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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5.18민주화운동 사망자는 모두 606명으로,
이 가운데 165명은 항쟁 당시 숨졌고, 행방불명이 65명, 상이 후 사망 추정자는 376명이다.
이 중 30명은 만 18세 이하였다. (고등학생 11명, 중학생 6명, 초등학생 2명)
26년이 지난 현재, 65명이 행방불명자로 등록되어 있으며
최초 발포 명령자와 장소는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1980년 5월 18일부터 열흘간 있었던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의 상황과 그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중학교 3학년이던 소년 동호는 친구 정대의 죽음을 목격한 것을 계기로 도청 상무관에서 시신들을 관리하는 일을 돕게 된다. 매일같이 합동분향소가 있는 상무관으로 들어오는 시신들을 수습하면서 바라본 열다섯 어린 소년의 시선은 어떨까. 소년의 눈에 입관을 마친 뒤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르는 것도,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것이며,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느냔 말이다.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궁금해하던 소년이 물었을 때 함께 있던 누나들 중 한 명은 이렇게 대답한다.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잖아, 권력을 잡으려고. 너도 봤을 거 아냐. 한낮에 사람들을 때리고 찌르고, 그래도 안되니까 총을 쐈잖아. 그렇게 하라고 그들이 명령한 거야. 그 사람들을 어떻게 나라라고 부를 수 있어.
아마도 가슴이 먹먹해지기 시작했던 건 이 지점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5.18 당시의 상황을 기억할만한 세대도 아니거니와, 주변에 그와 관련된 이들을 만나본 적도 없었기에 솔직히 영화나 책으로만 접했던 그 사건이 어느 먼 외국의 일인 것처럼, 그러니까 남의 일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했었다. 가끔 관련된 소재의 영상을 접하거나, 영화를 보게 되거나 할 때 너무도 어이가 없어 그들의 입장에서 분노가 느껴지긴 하지만, 그건 그 순간일 뿐 이야기가 끝이 나면 다시 너무도 먼 남의 이야기처럼 보이는, 차라리 사실이 아니었기를 바라고 싶었던 비현실적인 사건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 작품을 읽어 가는 내내, 어쩐지 숨죽이고 가슴 조이며 읽었던 것 같다. 편한 마음으로, 그저 소설을 읽는 다는 기분으로 읽어나가기엔 너무도 무겁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한강은 열 다섯 살 소년 동호의 죽음을 중심으로 5.18 당시 고통 받았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펼쳐낸다. 6개의 이야기와 에필로그는 각 장마다 화자가 다르고, 5년뒤, 10년뒤, 20년뒤.. 이렇게 시간을 건너면서 이어진다. 무자비한 국가의 폭력이 한 순간에 무너뜨린 순박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과 무고하게 죽은 어린 생명들.. 열 여섯 살 짜리가 자신이 마치 일흔여섯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을 만큼 영혼이 부서진다는 게 대체 어떤 걸까.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데모로 점철된 대학생활 대신 작은 출판사에서 일했던 여고생 은숙은 원고의 검열 문제로 끌려가 맞은 일곱 대의 뺨을 맞는다. 봉제공장에서 일하며 노조활동을 하다 쫓겨난 선주는 경찰에 연행된 후 하혈이 멈추지 않는 끔찍한 고문을 당한다. 대학생 진수는 연행된 이후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을 받으며 끔찍한 수감생활을 했고, 출소 후 트라우마로 고통 받다 결국 자살하고 만다. 이들은 살아 남더라도 생이 치욕스러운 고통이 되거나, 일상을 전혀 회복할 수 없어 35년이 지난 지금도 괴로워하고 있다. 왜냐하면 어떤 기억은 영원히 아물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그것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들이 서서히 마모되어 사라지는 것이다.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 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당시, 인구 40만의 광주 시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군인들이 지급받은 탄환은 80만발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국가의 부조리에 맞서도록 어린 그들까지 시위현장으로 이끌었던 강렬한 힘은 다만 ‘깨끗하고도 무서운 양심’ 하나였다고 한다. 그들도 당연히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언가가 그들을 압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양심'이다.
살아남은 이들은 날마다 혼자서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운다.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운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도 싸운다. 과연 이게 살아있는 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무자비한 군인들도, 그런 명령을 내렸던 이들도 모두 인간이었다. 지금 우리가 ‘날마다 만나는 모든 이들 또한 인간이란 것을 되새겨보자니, 어쩐지 고개를 들 수가 없을 것만 같다.
누군가에게 조그만 라디오를 선물 받았다. 시간을 되돌리는 기능이 있다고 했다. 디지털 계기판에 연도와 날짜를 입력하면 된다고 했다. 그걸 받아 들고 나는 '1980.5.18'이라고 입력했다. 그 일을 쓰려면 거기 있어봐야 하니까. 그게 최선의 방법이니까.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인적 없는 광화문 네거리에 혼자 서 있었다. 그렇지, 시간만 이동하는 거니까. 여긴 서울이니까. 오월이면 봄이어야 하는데 거리는 십일월 어느 날처럼 춥고 황량했다. 무섭도록 고요했다.
...그러던 어느 날,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오랜만에 외출을 했다. 2013년 1월의 서울 거리는 며칠 전의 꿈속처럼 황량하고 차가웠다. 예식장의 샹들리에는 화려했다. 사람들은 화사하고 태연하고 낯설어 보였다. 믿을 수 없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이 죽었는데.
사랑하는 이들이 죽은 뒤 제대로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자신의 삶 자체가 장례식이 되어 버린 이들. 만약 그 해 봄과 같은 순간이 다시 닥쳐온 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절대로 아물지 않는 기억들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한강이 마음을 다해 쓴 이 글을 조금 더 많은 이들이 읽어 상처 입은 영혼들을 위해 모두 기도할 수 있었으면 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