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늙을까, 왜 병들까, 왜 죽을까 - 내 안의 세포 37조 개에서 발견한 노화, 질병 그리고 죽음의 비밀 서가명강 시리즈 38
이현숙 지음 / 21세기북스 / 202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포 주기의 단백질들은 등장할 때와 떠나 없어질 때를 정확히 지킨다. 만일 이 회로를 무시하고 누가 더 나서서 자기 유세를 한다면, 교향악은 듣기 힘든 소리를 내게 될 것이고, 세포에서는 암세포가 되거나 대사 이상을 가진 염증 유발 세포가 되어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만일 면역계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이는 병들고 죽는 원인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포의 항상성을 잘 지키는 세포들만 가진 사람이 계속 이 지구상에 사는 것이 인간 종족에게 유리한 게 아닐까? 찰스 다윈은 우리가 나이 들고 죽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말한다. 왜 이렇게 훌륭한 개인조차 사멸되도록 설계되었을까?              p.16~17


우리가 태어나서 성장하고 늙고 죽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인간은 애초에 그렇게 설계되었다. 의학은 건강한 노년을 잘 유지하도록 도와주는 인류의 발견이며, 과학자는 메커니즘을 규명하여 그를 돕는다. 덕분에 인간의 수명은 점점 늘어났지만, 그럼에도 죽음을 결코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무병장수와 영생은 정말 불가능한 것일까. 여기 그에 대한 궁금증을 모두 해소시켜 줄 책이 있다. 


현직 서울대 교수진의 강의를 엄선한 ‘서가명강(서울대 가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명강의)’ 시리즈 서른 여덟 번째 책이다. 역사, 철학, 과학, 의학, 예술 등 각 분야 최고의 서울대 교수진들이 2017년 여름부터 ‘서가명강’이라는 이름으로 매월 다른 주제의 강의를 펼쳤고 그 현장 책으로 옮긴 것이 바로 이 시리즈다. 이번 책은 '차이나는 클라스, 이슈 Pick! 쌤과 함께' 에 출연해 '노화도 치료가 되나요? 라는 질문에 대해 세포의 관점에서 흥미롭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서울대 생명과학부 이현숙 교수가 쓴 첫 번째 책이다. 이 책은 누구나 극복하고 싶은 '노화'와 '암부터 생체 시계의 비밀이 담긴 '텔로미어 혁명'에 이르기까지 우리 몸속의 비밀들을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우리가 늙고 병드는 이유는 뭘까, 건강하고 오래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에 대해서 고민해 본 적이 있다면 아주 흥미로운 책이 될 것 같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늙는다. 늙는다는 건 과연 무엇인가? 늙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울지도 모르겠다. 기억력이 감퇴하고, 인지 능력이 저하된다. 사람 이름이 잘 생각 안 나고, 피로하고, 주름도 많이 생기고, 면역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병에 잘 걸린다. 키도 작아지고 암 발생률도 증가한다. 이 모든 것을 '노화'라는 하나의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 이렇게 별로 상관이 없을 것 같은 현상들을 동시에 일으키는 노화를 과학적으로는 어떻게 설명할까? '늙는 것이 무엇인가?'를 과학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데이터를 살펴보자. 1961년 미국 위스타 연구소 레너드 헤이플릭의 실험이다.               p.138



개인적으로는 '인간은 오래 살면 반드시 암에 걸린다'는 다소 충격적인 제목의 두 번째 챕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2012년 기준, 전체 사망률의 17%를 차지한 것이 바로 암이라고 한다. 그 중에서 가장 흔한 것이 폐암, 대장암, 위암, 유방암이다. 암이란 악성 종양을 이야기하며, 양성 종양은 암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암은 노화와 연관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는 오래 살수록 암에 걸릴 확률은 올라가게 되어 있다는 것과 같다. 물론 이제는 암이랑 것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할 정도로 두려워할 병은 아니다. 일찍 수술할 수 있는 암들은 우리가 다스릴 수 있는 암이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직 수술이 답이 될 수 없는 암들에 관해서는 연구해야 할 게 많다. 암의 정체, 암의 발생 원인, 항암제의 원리, 현대 과학이 풀어낸 암의 비밀 등 암에 대해 궁금했던 모든 정보들을 만날 수 있는 책이었다. 특히나 '정상 세포가 어떻게 암세포가 되는지', 암세포를 만드는 최초의 사건들에 대한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다.  


저자는 이 책에서 모든 생명의 토대인 세포의 탄생부터 소멸에 이르는 여정을 통해 과연 노화를 통제할 수 있을 것인지, 암은 정복할 수 있는 대상인지, 건강하게 나이 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 준다. 저자의 30여 년간 연구가 집약되어 있지만, 대중의 시선으로 알기 쉽게 들려주고 있어 누구라도 생물학에 대해서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다. 작은 세포 하나에 생로병사의 모든 정보가 담겨 있다는 것도 감탄스럽고, 그 세포로부터 배우게 되는 생명의 경이로움 또한 놀라웠던 시간이었다. 인간은 왜 늙고, 병들고, 죽어야만 하는 것인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홉 명의 목숨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득 캐럴라인은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이건 살해될 사람 명단이야. 누군가가 우리를 죽음의 표적으로 삼은 거야. 저절로 떠오른 생각이었다. 휴대전화가 울릴 때마다 형언할 수 없이 비극적인 소식을 듣게 될 거라는 생각이 저절로 떠오르듯이. 캐럴라인은 명단을 한번 더 읽고는 그렇게 소름 끼치는 망상을 한 자신을 속으로 비웃었다. 이것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명단이라면 당연히 모두가 언젠가는 죽음의 표적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오싹하긴 마찬가지였고, 뮤리얼 스파크의 책 <메멘토 모리>가 떠올랐다. 지금 그녀는 별 의미 없는 명단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p.34


사람을 죽이는 것이 정말 나쁜 것인지. 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해 인간 내면의 악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던 <죽여 마땅한 사람들>의 피터 스완슨이 신작으로 돌아왔다. 속도감 있는 전개와 탄탄한 구성으로 살인에 대한 다양한 질문을 던져온 작가이기에 이번 작품 역시 기대가 되었다.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에서 세상에서 독서를 제일 사랑하는 독서광 주인공을 등장시켜 고전 추리 소설 작품들을 단서로 미스터리를 만들어 냈었는데, 이번에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고전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독창적으로 재해석했다. 


이 작품은 서로 전혀 모르는 아홉 명의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이 포함된 명단을 우편으로 받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금융회사 부사장, 할리우드 배우 지망생, 무명의 싱어송라이터, 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리조트 소유주, 유부남에게 기대어 생활하고 있는 여성, 종양전문 간호사, 작가이자 은퇴한 사업가, 그리고 FBI 요원까지 나이도, 사는 곳도, 배경도 전혀 다른 아홉 명의 사람들은 대부분 명단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로 한 명씩 살해 당하기 시작하고, 경찰은 그 명단이 일종의 살인 예고라는 걸 알게 되고 수사를 시작하지만 전혀 단서가 없었다. 누가 범인인지, 범인의 목적은 무엇인지, 명단에 있는 아홉 명 사이의 연결고리가 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대체 누가, 왜 이런 일을 저지르는 것일까. 왜 하필 이들 아홉 명일까?





샘은 잘 보존된 양장본을 들고 평소 책을 읽을 때 즐겨 앉는 가죽 안락의자로 갔다. 충동적으로 이 양장본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찾아보았다. 인종차별적인 제목이 달렸는데도, 아니면 오히려 그런 제목 때문인지 약 1만 달러나 됐다. 그렇다고 그가 이 책이나 아끼는 다른 책을 팔 생각이 있는 건 아니었다. 샘은 이 책을 다시 읽기로 했는데,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프랭크 홉킨스와 그 명단의 불운한 다른 여덞 명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몰라도 이 소설과 어느 정도 유사했다. 샘은 1장을 펼치고 첫 문장을 읽었다.                p.151~152


피터 스완슨은 데뷔작인 <아낌없이 뺏는 사랑>에서 어려운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던 비밀 가득한 악녀라는 캐릭터를 등장시켜, 누구나 그런 환경에서 같은 선택을 한다면 세상이 얼마나 끔찍해질까라는 걸 보여 줬었다. <죽여 마땅한 사람들>에서 어차피 누구나 한번은 죽게 마련인데 그 시기를 조금 앞당기는 것뿐이라는 살인의 당위성을 굉장히 설득력있게 그려내며, 사람을 죽이는 것이 정말 나쁜 것인지. 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었다. <312호에서는 303호 여자가 보인다>에서는 여성들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집착, 언어폭력, 가스라이팅, 데이트폭력 등 매우 현실적인 공포를 그려 내며 인간 내면에 감추어진 어두운 심연을 들여다 봤다. 살인마의 마음속 깊은 곳을 옆집에 사는 여성의 눈을 통해 들여다본다는 독특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갔던 <그녀는 증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심증만으로 살인자를 쫓는 사립 탐정의 현재와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않은 살인을 저지르고 다니는 희대의 살인자의 과거를 교차 진행시키며 충격적인 이야기를 보여주었던 <살려 마땅한 사람들>등 정말 많은 작품들이 국내에 소개되었고, 사랑받았다. 


이번에 피터 스완슨은 고전적인 플롯에다 자신만의 트릭과 반전을 더해 군더더기 없이 완성도 있는 작품을 탄생시켰다. 이야기가 중반을 넘어설 때까지 대부분의 독자들이 범인에 대해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미스터리를 빈틈없이 직조했고, 후반부의 거듭 되는 반전 또한 강렬한 여운을 남겨 준다. 인간 내면의 악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가답게 피터 스완슨의 작품을 읽고 나면 항상 생각할 거리가 남는 것 같다. 피터 스완슨의 전작들을 재미있게 읽어 왔다면, 이번 작품 또한 절대 실망하지 않을 것같다. 고전 미스터리와 현대 스릴러의 매혹적인 콜라보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녹을 때까지 기다려
오한기 외 지음 / 비채 / 202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음식을 그리워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가리비 무스나 샴페인 젤리 같은 거요."

정민은 잠시 생각했다. 그는 가리비를 먹어본 적이 없었고, 샴페인을 마셔본 적은 있지만 그걸로 젤리를 만든다는 건 몰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샴페인 젤리라는 말을 듣자마자 미나리를 씹고 있던 입 안쪽이 아려오면서 군침이 돌았다.

"그럴 수 있을지도요." 정민이 말했다.               - 한유주, '세계의 절반' 중에서, p.53


어느 날 갑자기 젤리 봉지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면 어떨까. 있잖아, 있잖아...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그렇게 심심풀이로 먹고 있던 곰돌이 모양 젤리들 중에서 어떤 젤리와 눈이 마주친다면 말이다. 아마도 화들짝 놀라서 젤리 봉지를 바닥에 쏟아버리지 않을까. 박소희 작가의 <모든 당신의 젤리>에는 말하는 젤리가 등장한다. 말하는 젤리에 따르면, 젤리는 원래 사람이었다. 췌장암 말기로 46세에 사망한 여성이었다. 죽기 전에 젤리가 되길 선택했기에, 죽기 직전 의식을 복사해서 젤리 사백 개에 똑같이 옮겨지게 된 것이다. 그렇게 젤리들은 각자의 경험에 따라 각기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인간의 경험과 내면을 사물로 옮기고, 그 사물이 움직이기까지 한다는 설정이 어쩐지 귀엽게 느껴졌다. 그렇게 젤라틴으로 된 젤리는 자신의 소원을 하나만 들어달라고 하는데, 과연 젤리의 소원은 뭘까.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에 살고 있는 나는 십 년 만에 서울에 있는 어머니의 집을 찾아온다. 자신이 이십 년을 넘게 산 오래된 집이지만, 근처에 와서는 조금이라도 늦게 들어가고 싶어 미적대는 중이다. 나는 오랜만에 집에 오면서 행운의 상징이라는 슈톨렌을 사가지고 왔다. 집의 구조는 그대로였지만, 어쩐지 낯설게만 느껴지고, 가족들과의 불편한 관계도 변하지 않았다. 나의 방은 에어비앤비로 쓰이고 있었는데, 현재는 손님이 없었음에도 어쩐지 남의 방 앞에 선 기분이 든다. 그들은 독일의 크리스마스 빵인 슈톨렌을 함께 나눠 먹으며 오랜만에 대화를 나눈다. 그 시간은 이들의 관계에 어떤 변화를 줄까? 이지 작가의 <라이프 피버>에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빵인 '슈톨렌'이 등장해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다. 말린 과일과 설탕에 절인 과일껍질, 아몬드, 향신료를 넣고 구운 빵에 버터를 바른 후 슈거파우더를 뿌려 만든 독일식 과일 케이크인 슈톨렌은 럼향 가득 품은 달콤하고 쫄깃한 건과일의 맛과 꾸덕하고 깊은 풍미가 정말 근사하다.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서 만드는 빵이라서 더욱 특별한데, 그렇기 때문에 슈톨렌이 이들 가족에게도 어떤 역할을 하게 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읽었던 작품이다. 





"녹을 때까지 기다리자."

선영은 다시 혀를 내밀고 반짝거리는 사탕을 내밀었다. 

"너도 해봐."

갑작스러운 선영의 권유에 나는 조심스럽게 혀를 내밀었다. 소스라치게 차가운 공기 속에서 침이 말라갔다. 잠시 후 내 혀의 온도에 서서히 사탕이 녹는 것이 느껴졌다. 천천히 단맛과 함께 쌉싸름한 맛이 퍼졌다. 추운 겨울 공기 속에서 더욱더 박하사탕의 화한 맛을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신기하다. 나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감탄했다. 새삼 이상하고 낯선 감각이었다. 모든 게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 장 희원, '박하사탕' 중에서, p.170~171


다섯 명의 작가가 다섯 가지 ‘디저트’를 테마로 완성한 단편소설 앤솔러지이다. 오한기, 한유주, 박소희, 장희원, 이지 작가가 각각 초콜릿, 이스파한, 젤리, 사탕, 슈톨렌을 소재로 쓴 신작을 수록했다. 일부터 맛있는 디저트 가게를 찾아가서 먹어볼 정도로 디저트를 즐기고, 좋아하기 때문에 설레이는 마음으로 읽어 보았다. 사실 디저트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결코 필요불가결한 존재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즐겁고 아름다운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산다는 건 매우 고단한 일이고, 달콤하고 예쁜 디저트는 하루를 버텨낼 수 있도록 도와주곤 하니 말이다. 


오한기 작가는 <민트초코 브라우니>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공부방을 운영하며 건전하고 무해한, 정상적인 소설을 쓰기 위해 애쓰는 소설가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한유주 작가의 <세계의 절반>에는 다른 사람들의 전생을 보게 된 치과의사가 등장하고, 박소희 작가의 <모든 당신의 젤리>에는 죽어서 젤리로 다시 태어난, 말하는 젤리가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기를 부탁한다. 다양한 종류의 디저트만큼이나 형형색색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는 책이었다. 디저트는 배를 채우기보다 마음을 채워주는 음식이다. 책을 읽는 행위 역시 그렇지 않을까. 영혼의 허기를 채워주고, 우리를 지난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게 해주니 말이다. 자, 맛있는 디저트와 함께 책을 읽을 시간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절망과 열정의 시대 - 일제강점기 장르 단편선
곽재식 외 지음 / 구픽 / 202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양쪽은 서로 큰 피해를 입은 척하면서도 서로 상대방이 큰 성과를 내고 있다고 믿도록 맞춰 주고 있었다. 그것은 장기를 두다가 자기가 지면 울고불고 화를 내는 어린애와 탈 없이 놀아 주기 위해서 할아버지가 마지막에 일부러 실수한 척하면서 져 주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 단, 정영재의 정보에 대해서는 양쪽이 모두 화를 내는 어린애면서 동시에 져 주는 할아버지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렇게 오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관여시키며 계속될 수 있었을까?                 - 곽재식, '정직한 첩보원' 중에서, p.27



일제강점기 말기, 지하광복단과 총독부 사이를 오가며 이중스파이 역할을 했던 인물이 있다. 부모는 조선인이지만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정영재는 총독부의 지부장에게는 조선인들의 비밀 조직에 스며들겠다는 목적으로, 지하광복단의 단원들에게는 총독부의 비밀을 알려주겠다는 목적으로 접근한다. 그가 양쪽에서 이야기하는 수려한 언변을 듣다 보면 조선 광복을 위해 싸우는 사람인지, 총독부의 앞잡이인지 헷갈릴 정도로 설득력이 있다. 게다가 그가 주어진 일을 수행하는 방식이 매우 정직하다는 점도 흥미롭다. 지하광복단에는 자신이 총독부 소속이라고 대놓고 말했고, 총독부에는 자신이 지하광복단 사람들과 교류하는 사이라고 대놓고 말한 뒤, 양쪽에서 미끼로 넘길 만한 정보들을 얻어 서로에게 넘기고 있었으니 말이다. 


자, 정영재의 가짜 정직은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양측에서 정영재의 실체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이 나오지만 무사히 위기를 넘기고, 가짜 정보와 가짜 싸움은 더 이어진다. 지하광복단 멤버 중에서 정영재를 수상하다고 여겼던 홍춘화는 의심을 밝힐 증거를 찾아내지만, 정영재는 발뺌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수법에 대해서 그녀에게 아주 세세히 알려준다. 이번에도 그는 '정직'이라는 수단으로 대응한 것이다. 그 결과 홍춘화는 정영재와 같은 편이 되어 행동을 하며 살기로 하고, 정영재의 수법은 훨씬 더 탄탄해진다. 만화같은 설정인데, 이상하게 설득력있는 이야기였다. 짧은 분량이지만 아주 임팩트 있는 작품 <정직한 첩보원>이다. 곽재식 작가에 의하면 실제로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실화를 토대로 쓰인 이야기라고 하니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상상하며 읽으면 더 재미있을 것 같다. 





"누구십니까?"

한여름에도 덥지 않은지 친친 목을 두른 쪽빛 비단 목도리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검은 셔츠와 바지에 군화, 손엔 계절에 맞지 않은 가죽 장갑까지. 딱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사람이 돌아섰다. 노을빛을 가린 몸이 전체적으로 어두웠다. 그러다 맥고 모자 밑으로 드러난 눈을 본 순간 월매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사람이 아니다!'

뒷걸음친 만큼 그것이 다가왔다. 월매는 붉은빛에 드러난 얼굴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 배명은, '호열자 손님' 중에서, p.109


이선의 삶은 혼인 후 그지없이 외롭게 되었다. 시어머니가 도맡아 하는 장사도 잘 되어 있었고, 친정에 살던 때보다 형편도 훨씬 나아졌으나 마음만은 한겨울 구멍이 숭숭 뚫린 창호 문 같았다. 아이가 들어서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는데, 남편은 신혼 때부터 이선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첩도 세 명이나 잇달아 두었고, 장사에도 열심이지 않았고, 가정에도 소홀했던 그는 한겨울에 술을 먹고 결국 노상에서 얼어 죽고 만다. 시어머니는 이선에게 사내 잡아먹은 요망한 년이라고 머리채를 잡고 종로통에 그녀를 패대기 쳐버린다. 그렇게 흠씬 두들겨 맞으면서도 울지 않았던 이선은 외려 등허리가 시원하다고 생각한다. 이후 우연한 계기로 흡혈귀가 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는데, 영원히 늙지 않게 된 대신 즐기지도 않았던 육식을 탐하게 된 이선의 삶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이 이야기는 색다른 공포를 보여주는 최희라 작가의 <푸른 달빛은 혈관을 휘돌아 나가고>이다. 


책과 서점에 관한 SF, 팬데믹 시대의 로맨스, 귀신날 호러, 고전 SF오마주, 판소리 SF, 하드SF, '프롤레타리아 장르 단편 등 다양한 장르소설 앤솔러지를 선보여온 있는 구픽의 앤솔러지 신작이다. 이번에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다섯 명의 소설가들이 쓴 각기 다른 장르의 단편소설 다섯 편을 만날 수 있다. 스릴러, 호러, 로맨스, 판타지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어 새로운 재미를 선사한다. 특히나 이 책의 수익금 일부가 한국해비타트의 독립유공자 후손 주거환경개선사업에 선기부되었다고 하니 더욱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을 통해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를 다양한 시각으로 만나보고, 과거의 역사를 되새겨보는 시간이 되면 좋을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쿄도 동정탑 - 2024년 제170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구단 리에 지음, 김영주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묻지도 않은 것을 멋대로 설명하기 시작하는 맨스플레인 기질이 AI-built의 싫은 점이다. 똑똑하고 공손한 양식을 잘 꾸미는 건 실제로는 치명적인 문맹이라는 결점을 감추기 위함이다. 아무리 학습 능력이 뛰어나도 AI는 자신의 약점을 직시할 힘이 없다. 언어를 무상으로 훔치는 것에 익숙해져 그 무지를 의심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인간이 ‘차별’이라는 단어를 구사하기까지 어디에 사는 누가 어떤 종류의 고통을 겪어왔는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호기심을 가질 수 없다. '알고 싶다'라는 욕망을 품지 않는다.                p.24~25


‘심퍼시 타워 도쿄’, 일명 ‘도쿄도 동정탑’으로 불리는 건물이 세워질 예정이다. 소외와 차별없는 이상적인 사회를 위해 범죄자들에게도 안락한 생활을 제공하고자, 도심 한가운데에 최첨단 교도소를 짓기로 한 것이다. 이 책은 범죄자, 수감자, 비행청소년 등을 가리켜 '동정받아야 할 사람들'이라는 뜻의 ‘호모 미세라빌리스’, 죄를 짓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서 살아온 비범죄자들을 '축복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의 ‘호모 펠릭스’로 정의한다. 한편 타워 건설 프로젝트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연일 항의 시위를 하는 중이다. 


범죄자가 되는 이유를 개인의 인격과 의지박약 등에서 찾는 건 말과 현실이 크게 괴리되어 있다는 쪽도 이해가 되고, 범죄자는 범죄자일뿐, 동정은 피해자에게 해야 한다, 범죄자에게 세금을 쓰지 마라는 쪽도 공감이 된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을 만큼 불행한 성장 과정을 겪었다고 하더라도 모두 범죄자가 되는 것은 아니므로, 범죄자들을 동정해야한다는 의견에 완전히 동의하기는 어려웠지만 말이다. 이야기는 타워의 설계를 맡은 건축가와 그녀의 어린 연인, 범죄자 동정론을 주도하는 사회학자, 새 교도소를 취재하러 온 미국인 기자 각각의 시선을 통해 다각도로 진행된다. 분량에 비해 가독성이 높은 작품은 아니었지만, 과감한 상상력으로 그려진 근미래 도시의 풍경을 통해 우리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름 얘기잖아. 이름은 물질이 아니니까 건물의 구조랑은 상관없지 않아?"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그녀는 신기하다는 듯 나를 쳐다본다. "이름은 물질이 아니지만, 이름은 언어이고 현실은 언제나 언어로부터 시작돼. 정말이야. 이 육상 세계를 움직이는 건 수학이나 물리를 잘하는 인간이 아니라 말을 잘하는 인간이라고. 그래서 나도 꽤 쓰라린 경험을 해왔고. 너는 안 그래? 이건 말이지, 보기보다 훨씬 중대한 문제야..."                 p.83~84


이 작품은 2024년 제170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이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인 구단 리에는 ‘작품 일부에 생성형 AI로 만든 문장을 사용’했다고 밝혔는데, 작중 인물들의 질문에 AI가 답변하는 부분이 해당된다. AI를 활용해 집필한 소설이 문학상을 수상한 것도 이례적인데, 그만큼 독특한 작품이었다. 


찬성파와 반대파의 극심한 대립이 이어지는 가운데, 관계자들에게는 살해 협박까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상 71층짜리 거대한 원기둥 형태의 건물이 신주쿠 도심 한복판에 완공된다. 그리고 타워를 설계한 마키나 사라는 돌연 잠적해버린다. '심퍼시 타워 도쿄'는 도쿄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되었는데, 연민해야 할 현대의 장 발장들을 피상적인 언어만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형태로 동정하고 지원하기 위해 지어졌다고 보도된다. 호화로운 내부 시설에서 마약중독자, 연쇄 살인범, 강간범 등이 행복하고, 편안하게 지내고 있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게다가 탑 안에는 정해진 유니폼이나 죄수복이 없으며, 각자 지급되는 지원금을 사용해 취향에 맞는 옷을 자유롭게 사 입을 수 있다고 하니... 교도소라기보다 호텔같은 느낌이다. 탑 밖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의 세금으로 지불되는 비용을 범죄자들의 행복을 위해 사용해도 되는 걸까 의문도 든다. 인간의 행복에 대해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누리는 세상에 대한 기준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들어준 작품이었다. 독자들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지면서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사유하게 해주는 이 작품을 만나보자. 새로운 소설의 가능성을 만나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추천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