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살인자를 사냥한다 판타스틱 픽션 그레이 Gray 1
배리 리가 지음, 권도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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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중요한 건, 범인이 아주 잘 융화되는 사람이라는 거야. 한마디로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거지. 바로 그런 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가장 중요하고, 대단한 기술이야. 그들은 우리가 다가가는 걸 절대 알지 못해. 우리가 그들과 비슷한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우리는 인간처럼 보이는 거지."


겉으로는 평범하고, 사교적이고 거기다 매력적이기까지 한 얼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속내를 읽기 힘든 무표정하고 차가운 얼굴. 무고한 사람을 상대로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범인의 얼굴을 뉴스나 신문에서 보면, 그가 거리 어디에서나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 마음이 더 불편해지곤 한다. 겉으로 봐서는 인간과 괴물을 도무지 가려내기 힘든 세상이란 얘기도 될 것이다. '우리 사람은 되기 힘들어도 괴물은 되지 맙시다.’라고 했던 어느 영화 속 대사처럼 사람처럼 살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니 말이다.

 

이 작품은 21세기 가장 악명 높은 연쇄 살인마를 아버지로 두고 있는 한 소년의 이야기이다. 무려 123명을 살해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희대의 살인마인 아버지를 가지고 있는 십대 소년이라니..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피해자들에게 시달리고, 이웃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니 비뚤어지고... 결국은 아버지와 비슷한 길을 가게 되지 않을까... 싶겠지만... 주인공 재즈는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자기 자신과 싸우며 정상적인 사람으로 살려고 노력한다.

 

"재즈는 이 세상에서 무서워하는 것이 두 개 있었다. 오직 그 두 가지만이 무서웠다. 그 중 하나는 마을 사람들이 재즈를 지켜보면서, 그는 저주받고 태어나 살인에 관한 교육을 받았고 결국에는 아버지처럼 연쇄 살인범이 될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그 사람들의 말이 옳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


자신의 아들에게 어릴적부터 살인의 기술과 피해자의 심리에 대해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당연한 것을 교육시키듯이 가르치는 빌리는, 재즈가 자신만큼 엄청난 살인자가 될 거라고 믿고 있다. 그런 교육 덕분에 자연스레 사람의 심리를 꿰뚫어볼 수 있고, 그들의 마음을 자연스레 조정할 수 있는 17살 소년 재즈는 자신의 아버지처럼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동원해 살인자를 직접 찾으려고 한다. 여자친구인 코니와 친구인 하위와 함께.. 조금은 어설프지만 말이다.

 

10대가 주인공인 작품이지만, 코니와 하위는 어른 만큼이나 재즈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다.


"힘든 유년 시절을 보낸 사람은 많아. 연쇄 살인범과 같은 환경에서 자랐다고 해서 모두다 연쇄 살인범이 되는 건 아니야. 이 세상에 애들이 자라서 사람을 죽이게 만드는 지침서 같은 건 없어."라고 말하는 코니덕분에, A형 혈우병 환자인 하위 덕분에, 재즈는 인간성을 읽지 않을 수가 있으니까.

 

"아버지가 현재의 나를 만드셨어. 착한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마찬가지야. 너도 그걸 부정할 수는 없을 거야, 코니"
"우리 부모님 역시 지금의 나를 만들어 주셨어. 그게 어떻다는 건데? 우리는 부모에게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상의 영향을 받기도 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영향도 받게 되고. 그러다가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되는 거야."


3부작으로 기획된 작품이라 1부인 『나는 살인자를 사냥한다』는 주인공 재즈와 아버지의 관계, 그의 심리적 갈등에 대해 주로 이야기가 되고 있다. 이 작품의 마지막 반전 때문에 아마도 다음 2부에서는 더욱 흥미로운 사건들이 펼쳐지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소시오패스라는 존재가 주로 평범해 보이는 사람 중에 있다고 하잖아요. 실제로 사이코패스보다 소시오패스가 훨씬 많다고 한다. 타인을 이용하고 거짓말을 일삼지만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고,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소시오패스가 전 인구의 4프로라고 하니,,, 25명 중에 1명은 소시오패스라는 건데.. 무시무시한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어쩌면 누구가 가지고 있는 인간의 두 얼굴, 또 다른 본성이 만들어내는 게 아닐까. 우리는 어떤 숨겨진 얼굴을 가지고 있는지.. 지금 나는 어떤 얼굴로 살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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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교육
로맹 가리 지음, 한선예 옮김 / 책세상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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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일은 굉장히 어려울 거예요."
"오! 지금은 모든 게 다 어렵지. 그렇다 해도 글쓰기가 목숨을 부지하는 것, 믿음을 간직하는 것만큼 어렵지는 않아."
"주제가 뭐예요?"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싸우고 다시 가까워진다는 이야기."

 

이 작품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2년 폴란드를 배경으로 숲속에 숨어 살며 독일 점령군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과 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은 전쟁 속에서 부모를 잃은 열네살 소년 야네크와 독일 군인들에게 정보를 캐내기 위해 몸을 파는 열 여섯살 소녀 조시아, 희망을 위해 끊임없이 글을 쓰는 대학생 빨치산 대원 도브란스키가 주요 인물이다. 전쟁으로 인해 굶주리고 지친 사람들, 깊은 숲속에 숨어사는 빨치산들 모두,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생존이다. 전쟁이 계속 되면 사람들은 점차 어떤 사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다른 사람들에게 맞서기 위해서 싸우게 되니 말이다. 전쟁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독일은 우리한테 왜 그런 짓을 하는 걸까. 묻는 야네크에게 도브란스키는 절망 때문이라고 말한다. 절망은 인간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떠돌고 있으니까.

 

 

열여섯 소녀가 원하는 건 소박하다. 오직 사랑하고 먹고 따뜻하게 지내는 것뿐, 그런데 평화롭게 사랑하는 것, 굶어 죽지 않는 것, 얼어 죽지 않는 것이 왜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 이 어린 소녀에게 희망은, 새로운 고통을 견뎌내도록 인간을 격려하기 위한 신의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마음이 아프다.


열네살 소년은 심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추위와 배고픔, 희망이 사라진 전쟁의 한 가운데서 음악에 마음을 빼앗길 줄 안다. 쇼팽의 폴로네즈를 듣고 감동하는 그의 모습은 나에게 위안을 주었다. 그래, 결국 예술이 모든 것을 구원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음악 앞에서 순수하게 감동할 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데 이 작은 소년은 무려 전쟁의 한 복판에서 음악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린다.

 

바이올린을 집어들었다. 더러운 누더기를 걸친 아이, 유대인 거주 지역의 학살로 부모를 잃은 유대인 아이가 악취 풍기는 지하실 한가운데 서서 세계와 인간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있었다. 신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있었다. 그는 연주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더이상 흉하지 않았고, 그의 어설픈 몸은 더이상 우스꽝스럽지 않았다...세계가 혼돈으로부터 빠져나왔다. 세계가 조화롭고 순수한 모습을 띠어갔다. 연주가 시작되자마자 증오가 사라졌고, 처음 몇 곡에 굶주림과 경멸과 추악함이 달아나버렸다.

 

밤이고 낮이고 계속 되는 전투. 한 쪽이 이기면 새로운 세계가 과연 열리는 걸까? 많은 사람들을 죽여서 얻게 되는 평화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전쟁에 희생된 무고한 인명들은 그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단 얘긴데, 어떻게 하면 이 어처구니 없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지금도 세계 어딘가에선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  2차 세계대전이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되어 1945년 일본이 항복함으로서 종전되었다는 걸 기억해보자면, 그 긴 시간동안 사람들의 절망이 보이는 거 같아서 마음 한 켠이 싸해졌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로맹가리의 믿음은 가슴이 울컥해질만큼 멋지다. <사람들은 서로 멋진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이어 그 이야기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지. 그들은 그로써 신화가 현실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자유, 존엄성, 형제애, 인간으로서의 명예. 우리 또한 이 숲에서 동화를 위해 목숨을 내놓고 있는 거야.> 극중 인물 중에서 가장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인물인 도브란스키를 통해서 로맹가리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때문에 나는 우리의 주인공인 야네크가 결국 도브란스키의 희망에 동화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읽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작품의 후반부에, 이제 자신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고, 모두의 영웅이 실제하지 않는, 민중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거라는 것까지 깨닫게 된 그 마지막 대화가 정말 마음이 아팠다. 열네살 소년이, 더이상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고통의 목소리로, 그래서 환상이 제거된 목소리로 열여섯 소녀에게 하는 말이란 말이다. 나는 대체 누가 이 어린 소년에게 이런 깨달음을 주었는지, 전쟁이란 이 황폐함이 너무도 원망스럽웠다.

 

"도브란스키는 번역을 하면서 몇 마디 추가해야 했어. 그들은 중요한 것은 어떤 것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주장하는데, 거기에 담긴 의미는 결국, 한 사람은 죽었다거나 이제 곧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게 되리라는 것이지.?
"너 화났구나. 그럴 필요 없어."
"나 화 안 났어, 조시아. 하지만 나는 결국 배우게 되었어. 결국 그렇게 되고 말았어. 그들은 우리를 훌륭한 학교에 보냈고, 나는 언제나 훌륭한 학생이었어. 우리는 유명한 교육을 받은 거야. 타데크 흐무라 기억하지? 그는 그것을 우리의 '유럽의 교육'이라고 불렀어.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어. 내가 너무 어렸거든. 그는 자신이 곧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래서 아무 데서나 빈정거리고 다녔어. 하지만 나는 이제 알아. 그가 옳았어. 그가 그토록 비꼬아 말했던 그 유럽의 교육이란 바로, 그들이 너희 아버지를 쏠 때, 또는 너 자신이 뭔가 대단한 명분을 내세워 누군가를 죽일 때, 또는 네가 죽도록 굶주리고 있을 때, 또는 네가 마을을 파괴하고 있을 때 이루어지는 거야. 우리는 훌륭한 학교에 있었어. 우리는 정말 교육되었어."

 

그리고 그의 이런 변화를 느끼며, 그에게 말을 하는 소녀의 마음은 나를 멈칫하게 만들었다. 아.. 나는 이런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건넬 수 있는 소녀의 마음이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또 가슴이 먹먹해지게 아팠다.

 

조시아가 살며시 손을 내밀었다.
"너는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어째서?"
"왜냐하면 너는 불행하니까. 네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 때는 그 무엇도 너를 불행하게 하지 못해. 알겠지, 나도 대단한 걸 배웠어."

 

나는 과연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결코 불행해졌던 적이 없었던가. 사랑이 한때 내 삶을 구원해줄거라고 믿었던 적이 있다. 물론 삶을 바꾸는 것은 타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의지로 인해서만 달라지는 건 사실이다. 살아가는데 사랑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만큼 나이를 먹었다는 얘기이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사랑을 믿는다. 내가 사랑을 믿을 때만이, 사랑이 내가 가야할 길을 이끌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로맹가리의 전작들을 아주 어릴 때에 읽었었다. 그래서 어쩌면 나는 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지금 이 시간까지 온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유럽의 교육'은 그의 전작들을 먼지 쌓인 책장에서 다시 꺼내어 읽어보게 만들어주었다.

 

책장을 덮으려는데, 아내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던 순결한 영혼의 소유자인 늙은 변호사의 말이 떠올랐다.

 

"당신이 쉰 살이 되면, 그리고 내가 아내를 사랑하는 것처럼 어떤 어린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땐 당신도 이해할 겁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그가 다소 오만하게 말했다. 모든 사람한테 그런 일이 주어지는 건 아니라고.


모두가 로맹가리를 좋아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한테 이렇게 멋진 감동의 순간이 일어나는 건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장담한다. 이 작품을 읽게 되는 당신에게는, 그런 기적이 일어날 거라고. 소중한 것은 그 어떤 것도,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런 믿음을 가지게 될 거라고.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로맹가리는 참.. 멋진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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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잠들기 전에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6-1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6
S. J. 왓슨 지음, 김하락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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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S.J.왓슨의 데뷔작이다. 그는 병원에서 청각장애 아동들을 치료하는 일을 하며 주말에는 소설을 써왔다고 한다. 런던의 파버 아카데미에서 처음으로 작문 수업을 받았고, 6개월 짜리 이 강좌가 끝나는 동안 완성한 것이 바로 이 작품이라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작품을 구상하게 된 계기도 흥미로운데, 1953년에 간질 수술을 받은 이후 새 기억을 형성하지 못해 줄곧 과거 속에서만 살다가 세상을 떠난 인물의 부고를 읽고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이 작품의 주인공인 크리스틴이다. 매일 아침 눈 뜰 때마다 지난 일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인물, 내가 누구인지, 이곳이 어디인지, 내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인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 말이다.

 


단기 기억상실증 하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메멘토>가 자연스레 떠오를 것이다. 그의 기억은 단 10분 밖에 지속되지 않기 때문에 10분이 지나면 아무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거나, 자기 몸에 문신을 하면서 기억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반면 이 작품의 주인공 크리스틴은 하루 정도의 일은 기억을 한다. 그 다음날이 되면 다시 아무것도 기억이 안나는 상태로 돌아가버리기 때문에, 그녀는 부지런히 일기를 쓴다. 하루동안 들었던 일, 있었던 일들을 그날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가능한 많이, 모조리 기억하려고 한다. 이들처럼 기억을 단기 저장고에서 장기 저장고로 옮기지 못하는 경우. 바로 직전의 일만 잠시 기억하기 때문에 그들은 단지 순간만을 산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오늘 하루가 내게 주어진 시간 전부인 것이다.

 

“노 데이, 벗 투데이(No day, but Today)”

 

여기서 당연히, 뮤지컬 렌트의 그 유명한 대사, 내일은 없고, 나에겐 오직 오늘뿐이라는 문구가 기억이 나났다. 크리스틴에겐 오로지 매일 매일, 그 순간의 하루밖에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자신을 20대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 시절로부터 기억이 완전히 멈춰버린 여자가 매일 아침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모습이 생각보다 스무 살이나 더 늙어보인다는 것을 알았을 때, 지난 날을 송두리째 읽어버리고, 빼앗겼다는 것을 깨달을 때. 나는 나이를 먹은 기억이 없는데, 내 얼굴엔 잔주름이 있고, 쭈글쭈글해진 자신의 손을 보게 되면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내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동안 20년의 세월이 흘렀고, 내 침대 옆에 누워있는 누군지 모르는 남자가 나의 남편이라고 한다면? 그 막막하고 혼란스러운 감정들을 고스란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나는 극중 크리스틴이 되어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조차 모르는 그녀는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의지할 데라곤 남편 밖에. 그런데, 자신이 쓴 일기장엔 <남편을 믿지말라>.고 써 있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남자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고, 날 치료하기 위해 남편 몰래 만나는 의사에게서 엉뚱하게도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그 와중에 문득 문득 떠오르는 끔찍한 폭행의 기억. 분명 남편은 내가 교통사고로 인해 이렇게 됐다고 하는데, 자신은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의 폭행때문이었던 것 같다. 남편인 벤은 아들 애덤이 죽었다고 말하고, 친구 클레어는 애덤이 살아 있다고 말한다. 게다가 나는 분명 소설을 한 편 출간한 적이 있는데, 남편은 내가 글을 쓴 적이 없다고 한다.

 

과연 나는 누구를, 얼마나,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 걸까? 내 주변에 믿을 만한 사람이 있기는 한 걸까?
나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 나 자신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 걸까?

 

"나는 죽은 것 같다고 썼어요. 하지만 이건 뭐예요? 더 나쁘잖아요. 이건 죽어가는 거예요. 매일매일 죽는 거예요. 더 나아졌어야 하는데도 말이에요. 이런 꼴이 더 계속되는 건 상상할 수 없어요. 오늘 밤에도 자러 갈 테고, 내일 아침 눈뜨면 또 아무것도 알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어요. 모레도, 글피도 그럴 거고 영원히 그럴 거예요. 그런 건 상상할 수도 없어요. 난 그런 꼴 못봐요. 이건 사는 게 아니에요. 그저 목숨만 붙어 있는 거지. 과거도 기억하지 못하고 미래에 대한 계획도 없이 한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넘어가는 거예요. 짐슴과 다를 바 없어요. 가장 나쁜 것은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조차 모른다는 거예요.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고통이 적지 않을 거예요. 내가 아직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들 말이에요."

 

오늘 알게된 모든 사실은, 내일이 되면 또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말은 곧, 타인이 그녀의 기억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된다. 만약 누군가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그녀는 오늘 이전에 기억이 전혀 없으므로 누구든 자신에 관한 말을 하면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무섭지 않은가.

 

그녀는 아무도 믿을 수 없다. 남편도 믿을 수 없다. 나를 도와주겠다고 하던 의사도 믿을 수 없다. 그녀는 진실을 알고 싶다. 자신의 삶에 대한 의미를 알고 싶다. 여느 사람처럼 하루를 그 다음 날과 연결할 수 있기를 원하는 그녀는 필사적으로 일기장에 매달리고, 그러면서 점점 자신의 실체에 다가가게 된다. 그녀가 만나는 인물이 남편인 벤과 닥터 내시로 한정이 되어 있어, 단조롭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바로 그 부분이 이 작품만의 차별화가 된다. 그렇게 한정된 공간과 관계를 통해서 한 인물의 심리상태에 몰입할 수 있게 되고, 우리가 그녀가 처한 상황에 '공감'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작가는 영리하게도, 이 작품을 미스테리물을 넘어서서 스릴러물로 발전시킨다. 오로지 그녀의 정체와 숨겨진 기억에만 치중했다면 지루한 심리물에 그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표면적인 플롯 외에도 숨겨진 이야기들은 다채로운 해석이 가능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충격적인 반전에 이르는 순간 소름이 쫙 끼칠정도였으니,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그 긴장감이란 말할 것도 없다. 타인이 말하는 과거와 그녀의 진짜 과거, 그녀가 믿고 싶은 현재와 진짜처럼 보이는 현재가 씨실과 날줄처럼 교차되어 차곡차곡 쌓인다. 묘하게도 등장 인물도 적고, 공간도 한정되어 있고, 현재와 과거와 수시로 교차하는 이야기지만, 영화화되기에 이만큼 좋은 텍스트는 없다고 느껴진다. 아마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크리스틴이라는 매력적인 캐릭터 때문 일 것 이다. 그래서 곧 영화화된다는 소식이 더욱 반갑다. 

 

이 작품은 출간도 되기 전에 이미 리들리 스콧 감독의 스콧프리 프로덕션에 영화화 판권이 팔렸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었다. 2014년 공개 예정으로 로완 조페 감독 연출의 미스테리 스릴러 영화로 영국에서 제작 중이다.

 


로완 조페 감독은 영화 <미션>과 <킬링 필드>로 유명한 롤랑 조페 감독의 아들이며, 시나리오 작가로 경력을 쌓았던 인물이다. 영화 <28주후>, <아메리칸>의 각본, <브라이튼 룩>의 각본과 연출 맡았던 감독이고, 주연은 니콜 키드먼, 마크 스트롱 콜린 퍼스라고 한다. 감독, 주연과 포스터외에 아직은 아무것도 공개된 게 없지만, 포스터의 분위기는 책 만큼이나 기대감을 준다. 무엇보다 불안한 심리상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고 가야할 여주인공역에 니콜 키드먼이라니, 유리처럼 깨질 것 같은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보여주는데, 그녀만큼 절묘한 캐스팅이 또 있을까 싶다.  영화도 빨리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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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인간의 증명l증명 시리즈 3부작/모리무라 세이치 저/최고은 역/검은숲

  

 101.소울 케이지/혼다 테쓰야 저/한성례 역/씨엘북스

 

 102.사랑이 아팠던 날/심이준 저/라이온북스

 

  103.데드 심플/피터 제임스 저/김정은 역/살림출판사

 

 104.시나리오 마스터- 필름 스토리텔링의 건축학/데이비드 하워드 저/심산스쿨 역/한겨레출판

 

 105.천국의 수인/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저/김주원 역/문학동네

 

 106.셰프의 딸- 맛있고 심플한 삶, 코즈모폴리탄의 이야기/나카가와 히데코 저/마음산책

 

 107.작가가 작가에게- 글쓰기 전략 77/제임스 스콧 벨 저/한유주 역/정은문고

 

 108.쿠퍼 수집하기/폴 클리브 저/하현길 역/검은숲

 

 109.나프탈렌/백가흠 저/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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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9.유리고코로/누마타 마호카루 저/민경욱 역/서울문화사

 

 90.템테이션/더글라스 케네디 저/조동섭 역/밝은세상

 

 91.악녀를 위한 밤/존 버든 저/이진 역/비채

 

 92.그림, 눈물을 닦다- 위로하는 그림 읽기, 치유하는 삶 읽기/조이한 저/추수밭(청림출판)

 

 93.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른다/로테 하메르,쇠렌 하메르 저/안미란 역/폴라북스(현대문학)

 

 94.레오파드/요 네스뵈 저/노진선 역/비채

 

 95.658, 우연히/존 버든 저/이진 역/비채

 

 96.최소한의 사랑/전경린 저/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97.심플 플랜/스콧 스미스 저/조동섭 역/비채

 

 98.토로스 & 토르소/크레이그 맥도널드 저/황규영 역/북폴리오

 

 99.Story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로버트 맥키 저/고영범,이승민 역/민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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