트 사용설명서도 포함되어 있다. 가장 중요한 지침이 아닐 수 없다. 상한가 분석, 테마정리, 주간/ 월간 리포트 + 유튜브 추천주, 주차별 관심 종목, 시장현황, 뉴스분석, 매매일지 - 매수, 매매일지 - 매도 등의 항목을 볼 수 있다.

 

매매일지는 주식 입문자부터 고수까지 반드시 작성해야 할 기본 중의 기본이다. 거래 데이터는 HTS나 MTS에서 검색 가능하지만 투자원칙과 실수를 점검하는 건 매매일지에서만 가능하다. 마치 수험생의 오답노트처럼 투자 실수를 복기하며 성공 투자의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매매일지의 핵심이다. 매수는 기술, 매매는 예술이라 한다.

 

정확한 매도 근거를 세워야 한다. 매미일지에는 이런 항목들이 포함되어 있다. 종목명, 비중, 승/ 패, 실현 수익, 매수가, 매도가, 목표가, 손절가, 공략 계획, 매수일, 매수가, 매수 근거, 수량, 비고, 대응전략, 매도일, 매도가, 수량, 비고, 매매평가...이 책을 보며 하는 생각은 투자자는 아니지만 주식을 막연히 주먹구구식으로 생각했다는 데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많은 투자자들이 이런 정교하고 구체적인 노트를 작성하지 않으리란 생각이 든다.

 

감(感)에 의존하고 직관에 따라, 기분에 따라 투자를 한다는 생각이 든다는 말이다. 지난 주 한 지인이 내게 주식 투자에 대해 물었다. 의아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서 그가 내가 책을 많이 읽기에 한 질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에게 이 책을 추천해야겠다. 저자의 오답노트라는 말이 가슴에 파문을 일으킨다. 학생시절에도 작성하지 않은 것이 오답노트가 아닌가.

 

맞힌 문제에 집중하는 것은 발전이 없다. 틀린 문제를 다시 틀리지 않게 하는 것이 방법이다. 주식도 같은 원리를 따르리라. 야구 이야기로 투자노트의 가치를 설명할 수 있겠다. 학생 시절 선동열 투수는 야구 일기를 썼다. 가령 컨트롤을 보자. 그에 의하면 컨트롤에는 세 가지가 있다. 1. 몸 균형에서 오는 컨트롤, 2. 볼을 쥐는 그립, 3. 자기 정신의 컨트롤 등이다. 그는 고교 2학년에 야구 십계명도 썼다.

 

야구 노트든 투자 노트든 하나 하나 채워나가는 과정이 핵심이다. 주식을 하지 않지만 투자노트로부터 많은 시사점을 얻었다. 소설가 박태원을 플라뇌르(만보객; 漫步客)으로 볼 수 있다. 그는 대학노트를 옆에 끼고 거리를 걸으며 관찰한 것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만보객은 어슬렁어슬렁 걷는 사람이지만 그의 눈은 매서웠다.

 

호랑이의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의 정황을 살피고 황소의 육중한 걸음걸이처럼 행동한다는 뜻의 호시우행(虎視牛行)이란 말이 떠오른다. 주식 투자는 어떨까? 잘 모르지만 투자노트를 쓰면 자기만의 비결이 캐치되지 않을까? 이상우 저자의 조언에 감사한다. 기록하는 사람, 그러나 꼼꼼히 나아가 의미 있게 기록하는 사람이 이긴다. 거기에 바른 생각이 개재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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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수다는 1) 먹다의 높임말, 2) 제사/ 장례/ 염 따위를 모시어 행하다라는 말. 잡수다를 높이어 부르는 궁궐 표현(임금에게 쓰는)은 젓수다. 낮수라란 말은 한글 플러스 한자어여서 없을 줄 알았는데 있다. 임금의 점심이란 뜻. 젓수다고 그렇고 낮수라도 그렇고 안소영(安素玲) 작가의 ‘갑신년의 세 친구’에서 알게 된 단어들.

 

부친이 안재구 교수님이란 말을 듣고 오래 전 읽었던 교수님의 수학 책 생각을...인간은 “울고, 웃고, 떠들고, 격정적이고, 불안정하고, 고뇌하고, 향락에 빠지고, 도취하고, 분노하고, 사랑하고, 상상 속에 몰입하고, 죽음을 당연시하지 못하고, 신화와 주술(呪術)을 만들어내고, 영혼과 각종 신들을 빙자(憑藉)하고, 환상과 공상 속에서 살고, 착오하고, 방황하고, 무질서를 만들어 내는" 호모 데멘스(광기의 인간)란 말은 에드가 모랭의 말..

 

미하엘 슈미트-살로몬의 ‘어리석은 자에게 권력을 주지 마라’에 호모 데멘스란 말, 광기의 수라란 말이 나옴. 김현경 님의 ‘사람, 장소, 환대’를 한 번 더 읽고 싶다. 김영민 교수(철학자)께서 ”도저한 신앙 양심이 만들어낸 공상“의 윤리학이라 표현한 레비나스 책도 다시 정독하고 싶다. 읽고 싶은 책이 늘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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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로기(初老期) 인지증(認知症; 치매의 순화어/ 대체어)을 앓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정희성 시인의 시 ‘새벽이 오기까지는’을 떠올린다. “새벽이 오기 전에/ 나는 머리를 감아야 한다/ 한탄강 청청한 얼음을 깨서/ 얼음 밑에 흐르는 물을 마시고/ 새벽이 오기 전엔/ 얼음보다 서늘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

 

유신(維新) 정권 말기인 1978년 나온 시다. 저 한탄강은 어느 한탄강을 이르는 말일까? 철원 한탄강인지, 연천 한탄강인지 궁금하다. 얼음 밑에 흐르는 물을 마시고 얼음보다 서늘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비유적으로 쓰인 말이리라. 한탄강이 논의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시인은 “얼음 밑에 흐르는 물을 마시고 얼음 보다 서늘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냉철한 판단력과 기억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점은 마음 또는 정서가 인지(認知)작용이나 지성(知性)의 작용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사실이다.(스피노자로부터 배우는 진실이다.) 서늘한 마음을 지향하든 유연한 마음을 지향하든 자비를 지향하든 늘 성찰하고 지켜보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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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외국군 주둔사 - 웅진도독부에서 주한미군까지
이재범 외 지음 / 중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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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반도에 외국군이 주둔한 역사는 길다. 삼국시기부터였으니. ‘한반도의 외국군 주둔사’는 김창석, 이재범 등 12명의 저자가 쓴 글을 모은 책이다. 목차를 보니 기억이 하나 둘 살아난다. 몽골군(책에는 몽고군이라 표기),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명나라군, 모문룡(毛文龍)군, 정묘/ 병자호란의 청군 등을 거쳐 해방 이후 북한의 소련군과 주한미군까지 참으로 긴 역사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내 관심은 ‘개항기 청군’을 중심으로 펼쳐질 것이다. 이 챕터의 부제는 ‘민씨 척족의 사리사욕이 불러들인 12년 재앙’이다. 갑신정변을 중심으로 서술할 사건 또는 이야기 때문이다. 발간의 변을 듣기 전에 이야기 할 것이 있다. 우리는 피침(被侵)의 역사만을 가지고 있는가?란 물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조선 중심의 서술이어서 아쉽지만 계승범 교수의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를 읽으면 좋을 것이다.

 

각설하고 발간의 말(‘외국군 주둔사를 펴내며‘)에서 편집부는 1906년 일제가 미 8군 기지에 군사 시설을 들이민 이래 용산기지는 1백년 가까이 우리 땅이 되어본 적이 없다는 말을 했다. 근세 들어 이 땅에 외국 군대가 주둔하기 시작한 것은 1882년 6월 임오군란으로 쫓겨난 민비가 권력을 되찾기 위해 청국 군대를 끌어들이면서부터였다.

 

이 책은 외국군 주둔의 역사를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외국군 주둔이 정치나 군사문제뿐 아니라 우리 문화와 풍속에 끼친 영향을 검토하고 외국 주둔군과 이 나라 지배집단 사이의 유착관계를 밝힌 책이다. 또한 이 땅을 거쳐간 수많은 외국군 가운데 상당수는 극소수 지배집단이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애걸해서 불러들인 반민족적 사리사욕의 결과였음을 밝힌 책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대사관 앞에서 해설을 하게 된 나는 중국대사관과 청나라 군대의 연관관계에 초점을 두었다. ’밝혀내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 이 책은 그런 관심사와 무관하게 읽을 만한 책이다. 다행히 이런 기사가 있다.

 

“중국 대사관 자리는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중화민국 대사관으로 쓰이다 1992년 대만과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교를 수립하면서 소유권이 넘어간 것으로 잘 알려졌다. 하지만 이곳은 1882년 이후 중국이 사용해왔다.”(2017년 6월 17일 중앙일보 기사 ‘명동 주둔 청나라 군대의 첫 임무는 대원군 유괴와 납치’)

 

‘발간의 말’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1884년 7월 청국이 베트남 종주권을 둘러싸고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게 되면서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주둔시키고 있던 병력 4천 명 가운데 2천 명을 철수시키려고 하자 당시 민씨 척족정권의 우두머리이던 민영준은 청국 군문을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리며 철군 보류를 애걸했다. 청국 군대가 바로 부패하고 무능한 척족정권을 유지시켜주는 배경이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부분이기에 (많은 부분을 실을 수 없는) ‘발간의 말’에 상세하게 실었을 것이다. 다음 부분을 보자. ”1882년 민비가 청국 군대를 끌어들인 이래 외국군 주둔의 역사는 거의 비슷한 형태로 반복되고 있다.“ 1882년 이전 외국군 주둔의 사례는 있었지만 외국군이 장기간에 걸친 주둔한 것은 1882년 민비가 청국 군대를 끌어들인 것이 계기가 되었으리라.

 

외국군 주둔은 우리 국력이 약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 외세를 대하는 자세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8 페이지) 현재 용산 미군 기지의 반환 협상이 이뤄지고 있다.(2020년 12월 11일 한겨레 신문 기사 ‘주한미군기지 12곳 돌려받는다…‘용산기지 반환’ 본격 개시‘)

 

’한반도의 외국군 주둔사‘는 발간된 지 20년 된 책이다. 최근의 역사가 반영된 개정판이 나오길 기대한다. 다시 각설하고 우리 역사상 이민족의 침입이 가장 극심했던 왕조는 고려였다.(37 페이지) 고려는 몽골에 무릎 꿇었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을 받았을 때는 무신정권기이다. 당시 정권은 무신정권임에도 군사력은 약화되었다. 무신정권 집정자들이 국가의 군사력을 강화하기보다 사병 집단인 도방을 강화하는 데 주력한 탓이다.(38 페이지)

 

이는 앞에서 서술한 사리사욕에 눈이 멀었던 민씨척족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문제(?)는 임진왜란 당시 명군이다. 당시 명군은 우리가 불러들인 군대다. ”침략군으로서 일본군에 의한 피해도 말할 것도 없지만 조선을 구원하러 온 명군 또한 변방의 소국을 위해 피흘려 싸울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106 페이지)

 

명군은 치밀한 계산에 근거해 참전했다. 전쟁 발발 전부터 그러했지만 임란이 진행되어 일본이 승승장구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명 조정은 조선이 일본과 공모. 합세해 자국을 침입하려 한다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107 페이지) 조선 정부는 명에게 조선이 일본의 향도(向導; 길잡이)가 아님을 증명했다. 명의 참전은 그 연후에 결행되었다.

 

얼마 전 조종산(祖宗山)이란 개념을 알았다. 물도 근원지가 있듯 산도 출발지점이 있으니 이를 일러 조종산(祖宗山)이라 한다. 이름과 개념 자체가 조금 다르지만 경기도 가평에 조종암(朝宗巖)이란 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 만절필동(萬折必東) 재조번방(再造藩邦)이라는 선조의 친필이 새겨져 있다. 임진왜란 때 원군(援軍)을 보내준 명나라에 감사하는 뜻으로 쓴 글자로 오랑캐 나라를 다시 세워주셨다는 의미다.

 

이뿐인가. 충북 괴산에는 송시열의 유언을 받들어 세운 신종(神宗; 임진전쟁 당시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 황제)과 의종(毅宗; 명나라 마지막 황제)의 사당인 `만동묘(萬東廟)`가 있다. 각설하고 왕실이 아닌 민간이 주축이 되어 세운 사당이란 점이 특이하다. 이에 자극(?)을 받은 숙종은 명나라 신종을 제향하는 대보단(大報壇)을 세웠다.

 

개항기 청군(淸軍)을 보자. 청나라 군대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배경에는 임오군란을 진압하고 대원군에게서 권력을 되찾으려는 민비와 고종의 의지가 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우리나라에 주둔하기 시작한 청나라 군대는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고 자신들의 이익에 맞게 지배하려는 청나라의 무력 기반이었다.

 

이 군대는 1884년에는 갑신정변마저도 피비린내 나는 유혈진압으로 좌절시킴으로써 우리 내부의 근대적 변혁을 저지하기도 했다.(174 페이지) 임오군란을 피해 장호원으로 피신한 민비가 고종에게 은밀히 편지를 보내 청국에 청병(請兵)하자고 제안하자 고종이 따랐다. 청이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 것은 조선이 요청했기 때문이지만 조선을 둘러싼 일본과의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는 속셈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청나라 마건충은 (임오군란으로 다시 실권을 잡은) 대원군을 만난 자리에서 자신들은 오직 일본인을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다른 뜻은 없다는 거짓말로 대원군을 안심시켰다. 물론 청은 임오군란을 사주한 인물로 대원군을 지목하고 그를 납치할 준비를 세워놓았다.(대원군이 청 군영을 방문하는 것을 불길하게 여겨 만류한 사람은 동래부사를 역임했던 정현덕뿐이었다.)

 

군란 이후 조선에 주둔한 청나라 병력은 군란 때 파병된 3천명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조선 정부는 군란 이후 일본과 체결한 제물포조약(1882년 8월 30일 임오군란의 사후 처리를 위해 조선과 일본 제국 사이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에서 1년이란 한정된 기간이었지만 병력주둔권을 인정했다. 조선에 청군과 일본군이 함께 주둔한 것이다.

 

청과 일본은 조선에서 우월한 지위를 얻기 위해 싸웠고 조선측에서도 이들의 무력을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이용하고자 하는 세력이 나타났다. 개화파도 그런 세력의 하나였다. 1882년 8월 23일 청이 조선에 근대적 식민지배를 강요할 수 있는 규정(속방조항)을 명문화시킨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체결되었다.

 

조선은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로부터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었기에 거부할 수 없었다. 이때 개화파는 청나라와 일본 중 어느 나라를 기축으로 삼아 대외정책을 펼지를 놓고 나뉘었다. 김윤식 등 청의 압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본 사람들이 시무(時務; 온건) 개화파였고 김옥균 등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도 개화정책을 시행하는 데 필요하다면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양 여러 나라와도 제휴할 수 있는 대외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변법(變法; 급진) 개화파였다.

 

이 때문에 1884년 김옥균 등이 일으킨 갑신정변은 반청 운동의 성격도 갖는다. 1884년 1월 한 약국에 인삼을 사러 들어간 청병이 외상값을 지불하라고 독촉하는 주인을 총으로 쏴 중상을 입히고 아들을 사살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당시 한성순보에 중국 병범죄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그러자 청 병영에서 한성순보를 발간하던 박문국에 항의하고 청 정부도 조선 정부에 엄중한 항의서를 보냈다.

 

당시 기사를 취재하고 원고 작성 등의 실무를 맡았던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가 책임을 지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1884년 5월 청 상인이 관련된 이범진(李範晉) 사건이 일어났다. 부동산 문제로 다툼이 일어난 것이다.

 

전 병조판서 이경하(李景夏)의 아들인 이범진은 헤이그 밀사로 파견된 이위종의 아버지다. 당시 조선 주제 청 상무공서가 사건에 개입해 공서에 천자법정이라 써 붙였다. 이를 본 조선 정부는 물론 영국 대리 총영사 애스턴도 항의했다. 조선에서 발생한 사적인 사건을 청 천자의 법정에서 재판한다는 뜻이므로 조선인을 완전히 무시하는 행위였다.

 

김윤식의 회고에 의하면 홍영식은 보빙사로 미국에 다녀온 후 서양의 제도를 흠모하고 청을 오랑캐 보듯 하며 공자와 맹자의 도(道)도 배척했으며 김옥균 등은 일본을 사사건건 흠모하며 입에서 나오는 말이 자주(自主)였다고 하며 청과 잘 지내는 김윤식을 가장 미워했다. 1882년 5월 22일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조선은 이듬해 4월 초대 조선 주재 미국공사 루시어스 푸트가 내한하자 고종의 명에 따라 답례로 미국에 보빙사(報聘使)를 파견한다.

 

최초의 서양 사절단이었다.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등 보빙사 일행은 7월 인천항을 떠나 일본에 들렀다. 일본 정부는 이들을 돕기 위해 미국인 청년 퍼시벌 로웰(1855∼1916)을 고용해 보빙사에 합류시켰다. 로웰은 보빙사와 함께 11월 일본에 돌아온 뒤 12월 조선에 왔다. 홍영식이 로웰이 방미 외교와 산업 시찰 등을 순조롭게 마칠 수 있도록 많이 도와줬다는 별도의 보고를 고종에게 올리자 이에 감사하는 뜻으로 조선 조정이 초청한 것이었다.

 

로웰은 1884년 12월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시사월간지 '애틀랜틱 먼슬리'(Atlantic Monthly)에 사건의 배경과 주도자들을 소개한 ’조선의 쿠데타'(A Korean Coup d'Etat)를 기고했다.

 

그와 가까웠던 홍영식의 죽음에 대해서는 "일본인들의 배신으로 쿠데타가 실패하자 주모자들은 살길을 찾아 일본과 미국으로 도피했으나 홍영식은 혼자 남아서 청나라 군사들에게 체포돼 처형됐다. 용맹스럽고 충직했던 그는 대의를 포기하는 것은 비겁한 행위로 여기고 기꺼이 생명을 바쳤다"고 썼다. 서유견문'의 저자 유길준의 미국 유학을 주선하기도 한 로웰은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책을 썼다.

 

갑신정변은 뒷받침할 무력 부재로 실패한 전형적인 케이스다.

 

주한 미군을 보자. 그들은 우리나라의 외국군 주둔사에서 전례가 없는 기록들을 세웠다. 1) 최장기간(1945년 9월 이후 지금까지), 2) 주둔 규모(상시적으로 4에서 5만 병력 주둔). 3) 전 국토의 미국군 기지화. 4) 우리 동족을 겨냥. 역사적으로 한반도에 주둔한 외국군은 안보의 담보가 아니라 안보의 교란요인이었으며 동북아 지역의 세력 균형자가 아니라 전쟁을 촉발시키는 평화의 파괴자로 기능했다.(37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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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이 평소보다 조금 더 슬프게 들린다. 봄인가 보다. 이상화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듣고 멘델스존 피아노 트리오 1번을 듣는다. 빠른 악장보다 느린 악장이 더 좋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 2악장은 듣지 않는다. 슬픔 모드로의 침잠을 경계하는 차원이다. 어떤 경우든 침잠(沈潛)은 부정적이다.

 

누군가는 봄이 슬픔과 연결된다고 말한다. 염명순 시인은 “봄날엔 모두 하늘로 오른다”고 말했다.(시 ’봄날엔‘) 가볍기 때문이다. 다른 계절은 가볍지 않아 가라앉는데 봄은 날아오르니 사라지는 것이고 그래서 써버리는 것, 흘러가는 것과 관계된다. 이런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니 어떤 경책(警策)이 생각난다.

 

이진경 교수의 ’설법하는 고양이와 부처가 된 로봇‘에 나오는 글이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에 머문다면 우리는 보편 법칙을 얻을 뿐이다. 그것은 보편적이기에 어디에나 적용된다 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느 ’이것‘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내가 새겨야 할 말이다. 봄 이야기 하지 말고 열심히 봄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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