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가 잠든 사이에
스테이시 에이브럼스 지음, 권도희 옮김 / 비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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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버리는 놀라지 않았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그 사람은 자기가 죽을 거라고 했어요." 재러드가 접시를 옆으로 밀었다. "날 도우려고 했는데 일이 복잡해졌다면서요."

복잡해졌다? 그 합병을 허용하기 위해 대법원 판결을 이끌어내는 일은 그저 복잡한 정도가 아니지 않는가. 에이버리는 신랄하게 생각했다. 그건 탄핵의 근거이며,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대법원 판결의 상황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했던 것처럼.         p.165


'국민의 대변인'이라 불리는 대법관 하워드 윈은 업무 능력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지만, 괴팍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재선을 준비 중인 현대통령과 대놓고 대립 중이면서 나라 전체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킬 사건을 조사하던 중이었다. 최근 대통령이 막내딸의 졸업을 축하하기 위해 참석한 대학의 졸업식에서 한 연설로 인해 언론을 들썩이게 만들었는데, 언론에서는 윈 대법관이 앞으로 <미친 판사>라는 리얼리티 쇼를 보여주진 않을지 궁금하다며 대놓고 비꼬기도 한다. 윈은 늘 혼자였다. 첫 번째 아내는 죽었고, 두 번째 아내와는 이혼 소송 중이었으며 하나뿐인 아들은 아버지를 경멸했다. 그를 상대로 음모를 꾸미고 걱정하는 척하는 아첨꾼들과 멸시당해도 산 인간들만 모여 있는 법원도 역시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하워드 윈이 혼수상태에 빠진 채 간병인에게 발견되고, 그의 법적 후견인으로 자신의 서기로 일하는 에이버리 킨을 지명하면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아버지는 사고로 일찍 돌아가셨고, 엄마는 마약 중독자에, 가진 돈도, 연줄도 없는 에이버리 킨은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다. 세간에서는 킨이 대법관과 사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게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지만, 단연코 아무런 일도 없었던 데다 그가 자신을 조금이라도 편애한다고 느낄 법한 일도 없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의식이 없는 대법관은 킨을 위해 숨겨진 단서들을 곳곳에 숨겨 두었는데, 알 수 없는 수수께끼를 풀면서 자신을 몰아내려는 세력에 맞서야 했다. 그녀는 윈 대법관이 나라에서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사건 중 하나인 미국 생명과학 회사와 인도 유전학 회사 간의 합병 제안을 비밀리에 조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사실 이 문제는 정치적 문제와 국제적 음모가 함께 어우러진 복잡한 사안이었다. 과연 킨은 대법관이 남겨놓은 비밀들을 무사히 찾아내 그를 구해낼 수 있을까. 




에이버리는 리타와 윈 대법관, 양쪽 모두를 잃을 수 없었다. 두 사람 다 구해야 해. 바로 그 순간 갑자기 해결책이 떠올랐다. 에이버리는 또다시 숨을 들이마셨다. 이번에는 단호하고, 안정적이었다.

"방법이 있어요." 그녀는 위협적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윈 대법관이 에이버리를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녀가 책으로 배운 지식만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이버리는 경험도 많았다. 그래서 쉽게 겁을 먹지 않았다. 여전히 목을 조르고 있는 위협을 옆으로 밀어내며, 에이버리가 중얼거렸다. "나한텐 문서가 있잖아요. 영향력도 있고."           p.440


요즘은 앉은 자리에서 한 권의 책을 몰입감있게 읽기가 힘들다. 워낙 읽을 책이 많아 병렬독서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매력적인 작품이 별로 없는 탓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주 오랜만에 제대로 된 스릴러 작품을 만났다. 한번 읽기 시작하면, 도저히 중간에 다른 책을 읽을 수 없을 만큼 속도감있고 흥미진진한 작품이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인 스테이시 에이브럼스는 예일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조지아 하원의원과 소수당 대표를 역임한 정치인이기도 하다. 필명으로 여덟 권의 로맨스 소설을 썼는데 이번 작품이 자신의 실명으로 출간한 첫 번째 작품이라고 한다. 정치와 법조계를 거쳐온 자신의 이력을 잘 살린 작품이라 굉장히 현실적이고 시의성있는 이야기를 탄탄하게 그려 보이고 있다. 


이 작품의 장점을 얘기하자면, 탄탄한 플롯과 속도감 있는 전개, 시의성 있는 주제와 현실감 넘치는 배경 등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돋보이는 것은 캐릭터이다.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이야기를 더욱 생생하고 입체감있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에이버리 킨은 영리하고 침착하고, 사진같인 기억력을 가지고 있으며 신의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순간에조차 옳고 그름을 판단해 행동할 수 있는 대범함과 치밀하게 짜여진 단서들을 풀어나가는 신중함도 가지고 있다. 반가운 소식은 후속작이 2023년 여름에 출간되었고, 작가가 현재 세 번째 이야기를 집필 중이라는 거다. 그녀의 새로운 활약과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로서의 재미 또한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다. 정의는 어디에나 있지만 보기 힘든 세상, 지금껏 쌓아온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질 위기에 처해서도 오직 정의를 실현시키기 위해 위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는 여성 캐릭터의 탄생을 놓치지 말자. 군더더기 없는 속도감으로 휘몰아치는 이야기의 힘을 보여주는 잘 만들어진 스릴러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적극 추천해주고 싶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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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의 뇌 - 더 좋은 삶을 위한 심리 뇌과학
아나이스 루 지음, 뤼시 알브레히트 그림, 이세진 옮김 / 윌북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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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피엔스는 믿을 수 없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자기 동족이 느끼는 바를 함께 느끼고 이해하는 능력이죠(다른 포유류들도 어느 정도 공감 능력을 지니고 있긴 합니다_. 흥미로운 점은 인간의 공감 수준이 모두 같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똑같은 동물 다큐멘터리를 봐도, 저는 어느새 펑펑 울고 있는데 제 친구는 콧물 한번 훌쩍이지 않죠. 이유가 뭘까요? 게다가 우리는 모든 존재에게 같은 방식으로 공감하지 않습니다... 어째서일까요? 공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며 지적인 능력입니다.              p.52

 

수천 년 전부터 연구자와 철학자들은 인간의 뇌에 관심을 가졌다. 그렇지만 뇌를 실제로 연구하기 시작한 건 20세기 부터였는데, 뇌 영상 촬영 기법과 정보공학 및 그 밖의 기술 발전이 큰 도움이 되었다. 덕분에 인류는 지난 수십 년 사이에 뇌의 진화와 기능, 그리고 인간의 뇌 구조에 대한 여러 이론을 수립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모든 이야기는 신경과학이라는 학문이 등장했기에 존재할 수 있었는데, 신경과학이란 신경계를 연구하는 학문 분과들의 총체를 말한다. 머리에 전극을 부착해 뇌의 전기적 활동을 기록하는 기술인 뇌전도(EEG)와 자기공명영상(MRI)의 발명으로 인해 인간의 뇌가 활동하는 모습까지 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뇌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많다. 언제쯤 뇌의 수수께끼를 완전히 풀 수 있게 될까.

 

이 책은 프랑스의 임상심리학자이자 250만 명이 넘는 청취자에게 사랑받은 뇌과학 팟캐스트 〈뉴로사피엔스Neurosapiens〉를 제작하고 진행하는 과학 커뮤니케이터이기도 한 저자가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심리 뇌과학책'을 쓰기로 결심하고 펴낸 것이다. 뇌의 경이로움에 매료되어 신경과학을 연구하게 되었다고 하는 저자는 '왜 머리와 마음이 따로 노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하는 무수한 청취자의 고민을 접하다 그들의 생활 속 고민과 밀착한 뇌과학 이야기를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고작 1.4킬로그램 밖에 되지 않는 뇌는 수많은 신경 세포로 구성된 경이로운 연회색 덩어리이다. 이 작지만 복잡한 뇌라는 존재 덕분에 우리는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고, 환상을 품으며, 이상을 꿈꾸고, 만족할 만한 선택을 하거나 후회할 만한 행동을 하기도 하며, 타인과 더불어 살아간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그러한 뇌라는 존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답은 우리가 기억한 단어들이 뇌에서 네트워크를 이루는 방식에 있습니다. 인간의 기억력은 경이롭습니다. 단어를 기억하기 위해 얼마나 집중력을 기울이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집중한다고 생각이 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거든요... 사실 단어에 대한 기억에는 '뇌 전체'가 관여합니다. 대부분의 인지 능력은 뇌의 어느 한 영역만 작동해서 발휘되지 않습니다. 예컨대 언어 구사의 중추가 측두엽에 있는 건 맞지만, 그 중추는 뇌의 모든 부분과 연결되어야 제대로 작동할 수 있어요.            p.270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한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부딪치는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왜 나는 나를 간지럼 태울 수 없을까, 왜 그 사람은 말의 속뜻을 모를까, 어떤 단어가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불현듯 기시감이 들 때 뇌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아름답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을까,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 걸까, 창의성도 계발할 수 있을까 등등 뇌의 작동 방식을 알게 되면 일상 속 고민들에 대해 명쾌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될테니 말이다. 이 책 속 내용들은 뇌과학 팟캐스트에서 지난 5년 동안 다뤘던 이야기 중 가장 유용한 주제 23가지를 엄선한 것이다. 대중들을 풀어내는 방송이라 그런지, 기존의 뇌과학을 다루고 있는 어떤 책보다도 쉽고 현실적이고 활용할 수 있는 내용들이 많았다.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기억나는 건 공감 능력이 고도의 지능이라는 점이었다. 타인이 느끼는 바를 함께 느끼고 이해하는 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며 지적인 능력이라고 한다. 저자는 정서적 공감과 인지적 공감을 구분해 알려주고,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사이코패스의 뇌는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도 짚어준다. 외국어를 배울 때 뇌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알려주는 챕터도 재미있었다. 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유독 외국어를 빨리 배우는 것인지, 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일은 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한 언어를 쓰다가 다른 언어를 쓰는 일은 뇌에 좋은 일인지, 불편한 일인지 궁금해 본적이 있다면 도움이 될만한 내용들이 많을 것이다. 그 밖에도 다양한 신경과학과 심리학의 최신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기존에 잘못 알려진 뇌에 대한 정보와 오해를 바로잡고 정확한 지식을 제공하고 있어  우리의 뇌를 이해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되어준다.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생각하는 대로 살고 싶은'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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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짜툰 메모리즈 - 뽀짜툰 연대기, 8장의 빅 스티커북, 표지 일러스트 3장, 작가 사인과 후기(인쇄)
채유리 지음 / 북폴리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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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애묘인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고양이 만화 <뽀짜툰>의 단행본 출간 10주년 기념 스페셜 에디션이다. 그 동안 출간되었던 전체 시리즈에서 엑기스만 뽑아서 단 한 권으로 만나는 뽀자툰 연대기가 완성되었다. 카리스마 군기 반장 뽀또, 새침하고 도도한 아가씨 짜구, 까칠하고 고독한 쪼꼬, 천방지축 막내 포비와 어수룩하지만 책임감 있고 애정 넘치는 집사 가족들과의 스토리를 만났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년이라니 시간이 참 빠르다. 이후 세상 까칠하고 예민한 봉구와 성격 좋고 귀여운 꽁지, 그리고 봉구와 친형제였지만 먼저 떠난 똥국자까지... 고양이 가족들이 점차 늘어나는 과정을 함께 지켜보았던 독자라면 이번 스페셜 에디션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질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동물을 좋아했던 작가가 아기 길고양이 뽀또와 짜구를 처음 만나고, 이어 세 번째 고양이 쪼꼬, 그리고 막둥이 포비까지 결국 네 마리의 고양이와 함께 살게 되었다가, 봉구와 꽁지까지 점점 더 가족이 늘어나게 된다. 그야말로 고양이 대가족이 된 것이다. 특히나 이들의 이야기는 곁눈질로 대충 보아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오랜 기간 고양이이와 함께 애정으로 살아온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소소한 디테일들이 가득해 마음이 짠해지게도 하고, 빙그레 미소짓게도 만들어준다.

 

단순히 재미있는 에피소드 나열이 아니라 고양이의 생활 습성이나 질병, 함께 살아가는 요령 등 유용한 정보들이 녹아있어 고양이를 처음 키우는 사람이나 이미 기르고 있는 사람 모두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 같다. 동물을 집에 들이는 것을 반대하는 아버지, 혼자 나와 살면서 취직을 하게 되자 어린 고양이 혼자 빈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져 걱정이 되고, 결국 부모님이 다른 집에 분양을 줘버려 생이별을 하게 되고, 이후 또 우연히 고양이를 친구에게 분양받게 되지만, 동물을 키울 수 없으니 빠른 시일 내에 내보내라는 집주인의 압박부터 산넘어 산처럼 고양이를 키우는 일은 만만치가 않다. 현실의 장벽들 때문에 스토리는 더욱 흥미진진해지긴 했지만 말이다.

 

 

길든 짧든..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게 죽음으로 인한 이별은 피할 수 없는 문제다. 고양이든, 강아지든 반려동물과 함께 하다 보면 언젠가는 이별의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사람보다 더 오래 사는 반려동물은 없을 테니 말이다. 뽀짜툰에서도 안타까운 이별의 순간이 담겨 있다. 영원히 함께 할 것만 같았던 아이들이 어느 순간 병을 앓게 되고, 노환으로 인해 힘들어 하는 걸 지켜보기란 결코 쉽지 않다.

 

나 역시 강아지를 오래 키우다가 무지개 다리로 떠나 보낸 적이 있기에 이 작품 속 이별 장면들이 특히 더 와닿고 마음이 아팠던 것 같다.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담담하게 떠나는 아이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는 마음이 페이지마다 묻어나서 더 애틋했다. 그렇게 웃기고 짠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눈물도 나고 피식 웃게도 만드는 고양이 가족의 20년 추억을 단 한 권에 담았기에 이 작품은 더욱 의미가 있다. 20년 동안 열 권의 이야기가 모였고, 그 모든 걸 통틀어서 딱 한 권, 스폐셜 에디션이니 말이다.

 

 

이번 <뽀짜툰 메모리즈>는 반양장으로 제작해 소장 가치를 높였고, 표지를 양면 인쇄해서 뒷면에는 컬러링 일러스트가 깜짝 선물처럼 들어가 있다. 그리고 61개의 일러스트를 담은 8장의 빅 스티커북과 웹툰에 공개되지 않은 여섯 고양이들의 귀여운 사진도 듬뿍 수록되어있어 이 시리즈를 사랑해온 독자들이라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뽀짜툰>이 대한민국 최장수 고양이 만화가 된 것은 개성넘치는 캐릭터와 깨알같이 재미있는 스토리뿐만 아니라 동물을 '좋아한다는 것'에는 항상 그에 따른 '책임'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종일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동물과 가족이 되어 사는 건, 더이상 자라지 않는 세살배기 아기와 사는 것과 비슷할 듯 하다는 작가의 말처럼 현실은 마냥 귀여워하고, 예뻐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니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오래 전에 만났던 뽀짜툰 시리즈들을 다시 찾아서 읽어보고 싶어졌다. 우당탕탕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섯 고양이 이야기를 통해서 힐링의 시간을 가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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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징 4학년 스콜라 어린이문고 40
김혜진 외 지음, 메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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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서 온 브로콜리가 덩굴을 뻗어 큼직한 이파리 하나를 내밀었다. 악수하자는 뜻인가? 나는 손바닥으로 이파리를 살짝 건드렸다. 그러자 비 온 다음 날 숲에서 나는 냄새가 확 퍼졌다. 와, 꼭 산림욕장에 온 것처럼 상쾌해서 절로 웃음이 났다.
"나는 하이랑, 친구들은 그냥 하이라고 불러. 그리고 지구인이고, 여자아이고, 한국 사람이고, 청운초등학교 4학년 2반이야."             - 문이소, '우주 브로콜리는 지구를 정복하지 않아' 중에서, p.92~93

 

한 달 전에 전학을 온 여울이는 친구 관계가 걱정이다. 왜냐하면 지난 학교에서 자신을 괴롭히고 따돌린 아이들 때문에 도망치듯 이사를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또 일어나면 어떻게 하지?' 하는 마음에 어떤 상황에서도 튀지 않고 조용하게 지내기로 마음 먹는다. 마침 마니토 게임을 하게 되고, 친구들과 친해질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보니 자신의 이름을 뽑게 되어 그마저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그때 맑은 목소리로 누군가 말을 건넨다. 휘파람을 부는 듯, 유리잔이 울리듯 영롱한 소리로 자신과 마니토를 하면 된다고 말이다. 과연 그 목소리의 정체는 누구였을까. 여울이는 친구들과 잘 어울려 지낼 수 있을까.

 

엄마 손을 잡고 입학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아이들이 벌써 4학년이 되었다. 보통 3학년까지를 저학년, 4학년부터는 고학년이라고들 하지만, 사실 5, 6학년에 비해 4학년은 아직 많이 서툴고, 부족한 것 투성이이다. 그럼에도 점점 더 자아가 생기고,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나고, 주변 관계에 대한 걱정도, 고민도 많아져서 훌쩍 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 이 시기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런 4학년들을 위한 맞춤 동화집이다. 김혜진, 이재문, 문이소, 이나영, 채은하, 다섯 명의 작가가 완전히 다른 매력의 다섯 빛깔 동화들을 탄생시켰다.

 

 

나는 크게 한숨을 쉬고는 사물함에 몸을 기댔다. 아무리 돌이켜봐도 딱히 잘못한 건 없는 거 같은데, 왜 꼬여 버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화기애애한 교실 풍경이 무척이나 멀게 느껴졌다. 지난 학교에서도 이런 기분이었지. 나는 무심코 떠오른 생각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랑은 다르잖아.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 내려고 일부러 큰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이것 참 큰일이네. 나는 누구랑 마니토를 한담."            - 채은하, '너는 나의 우렁' 중에서, p.174~175

 

별로 친하지 않은 친구와 미스터리를 해결하게 된 채이의 이야기, 자신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아빠 때문에 답답함을 느끼는 솔이의 이야기, 유치원 때부터 단짝이던 친구와 멀어지게 되어 고민인 하이의 이야기, 잘하던 수영을 할 수 없게 된 리안이의 비밀, 따돌림을 당할까봐 걱정인 여울이의 이야기 등 다섯 명의 아이들은 각자 다른 고민을 안고 있지만,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친구들과의 관계를 통해 어려움을 풀어 나가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딱 그 시기에 걸맞는 눈높이와 사려 깊음으로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이 작품은 기획 단계부터 오로지 4학년만을 위한 맞춤 동화를 만드는 걸 목표로 하고 전국의 초등학교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거쳐 탄생했다. 선생님들이 4학년에 대해 해주신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이 시기에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다섯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페이지수가 많은 편이지만, 글자 크기가 크고 읽기 편한 레이아웃에 귀엽고 발랄한 그림들이 삽입되어 있어 아이들이 읽기에도 딱 좋다. 4학년들을 가리켜 농담 삼아 (천)4학년이라는 말을 한다고 한다. 그만큼 저학년 동생들에게는 모범이 되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나며, 적극적이고 호응도도 높은 '천사'같은 학년이라는 뜻이다. 세상의 모든 4학년 아이들이 이 책을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 본다.

 

작가의 말을 읽어 보니, 곧 <레벨 업 5학년>이라는 5학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도 나올 것 같다. 이번 작품에 등장했던 어린이가 5학년이 되어 맞이하게 되는 에피소드도 수록된다고 하니 궁금해진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속도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조금씩 하나의 문턱을 넘어간다고 생각한다. 아직은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하고, 부족한 것들이 더 많지만, 그것조차 이 나이에 겪을 수 있는 꼭 필요한 과정이니 괜찮다. 더 즐거운 학교 생활이 될 수 있도록, 이 책을 적극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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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랑찰랑 사랑 하나 파란 이야기 16
황선미 지음, 김정은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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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구할 거야. 할머니가 그랬어. 나쁜 생각은 행운을 갉아먹는다고. 궁지에 몰려도 최선을 생각하라고. 궁지가 뭐냐고? 글쎄. 아마도 나쁜 일 중에 최악이 아닐까. 아무튼, 애들이 내 얘기를 하지 않는 건 내가 궁지에 몰리지 않았다는 거야. 그러니 윤봄인답게 당당해도 돼. 혹시라도 누가 그 얘기 꺼내면 “그게 뭐?” 해야지.            p.50

 

황선미 작가의 <찰랑찰랑 비밀 하나>에 이은 두 번째 이야기이다. 전작에서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이 생겼던 봄인이에게 봄바람처럼 설레이는 감정이 찾아온다. <찰랑찰랑 사랑 하나>라는 제목처럼 사랑스럽고 귀여운 첫사랑 이야기이다.

 

봄인이의 엄마와 아빠는 아프리카 아이들을 치료해주는 의사이다. 덕분에 다섯 살 때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할머니랑 둘이 살아 왔다. 그런데 어느 날 치매가 온 할머니가 요양원에 가게 되면서, 봄인이는 백수 삼촌과 함께 지내게 된다. 백수 삼촌은 할머니랑도 사이가 나빴고, 봄인이랑도 별로 친하지 않았기에, 낡은 공동 주택에서 삼촌과 함께 살게 된 것이 봄인이는 화가 나고 슬펐다. 하지만 거침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당당한 성격의 봄인이는 도무지 책임감 없는 어른들에게 언젠가는 다 갚아 주겠다고, 아주아주 멋지게 자라서 당당하게 말해줄 거라고 생각하며 씩씩하게 주어진 환경을 헤쳐 나가는 것이 전작의 이야기였다.

 

 

새카만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뛰기를 잘해서 붙은 별명 '찰랑이'가 이름보다 더 익숙한 봄인이는 생일인데 아무도 챙겨주지 않아 속상하다. 늦게까지 만화책 작업을 한 삼촌은 쿨쿨 자고 있고, 하나뿐인 손녀 생일마다 수수팥떡을 직접 만들어 주셨던 할머니는 요양원에 계시고, 작년 생일에 원피스를 보내주셨던 엄마도 소식이 없다. 하지만 오늘은 친구들과 키즈 카페에서 놀기로 했다. 재원이가 친구들까지 초대해 자신을 위해 번개 파티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으로 봄인이는 위안을 삼는다.

그런데, 친구들인 모인 자리를 보자마자 봄인이는 깨닫는다. 이건 자신을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는 것을. 재원이가 크림색 드레스에 공주처럼 왕관을 쓰고 있었던 거다. 창피해서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봄인이는 친구들의 깜짝 파티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세상 모두한테 버려진 기분이 든다.

 

 

"찰랑. 좋은 일 있구나! 남재민이랑 연락된 거야?"
아, 현기증 나.
좋은 일이라니. 죽을 지경인데.
그런데 말이야, 참 이상하지. 갑자기 숨을 크게 들이마시게 되더라고. 용기가 필요할 때 나는 가끔 이래. 저번에 영모한테 사귀지 않겠다고 할 때도 그랬어. 지금도 그런 때야. 솔직해져야 할 때.            p.101

 

너무 슬프고 화가 나서 그대로 나와 버린 봄인이는 눈물을 쏟으며 무작정 걷고 또 걷는다. 집에는 가기 싫고, 전화할 사람도 없고, 아무도 모르는 데로 가 버리고 싶었던 거다. 그러다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요양원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뜻밖의 만남을 하게 된다. 어쩌다 보니 인기 절정의 아역 배우 남재민과 얽히게 된 봄인이는 늘 곁에 있었던 친구 영모에게 고백까지 받아 당황스럽기만 하다. 누구를 사랑하는 게 어떤 마음인지 조금은 알지만, 영모를 좋아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남재민 생각에 가슴이 막 두근거리니, 설레는 건지 어떤 건지 자신의 마음을 알 수가 없다.

 

자, 봄인이에게 찾아온 마법과도 같은 첫사랑의 순간은 어떻게 될까. 싱그럽게 반짝거리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너무도 사랑스럽게 펼쳐진다.

 

 

누구나 살면서 설레는 감정이 찾아오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그 순간만큼은 일상의 모든 것들이 반짝거리고, 세상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듯한 기분도 든다. 하지만 반짝이는 순간은 계속되지 않는다. 영원히 지속되는 감정이란 없으니 말이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더욱 소중한 것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사랑은 살면서 꼭 필요한 마법과도 같은 감정이다. 그 사랑이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말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든, 어떤 대상을 좋아하든,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한 존재는 성숙해지고, 앞으로 한 단계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힘이기도 하고 말이다.

 

당차고 똑 부러진, 어떤 상황에서도 씩씩하게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그래서 더욱 사랑스러운 봄인이와 철없는 삼촌의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된다고 하니, 다정하고 유쾌하고 따뜻한 이들의 좌충우돌 일상이 어떻게 이어질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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