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러운 살인
엘리자베스 조지 지음, 김정민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개인적으로 국내에 처음 번역되어 출간되는 장르소설 작가들의 책은 무조건 읽어보려고 하는 편이다. 물론 나에게 검증되지 않은 작가이므로 때로는 실망하지만, 가끔은 상상도 못한 보석을 발견하게 되는 재미도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만난 엘리자베스 조지의 <성스러운 살인>은 완벽하게 잘 쓰인 미스터리 물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예측 불가능하고 매혹적인 인물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오랜만에 오롯하게 캐릭터의, 캐릭터를 위한, 캐릭터에 의한 작품을 만난 듯한 기분이다. 그동안 숱한 장르 소설을 탐독했던 나는, 이 작품 속의 토머스 린리 경위와 바버라 하버스 경사, 둘 사이의 파트너 십을 그 이전의 어떤 작품에서도 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이야기의 배경은 마치 오래된 미스터리 물 같은데, 그 속에 굉장히 모던한 오늘날의 두 형사를 투입했다고나 할까. 사실 뭐 이런 캐릭터가 다 있어. 로 시작해서 작품이 끝날 무렵 즈음에는 이들에게 아주 푹 빠져서 그들이 실재한다면 어떨까.하는 생각까지 하기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이 작품은 영국 BBC와 미국 PBS 인기 드라마린리 경위 시리즈원작이며, 린리 경위 시리즈는 현재까지 무려 18권이나 출간되었다. 20년 넘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캐릭터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결과일 것이다.

 

 

숲과 목초지의 지극히 안전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에 에워싸여 있는 마을에서 머리가 없는 사체가 발견된다. 사건 현장인 농장에서는 아버지의 사체 앞에 앉아 있던 딸 로버타가 있었다. 그녀가 내뱉은 소름 끼치는 한 마디.

 

"제가 했어요. 하지만 후회하지 않아요."

 

그녀는 그 말 뒤로 입을 닫아버리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 로버타가 아버지를 죽였을 리 없다고.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린리와 바버라가 팀이 되어 파견된다. 그러나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순탄치 않다. 그들이 팀을 이루게 되고 처음 만나게 되는 순간을 묘사한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그늘에 안전하게 숨은 채 바버라는 린리가 다가오는 걸 지켜봤다. 그의 동작은 고양이같이 우아하고 여유로웠다. 바버라가 본 남자 가운데 단연 최고의 미남이었다. 그녀는 그런 그를 혐오했다.

 

어쩌면 토머스 린리 경위와 바버라 하버스 경사의 관계가 여타의 추리 소설 속에서처럼 평범하고 정상적이었다면 엘리자베스 조지의 이야기도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가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 속에서 미스터리적인 부분과 사건을 해결하는 부분도 충분히 흥미롭긴 하지만, 사실 그 플롯 자체가 새로운 건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는 사건을 추리하고,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것보다는 두 인물이 결합하는 방식, 그가 그녀에게 의도치 않게 상처를 주는 방식, 그녀가 스스로로 하여금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도록 내버려두는 방식 같은 것들에 더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인물에 대한 묘사와 그들의 관계와 상황에 대한 설명이 작품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이 사건 해결을 위해 켈데일에 가기까지 무려 백 페이지가 넘는 부분이 할애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추리 소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충분히 진행되고 나서야, 직접적인 수사 과정을 만날 수가 있지만, 아이러니한 건 전혀 지루할 틈이 없다는 것이다.

 

 

토머스 린리는 귀족 가문의 엘리트 미남 형사로 주변에 여자가 끊이지 않는다. 바버라 하버스는 노동자 계층의 까칠한 추녀로 자격지심으로 가득 차 있다. 옥스퍼드 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사립학교 출신다운 고상한 말씨에, 빵빵한 족보를 가진 상류층에다, 총명함과 넘치는 매력까지 가진 그의 곁에는 여자가 끊이지 않는다. 부서를 가리지 않고 여자들과 잠자리를 했으므로 그는 씨받이 경주마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에 관한 온갖 소문이 난무했다. 나이 서른인 그녀는 확실히 매력 없는 외모를 지니기도 했지만, 스스로 전혀 꾸미지 않는데다 못마땅한 듯 찡그려진 채 굳게 앙다물어져 표정 덕분에 전적으로 접근 불가능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러니 바버라 입장에서는 상사들이 린리에게 사건을 맡기고 싶었으나, 여자 수사관도 필요했고, 범죄 수사부 여자 가운데 린리 주변에서 안전할 사람은 한 명도 없었으므로 그 대단한 린리 옆에 있어도 정숙이라는 두 글자에 먹칠하지 않을 유일한 행운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는 자신을 선택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하버스에 대해 알고 있었다. 누구나 그녀에 대해 알았다. 그녀는 신속하게 맥퍼슨, 스튜어트, 그리고 헤일을 떠밀어내며 범죄 수사 부에서 신임 시절부터 참혹한 실패를 기록해왔다. 세 사람은 다들 함께 일했으면 하고 바라는 가장 무던한 경위들이었다. 특히 맥퍼슨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유연한 유머와 아버지 같은 푸근함을 지녔는데, 하버스 같은 사람에게 특별한 멘토가 되고도 남았다. 그는 살아 있는 곰돌이 인형이었다. 그와 함께 일하는 데 실패한 경사들이 있었던가? 하버스 딱 한 사람뿐.

 

이 대목은 린리를 포함해서 범죄 수사부 대다수가 바버라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그녀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게다가 그녀는 <제가 은행에 돈을 쌓아놓고 이름에 귀족 직함이 붙고 눈에 뵈는 대로 여자, 남자, 아이, 또는 동물까지도 잠자리에 끌어들이길 마다하지 않는다면 전 경정님의 귀하신 부서에서 일할 자격이 충분하겠죠.> 라고 이야기 할 정도로, 못생긴 외모와 가정사로 인해 콤플렉스로 똘똘 뭉쳐진 상태이다. 재미있는 건 린리의 성격이다. 그는 자신을 비웃는 말에도 가벼운 어투로 농담을 할 줄 아는 여유로움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린리를 지독히 증오하는 니즈 총경이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그에게 악담을 퍼부을 때도 그는 유유자약하다.

 

바버라는 타인을 공격하려는 남자의 욕구를, 또는 그 욕구를 완성시키려는 인간 본연의 야만성을 그토록 적나라하게 접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지금 그 실체를 니즈를 통해 그의 태도에서, 독수리 발톱 같은 손가락을 엉거주춤 말아 쥔 주먹에서, 목에 돋아 꿈틀거리는 핏줄에서 보고 있었다.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건 린리의 반응이었다. 처음에 잠깐 긴장하고 난 뒤, 린리는 비정상적으로 태연자약했다. 때문에 니즈의 화가 더욱 격렬해지는 듯했다.

 

왜냐하면 린리는 니즈가 스트레스를 받아 폭발 직전까지 이르렀다는 점을 이해하기 때문에, 5년 전의 대립에 관해 원색적으로 조롱을 퍼부어대는 일이 그자에게 잠깐만이라도 스트레스를 벗어나게 해준다면, 그에게 기꺼이 그 자유를 주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그들을 지켜보는 다른 이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태도이지만 말이다.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있고, 참을 수 없는 진실 앞에서도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있는, 게다가 신분의 차이로 인해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의 아픔까지 가지고 있는 매력적인 그가, 평범하고 땅딸막한 여자, 세상을 못마땅해하고, 억울해하고, 친구도 없고 완전히 혼자인 바버라와의 파트너 쉽은 쉽지 않다. 좌충우돌, 이리저리 뒤죽박죽 그들의 관계는 어디로 튈지 모르게 흘러간다. 그들이 수사 과정에서 겪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스스로를 극복해가며, 서로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된다.

 

  

 

BBC 드라마 속의 린리와 바버라의 이미지는 책 속의 그것 과는 조금 차이가 있긴 하다. 일단 바버라가 심각한 자격지심에 빠져서 심사가 꼬여 있을 정도로 못생긴 얼굴이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는 않으니까. 린리도 조금 더 젊고 스마트한 이미지라고 상상했는데 그에 비하면 좀 느글거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페이지 속의 글자를 읽으면서 그 캐릭터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상상하게 만드는 그 힘이 아닐까 싶다. , 생각해보자.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리 차일드의 잭 리처, 제프리 디버의 링컨 라임,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 등의 캐릭터들을 생각하면 거의 즉각적으로 그 인물들이 실재하는 것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말하자면 이들은 일 차원의 피상적인 캐릭터가 아니라, 페이지 바깥으로 튀어나와 실제 하는 인물이 된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책을 읽지 않는 아이들도 조앤 K.롤링의 <해리 포터>를 미친 듯이 읽어대는 것은 바로 흥미로운 상황에 놓인 매력적인 인물 때문이다. 아마 플롯으로 기억되는 책은 백 년에 몇 권도 안 나올 것이다. 독자들의 뇌리에 남는 것은 플롯이 아니라 캐릭터이니 말이다.

 

바야흐로 캐릭터의 시대이다. 얼마 전에 시즌 3가 방영된 BBC의 셜록 시리즈를 떠올려보자.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19세기 명탐정 셜록 홈스를 21세기로 멋지게 소환해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탐정 캐릭터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TV와 영화를 통해서 셜록을 연기했던 수많은 배우들이 모두 다 이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아니란 걸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70여명의 배우들이 연기했던 셜록 홈스와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셜록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가장 큰 매력은 프록코트를 입고 스마트 폰, 노트북 등 디지털 기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엄청나게 빠른 말투로 자신의 생각을 쏟아내 상대방의 혼을 쏙 빼놓는, 이른바 소시오 패스라는 21세기형 캐릭터라는 점일 것이다. 배우가 가지고 있는 외모적인 개성마저도 정서적으로 코난 도일의 원작 속의 홈즈 처럼 느껴지게 만들 정도이니 말이다. 이렇게 잘 구축된 캐릭터는 스토리를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동일한 상황이라도 인물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기 때문에, 플롯은 주로 인물에 의존하게 된다. 따라서 인물이 키 포인트인 것이다. 등장인물이 작품 속 캐릭터가 아니라 독자들의 친구가 된다면, 그 인물은 한 번 읽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러니 정말 잘 만든 작품은 스토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작품이 흥미진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야기에 푹 빠질 숨은 독자들까지 끌어들 일 수 있는 방법, 그 마법의 열쇠가 바로 인물인 것이고, 이 작품은 충분히 그럴만한 마법을 일으키고 있다. 린리 경위 시리즈의 다음 편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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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저어
소네 게이스케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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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샤오밍이 그런 스파이가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국가 안전부 대 외국의 일본 담당 부서에 있을 때였다고 한다.

"거물 침저어(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아 지내는 어류)가 일본에 잠복해 있다."

침저어. 즉 슬리퍼(Sleeper)는 본국으로부터 지시가 있을 때까지는 대상국의 한 시민으로 살며 오로지 명령을 받았을 때만 활동을 시작하는 공작원을 말한다. 게다가 후샤오밍이 들었다는 그 침저어는 평범한 시민이 아니라 국회의원이라고 한다.

 

외무성에서 두견새라는 암호명으로 활동하는 정보 제공자로부터 국내에 침저어 맥베스라 불리는 스파이가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그걸 밝히기 위해 경시청 내에 팀이 꾸려진다. 유출된 기밀문서는 미국과 일본의 합동위원회가 정한 '요코타 페이퍼'라는 문건으로 타이완에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경우를 상정한 공동작전 계획이다. 이 요코타 페이퍼를 도쿄에 있는 침저어 맥베스가 중국에 흘렸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인데, 베이징에 있는 두견새도 결국 고국의 배신자이므로, 일본과 중국의 배신자 두 명에 의해 기밀문서가 왔다 갔다 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게다가 이 내용을 처음 알려준 후샤오밍 또한 사기꾼 망명자인지 정확하지가 않고, 맥베스란 인물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근거도 부족한 상황이다.

과묵하고 무뚝뚝한 후와와 그의 파트너인 와카바야시, 맥베스로 의심되는 아쿠타가와 의원의 비서인 이토 마리는 후와와 동창이다. 경시청 외사2과 형사들 내에서도 소리마치와의 껄끄러운 관계와 새로 프로젝트를 맡게 되어 외부에서 영입된 도쓰이 미사키. 수많은 사람들이 얽혀 무엇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어떤 정보가 진짜인지 이야기는 그렇게 휘몰아쳐간다. 때로는 가정을 배제시키고, 때로는 동료까지 의심하며 조용한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는 상황적 특수성이 만들어내는 아이러니와, 옳고 그름이 옳고 그름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업무적인 특수성이 이야기의 속도감을 올려준다. 극중 인물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이나 정의가 아니라, 오로지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고 제거하기 위한 온갖 음모와 협잡들이다. 페이지수가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이기도 하지만, 원가 내용 자체에 군더더기가 거의 없다. 처음부터 빠른 전개가 숨돌릴 틈 없이 돌아가는 상황과 맞물려 극적인 긴장감을 극대화 시켜준다.

 

와카바야시는 매우 띠어난 수사관이다. 특히 용의자 사진 가운데 범인을 골라내는 일은 그보다 더 잘해내는 사람이 없다. 그의 머릿속에는 언제 어떤 일로 조사한 남자인지, 어디의 누구와 연결되는 여자인지 바로 알아낼 수 있는 엄청난 양의 얼굴 사진이 저장된 메모리와 그걸 순식간에 찾아내 해석하는 CPU가 갖추어져 있다. 하지만 그런 두뇌도 다른 사람과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자주 멈춰버리고 만다.

일본과 중국, 미국 간의 정보 전쟁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이 작품은 첩보, 경찰 미스터리물이다. 첩보 물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존 르 카레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가 떠오르기도 하고, 경찰 미스터리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요코야마 히데오의 <64>가 떠오르기도 한다. 첩보물로서의 무게 감과 경찰 미스터리로서의 긴장감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앞서 언급했던 요코야마 히데오의 작품 속에서 느껴지는 수많은 정보와 치밀한 구성, 탄탄한 문장들에 비해서는 어딘지 허술하고, 존 르 카레의 작품에서 빠른 전개와 극적인 긴장감 너머 개인의 고독과 외로움에 비해서는 무언가 아쉽기는 하다. 하지만 기존에 소네 게이스케의 작품들을 읽어본 적이 있다면, 호러 물에서는 느껴볼 수 없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색깔을 느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무엇보다 첩보물의 가장 큰 특징이 복잡한 플롯인데, 이리 저리 얽힌 관계와 끊임없이 터지는 의외의 전개와 막판의 반전은 매우 흥미진진하다.

외사2과에서는 중국이나 북한의 정보 조직 및 관련 단체에 속해 있으면서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협력자를 스파이의 머리글자에서 따온 호칭으로 S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경찰 조직에 공인하는 협력자인 셈인데, S라는 존재를 통해 생겨나는 갈등도 사건을 증폭시키는데 도화선의 역할을 한다. 조직 내에서 스파이로 의심받는 캐릭터에 대한 심층적 묘사와 그로 인한 갈등과 인물의 고뇌, 그리고 계속 벌어지는 진실과 거짓의 뒤집기와 반전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이 작품이 총격전이 난무하는 유혈 스릴러 극보다 더한 서늘함을 심어주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인물들의 인간적인 고뇌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스파이라는 존재 자체가 사람이라면 응당 지녀야 할 양심과 윤리성을 가슴에 묻어둔 채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하고 고뇌해야 하는 캐릭터라 어느 정도는 일반인들에게 동경의 대상이기도 하지 않나. 기존에 영미권 작가들의 첩보 소설만 읽어서인지 일본 작가의 첩보전은 매우 색다르고, 독특한 재미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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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끝의 남자
백민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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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만에 다시 돌아온 백민석의 이번 소설집에는 신작 두 편과 십 년 전 이미 발표했던 작품을 다시 고쳐 쓴 일곱 편이 실려 있다. 우선 "10년 만에 돌아온"이라는 것에 방점을 두자면, 신작 두 편에 대해 먼저 읽어야 할 것 같다. '혀끝의 남자' '사랑과 증오의 이모티 콘' 두 편이 신작인데, 전자는 그가 다시 글을 쓰게 된 이유가, 후자에는 그가 글을 멈추게 된 과거의 정황에 대해 드러나있다.

 

나는 백 년도 더 전의 한 남자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 백 년도 더 전의 그는 밝은 대낮에 등불을 켜고 시장을 달려갔다고 했다. 장바닥의 구경꾼들은 그에게 신이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한다.

우리가 신을 죽였으므로, 신이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냐고.

우리를 두려워하냐고.

그런데 신 없이 살아간다는 게 어디 가능한 일이겠는가. 어제 누군가 신을 죽였다면 오늘 누군가 새 신을 만들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에겐 서로 다른 이름을 지닌 신이 일억이나 된다.

-혀끝의 남자 중에서-

 

 

'혀끝의 남자'는 인도 여행기의 형식을 띠고 있다. 실제로 작가는 15년 전에 인도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고 하는데, 10년의 공백을 여는 작품으로 인도에서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도란 여타의 나라와는 달리,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순례라는 의미로 더욱 많이 읽히기 때문일 것이다. 아그라, 바라나시, 보드가야 등에서 뉴델리로 이어지는 그의 여정은 일종의 개인적인 순례기로 보인다. 작년 한해 하루키를 시작으로 출판계에 마치 '순례' 열풍이라도 분 것처럼  많이 출간이 되었었다.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크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서는 자신의 과거와 마주서기 위해서 16년 만에 헤어졌던 네 명의 친구들을 찾아가 잃어버린 과거를 찾기 위한 순례를 떠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레이첼 조이스의 <해럴드 프라이의 놀라운 순례> 에서는 20년 전 회사 동료의 편지 한 통에 그녀를 만나기 위해 무작정 길을 떠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처럼 여행을 떠나는 것은 아니지만, 수잔 최의 <요주의 인물>에선 주인공 리가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과거 자신이 저질렀던 과오에 대해 속죄하는 이야기가 그려진다. 김정남의 <여행의 기술>에선 아들과 함께 죽기 위한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모두 색깔과 분위기는 다르지만, 과정이 어찌되었든 과거를 돌아보는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순례'란 보통 종교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 여러 곳을 찾아 다니며 방문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 '혀끝의 남자'에서의 나도 결국은 순례를 하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인도 여행을 거쳐서 다시 돌아온, 2013년의 서울 사당동에서 머리에 불을 붙인 채 혀 끝을 걷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던 나는 신이 없는 삶이 어디 가당키나 하냐고 생각한다.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신의 존재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 스스로 만들어낸 신일 수도 있다는 것은, 사실 자신의 혀끝이 종교의 발상지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종교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이제 모든 것은 다시 씌어져야 한다>는 일종의 선언문 같은 문장은 그의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 일으킨다. 신작 두 편 외에 기존 발표 작들도 첫 문장부터 끝 문장까지 지금 여기의 시점으로 모두 고쳐 쓰여졌다고 한다. '신데렐라의 게임을 아세요?' '재채기' 정도만 술술 잘 읽혔지만, 사실 나머지 작품들은 한 번에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 두어 번을 읽어야 했다. 여전히 어렵고, 통렬하고, 직설적인 그의 작품들은 대중적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흥미로운 건 사실이다. 그리고 솔직히 그의 작품은 첫 번째 읽었을 때보다, 두 번째 읽었을 때 문장의 맛이 더 살아나곤 한다.

 

그날 나는 벤치에 ' . ' 의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그것이 감정을 띤 형태의 것은 아니었다. 딱히 슬픈 것도 기분이 좋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기본형 ' . ' 는 표정 없음이다. 정서적 반응이 없으니 표정도 없는 것이다.

-사랑과 증오의 이모티 콘 중에서-

 

'사랑과 증오의 이모티 콘' 10년 전 그가 절필을 했던 상황이 오롯이 담겨 있는 작품이라 어조는 가볍지만, 사뭇 비장한 느낌마저 든다. 그런데도 나는 어딘지 ' . ' 의 표정을 하고 있다는 문장이 작가의 진짜 얼굴과 오버랩 되면서 자꾸만 웃음이 비져 나오고 말았다. 어쩜 이리 절묘한 표현이 있다는 말인가. 이모티 콘을 나도 문자든, 웹에서든 자주 사용하는 세대이지만, 사람의 표정과 그의 감정을 이렇게 비유할 수도 있구나 싶어 이모티 콘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한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가 그렇게 절필을 선언하게 된 그 무렵 그의 몸무게는 거의 백이십 킬로그램에 육박해 있었고, 거의 말을 잃어버린 상태였다고 한다. 기본형 ' . ' 에서 입까지 사라진 '  ' 가 되었다고. 작가로서의 자신을 죽여서, 그의 나머지를 살게 했던 것이라고 말하는 걸 보면 다시 글을 쓰기 위해서 10년 이라는 시간이 왜 필요했는지 알 것도 같다. 하지만 그는 그런 와중에도, 책은 계속 읽었다. 왜냐하면 그는 작가가 되기 훨씬 전부터 도서관 소년이었고, 죽고 죽이는 와중에도 또 하나의 자신인 도서관 소년은 살아 남아 하던 일을 계속할 수가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가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인 것이다.

 

가장 소중한 독자는 나 자신. 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그가 자신을 위해서도 더 이상 글 쓰는 것을 멈추지 않기를. 바래본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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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여동생
고체 스밀레프스키 지음, 문희경 옮김 / 북폴리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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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프로이트의 여동생이라는 제목과 구스타프 클림프의 그림을 표지로 한 탓에 나는 이 책이 심리학에 관련된 책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책은 '사실을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이라는 데에 방점이 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라는 위대한 정신분석학자의 이론과 사상에 대해서는 이미 너무도 많은 저서들이 그 유명세를 증명하고 있으니,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그의 생애에서 마지막을 짚어보자면 나치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하고 83세를 마지막으로 사망한 걸로 정리가 된다. 저자인 고체 스밀레프스키는 바로 그 즈음 그가 영국으로 망명을 할 때 누이들에게 그가 어떻게 했는지, 남겨진 누이들이 결국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당시에 프로이트가 마음만 먹었다면 어렵지 않게 누이들의 출국비자를 마련해서 그녀들이 수용소로 끌려가 죽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 저자가 주목한 것은 이제는 누구도 알아낼 수 없는 프로이트의 마음이 아니라 남겨진 누이들의 생이었다. 누이들 중에 가장 다정하고 착한 동생이었던 아돌피나, 어머니에게 학대 받았고, 어른이 되어서도 부모와 함께 살면서 평생 외롭게 살았던 그녀에 대해서. 너무도 많이 알려진 인물의 생애 속에 감춰진 주변 인물을 그려내는 작업이 수월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매력적인 작품은 커다란 역사 속의 한 귀퉁이에서 그저 사라져 버릴 수도 있었던 사람들을 오롯이 그려낸다.

표지로 사용된 구스타프 클림프 <죽음과 삶>

 

오빠는 의자에서 일어서더니 반대편 벽에 걸려있는 70년 전 우리 프로이트 집안의 자식들을 그린 유화 앞으로 걸어갔다. 그림이 그려진 당시 한 살 반이던 알렉산더가 훗날 기억하기로, 그가 조금 컸을 때 지그문트 오빠가 그림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누이들하고 같이 있으니까 꼭 한 권의 책 같구나. 네가 막내고 내가 장남이니까. 우리가 튼튼한 표지가 되어 나보다 늦게 태어나고 너보다 앞서 태어난 누이들을 굳건히 보호해줘야 해. " 긴 세월이 흐른 지금 오빠가 다시 그 그림으로 손을 내밀었다.

"이건 따로 싸자꾸나." 오빠는 손을 뻗어 그림을 벽에서 떼어내려 했다.

"오빠는 그 그림에 손댈 자격이 없어요." 내가 말했다.

프로이트가 오스트리아를 떠나 런던으로 망명을 가면서, 그는 올케, 조카들, 집안 식솔들, 올케네 여동생과 가정부 둘, 그의 주치의와 주치의의 가족들까지.. 강아지 요피 까지 데려갔다. 그러나 누이들은 데려가지 않았다. 남겨진 그의 누이들은 오빠가 런던에 가서도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을 비엔나에서 빼내 줄 거라고, 죽기 전까지도 그렇게 믿었다고 한다. 궁핍과 공포에 떨면서 열차에 실려 수용소를 옮겨 다니면서도 말이다. 그가 왜 물론 아무도 알 수 없다. 전혀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유추해볼 수 있는 건, 프로이트가 평생 인간의 본질이 죄책감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싶다. <모든 인간이 죄책감을 느끼는 이유는 누구나 한때는 어린아이였고 엄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경쟁하면서 아버지라는 적의 죽음을 갈망했기 때문이다>라는 지그문트의 말처럼, 누구보다 순수하고 무력한 존재가 원초적인 죄를 저질렀다는 이론에 따르자면 뭐.. 설명이 안 될 법도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걸로 인해 벌어진 결과이니 우리는 이 작품의 내용에 주목 해야 한다.

아돌피나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많이 아팠고, 여섯 살 위였던 프로이트는 다른 누이들보다 그녀에게 더 살갑게 대했었다. 두 사람은 함께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면서 도서관에 들락거렸었고, 어린 그녀는 그런 시간들 덕분에 엄마의 힐난과 싸늘한 시선으로부터 버텨낼 수 있었다.  어린 아돌피나가 기침을 하거나 토하거나 열에 들떠 정신을 잃으려고 할 때마다 엄마의 푸념. "널 낳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이런 말은 그녀에게 상처로 박힌다. 물론 그녀 또한 엄마가 자신을 얼만큼 사랑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불행했고, 그 고통은 두려움으로 연결되어 어린 그녀에게 사랑 만큼의 미움을 주었던 것이다. 이 책의 대부분의 내용은 아돌피나의 삶에 집중되어 있다. 그녀의 어린 시절, 엄마와의 관계, 사랑했던 라이너의 배신과 그의 자살로 인한 충격, 이어지는 낙태와 우울증으로 인한 정신병원 생활까지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삶이 펼쳐진다.

 

책의 장마다 삽입되어 있는 뒤러의 판화<멜랑콜리아>

 

살아야 하나, 죽어야 하나? 판화에서 그늘 속에 파묻혀 흰자위를 반짝이는 얼굴에 떠오른 질문이다. 뒤러의 판화 속 멜랑콜리아에는 날개가 있지만 그녀가 날개를 펼치고 날 거라고는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뒤러의 멜랑콜리아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듯한 질문인 '살아야 하나, 죽어야 하나? 라는 질문은 나에게 나의 존재를 묻는 질문이 되었다. 나는 내 안의 어둠이 던지는 그 질문을 거울을 피해 다니듯이 피하고 싶었다.

 

아돌피나가 사랑하던 라이너와 헤어지고, 아버지마저 돌아가시고, 복잡한 애증관계에 있던 엄마와 지내던 그 시기에, 프로이트는 결혼한 뒤 신혼 집에 의원을 열고 정신과 문제가 있는 환자들을 진료를 했다. 외로웠던 그녀는 오빠네서 같이 살면 안 되냐고 애원했지만, 프로이트는 자식들이 연년생으로 태어나서 돈도 부족하고 공간도 넉넉하지 않다고 거절한다. 그렇게 몇 해가 흐르고, 아돌피나는 자신이 아닌 것 같은 기분으로 매일을 한다. 그러니까. 아침에 일어나도 그녀의 일부는 침대에 그냥 남아 있는 것만 같은 그런 기분으로 말이다. 그때, 그녀는 뒤러의 판화 <멜랑콜리아>를 본다. 자신의 몰골을 마주하기 싫어서 일부러 거울을 피해 다녔는데, 그 작품을 볼 때마다 자신과 마주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판화 속의 여인은 날개는 있지만 천사는 아니고, 아무데도 아닌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우울증을 형상화한 인물이라고 한다. 아돌피나 역시 망연자실한 상태로 몇 해를 보냈으니, 곁에 아무도 없는 적막한 상태에서 그와 비슷한 심경이었으리라.

지그문트 오빠가 집에서 나가 병원에서 살기 시작하고, 안나 언니가 결혼해서 미국으로 떠나고, 파울리나와 마리 언니도 결혼해서 베를린으로 떠나고, 부모님만 남은 집에 아돌피나는 홀로 쓸쓸히 남아 있었다. 집안 어디에서도 그녀의 고통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었고, 그녀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결핍, 공허, 무력감과 우을증. 살아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사람처럼 그녀는 그렇게 존재했다. 그러니 이 작품의 표지에 삽입된 클림프의 <죽음과 삶>과 뒤러의 <멜랑콜리아>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삶과 죽음이 종이의 양면과도 같이 사실은 별 다를 바가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아돌피나는 결국 수용소에서 죽어가면서 이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것이라 되뇌 인다. 엄마도, 아기도, 오빠도..이 모든 고통도.. 상처받기 쉬운 자신도... 그리고 자신이 태어난 사실도 잊을 거라고 말이다. <인간은 살면서 가장 고통 덜 받는 곳으로 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프로이트의 말이 어쩐지 웃을 수 없는 농담처럼 느껴지는 슬픈 장면이었다. 나는 이 매혹적인 책을 통해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대해 오히려 더 관심이 갔다. 정작 이 작품에서는 프로이트가 아니라 그의 누이 아돌피나의 목소리만 들렸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돌피나의 삶을 그린 이 작품은 어쩐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삶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게 여운이 많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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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스
어빈 웰시 지음, 김지선 옮김 / 단숨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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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의 가장 큰 화제작은 대니 보일의 <트레인스포팅>이었다. 내가 아직도 이걸 기억하는 이유는, 그 해가 제 1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던 순간이었고, 그때 설레 이는 마음으로 영화제에 참여하느라 내가 부산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가장 궁금했던 영화 중의 하나가 <트레인스포팅>이었는데, 다소 얌전한 취향이던 내 친구들은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서, 결국 최초로 극장에서 혼자 본 영화가 되고 말았다는 기억도 남겨준 작품이다. 대니 보일의 감각적인 연출, 이완 맥그리거라는 배우의 발견, 그리고 루 리드의 음악까지.. 마약과 환각, 절망으로 얼룩진 세기말의 청년문화를 그린 내용 자체도 충격적이었기에 원작 자인 어빈 웰시에 대한 관심도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는 데뷔작인 <트레인스포팅>을 영국에서만 백만 부 이상 팔았고 이후 출간된 <포르노> <필스>도 모두 베스트셀러를 만들었다. 98년에 출간된 필스를 이제야 우리가 만나게 된 것은, 2013년에 이 작품이 제임스 맥어보이 주연으로 영화화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어찌되었든 그의 작품은 영상화하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모양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안 그런 척 하면서도 사실은 이런 걸 보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너무 대놓고 그러니까, 완전히 노골적으로 저속함을 드러내면 우리는 그걸 비웃으며 우월감을 느낄 수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런 것이 욕망의 배출구가 될 수도 있고 말이다. 악이 없으면 선도 없는 것처럼, 저속함이 있어야 그 반대인 청순, 고결함도 존재할 수 있는 거라고 하면 좀 아이러니 할래 나. 아뭏튼 빛과 그림자처럼 어쩔 수 없이 극단의 양면이 모두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이란 얘기다.

 

어빈 웰시는 사람들이 모른 척 하고 싶어하는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끄집어내는 데 기막힌 재주를 가진 작가이다. 일명 타탄 느와르라고 일컬어지는 그의 작품들은 어둡고, 익살스럽고, 매우 폭력적이다. 배경만 스코틀랜드일 뿐, 문학적으로는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같은 부류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마약은 기본이고, 도덕적 가치의 혼란과 죽음, 섹스가 난무해서 아주 극단적으로 치솟는 속수무책의 악순환이 이어진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혐오스럽고, 음탕하고, 저속한 묘사가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래서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으면 적응하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트레인스포팅>은 관객들이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스코틀랜드를 보여주었었다. 영화를 통해 참을 수 없을 만큼 심하고 역겨운 장면들을 초현실적 느낌으로 바꿔놓은 장면들이었던 터라 조금 받아들이기 나았을지는 모르겠으나, 당시에 영화를 보면서 내내 충격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이번 작품 <필스>에서는 크리스마스 무렵의 에든버러를 배경으로, 타락한 경찰이 서서히 파국을 향해 몰락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제임스 맥어보이 주연의 영화도 꽤나 인상적이다. 역시 배우의 비주얼이란 인물들이 끊임없이 바닥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 수긍내지는 공감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모양이다.

 

             

 

에든버러 경찰서의 브루스 로버트슨 경사는 인종 차별, 권력 남용, 살인, 절도, 협박, 강간, 거짓말, 마약, 불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악행을 저지르며 거리를 누비는, 말 그대로 갈 때까지 간, 타락한 경찰이다. 경사에서 경위로의 승진을 꿈꾸는 그는 살인 사건을 맡지만, 정작 사건 수사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자신이 승진하는데 라이벌이 될만한 동료들에 대한 중상모략과 이간질, 동료의 아내와 바람을 피우고, 상관과 친구를 궁지에 몰아넣고, 처제와 섹스를 즐긴다. '막장'이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오를 수밖에 없는, 그러니까 우리가 볼 때는 처절하게 몰락할 수 밖에 없는 코스를 달려가는데, 그 속에 있는 당사자만 모른다는 그런 얘기다. 온 세상에 사랑과 축복이 가득한 크리스마스에 그는 결국 파국에 이른다. 그러나 그 누구를 탓하랴. 그렇게 막 되는대로, 아무 눈치도 보지 않고 살아 버린 그가 스스로 만들어낸 결과이니, 책임을 질 사람도 자신밖에 없는 것을.

 

<게임은 우리가 일을 버텨낼 유일한 방법이다. 누구에게나 나름대로 보잘것없는 허영과, 나름대로 보잘것없는 자부심이 있다>는 그의 자부심은 세상 만사 모든 것을 다 게임으로 여기고 살아간다. <어떤 새끼나 다 아킬레스건이 있고, 나는 내 지인들의 아킬레스건을 으레 기억해둔다. 그들의 자아상을 허섭쓰레기로 뭉개버리는 무언가. 그렇다, 그것들은 모두 언젠가 이용할 수 있도록 저장된다>고 생각하는 그는 언제나 누군가의 약점을 기억했다가 그걸 적시에 이용하고 써먹는다. 그는 <경찰봉과 방패를 들고, 국가의 권력을 등에 업고, 찢어진 주둥이와 돼먹지 못한 태도로 세상에 의문을 제기하는 버릇없는 쓰레기들을 두들겨 패서 납작하게 만드는 생각에 기분>으로 한껏 달아오른다. 그는 이런 세상을 '멋지다'고 여긴다.

 

구토와 배설물로 가득한 세계. 마치 더럽혀진 육체와 부패한 영혼을 묘사하듯 이 작품은 시종일관 '지저분함'을 표출한다. 브루스는 끊임없이 바닥을 향해 가고 있는데, 어쩌면 그도 은연중에 그곳이 자신이 머물고 싶어하는 곳이라는 걸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망각이란 떨어질 데까지 떨어지고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다. 어쩌면 브루스도, 이 작품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도 모두 그냥 갈 데까지 가고 싶어하는 게 아닐까. <우리는 우리 아닌 다른 존재가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자신을 증오한다. 더 나은 누군가가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우리는 분노를 지킨다> 페이지 중간을 가로지르는 촌충의 목소리와 브루스의 비정상적인 정신세계는 가끔은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또 가끔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부분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도 가끔은 불량식품이 필요할 때가 있지 않나. 나쁜 것을 통해서 야만 볼 수 있는 진실도 있는 법이니까. 우리는 이 머리 아픈 페이지들 속에서 브루스에 대한 여러 가지 비밀을 엿볼 수 있다. 동생의 죽음과 아버지의 학대, 자신을 버린 아내, 조울증과 편집증... 지독하게 쓰레기 같은 놈이지만 끝내 연민이 들 수밖에 없는 그런 인물로 만들어버리는 어빈 웰시의 솜씨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모든 파멸은 재미있다. 왜 안 그렇겠는가. 누구나 가끔은 나쁜 짓이 하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어빈 웰시의 작품을 만나보자. 아마 당신이 상상도 하지 못할 그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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