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비경 - 신의 커피를 맛볼 수 있는 전국 22개 로스팅 하우스
양선희 지음, 원종경 사진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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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에 있는 ''이라는 카페에 가면 이렇게 선반에 잘 볶인 갈색의 원두가 들어 있는 유리병이 놓여 있다. 그런데 이 병들을 자세히 보면 숫자가 적혀 있다.. 4.3, 4.6, 3.29, 4.6, 3.28, 4.3.. 이 숫자들은 뭘까?

 

"손님들이 여기 와서 '맛있는 커피 주세요!' 했을 때 최소한 볶은 지 일주일 이상 지난 것을 주기 위해 적어 둔 로스팅 날짜예요. 로스팅 한 지 20일까지도 맛은 나와요. 물론 약하게 볶은 건 하루 이틀 더 가지만요. 그런데 18~19일 지나면 향기가 미세하게 떨어지더라고요. 그래서 볶은지 15일 이상 지난 건 뺍니다."

"그럼 그건 방향제로 쓰나요?"

"운 좋은 손님들이 향기를 얻어가지요."

 

와우. 나는 이 대사를 읽는 순간 강원도의 그곳에 직접 가보고 싶어졌다. 갓 로스팅 된 원두로 내린 커피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유의 향기가 있다. 그런데 눈만 돌려도 숱하게 마주치는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의 원두들은 모두 로스팅한 지 한참은 된 게 분명한 향과 맛을 내니까. 하지만 도심지에서 어디 그리 쉽게 이런 집을 만날 수 있냐는 말이다. 서울을 벗어나 전국 곳곳에 숨어 있는 커피 명소를 발굴한 이 책에는 정말 '명품'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커피 하우스 스물 두 곳이 소개되어 있다. 저자인 양선희 작가가 온라인 매거진커피 타임즈를 운영하며 2년여의 기간 동안 100여 곳이 넘는 커피 하우스를 발로 뛰며 직접 취재해 그 중에 스물 두 곳을 골랐다고 하니 뭐 더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부산에 있는 '까사오로의 주인인 정승기 씨는 마인드가 독특하다. 커피는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음료이기 때문에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일도 행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 향기로운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것이 '까사오로'의 커피라고 하니, 꼭 한번은 마셔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마음이 있는 커피랑 마음이 없는 커피랑 완전히 달라요. 그래서 저는 기분이 우울할 때나 몸이 아플 때는 드립을 안 해요. 제 몸과 마음 상태가 안 좋으면 은수가 드립을 하고, 은수 몸이나 마음 상태가 안 좋으면 제가 드립을 해요."

 

세상에,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주인이 내려주는 커피라니. 얼마나 황홀하고 깊은 향과 맛을 낼지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이다. 사실 커피의 맛을 결정하는 것은 원두, 로스팅 등 커피 그 자체의 맛이 전부는 아니다. <모든 것이 동일한 조건일 때 그 집의 커피 맛을 결정짓는 건 그 커피 집 주인의 품성이라고 봐. 특히 그 집에서 커피를 볶고, 핸드 드립을 하는 경우에는 그 점이 커피 맛의 99% 결정한다고 봐. 나머지 1%는 그 집의 분위기겠지>라는 대목처럼 커피를 내리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좋은 마음과 긍정적인 감정 상태가 과연 커피의 맛까지 다르게 할까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커피의 맛을 음미하면서 마셔본 사람이라면 무슨 말인지 어느 정도는 공감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어릴 적에 커피라는 음료를 마시면 안 되는 그 나이에, 엄마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이렇게 쓴 걸 왜 먹냐고. 엄마가 그때 농담처럼 말했었다. 너도 어른이 되면 알게 될 거라고. 인생의 여러 면을 겪어본 다음에 어른이 되어야만 그 맛을 알 수 있는 음식이 있는 거라고. 어릴 때는 하면 안 된다.는 금기에 대해 다소의 반항 심같은 것도 있었으므로, 그냥 둘러대는 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면 갈수록, 커피가 점점 더 맛있게 느껴지면 질수록, 어쩐지 어린 시절 엄마의 그 말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 내가 인생의 쓴맛, 단맛을 어느 정도는 겪었기 때문에, 이렇게 쓴 커피가 달게 느껴지는 걸 수도 있겠다. 뭐 이런 생각 말이다. 지금도 친구들 중에는 아메리카노는 써서 못 먹겠다고, 그 쓴 걸 무슨 맛으로 먹냐며 카페라떼나 마끼아또 등 단 커피만 먹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중요한 건 아메리카노에 쓴 맛만 있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 속에는 깊은 풍미와 향과 그윽한 맛이 숨어져 있다.

 

나는 하루에 아메리카노 두세 잔은 꼭 마셔야 하는 소위 커피 중독자이다. 커피 드리퍼도 종류 별로 서너 가지 가지고 있고, 집에 에스프레소 머신도 있을 만큼 커피를 즐겨 마시는데, 덕분에 하루라도 마시지 않으면 두통이 생길 정도이다. 워낙 오랜 시간, 다양한 원두를, 다양한 방법으로 마셔보았기 때문에 어떤 집의 커피가 신맛이 강하고, 향이 좋고, 끝 맛이 텁텁하고, 단맛이 나는지 안다. 하지만 집과 회사를 오가는, 그러니까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도심지에는 이런 커피 맛 집이 사실 없다. 눈에 보이는 거라곤 프랜차이즈 전문점 밖에 없어서, 이렇게 책으로나마 멋진 커피 전문점들을 소개받게 되어서 참 행복했다. 아마도 이번 여름 휴가 때는 이 책에 소개된 집 중에 한 곳을 가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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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4-03-05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는 곳은 부암동 고개에 에소프레소 라는 집이거든요.. 그 집 커피도 2층에서 직접 볶아서 신선하더라구요.. 아시고 계실 것 같긴 한데, 혹 또 몰라서.. ~~

저도 커피 중독이라서요. 하루에 아메리카노 7잔.. ~~ 중독이죠.. ㅠㅠ

피오나 2014-03-07 17:16   좋아요 0 | URL
오 그렇군요. 부암동 고개에 가봐야겠습니다. ㅎㅎ 동선이 정해져있다보니.. 강남권을 벗어날 일이 별로 없어서요. 커피를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사실 맛집에 자주 가보진 못했어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

근데 새벽숲길님은 저보다 훨씬 마니아시네요. 하루에 7잔이면...... ^^;;;;;;;
 
겨울 일기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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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하는 일을 하기 위하여 걸을 필요가 있다. 걷다 보면 단어들이 떠오르고, 머릿속에서 그것들을 쓰면서 단어들의 리듬을 들을 수 있다. 한 발 앞으로, 다른 발을 앞으로 내밀면서 심장이 이중으로 두근두근 뛴다. 두 개의 눈, 두 개의 귀, 두 개의 팔, 두 개의 발. 이것 다음에 저것. 저것 다음에 또 이것. 글쓰기는 육체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몸의 음악이다. 단어들이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때로는 글쓰기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단어들의 음악은 의미가 시작하는 곳이다.

 

이 작품은 예순네 살의 작가 폴 오스터가 그 동안 살아온 삶에 대한 자서전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올해로 벌써 그도 예순일곱이니 노 작가라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은 것 같지만, 그는 여전히 이렇게 치열하게 글을 쓰고 있다. 그의 거의 모든 작품들을 다 읽었지만, 매번 한번도 같은 스타일을 복기 하지 않는, 그렇지만 독특한 자신만의 색깔을 가지고 있는 작가라서 매번 신작을 읽을 때마다 나는 가벼운 흥분을 느낀다. 특히나 이 작품은 매우 독특한 형식을 띠고 있어, 자서전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일기 같은 느낌마저 든다. 그는 과거를 돌아보면서 자신의 삶에서 의미가 있었던 사건들을 감각적 경험의 기억을 통해 복기해낸다. 그러니까 호흡의 현상학으로 들여다본 폴 오스터의 인생이야기인 셈이다. 머리는 잊어도 몸은 기억한다.는 명제에는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만큼 육체가 기억하는 흔적은 오래 남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다이앤 애커먼의 <감각의 박물학>에 보면 세상이 얼마나 황홀하게 감각적인지, 그리고 감각이라는 레이더망을 통하지 않고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없는지 알게 된다.  우리의 오감, 후각, 촉각, 미각, 청각, 시각 등에 대한 여러 가지 기술이 되어 있는 이 책이 문득 떠올랐다. 냄새, 소리 등의 감각은 우리를 순식간에 과거의 시간으로 데려다 놓는다. 전 애인의 향수 냄새가 그를 떠올리게 하고, 귀에 익은 노래가 나를 그 시간 속으로 옮겨 놓는다. 그렇게 우리의 몸과 감각은 머리 속의 기억들을 헤집어 놓는다. 그렇게 육체에 새겨진 경험은 오랫동안 우리의 기억을 지배한다. 어떤 향기가 순간적으로 스쳐갈 때, 그것은 우리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도 할 수 있고, 달콤한 요리를 먹던 저녁 식사시간으로 데려다 놓기도 한다. 셜록 홈즈의 <바스커빌 가의 개>에서는 한 여성을 편지지의 냄새로 알아보는 장면이 나오며, 수사관이라면 일흔 아흡 가지 향수의 냄새 정도는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대목이 있다. 나는 특히 새 책의 종이 냄새나, 석유 내가 아직 가시지 않은 인쇄물의 냄새, 오래된 종이의 낡은 냄새를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도서관에서, 서점에서 책에 얽힌 갖가지 추억들을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폴 오스터는 그 감각 중에서 성적 쾌감과 고통의 기억을 샅샅이 복기한다. 본능에 충실한 그의 경험은 적나라하게 독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가 육체와 감각을 통해 써 내려간 자신의 과거는 기나긴 성적 탐험의 역사를 거쳐 가족사의 어둡고 아픈 부분까지 모두 담고 있다. 굳이 이런 거까지 밝힐 필요가 있나 싶은 부분까지 모두. 어쩌면 스스로를 2인칭으로 묘사하는 관찰자 시점으로 쓰인 작품이라 그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의 겨울로 들어선 노 작가가 떠올리는 그 삶의 편린들은, 어떤 순간에는 고통스럽고, 어떤 순간에는 민망하고, 어떤 순간에는 따뜻하다.

 

당신은 <옛날이 좋았지>라는 말을 싫어한다. 문득 향수에 젖어 지금보다 삶을 더 낫게 만들어 준 것만 같은 무언가가 사라졌다는 데 슬퍼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면 스스로에게 당장 그만두고 잘 생각해 보라고, 지금을 볼 때와 같이 그때를 정밀하게 들여다보라고 말한다. 오래지 않아 당신은 그때와 지금 사이에는 거의 차이가 없으며 본질적으로는 같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럼에도,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해도 그가 지나간 세월에서 그리워하는 것이 있긴 하다. 옛날 전화기의 벨 소리, 타자기의 딸깍 거리는 소리, 병에 든 우유, 지명 타자가 없는 야구, 비닐 레코드 판, 방수용 덧신, 스타킹과 가터벨트, 흑백 영화, 헤비급 챔피언, 브루클린 다저스와 뉴욕 자이언츠, 35센트짜리 페이퍼백.... 나는 그의 그리움 속에서, 그의 지나온 시간을 읽어낸다. 그리하여 침대에서 나와 차가운 마룻바닥에 맨발을 내딛고 창문 쪽으로 걸어가는 여섯 살의 그로 시작해서, 다시 침대에서 나와 창가로 걸어가면서 차가운 마룻바닥에 닿는 맨발의 그는 이제 예순네 살이다. 여섯 살 그의 시선으로 바깥에서 내리던 눈이 뒷마당의 나뭇가지들을 하얗게 바꿔졌다면, 이제 바깥은 거의 흰색에 가깝지만 완연한 회색이다. 해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그는 자문한다. 몇 번의 아침이 남았을까? 그의 인생은 이제 겨울로 들어섰다. 계절이 지나갔으므로, 어떤 문은 이제 완전히 닫혀버렸다. 그러나 또 다른 문이 열릴 것이다. <당신은 그런 일이 당신에게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일어날 리 없다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도 당신에게만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일이 우리 모두에게도 일어나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다른 이들에게 일어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누구도 시간의 무게를 피해갈 수는 없다. 아무리 위대한 작가라도,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도, 누구에게나 시간은 공평하게 통과한다.

 

폴 오스터는 <당신이 살아 있음을 기억할 수 있는 첫날부터 오늘까지 이 몸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기분이었는지> 살펴본다. 그리고 그 감각적 자료들의 모음을 '호흡의 현상학'이라고 지칭한다. 숨을 쉬는 육체의 감각에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영향을 미친 사건들을 나열하는 것, 그리고 그 교차점에서 자신을 규명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바로 폴 오스터만이 써 내려갈 수 있는 그 만의 자서전이 아닐까 싶다. 누구나 늙어간다. 사람이 평생을 젊은 육체를 유지하면서 살 수는 없으니 말이다. 몸이 결국 말을 듣지 않게 되고, 고통은 결국 견딜 수 없어지고, 총명함은 차가운 세찬 물줄기 속에 사라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 몸에 새겨진 모든 감각의 기억들은, 오롯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그의 겨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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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03 1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04 16: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팽 선생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남진희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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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길을 가다 불량배를 만났다. 친절하게도 불량배는 선택의 기회를 준다. 돈 줄래, 죽을래? ‘좋은 것나쁜 것사이에서가 아니라나쁜 것더 나쁜 것사이에서 주어진 선택의 기회. 경험적으로 볼 때, 우리가 마주하는 수많은 선택의 기회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당연하게 우리는 더 나쁜 것을 피해 덜 나쁜 것을 선택해야 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삶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니까. 어떤 건 쉽고 어떤 건 조금 어렵다는 차이일 뿐, 대부분 중요하지 않은 선택들이다. 삶의 모퉁이를 돌아설 때마다 이런 작은 일들이 우리의 결정을 기다리며 앞을 가로막고, 우리는 재빨리 선택하고는 다시 일상을 이어간다. 그런데 C를 선택하고 싶은데 선택지는 오로지 A B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회피하겠는가, 아니면 끝까지 가보겠는가?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하든 결과가 좋지 않을 거라는 점은 거의 확실하다.

 

「우리는 선생님께서 바예호 씨를 치료할 생각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둘 중 더 깡마른 사내가 조금은 슬픈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포도주 잔을 사이에 두고 그를 꼼꼼히 뜯어보았다. 붉은 뱀장어 같은 혀를 천천히 움직여 이를 훑더니, 가식적으로 와인을 홀짝이는 척하고 있었다.

「어제 저녁 나를 쫓아왔던 것이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까?

 

팽 선생이 처한 상황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어느 날 레노 부인에게서 자신의 친구 남편을 좀 만나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다. 그는 바예호라는 시인으로 멈추지 않는 딸국질로 인해 죽어가고 있는데, 의사들도 그를 위해 손을 쓸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당신이 내 친구 남편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레노 부인의 말 때문에 그는 그러겠다고 대답한다. 최근에 남편이 죽은 그녀에게 그가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며칠 뒤 시인을 만나러 가지만, 어쩐 일인지 의사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를 위협하는 느낌마저 든다. 바예호를 만나고 오고 나자, 낯선 스페인 남자 두 명이 그를 쫓기 시작한다. 그들은 팽 선생에게 2천 프랑이라는 거금을 주면서 치료를 그만두라고 협박(?)을 한다. 그는 얼결에 뇌물을 받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그의 마음은 벽에 부딪히고, 무슨 이유에선지 치료를 막으려는 이들은 일종의 악이다. 최면요법가인 팽 선생은 점점 더 바예호의 치료에 집착하게 되고, 그럴수록 자꾸만 악몽을 꾸게 된다. 그리고 점차 꿈과 현실을 구분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환상이 현실보다 더 현실적일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보이는 볼라뇨 식 미스터리는 우리를 점점 더 극 속으로 이끌고 들어간다.

 

이 몽환적인 작품이 더욱 재미있는 것은 극 중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거의 실존했던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바예호는 물론이고 그의 부인 조르제트 바예호, 팽 선생이 가르침을 받은 최면학자 메스머, 심령의 존재를 과학으로 입증하고자 했던 바라뒤크, 그리고 아라공, 다르송발, 이렌느 졸리오퀴리 등 실존 인물과 실제 있었던 사실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시인 바예호는 실제로 파리에서 알 수 없는 폐 질환으로 초라하게 죽었으며 스페인의 전체주의에 대항했던 행동파 시인이었다. 악에 맞서 보려고 했으나 힘없이 죽어가는 시인 바예호와 그런 그의 딸꾹질을 치료하려고 했지만 결국 병의 원인도, 자신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들의 이유도 알 수 없었던 팽 선생은 모습과 그를 괴롭히는 정체 모를 스페인 남자 두 명의 대립은 극의 끝까지 불안감과 긴장감을 유발시킨다. 바예호가 그 병원에서 죽을 운명이었으며,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시인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전체 작품의 스토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이들이 실존 인물이라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실제와 허구가 뒤섞여 만들어내는 이 미스터리 한 퍼즐은 혼란스럽지만, 매우 매혹적이다. 2차 세계 대전 직전의, 암울하고도 뒤숭숭한 파리를 배경으로 악으로 뒤덮인 세계 속에서 무기력한 인물들의 초상을 그려내는 것이 전체주의에 대한 문학적 저항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것보다 이 작품의 분위기가 만들어내는 미로 자체가 흥미로웠다.

 

나는 손가락으로 창틀을 따라 더듬어 봤다. 그러나 쓸데없는 짓이었다. 창문엔 잠금 장치도 없었고, 그렇다고 위나 아래로 여는 것도 아니었다. 열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남자는 계속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손으로 유리창을 두드렸다. 분명 내가 내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스위치를 찾았다. 알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빛으로 나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신호를 보내고 싶었다. 분명한 나의 〈존재〉와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보잘것없긴 했지만 확실한 관객으로서 말이다.

 

이 작품의 첫 페이지에는 에드거 앨런 포의 <최면의 계시>에서 한 대목이 소개되어 있다. 포의 단편에서는 최면술사가 최면에 걸린 환자와 나누는 대화를 서술하기 때문에, 이 한 대목은 <팽 선생>의 전체 줄거리를 암시적으로 제시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볼라뇨라는 최면술사가 독자인 우리에게 건네는 일종의 최면술 같은 작품이다. 그의 세계에 입문한다면, 우리는 최면을 통해서 꿈과 현실이 뒤섞여 구분하기 어려워지는 바로 그 지점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볼라뇨의 작품을 처음 만난 것은 <야만스러운 탐정들>부터 였다. 꽤 두툼한 분량의 두 권짜리 그 책을 집어 든 이유는 사실 제목 때문이었는데, 추리, 스릴러 물을 온갖 종류별로 다 읽어대던 나에게 뭔가 독특하고 새로운 게 필요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은 내가 애초에 예상했던 바대로 흘러가는 작품이 전.혀 아니었지만, 어쩐 일인지 나는 그 뒤로 볼라뇨의 작품들을 하나씩 찾아서 읽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나는 이 독특하고, 미스터리하고, 몽환적이고도, 철학적인 이 작가에게 매혹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모든 작품들이 분량과 상관없이 읽는데 시간이 꽤 소요되긴 했다. 아무래도 기존의 기승전결이 분명한 작법에 너무도 익숙해서 였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볼라뇨의 작품들은 나를 궁금하게 만든다. 얼마 전에 벼르고 벼르던 그의 유작 장편소설 <2666 세트>를 구입했는데, 시간이 없어 아직 읽기 시작하지는 못했지만 책장에 넣어두기만 해도 설레 일 정도니 말이다. 문학이 사라진 시대의 풍경을 이야기했던 <야만스러운 탐정들>에서 볼라뇨는 이런 말을 했었다. "지루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그런 문학은 넘쳐난다. 평온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내 생각에는 그것이 최고의 문학이다. 슬플 때를 위한 문학도 있다. 기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지식에 갈증을 느낄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절망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라고. 어쩌면 볼라뇨의 문학은 제일 마지막에 해당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홀린 듯이 빠져들게 되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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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01 1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02 2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13기 활동 마감 페이퍼를 작성해 주세요.

어느새 6개월이 훌쩍 지나, 벌써 13기 신간평가단 활동이 모두 완료가 되었다.

알라딘 신간평가단만의 특별한 매력은 바로 매월 초 추천도서를 작성하기 위해 신간들을 열심히 뒤질때가 아닌가 싶다. 새로 출간되는 신작들의 정보를 파악하기에도 참 좋고, 몰랐던 소식을 듣게 되는 소소한 기쁨도 있었다.

신간평가단 활동을 하면서, 내가 추천했던 도서가 선정되었던 적도 있고,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도서를 받게 된 경우도 있었는데, 알라디너들의 관심사가 이렇구나. 라는 걸 알게되는 점도 상당히 재미있었다. 그래서 실제 선정되지 않은 도서를, 추천도서 목록에서 골라서 구매를 하는 경우도 종종 생겼으니 말이다.

 

, 그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13기를 정리해보자.

 

 

 



 

 

 

 

 

파과 - 모든 과일이 파과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소재에서 이렇게나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지다니, 멋지다.

결괴 - 오직 히라노 게이치로만이 들려줄 수 있는 행복의 파시즘에 관한 장광설이야말로,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

 

10만분의 1의 우연 - 반드시 일어나는 우연은 결국 필연이다. 가슴 한 켠이 묵직해지는 잔상이 남는 작품!

천국보다 낯선 - 짐 자무시의 흑백 화면 만큼이나 매혹적인 여정, 이장욱의 그림 같은 묘사는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블랙스완그린 - 영화 <빌리엘리어트>의 감동을 문학으로 만나는 기분, 풋풋하고, 설레고, 가슴아픈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이야기의 매혹!

 

누군가 당신에게 지금 당신은 행복하냐고 물었을 때, 망설임 없이 행복하다고 대답할만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세상에 대한 불만도 없고, 현재의 상황에 만족하는 사람은 아마도 많지 않을 것이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이번 작품 <결괴>에서 '악마'라고 스스로를 칭하는 희대의 살인마는 가장 불행해 보이는 인간을 골라 그에게 질문을 던진다. "너는 '행복'한가, 아닌가?" 라고. '행복'하지 않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고. 가짜 행복을 갈구하지 말고, 억지로 행복 하려고 애쓰지 말고, 스스로 불행하다는 걸 시인만 한다면 '행복'의 제국에서 열등 민으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거였다.

전반적으로 이야기는 천천히 진행되는데, 가독 성이 좋아 굉장히 빨리 읽힌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현대 사회에서 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노골적으로 독자에게 던진다. 악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그 가장 밑바닥까지 깊이 들어가는 작가의 방식은 인간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잔인한 악마 성을 마주하게 만들어 독자들을 꼼짝 못하게 한다. 살인 사건이 벌어진 뒤로 이어지는 페이지마다 인물들의 장광설이 다소 현학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만큼 곳곳에 포진하고 있지만, 사실 진정한 이 작품의 재미는 바로 그런 부분에 있다. <악의 반대가 선이 아니고, 악의 반대는 행복이다>라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그가 독자들에게 던지는 깊이 있는 질문은 매우 흥미롭다. “행복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현대사회의 시스템자체에 대해 말하고자 했던 의도가 작품에 얼마나 드러났느냐 보다는 이야기라는 매개체로서의 재미에 집중해도 좋을 것 같다. 그의 어떤 작품보다 술술 빨리 읽히지만, 분량은 매우 많고,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그걸 따라가는 형식이지만 주제는 매우 철학적이라 독자로서는 그저 재미있을 따름이다. 매번 그의 작품을 기다리는 이유이기도 하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신간 취합과 선정에 고생하셨을 알라딘 담당자님과 파트장님~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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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자격 - 내가 제대로 키우고 있는 건가
최효찬.이미미 지음 / 와이즈베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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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로 쓰인 이수동 화백의 행복나무이다. 궁극적으로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목적이 바로 행복 아닌가. 사실 공부를 잘 하는 것과 행복하게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의 학부모들이 행복하려면 공부를 잘 해야만 한다고 믿고 있다는 게 함정이지만 말이다. 자식과 부모가 모두 행복할 수 있는 교육이란 무엇일까. 모든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가 인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행복한 사람으로 자라나기를 소망한다. 그런데 왜 점점 부모(父母)가 학부모(學父母)가 되어 가는 걸까. 멀리 보고, 꿈을 꾸라고 하지 않고 앞만 보라 하며, 꿈을 꿀 시간을 주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당신은 부모인가? 학부모인가? 한번쯤 고민해볼 문제이다.

 

교육 업체에서 몇 년간 일을 하다 보니, 대부분의 부모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자식을 믿지 못해 무턱대고 의심부터 하거나, 반대로 자식을 맹목적으로 감싸는 경우이다. 전자는 자식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못하는 부모라서 문제이고, 후자는 자식이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에도 무턱대고 덮어두려고만 해서 문제이다. 요즘 하도 비행 청소년, 가출 청소년 문제가 많다 보니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우스갯 소리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런 청소년들의 집안 사정을 조사해보면 항상 원인은 부모로부터 시작된 경우가 많다. 무조건 낙태를 금지하고, 출산만 권장할 게 아니라, 부모도 그럴만한 인성과 자격이 있는 지를 평가하고 나서 부모의 자격을 줘야 하는 게 아니냐고. 농담처럼 하는 말들이었지만, 어딘지 씁쓸했다. 세상이 점점 부모라는 존재를 이렇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현대 소비사회의 가장 큰 불행은 서로 비교하게 만드는 '차이의 욕구'에 있다고 프랑스의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말한 바 있다. 현대인들은 미디어 등의 영향에 따라 '비교당하기'에 노출되어 있다. '비교하기'는 끝없이 경쟁하는 사회가 안고 있는 숙명과도 같은 덫이다. 따라서 학교와 학부모, 학생 등 우리 모두가 행복한 교육은 바로 '서로 비교하지 않기'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옆집 아이는 몇 등 했던데, 너는 왜 성적이 이 모양이니>, < 저기 저 아이는 저렇게 얌전한데, 너는 왜 그리 정신이 없니> 어른들이 별 생각 없이 내뱉는 말이다. <누구네 아빠는 생일날 이런거 사주던데, 왜 우리 아빠는 겨우 이거 사줘?>, <재네 엄마는 이렇게 해줬다던데, 우리는 안 해?> 아이들도 자연스레 친구와 자신의 처지를 비교한다. 비단 가족의 문제만은 아니다. 연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다툼 중 가장 많인 원인도, 누군가와 비교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한다면, 스스로의 아쉬움도, 타인의 행복도 모두 충족시킬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뭐든 그냥 있는 그대로, 자연스러운 그 모습 그대로를 사랑할 수는 없는 걸까. 우리 아이는 왜 이렇게 공부를 못하지? 가 아니라 우리 아이는 대신 그림을 잘 그리잖아. . 친구네 아빠가 생일날 비싼 장난감을 사줬다고 하지만, 대신 우리 아빠는 나랑 하루 종일 놀아줬잖아. 라고 생각하면 기분이 훨씬 좋지 않을까.

 

최근에 방영되었던 sbs 스페셜 [부모vs학부모] 라는 다큐는 아직 부모가 되어 보지 못한 내가 보기에도 사태가 심각해 보였다. 이 방송에서는 수많은 학생들이 성적으로 인해 자살로 내몰리고, 크고 작은 정신과적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현주소를 보여주고, 그 원인에 대해 짚어주었다. 사실 부모들이 자녀를 입시 경쟁에 몰게 된 것은 사회가 부모의 불안을 조성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학력에 의한 소득 격차, 대학서열에 의한 빈부격차는 말할 것도 없고, 청년실업 삼백만 시대가 되고 보니.. 아이가 성인이 되기도 전에 걱정부터 드는 것이다. 우리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 행복하게 사려면 무조건 좋은 성적으로 명문 대학에 가야한다.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도록. 그게 부모의 의무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3부로 진행된 이 방송에서는 그 외에도 부모에게는 아이에 대한 확신을 주고, 아이들에겐 자기주도 멘토링이 진행되기도 하고, 외국의 경우와의 차이점을 짚어보는 등 다각적인 시선으로 현 상황의 문제점을 짚어 주었다. 결론은 문제 아이 뒤에는 언제나 문제 부모가 있고, 궁극적으로 문제 부모 뒤에는 문제 사회가 있다는 것이다. 해결방안이나 대안을 제시하는 부분은 약했지만,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알아야 할 부분들에 대해 심각성을 상기시켜주어 흥미로웠다.

 

방송을 봤던 탓인지, 이번 <부모의 자격>이란 책이 더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느껴졌다. 단순히 부모와 아이들의 문제뿐만 아니라 교육 제도 자체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었다. 흔히들 사교육은 공교육을 붕괴시키는 암적 존재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교육은 부실한 공교육이 키웠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학부모들이 공교육만으로 안심할 수 없다는 건 그것의 부실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니 말이다. 예를 들어 수업시간에 버젓이 인강을 틀어주는 걸로 대체하는 교사도 있다고 하니 얼마나 안이한 태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 학교에선 성적순으로 좌석을 배치하고, 방과후 자율학습도 전교 석차를 기준으로 시설 좋은 독서실 제공 등 인간 가치의 평등을 교육해야 할 현장에서 입시라는 미명하에 인권유린이 벌어지고 있다. 다른 곳도 아닌 '학교'에서 말이다. 대신에 사교육 기관인 학원에서는 학원은 공부를 잘하거나 못하거나 똑같은 학원비를 내고 다니기 때문에 인격적으로 차별하지 않는다. 게다가 경쟁력을 위해 치열하게 준비하는 강사들이 교사들보다 실력이 더 뛰어나다는 것은 이미 많은 사례로 증명되고 있으니 마냥 사교육을 규제할 것만도 아니란 말이다.

사실 부모의 자격을 따진다는 발상 자체가 현재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건지도 모르겠다. 과거에만 하더라도 부모님은 높이 우러러 봐야 하는 어려운 존재였는데, 언제부턴가 자녀가 부모를 무시하거나, 반대로 부모가 부모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하고 있으니 말이다. 저자는 귀한 자식일수록 독립적으로 키우라고 말한다. 부모로서의 욕심을 조금만 버린다면, 아이를 조금 더 믿어준다면 더 좋을 거라고. 과잉사랑이 결국 아이를 사회적 무능력자로 만든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말이다.

시작은 사소한 것에서 시작하자. 바로 우리의 아이들을 믿어주고, 기다려주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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