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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
강희진 지음 / 비채 / 2014년 5월
평점 :
인조 14년(1636년). 병자년의 겨울.
임금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세 번 큰절을 올리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했다. 이듬해 3월이 되자 조선 원정군의 주력부대는 다시 압록강을 건넜다. 임금은 청의 신하가 되어 궁궐로 돌아왔으며 신료들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더 높은 품계를 받은 신하들도 있었다. 누구도 전쟁에 대해, 패배와 굴욕, 죽음과 상처에 대해 책임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꽃이 피고 또 졌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다. 그리고...
우리가 잊고 싶어하는 역사, 혹은 무심코 잊어버리고 사는 치욕의 역사는 오늘날 우리의 또 다른 삶을 반추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최근에 이런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세월호 선장과 병자호란 당시 지도자들의 서로 닮았다는 것이다. 배와 승객을 버리고 제일 먼저 도망간 선장과 아무런 방어대책이 없는 상황에서 백성들을 전지에 남겨두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국왕은 모두 리더의 책임감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 거울과도 같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오랑캐 황제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의 역사를 만들었다. 인조는 과거 정권을 뒤엎는 데는 성공했지만, 집권 이후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데는 실패했고, 그 피해는 백성의 피와 눈물로 고스란히 나타났다.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일을 우리가 다시 돌이켜봐야 하는 이유는, 이것을 비단 과거의 일이라고 치부하기엔 현재의 상황이 심상치가 않은 것이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소통과도 같다. 그러니 기억하고 싶지 않은 비참한 역사 속에서도 우리는 오늘날의 자화상을 발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조는 피눈물 흘리는 노파의 오열을 듣고서야 병자호란이 끝난 지 1년 1개월 만에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했고, 박근혜 대통령 역시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14일 만에야 겨우 국민들에게 사과했다. 지도자가 무능하면 그 시련이 국민의 처절한 고통으로 고스란히 전가된다
김훈은 <남한산성>에서 조선 왕이 오랑캐의 황제에게 이마에 피가 나도록 땅을 찧으며 절을 올리게 만든 역사적 치욕을 정교한 프레임으로 복원한 적이 있다.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무기력한 왕과 그를 둘러싼 권력 다툼속에 고통 받는 민초들의 삶은 참담하고 쓸쓸했다. 강희진이 그리는 <이신>에서는 평범한 행복을 꿈꾸었으나 포로사냥의 희생자가 되어 가족을 잃고 인간성조차 말살 당한 남자를 내세워 착한 백성들의 한과 서늘한 분노를 대변한다.
도대체 누가 누구더러 절개를 다시 회복하라고 하는가? 김씨 부인이 그 동안 공부한 바로는 조선의 그 누구도 청나라에서 돌아오는 아녀자들에게 손가락질 하거나 정절을 지키지 못했다고 시비할 자격이 없었다. 혹시 그런 말을 할 선비가 있다면 그는 이미 죽은 사람들일 거라고 김씨 부인은 믿었다. 그들이 무슨 권리로 회절강을 만들어, 그렇잖아도 끔찍한 삶을 경험한 여인들에게 또 다른 멍에를 지우는 촌극을 벌인다는 말인가? 또 한번 버린 정절이 물로 씻는다고 회복될 수 있단 말인가? 만일 회절강이 있다면 그 강물에 가장 먼저 몸과 마음을 씻어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교지를 내린 오랑캐의 주구, 즉 임금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시련이 환향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병자호란의 희생양으로 청국에 끌려갔던 조선의 아녀자들은 환황녀라는 이름으로 멸시당하고, 정절을 훼손했다는 이유로 죽음에 이른다. 대체 누가 그들을 그 지경으로 몰아넣었는가? 참혹한 전쟁을 막지는 못하고 백성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던 이들이 간신히 살아온 아녀자들에게 정절 운운하는 대목은 기가 찰 정도이다. 사대부들은 심양에서 돌아온 환향녀들과 재결합을 거부하고, 이혼하고 새 장가를 들 수 있도록 해달라고 왕에게 주청을 올렸다. 더러운 몸으로 조상의 제사를 받을 수 없다는 핑계였다. 수많은 사대부가의 환향녀들이 쫓겨나거나 자결을 강요 받았고, 그에 불응할 경우 은밀히 살해되는 경우도 드문 일이 아니었다. 염치 같은 것은 애초에 없는 망종들이었던 것이다. 자연히 환향녀들의 자살이 끊이지 않았다. 아녀자들이 전쟁을 벌인 것도 아니고, 전쟁에 진 것도 아녀자들의 잘못이 아니건만 전쟁으로 인한 단죄가 왜 아녀자들의 몫이 되어야 하느냔 말이다. 일본군에게 성노예로 끌려간 위안부를 두고 그들이 자발적으로 따라다녔다고 말하는 망언만큼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어불성설의 참담한 책임 회피는 세월호를 둘러싼 현재의 우리 현실에서도 보여지는 모습이라 안타깝고, 화가 난다.
환향녀(還鄕女).. 고향[鄕]에 돌아온[還] 여자[女]가 뭘 어쨌단 말인가. ‘화냥년’이라는, 손가락질의 표적으로 변질된 원통하고 서러운 이름. 나라의 패전으로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청국에 끌려간 여인들이다. 당시에 임금은 교지를 내려 한강, 소양강, 금강, 예성강, 대동강 등을 회절강이라 칭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아녀자들에게 그곳에서 회절하는 정성으로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렇잖아도 끔찍한 삶을 경험한 여인들에게 임금이 무슨 권리로 회절강을 만들고, 또 한번 잊어버린 정절이 물로 씻는다고 회복이 될 수 있단 말인지. 만일 진짜 회절강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곳에서 몸과 마음을 씻어야 할 사람은 오랑캐 황제에게 치욕스럽게 고개를 숙여야 했던 임금이 아니었을까.
이것이 하늘이 정한 이치라면 하늘이 존재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인간의 의지뿐이다. 그것만이 천명이다.
나쁜 왕은 죽여야 한다...
이신은 중얼거렸다. 오랫동안 품고 있던 진심이었다. 입 밖에 내고 보니 그가 정말로 원했던 것은 바로 그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왕을 죽여야 한다.
주인공 이신은 칙사라는 높은 지위까지 올랐으나 여전히 서얼이고, 사랑의 열병을 앓는 사내이며, 칼잡이이고, 잃어버린 아내와 딸의 꽃신을 만드는 갖바치였다. 이씨 왕조의 신하(李臣)로 살라는 뜻을 담아 이름 지어졌으나, 다른 왕을 섬긴 이신(貳臣)이 된 그를 통해서 국가에 복수하는 것은 평범한 백성들 모두의 염원이 아니었을까. 이신은 청나라의 칙사가 되어 조선으로 돌아와 마찬가지로 청으로 끌려갔던 아내와 딸을 찾으면서,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을 져야 할 이들을 향해 복수를 계획한다. 이신(李臣)에서 이신(貳臣)으로 그의 삶이 바뀌게 만든 그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이들에게 말이다. '평범한 남자'를 통해 17세기 조선의 사대부를 단죄하는 일은 물론 그리 쉽지도, 만만치도 않다.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 쓰여진 이야기라서, 병자호란을 전후로 한 인조와 서인 세력의 무능과 전쟁의 후유증이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전달된다. 하룻밤도 편하게 잠들어본 적 없는, 고독하고 고독한 남자 이신. 모든 것을 잃어 버린 그의 통탄한 마음은 착하게 살았기 때문에 별다른 저항도 할 수 없이 죽어간 백성들의 그것과도 같다.
강희진은 이토록 참혹한 비극이 있었다면 전쟁을 부른 당사자들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함에도 흐지부지 끝나버린 400년 전의 역사에 주목해서 이 작품을 쓰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17세기 조선 사대부들의 모습은 오늘날의 사회지도층과 크게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400년이 지나도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 안타깝고 부끄럽다.
진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만화경처럼 눈에 비춰질 뿐, 무엇이 비춰지게 할 것인가를 정하는 것은 바로 권력이었다. 중요한 것은 백성들에게 그들이 진실을 알고 있다고 믿게끔 만드는 것이다. 임금은 그 일을 아주 능숙하게 해내고 있었다.
강화도 나루터에서 몸을 던진 여인들, 청으로 끌려가 모진 매질과 고신에 죽어간 사람들, 가족과 모든 것을 잃고 어두운 골짜기에서 죽어간 수많은 백성들의 원한은 아무도 갚아주지 않았다. 그 모든 일을 벌인 임금은 여전히 임금이고, 사대부들은 여전히 사대부였으니까 말이다. 어차피 허구인데 더 끝까지 가버리지, 결말이 조금 허무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나는 작가의 이런 시도만으로도 어쩐지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과오는 있으나 책임이 없는 그들에게 보란 듯이 이신처럼 그런 존재가, 현재의 세상에서도 언젠가는 나타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희망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치욕스러운 역사를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고,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