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빌라
전경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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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그런 적이 있었다. 책을 너무 너무, 과하게, 많이(같은 뜻이지만 무려 세 번의 강조할 정도로 많은 양을) 읽어대다 보니, 거의 하루에 한 권씩 혹은 하루에 서너 권 씩 마구 읽다 보니 초반 몇 페이지만 읽어도 마지막 페이지가 예상되거나, 전개될 스토리가 뻔해서 그냥 덮어버리거나, 몇 문장만 봐도 행간에 억지로 숨긴 의도가 보여 지루해지거나, 그러니까 뭘 읽어도 재미가 없는, 딱히 어떤 이야기도 나를 사로잡지 못하는 그런 상태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유일한 처방전은 책에서 아예 손 놓고 시간을 보내거나, 이야기와 플롯에서 해방된 책을 만나거나, 조금 가벼워지는 것밖에 없는 것 같다. 재미있게도 이번에 만난 전경린 작가의 신작은 딱 그런 상황일 때에 읽으면 너무 좋을 만한 작품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바닷가 해변에 앉아 선선한 바람을 쐬고 모래밭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니까. 복잡한 것들 모두 내려놓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싶었으니 말이다. 작가는 이번 신작을 쓸 무렵에 세상의 온갖 이야기가 다 싫었다고 한다. 오해와 착각과 환상과 거짓과 허구와 진실의 충돌 사이에서, 타인의 이야기든 나의 이야기든 싫증 나기는 마찬가지였다고 말이다. 그래서 '가급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소설을 쓰고 싶다'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정황만 있을 뿐, 별 사건도, 갈등도 없는 그런 소설 말이다.

이린이 가끔 하던 말장난이었다. 내가 어느 날 사라지면 페루로 떠난 줄로 알아, 라고 말했다. 페루엔 왜? 라고 내가 물으면, 모르니? 삶이란 부재의 사과를 깎는 일이다, 할 때의 그 사과이지. 삶이란 사과 껍질을 가급적 얇게, 끊어지지 않게 깎는 일이야. 그 사과는 페루에만 있는 거야? 라고 물으면 당연하지, 라고 말했다.

이 작품은 매우 담백하게 흘러간다. 출생의 비밀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중요한 메인 플롯이 아니고, 어린 주인공과 선생님 사이에 벌어진 다소 외설적인 사건도 덤덤하게 지나가버린다. 이야기들이 파도에 휩쓸려 왔다가, 다시 파도에 휩쓸려 내려가는 듯한 분위기로 흘러가는 이 작품은 작가가 시간의 무게만큼 더욱 깊어지고, 그만큼 또한 가벼워졌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다. 전경린 작가의 책을 처음 읽었던 게 고등학교 때였나.. <염소를 모는 여자> 였으니 어느덧 이십여 년이 가까워온다. 한 작가의 책을 오랜 시간에 걸쳐 읽다 보면 살면서 누구나 변하듯, 작품의 분위기도 조금씩 변해가는 것 같다. 나의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에 한참 나를 매혹시켰던 것이 극중 인물들의 사랑과 열정으로 대표되는 캐릭터와 스토리였다면, 갈수록 그녀의 작품은 단순해지고, 그만큼 깊어진다는 느낌이 든다. 때로는 화려한 수사로 치장된 문장보다 감정이 극도로 절제된 단순한 문장이 더 먹먹해지는 법이다. 작가의 의도대로 '진실은 굳이 알려고 하지 않고, 상대의 변심은 곁으로 흘러서 지나가게 하고, 거부는 가만히 받아들이고, 비밀은 덮어놓는, 말하자면 문제를 괄호 속에 담아두고, 타자와는 가능한 부딪치지 않고, 세상과는 최소한만 연루되는 그런 소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 인물들은 변화하고 성장하고 시간을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삶은 그렇게 움직이는 것이니까 말이다.

주인공 유지는 큰 고모부를 자신의 아버지로 알고 살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작은 고모가 자신의 생모라는 걸 알게 된다. 그녀가 살아온 작은 세상이 뒤틀리며 산산이 붕괴되어 버린 것이다. 생모인 이린은 끝내 유지의 생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그것은 자신에 대한 완전한 부정처럼 느껴져서 유지는 자신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투명 인간같다고 느낀다. 하루 아침에 윤유지였다가 손유지가 되는 경험은 그녀에게 지독한 박탈감과 결락 감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즈음 그녀는 세상에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래서 생물선생님인 이사경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사경은 말을 하는데도 침묵이 들리는 것 같은, 침묵의 음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생물 실습실에 인체 모형도가 새로 들어온 날 구경을 하다가 갑자기 그 앞에서 옷을 전부 벗고 자신이 보이느냐고 묻는다. 당황한 이사경은 자신의 몸으로 유지를 가리며 네가 보인다고 말해준다. 그것은 유지가 그즈음 누군가에게 꼭 듣고 싶었던 말이다. 이 사건은 곧 그의 아내와 어머니도 알게 되고, 이사경의 어머니인 노부인은 오히려 유지를 손자인 연조의 피아노 교사로 집에 들이게 된다. 유지는 그렇게 노부인의 집을 다니며 피아노를 치면서 그들과 관계를 맺어간다.

그즈음 나는 세상에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세상의 중력이 내게만은 작용하지 않는 것 같았고 사람들 눈에 내가 보인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사람들은 설마 그럴까, 할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현실이었다. 작은 고모의 눈에 내가 보일 때면 흠칫 놀라곤 했다. 나는 집에 들어갈 때나 나갈 때 투명인간인 양 인사를 하지 않는 아이였다. 교사들이나 반 아이들에게 인사를 하지 않아 크고 작은 말썽이 일어나곤 했다. 나는 아무리 놀라도 다른 아이들처럼 엄마, 라고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한밤중에 내내 아파서 앓다가 아침에 응급실에 실려 갈 때도 결코 엄마를 부르지 않았다.

유지의 생모인 손이린과 이사경, 그리고 그의 부인 백주희, 유지의 전 연인 오휘와 이사경의 아들 연조에 이르기까지 이들 인물들의 관계는 바닷속에서 부유하는 해초 같은 느낌이 든다. 분명히 어떻게든 관계를 맺고 있지만 어느 날 길거리에서 마주쳤을 때 서로 모른 척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그런 분위기랄까. 작품의 시작 즈음에 노부인이 이런 말을 한다. "여자의 진짜 능력이란, 제 남자를 알아보는 거란다." 라고, 그리고 "남자란 세상의 들판을 지나가는 바람과 같아. 하지만 자기를 알아보고 계산 없이 인생을 내놓는 여자를 만나면 자기가 줄 수 있는 것을 몽땅 주지. 거기에 제 생명을 쏟는 거다. 그게 남자와 여자 사이의 비밀 논리야." 라고. 그런 여자와 그런 남자를 만나지 못하면 바람처럼 들판을 떠돌다가 덧없이 세상 밖으로 사라진다고. 이렇게 무섭고도 슬프게 정확한 진리가 있을까. 서로의 짝을 만나지 못한 남자와 여자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말은 어쩌면 그 동안의 전경린 작가의 작품들을 일맥상통하는 키워드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녀의 주인공들에겐 항상 사랑이 세상 전부이니 말이다. 나는 '사랑을 한 후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하는 그녀의 작품 속 인물들에게 매혹을 느낀다. 사랑이 그렇게 무시무시한 거라는 걸 동감하니깐. 사랑의 끝은 누군가의 삶을 생각지도 않았던 곳으로 옮겨놓을 수도 있을 만큼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니까. 그러니 우리는 정신 반짝 차리고 사랑을 해야 한다. 대신 삶은 바다에서 물결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것처럼,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면 어떨까. 삶이란 부재의 사과를 깎는 일이라는 말처럼, 어떤 사건이 우리에게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은 그것이 지나가버린 뒤의 일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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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류 연애 블루스
한상운 지음 / 네오픽션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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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 다니는 성욱은 7년을 사귄 검사 여자친구 인영에게 차였다. 원고 마감이 늦어져 야근을 하느라 무려 3주 만의 데이트였다. 대체 뭐가 문제인지 이유라도 알자는 그에게, 인영은 "재미가 없어."라고 말한다. 7년 하고도 5개월 이틀을 만났는데, 그 동안 한 일이라고는 밥 먹고 가끔 잠자고 그게 전부였다고. 이제는 달라지고 싶다고 말이다. 차가운 봄비를 맞으며 바깥으로 나온 그는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늘씬한 미녀를 만나 홀리듯 그녀를 따라 영화관에 들어간다. 그녀와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영화를 같이 보고, 함께 버스를 탔지만 말 한마디 건네보지 못하는 소심한 우리의 주인공. 그런데 버스정류장에 검정색 벤츠가 급하게 세워지더니, 30대 초반의 남자가 내려 다짜고짜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뺨을 갈기며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였냐며 소리친다. 정류장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남자의 난폭함에 누구 하나 나서질 못하고, 다른 때라면 도망쳤을 성욱은 그날 여자친구에게 차인 충격 때문인지 그 동안 꾹꾹 누르기만 해온 감정들과 분노가 한꺼번에 치밀어 그에게 덤벼들고 만다. 벤츠에 타고 있던 운전사가 내리면서 트럭에 치여 죽으면서 상황은 일단락이 되지만, 그는 이미 엉망이 되도록 맞은 상태이다. 여자 친구에게 차인 날, 생전 처음 보는 남자에게 얻어맞고 아무도 없는 뒷골목 구석에서 비를 쫄딱 맞고 있는 신세라니, 왜 이렇게 재수가 없는 걸까 생각했지만, 그렇게 인연이 되어 그는 아리따운 그녀, 수정과 하룻밤을 함께 보내게 된다. 하지만 우연히 휘말린 이 사건으로 인해 그의 앞날은 평탄치 못하게 흘러간다.

성욱은 침을 삼켰다. 괜찮을까? 그가 하려는 일이 과연 옳은 일일까? 입술을 깨물었다. 옳냐, 올지 않느냐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행동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전직 경찰로 해결사인 일도는 대한민국 제일의 사채업자인 방성환의 의뢰를 받는다. 그의 아들 방태수가 바로 버스 정류장에서 수정을 난폭하게 폭행했던 벤츠의 그 남자였던 것이다. 그는 아들과 잠깐 사귀었다가 돈을 가지고 도망쳤던 여자를 찾아달라고 일도에게 의뢰를 한다. 아들이 뒤통수를 맞은 것이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그는 수정을 찾아내기 위해 뒷조사를 시작하고, 성욱과 수정 모두 쫓기는 신세가 된다. 수정이 근무하던 다이어트 회사의 사장이 방태수였고, 불법적인 운영을 하는 것을 수정이 알게 되어 회사를 나와 협박 받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성욱은 위험한 일이라는 걸 알지만, 수정을 도와 증거물과 돈을 거래하는 것을 돕기로 하지만, 거래 장소에서 수정은 방태수를 차로 치여 죽이고 혼자 사라져버린다. 방태수의 비서인 석구는 그녀가 사실은 꽃뱀에 사기 전과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성욱은 그녀의 정체에 대해 알 수 없지만 어쩐지 그녀를 믿어주고 싶다. 그렇게 이리저리 얽히고 설켜 인물들이 엮이고, 사건은 점점 막바지로 치달아간다.

지금껏 목적 없이 그럭저럭 살았던 성욱의 인생에 '단 하나의 동기' 같은 게 생겨버린 이후, 그는 갑자기 평범하고 소심한 남자에서 용기 있고 정의로운 인물이 되어 간다. 수정과 함께라면 뭐든 해낼 수 있을 거란 믿음이 그에게 그런 무모한 용기를 심어 주었던 것이다. 매번 시험에 낙방하기 전까지만 해도 자심 감이 넘치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렇게 몇 년을 허탕 친 후에 간신히 출판사에 취직한 이후로는 대충대충 시간을 때우면서 늘 성공한 친구들의 험담으로 시간을 보냈던 그였다. 그런데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도 달라져야 할 때라는 걸 스스로 깨닫게 된 것이다.

'여기 이 비열한 거리를 지나가야만 하는 한 남자가 있다. 그 자신은 비열하지도 않으며 세속에 물들지 않았으며 두려워하지도 않으면서.'

작가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이 구절을 읽으며 어둡고 을씨년스러운 거리를 꿋꿋하게 걷는 한 남자의 뒷모습을 떠올렸다고 한다. 어쩌면 비열한 거리를 걷는 그 남자는 그냥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하고 소심한 남자일지도 모른다고, 단지 지켜야 할 무언가가 있기에 이를 악물고 버티는 게 아닐까 하고. 그것이 이 작품의 시발점이다. '비주류 연애 블루스'라는 말랑말랑한 제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말이다. 그렇다. 사실 제목과 표지의 분위기만 보고는 가벼운 멜로 인줄 알았는데, 웬걸 진행되는 스토리는 다소 어둡고, 긴박감 있고, 흡사 스릴러 영화라도 한 편 본 것 같은 느낌마저 준다. 영화 '비열한 거리' 처럼 변해가면서 성숙해져 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던 거라면, 왜 이런 의문스러운 제목을 달아놓았는지 의아할 정도로 말이다. 무엇이 평범한 남자를 비열한 거리에서 버틸 수 있게 만드는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라면, 그에 맞는 제목을 달아두었다면 훨씬 더 많은 낫지 않았을까. 이야기는 재미있었는데, 제목 때문에 어쩐지 스파게티를 뚝배기 그릇에 담은 듯한 어색함이 남아 아쉬웠다.

하지만 스피디하게 진행되는 스토리는 흥미로웠고,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평범한 플롯이었지만 우리의 주인공이 스스로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은 공감할만했다. 게다가 지루하지 않아 킬링 타임 용으로는 나쁘지 않은 작품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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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논 레터스
헌터 데이비스 지음, 김경주 옮김 / 북폴리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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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작가이자 사상가인 모리스 블랑쇼는 소통의 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글로 쓰는 말들은 고유의 목소리와 영혼, 공간, 대기를 갖는다. 말은 말 자체로 존재함과 동시에 그 의미가 가리키는 장소로 독자를 운반해 가는 힘을 지녀야 한다."

비틀즈와 존 레논이라는 엄청난 스타에 대해서는 이미 숱한 평전들이 출간되었었지만, 이번 작품집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단순한 평전이 아니라 존 레논이 주변 사람들에게 보낸 엽서와 편지들을 긴 세월에 걸쳐 찾아 모으고 복원해서, 비즐트 공식 전기 작가인 저자의 해석을 곁들여 엮어 낸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날 것 그대로의 생생한 존 레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팬이라면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이 될 것이다.

존 레논은 기쁘거나 짜증나거나 증오심이 치밀거나, 유쾌하거나 화가 나는 그 모든 순간에 자신의 감정을 음악뿐만 아니라 글로도 남겼다고 한다. 그는 영감이 떠오르거나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을 때면 언제나 자연스럽게 펜과 종이를 꺼내 들었다고 한다. 가족, 친구, , 신문사 등에 타자기로 편지와 엽서를 써서 보냈다고 하는데, 이 책을 읽다 보면 그의 위트와 설득력, 지혜로움 뿐만 아니라 분노와 고뇌까지 엿볼 수 있다. 그가 작사한 노랫말과 시집 두 권은 대중에게 알려져 있지만, 그가 남긴 편지들을 출판하는 것은 이 책이 처음이라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 같다.

 

소설가 E.M.포스터는 편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편지는 좋은 편지로 분류되기 전 두 가지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우선 쓰는 사람의 인간성을 드러내야 하고, 그 다음으로 받는 사람의 인간성을 드러내야 한다."

저자는 존의 친척과 친구, 팬들과 애인, 심지어 세탁소 앞으로 쓴 편지와 엽서까지 무려 300여 점을 추적해서 그것들을 수집했다. 그리고 편지의 사연을 하나하나 소개하고, 편지들이 쓰일 당시에 존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누구에게 썼고 어떤 내용과 맬락의 편지인지를 상세하고 설명해주고 있다. 우리는 그 편지를 통해서 존의 삶과, 당시 그가 가졌던 고민과 두려움, 열정 등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천재적인 뮤지션이 아니라 인간 존 레논의 맨 얼굴을 만나는 기분이 들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얼마 전 고인이 된 가수 신해철씨가 자꾸 생각이 났다. 의료사고일지도 모르는 죽음에 대한 문제로 아직 시끌시끌하지만, 너무도 젊은 나이에 맞이하게 된 죽음이라 가족들도, 팬들도 쉽게 그를 놓을 수 없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특히나 음악인의 죽음은 그가 떠나도 우리 곁에 그 음악이 항상 있기 때문에 더욱 애잔하고, 그 슬픔이 오래 가는 거 아닐까. 비단 그 뿐만 아니라 이른 나이에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존 레논을 비롯해서 여러 유명인들이 젊은 나이에 불꽃처럼 생을 피우다 갔다. 꽉 차지 못한 이른 죽음은 어딘지 황망한 기분을 주변인들에게 떠 남기고 만다. 물론 저 곳으로 가야 하는 그의 발걸음도 그들을 보며 쉽사리 뗄 수 없겠지만 말이다. <존 레논 레터스>가 너무도 알차게, 소중한 정보들을 모아 만든 책이라 그런지 신해철씨를 비롯해서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이들의 이런 책이 또 출간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남긴 글들과 생의 자취들을 따라가며, 남겨진 이들이 그를 더욱 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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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 그릴스, 뜨거운 삶의 법칙
베어 그릴스 지음, 김미나 옮김 / 이지북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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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으로부터 내가 배운 것은 가장 어두운 시간을 지나고 나서야 새벽이 온다는 것이다.

디스커버리채널의 모험 프로그램 [Man vs. Wild] [Born Survivor] 등에 출연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베어 그릴스의 책은 국내에 여러 권 나와 있다. 사막에서 살아남기, 숲 속에서 살아남기, 정글에서 살아남기, 늪지대에서 살아남기 등등 제목만 들어도 극한체험 같은 그의 '무한도전'을 그리고 있는 책들이다. 그는 이미 국내에서도베어 형이라는 친근한 별명으로 불리며 두터운 마니아 층을 형성하고 있다고 한다. 디스커버리채널의 모험 프로그램은 최소한의 장비만 가지고 극한의 환경에서 살아남는 여러 가지 생존 기술을 보여주었고, 그 덕에 그를 지구상 그 어떤 혹독한 야생에서도 살아남은 남자, 생존 왕으로 불리게 해주었다. 이 책은 그의 가족 이야기와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전 세계 최강 영국 군특수부대 SAS에 입대하기까지 겪었던 혹독한 일들, 척추뼈 세 개가 부러져 다시 걸을 수 없을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도 에베레스트 등반을 꿈꾸고 결국 그것을 실현한 그의 실제 삶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흉터와 부러진 뼈들, 끊어질 것처럼 아픈 사지와 욱신거리는 등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들은 내게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일깨워주는 작은 암시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저 아마도, 내가 인정할 수 있는 것보다 실은 내가 훨씬 더 연약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극지, 사막, 바다, 정글 인간은 인간이 도저히 생존할 수 없는 곳에서 조난을 당하고 또한 이겨내는 세계 최고의 탐험가 베어 그릴스는 사실 유명한 정치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게다가 왕족들이 유학을 간다는 영국 명문대 출신이고 말이다. 머리도 좋고 공부도 잘했고, 가문도 좋았던 그가 왜 이리 험난한 삶을 선택하게 되었을까.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선택은 계획적인 부분보다는, 우연인 경우가 많다. 그의 단짝 친구 트러커와 대학의 예비 장교 훈련소에서 SAS 출신 장교의 모습에 자극을 받고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군인에 대한 꿈을 키워나가게 된다. 그런데 SAS 입대 후 낙하산 추락 사고로 일생일대의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때 그는 앞으로 걸을 수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놓였지만, 그런 엄청난 절망 속에서도 에베레스트 등반을 꿈꿨다. 항상 모험을 즐겼던 아버지의 영향이기도 했고, 그는 결국 인생 최대의 위기를 극복한 이후 끝내 등반에 성공한다.

 

그는 남들이 다 하는 일, 남들이 다 가는 길이라서 가야겠다고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고, 직접 경험한 것들을 통해 삶의 지혜를 깨닫는다. 불의의 낙하산 사고로 척추가 세 조각으로 부러지면서 의가사 제대를 한 그가 기적적으로 몸이 회복되자마자 2년 만에 세계 최연소 에베레스트 정복으로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렸던 것도 그의 정신력이 가장 큰 힘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때 나이는 불과 스물셋이었으니 말이다. 이후 그는 세계 곳곳을 누비며 획기적인 탐험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다. 가장 큰 위기가 그의 삶에서 가장 큰 도전이 되었던 셈이다.

이 책을 읽는데, 문득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 한 장면이 떠올랐다. 동물들을 싣고 캐나다 이민 길에 나선 어린 10대 소년 파이가 배가 난파된 뒤 살아남은 사나운 호랑이와 함께 227일 동안 태평양을 표류한 그 이야기에 말이다. 먹고 마실 것도 없거니와, 몸을 따뜻하게 할 것도 없고, 상어 떼의 습격을 받을 수도, 리차드 파커라는 이름의 호랑이에게 물려 죽을 수도 있는 고독하고도 무시무시한 상황에 처한 소년 파이야 말로 극한의 상황에 처한 인간의 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니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순간에 약간 싸우다가 희망을 놓아버리거나, 한숨지으며 살기를 포기하거나, 혹은 어떤 대가를 치르든 싸우고, 불확실한 희망에 모든 것을 건다. 어린 소년 파이는 명백하게 후자였다. 게다가 그는 살겠다고 결심한 이후, 쳐다보고 있기만 해도 무서운 호랑이를 길들여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그는 마음 한편으로는 호랑이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호랑이 마저 없었다면 막막한 태평양 한 복판에서 절망을 껴안은 채 자신 혼자 남겨질테니까 말이다. 절망이 호랑이보다 훨씬 무서운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어린 소년이, 그것도 희망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어쩐지 베어 그릴스 또한 늘 이와 같은 상황에서 파이와 같은 선택을 하는 게 아닐까 싶어 책을 덮으면서 뭉클해졌던 것 같다. 살아 있다면 모든 순간이 서바이벌 상황이다. 우리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간이니까. 내 앞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니 살아있는 모든 순간을 즐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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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취록 - 조선 최고의 예언서를 둘러싼 미스터리
조완선 지음 / 북폴리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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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올해 내 운수가 어떨지 토정비결을 보곤 한다. 몇 년 전부터는 타로 점까지 가세해서 카페에서 쉽게 운을 점쳐 볼 수 있는 시대이니, 다들 재미로라도 한 번쯤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라. 자신의 미래를 정확히 맞췄던 적이 있을까. 그 누구도 인간의 미래를 내다볼 수는 없다. 그저 심리적인 위안을 위해서, 단순한 오락거리로 재미 삼아 보는 거지만, 그래도 내심 마음 한 켠에선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불안한 내일이 궁금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게 대체 어떤 책이길래 사사건건 끼어드는 거요? 이게 정말 팔자를 고칠 정도로 값이 나가는 책입니까?”

안기룡의 아내도 그런 소리를 했다. 이 책 한 권이면 팔자를 고칠 것이라고.

“하여튼 귀신이 붙은 책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소.”

“귀신이 붙은 책이라뇨?”

“이 책과 엮인 자들은 죄다 저 세상으로 갔으니 말이오. 그러니 귀신 들린 책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섬뜩한 소리였다. 명준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조선 중기 이후 민간에 성행하였던, 국가운명에 관한 예언서로 '정감록'이라는 것이 있었다. 비록 허무맹랑한 도참설·풍수설에서 비롯된 예언이라 하지만, 당시 오랜 왕정에 시달리며 조정에 대해 실망을 느끼고 있던 민중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광해군·인조 이후의 모든 혁명운동에는 거의 빠짐없이 정감록의 예언이 거론되었다고 하니, 그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비취록>은 바로 이 '정감록'에서 모티브로 삼아 시작된 작품으로 19세기의 예언이 21세기의 현실로 나타난다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조완선 작가의 전작인 <외규장각 도서의 비밀>, <천년을 훔치다>를 떠올려보자면, 비록 '비취록'이 허구의 예언서이지만 얼마나 설득력 있게 그려질지 짐작이 될 것이다. 게다가 전체적으로 추리소설의 플롯을 가지고 치밀한 역사 고증을 통해 이야기를 꾸려가고 있어 매우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펼쳐지고 있다.

이야기는 고서 감정 전문가이자 역사학자 강명준 교수에게 누군가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고서점을 운영하는 최용만으로 '비취록'이라는 예언서를 들고 나타나 다짜고짜 진품 여부를 확인해 달라고 하는데, 한눈에도 심상치 않은 책이라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그런데 그는 다시 오겠다는 말만 남긴 채 일부 복사본 샘플만 던져주고 사라진 뒤 연락이 없다. 그리고 며칠 뒤 수상한 전화가 걸려와 강교수를 협박하고, 이어 강력계 형사가 찾아와 최용만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알려준다. 그리고 계룡사에 은둔한 사찰 쌍백사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은 해광스님의 사인을 밝히기 위해 유정스님이 도착한다. 쌍백사라는 곳은 여러모로 일반 사찰과는 달랐는데, 해광이 남긴 수첩 속의 문구들은 그런 의심을 더욱 기폭 시켰다. 이렇게 두 가지 이야기가 병행되면서 진행이 되는데, 결국 쌍백사라는 교집합에 의해 이야기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최용만이 죽고, 그를 살해했을 것으로 보이는 용의자 안기룡마저 살해당하고, 그들 두 사람이 쌍백사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두 형사가 사찰에 방문하지만 또 다른 죽음을 목격하게 된다

'이 고서에 적힌 대로라면...... 그러니까.....조만간 우리나라에......아주 심각한 일이.....벌어질 것 같단 말이지. 흠흠, 내가.... 예언 글귀를 좀..... 풀 줄 아는디 말이여. 청양지세는 을미년, 바로 올해를 말하는 게 아니유?'

최용만의 목소리였다. 그는 실종되기 전에 연구실로 전화를 걸어 이 같은 소리를 늘어놨었다. 조금씩 꼬인 매듭이 풀어지고 있었다.

마치 사이비 종교처럼 보이는 수상한 종교단체부터, 옛 고서의 비밀을 파헤쳐가는 이야기까지 추리 소설로서의 긴장감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어 역사 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도 수월하게 읽혔던 작품이다. 20세기 초반에 한때 각종 예언이 범람했었지만, 시대는 어느덧 21세기에 이르렀다. 과연 예언서는 미래를 보는 눈일까.에 대해 의문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예언서가 불행에 빠진 당시 사회의 열망을 담고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진인이 출현하여 혼탁한 이 세상을 뒤엎고 백성을 구제할 것이라는 예언은홍경래의 난이 있던 시절이나, 어쩌면 어지러운 지금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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