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집
박완서 지음, 이철원 그림 / 열림원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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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왜 그렇게 나를 애지중지하셨을까. 그 생각만 하면 자신이 소중해진다. 그분이 사랑한 나의 좋은 점이 내 안에 지금도 살아 숨 쉬는 것처럼. 그건 삶이 비루해지려는 고비마다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 되었다. 우리가 여행을 할 때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아마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는 소리일 것이다. 그러면서 자꾸자꾸 사진을 찍어대듯이 사람이 한세상 살고 나서 남길 수 있는 게 사랑밖에 없다면 자꾸자꾸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손자가 고삐를 잡은 마상에 앉아서 이 힘든 여행이 훗날 손자에게 무엇이 되어 남을까 상상해보며 부디 사랑 받은 기억이 되기를 빌었다

 

요 며칠 굉장히 예민해져 있었더니, 월요일 아침부터 완전 넉 다운된 기분이다. 소소한 일들이 쌓이고 쌓이면 모든 게 다 엉망진창이 되어버리곤 하니 말이다. 마음 상태가 '누구든 걸리기만 해봐'라는 컨디션이다 보니, 잘못 말을 거는 누구에게든 본의 아니게 날카롭게 대꾸를 한다거나, 퉁명스럽게 반응을 보인다거나 하게 되고 말았다.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어버리는 일들인데, 이런 소소한 일에 연연하지 않고 한걸음 뒤로 물러나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다. 물론 내가 억지를 부리거나 트집을 잡은 건 아니므로, 상대방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바깥으로 화를 표출하다 보면 결국 내 속이 더 불편하고, 답답해지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렇게 고슴도치처럼 뾰족해진 나를 감싸준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수수한 이야기 속에 번지는 유머와 따스함이 화난 내 표정까지 누그러들게 만들었다고 할까. '조금만 너그러워지면 결국 네 속이 편하지 않겠냐'고 웃는 얼굴의 박완서 선생님이 옆에서 말씀하시는 것만 같았다고 할까.

 

2010년에 마지막으로 발표하셨던 수필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읽었던 기억이 엊그제만 같은데, 벌써 돌아가신 지 이년이 지났다. 하지만 아직도 이렇게 박완서 선생님의 미발표 글을 볼 수 있다는 건 우리에게 어쩌면 행운이다. 이 작품집은 2000년 초반부터 아치울 노란 집에서 쓰신 글의 모음으로, 짧은 단편들은 그 길이와 상관없이 깊이 있고, 따스하고, 예리하면서도 여유롭다. 특히나 글들 사이사이에 그려진 일러스트들은 글의 맛을 더해주는데, 글과 그림이 더해져서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가슴 뭉클하다. 구구절절 감상을 적기 보다는, 너무 예쁘고도 마음 아픈 단편 하나라도 직접 읽어보는 것이 이 작품의 읽어보고 싶게 만들 것 같다. 짧은 단편이니 글의 맛과 그려지는 풍경을 떠올려보면 좋을 것 같다.

 

그러다 별안간 허방을 밟은 것처럼 비참의 밑바닥에 내팽개쳐진 것이다. 평생 제 입밖에 모르는 영감과 살아왔거늘 이제 와서 웬 지옥 불 같은 증오란 말인가. 하긴 저 영감이 무슨 잘못이람. 아들을 저따위로 키운 시어머니 탓을 하다가, 난 또 뭔가. 내가 저 영감을 저렇게 길들인 걸. 자신을 다독거렸다가, 그래봤댔자 남는 건 허망감 밖에 없다. 한바탕 허망감이 휩쓸고 지나가면 뼈에는 숭숭 구멍이 뚫리고 입술은 다시는 열리지 않을 빗장처럼 무겁게 닫힌다.

 

영감님은 마나님이 왜 토라졌는지 아직도 모른다.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오십여 년을 해로하면서 어찌 좋은 날만 있었겠는가. 툭하면 토라지기도 잘하지만 뒤끝이 없어 언제 그랬더냐 싶게 헤헤거리기도 잘하는 마누라였다. 그래 버릇해서 영감님은 한 번도 마누라가 왜 토라졌는지 그 근본 원인을 캐 들어간 적이 없다.

 

마나님의 토라짐도, 영감님의 서글픔도 그냥 다 이해가 될 것만 같다. 우리네 어머니, 아버지의 이야기처럼도 보이고, 이 상황은 지금 우리 세대의 이야기에 대입시켜보아도 공감이 충분히 된다. 게다가 <마음이 그들먹했다. 허방을 밟은 것처럼. 뼈에는 숭숭 구멍이 뚫리고> 이런 단어들, 표현들은 너무나도 정겨우면서도 감정의 결을 미세하게 포착하게 만들어준다. 마나님은 비싼 굴비를 먹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귀한 것을 나누어 먹는 그 마음씀씀이를 바랐기에 서운했던 것이고, 영감님은 이기적인 게 아니라 평생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미처 생각지도 못하는 부분인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유머를 잊지 않는다. '살을 어찌나 알뜰하게 발라먹었는지 머리와 꼬리를 잇는 등뼈의 가시가 빗으로 써먹어도 좋을 정도'라는 표현에선 피식 웃게 만들고 만다. 마나님이 왜 토라졌는지 모르는 영감님이, 그나마 자신있었던 화해의 방법을 이제는 나이가 들어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대목에선 마음이 싸해지고 먹먹해진다. 나이가 들수록 남자들은 어린아이처럼 되고, 젊을 때 남편의 눈치만 보던 아내들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이 괜한 말이 아닌 것이다. 사소한 부부간의 투닥 거림이 나이를 먹는 것에 대한 쓸쓸함으로 이어진다.

 

살다 보면 참 바쁜 일도 많고, 기분이 상하는 일도 많다. 왜 이렇게 시간은 없는데 할 일은 많고, 왜 이렇게 짜증나는 일 투성이고.. 그럴 때 한번 멈추고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보라.고 이 작품은 나에게 말을 건넨다. 네 마음이 바쁜 것인지, 아니면 세상이 바쁜 것인지, 네 마음이 화가 나서 그런 마음의 형태대로 보이는 세상에 기분이 상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여유를 가진다면, 같은 상황도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생각대로 쉬운 것이 아닌 것 또한 사실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이까짓 세상에 왜 태어났을까 싶게 삶이 비루하고 속악하고 치사하게 느껴질 때가 부지기수로 많다> 그렇지만 <살다 보면 아주 하찮은 것에서 큰 기쁨,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 싶은 순간과 만나질 때도 있는 것이다> 라는 대목을 읽으면서, 좀 멀리 보아야겠다고 새삼 다짐을 한다. 뾰쪽한 내 마음을 감싸주는 따듯함이 페이지마다 그득해서 괜시리 가슴이 뭉클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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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얼 헤이스 두 번 죽다 모중석 스릴러 클럽 34
마커스 세이키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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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파가 몰아치는 해변가에서, 기억을 잃어버린 벌거벗은 남자가 깨어난다. 자신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전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상태로 그는, 비어있는 BMW안에서 자신에게 잘 맞는 옷을 찾아 입고, 대니얼 헤이스라는 이름의 차량등록증을 발견한다. 우선 그는 그 차량등록증에 적힌 주소에 찾아보기로 한다. 그는 집에 도착해서야 자신이 드라마 <캔디 걸스>의 베스트 각본상을 받은 대니얼 헤이스라는 작가이며, TV 속에 등장하는 유명 여배우 레이니가 자신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게다가 자신의 아내가 차량 전복 사고로 실종된 상태이고, 그녀의 죽음에 관한 추측 성 보도는 바로 자신을 용의자로 지목해서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경찰이 그를 쫓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까지 파악하고 나자, 그는 당황스럽다. 자신이 정말 아내 레이니를 죽였는지는 커녕, 대체 그들 부부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 자신이 대니얼 헤이스라는 것에 대한 자각조차 없는데, 무작정 도망자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네 자신이 누구인지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은 어떤 사람이지?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 플롯으로 진행이 된다. 대니얼 헤이스의 실체, 그러니까 기억을 잃은 채로 해변에서 깨어난 남자에 대한 정체를 밝히고 기억을 되찾는 것과 나머지는 죽은 아내에 대한 사건의 진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에 대한 추적의 스토리이다. 그리고 대니얼 헤이스라는 중신 인물 외에 그를 찾아 다니는 정체 불명의 여인과 베넷이라는 악당이 있고, 그를 쫓는 경찰이 있다. 이들 관계는 그야말로 얽히고 설킨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그물을 만들어, 스토리를 구축한다. 사실 '기억상실증'과 관련된 숱한 작품들이 기존에 있었기 때문에, 설정 자체만으로는 그다지 특별할 만한 게 없다. 육체적인 충격이 아니라도 하더라도, 정신적인 충격으로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리는 경우도 실제로 벌어지곤 하는 일이니 말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사건보다는 그것을 대하는 태도이다. 나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내가 살인을 저질렀거나,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그런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여진 그 시점에서, 내가 해야 하는 행동, 할 수 있는 태도가 결국 자기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다.

 

대부분 '기억상실'을 소재로 진행되는 스토리에서는 주인공이 잊어버리고 있는 과거에 대한 미스터리가 주요 플롯이 된다. 그러니까, 현재보다는 과거에 어떤 일이 벌어졌고, 과거에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미스터리가 모든 사건을 해결할 키가 되고, 그것이 주요 스토리로 진행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아무래도 과거보다는 '현재'에 방점이 있다 하겠다. 작가는 인물에게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 너는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을 못하고 있다. 따라서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래서 뭐 어쨌다고? 과거에 네가 뭘 어떻게 했든지, 지금 현재의 너 자신이 더 중요한 거 아니야? 네가 기억을 하든 못하든, 과거에 네가 내린 결정이나 행동에 대해서는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고, 스스로 자초한 일에 대해서 벌어지는 결과는 네 몫이야. 지금의 모습은 지난 날 네 선택의 산물이니까. 라고 말이다. 아니, 기억을 잃어버린 인물한테 너무 냉정한 거 아니야? 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만큼. 작가가 인물에게 연민을 가지지 않고 그려낼수록 독자는 인물에게 더욱 몰입할 수 있다. 게다가 어른스러운(?) 우리의 대니얼은 자신이 당하고 있는 일이 억울하지만, 그럼에도 과거에 내가 뭔가를 잘못했다면, 지금의 내가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주인공의 바로 그 태도가, 이 작품을 여타의 작품과는 다른 차별성을 만들어준다.

 

넌 네가 되고자 선택한 사람이야. 네가 내린 결정에 따라 살 수 있다는 걸 확신해야 해.

 

경찰, 기자들을 포함해 네티즌들은, 아내가 살해된 경우 열에 아홉은 남편이 개입되어 있다는 게 상식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그 남편이 아내가 죽자 마자 어디론가 사라졌을 경우에, 그 의심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대니얼은 쫓기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열에 아홉이라면, 그럼 나머지 하나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거냐고. 여기서 또 이 작품의 특별한 재미가 드러난다. 대니얼은 히트 드라마를 써낸, 그 작품으로 베스트 각본상까지 받은 드라마 작가이다. 아내를 죽인 살인범을 쫓으면서, 혹은 추측하면서 그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작가의 입장에서 생각해봐. 왜 사람들은 살인을 저지르지? 살인사건의 원인이야 항상 '사랑' ''이다. 그는 레이니가 샀다는 보석을 기점으로 관련된 인물들에 대해서 알아 보기 시작하고, 그를 쫓는 두 명의 남녀와 만나면서 스토리는 점점 그들의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알려준다. 대니얼은 그 과정에서 실제 삶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스토리를 상상해서 키보드로 단어를 타이핑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체감하게 된다. 그가 작가라는 설정은, 현재 대니얼이 처해있는 상황에서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특별한 재미를 만들어 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작품에는 중간중간 드라마 대본 형식의 장면들이 등장한다. 지문과 대사로 이루어져서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그래서 극중극 같은 느낌을 주는데, 그 덕분에 이 작품이 조금 더 입체감 있게 느껴진다고 할까. 덕분에 대니얼과 레이니라는 배우의 이미지가 자연스레 떠오르면서, 실제 이 역할을 하는 캐릭터가 작품 속에서 생명력을 발한다. 대본은 소설과 다르게, 배우가 연기를 할 수 있는 지도같은 역할을 한다. 인물들의 감정을 설명하고, 행동을 묘사하는 게 소설이라면, 대본은 인물이 행동할 수 있게 지시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지문은 심플하지만 구체적이어야 하고, 대사는 감정이 아니라 말을 내뱉어야 한다. 상당히 다른 표현방식이라는 말이다. 마커스 세이키가 확실히 영상화에 대한 감각이 있는 것이, 중간중간 보여지는 대본 형식의 장면 연출 또한 군더더기가 없다. 그는 '2의 데니스 루헤인으로 불리 우는 작가인데, 기존에 출간한 네 작품 모두 영화화 계약이 되면서 현재 할리우드가 가장 주목하는 신인 작가라고 한다. 국내에는 그의 데뷔작인 <칼날은 스스로를 상처 입힌다>만 출간이 되어 있는 상태인데, 바로 이 작품은 최근에 밴 애플렉에게 판권이 팔렸다고 한다. 밴 애플렉이 감독으로서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기에, 이 작품이 스크린에서 어떻게 보여질 것인지도 기대를 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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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고 차가운 오늘의 젊은 작가 2
오현종 지음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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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일 바닥을 밟는 소리가 아작, 하고 단호하게 들리는 순간에야 비로소 들어온 구멍으로 다시 나갈 수 없음을, 모든 일은 돌이킬 수 없음을 확연하게 깨달았다.


어쩔 수 없지, 악을 없앨 방법은 악밖에 없는걸. 죽느냐 죽이느냐, 둘 중 하나라고.

 

미이케 다카시 감독의 영화 <짚의 방패>에도 이와 유사한 윤리적 질문이 등장한다. 사랑하는 손녀딸을 살인자에게 빼앗긴 재계의 거물이 그를 죽이면 100억 원을 주겠다고 현상금을 내건다. 엄청난 현상금 덕분에 범인은 전 국민의 타겟이 되어 버리고, 목숨의 위협을 느낀 범인은 경찰서에 자수를 한다. 문제는 그를 검찰에 송치하기 위해서 경시청으로 이동을 시켜야 하는데, 과연 그들은 무사히 범인을 호송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법적인 교육을 받은 경찰관부터 간호사, 정비사 등.. 그러니까 범인에게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100억이라는 돈 때문에 그를 죽이려고 달려든다. 경찰에서는 범인이 법의 심판을 받게 하기 위해서, 범인을 안전하게 지키며 호송을 해야 한다. 그를 경호하는 과정에서 경찰, 일반일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는다.

 

"악을 없앨 방법은 악밖에 없을까?"

 

여기서 우리는 딜레마에 빠진다. 과연 이런 쓰레기 같은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서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경호를 하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인가? 대상이 누구든 경호 대상을 지키면 된다는 직업적인 소명감이 이런 경우에도 과연 옳은 일인가? 살인교사는 분명히 나쁜 죄이지만, 아무 죄 없는 어린 여자 아이를 학대하고 죽인 죄에 비할까? 이렇게 잔인한 방법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다면, 누구라도 범인을 죽이고 싶은 분노가 생기지 않을까? 게다가 범인은 동종의 범죄로 복역하다 가석방 중이었다. 법적인 처벌을 받았지만, 결국 또 사회에 나와서 같은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은 결국 법이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 아닐까? 끔찍한 악이 팽배한 부조리한 세상에서, 법이 피해자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되면 직접적인 응징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물론 무분별한 개인적 복수로 사회가 무법천지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정의란 무엇인지, 고민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다들 지옥에 있다고 하지. 모두 너 때문에 내가 지옥에 있다고 욕하는데, 너 역시 지옥에 있다고 아우성을 쳐. 그러면 이게 다 누구 책임일까."

 

오현종 작가의 <달고 차가운>이라는 작품에서는 살인을 저지른 주인공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전혀 후회하지 않는 것으로 도덕적 가치에 대해 질문한다. 어린 딸에게 성 매매를 강요하고 가족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악마 같은 사람이라면, 죽어도 상관없다라는 것이다. 그대로 두면 더 나쁜 짓을 저지를 것이고, 또 다시 어린 소녀를 지옥 같은 풍경 속으로 밀어 넣을 테니까, 그런 나쁜 짓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 벌어진 살인이니 정당하지 않는가.라고. 악을 없애기 위해서, 또 다른 악으로 대항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니체의 그 유명한 경구를 떠올려보자.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 해야 한다고 했다.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그 심연 또한 그를 들여다보게 되니까 말이다. 따라서 피해자의 절망감과 분노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더라도, 복수를 위한 악마적인 행동에는 보편성이 결여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악이라는 것은 한번 빠지면 좀처럼 쉽게 빠져 나오기 힘든 구렁 같은 것이니까. 이 작품이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이런 것이다.

 

악을 없애기 위해서 악으로 대응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이 악이 아니었다면??

 

대학 입시에서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재수 학원에 다니는 강지용은 학원에서 민신혜를 만난다. 그녀와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되면서 그들은 서로에게 공통점이 있음을 알게 된다. 지용은 유치원 원장인 어머니와 고시 출신 공무원인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한다. 평범한 자신이 남들에게 보이고 싶은 특별한 아들이 되어 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어머니의 구속과 기대가 부담스럽고 속물같고 싫다. 그래서 차라리 부모가 없었다면, 고아였다면 좋겠다고 상상했던 적이 있다. 신혜는 술집을 운영하는 어머니가 어릴 적부터 성 매매를 강요했다고 한다. 마녀가 사는 집에서 달아나고 싶지만, 지금은 배다른 어린 여동생에게 그녀가 무슨 해를 끼칠지 몰라 달아날 수도 없다고. 진짜 지옥이 어떤 건지는 모르지만, 난 항상 지옥 비슷한 환경에서 살아야 했다고 말한다.

 

지용은 그녀를 울게 만드는, 그 괴로움으로부터 그녀를 구출하고 싶었다. 어릴 적부터 생각했던 자신의 부모가 사라지게 할 수는 없지만, 대신 다른 사람의 부모를 사라지게 할 수는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차피 나에겐 타인이고, 어차피 그녀는 죽어 마땅한 짓을 저지른 악마 같은 여자이니까. 라고 자신을 합리화시키면서. 그러니까 넌 아무것도 하지마. 내가 널 지옥에서 구해줄게. 내가 네 엄마가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들어줄게. 악을 없애는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어. 죽느냐. 죽이느냐. 내가 그녀를 죽이지 않으면, 사랑하는 신혜가 죽을 것처럼 괴로우니까. 그래서 그는 미국으로 도피성 유학을 떠나기 전에, 신혜의 엄마인 호프집 여사장을 살해하고 강도의 소행으로 위장하는데 성공한다. , 여기까지의 스토리는 평범하다. 그러나 오현종 작가는 전제를 뒤집어버리는 선택을 한다.

 

"내가 아니어도 그랬을 거잖아. 넌 누구라도 죽이고 싶었잖아. 그랬잖아."

 

그는 완전 범죄를 저질렀고, 무사히 미국으로 간다. 하지만 누나와 함께 지내면서 그는 악몽에 시달리고, 결국 중간에 신혜가 보고 싶다고 부모님 몰래 한국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신헤의 핸드폰 번호는 없는 번호라고 확인되고, 그녀가 다닌다던 학교에는 아예 다닌 적도 없고, 그녀의 여동생은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고, 교통사고로 죽었다던 새 아버지는 멀쩡히 살아있으며.. 설상가상으로 그 새 아버지라는 사람이 신혜의 애인이었다. 신혜는 그 남자와 살고 싶었고, 그걸 가로막는 존재를 없애고 싶었던 차에 지용이 대신 살인을 저질러 준 것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지용이 저지른 살인에는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존재했던 토대 자체가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것이다. 간단하게 이것은 덧셈과 뺄셈의 문제가 되어버린다. 원인이 없어졌는데, 결과만 남았다. 그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그가 지어야 하는 것이다. 신혜를 위한 일이었다는 '선의'가 사라지자, 그가 여자를 살해했다는 '악행'만 남아버린다. 지용은 결국 신혜를 찾아서 진실과 직면하지만,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지용이 자신의 어머니를 죽이고 싶어했던 그 은밀한 욕망을 대리 충족시키기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을.

 

남들에게 일어나지 않는 기적이 자신에게는 일어날 거라고 믿는 어머니를 혐오하던 지용은, 그러나 만약 자신에게 기적이 온다면 거절하고 싶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똑같은 실패를 반복해서 겪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모두가 기적을 기도한다면 불운은 누구의 몫일까. 한 해가 가고 새로운 해가 시작될 때, 우리는 흔히들 이런 인사를 한다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에는 바라는 일이 모두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그러나 이 말은 사실 끔찍하게도 무서운 이야기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일과 살인범이 자신의 욕망을 위해 바라는 일, 이윤을 얻기 위해 기업 총수가 바라는 일과 힘없는 샐러리맨들이 바라는 일들이 과연 '함께'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현실을 견딜 수가 없어 미쳐버릴 것만 같던 신혜가 부러워했던 지용의 일상이, 사실은 부모의 기대와 압박에 질식해버릴 지경이었던 불행한 하루였던 것처럼. 누구나 자기 기준에서의 지옥에 있으며, 내가 이렇게 불행한 이유는 타인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타인조차 스스로 지옥에 있다고 아우성을 친다면, 그렇다면 결국 이 모든 일은 누구의 책임이란 말일까.

 

강지용에게 달콤하고, 차가운 것과 부드러운 것은 모두 같은 의미이다.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아도 기적처럼 얻을 수 있는 그런 요행 같은 것만 꿈꾸는 것이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불안했지만 그는 낳아 달라고 애원한 기억이 없으므로 미안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삶을 사랑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사는 속물 같은 인물에겐, 살아가는 일에는 달콤한 초콜릿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려줘야 한다. 그래야 공평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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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심장 열린책들 세계문학 213
미하일 불가꼬프 지음, 정연호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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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불가코프의 <개의 심장>이 열린 책들과 창비에서 각각 다른 번역자로 비슷한 시기에 출간이 되었다. 지난 번에는 사데크 헤다야트의 <눈먼 부엉이>, <눈먼 올빼미>가 다른 출판사, 다른 번역으로 나란히 출간된 적이 있었는데, 독자 입장에서는 선택과 비교의 폭이 넓어지니 재미있는 현상인 것 같다. 이 작품은 1920년대 혁명과 내전으로 이어지는 혼란한 시대를 배경으로 의사였던 작가 불가꼬프가 과학이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써낸 기발한 작품이다. 인간의 놔하수체와 생식기를 개에게 이식을 한다니, 어쩜 이런 발상을 할 수 있었는지 작품의 시작부터 너무도 독특하고 기발해서 흥미를 유발시키는 작품이라 하겠다.

 

극중 쁘레오브라젠스끼 교수는 뇌하수체의 적응성에 대한 문제를 연구 중이다. 그래서 그것이 사람의 유기체를 젊어지게 하는데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분명히 밝히기 위하여 뇌하수체과 고환을 연결해 이식하는 실험을 하게 된다. 우연히 거리에서 만난 주인 없는 개를 데려다, 부랑자의 시신에서 남성의 생식기를 이식하고, 인간의 뇌하수체로 교체를 하는 엄청난 수술을 한다. 그리고 경과를 지켜보는데,  갑자기 이마와 몸통 옆구리에서 털이 현저하게 빠지고, 개 짓는 소리가 멍멍 소리 대신에 아-오 음절로 바뀌고, 대단한 식욕을 보이더니 몸무게가 늘어나고, 웃고, 단어를 짖어 대는 지경에 이른다. 개가 점점 인간처럼 말하고, 인간처럼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개 샤리크가 아닌 인간 샤리꼬프가 된 것이다. 뇌하수체의 이식이 개를 젊어지게 한 게 아니라, 아예 개를 완전한 인간으로 만들어 버린 놀라운 대발견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회자되는 커다란 사건이 된다. 그러나 문제는, 샤리꼬프가 인간처럼 말하고 행동은 하지만, 인간답지는 않다는 것이다. 욕을 하고, 흡연을 하고, 술을 마시고, 인간처럼 먹고, 옷을 입고, 말을 하지만 그것이 '인간' 처럼 보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이 하는 행동을 그저 따라 할 수는 있겠지만, 윤리적인 판단을 하고, 기본적인 예의를 지켜야 '인간답다'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한테 나를 수술해 달라고 청한 적이 있나?

 

그는 흥분하여 지껄이기 시작했다

 

좋은 일 하셨구먼! 동물을 잡아다가 칼로 머리를 길게 썰어 줄무늬를 만들어 놓고서, 이제 와서는 싫어하고 경멸하신다 이거지. 나는 나를 수술하라고 허락하지도 않았어. 그리고 또 마찬가지로... (그는 천장을 향해 두 눈을 위로 치켜 뜨고, 마치 모종의 법률적 문구라도 회상해 내려는 듯했다) 마찬가지로, 내 친족들의 동의도 없었다고. 나는 민사상의 손해 배상을 청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어.

 

 

불가꼬프는 당시 러시아 혁명으로 만들어진 소비에트 인간형을 풍자하고 사회주의의 허상을 이렇게 비판한다. 물론 우리는 러시아 혁명을 배경으로 한 혹은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배경으로 한 숱한 작품들을 이미 본 적이 있다. 루타 서페티스의 <회색세상에서>, 톰 롭 스미스의 <차일드 44> 그리고 영화 <웨이백>, 조금 멀리 영화 <타인의 삶>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회주의란 국가가 인간의 삶을 전적으로 책임지고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이다. 당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러시아는 완벽한 공동체를 향한 최초의 인간 실험장이었다는 말조차 있을 정도니 어느 정도인지 알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공동 아파트에 거주하며 개인적인 생활은 국가에 의해 철저히 감시를 당하고, 불순분자로 찍히면 바로 노동수용소행이다. 따라서 집단적 인간은 자신의 사생활을 포기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사생활을 감시해야 했고, 자연스레 자기중심주의가 자라나는 온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체포되지 않기 위해 남을 고발해야 했던 사회에서 사람들은 어느 한 순간도 마음 놓고 대화하지 못하고속삭이며살아야 했으니, 과연 사회주의 유토피아라는 게 말이 되는 얘기일까?

 

불가꼬프는 개를 인간으로 변형시키는 비자연적이고 부자연스러운 수술을 볼셰비끼의 파괴적인 혁명과 동일시하고 있다. 이 수술이 잘못되었음을 마치 혁명의 부당함을 알리듯이 주인공 쁘레오브라젠스끼를 통해 전한다. 1925년에 쓰인 이 작품은 1988년에 블라디미르 보르트코 감독에 의해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나는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대체 인간처럼 변한 개는 어떤 모습일까?> 너무나도 궁금했기 때문에 영화도 찾아서 보았다.

 

영화 속의 '개 샤리크' 와 인간 '샤리꼬프'는 바로 이런 모습이다.

 

 

소설에선 쁘레오브라젠스끼 교수를 중심으로 수술을 하고, 관찰을 하면서 그의 심경 변화가 중점적으로 서술되었다면, 영화에서는 그런 변화의 원인이 되는 사회적인 부분에 조금 더 시선을 두고 만들어진 느낌이다. 무산계급의 혁명대원들에게서 울려 퍼지는 혁명의 목소리, 모두 방을 나눠가져야 하는데 박사 혼자 너무 넓은 공간을 차지한다며 쳐들어온 이웃들, 그리고 사람의 형상을 하고는 있지만 기존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 샤리꼬프. 게다가 그는 이제 자신이 사람의 형상이니 다른 사람들처럼 서류에 이름도 올리고 싶고 어쩌고 하면서 슬슬 욕심을 부리기 시작한다. 결국 교수는 창조가 아닌 또 다른 변형물인 개인간을 만들어 낸 것이 중대한 실수였음을 직시하고..샤리꼬프(개인간)을 다시 샤릭()로 환원시키는 수술을 단행한다. 마치 작가 자신이 당시에 저질러지고 있던 혁명의 소용돌이를 다시 그 이전으로 환원시키고 싶었던 것처럼 말이다.

 

사람은 사람 다울 때, 개는 개 다울 때가 가장 자신다울 수 있다. 각자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제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순리를 거역했을 때 엄청난 재앙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이 작품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인간 사회에도 자연스러운 법칙과 순리가 있거늘, 국가에서 강제로 통제하여 억지로 만들어내는 평등은 부자연스럽고, 결국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은 어찌 보면 기발한 발상으로 풀어가는 한 편의 소동 극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의미를 짐작해보면 슬프고 무서운 작품이다.

 

소설을 읽고 내용 파악이 잘 안되거나, 이미지가 와 닿지 않다거나 하는 경우에는 영화로도 만나보기를 권한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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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파과>의 주인공은 65세 할머니 킬러이다. 손톱이라는 의미의 '조각'이라는 가명으로 45년간 킬러로 살았고, 현재도 활동하고 있는 현직킬러이다. 그녀는 청탁 받은 존재들을 '방역'이라는 이름으로 제거하는 청부살인업자이다. 가난한 집 딸로 태어나 친척 집에서 눈치 밥을 먹으면서 자랐고, 집을 나와 주방 일을 하던 시기에 자신에게 달려드는 미군을 방어하다 죽인 것이 그녀의 첫 살인이었다. 살인의 시작에 매우 분명하고, 명확한 이유가 있는 정당방위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녀는 사랑했던 남자 ''에 의해서 전문 청부살인을 시작하게 되고, 결국 그것이 그녀 삶의 전부가 된다. 자신의 의지로 시작한 살인은 아니었지만, 평생 전문적이고 체계적으로 살인을 했고, 무려 60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현역 활동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자존심 강하고, 독립적인 여성 캐릭터라 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조각이 어떤 캐릭터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을 보자.

 

그녀가 심란한 이유는 팔이 붙잡힌 순간 곧바로 소매를 뿌리치려고 했으나 투우의 손에서 빠져나갈 수 없어서인데, 자신의 신체적 노화가 일상의 노력을 추월한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데에서 비롯되는 초조함이다. 베일 철을 지난 이삭은 고스러지게 마련이고 젊은 남자와 나이 든 여자의 당연한 힘 차이라는 건 이 상황에 고려 대상이 아니며 지금은 업자 대 업자일 따름인데 조각으로선 사소하고 순간적인 장면이라 한들 이 코흘리개한테 졌다는 게 핵심이다. 상대방에 대한 감정적 반응보다 부실한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한 실망 때문에 그녀는 투우가 천천히 힘을 풀고 소매를 놓았음에도 그 자리를 떠날 생각을 미처 못 하고 다시금 소파에 주저 앉는다.

 

물론 육 십대의 그녀가 삼 십대의 투우와 힘 싸움으로 이길 수 있을리는 만무하다. 그녀가 아무리 노련한 킬러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투우는 조각을 만날 때마다 시비를 걸고, 그들은 그렇게 늘 부딪힌다. 그래서 이런 순간에도 <부실한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한 실망>을 느끼는 그녀의 마인드야 말로 그녀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겠다. 여태껏 그 누구한테도 기대거나, 혹은 기대어보려고 마음을 먹거나 한 적 없이 자립적으로, 스스로를 지키며 살아온 강단 있는 여성 캐릭터라는 느낌이다. 물론 작가는 외부에서 노인들을 바라보는 객관적인 시선도 잃지 않는다. 이 작품의 처음 지하철 내의 풍경을 묘사한 장면은, 우리가 매일같이 실제 보는 그 풍경이다. 노인에 대한 젊은이들의 시선과 생각, 그리고 '나이 듦'을 권력으로 이용하려는 횡포와 실제 그들의 쇠락한 육체가 비춰지는 모습까지 말이다. 하지만 '조각'이 여느 노인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온 건 분명하다. 그리고 그녀의 킬러로서의 삶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진행 중이다. 여전히 의뢰를 받아서 방역 업무를 하고 있으며, 젊은 그 누구에게도 실력으로 밀리지 않는다.

 

조각은 길 잃은 개 무용과 함께 지내는데, 무용을 집에 데려온 뒤로는 항상 창문을 열어둔다. 그리고 창문을 밀어젖히는 모습을 몇 번이고 무용에게 보여주며 확인시킨다. 언젠가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혹은 어느 날 아침 네가 눈을 떴을 때 내가 누워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면.. 그때 너는 저리로 나가야 해.라고 가르쳐주기 위해서. 너는 나가서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고. 개 장수들한테 잡히지 말고. 사람들이 너를 안락사 시키지 않도록. 늙은 개는 누구도 맡으려고 하지 않을 게 뻔하니까. 이런 순간에야 조각이 평범한 65세 할머니처럼 느껴진다. 혼자 남겨질 누군가를 걱정해야 할 만큼, 이제는 어느 날 갑자기 어떻게 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나이라는 걸 스스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평소와 달리 방역 작업 준비 중에 만난 폐지 수거 노인을 도와주다, 작업을 망쳐버리고 만다. 그리고 다친 자신을 몰래 치료해준 강박사의 가족에게 연민을 가지고, 그의 딸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이면서, 처음으로 '연민'을 가지게 된다. 물론 그것이 노화의 증거라고 스스로 느끼면서 말이다.

 

그러고 보니 복숭아, 그 뒤로 복숭아를 어떻게 했더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조각은 냉장고를 연다. 혼자 살면서 식료를 쟁여둘 일이 없으니 냉장고는 300리터다.

이 참에 한꺼번에 청소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하단 채소 칸을 연다. 거기 뭉크러져 죽이 되기 직전인 갈색의, 원래는 복숭아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물건이 세 덩어리 보인다. 집에 와서 그녀는 꼭 한 개를 먹었을 뿐이고, 그 뒤로 잊어버린 모양이다.

 

냉장고에 넣어둔 과일이나 채소가 색이 변질되고 형태가 망가지는 걸 누구나 한 번쯤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지난 여름에 남자친구가 복숭아를 한 박스 집으로 보내준 적이 있다. 주문하면서 모양 예쁜 걸로 잘 골라서 담아달라고 했다고 하면서. 그래서인지 도착한 복숭아 한 상자엔 멍들지 않고, 탐스러운 복숭아들이 가득했다. 색깔이 변하지 않게, 물러지지 않게 빨리 먹어야지. 마음 먹었었는데, 워낙 집에서 뭘 잘 안 먹는 성격이라 그런지 이 주쯤 지난 뒤에 어김없이 모양이 망가진 '파과'들을 냉장고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마음 써준 남자친구에게 미안해서 그것들을 골라 잘라서 조각을 내고, 성한 부분만 모아서 복숭아 잼을 만들었다. 잼을 만드는 것이 결과적으로 복숭아의 유통기한을 늘려주는 것이 되었지만, 그래도 싱싱한 과육 상태일 때 그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미안함 마음이 남았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달콤하고 상쾌하던 것이 갈색 덩어리로 변해서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무엇으로 변해버리는 것이, 어쩌면 우리네 인간이 자연히 나이를 먹어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영원한 젊음이란 없으니까. 과일이 만들어질 때부터 방부제로 보존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조각은 투우와의 마지막 결전의 날을 앞두고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콜트 45구경을 꺼낸다. 오래되었다고 해도 구한 지 15년은 넘지 않았고, 밀봉상태였으니 불발탄이 나올 가능성이 크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하루가 달라지는 자신의 몸만큼이나 그것의 기능이 불안해 점검을 받으러 나선다. 사람의 영혼을 포함해서 자연히 삭아가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모든 물건은 노후 된 육체와 마찬가지로 영원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파과'라는 제목만큼이나 작품을 읽는 내내 어디선가 복숭아의 달콤한 향기가 나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아마도 사라져 버린 것들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느낌에 내가 지난 여름의 그 과육에 대한 미련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 그리고 같은 시기에 출간된 김영하 작가의 <살인자의 기억법>과 비교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미 많은 이들이 리뷰에서 이 두 작품에 대한 감상문을 올렸지만, 같은 소재로 이렇게나 다른 색깔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흥미로움이 나도 몇 자 끄적이게 만든다.

 

구병모의 이야기는 현재 '진행형'이고, 김영하의 이야기는 다소 '후일담'같은 느낌이다. <파과>의 문장은 호흡이 매우 길어 대충 흘려 읽으면 의미가 분명하지 않게 느껴질 수도 있어, 천천히 꼭꼭 씹어가며 읽어야 한다. 대신 주인공이 왜 킬러 일을 하게 되었는 지와 그녀가 '방역'을 하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묘사가 되어 있어 스토리 자체는 구체적이고 분명하다. <살인자의 기억법>의 문장은 단문이라 속도감 있게 페이지가 넘어간다. 그러나 치매에 걸린 늙은 살인범이 기억과의 사투를 벌이는 스토리는 서사가 툭툭 끊어지며 전개되어 불친절하다. 그가 왜 살해를 시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동기와 살해하는 과정에 대한 묘사가 없기에 모호하다. 누군가는 구병모의 긴 문장이 술술 읽히지 않고 자꾸만 걸린다고 불편해하고, 누군가는 김영하의 이야기에 긴장감이 떨어진다고 아쉬워한다. 그러나 두 명의 완전히 다른 색깔을 가진 작가가, 정확히 같은 시기에 유사한 소재로 다른 이야기를 풀어내었다는 것 자체가 독자 입장에서는 꽤나 행복한 일이 아닌가 싶다. 간결하고 압축되어 짧은 남성적인 문체의 너무나 잘 읽히는 작품과 호흡이 길고 수식이 많아 긴 여성적인 문체의 너무나 어렵게 읽히는 작품. 그러나 전자는 스토리가 모호하고, 반면에 후자는 스토리가 명확하다.

 

<살인자의 기억법>의 주인공 70세 김병수는 은퇴한 연쇄 살인범이다. 30년 동안 사람을 죽였지만, 마지막 살인으로부터 25년이나 흘렀다. 그리고 그는 알츠하이머에 걸려 자신의 사라져 가는 기억과 사투 중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딸을 지키기 위해서 마지막 살인을 계획하려고 한다. 이제 그에게 마지막 할 일이 생긴 것이다. 내 딸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리기 전에 박주태를 죽이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자신이 적어둔 기록도 다음날이면 까맣게 잊어버리는데. 김병수의 첫 살인은 자신의 아버지였다. 술만 마시면 어머니와 여동생을 두들겨 팼던 아버지에 대한 살인은 그 이후에 30여 년 동안 행했던 살인과 인과관계로 이어지진 않는다. 그가 왜 아버지 이후에, 다른 사람들을 계속 죽여야 했는지에 대해서 작품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후반부로 갈수록 스토리 자체가 모호해진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주인공의 1인칭 시점이니 독자가 혼란에 빠지는 것이 당연하지만 말이다. <파과>는 반대로 주인공 65세 조각이 왜 킬러가 되었고, 현역으로 활동하면서 실제 그녀가 사람을 죽이는 방식까지 구체적으로 묘사가 되어 스토리가 매우 명확하다. 3인칭으로 쓰여진 시점이라 각 캐릭터 별로 사연과 감정선이 분명하게 보여진다. 김영하의 작품이 150페이지 정도의 아주 가볍고 짧은 책으로, 수식 없이 단문으로 이루어진 문장이 스륵스륵 책장이 넘어가는 것에 비해 내용을 모호하게 만들었다면, 구병모의 작품은 스토리가 명확한데 비해 호흡이 긴 문장들로 페이지 넘기는 속도를 더디게 만들었다는 얘기다.

 

이렇게나 다른 두 작품이지만, 사실 두 작품 모두 매우 흥미롭고 매력적인 부분들이 많다. 으깨진 과일.에서 소멸하는 육체에의 비유를 발견하고 이팔청춘이 지나가버린 늙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만든 구병모 작가도 멋지고, 치매에 걸린 연쇄살인범이 마지막 살인을 준비하고, 살인일지를 쓰는데 문장력이 부족해 시 강좌를 듣는다는 설정을 한 김영하 작가도 멋지다. 구병모 작가는 독자들이 페이지를 빨리 넘기는 것이 싫어서, 의도적으로 시간을 좀 들여서 읽으라는 뜻으로 긴 문장을 썼다고 하는데, 그에 따라 누군 가에게는 그 긴 호흡들이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김영하 작가는 이번 작품이 하루에 한두 문장, 한 단락 정도만 쓰는 날이 많았을 정도로 천천히 쓰였다고 하는데, 그와 반대로 독자들에게 이 작품은 '너무' 잘 읽혀서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구병모 작가의 결말은 어딘지 쓸쓸하기 보다는 따뜻하고, 김영하 작가의 결말은 서늘하고 섬뜩하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부서지고 소멸에 가는 것들에 대한 시선이 아닐까 싶다. '치매는 늙은 연쇄살인범에게 인생이 보내는 짓궂은 농담이다' 라는 김영하 작가의 말처럼, 어쩐지 그의 짧은 소설은 농담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피식 웃게 만드는 이야기 속에 남아 있는 건 찝찔한 슬픔의 맛이 남아 있다. '육체적인 소멸과 더불어 사회적인 시선에 저항하는 방식을 극단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킬러라는 소재를 사용했다'고 하는 구병모 작가의 말처럼, 그녀의 소설은 늙어서 약해져 가는 인간에 대한 애틋하고도 달콤한 맛이 나는 우화처럼 느껴진다.

 

이런 두 작가의 '다른' 작품을 '동시에' 볼 수 있다는 건, 같은 시대를 사는 독자로서의 즐거움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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