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수를 믿다
나스타샤 마르탱 지음, 한국화 옮김 / 비채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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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의사와 나, 그리고 곰이 내 몸 깊숙이 두고 간 정의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할 일은 이제 '이 소통을 유지'하는 데 있다.

곰에 맞서 생존한다는 것은 이 세계에서 '다가올 일'에 맞서 생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조적인 변화의 재개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우리를 매료시키는 단일성은 결국 그것의 본래 모습인 환상으로 판가름 난다. 형태는 그것만의 고유한 도식을 가지고 재구성되지만, 그것에 사용되는 요소는 모두 외부에서 온다.            p.90~91



짧게 자란 풀들로 뒤덮인 평원이 붉게 물들고 있다. 안개가 서서히 걷히면서 드러나는 것은 갈색 털 뭉치들이 흩어져 있는 가운데 체액과 피로 덮인 모호한 형상을 하고 여성이다. 그녀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인류학자인 나스타샤 마르탱은 시베리아 캄차카 반도의 화산 지대를 홀로 탐방하다가 곰에게 습격을 당한다. 광대뼈와 턱, 얼굴 전체가 찢기고 오른쪽 다리까지 물리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등반용 얼음도끼를 휘둘러 가까스로 곰을 쫓아내고 여덟 시간만에 구조된다. 


러시아 클리우치의 군사기지 병원으로 이송되어 열악한 환경에서 인공 턱을 삽입하는 대수술을 받고 간신히 회복한 뒤 마침내 가족들과 고국인 프랑스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이미 너무도 달라져있었다. 이 책은 생사의 기로를 오가는 강렬하고 생생한 체험을 기반으로 쓰인 일종의 다큐멘터리이자 회고록이다. 눈앞에서 번뜩이는 곰의 이빨과 축축한 숨결, 뿜어져 나오는 붉은 피와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게다가 시베리아 곰에게서 생존한 사람을 구경하러 모여드는 사람들, ‘얼굴 훼손은 정체성의 상실’이라며 끊임없이 기분을 묻는 심리치료사와 자신의 몸을 연구 대상으로 대하는 의사들, 더는 함께 일상을 공유할 수 없는 친구들 속에서 저자는 생각이 많아진다. '인간인 그들과 저 위, 고도의 툰드라에 존재하는 곰의 세계 사이를 잇는, 이상야릇한 가교가 된다'고 스스로에 대해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나는 몇 년 전부터 경계, 가장자리,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상태, 접경지대, 그리고 중간 세계에 대해 써왔다. 다른 존재의 힘을 만나는 것이 가능한 곳, 자기가 변질될 위험을 감수하는 곳, 그리고 한번 가면 다시는 되돌아오기 힘든 매우 특별한 공간에 대해서. 나는 매혹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항상 스스로에게 말해왔다. 사냥꾼은 먹잇감의 냄새를 풍기고 그 가죽을 뒤집어쓰고 목소리를 흉내 냄으로써 위장하지만, 가면 너머에서는 여전히 자신인 채로 상대의 세계로 들어간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혹은 우리가 속한 사람들에게 돌아가기 위해 상대를 죽일 수 있는가. 혹은 실패하고 상대에게 집어삼켜져 인간의 세계에서 살기를 멈출 것인가.               p..149



병실에 있는 저자에게 FSB, 러시아 연방보안국 요원이 찾아온다. 클리우치 즉 군사 요충지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어떻게 곰의 공격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궁금해한다. 그리고 '이 지역의 러시아 군사 시설을 정찰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파견된 고도로 훈련을 받은 비밀 요원'이 아닌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저자는 자신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간첩 행위는 없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세 시간 넘게 설명해야 했다. 이후 가족들과 함께 프랑스로 돌아오지만, 의료진은 러시아의 수술이 잘못되었다며 ‘프랑스식’으로 다시 수술받아야 한다고 진단하고, 다시 또 수술이 시작된다. 육체적인 고통은 점점 심해졌고, 내면에서는 살아 숨 쉬는 곰의 존재를 끊임없이 느낀다. 


이 모든 길고 끔찍한 과정들을 서술하는 방식은 아이러니하게도 매우 시적이다. 곰과의 결투 이후 섬광의 순간, 숲의 자명함, 죽지 않도록 결심하게 만든 명백함, 시간 이전의 시간, 살아갈 세상에 대한 주제로 협상을 구축하는 시간...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사유가 아름다운 언어로 페이지마다 그려지고 있으니 말이다. 곰에 맞서 생존한다는 것은 이 세계에서 다가올 일에 맞서 생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조적인 변화의 재개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라고, 저자는 생각한다. 가을에 시작되었던 이 이야기는 겨울을 병원에서 보내고, 봄을 거쳐 여름으로 향한다. "나는 우리의 삶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끄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삶의 불확실성을 대하는 저자의 태도는 놀라울 정도로 담담하다. 그래서 저자가 피해자로 남는 대신 인류학자로서 다시 서기 위해 한 선택이 더욱 멋지게 느껴졌다. 인간과 짐승이라는 경계를 넘어서면 보이는 세상이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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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부자 유전자 - 부자의 삶은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내 인생에 지혜를 더하는 시간, 인생명강 시리즈 30
한민 지음 / 21세기북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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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요즘 한국은 사회 전반에 ‘부자 신드롬’이 깔려 있는 듯하다. 최근 몇 년간 한국 사람의 삶을 보면 부자가 되기 위한 노력이 굉장히 다양한 방면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테슬라나 엔비디아의 주식을 사서 돈을 벌었다거나, 위험을 감수한 덕분에 코인으로 벼락부자가 되었다거나, 갭투자 등으로 부동산에 투자해 돈을 벌었다는 사람들 이야기가 종종 들리고 부자가 되는 법, 자산을 늘리는 법을 알려준다는 유튜브 채널도 수없이 많다... 유튜브나 미디어, 소셜미디어를 보다 보면 한국에서 나 혼자만 부자가 아닌 것 같고, 나 혼자만 부자가 되지 못할 것 같고, 나 혼자만 뒤처질 것 같은 불안이 생긴다.              p.15~16



대한민국 대표 교수진이 펼치는 흥미로운 지식 체험, ‘인생명강’ 시리즈의 서른 번째 책이다. 이 시리즈는 역사, 철학, 과학, 의학, 예술 등 전국 대학 각 분야 최고 교수진의 명강의를 책으로 옮겨 다양한 분야의 지식 콘텐츠를 만날 수 있도록 했다. 이번에 나온 것은 문화심리학자 한민 교수가 한국인이 겪어온 가난의 역사를 토대로 한국 사회의 부자 열풍 현상의 기원을 문화, 사회, 경제, 심리학적 측면에서 심층 분석하면서 부자가 되지 못했을 때의 삶을 대안을 모색하는 책이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우리의 현대사부터 시작해 세계적인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지금도 여전히 '더 많은 부'를 원하는 이유, 그로 인한 경쟁과 그에 따른 스트레스, 불안과 우울, 사회적 갈등에 휩싸이게 된 현재를 되짚어 본다. 낮은 행복도와 높은 자살률, 세계 최저 수준의 출생률, 심화되는 사회 갈등과 늘어나는 혐오 범죄는 부자가 되기 힘들다는 한국인의 좌절이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끝없이 부를 좇는 것인지, 부자가 되지 못했을 때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하는 시점인 것이다. 저자는 더 이상 부의 축적이 성공한 삶과 행복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 아니라고, 학벌, 연봉, 명품, 아파트로 대표되는 부의 기준에서 벗어나더라도 나답게 살아가는 방법을 찾을 수 있는 ‘자기실현’의 추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나는 부자가 되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했지만 부자가 되지 못했다. 이런 결과라면 냉정하게 말해서 앞으로도 부자가 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용기를 꺾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막연하게 부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부자가 되기 위한 직업을 선택한 것도 아니고, 투자나 저축을 열심히 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부자가 될 수 있을까? ... 하지만 그전에 부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왜 부자가 되어야 하나? 충분한 돈이 있으면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기준은 어느 정도인가? ... 부자가 되는 것이 내 삶의 이유인가? 부자가 되지 못하면 내가 아닌가?               p.172~173


제목만 보자면 여타의 많은 책들처럼 '부자가 되는 기술'이라도 알려줄 것 같지만, 이 책은 대신 왜 우리가 끝없이 부를 좇는지, 부자가 되지 못했을 때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저자는 이 책이 '살아갈 이유에 대한 '책'이라고 단언한다. 우리는 왜 부자가 되고 싶을까. 부자가 된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리고 부자가 되지 못한다면 무엇을 붙들고 살아야 할까. 하지만 온갖 미디어와 소셜미디어에서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 방향을 잡기가 쉽지 않은 것또한 사실이다. 저자는 한국인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그 문화적 정서부터 차근차근 들여다본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정서와 삶에 어떤 기준이 있다는 생각이 우리의 현실을 불행하게 만든다. '남 부끄럽지 않은 삶, 또는 '남부럽지 않은 삶'이라는 것이 한국인의 삶의 기준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을 불행하게 만드는 마음 습관 중 하나가 상대적 박탈감이다. 재산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해지는 습관인 것이다. 그렇다면 돈이 전부라 믿는 사회에서 삶을 지켜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돈만 좇느라 정작 삶의 이유와 행복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부의 추월차선’에서 벗어나 진짜 성공과 행복을 찾는 방법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또한 부자가 되지 못했을 때도 충분히 가치 있는 삶의 가능성을 모색해봐야 한다. 저자는 무한 경쟁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행복을 찾는 방법을 안내한다. 학벌, 연봉, 명품, 아파트로 대표되는 부의 기준에서 벗어나더라도 나답게 살아가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온전한 나로 살아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내 삶의 이유는 자신에게서 비롯되어야 한다. 사회적 분위기나 타인과의 비교에서 비롯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경쟁과 불안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속도로 살아가는 법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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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넘 숲
엘리너 캐턴 지음, 권진아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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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가 그렇게 원예 농업에 빠진 한 가지 이유는 식물을 돌볼 때면 가차 없는 자기비판 습성에서 한숨 돌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식물을 키우면 명백히 용서받는 느낌이 들었다. 그건 삶의 다른 어떤 영역에서도 불가능한, 영속적으로 이행하며 새로워지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실패하고 실수해도 ─ 예컨대 양파 씨앗은 오래 보관할 수 없다거나, 흙 온도가 낮으면 당근색이 연해진다거나, 회향풀은 다른 식물의 성장을 막기 때문에 따로 번식시켜야 한다는 사실들을 배울 때 ─ 전혀 야단맞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텃밭에서는 진실이 올바름의 형태를 취하지 않았고, 옳음의 반대가 틀림도 아니었다.              p.76



미라는 버려진 땅에서 작물을 키우는 게릴라 가드닝 단체 〈버넘 숲〉의 설립자다. 게릴라 가드닝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땅에 쓰레기 대신 꽃과 식물을 심어 정원을 만든다는 긍정적인 측면과 토지 소유자의 허락을 받지 않고 몰래 하는 활동이기 때문에 불법이라는 부정적인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환경 운동가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이상을 품고 있는 미라는 5년간 활동해왔지만 조금씩 침체되어 가고 있는 버넘 숲의 미래를 위한 돌파구를 찾는 중이다. 그녀는 산사태로 고립된 마을 부지 답사에 나섰다가, 제조업체의 CEO이자 억만장자인 로버트 르모인과 우연히 맞닥뜨린다. 


땅의 원래 주인이 알면 안 되는 계획을 각자 품고 있던 미라와 르모인은 원예가와 기업가라는 상반된 직업에 추구하는 가치도 전혀 달랐다. 이론상으로는 철천지원수 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에게서 묘한 공통점, 자신만만하고 매력적인 야심가라는 점을 발견한다. 미나는 처음에 자신의 가짜 신분 중 하나를 골라서 말하며 그 자리를 회피하려고 했지만, 사실 르모인은 그녀의 이름이 미라라는 것과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간파해낸다. 이유는 그녀를 먼저 발견한 즉시 미라의 휴대 전화와의 강제 연결로 신원 정보에 접근해 그녀에 대해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르모인은 미라에게 '당신이 날 방해하지 않으면 나도 당신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미라와 그녀의 프로젝트를 이용해야겠다고 마 음 먹었기 때문이다. 르모인은 자신이 비밀리에 진행하던 프로젝트를 숨기기 위한 연막작전으로 버넘 숲에 재정 지원을 약속하는데, 그로 인해 갈등이 시작된다. 





「...뭐가 옳은지는 사실 아무도 모르잖아. 내 말은, 뭐가 옳은지 안다고 생각할 수 있고, 안다고 자신에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선택하는 시점에는, 그러니까 그 순간에는 절대 확신하지 못하잖아. 그냥 바랄 뿐이지. 그냥 일단 행동하고 최선의 결과가 나오길 바라는 거지. 지나고 보면, 그게 옳은 일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었을 수도 있지. 아닐 경우에는, 적어도 노력은 했다고 말할 수밖에. 하지만 잘못된 일은 말이야, 종종 훨씬 분명해. 잘못된 일은 많은 경우 옳은 일보다 더 잘 보여. 더 명확해. 이건 내가 안 넘을 걸 아는 선, 이건 내가 절대 하지 않을 일, 이런 식으로.」              p.332~333



공식적으로 버넘 숲은 시내의 열여덟 군데에서 경작하고 있었다. 요양원과 어린이집 정원, 병원 주차장 근처, 학생 임대 아파트 마당 등에 자리하고 있었다. 땅과 수돗물을 사용하는 대가로 땅 주인들에게 모든 수확물의 반을 주고, 나머지 반은 회원들끼리 소비하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기도 했다. 누구도 임금을 받지 않았고, 모든 자산은 공동 소유였으며, 활동은 거의 모두 비상근으로 이뤄졌다. 미라의 친구이자 현실적인 조력자인 셸리는 활동 계획을 좀 더 안정적으로 세우기 위해 농산물 구독 서비스를 시작해보자고 의견을 냈지만 결국 실현되지는 못했다. 셸리에 비해 미라가 버넘 숲에 품은 야심은 급직적이고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사회 변화였다. 버넘 숲에는 현명적 목표를 품은 이론 공상적 사회 개량주의자들, 두 개의 파가 존재했다. 미라는 르모인의 제안을 손에 쥐고 버넘 숲의 일원들을 설득하려 한다. 어떤 조건도 없이, 그냥 기부 같은 걸로 자금을 대주겠다고 했다며, 그걸로 우리가 제대로 된 비영리 기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버넘 숲의 일원들은 각자 생각이 달랐다. 


이 작품은 <루미너리스>로  맨부커상 최연소 수상을 했던 엘리너 캐턴이 10년만에 발표한 신작이다. 자본주의 구조 밖에서 활동하던 원예가가 엄청난 자본과 함께 나타난 기업가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 이야기는 단순한 선과 악의 구도를 넘어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문제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절대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믿었던 맥베스의 '버넘 숲'이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 떠올려보면, 이 작품의 제목이 의미하는 바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 이들은 과세 신고도 하지 않고 단속도 받지 않으며 때로는 범죄자, 때로는 박애주의 친구 모임 같은 집단에 불과했다. 하지만 억만장자 르모인이 나타나면서 사태가 달라지고, 충격적인 사고와 어두운 비밀이 드러나면서 산사태처럼 휘몰아치는 전개가 이어진다. 우리 시대의 핵심 문제에 대한 깊은 통찰뿐만 아니라 이야기 자체로서도 매우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압도적인 몰입감의 페이지 터너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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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늙기를 기다려왔다
안드레아 칼라일 지음, 양소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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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은 잘 무장해야 진입할 수 있는 낯선 세계가 아니라 친숙하던 자신의 세계가 확장되는 시기이다. 노화는 개인적인 것이어서 각자 자신이 잃고 있는 것과 이미 잃은 것, 즉 여기서 무언가를 빼고 저기서 무언가를 더하는 구체적인 리스트를 만들 수 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허영심을 동원하고 심지어 산업적 동반자와 함께한다고 해도 노화에서 벗어날 순 없다. 인생 내내 우리에게 닥쳐온 신체적 변화를 멈출 수 없었던 것처럼.             p.144


누구나 나이를 먹는다. '늙음'은 아무도 피해갈 수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나이 드는 것을 두려워할까? 나이가 든다는 것은 기억력이 감퇴하고, 인지 능력이 저하되며, 외모도 달라지고, 다양한 생리적 변화도 일어나는 일이다. 그리고 한때 가졌지만 다신 가질 수 없는 능력과 더 이상 곁에 없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리워하게 된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우리의 내면은 지극히 풍요로워진다. 살아온 시간만큼의 통찰과 혜안을 누구나 갖게 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젊을 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감정의 깊이와 성숙한 시각을 얻을 수 있다. 나이 드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노년은 우리의 삶이 가장 깊어지는 순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곧 여든 살을 앞둔 노년 작가 안드레아 칼라일은 100세까지 살다 떠난 어머니를 7년 동안 간병하며, 나이 듦에 관한 고정관념에 질문을 품게 된다. 왜 우리는 나이 드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할까? 강가의 하우스보트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저자는 산책을 하며 삶을 돌아보고, 자연 안에서 많은 것을 느낀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노년>, 진 리스의 <나의 날들> 등 작가들이 나이 듦에 대해 사유한 책들을 읽으면서도 많은 것을 생각한다.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책을 읽어 오면서 주인공에게서 공감할 수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로 인해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었는데, 나이가 들고 보니 나이 든 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 자체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문화 속에서 중심인물로서의 노인이 거의 부재한 건 이미 느끼고 있는 존재감 상실에 더해 우리를 더욱 보이지 않게 한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그렇게 저자는 '우리 이야기는 어디에 있는가' 라고 묻는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부터 온라인에서 삶의 이 시기를 다룬 좋은 소설을 검색하곤 했다고 한다. 그렇게 모은 노년을 주제로 다룬 소설들에 대한 리스트도 매우 흥미로웠다.   





어떻게 하면 오늘날의 중장년층인 우리가 나이 듦에 대한 기존의 편견 어린 인식을 새롭게 하고 절실히 필요한 걸 더할 수 있을까?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서 시작되겠지만 사회가 외면하라고 지시하고 결국 많은 사람이 우릴 외면하는 상황에서 이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만약 우리가 진정한 인간으로서, 온전한 존재로서 대우받기 위해서 보이고 인식되어야 한다면, 그리고 버려지고 잊힐 집단으로 취급되지 않으려면, 나는 더 많은 사람이 '어떻게'라는 질문 속으로 발을 들여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p.186~187


우리가 어릴 때부터 접한 동화 속에서 나이 든 여자, 그러니까 '노파'는 보통 가난했고 외모는 지저분한 수준부터 눈 뜨고 보지 못할 정도로 흉측한 수준까지 다양했다. 과자집에 살면서 헨젤과 그레텔을 오븐에 밀어 넣으려는 노파, 다리 한 쌍을 주는 대가로 인어 공주의 목소리를 받아내는 바다 마녀, 의붓딸에게 독이 든 사과를 건네는 사악한 여왕, 공주가 물레에 찔려 깊은 잠에 빠지도록 주문을 거는 사악한 요정, 라푼젤을 탑에 가두는 사악한 마법사 등 동화 속 노파들에게서 혐오감 외에 다른 감정을 느끼기란 어려웠다. 많은 동화들이 은연중에, 혹은 노골적으로 공포와 두려움을 이용해 어린이에게 교훈을 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외롭고, 심술궂으며, 악의적인 존재로 그려지는 나이든 여자의 이미지는 우리의 무의식에 영향을 미쳐 노화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이 책은 노인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이 자리 잡은 역사적, 사회문화적 배경을 설명하며, 이를 걷어내고 있는 그대로의 시선으로 나이 듦을 바라보기를 제안한다. 나이 드는 일이 편안하지만은 않겠지만, 다행한 건 우리가 평생 살아오며 품어온 몸과 자아 그대로를 지닌 채 나이가 든다는 것이다. 이를 받아들이고 나면 새로운 즐거움과 변화가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나이 든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탐험하는 이 책을 통해 누구나 머지않아 당도할 노년의 세계를 준비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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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요괴 병원 1 - 요괴도 감기에 걸려요! 여기는 요괴 병원 1
도미야스 요코 지음, 고마쓰 요시카 그림, 송지현 옮김 / 다산어린이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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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5학년인 미네기시 준은 절 뒤에 있는 연못으로 붕어를 잡으러 간다. 하지만 뜰채로 건져 올린 건 조개껍데기로 만든 작은 단추뿐이었다. 단추가 아주 예뻤기 때문에 버리지 않고 주머니에 잘 넣어 두었는데, 그때만 해도 그 단추 때문에 이상한 세계로 끌려 들어가게 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붕어는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채 배가 고파서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 준은 익숙한 길에서 낯선 골목길을 발견한다. 좁디좁은 샛길은 집으로 가는 지름길처럼 보였고, 배가 고파 집에 빨리 가고 싶었던 터라 골목길에 발을 들인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걸어도 걸어도 골목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다 발견한 것은 빛바랜 크림색 건물, 간판에는 <내과, 요괴과 전문 병원>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곳은 요괴들을 위한 병원이었다. 어떻게 보아도 수상한 마술사나 사기꾼처럼 보이는 의사인 호즈키 선생님이 골목길에서 봤던 남자를 상대하고 있었다. 남자는 인간 마을에 놀러 가 볼까 하고 변신했다가, 원래 모습대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말하는 중이었다. 그러다 변신했을 때의 모습에서 뭔가를 잃어버리면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는 의사의 말에, 단추를 분실한 걸 알아차리게 된다. 마침 그 단추는 준이 연못에서 주웠던 그 조개껍데기 단추였다. 


그들의 대화를 듣던 준은 자신도 모르게 나서서 단추를 내밀고, 덕분에 호즈키 선생님과 처음으로 대면하게 된다.




마침 응급환자가 있다는 연락이 오고, 호즈키 선생은 준에게 자신이 자리를 비우는 동안 예약 환자가 있기 때문에 잠깐 병원을 지켜달라고 말한다. 그렇게 준은 요괴가 모습을 볼 수 없도록 하는 부적을 등에 붙인 채 홀로 병원을 지키게 되는데, 그야말로 요괴들이 끊임없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몸에 달린 눈 100개가 부산스럽게 여기저기를 두리번 거리는 커다란 점토같은 요괴를 시작으로 등딱지에 생긴 곰팡이를 없애고 싶다는 할아버지 요괴, 잠을 잘못 자는 바람에 목을 집어넣을 수 없게 됐다는 긴목요괴, 쉴 새 없이 재채기를 하는 눈이 하나밖에 없는 커다란 스님.... 그리고 예약한 환자인 달걀귀신까지 등장하는데... 과연 인간 아이인 준은 호즈키 선생님이 돌아올 때까지 무사히 병원을 지킬 수 있을까.




일본 판타지의 거장 도미야스 요코가 <수상한 이웃집 시노다> 시리즈에 이어 두 번째로 국내에 소개하는 작품이다. <여기는 요괴 병원> 시리즈는 벌써 4권까지 출간되었고, 이번에 만나본 것은 그 시리즈의 첫 번째 이야기이다. 평범한 초등학생이 요괴들이 사는 세계에 우연히 가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 이야기는 세상에 딱 하나밖에 없는 '요괴 전문 병원'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요괴를 치료하는 '인간' 의사인 호즈키 선생님을 비롯해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희귀하지만 어쩐지 무섭게만 느껴지지는 않는 여러 요괴들이 등장해 재미를 더해준다. 


요괴도 인간처럼 감기에 걸리고, 어딘가 아파서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는 설정도 신선하지만, 겉모습과는 달리 인간과 비슷한 면모를 보여주면서 느껴지는 친근함이 이 시리즈만의 매력이다. 담대한 성격과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대하는 의사 선생님과 호기심 가득하고 강단 있는 초등학생 조수라는 독특한 조합이 만들어 내는 유쾌한 활약도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자, 앞으로 요괴병원에서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기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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