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윌 파인드 유
할런 코벤 지음, 노진선 옮김 / 문학수첩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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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위로 맨해튼의 맑은 밤하늘이 펼쳐져 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빨간색 조명으로 빛나고 있는데 이유는 모르겠다. 그래도 숨 막히게 아름답다. 전부 다 그렇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에 절대 고마워하지 않는다. 다들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사실은 고마워하지 않는 게 아니다. 그냥 그렇게 길들여졌을 뿐이다. 우리는 익숙해진 것을 당연히 여긴다. 인간의 본성이다. 이 멋진 야경을 좀 더 즐기고 싶지만 아쉽게도 그럴 수가 없다. 전에도 말했듯이 나는 감옥에 갇힌 신세로 살아도 상관없었다. 매슈가 죽었고, 그건 내 탓이었기 때문에 시궁창 같은 삶을 살아도 만족했다.               p.230~231


데이비드 버로스는 자신의 세 살짜리 아들을 살해한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5년째 복역 중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죽이지 않았으며, 무죄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아버지로서 자신의 아들을 지키지 못한 것은 잘못이므로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이 시궁창 같은 감옥에서 해방된다 해도 자신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자신의 아들이 여전히 죽고 없는 세상에서 구원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5년 만에 처음으로 누군가 면회를 신청하고, 모든 것이 달라진다. 이혼한 아내의 동생 레이철이 사진 한 장을 보여줬고, 그 속에 한 소년이 있었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아들 매슈가, 여덟 살 소년의 모습으로. 


매슈는 선천성 혈관종으로 오른쪽 얼굴에 모반이 있었다. 사진 속 소년 역시 더 작고 색이 옅기는 하지만 같은 위치에 모반이 있었다. 기자인 레이철은 보스턴 경찰국의 전문가에게 미래 얼굴을 예측하는 소프트웨어로 매슈의 5년 후 모습을 보여달라고 의뢰했고, 그것이 사진 속 아이와 거의 일치했던 것이다. 물론 머리로는 매슈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건 이전에 데이비드와 레이철은 각별히 사이가 좋은 형부와 처제 사이였었다. 데이비드는 아들이 살아 있다고 확신하고,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이곳에서 나가야 한다고 생말한다. 레이철과 그가 이 사진 속 아이에 대해 더 알아내야 한다고, 하지만 어떻게 나갈 수 있을까? 데이비드는 아버지의 친구이자, 자신의 대부이기도 한 교도소장에게 면담을 요청한다. 그리고 목숨을 건 탈출을 계획하는데, 과연 그는 아들을 되찾고 사건의 진실을 밝혀낼 수 있을까. 누가 그를 함정에 빠뜨린 걸까. 그의 아들은 정말 살아 있는 것일까? 





가족은 중요하다. 그러니까 내 가족 말이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옛날이든 지금이든 이 사실은 변함이 없다.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이걸 부인하는 사람은 미쳤거나 거짓말쟁이다. 말로는 막연한 대의가 더 중요하다고 하지만, 그건 대의가 우리의 이익에 부합할 때만 그렇고 사실은 남에게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내게 편리할 때를 제외하고. 안 믿긴다고? 그렇다면 이렇게 자문해 보라. 당신의 자식 혹은 손자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몇 명의 목숨과 바꿀 수 있는가? 한 명? 다섯 명? 열 명? 백만 명? 이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한다면 그날 밤 거트루드가 한 행동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p.386


이 이야기는 데이비드의 1인칭 시점과 그외 여러 인물들의 시점을 번갈아 교차 진행시키며 빠르게 진행된다. 재미있는 건 이 롤로코스터를 출발시켰던 첫 문장이다. “나는 내 아이를 살해한 혐의로 5년째 종신형을 복역 중이다. 스포일러 경고: 내가 죽이지 않았다.”라는 데이비드의 고백으로 시작했으니 말이다. 모든 증거와 정황이 그에게 불리한 상황이었고, 결정적인 증언을 한 증인까지 있었기 때문에, 데이비드를 믿었던 가까운 이들조차 그가 범행을 저질렀다고 믿고 있었다. 술에 취해 정신을 잃었던 거라고, 의도하지 않았던 범행이라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제 그 날 죽었다고 믿었던 그의 아들이 살아서 어딘가에 있다고 의심될 만한 사진이 있었고,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아버지의 사투가 시작된다. 


언제나 실망시키지 않는 작가, 할런 코벤의 신작이다. 할런 코벤의 작품은 매끈하게 잘 만들어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같다. 수많은 등장 인물은 이리저리 얽히고 설켜있고, 결국에는 퍼즐처럼 연결이 된다. 복잡하고 다채로운 플롯은 막판에 가서야 단순하게 정리가 되며, 끝을 향해 달릴 때까지 지루할 틈이란 단 한 순간도 없다. 비밀과 배신, 반전과 폭로, 위선과 거짓말, 그리고 스펙터클한 액션까지 골고루 잘 담겨 있는 종합선물세트같은 작품이다. FBI 콤비와 경찰들이 일거수일투족을 추적하는 가운데, 데이비드는 자신의 과거로 향한다.  오직 '내 아들을 구한다.'는 목적을 위해,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으며 숨겨진 진실을 찾기 위해 애쓴다. 자본의 논리에 움직이는 현대 사회에서 상류층이 범죄에 개입되면,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이란 사실 없다. 그 속에서 우리의 주인공이 어떻게 자신과 가족을 지켜낼 지 지켜보는 일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것은 바로 그런 현실성때문일 것이다. 불필요한 군더더기 없이, 모든 캐릭터와 사건이 한 방향으로 향해 달려가는, 잘 만든 스릴러가 궁금하다면 할런 코벤의 작품을 만나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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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의 늦여름
이와이 슌지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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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훨씬 컸다.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게 정묘했다. 어떻게 이런 필치가 가능할까... 이런 작품, 나라면 평생 걸릴지도 모른다. 뭔가 찰나의 덧없음이 있다. 가령 인생에 이런 순간이 있다면 실로 한순간일 터인데, 그 한순간이 이렇듯 한 폭의 그림이 되어 언제까지고 그곳에 머문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훌륭하게 그리려는 생각도, 사실적으로 옮기려는 의도도 찾아볼 수 없다. 어쩌다 찍은 사진이 생각보다 잘 나와서 방에 걸어봤어, 하고 말하는 듯한, 내일 다시 찾아오면 그림은 사라지고 벽만 남아 있을 것 같은, 불안정한, 순간의 흔들림 같은 무언가가 그림을 숨 쉬게 했다. 나는 불가해한 매력에 사로잡혀 꼼짝도 하지 못했다.          p.37


카논은 미술을 전공했지만 자신의 그림 재능이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광고 회사에 취직한다. 하지만 엉뚱한 요구를 해대는 상사와 불륜이라는 이상한 소문이 돌게 되자 그만 질려서 퇴사를 하게 된다. 이후 지인의 소개로 미술잡지 편집부에 수습기자로 들어가게 되지만, 기획이 채택될 때까지는 딱히 보수가 있는 게 아니라 불안정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그림을 다루는 일을 하면서 화가들을 인터뷰하고, 작품을 취재하며 잊고 있었던 그림에 대한 애정이 솟아나기 시작한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특집기사 작업을 맡게 되는데, 뱅크시처럼 얼굴을 공개하지 않는 화제의 작가에 대한 심층 탐구 기획이었다. 


얼굴도 이력도 공개하지 않는 수수께끼의 화가가 있다. 그가 그린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얘기가 떠돌아 ‘사신’이라 불리며 도시전설의 주인공처럼 되어 버렸다. 대부분의 작품이 죽음을 테마로 하고 있고, 임종 직전의 인물을 그리거나 해부중인 인체를 모티프로 한 작품도 있었다. 그가 그린 작품의 모델들은 전부 이미 세상에 없다. 게다가 그에게는 인터넷상의 가십 따위는 깨끗이 잊게 만드는,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오라가 있어 전시회는 대성황을 이루었고, 그에 대한 관심도 높아진다. 이 작품은 바로 그 천재 복면 화가의 이야기를 쫓는 아트 미스터리이다. <러브레터>의 감독 이와이 슌지는 소설가로서도 차곡차곡 필모그래피를 쌓아 왔는데, 이번 작품으로 첫 미스터리 소설에 도전했다. 수습기자인 카논은 본명도, 얼굴도 알려지지 않은 복면 화가의 정체를 추적하게 되면서 점점 더 그의 작품과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모습은 닮기 어렵고 뜻은 닮기 쉬우니."

"그게 뭐예요?" 가세가 물었다.

"다카나시 씨가 좌우명으로 삼았던 말. 마음을 흉내 내기는 쉽지만 형상을 흉내 내는 일이야말로 어렵다는 뜻이래. 어떻게 생각해?"

가세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마음과 형상을 분리해 생각한 적이 없었는지도 몰라요."

잘 넘기기는. 분명 그는 그게 어렵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리라....... 아마도. 나는 평범한 인간이라 잘 모르지만.               p.377


카논은 고교 미술부 후배였던 가세를 취재 중에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다. 그래서 천재 복면 화가의 정체를 추적하는 과정에도 종종 동행하게 되는데, 어느 날 가세가 이런 말을 한다. "뭔가 그, 언뜻 현실 세계와 상관없어 보이는, 그저 망상이나 꿈 같은 그것들이 의외로 현실에 이리저리 개입해서 때로 이 세계를 바꿔버리는 일도 있지 않을까, 가끔 생각해요."라고. 머릿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실은 세계에 깊은 영향을 주고, 나아가 세계를 바꿀지도 모른다는, 영 알쏭달쏭한 이 말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포인트가 아닐까 생각했다. 일순간 보는 이를 매혹시키는 그림 작품처럼, 뭔가 형언하기는 어렵지만 마음에 새겨지는 게 있는 그런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저주를 그리는 사신이라는 금단의 도시전설을 따라가는 미스터리 서사 자체도 흥미진진했고, 인물들 간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정서적인 부분도 어딘가 설레는 부분이 있는 그런 작품이었다. 마주하는 순간 무언가 와락 전해지는 그런 그림과 같은 소설을 쓰고 싶었다는 이와이 슌지는 그림은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여 순식간에 매혹시키곤 하는데, 그런 감각을 소설에서 표현할 수 있을까, 에서 이 작품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가 실제로 소설을 집필하는 데 모티프가 된 미에노 케이의 하이퍼리얼리즘 회화가 표지 이미지로 사용되었는데,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도 상당히 큰 도움을 주는 그림이었다. 이와이 슌지 특유의 섬세하고 감각적인 면모와 미술에 대한 깊은 이해가 이 작품을 더욱 독특한 미스터리로 만들어 주고 있다. 이와이 슌지의 소설은 처음 읽었는데, 여러모로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색다른 미스터리 소설을 만나보고 싶다면, 이와이 슌지의 작품들을 좋아했다면, 이 작품을 적극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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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들의 섬
엘비라 나바로 지음, 엄지영 옮김 / 비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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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그 일을 잊을 수 있었을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현실 전체를 의심하도록 만든 그 경험이 다른 경험으로 대체되었을까? 어쩌면 그 경험이 너무 환상적이어서 그저 꿈으로 여겼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기억의 예외적인 성격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 집을 다녀온 뒤 며칠 동안 괴로워한 기억만 남아 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고통.          - '역행' 중에서, p.78


표제작인 <토끼들의 섬>에서는 스스로를 발명가로 여기는 한 남자는 어린 시절부터 품어온 무인도를 여행하겠다는 꿈을 실현시키고자 직접 만든 통나무배를 강에 띄운다. 본격적으로 배를 타고 돌아다니다 작은 섬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살기로 결심한다. 그는 도시 생활에 신물이 났고,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렜다. 우선 일주일에 두어번 섬에서 잠을 자며 몇 주간 주변을 관찰했고, 그곳이 아직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무인도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문제는 새들이었다. 새들은 자고 번식하고 죽기 위해 섬을 찾아왔고, 덕분에 섬 전체가 새 둥지와 배설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그는 고민 끝에 섬에 토끼를 풀어 새를 쫓아내자고 생각한다. 아주 하얗고 긴 털과 빨간 눈을 가지고 있는 하얀 토끼 스무 마리를 섬에 풀어놓았고, 그 뒤에 벌어진 상황은 그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다. 


표제작인 <토끼들의 섬>을 비롯해서 이 소설집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들은 하나같이 독특하다. 귀에서 발이 돋아나기 시작한 한 여인의 이야기, 이별을 앞둔 연인의 기묘한 여행기, 정신병을 앓고 있는 형의 말대로 악마의 관점에서 도시를 바라보고자 결심한 건축학도, 밤마다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호텔 옆방의 미스터리, 신혼여행지에서 돌연 자신이 벌레로 변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남자, 휴대전화에 뜬 점술가의 광고 메시지가 이상하게도 상황과 맞아떨어지는 걸 알게 된 여자의 사연 등등 평범한 일상 속에서 뭔가 하나가 어긋나고 틀어져버린 곳에서 시작된 이야기들이다. 다가갈수록 미로처럼 뒤틀리는 거리, 말라빠진 음식과 벌레가 들러붙은 욕실 등 선연하게 보여지는 이미지들이 자아내는 분위기 또한 작가가 그려내는 환상과 현실 그 어딘가에 있는 세계를 느끼게 해준다. 





어느 목요일, 차에 앉아 있던 그는 별관의 어느 방 커튼 사이로 비치는 큰형의 그림자를 보았다. 말라붙은 야자수 잎이 발코니에 달려 있었다. 큰형은 방에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는데, 누군가를 구석에 몰아넣고 위협하거나 공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걸음걸이가 어딘지 부자연스러웠다. 그러고 나서 갑자기 불이 꺼졌다. 다시 한번 온몸에 오싹 전율이 일었다. 그의 뼈와 근육은 머리가 상황을 논리적이면서도 불분명하게 만들고 있음을 알았다. 그 사건은 매일 같은 시간에 사흘 연속 되풀이해서 일어났다.               - '지옥의 건축학을 위한 기록' 중에서, p.152~153


총 열한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이 책은 스페인 문단을 이끌어갈 새로운 목소리라 평가받는 작가 엘비라 나바로의 소설집이다.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는 작가인데, 대표작인 이 작품은 “카프카와 보르헤스의 문학적 성취를 이어받은 걸작”이라 극찬받으며 2021년 전미도서상 번역문학부문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환상과 악몽을 오가는 이야기들은 기괴하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가득한데, 각각의 이야기가 짧은 만큼 더욱 임팩트가 강하다. 단편소설의 매력을 제대로 보여주는 이야기들이라 낯설고, 불편하다는 점 또한 작가가 그려내는 서사에 가산점이 되어 준다. 엘비라 나바로는 '외곽, 변두리, 경계... 내 관심사는 언제나 현실을 결정짓는 윤곽이 희미해지는 틈새에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독특한 환상 괴담을 만난 듯한 기분이다. 


이 작품은 전미도서상 번역문학부문 후보에 오르며 '프란츠 카프카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문학적 성취를 이어받아 유럽 사회가 당면한 불안을 이야기하는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스페인어권 작가들의 최고 등용문으로 꼽히는 하엔 소설상을 비롯, 유수의 신인상과 작품상을 연달아 수상하기도 했는데, 현대 스페인 문학의 새로운 목소리가 궁금하다면 놓치지 말아야 할 작가인 것은 분명하다. 책 표지의 어두운 밤의 이미지와 그 속에 보랏빛과 핑크빛으로 선연하게 물든 컬러감이 이 작품의 분위기를 근사하게 재현시켜주고 있다. 자, 스페인의 젊은 작가가 그려내는 환상과 악몽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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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시가 없다면 너무 외롭지 않을까요 - 흔들리는 인생을 감싸줄 일흔일곱 번의 명시 수업
장석주 지음 / 포레스트북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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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의 도입부는 강렬하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마시는 "새벽의 검은 우유"는 죽음의 은유로 읽힌다. 홀로코스트의 공포와 고통이 얼마나 오랫동안 그의 무의식을 억압하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한다. 그가 평생 품고 살았던 비애와 고통, 불안과 절망의 무게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 시를 읽을 때마다 고통으로 가슴이 찢기는 듯하다. 독일에서 온 죽음의 명인, 사냥개, 뱀 따위는 그가 유대인으로서 겪은 죽음의 불안을, 즉 죽음의 무도곡이 연주되는 가운데 가스실에서 처형당하는 공포를 날것으로 드러낸다.            p.150~151


장석주 작가의 글을 좋아한다. 그가 아내인 박연준 시인과 함께 쓴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를 읽고 굉장히 로맨틱하면서도 특별한 부부라고 생각했던 것이 그의 글을 만난 첫 번째 기억이다. 출간한 책이 100권을 넘고, 50년 가까이 시를 읽고 써온 그는 시집뿐만 아니라 산문집, 비평 등의 다양한 분야의 글들을 써왔다. 시인이라는 이력 때문인지 장석주 작가의 산문에서는 여백에서도 뭔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참 좋았다. 그런 그가 어른들에게 꼭 필요한 77편의 명시를 정성껏 가려 뽑고, 이해를 돕기 위해 글을 썼다니 이번 책은 꼭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시인들은 말을 모으는 자들이 아니라, 말을 버려서 의미의 부재에 이르게 하는 사람이라고. 말의 바닥에 닿으려고 말을 지우고 빈자리를 만들면, 그 말의 빈자리에 시가 들어선다"고. 이 말만큼 시를 간결하고도 핵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와 닿았던 말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시를 온전히 즐기기에는 그 문턱이 높은 것 또한 사실이었다. 시를 읽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계절 가을이지만, 선뜻 시에 손이 가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장석주 시인과 함께 이 책을 읽으면서, 낯설다거나, 난해하다는 느낌을 거의 받지 못했다. 시가 이렇게 쉽게 이해될 수도 있는 거구나 싶어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그는 서문에서 '시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왔지만 그건 깜짝 놀랄 만한 사건이고, 끔찍한 아름다움이 태동하는 순간'이라고 썼다. 이번에 이 책을 통해 만난 시들이 내게 그러했다. 





불행은 늘 멀리서 온다고, 불행의 총량은 누구에게나 균등하다고 믿었다. 살아 보니 그건 잘못된 믿음이었다. 나이 든 덕으로, 나는 불행이 균등하지 않을뿐더러 그것이 전생의 업도 아니라는 걸 깨쳤다. 불행은 우연이 빚은 사태이고, 가장 나쁜 불행조차 흩뿌려지는 빗방울같이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방관자로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타인의 불행에 책임은 없을까? 이웃의 불행을 아파하지 않고 무심히 흘려보낸 채 얻은 면죄부는 정당한 것일까? 이웃의 불행과 고통에 야박하게 군 것은 얼마나 고약한 태도인가. 타인의 불행을 무감각하게 소비하고 냉담하다는 것은 우리가 영악한 이기주의자라는 뜻이다.                     p.251


어느 소설가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소설가는 만들어질 수 있지만, 시인은 태어나야만 한다고. 시는 머리가 아니라 몸에서 나오는 것이니 말이다. 시는 은유에서 시작해서 은유에서 끝난다. 시만 은유를 독점적으로 쓰는 것은 아니지만 은유 없는 시를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사람들이 시를 어렵게 느끼는 것이다. 시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을 사용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시의 언어들이 모두 은유를 통해서 빚어낸 것이니 말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겐 이런 책이 필요하다. 저자의 사색과 통찰이 더해진 글이 우리를 시의 아름다운 세계로 천천히 이끌어 주고 있으니 말이다.


월트 휘트먼, 메리 올리버, 백석, 윤동주, 김소월, 칼릴 지브란, 실비아 플라스, 라이너 마리아 릴케, 파블로 네루다, 아르튀르 랭보, 김수영, 샤를 보들레르, 에밀리 디킨슨, 나태주 등등... 익히 들어본 시도 있었고, 처음 만나는 시들도 있었다. 시를 통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돌아보고, 그리움이란 지금 여기에 없는 것을 마음으로 끌어당겨 그윽하게 응시하는 것이라는 것을 배우고, 각박한 현실에 쫓기는 마음에 여유를 찾게 해주는 시간이었다. 한 자 한 자 읽고 되뇔수록 '시는 현실에서 아무 쓸모도 없다. 시는 그토록 무용하지만 우리를 계속 살아가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하게 되었다. '삶에 시가 없다면 너무 외롭지 않을까요'라는 제목처럼, 삶이 외롭고 허무하게 느껴질 때마다 더욱 적극적으로 시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시란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빛을 찾아내는 유일한 언어이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시가 어렵고 멀게만 느껴졌다면, 이 책을 통해 왜 우리가 시를 읽어야만 하는지, 시의 언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제대로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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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밤의 달리기
이지 지음 / 비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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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은 어쩌면 음식과도 비슷하다. 모르는 음식은 영원히 그 맛을 알 수 없지만, 한번 맛을 본 것은 모른다고 할 수 없다. 그러고 보면 맛은 단지 입으로만 느끼는 게 아니다. 미각이 첫 번째긴 하지만 후각이나 시각 또한 중요하고, 더 나아가 그 못잖게 중요한 게 또 있다. 바로 촉각이다. 면이 퍼져 있다면 더 이상 면이 아니고, 질긴 고기는 이미 고기가 아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촉각을 한 번이라도 맛본 사람은 그 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전성기는 그 찰나다. 모든 것이 아주 잠깐 동안 딱딱 맞아떨어지던 그 순간. 우리는 모두 긴 어둠 속에서 아직 먹지 못한 음식을 기다리거나, 단 한 번 맛본 그 최고의 맛을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p.43


을지로 세운상가에 터 잡은 청년 예술가들의 일상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 속 인물들은 종종 현실을 벗어난다. 어릴 적 여자아이였던 휴일은 엄마가 집을 떠나자 남자가 되어 연상의 여인과 연애를 하고, 엘은 알록달록한 곰 젤리 하리보를 한 움큼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잔인하게 곰을 통째로 먹고 있다고 하리보를 끊어야 한다고 말한다. 모태솔로인 도도는 언제나 관심사가 연애이고, 끊임없이 유턴하는 버릇이 있는 휴일의 아버지는 또 집을 떠나 해외에서 새로운 일을 벌이려는 중이고, 태유의 아버지는 동물원 우리에서 이십 년을 지내며 핑크스핑크스로 근무하고 있다. 


가진 건 감각뿐인 젊은 예술가들이 바라는 건 작업실과 작업을 할 수 있는 돈뿐이지만, 그게 너무 어렵다. 지원금을 받으면 수월해지지만 내야 할 서류와 사유와 영수증을 정리하다 보면 정작 작업할 시간을 가질 수 없는 구조 속에서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래서 휴일은 '약하디약한 우리에겐 둘만의 우주가 필요하다'는 말로 사랑에 기대뿐이다. 동료들도 예술을 그만두고 공무원이 되거나 카페를 개업하는 등 각자의 살길을 찾아 나선다. 





우리의 멜랑콜리는 따뜻하다. 검지도 희지도 않은 재 같은 우울이 눈과 진흙처럼 쌓인 것은 재의 마을 때문이 아니라, 카페 수영장 때문이 아니라, 하리보 때문이 아니라, 핑크 스핑크스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이 불확실해서가 아니라, 그저 우리가 사람이라서다. 그리고 인생을 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살아온, 살고 있는, 살아갈 생 그 자체. 지분이 없어도 발이 떠 있어도 결국은 나의 삶이니까. 눈 위에 눈이 쌓인다. 흩날리면서 눈은 눈과 만난다. 눈 위의 눈, 눈 위에 눈, 눈에 눈. 그리고 진흙. 아름다운 혼돈, 선과 선, 악과 악의 애매한 경계들. 그것들이 쌓이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작업을 묵묵히 해나갈 것이다. 작업은 다른 게 아니라, 우리의 삶이다.              p.241~242


이지 작가는 ‘하루키적 경묘함’을 갖췄다는 찬사를 받으며 데뷔했는데, 이번 작품 역시 상실을 다루는 모습에서 그런 느낌이 나는 것 같았다. 남편이 게이라는 것을 알고 집을 나간 엄마, 커피 유통업을 하겠다며 해외로 떠난 아빠.... 불행한 가정사에도 불구하고 휴일은 어둡거나, 절망하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만 보인다. 비극적 사건이 벌어지더라도 가뿐하게 밟고 넘어설 수 있는 청춘 특유의 무신경함과 담백함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이야기는 점점 논리나 이성으로 따질 수 없는 영역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 현실과 환상의 경계 그 어디선가에서 멈춰 서서 독자들을 똑바로 쳐다본다. 우리의 현실 또한 종종 길을 잃어 버리고, 실패하고, 넘어지고, 부서지는 가운데 서로에게 기대고, 위로받으며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오랜 잡지기자 생활을 비롯하여 각종 직업을 거친 끝에 소설가로 데뷔한 이력을 가진 작가답게 문장들이 특히나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이 작품의 서사에 공감하지 않더라도, 밑줄 긋고 싶은 문장들이 많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 만큼 경쾌하고, 톡톡 튀는 문장들로 가득한 작품이다. ‘한 줄 메시지로 요약할 수 없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작가의 등단 포부처럼 이 작품 역시 단 몇 줄로 줄거리를 요약하기 보다는, 소설의 분위기를 통해 작품 속 세계를 느껴본다면 더 좋을 것 같다. 무언가 철거되고 또 새로 지어지다 돌연 취소되는 등 금세 사라질 것으로 가득한 곳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청춘들의 이야기는 냉정한 현실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신만의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데서 오는 담백한 위로를 보여준다. 감각적인 문장과 독특한 필치에서 오는 경쾌함으로 '요즘 젊은것들'의 영혼을 느껴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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