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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스완그린
데이비드 미첼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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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스완그린은 런던도 아니고 리치먼드도 아니고, 다른 그 어떤 곳도 아니기 때문이야. 블랙스완그린은 비밀을 숨길 데가 없어. 네가 로저 블레이크네 문을 두드리는 날에는 우리 모두 그 사실을 알게 될 거야.

 

영국의 작고 보수적인 시골 마을에 블랙스완그린이라는 이름의 호수가 있다. 이름과 달리 실제 백조가 있지는 않은 호수처럼 이곳은 어딘지 삭막하고, 폐쇄적인 마을이다. 이곳에 엄마, 아빠, 누나와 함께 살고 있는 열세 살 소년이 있다. 그는 친구들 몰래 교구 잡지에 시를 쓰고 있고, 남들에게 숨기고 싶은 말더듬 증을 가지고 있다. 지루하고, 조용한 동네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부부싸움이 벌어지는 집안 속에서 제이슨은 어른들의 위선이나 아이들 세계의 위계질서, 행동법칙, 따돌림 등을 벗어나 또 다른 세계를 꿈꾼다. 남루한 현실을 벗어나 꿈을 꾸는 소년을 그린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영화 <빌리엘리어트>가 떠오른다. 누구나 기억하는 그 장면! 발그레하게 양 볼을 붉힌 소년이 마치 천국에라도 닿을 듯이 공중으로 솟구치는 아름다운 모습말이다. 황홀한 그 순간이 끝나고 나면 소년의 머리 위에는 지저분한 천장과 발 밑의 낡은 침대만 남지만, 팍팍한 현실을 벗어나 꿈을 꾸는 것으로 소년은 의젓하게 비루한 삶을 참아낸다. 꿈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현실을 버티게 해 주는 달콤한 사탕 같은 것 말이다.

 

 

 

 

빌리가 엄마를 잃고 무력한 아버지와 무뚝뚝한 형, 치매를 앓는 할머니를 부축하며 살아가야 가면서도 결코 변명하거나 울지 않는 조그만 현실주의자였던 것처럼, 이 작품의 제이슨 또한 어딘지 그런 씩씩한 모습이 있다. 물론 그는 남몰래 자신의 말더듬증을 숨기려 애쓰고, 잘 나가는 그룹에 속해있지도, 따돌림을 당하는 무리에 속해 있지도 않은 어중간한 상태였지만, 그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지키려 애쓴다. 자신이 시를 쓰는 것을 감추려고, 말더듬증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동안, 그것들을 모두 시로 써내려가는 것이다. 사실 눈에 띄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제일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이곳 저곳의 눈치를 보다 보니, 감수성 풍부하고 예민한 그는 다른 이들에 비해서 날카로운 관찰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제이슨의 내면적인 성장도, 친구들의 무모한 행동도, 어른들의 이기적인 모습도 예리하게 읽어내고 있다. 그 속에서 판타지는 현실의 갈피에 슬쩍 섞여 들며 초라한 마을 어딘가로 살그머니 내려앉는다. 그래서 빌리가 허름한 담벼락을 따라 달리고 도약하는 장면만큼이나, 제이슨이 시를 배우고 쓰는 모습은 설레임을 느끼게 해준다.

 

 

숨은 계단에 발이 걸려 자꾸 넘어지고 넘어지고 또 넘어지다 보면, 마침내 깨닫게 된다. 저 계단을 조심해야 해! 만약 우리가 너무 이기적이거나, 아니면 너무 예 주인님, 아니요 주인님, 가방 세 개 다 찼습니다 주인님 하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식으로 행동하더라도, 그것이 바로 숨은 계단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문제가 다 숨은 계단이다. 우리가 영원히 자기 잘못을 알아차리지 못한 결과로 고통 받게 되거나, 아니면 언젠가 잘못을 깨닫고 고치게 되거나, 둘 중 하나다. 우스운 건, 일단 머릿속에 그 숨은 계단에 대해 새겨놓고 다시 자, 인생이 그래도 그렇게까지 똥통은 아니야 하고 생각한 바로 다음 순간 꽝! 하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또 다른 숨은 계단에 걸린다는 것이다.

항상 그게 다가 아니다.

 

 

 

데이비드 미첼은 <블랙스완그린>의 배경이 되는 우스터셔 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미첼 또한 어린 시절에 말더듬증을 겪어 언어치료를 받았다고 하니, 문학적인 감성이 풍부한 제이슨의 스토리가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전작들에 비해 덜 복잡한 스토리를 구성한 것도 바로 자전적인 소설이라 그런 게 아닐까 싶다. < 클라우드 아틀라스>에서 엄청난 등장 인물과 복잡한 관계가 있었다면, 이 작품에서는 우스터셔 주 블랙스완그린이라는 작은 마을 안에서 제한적으로 전개되고, 등장인물도, 시간적인 부분도 그리 길지 않은 시기로 진행되니 말이다. 지금은 유명한 작가가 된 데이비드 미첼을 어린 제이슨의 모습에 대비해서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제이슨이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어른들의 세계는 결국 부모의 이혼으로 마무리된다. 이제 열네 살이 된 제이슨은 새로운 동네로 가서, 이혼하고 홀로서기를 해야하는 어머니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빌리처럼 결코 울지 않는다. 누가가 결국에는 다 괜찮아질 거야, 라고 말하지만, 그는 이 상황이 별로 괜찮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이게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잔잔하게 전개되는 일상의 이야기지만, 마지막 페이지까지 도달했을 때 어딘지 뭉클한 기분이 드는 것은 나만의 느낌이 아닐 것이다. 언젠가 제이슨이 더 높은 곳으로 비야 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믿기 때문이다. 고통과, 기쁨, 슬픔을 통과하면서 나이를 먹어가며 그도 언젠가는 어른이 될 것이다. 누구나 겪는 사춘기이지만, 각각의 모습은 너무나도 다르다. 그래서 더욱 가슴 아프고, 설레고, 뭉클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 개인적으로 <클라우드아틀라스>는 영화로만 보았던 터라, 데이비드 미첼의 책은 처음인데, 전작을 읽었던 이들이라면 등장인물들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할 것 같다.

1.제이슨을 집요하게 괴롭히는 닐 브로즈 => <유령이 쓴 책> ‘에서 다국적 투자회사의  변호사

2.교구목사의 부인인 수다스럽고 오지랖 넓은 그웬돌린 벤딩크스 => <클라우드 아틀라스>에서 강제 요양원의 입주자 위원회 대표

3.제이슨에게 시와 인생을 가르쳐주는 마담 크롬린크 = > <클라우드 아틀라스>에서 작곡가 로버트 프로비셔의 스승의 딸로 등장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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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딸 2014-02-26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담 크롬린크가 너무 매력적이여서 <클라우드 아틀라스>를 읽을 책으로 꼽아두었는데, 닐 브로즈가 다국적 투자회사의 변호사로 나왔다는 <유령이 쓴 책>도 궁금하네요.

피오나 2014-02-26 15:53   좋아요 0 | URL
데이비드 미첼의 작품을 이번에 처음 만난 거였던터라... 이 작품으로 인해 오히려 전작들이 더 궁금해졌어요. ㅋㅋ 저도 <유령이 쓴 책>부터 읽어보려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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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보다 낯선 오늘의 젊은 작가 4
이장욱 지음 / 민음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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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장욱이라는 작가를 이번에 처음 만나는 거였는데, 이 작품을 읽기 시작하고 단 두 페이지만에 가슴이 철렁 내려 앉고 말았다. 이런 그림 같은 묘사라니, 페이지 속의 단어들이 춤추며 허공에다 장면을 만들고 있었던 곳이다. 떨어지는 빗방울과 거리에 펼쳐진 우산과 그 속의 사람들에 대한 느낌이 마치 내가 거기에 있는 것만 같은 체감이 들게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대목이다.

 

짙게 코팅된 차창 밖으로 빗방울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떨어지는 빗방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떨어진다. 행인들이 우산을 펴 드는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서로 다른 자세로, 다른 표정으로, 다른 각도로, 우산을 펴 든다. 풍경이란 언제나 그런 방식으로 펼쳐진다. 그것이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손바닥으로 머리를 가린 채 달려가다가 중년 남자와 어깨를 부딪치는 사람이 보였다. 멍하니 서서 담배를 피우던 중년 남자가 자신의 어깨를 치고 달려간 사람을 향해 뭐라 뭐라 소리쳤다. 욕설일까, 외침일가. 목소리는 허공으로 흩어졌다. 달려가는 사람은 외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 것이 풍경이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그냥 별거 아닐 수도 있는, 지나가버릴 수도 있는 풍경 묘사인데, 이상하게도 나는 이 대목부터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구체적인 명사들과 역동적인 동사들로 이루어진 문장들은 매 페이지마다 그가 창조해낸 시공간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나는 그의 문장에 매혹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전반적으로 미스터리 한 작품의 분위기만큼이나, 작가의 문장이 참 마음에 들었다고 해야 할까. 그의 전작들을 찾아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은 A라는 친구의 장례식장을 찾아가는 친구 네 명에 대한 이야기이다. 메인 스토리를 끌고 가는 주요 인물 세 명은 정과 김, 최이고, 이들과 만나기로 했다가 길이 어긋난 염은 마지막 장에 가서야 등장한다. 이들은 모두 같은 대학 영화 동아리에서 만나 한 시기를 같이 보냈던 친구들이다. 김은 A의 옛 연인이고, 현재 그는 정과 부부이다. A의 글 솜씨를 부러워했던 정은 현재 동화작가를 하고 있다. 최는 공부에 대한 순수한 목적으로 대학에 남았지만, 지금은 국회희원의 보좌관이 되려고 한다. 글 솜씨가 뛰어나 시나리오를 썼던 A는 며칠 전, 이들 친구들을 자신의 영화 시사회에 초대했었다. 이들 친구들은 갑자기 A의 교통 사고 소식을 전해 듣고, 부랴부랴 K시를 향하는데, 함께 차에 타고 있지만 서로의 마음 속에서는 각자만의 A를 추억하고 있다.

어딘지 미스터리하고, 불길한 분위기가 팽배한 가운데, 플롯의 방향은 '죽음'을 향해 흘러간다. 다만, 그걸 극중 인물인 정과 김, 최만 모르고 있을 뿐이다. 사실 글을 읽어가는 내내 독자들도 플롯이 흘러가는 방향을 짐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어딘가 이상하고, 뭔가 잘못된 것 같은 불안감이 조성될 뿐이지, 직접적인 암시는 없으니 말이다.

나는 버튼을 눌러 메시지를 확인했다. 메시지는 간결했다.

잘 오고 있는지.

밤하늘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언제나 등 뒤에는 더 깊은 세계.

죽은 이의 전화번호를 물끄러미 바라볼 때가 있다. 그 번호로 전화를 걸어 볼 때가 있다.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음성을 오래 듣고 있을 때가 있다. 하지만.... 그 번호에서 전화가 걸려오거나 메시지가 날아온다면?

 

언젠가부터 내비게이션은 엉뚱한 지표를 가리키고, 지도에는 없는 터널과 바다가 나타난다.  방금 전 라디오에서 교통사고에 대한 보도를 듣고, 그 몇 분 뒤에 눈앞에서 몇 건의 추돌사고가 발생되는 현장을 목격한다. 그들은 사고가 일어나는 것보다 신고가 먼저 들어올 수도 있나? 싶어 어리 둥절 하다. 그리고 죽은 A로부터 각자에게 문자 메세지가 오기 시작한다.  각자에게 모두 다른 메세지가. 그들은 등에 땀이 배는 것이 느껴지면서 어딘지 오싹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냥 누군가 상가에 먼저 도착해서 그녀의 전화로 메세지를 보낸 거겠지. 장난이겠지. 싶어 그냥 무시하려 한다. 그러나 누구도 그럴 수가 없다.

 

 

 

A의 죽음으로 시작된 세 남녀의 기묘한 여정은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짐 자무시의 영화 <천국보다 낯선>을 떠올리게 한다. 극중에서는 A가 죽기 전에 만들었던 영화의 제목으로 인용된다. 짐 자무시의 영화도 마찬가지로 한 여자와 두 남자의 유랑기이다. 여자가 헝가리를 떠나 뉴욕에 와서 두 남자를 만나고, 그녀가 떠난 뒤 두 남자가 클리블랜드에 가서 여자를 만난다. 재회한 셋은 함께 플로리다로 떠난다. 그들은 극중에서 이런 말을 한다. “어딜 가도 왜 이렇게 다 똑같은 거지.” 뉴욕이건, 클리블랜드 건, 플로리다건 그들에게는 다 똑같았던 것이다. 낡은 아파트나, 눈 덮인 벌판이나, 바람 부는 바닷가나 가난한 청춘에게는 그저 외롭고 고독하고, 황량하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장욱의 작품 속 그들도 그랬다. "웃긴다. 낯선 곳에 왔는데도 모든 게 다 비슷해." 라고. 기시 감이란 것이 도처에서 느껴지면서, 처음 가 본 곳도 몇 번 와 본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의 생활이 어제와 같고,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도 언젠가 만났던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모두 이미 지나온 시간 같고, 지나가 본 적이 있는 공간 같은 느낌.

감상은 혐오의 대상이며, 감정의 낭비야말로 어리석은 자의 특징이라고 믿었던 김도, 자신은 과거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유형의 인간이 아니라고 하는 최도, 김이 속한 세계가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지 않는 자신과 같은 세계라고 믿었던 정도 모두 어긋난다. 그들은 서로를 기다리고 또 무언가를 기다리지만, 매번 머무르지는 못한다. 오래 전 A의 연인이었던 김은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같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위태로웠다. 정은 자신이 보았던 김의 모습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A와 김의 관계도 목격하지만 모른 척 하고 만다. 최도 A에게 조금의 감정을 가질 수도 있었지만, 끝내 마음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완성될 수 없는 여정과 완성될 수 없는 관계에 대한 이들의 서사는 짐 자무시의 흑백 화면만큼이나 매혹적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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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어웨이 - 도피할 수 밖에 없었던 여자의 가장 황홀했던 그날
앨리스 먼로 지음, 황금진 옮김 / 곰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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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먼로의 첫 소설집 <행복한 그림자의 춤>와 마지막 작품집인 <디어 라이프>에 이어 세 번째 소설집 <런어웨이>를 읽었다. 이 작품집은 국내에 처음 출간되었던 <떠남>을 새롭게 번역하여 출간한 책으로 기존 번역서에는 없는 '허물', '반전', ''이 추가 수록 되어 있다.  앨리스 먼로 단편의 특징이라면, 내 옆에 있는 사람들, 내가 속한 공간의 사물들, 나와 가장 가까운 세계에 대해 이보다 더 꼼꼼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정밀한 그림 같은 묘사가 돋보인다는 것이다.  주변 상황에서부터 마치 카메라처럼 정교한 묘사를 통해서 점점 더 그 인물에 다가가는 듯한 느낌이라, 장편만큼이나 묵직한 감동을 준다. 예전에 김연수 작가가 장편은 일상의 삶에 가깝고, 단편은 일종의 여행 같은 느낌으로 보면 될 거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익히 알려진 대로 그는 빵집 아들이었는데, 그것에 비유를 하자면 일년 내내 손님이 없다가 크리스마스 시즌 때에만 손님들이 북적 이는 빵집이 있다. 장편이라면 평범한 날들 속에 매일 손님이 없는 걸 계속 보여주어서, 클라이막스 인 크리스마스 때 감동을 주는 것이고, 그에 반해 단편은 절정인 크리스마스의 풍경만 딱 때어서 얼마나 흥겨웠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말이다. 따라서 단편에서는 복잡한 이야기보다는 인물의 내면에 대한 묘사가 더 많고, 생략을 통해 상징화된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 장면의 선택에 공을 들이는 경우가 많다. 길이는 짧지만 그만큼 밀도가 높은 이야기들이라서, 첫 번째 읽을 때보다 두 번째 읽었을 때 그 맛이 더 향기로운 것 같다.

 

수록된 첫 번째 작품 '런어웨이'부터 마음을 쿡쿡 찌르는 묘사가 돋보인다. 예를 들면 이런 부분 들 말이다. <실비아는 물기를 머금은 햇살이 얼굴을 내민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실비아는 이 웃음이 콸콸 흐르는 시냇물처럼 온몸으로 쫙  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실비아는 그 키스를 폐경기에 나타난다는 열감처럼 그녀의 내면에서 어마어마한 열을 내뿜으며 꽃잎을 활짝 피운 눈부신 한 송이 꽃으로 여겼다> 는 대목들 말이다. '런어웨이'는 남편의 정서적 학대와 삶에 찌들어 도피를 꿈꾸는 칼라라는 여성과 그녀가 실비아라는 여성과 교류하는 감정에 대한 스토리이다. 단순히 인물의 사소한 행동으로 지나갈 수도 있는 대목들이, 저런 빛나는 묘사로 인해 그 순간,   찰나의 인물이 되어 볼 수 있는 감정이입이 되도록 만들어준다. 웃음이 시냇물처럼 온몸으로 퍼진다.라니. 어쩜 이렇게 절묘한 표현을.. 이라며 감탄하면서 읽었다. 유려하고 단단한 문장들은 생생하고, 아름답게 가슴으로, 머리로, 귀로 삶을 체감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남았던 작품은 '반전'이었는데, 셰익스피어 연극을 보고 나온 극장 앞에서 친절을 베푼 한 남자에게 마치 한 여름 밤의 꿈처럼 신기루처럼 작은 꿈을 꾸었던 로빈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혼자 연극을 보러 다니길 즐겼는데, 그 이유는 비루하고 평범한 자신의 일상을 견디게 해주는 유일한 탈출구였기 때문이다.

연극이 끝나면 그녀는 시내까지 걸어가 강을 따라 걷다가 너무 비싸지 않은 식당이 나오면(대개는 샌드위치 집이었다), 카운터 자리의 높은 의자에 앉아 혼자 식사를 했다. 그러고 나면 집으로 가는 7 40분 기차를 잡아탈 수 있었다. 그게 다였다. 그 몇 시간으로 그녀는 자신이 돌아가려는 보잘 것 없고 불만족스러운 삶이 일시적인 것일 뿐이고, 그런 삶을 견디는 것도 전보다 덜 힘들 거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시간, 그런 인생, 모든 것 뒤에는 기차 창 밖을 통해 보이는 햇빛을 받아 더욱 찬란히 빛나는 광채가 있었다. 여름 들판을 비추는 햇빛과 길게 드리운 그림자는 머릿속에 남아 있는 연극의 여운 같았다.        - '반전' 중에서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극장에서 가방을 잃어버리고 만다. 집에 갈 티켓도, 돈도 한 푼 없던 그녀에게 나타나 따뜻한 저녁을 제공해주고, 선뜻 차비까지 빌려주는 한 남자. 돈을 갚고 싶다는 그녀에게, 그는 일년 후 같은 날 같은 옷 차림으로 자신의 가게에 와 달라고 말한다. 그때 다시 만나서 그 동안 있었던 일도 들려주고 했으면 한다고. 마치 연극의 한 장면처럼 그 날은 그녀에게 새겨지고, 일년 후 세탁소에 맡긴 그날의 초록색 드레스를 찾지 못해, 비슷한 다른 옷을 서둘러 구해 입고 간 그녀는, 그러나 결국 그와 재회하지 못하고 쓸쓸하게 되돌아서 오고 만다. 일년 내내 기다렸던 시간이었는데, 기다리는 것이 아까워 결국 그날의 연극이 끝나기도 전에 나왔건만 말이다. 왜 그날 그와 그녀의 재회가 이루어지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아주 먼 세월이 흐른 뒤에 알게 된다. 여기엔 일종의 깜짝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비밀이 숨어 있는데, 글쎄, 세상에는 차라리 모르는 편이 더 나은 진실도 있는 법이니까. 진실을 알게 된 그녀가 "조금만 뒤늦게 갔더라면. 아니, 조금만 일찍 갔더라면. 연극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거나 연극을 아예 보지 않았더라면. 머리 따위 매만지지 않았더라면..."이라고 후회하는 순간에 이르자, 어쩐지 씁쓸해졌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나. 매 순간 후회와 회한이 남아 반성하고, 아쉬워하는 것이 인간이다. 게다가 어쩐지 행복한 일은 차곡차곡 계단을 밟아야 겨우 생기는데, 불행한 일은 <하루 만에, 단 몇 분 만에 파국을 맞이>하고 만다. 로빈이 가졌던 마음이 무모한 믿음이 아니었다고, 그날, 그 순간이 무대 위에서 만들어진 다른 세상의 일이었던 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이번 작품집에는 모든 이야기가 후회와 회한으로 점철되어 있다. 단편이지만 줄리엣이라는 공통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우연', '머지않아', '침묵'의 세 편도 그렇다. 줄리엣은 기차에서 우연히 낯선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우연), 그의 아이를 안고 친정에 방문하고(머지않아), 그가 죽고, 애지중지 기른 딸과 연락이 두절되면서(침묵), 그렇게 이어지는 그녀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칼리파레오스. 예쁜 볼. 이제 생각난다. 그녀가 기억의 바다에서 낚아 올린 호메로스의 단어가 낚싯바늘에서 찬란히 빛나고 있다. 그러자 별안간 모든 그리스어 단어들이 떠오른다. 6개월 동안 벽장에 꽁꽁 처박아두었던 것을 이제야 발견한 기분이다. 그 동안 그리스어를 가르치지 않아 기억의 저편에 묻어두고 있었던 것이다.    - '우연' 중에서

 

 

한때는 보물 1호였던 것도 일상에 치이다 보면 어느 순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게 되는 것이 우리이다. 당시에는 잊어버린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만큼 소중한 것이었는데도 말이다. 삶이란 언제나 그런 식이다. <벽장에 처박아두었다가 때때로 다른 것을 찾으려고 뒤지다 보면 기억이 나고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문득 떠올린다. 자신의 과거를, 자신이 한때 별처럼 빛나던 한 때를, 아 내가 이런 시절도 있었지. 라고 자조하면서. 살아 가다 보면 내 인생의 앞에는 온갖 일들이 벌어진다. 그러나 견디기 어려울 만큼 나를 불행하게 만들었던 일도, 기쁨에 겨워 주체하지 못할 만큼의 벅찬 일도, 모두 지나간다.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연'에서 이어지는 스토리인 '침묵'에서는 에릭이 죽고 나서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던 줄리엣이 어느 날 문득, 그의 부재를 온몸으로 깨닫는 장면이 나온다. 앨리스 먼로는 그 순간, 그녀의 감정을 이렇게 표현해놓았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세상에서 그와 함께했던 기억은 구석에 처박혀 버렸다. 이런 것이 애도로구나. 시멘트 한 포대가 쏟아져 들어와 순식간에 몸이 굳어버린 느낌이다. 몸을 거의 움직일 수 없다. 버스에 오르고, 버스에서 내리고, 집까지(대체 왜 여기서 살고 있는 거지?) 반 블록을 걸어가는 일이 마치 절벽을 오르는 것만 같다>라고. 이토록 문장을 보자마자 와 닿는 묘사가 또 있을까 싶을 만큼,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곪아터진 상처와 흉터, 여인이면서 사람이기도 한 하나의 존재에 대한 연민과 애정. 우리의 머리 속에서 매일 같이 떠오르는 감정과 생각들이지만 한번도 제대로 입 밖으로 표현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콕 집어 글로 새겨놓은 문장들은 죄책감과 후회조차 삶에 대한 아름다운 해석으로 보인다. '반전'에서 로빈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그 심정, "이건 말도 안 된다고요. 난 받아들일 수 없어요."에 바로 이어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마음과 '우연'에서 하필이면 줄리엣이 처음으로 용기를 내서 누군가에게 퇴짜를 놓은 날 그가 기차에서 몸을 던지는 잔인한 상황, 바로 그런 것들이 삶의 유일한 진실이니 말이다. 그래서 앨리스 먼로의 작품은 읽고 나면 언제나 지나간 삶을 돌아보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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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저 이상용 1 - 승리를 책임지는 마지막 선수
최훈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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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선셋 파크'에 이런 말이 있었다. <야구는 삶 자체만큼이나 큰 우주이니까 좋든 나쁘든, 비극적이든 희극적이든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다 야구의 영역 안에 있다>라고.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두 세시 간짜리 야구 경기 안에서 모두 일어난다는 것이 키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야구를 좋아하는 수백만 가지의 이유 중에 말이다. 야구에선 매 순간이 '선택'이다. 사소한 선택 하나가 그날의 경기 결과를 바꾸기도 하고, 한 선수의 운명을 바꾸기도 한다. 실제 일상에서도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우리네 삶과 닮은 야구가 너무 좋다. 시즌 권을 구매해서 경기장에 가고, 전국 곳곳으로 원정경기 관람을 갈 정도로 야구라는 스포츠에 푹 빠져 있다. 그래서 야구에 관련된 책도 참 많이 읽었고, 가지고 있는 편인데 집에 있는 종류만 대충 어림잡아도 스무 권은 족히 되어 보였다. 그 속에 한 권 추가하게 된 것이 바로 이번에 출간된 최훈의 <클로저 이상용>이다. 스포츠 동아에 연재되고 있는 만화인데, 평소 신문이나 웹을 통해 만화를 잘 보지 않는 나 같은 독자라면 이렇게 단행본으로 보는 것이 최고다. 무엇보다 야구팬들이라면 절대 모를 수가 없는 이름, 최훈 작가의 카툰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말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클로저, 즉 마무리 투수이다. 대표적인 이미지로 올해 일본으로 진출한 삼성의 오승환 선수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 선발 투수가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기는 하지만, 야구 경기를 조금만 지켜본 적이 있다면, 그 선발만큼이나 중요한 보직이 바로 마무리라는 걸 알 수 있다. 선발이 8이닝을 호투해도, 마지막 1이닝을 막지 못해 역전패 당하는 경기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마무리 투수는 오승환 선수의 별명인 돌부처만큼이나 감정 변화가 드러나지 않아야 하고, 흔들리지 않아야 뒷 문을 튼튼히 사수할 수가 있다. 극중 10년차 베테랑 선수인 이상용은 느린 구석 덕분에 제대로 된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여전히 2군에서만 뛰는 선수이다. 프로선수의 세계는 냉정해서 사실 1군 선수가 부상이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잠깐 2군에 내려와 있기는 하지만, 실제 2군에만 있던 선수가 1군에 올라와 뛰어난 능력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란 거의 없다. 거기다 신입도 아니고, 10년차 선수라면 뭐. 그의 선수 생활은 아마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그렇게 2군 선수로 마무리 될 수 밖에 없다. 대부분의 경우라면. 그런데 그에게는 다른 사람들과는 좀 다른 능력이 있다. 선수 개개인의 스탯을 마치 컴퓨터처럼 기억하고 있고, 그에 따라 게임의 흐름을 보는 눈이 있는 것이다. 감독이든 선수든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그의 이런 능력을 알아봐 주는 이가 한 명 있었으니, 2군 투수코치가 1군으로 올라가면서 드디어 그에게도 인생 역전의 기회가 온다. 좀처럼 기회가 찾아오지 않는다면,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과연 그는 그 기회를 살려 1군에서도 가치가 있는 선수가 될 것인가? 앞으로 출간될 시리즈가 더욱 궁금해지는 이유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

그곳은 바로 관중들로 꽉 찬 야구장이다.

 

폴 오스터도 그렇지만, 또 야구 광 팬인 작가 중에 오쿠다 히데오가 있다. 그는 야구를 얼마나 좋아했던지, 전국을 돌며 야구장을 다니는 걸로 에세이를 출간하기도 했었다. '야구장 습격사건' '야구를 부탁해'인데, 이 책은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들만큼이나 흥미롭다. <내게 필요한 건 야구장, CP컴퍼니 옷 그리고 여행. 승패 따윈 아무래도 좋아. 온 힘을 다해 뛰는 선수가 있고 그들을 마음으로 응원하는 팬이 있다면. 다시 태어난다면 야구선수가 되어야지. 누가 다시 한번 나를 낳아줘>라는 그의 멘트를 보고 있노라면, 큭큭 웃음부터 나오지만, 아마도 야구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많이들 공감할 것이다. 응원하는 팀이 있고, 그 팀이 승리하면 정말 기쁘지만, 사실 승패보다는 경기를 하는 그 순간의 희열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야구장 특유의 공기, 선선한 바람, 땀 흘리며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 머리 싸움하는 프런트, 응원가와 응원단장을 따라 하는 그 동작들.. 지금처럼 야구 시즌이 아닐 때는 손꼽아 3월의 시범경기 일정만 기다릴 정도로.. 야구 팬들은 경기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 열기를 기억할 것이다. 티비 중계로 보는 야구도 재미있지만, 무엇보다 진짜는 경기장에서 보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야구를 계속 보면서 규칙들이 눈에 들어보고, 선수들의 포지션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그때는 경기의 흐름 같은 것이 좀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러면서 정말 아름다운 것은 공격이 아니라 수비라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선수의 포지션이 '유격수'인 것도 물론 영향이 있겠지만 말이다. 엄청난 투수의 제구력도 팀 내 동료들의 '수비'가 뒷받침 되지 않으면 실점을 피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날려서 팀의 실점을 막아내는 순간, 그럴 때 그들의 아낌없는 수비 동작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울컥하게 만들 때가 있다. 마무리 투수도 어떤 의미에서는 공격보다는 방어이다. 더 이상 실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건, 뒷문을 잘 틀어 막아서 승리를 유지하거나, 혹은 연장전으로 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는 거니까 말이다. 그들의 공 하나로 다 이긴 시합이 역전패로 끝날 수도, 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시합이 연장전을 넘어 역전승 할 수도 있다. 그래서 <클로저 이상용>이라는 이 작품이 더욱 재미있는 것이고, 최훈 특유의 유머 감각과 심플한 캐릭터들이 그 몰입 도를 더해준다. 작년 10월 시즌이 끝나고 나서 이제 언제 야구 보나.. 암담했었는데, 벌써 다음달이 3월이다. 야구가 그리운 이들이라면, 3월초 시범경기를 앞두고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뜨거운 야구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해보는 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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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루스 이야기
세스 고딘 지음, 박세연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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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랏빛 소가 온다》 를 흥미롭게 읽은 이들이라면 꼭 읽어야 하는 책!! 이카루스의 스토리를 통해 선택과 도전이라는 2014년의 화두를 던진다. 망설이지 말고, 바로 지금 시작하고 싶게 만드는 마법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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