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봄의 불확실성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민승남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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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한동안 나는 책을 읽을 수가 없었고 다시 글을 쓸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그건 그해 봄의 많은 불확실성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내가 아는 작가 중에 그런 체험을 하지 않은 이가 없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왜 평생 애도하며 사는 기분인지 알고 싶다. 그 감정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고 도무지 사라지려 하질 않는다.             p.19~20


2020년의 뉴욕, 불확실한 봄이었다. 팬데믹으로 인해 도시가 봉쇄되었고, 집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 규칙이었다. 날마다 이른 아침에 산책을 나가는 것이 거의 유일한 낙인 노년의 소설가에게도 바깥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러던 중 소설가의 지인이 부모님을 만나러 갔다가 도시가 봉쇄되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자, 집에 홀로 남은 앵무새를 돌봐달라는 부탁을 하게 된다. 지능이 매우 높고 사교적인 종의 앵무새라서 혼자 두어서는 안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원래 새를 돌봐 주기로 한 친구의 아들이 있었지만, 대학이 문을 닫고 친구들도 모두 뉴욕을 떠나자 낯선 아파트에 혼자 갇혀 있고 싶지 않았는지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고 한다. 


소설가는 이 일을 뜻밖의 행운으로 여겼다. 남에게 호의를 베푸는 일이라기보다, 적어도 하루의 일부를 다른 공간에서 보낼 구실이 생긴 것이니 말이다. 새의 이름은 유레카였고, 아주 작은 품종의 초록빛깔을 하고 있었는데, 어찌나 밝고 싱그러운지 열대 식물을 바라보는 것처럼 상쾌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덕분에 그 기이하고 불안했던 시기를 버틸 수 있게 해준다. 매일 아침 기대에 부풀어 눈을 뜰 수 있었던 건, 기괴하리만큼 인적 없는 거리를 몇 블록 걸어가서 자신의 보살핌을 기다리는 깃털 달린 친구를 만나는 단순한 허드렛일 덕분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집을 오가며 유레카를 돌보던 소설가는 자신의 집을 자원봉사자로 뉴욕에 온 의사에게 빌려주고, 아예 그 아파트에 머무르며 앵무새를 돌보기로 한다다. 그렇게 소설가는 앵무새 유레카와 함께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며 잔잔한 기쁨을 느끼지만, 먼저 앵무새를 돌보다가 사라져 버린 대학생이 갑자기 다시 나타나면서 원치 않은 동거 생활이 시작된다. 





잘못된 생각. 심리학자들은 그걸 중단시킬 수 있는 방법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정신 건강을 위해선 중단시켜야 한다. 작가에겐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작가에게 강박적인 되새김질은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상상력은 어두운 생각을 따라 어두운 곳으로 가야만 하며, 작가는 상상력에게, 멈춰, 거긴 가지 마, 하고 말할 수가 없다. 타인들의 삶을, 그들이 어떤 일들을 겪는지를 상상하는 것, 그게 작가의 일이 아닐까?                p.195


우리는 일상의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살아 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루가 지속된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다음에는 이미 늦었을 때가 많다. 팬데믹으로 인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왔던 많은 일상들이 대부분 사라져버렸고, 불과 몇 달 사이에 도시의 모든 것이 바뀌었으며, 그 혼란의 한복판에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평범한 일상이 건네주는 위안의 소중함을 말이다. 당시 국내에선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작되었고, 해외의 경우 도시 전체가 봉쇄되기도 했다. 외출을 하지 못하거나 타인과의 교류가 줄어든 사람들이 답답함과 우울함을 느끼며 코로나 블루를 호소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지긋지긋했던 팬데믹으로부터 벗어나 다시 일상이 찾아왔다. 그리고 이렇게 팬데믹 시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읽고 있자니, 새삼 오늘의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노년의 소설가와 너무 똑똑한 앵무새, 그리고 분노조절장애를 가지고 있는 대학생이 함께 지내며 이런 저런 일들을 겪으며 서로 연대감을 쌓아가는 이 이야기는 잔잔하고, 담백하게 펼쳐진다. 친절했던 이웃이 예민해져 날카로운 말을 내뱉게 되고, 산책 나온 개들조차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그 해 봄,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걷잡을 수 없이 퍼지고, 당장 내일 어떻게 될 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세상은 소설 속 허구의 세계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겪은 세계였다. 시그리드 누네즈 특유의 건조하면서 온기 있는 문체와 독특한 유머 감각으로 무장한 이 작품은 문학에 대한 각종 비평과 사회적 트라우마 속에서 지켜내는 일상의 작은 나날들을 보여준다. 드라마틱한 서사는 없지만 극중 소설가의 머릿속에 두서없이 떠오르는 단편적인 기억들이 의식의 리듬을 타고 흘러가는 것이 이 작품의 진짜 매력이다. 과거와 현재, 문학과 예술, 인생, 그리고 상실에 대한 사유를 통해 우리의 평온한 일상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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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진 산정에서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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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주는 양쪽 다 한 번씩인데, 고류다케, 가시마야리가타케 각각 왕복한 건 합쳐서 열 번은 넘지 싶어.

─그런데 다음에 또 하치미네기렛토에 가도 돼? 아무리 너라도 아직 올라보지 않은 산이 있을 거 아냐.

─응. 일본 100대 명산에서만도 아직 스무 곳이 안 될 수도.

─그럼 왜?

─좋아해.

덜컹했다. 좋아하는 대상이 나인 것도 아닌데. 부럽기도 했다. 좋아한다고 가슴을 펴고 말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p.60


올해 예순다섯 살인 다니자키 아야코는 마흔 두 살인 마미야 마미코와 함께 산에 오른다. 부모 자식 정도로 나이 차이가 나는데, 가족도, 친척도 아닌, 알고 지낸 지 아직 이 년도 되지 않는 사이로 함께 등산을 하게 된 것이다. 아야코는 10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카페를 홀로 운영하고 있다. '고류다케'는 남편이 생전에 가장 좋아하던 산으로, 함께 오자고 약속했었는데 결국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가이드가 동행하는 등산을 위해 산악 가이드를 신청했고, 가이드인 야마네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산악 사진가이기도 하다. 남편이 생전에 그의 사진에 반해 현재도 카페에 그가 찍은 사진이 있다. 산을 좋아하던 남편이 그 중에서도 왜 고류다케를 좋아했을지 이유가 궁금했던 아야코는 산에 직접 올라서야 그 이유를 깨닫게 된다. 


대기업에 다니는 회사원 마미코는 대학시절 산악부 출신이다. 산악가이드인 야마네와는 동창 사이로 같은 산악부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산과의 거리가 점점 멀어졌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러던 중 아야코의 카페에서 사진을 보게 된 것이다. 산악사진가가 된 야마네의 사진을 보며 자신이 믿을 수 없었던 미래를 손에 넣었구나 싶어 놀란다. 가이드 신청은 아야코가 직접 했기에 마미코는 산악 당일에 와서야 가이드가 야마네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 두 사람은 서로 아는 척 하지 않은 채로 등산이 시작된다. 꿈을 포기하고 현실과 타협한 사람과 기어코 자신의 꿈을 이루어낸 사람의 마음 속은 복잡할 수밖에 없다. 남편을 생각하며 후회와 회한에 사로잡힌 아야코와 산악부 동기인 마미코와 야마네, 세 사람의 등반은 무사히 잘 진행될까.





살아갈 수 있을까? 문득 그런 불안이 스친 순간, 숨을 쉬는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서 과호흡을 일으키고 말았어. 다행히 혼자 조치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밖에 나가야겠어. 신선한 공기를 마셔야만 해.

... 어쩐지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온 듯한 기분이 들었어. 하지만 장거리 이동은 못 해. 곧장 줄이 툭 끊어지려 하더라. 그래도 나이가 들면 좋은 의미에서 이 줄이 뚝 끊어지지는 않는 법이잖아. 가느다랗게 이어져 있는 줄이 속삭였어. 낮은 곳이어도 되지 않을까?                   p.250~251


미나토 가나에가 산을 배경으로 소설을 쓴다고 하면 누군가 다치고, 죽고, 속이고, 배신하는 미스터리 장르를 예상하겠지만, 이 작품에선 아무도 다치지 않고 타인의 선의에 기대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여자들의 등산일기>에 이어 등산을 소재로 여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힐링 드라마를 만날 수 있다. 각자의 근심과 걱정을 안은 채 산으로 향하는 이 이야기는 일본에서 세 시즌에 걸쳐 TV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네 개의 에피소드가 각각 완결된 단편인 연작소설집으로 일본의 다양한 명산들을 글로 만나는 재미도 일품이다. 


남편이 생전에 가장 좋아하던 산에 올라 후회와 회한에 사로잡힌 60대 여성, 대학시절 산악부였지만 현실과 타협해 사느라 잊고 살았던 산을 오랜만에 다시 오른 40대 여성, 성악과 피아노, 바이올린이라는 각기 다른 전공을 가졌지만 연습 메이트로 만나 함께 산에 오르게 된 음악대학 1학년 친구들, 엄마를 설득하기 위해 산행을 계획한 딸과 일찍 남편과 사별한 뒤 딸을 혼자 키워온 엄마의 모녀 여행 등 각자 나이도, 상황도 다른 여성들이 저마다의 고민과 사정으로 산에 오른다. 바위투성이의 길을 다 올라가면 단숨에 시야가 탁 트이고, 하늘이 손에 닿을 것만 같다. 은하수가 뚜렷해 밤하늘이 아니라 우주가 펼쳐진 것 같은 기분이 곳도 있다. '인생에 ‘등산’이라는 두 글자가 없는 사람도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분명 산을 좋아하게 되리라 기대'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싱그러움과 무해한 자연의 힘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지친 일상을 위로해주며 재생과 회복을 선사해주는 이야기가 필요한 당신에게 이 작품을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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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일록 작전
필립 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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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밤에 침대에서 생각했던 것과 아주 연관이 없지는 않은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마치 내가 쓴 소설을 읽는 것 같다던 아하론의 말이 씨앗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어쨌든 엄청나게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다시 확인된 것을 내가 직업적으로 너무나 잘 아는 정신적인 사건으로 변환하려는 또 하나의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주관적인 시도였다... 이들이 모두 활자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나를 풍자하듯 닮은 인물 한 명으로 재구성된 거야. 다시 말해서 이것이 할시온 때문도 아니고 꿈도 아니라면, 틀림없이 문학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는 뜻이다. 내면의 삶보다 만 배나 더 터무니없는 외면의 삶은 있을 수 없다는 듯이.             p.39


어느 날 필립 로스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자신을 사칭하며 돌아다니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자신은 뉴욕에 있었는데, 자신을 사칭하는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공포의 이반이라고 알려진 존 데미야뉴크의 재판을 방청하고, ‘유대인은 유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정치적 주장을 공표하는 등 각종 파격적인 행보를 하고 있다고 했다. 필립 로스는 이스라엘로 가서 사칭범을 직접 대면하기로 하고, 그가 묶고 있다는 호텔로 찾아간다. 그 순간까지 결코 그의 존재를 진심으로 믿지 않았던 필립 로스는 막상 사칭범과 마주하자 충격에 휩싸인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그는 이목구비가 자신보다 조금 더 보기 좋은 미남 버전에 가까웠는데, 그는 호들갑을 떨며 진짜 필립 로스를 만난 것을 감격스러워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당신의 가장 열성적인 팬이자, 당신의 책을 읽고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며, '사실 당신은 그냥 도구일 뿐'이라고 하는데, 대체 그의 정체는 뭘까. 


필립 로스는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을 여러 편 집필했는데, 이번 작품에선 그중 가장 미스터리한 방식으로 등장한다. 가짜 자신에 대한 소식을 들은 뒤 확인을 위해 연락처를 알아내 통화를 할 때도, 사칭범은 자신을 '필립 로스'라고 소개한다. 정말로 그 작가계요? <포트노이의 불평>의 작가? 라고 필립 로스가 되묻자, 사칭범은 그래요, 그래요. 누구십니까? 라고 대꾸한다. 그래서 통화하는 내내 진짜 필립 로스는 아무렇게나 고른 이름을 붙여 자신이 기자인 척 그와 통화를 한다. '수화기 저편에서 놈은 내 행세를 하고, 나는 이쪽에서 내가 아닌 척한다는 사실이 뜻밖에도 사육제처럼 사람을 들뜨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미스터리로 시작했던 이 작품은 점차 첩보소설로 전개된다. 사칭범을 대면하기 위해 방문한 예루살렘의 상황이 나치 집권기의 수용소 간수로 의심받는 인물의 재판이 한창이고, 팔레스타인인의 봉기는 점차 격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와 나란히 당신의 목을 매달 거요. 물론, 그들이 당신을 또 다른 필립 로스로 착각한다면, 당신은 조금이나마 희망을 품을 수 있을 거요. 그 필립 로스는 유럽 출신 유대인들이 훔친 땅에서 물러나 유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유럽 디아스포라가 그들에게 마땅하다고 주장했으니까. 그 필립 로스는 그들의 친구, 그들의 동맹, 그들의 유대인 영웅이었소. 그리고 그 필립 로스가 당신의 유일한 희망이오. 당신이 괴물로 생각하는 그자가 사실은 당신의 구원이라고. 그 사기꾼이 곧 당신의 무고함이오. 재판에서 그자 행세를 하면서, 온갖 속임수를 동원해 당신들 두 사람이 사실은 하나라고 믿게 만들어야 하오.                  p.502~503


<에브리맨>, <휴먼 스테인>에 이어 국내에 세 번째로 소개되는 필립 로스의 펜/포크너상 수상작이다. 극중 ‘필립 로스’가 자신의 사칭범과 만나면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과 그 이면의 첩보작전에 휘말리게 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묵직한 분량의 작품을 읽다 보면 누가 진짜이고 가짜인지, 무엇이 현실이고 허구인지 점점 혼란스러워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필립 로스를 사칭하는 수수께끼의 인물은 스스로 반유대주의와 싸우는 투사로 점점 파격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필립 로스의 친척은 제2차 세계대전 때 겪은 폭력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 것으로 나오며, 그 와중에 필립 로스는 이스라엘의 정치적 분쟁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이 작품은 필립 로스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에 관해 정면으로 다룬 최초이자 마지막 소설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묵직한 분량만큼이나 심도 있는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진다. 유대인은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억압받은 민족 혹은 소수자는 어떤 미래로 나아가야 하는가. 또한 특정한 민족 혹은 소수자 집단이 항상 피해자이거나 가해자일 수 없는 세계의 복잡성과 유대인의 정체성에 관한 깊이 있는 사유 또한 작품의 전면에 깔려 있다. 특히나 흥미로운 것은 현실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애매하게 만들어 소설 형식을 뛰어넘는 포스트모던 문학으로서의 매력을 지닌다는 것이다. 서두에서 화자는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책을 썼음을 밝히지만, 마지막 장에서 '이 책은 허구다'라고 쓰여있기 때문에 이 작품은 실제로 작가가 전부 실제로 겪은 일일 수도, 혹은 전부 허구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현실의 경계를 지움으로써 문학적으로는 더욱 흥미진진하고 매력적인 작품이 되었다. 오래 전에 쓰인 작품이지만, 역사의 폭력은 계속되고 피해자와 가해자는 수시로 뒤바뀌고 있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많은 이야기였다. 거장이 전성기에 남긴 압도적인 이야기를 경험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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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의 기쁨과 슬픔 - 인간이 꿈꾼 가장 완벽한 낙원에 대하여
올리비아 랭 지음, 허진 옮김 / 어크로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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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낙원을 잃어버렸고, 또 그런 경험이 없다 해도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이야기는 울림을 갖는다. 우리 대부분은 세상이 너무나 새롭고 놀랄 일이 가득한 어린이의 인식이라는 낙원을, 또 몸 자체가 정원이 되는 첫사랑의 달콤하고 풍성한 낙원을 잃어버리거나, 포기하거나, 잊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세속적인 에덴동산 이야기가 문학에 그토록 많은지도 모른다. 예상치 못하게 열렸다가 다시 잠기는 정원, 우연히 발견했지만 두번 다시 찾을 수 없는 낙원.              p.53~54



올리비아 랭은 마흔 살에 뒤늦게 집을 살 때까지 줄곧 세 들어 살았고, 야외 공간이 있는 아파트에 산 적은 드물었다. 그러다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곧 결혼했다. 애초에 정원 가꾸기라는 공동의 취미 때문에 친구가 되었고, 그의 은퇴 후 정원을 가꿀 수 있는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그들이 서퍽의 작은 마을에 도착하고 얼마 뒤 코로나로 인해 영국에서 봉쇄 조치가 실시된다. 거의 모든 사람이 집에 갇혔고, 야외 운동은 하루에 한 시간만 허락되면서 너무도 빠르게 움직이던 세상이 딱 멈추게 된 것이다. 


그 시기 동안 올리비아 랭은 집의 오래된 정원에 매료되어, 옛 모습을 복원하고, 식물을 살리기 위해 애쓴다. 전염병의 공포가 커질수록, 정원을 드나들며 위안을 얻었던 것이다. 실제로 전 세계 사람들은 팬데믹 기간 동안 식물과 열병 같은 사랑에 빠졌다. 정원 가꾸기는 발을 땅에 붙이게 하고, 마음을 달래고, 유용하고,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것이었기에 사람들 모두가 갇혀버린 현재의 순간에 순응하는 방법이 되어준 것이다. 상상할 수 없는 재난의 문턱에서 시간이 멈춰버린 그때, 씨앗이 펴지고, 싹이 움트고, 나팔 수선화가 흙을 밀며 올라오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놓이고, 보장되지 않은 미래를 기다릴 수 있게 되는 희망이 생기게 된다. 올리비아 랭의 새로운 집에는 유명 정원사 마크 루머리가 디자인한 오래된 정원이 있었기에, 정원을 복원하는 동시에 그것이 역사와 어떻게 교차되는지 추적하기로 한다. '모든 식물은 공간과 시간의 여행자이므로 아무리 작은 정원도 역사와 교차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그렇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싹을 틔우거나 이상하게 성장할 수 있는 요소들이 파묻혀 있던 정원의 비밀은 세기를 거스르는 여행으로 확장된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짐을 진 채 어른이 된다. 그 짐의 일부는 개인적이고 개별적이고 독특할 수밖에 없지만 일부는 정치적으로 분류하는 것이 더 적절하고, 같은 환경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역사와 관련이 있다. 어른이 때로 방사능 물질처럼 위험한 자신의 과거를 처리하고 관리하는 방법은 무척 다양하다. 정원을 가꾸는 행위에서 위안을 찾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의 경험 덕분에 안전하고, 야생적이고, 어지럽고, 풍요롭고, 무엇보다도 공개되지 않은 공간에 대한 갈망을, 끈질기게 계속되는 필요성을 느꼈다. 나는 물론 집을 갖고 싶었지만 내게 정말 필요한 것은 정원이었다.                p.236~237


'제2의 리베카 솔닛'이라 불리는 올리비아 랭의 신작이다. <외로운 도시>, <이상한 날씨>, <에브리바디>까지 차근차근 읽어왔는데, 매번 인문학적인 사유와 빛나는 통찰력으로 정말 좋아하는 작가이다. 개인의 고독을 사회적 소외로 확장한 <외로운 도시>, 혼란스러운 시대에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탐색한 <이상한 날씨>, 그리고 질병과 성, 저항과 감옥 등 몸의 여러 다른 측면들을 살펴보았던 <에브리바디> 모두 너무 좋았던 기억이 있다. 특히나 이번 신작은 '정원'을 다룬다고 해서 더 기대가 되었다. 나 역시 나만의 정원을 가지는 것이 오랜 로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심에서 단독주택이 아닌 이상 정원을 만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서재가 실내 정원처럼 되어버렸는데, 나름 온실도 있고, 천장까지 닿는 식물들도 몇 있어서 정원이나 다름없는 공간이긴 하다. 이렇게 식물이 주는 위안에 대해 깊이 공감하는 독자로서, 올리비아 랭의 정원 이야기는 기대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팬데믹, 브렉시트, 극우 세력의 부상 등 시대의 어두운 분위기와 새어머니의 죽음 같은 개인적 문제에 짓눌려 있던 올리비아 랭은 정원에 탐닉하며 자신만의 낙원을 만들어간다. 또한 정원에서 존 밀턴의 《실낙원》을 탐독하며 우리가 잃어버린 낙원에 대해 이야기한다. 《실낙원》을 시작으로 윌리엄 모리스의 《에코토피아 뉴스》, 데릭 저먼의 퀴어 유토피아 등 예술, 역사, 사회사상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지는데, 정원을 돌보는 방법에서 ‘정원’이라는 개념 그 자체로 확장되는 사유가 정말 흥미진진했다. 대정원의 매끄러운 아름다움에 어떤 희생이 담겨 있는지도 놀라웠다. 18세기 영국에서 진행된 대정원화 작업에서는 상류 지배 계층을 위해 오소길, 농장, 때로는 마을 전체를 옮기기도 했다니 말이다. 농지를 개선한다는 명목하에 진행된 인클로저 역시 대정원화와 마찬가지로 자연을 대대적으로 개조하는 작업이었다고 한다. 이렇듯 '숨겨진 비용, 권력 및 배제와의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가 정원의 한 측면이라고 생각해보면, 정원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 개인의 것과 공공의 것의 경계가 희미해진 공간에 대한 올리비아 랭의 사유는 혐오와 배제, 기후위기와 파국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희망을 잃지 말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예쁜 책표지만큼이나, 눈부시게 아름다운 책이었다. 자, 올리비아 랭의 아주 특별한 정원으로 당신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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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비와 베끼기 - 자기만의 현재에 도달하는 글쓰기에 관하여
아일린 마일스 지음, 송섬별 옮김 / 디플롯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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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학이 낭비된 시간이며, 좋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도덕적 프로젝트가 아니라 그저 지극히 심오한 시간 낭비일 뿐이다. 나는 모든 방면에서 그 모험을 샅샅이 탐구했다. 우리 시대의 위대한 모험을.              p.30



일흔 살이 넘은 지금까지도 '이 시대 희귀한 컬트적 존재이자 록스타 시인'으로 불리는 아일린 마일스의 책이 국내에 처음 출간되었다. 1992년에 노동계급 퀴어예술가로서 미국 대선에 출마해 화제가 되었었는데, 당시 아일린 마일스의 출마에 응답하는 헌시 〈나는 이런 대통령을 원한다I Want a President〉(조이 레너드)는 삼십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이번에 출간된 책에서 원문 도판과 번역을 만나볼 수 있다. 이 책은 예일대학교에서 제정한 윈덤캠벨문학상의 시상식 기조연설을 단행본으로 펴내는 시리즈 '나는 왜 쓰는가'의 세 번째 책이다. 아일린 마일스는 자신이 사십 년 넘도록 살아온 뉴욕의 아파트 이야기로 말문을 연다. 지극히 사사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지만, 매우 시적인 문장으로 사회적이고, 문학적인 사유를 보여주는 글이었다. 그는 '쓰기'란 삶에서 겪는 경험들을 '베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핵심은 베끼기copy다. 그는 글쓰기를 삶을 획기적으로 바꿔줄 도구가 아니라, 끝없이 주문을 읊는 하나의 수행으로 지속한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베끼고 그 허위를 폭로하는 일이야말로 문학적 구원의 길이 된다고 말이다. 





나는 지금까지 쓴 모든 시를 기억한다. 암송할 수는 없지만 그것들은 파도처럼 돌아온다. 모두 내 뇌의 일부니까. 그것들이 내 뇌를 이룬다. 내 뇌는 안팎이 뒤집혀 있다. 시가 나를 증명한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조금도 알 바가 아니다. 일전에 시인 애덤 피츠제럴드가 망각에 관한 이야기를 했는데, 아마 루이스 하이드식 이야기였던 것 같다. 망각은 잃어버리는 것처럼 구체적인 게르만적인 것, 그리고 덮이거나 덧씌워지거나 보이지 않게 되는, 사라지는 것에 더 가까운 그리스적인 것으로 나뉜다.                p.92



이 책의 원제는 "For Now"이다. 아일린 마일스는 오랫동안 '중요한 것은 이곳에 존재하는 것, 현재에 있는 것'이라는 개념을 뒷받침하는 온갖 철학으로 무장해왔다. 거의 한평생 살아온 뉴욕의 집을 둘러싼 투쟁의 과정 속에서, 노동계급 퀴어예술가로서 정치적, 미학적 최전선의 글쓰기를 온몸으로 밀고나간 그의 '현재'를 만날 수 있는 책이었다. '이곳에 있고 싶다,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글을 쓰고, 읽힐수록 오롯이 하나의 사실이 되어 간다는 것. 아일린 마일스는 뉴욕의 한 아파트에서 사십 이 년째 살고 있고, 삶의 어지간한 일들은 바로 그곳에서 일어났다. 시간과 장소의 의미가, 현재와 세계가 되어 가는 과정을 느낄 수 있는 글이었다. 


특히나 '나는 문학이 낭비된 시간이며, 좋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는 문장에 매우 인상적이었다. '문학은 도덕적 프로젝트가 아니라 그저 지극히 심오한 시간 낭비일 뿐'이라며, 그 모험을 샅샅이 탐구했다는 말이 그의 문학 세계를 이루는 근간이기도 할 것이다. 자본으로 환원되지 않는, 순전한 시간 낭비로서의 글쓰기라니... 아일린 마일스의 글쓰기 스타일을 제대로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었다. 짧은 분량의 책이지만, 어려운 단어로 쓰인 것도 아니지만, 대단히 밀도 있는 글이라 충분히 시간을 들여 읽어야 했다. 책 전체가 한 편의 시처럼 읽히기도 하는 그의 글은 결코 수월하게 읽히진 않지만, 삶과 문학 사이의 복잡다단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어 매우 인상적이었다. 글쓰기에 관한 아주 독창적인 시적 통찰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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