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핀 게이트 1 : 비밀의 숲 그리핀 게이트 1
바시티 하디 지음, 내털리 스밀리 그림, 김선영 옮김 / 다산어린이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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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블루 피터 북 어워드 수상작가 바시티 하디의 그리핀 게이트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그리핀 가족은 모어랜드의 국가 안전을 지키는 수호자들이다. 모어랜드 전역을 보여주는 그리핀 지도는 그리핀 가족이 지도 속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게 하는 수많은 관문을 지니고 있다. 어디선가 문제가 발생하면 그리핀 지도에 표시가 되고, 그리핀 가족은 순간 이동 기술을 이용해 문제가 생긴 모어랜드의 모든 장소로 향한다. 그리핀 지도를 발명한 건 그레이스의 증조할머니인데, 지도가 발명된 뒤로 모어랜드의 범죄율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렇게 그리핀 가문은 지금껏 지도의 수호자로 활동해왔다. 그레이스의 엄마인 앤 그리핀과 이제 열다섯이 된 오빠 브렌 역시 수호자였고, 그레이스는 2년이 더 지나야 혼자 수호자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그레이스는 호빠인 브렌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더니 자신이 더 뛰어난 사람인 양 굴면서 더는 동생과 함께 훈련하려 들지 않는 것이 못마땅했다. 자기방어라면 그레이스도 오빠만큼이나 잘했기 때문이다. 


며칠 뒤, 그레이스와 브렌은 그리핀 지도의 방에 있었다. 엄마는 외출하셨고, 브렌은 초인종이 울려 현관에 나간 사이, 마침 지도 위에서 사파이어처럼 반짝이는 파란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멀리 북쪽의 머드포드라는 작은 마을에서 도움이 필요하다는 호출이었다. 그레이스는 어쩌면 이 기회가 나이 제한이 터무니없는 규칙이란 걸 증명할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도로 달려가 반짝이는 게이트에 손을 가져다 댄다. 




그리핀 가족의 말하는 까마귀인 왓슨과 그레이스는 그렇게 게이트를 넘어 첫 임무를 향해 간다. 담쟁이넝쿠르 원뿔 모양 지붕들, 삐뚤빼뚤한 옛날 건물들이 가득한 그 곳은 동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마을이었다. 마을 광장 너머 '실리아 철물점'이라는 가게 문 앞에서 어떤 여자가 그레이스를 향해 손짓했다. 


"괴물이.... 숲속에 괴물이 있어. 그 괴물이 오늘 낮에 마을을 습격했어. 마을 사람 모두 겁에 질렸어."


몇 주 동안 마을에서 물건들이 없어지고 있어 사람들이 서로를 범인으로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그러다 오늘 낮에 괴물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괴물은 숲속으로 사라졌고, 바로 수호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하필 그레이스가 출동한 것이다. 과연 그레이스는 괴물을 물리치고, 혼자만의 첫 임무를 무사히 해낼 수 있을까. 




공기가 살을 에듯 차갑고, 곳곳에서 흙과 곰팡이의 축축한 냄새가 풍기는 비밀의 숲, 그 속 어딘가에 있을 괴물을 찾아 떠나는 모험이라니...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가 가득한 작품이다. 게다가 기발한 발명품들이 가득하고, 자기 자신을 증명해 보이고픈 당찬 소녀가 주인공이다. 겁이 없고, 용감함으로 똘똘 뭉친데다, 똑똑하기 까지 한 우리의 주인공 그레이스는 예상치 못했던 상황 속에서도 침착하게 위기를 헤쳐 나간다. 


이 작품은 여러 나라에 출간되었고 영국에서 권위 있는 어린이 문학상인 블루 피터 북도 수상했다. 시리즈가 4권까지 출간되어 있으니, 그레이스의 다음번 모험도 곧 만나볼 수 있게 될 것 같아 기대가 된다. 판타지와 모험 이야기야말로 어린이들의 상상력을 키워주고, 조금씩 더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매개체가 아닐까 싶다. 모험심 넘치는 어린이 독자들에게 적극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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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세탁소 - 나쁜 기억을 지워드립니다
하이디 지음, 박주선 옮김 / 북폴리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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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아침에 제가 마지막 남은 원두를 다 썼어요. 그러니 이 캔이 비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커피 향으로 가득 찼다고 말할 수도 있죠. '비었다'라고 해서 꼭 빈 것만은 아니에요. 우리가 생각하는 '여백'도 어쩌면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이미 가득 차 있을 수 있어요."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 '여백'으로 가득 차 있다.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여자는 생각에 잠겼다. 사람들은 늘 눈에 보이고, 들리고, 손에 닿아야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반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정말 '없는' 것일까?                p.49


막다른 골목 안에 위치한 1900년대 초반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가진 세탁소, 사람들은 이곳에 특별히 소중한 것을 맡기곤 했다. 이유는 손님이 가져온 물건이라면 크기나 가격에 상관없이 최대한 깨끗하게 세탁해 돌려주기 때문이다. 성실하고 온화한 표정의 세탁소 주인은 부드러운 이목구비와 동그란 안경 등에서 문학 청년 느낌이 나서 서점 주인에 더 어울려 보이는 인상이다. 실제로 세탁소 한 켠에는 책이 가득 꽂힌 책장이 자리하고 있어 작은 도서관처럼 보이기도 한다. 


고등학교 교복 차림에 긴 머리를 하나로 높이 묶은 소녀가 조심스럽게 세탁소로 들어선다. 등교하기 전에 와야 했기에 시간은 새벽 6시 50분이었다. 소녀는 도톰하고 부드러운 천으로 만든 손수건을 세탁해 달라고 말한다. 보일 듯 말 듯 팥알만한 얼룩이 묻어 있는 손수건이었다. 좋아하는 선배에게 받은 손수건이었는데, '잠시 사귈래?'라는 그의 말에 진지하지 않은 건 아닐까 고민하는 중이었다. 선배의 고백에 설레었지만 그는 올해 졸업이었고, 곧 대학에 진학할 텐데 앞으로의 일을 깊게 생각하지 않고 덥석 사귀어도 되는지 나름 고민이었던 거다. '잠시' 사귀자는 말이 신경 쓰이는 소녀에게 세탁소 사장은 말한다. 인생은 아주 많은 '잠시'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이다. 앞으로의 미래가 어떻게 달라지더라도 계속해서 '눈앞의 현재'에 집중한다면, 매번 한 발짝씩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진지한 얼굴로 대화를 주고 받는 소녀의 고민은 해결될 수 있을까. 




“저 사람 진짜 너무해요. 분명히 샤오루한테 전화로 버리라고 했으면서 왜 그러죠? 어머니의 유품이라면서 왜 애초에 버리라고 했을까요?”

아모도 자책감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사람의 마음은 복잡한 거야. 많은 일이 서로 관련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인과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 때로는 어떤 것을 버리기로 결심했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야. 단지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찾지 못한 것일 수도 있어”.         p.170


첫사랑의 고백으로 고민 중인 10대 소녀의 손수건, 매사에 너무 바쁘고 급한 회사원의 셔츠, 아이를 잃은 엄마의 속싸개, 작가라는 꿈을 이루고 나니 오히려 불안해진 20대 남자의 네모난 손가방 등 세탁소에 도착하는 물품들은 각양각색이지만 모두 문제가 있거나, 고민을 가지고 있다. 세탁소 주인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다정한 위로와 조언을 건넨다. 타인의 생각과 기준에 맞춰 자신의 감정을 고민하는 이에게는 자기 자신에게 충실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고, 앞만 보고 달려가느라 너무 바쁜 이에게는 여백의 의미에 대해서 들려주고, 슬픔에 휩싸여 있는 이에게는 감정과 생각들을 충분히 표현하고 털어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이야기가 있고, 자신만의 어려움이 있다. 극중 세탁소의 역할은 모든 옷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에 있다. 세탁소 사장은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 그들의 구겨진 감정을 펴주고, 찢어진 관계를 이어 붙이며, 묵은 감정을 씻어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옷에 묻은 얼룩을 지우듯이, 나쁜 기억을 지워주는 세탁소라니, 실제로 존재한다면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다. 작가가 심리 상담가로서 상담실에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온 것을 바탕으로 쓰인 소설이라 작품을 읽으면서 치유받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두려움과 실망, 상실감과 자책 등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감정들을 조심스럽게 정화시켜주는 이야기들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펼쳐지는데, 가볍게 읽히면서도 따스한 여운이 남아 온기를 느끼게 해준다. 상처받고, 고단한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힐링 소설이 필요한 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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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 구픽 콤팩트 에세이 6
남유하 지음 / 구픽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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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 소설을 쓰다 보면 사람들에게 듣는 단골 질문이 있다. 바로 "귀신을 믿나요?"라는 질문이다. 나는 유물론자라서 내 눈으로 직접 본 것만 믿는다. 가위에 눌린 적도 있고, 분신사바를 혼자 했을 때 기이한 경험을 하기도 했지만 귀신을 '본'적은 없다. 그리고 가위눌림과 분신사바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과학적인 근거를 찾았기 때문에 그쪽을 더 신봉하는 편이다... 그러므로 귀신을 믿느냐는 질문에 대한 내 답은 "아니오."다. 나는 귀신을 믿지 않는다.                p.54


영화 <파묘>가 한 동안 화제였다. 호러라는 비주류의 장르로는 최초로 천만 관객을 끌어 모았을 정도이니 말이다. 이 작품을 만든 장재현 감독은 <검은 사제들>, <사바하> 등 오컬트, 호러 장르의 영화들을 만들어 오면서 이 장르에 특화된 재능을 선보여왔는데, 이번 <파묘>로 인해 그 정점에 선 것 같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호러를 좋아하는 걸까? 왜 일부러 시간과 비용을 들여 뒷골이 서늘해지고, 소름 끼치는 오싹한 감정을 느끼기 위해서 호러 장르를 소비하는 것일까. 어쩌면 평화롭고 단조로운 일상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는 감정을 경험하고 싶어서, 실제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호러 이야기 속 그것과는 반대로 안전하다는 것을 느끼고 싶어서 등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우리가 무섭고 기이한 것들에 끌리는 것은 본능에 가까운 감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 역시 귀신 들린 집, 오랜 세월에 걸쳐 누적된 저주, 실재하지 않지만 어딘가 진짜 있을 것만 같은 유령, 마음을 휘저어 놓고, 겁에 질리게 만드는 으스스한 이야기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하지만 호러 장르는 호불호가 많이 나뉘는 편이고, 즐기지 않는 이들에게는 어느 정도 진입 장벽이 있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러 장르의 인기 때문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면, 누구나 부담없이 호러 장르를 즐길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책이 바로 여기 있다. 제목처럼 '호러'가 이렇게 재미있는 거였다니, 깨닫게 해주는 가이드라도 봐도 좋을 것 같다. 작가의 경험담부터 풀어내고 있어 에세이처럼 술술 페이지가 넘어 가는데, 읽다 보면 점점 호러의 세계에 푹 빠지게 되는 마성의 책이 아닐까 싶다. 




호러 작가는 고달프다. 독자를 만족시키는 일이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다. 어떤 장르라도 모든 독자의 입맛에 맞추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호러는 ─ 호러 장르의 독자라 하더라도 ─ 작품에 따라 호불호가 심하다. 예를 들어 오컬트 장르를 좋아하면서 고어는 싫어할 수도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호러는 인간의 내면과 가장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장르라서 그렇다. 누구나 저마다의 공포를 품고 있다. 호러 장르 강의에 들어오는 수강생들에게 "당신의 공포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보면 상상을 초월하는 대답들이 나온다.             p.73


구픽의 콤팩트 에세이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 시리즈 여섯 번째 작품이다. 그 동안 SF, 뚝배기, 타로, 옛날 영화, 백합 장르 등의 주제를 다루었는데, 이번에는 '호러'편이다. 호러 마니아이자 다양한 호러와 SF 소설을 발표하며 확고한 장르소설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남유하 작가가 실제 호러 작가로서의 고충을 비롯해 호러의 모든 것에 대해 알려준다. 호러란 무엇인지, 사람들은 왜 괴담을 좋아하는지, 호러에 대한 기본 지식들과 호러 거장들의 삶과 작품에 대해서 정리했다. 러브크래프트, 에드거 앨런 포, 셜리 잭슨, 조이스 캐롤 오츠, 이토 준지, 리처드 매시슨,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 등 작가의 취향이 드러나는 추천작 소개도 흥미롭다. 그리고 호러의 하위 장르, 호러와 타 장르의 결합, 나라별 호러의 특징 등을 호러 영화 작품들과 함께 별도로 부록으로 묶었다. 


마지막에 작가의 미발표 단편인 호러 로맨스 작품 '영화관의 유령'도 수록되어 있어, 호러 종합 선물 세트의 대미를 장식한다. 호러 마니아라면 반가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고, 호러 문외한이라면 호러라는 장르에 대한 호기심이 싹틀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줄 것 같다. 얇고 가볍지만 알짜배기 정보들로 가득한 구픽의 콤팩트 에세이 시리즈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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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 뒤에서
사라 델 주디체 지음, 박재연 옮김 / 바람북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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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말들은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든다.

머릿속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맴돌던 말들인데 말이다.

한번 내뱉어진 단어들이 갖게 되는 돌이킬 수 없는 의미 때문에 소름이 돋았다.           p.40


1937년 프로방스에 살던 유태인 가족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어린이의 눈에 비친 전쟁의 혼란과 고통을 그려 보여주고 있다. 여덟 살 소녀 야엘은 자신의 생일파티에 모인 어른들의 대화를 듣고 엄마에게 물어 보지만, 유태인이 아닌 사람들을 뜻하는 '고이'라는 말이 아빠를 가리키는 비난의 뜻이 된다는 것을 아직은 이해하지 못한다. 이후 몇 달 동안 엄마가 병을 앓고 있을 때 커튼 뒤에서 아빠와 함께 있던 금발의 여성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엄마가 알면 단 된다는 생각을 한다. 이후 엄마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아빠의 재혼으로 새엄마가 생기지만 그녀가 커튼 뒤에 있던 여자와 같은 사람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유태인 엄마와 비유태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야엘에게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 투성이였다. 새엄마의 능숙하고 친절한 엄마 노릇이 너무 힘들었고, 엄마 생각이 나서 괴로웠다. 그래서 틈만 날때마다 새엄마로부터 도망다니고, 골탕 먹이고, 말썽을 부리기도 하지만 새엄마는 아이들이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을 한번도 눈치채지 못한다. 야엘은 새엄마가 어딘가 좀 모자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그만큼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어른이었던 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히틀러라는 남자에 대해 모든 어른들이 이야기하고, 군부대로 소집된 오백만 명의 남자들과 함께 아빠도 치과 의사 가운 대신 군복을 입고 전선으로 가게 된다. 아빠가 떠나고 난 뒤 매일 밤 라디오 뉴스에 귀를 기울였고, 독일군이 진경하고, 프랑스군이 공격을 개시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렇게 전쟁이라는 일상을 겪으며 어린 소녀는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죽는 것은 또 얼마나 쉬운 것인지에 대해 점차 알게 된다. 




지금 나는 커튼 뒤에 있다. 다 괜찮아질 거라는 말은 프티 아줌마도 믿고 있지 않을 거다.

내가 에밀리에게 엄마는 돌아가시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한 것과 비슷한 거겠지.

사람들은 왜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을수록, 희한하게도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처럼 행동하는 걸까?              p.116


프랑스와 독일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프랑스는 독일의 지배를 받게 된 북부와 남부로 나뉘게 된다. 유태인 법령이 발표되고, 유태인을 욕하는 게 새로운 국민 스포츠가 되어간다. 야엘의 아빠는 유태인이 아니었지만, 유태인 엄마는 이미 죽었고, 외가 친척들도 다 외국으로 떠나 버리고 교류가 없었지만, 야엘은 항상 자신이 유태인이라고 생각해왔다. 법적으로는 아니지만, 마음 깊은 곳부터 유태인으로 자라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법이 간주하는 것과는 별개로 유태인에 대한 핍박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고, 사회적으로 점차 '유태인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문제가 되어간다. 죄없는 사람들이 줄줄이 끌려가 죽임을 당하는 것이 일상인 세계에서, 야엘은 무사히 자라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야엘 자매를 찾으러 온 경찰들을 피해 커튼 뒤에 숨어 있는 마지막 장면에선 함께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 그 속에서 야엘은 이런 저런 생각을 한다. 만약 내가 죽으면 엄마를  다시 볼 수 있을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면 아빠가 무지 슬퍼할 거야, 프티 아줌마는 다 괜찮아질 거라고 말했지만 결코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커튼이 열린다'는 문장에서 이 이야기는 끝이 나지만, 뒤에 이어질 장면들을 상상해본다. 비극이 아니라, 기적이 일어났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지만, 아이의 순수함과 천진난만함으로 담백하게 그려내고 있어 누구나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고통과 괴로움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야만 그 무게가 느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우리는 여전히 전쟁과 죽음이 현재 진형형이고 미움과 차별이 존재하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 사랑스러운 아이의 시선을 통해 그려지는 이 먹먹한 이야기를 통해서 평화로운 세상이라는 기적을 언젠가는 만날 수 있기를 바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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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주식회사
잭 런던 지음, 한원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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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윈터 홀의 머릿속에 별안간 기막힌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너무 기발하고 터무니없다시피 해서 그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생각에 홀딱 빠지고 말았다.

"선생은 참으로 윤리적인 사람이군요." 그가 입을 뗐다. "일종의 ...... 도덕광이라고 할까요."

"도덕에 환장했다고 할 수 있지." 드라고밀로프가 유쾌하게 대꾸했다. "맞아, 내겐 그런 경향이 있지."

"옳다고 여기는 일이 있으면 무슨 일이라도 하시겠군요."           p.59


부패한 노동조합 간부, 리틀 경찰서장, 거물급 후원자, 목화 왕, 세철리 조사관 등 권력과 부패의 정점에 있던 사회계 인사들이 차례로 변을 당한다. 그리고 그 사건들 뒤에는 무시무시한 암살주식회사가 있었다. 암살국의 수장인 드라고밀로프는 죽어 마땅한 악인을 법의 테두리 밖에서 처단하는 일을 한다. 왕부터 가난한 농민까지 대상을 가리지 않고 어떤 의뢰든 받지만, 그 전에 조사를 통해 사회적으로 그 죽음이 정당하다는 결론이 나와야만 처리가 가능하다는 것이 유일한 규칙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암살국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백만장자 청년 윈터 홀이 나타나 자신에 대한 암살 의뢰를 하고, 그가 제시하는 도덕적 근거에 설득당한 드라고밀로프는 암살국 해체뿐만 아니라 그곳의 수장인 자기 자신 또한 제거되어야 옳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게다가 하필 윈터 홀은 드라고밀로프의 딸인 그루냐 콘스탄틴의 애인이기도 했다. 그루냐는 자신을 삼촌으로 알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의 딸이라는 사실을 비롯해 앞으로 자신의 딸을 잘 부탁한다는 말까지 건네며 드라고밀로프는 홀에게 뒷일을 맡긴다. 하루아침에 암살 표적이 되어 조직원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음에도 그는 자신만만한데, 직접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는 그는 대체 뭘 믿고 이 일을 수락한 것일까. 자, 과연 조직이 창조자를 죽일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창조자가 그보다 한 수 앞서나갈 수 있을 것인가. 이야기는 점점 더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얘야, 그루냐." 드라고밀로프가 애원했다. "아름다운 광기가 아니더냐? 꼭 광기라는 단어를 고집한다면 말이다. 여기에서는 사유와 도덕이 지배한단다. 내 눈에는 그게 가장 고결한 합리이자 통제로 보이는구나. 사람이 하등동물과 다른 점은 통제력이야. 지금 이 상황만 해도 그렇잖니. 저기 날 죽이려고 하는 일곱 명의 사내들이 있어. 여기엔 저들을 죽이려는 내가 있고. 하지만 대화라는 기적을 통해 우리는 휴전에 합의했다. 신뢰하는 거지. 고결한 도덕적 통제를 아름답게 보여주는 예시가 아니겠니?"            p.181~182


<야성의 부름>으로 잘 알려진 작가 잭 런던의 미발표 유작이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잭 런던이 1910년 3월 11일 당시 무명 작가였던 싱클레어 루이스(193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에게 70달러를 주고 사들인 열네 개의 이야기 개요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는 2만 단어 분량의 내용을 쓴 뒤 1910년 6월 말 소설의 결말을 논리적으로 끝맺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집필을 중단했다. 전체 286페이지인 이 작품에서 잭 런던의 원고는 198페이지의 중반 이후에서 멈춘다. 그리고 이 작품은 1963년 가을, 추리소설가인 로버트 L.피시가 뒤를 이어 마무리해서 출간이 되었다. 하지만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 잭 런던이 남긴 메모’와 ‘차미언 런던(런던의 두번째 아내)이 구상한 결말’이 함께 수록되어 미완성 결말에 대한 흥미로운 상상의 여지를 남겨준다. 


'법의 테두리 밖에서 악인을 처단하는 것은 정의구현인가, 또다른 범죄인가'에 대한 문제를 이렇게 오래 전에도 작품 속에서 고민했었다는 점도 흥미롭고, 미국 역사상 최초로 전 세계적인 인기를 누린 소설가이자 대중잡지 소설 황금기의 개척자 잭 런던조차 그에 대한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는 점도 인상적인 작품이다. 세상에서 가장 철학적인 킬러들이 등장하는 색다른 고전 문학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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