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약국 현대문학 핀 시리즈 에세이 1
김희선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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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도서관 앞으로 차를 몰고 지나갈 때, 나는 거대한 전면 유리 앞쪽에서 몇 개의 그림자가 일렁이며 움직이는 걸 보았다. 신호를 기다리며 서 있는 동안 그 묘한 광경을 지켜보았고, 마침내 그게 원숭이들이라는 걸 알았다. 사실, 세상의 수많은 도서관이 아무도 모르게 원숭이를 키운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것도 일종의 비밀인지 모르지만, 알고 보면 원숭이들은 책을 좋아한다.... 어디선가 들은 얘긴데, 원숭이들에게 책 정리를 처음 맡긴 곳은 중국의 오래된 도서관이었다.          p.86

 

현대문학의 '핀 시리즈'를 시와 소설에 이어 에세이로도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최근 <빛과 영원의 시계방>이라는 흥미로운 작품으로 만났던 김희선 작가의 <밤의 약국>이 첫 번째 작품이다. 김희선 작가는 핀 시리즈 소설로도 만난 적이 있는데, 시리즈 스물아홉 번째 작품으로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가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팔곡마을의 노인들과 이들을 찾아 나선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에 만연한 노인 혐오에 대해 이야기했던 작품이다. 사실 김희선 작가를 처음 만났던 건 아주 오래 전 <라면의 황제>라는 소설집이었다. 당시에 그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세상을 둘러보면 곳곳에 숨어 있는 기이한 이야기들의 집합체 같다고 생각했었다. 다소 황당하고, 생뚱맞아 보이는 소재로 세상에 대해 시시콜콜 오지랖을 펼치는 작가의 이야기는 당혹스러웠지만 유쾌했고, 어이없었지만 재미있었던 기억이 난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김희선 작가가 낮엔 약사로, 밤엔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다는 글을 보고 그런 독특한 이력이 특유의 상상력과 허구와 실재가 뒤섞인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까 했었다. 이번에 만난 작가의 에세이는 기존 작품들을 통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라 더 좋았던 것 같다. 작가가 그려내는 따뜻한 시선으로 빛을 밝히는 밤의 약국 이야기는 약사가 아픈 사람에게 약을 처방해주듯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우리 동네에도 구불구불한 골목 한 켠에 할머니 약사 한 분이 운영하는 약국이 있다. 근처에 있던 편의점이 문을 닫고 나자, 밤이 되면 어두운 골목을 유일하게 비춰 주는 따스한 존재가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실제 김희선 작가가 약사로 근무하는 약국도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처음 만든 빵은 옥수숫가루에 소금을 조금 넣어 구운 진짜 시골식 빵이었는데, 집 밖에 불을 피워놓고 널빤지 위나 집 지을 때 잘라 쓰고 버린 나무토막의 한쪽 끝에 올려놓고 구운 것이었다."
어려서 처음 본 <월든>의 이 문장을, 난 마음이 허전할 때마다 찾아 읽곤 했다. 마치 페이지 어딘가에 무형의 옥수수빵 혹은 빵의 영혼 같은 게 있어서, 책을 펼치기만 하면 그것을 들이마실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하여 내 안으로 들어온 빵의 영혼이 마음을 채워주고 그 따뜻하고 부드러운 풍미가 구석구석 퍼져나가 몸 전체를 데워주기라도 할 것처럼.            p.145

 

인적이 드문 길모퉁이에 홀로 불을 밝히고 선 가게가 있다면, 안에서 새어 나오는 빛 때문에 어두운 길을 환하게 비춰주는 등불처럼 느껴질 것이다. 물론 벽과 유리로 둘러싸인 내부만 따뜻해 보이기 때문에, 바깥에서 바라볼 때 느껴지는 감정은 소외감과 고독감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위로와 희망의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길 잃은 사람에게는 등대 같은 존재가 되어 주고, 아픈 사람에게는 편한 밤을 선사하는 약이 되어 주기도 하고, 갈 곳 없어 방황하던 사람에게는 한 줌의 휴식 같은 공간이 되어주기도 한다. 실제로 밤에 불이라곤 다 꺼진 쓸쓸한 거리에서 혼자 빛을 밝히고 있는 약국이 어찌나 등대 같았던지, 한때 나라에선 약국마다 문 앞에 '청소년 지킴이 시설'이라는 작은 표지판을 붙이게 한 적도 있다고 하니 말이다.

 

한때 연금술에 관한 한 거의 전문가급의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는 작가의 고백을 시작으로 기차역에 살던 꿩이 '역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게 되었던 이야기, 조제실 옆 책장에 '독버섯 도감'을 갖다 놓았던 이유, 말하는 앵무새 인형과 할머니, 죽은 돌고래의 꿈, 둥지에서 떨어진 까치를 구조했던 일, 함께 지내고 있는 반려 동물 거북의 하루, 박스맨이라는 도시 전설 등등... 사라져가는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싶다는 말처럼 세상의 구석구석들을 두루 살펴보고, 어루만져주는 다정한 글들이 이어진다. 특히나 마음에 들었던 글은 '빵의 이데아에 관하여'라는 글이었는데, 빵이 주는 온기와 영혼에 한 번 새겨진 것은 영원히 잊히지 않는다는 말에 너무도 공감했기 때문이다. 빵을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 괜스레 감정이입을 하게 되는 건, 세상의 모든 빵덕후들에게는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르겠다. 에세이는 그저 매일같이 사는 게 바빠서 무심코 지나치거나, 뭐 그런 걸 궁금해하냐고 무시하거나, 못 본 척 지나치거나, 아는 것처럼 넘어가는 경우가 다반사인 이야기들을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이어질 핀 시리즈 에세이 선에서는 또 어떤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을지 기대가 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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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하는 언어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언어는 어떻게 창조되고 진화했는가
모텐 H. 크리스티안센.닉 채터 지음, 이혜경 옮김 / 웨일북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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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놀라운 재주의 비밀은 누구나 발견하기 쉬운 곳에 숨겨져 있다. 즉 우리는 평생에 걸쳐 언어 기술을 사용하고 다듬는 일에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바이올린으로 곡 하나를 연습할수록, 테니스 백핸드 훈련을 반복할수록, 또는 곧 발표할 프레젠테이션을 검토할수록 실력이 나아지는 것처럼 우리의 언어 기술도 매일 반복해서 연습할수록 개선된다. 우리 대부분은 깨어 있는 동안 엄청난 양의 시간을 언어에 빠져들어 보낸다.           p.63

 

지구상의 생명체 중에서 오직 인간만이 언어를 가지고 있다. 인간을 다른 생명체와 구분짓는 가장 큰 차이점 중의 하나가 바로 언어를 사용해서 의사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언어가 있었기에 인간은 지구를 지배하고, 진화의 진로를 변화시켰다. 그렇다면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인 언어는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을까? 왜 침팬지는 말을 하지 못하는가? 기계는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가? 왜 우리는 모두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가? 궁금해진다.  언어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지만, 여전히 언어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는 문제는 엄청난 난제이다.

 

만약 불가사의한 바이러스로 인간이 더 이상 언어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고 상상해보자.. 현대 문명은 급속히 무정부 상태로 전락하고, 시민들은 정보 공백 상태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서로 협력하지도, 심지어는 논리적 판단도 내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우리가 지금까지 언어에 대해 안다고 생각해 온 거의 모든 지식을 낱낱이 해부해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혁명적 관점을 제시한다. 인지과학자이자 언어과학 분야를 선도하는 모텐 크리스티안센과 닉 채터는 인류의 언어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부터 시작해, 의사소통은 어떻게 이뤄져 왔는지, 믿을 수 없이 방대한 언어의 발전 과정을 차곡차곡 짚어가며 그 동안 잘못 전해져 온 언어의 기원에 대해서 제대로 살펴본다.

 

 

 

<종의 기원>의 마지막 대목에서 찰스 다윈은 자연선택의 놀라운 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사색적인 독백을 남긴다. "시작은 너무도 단순했다. 하지만 바로 그곳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경이로운 형태들이 끝도 없이 진화되어 나왔고, 지금도 진화하는 중이다." 이는 생명 유기체의 진화를 두고 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가장 아름다운 형태들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라는 다윈의 고무적인 구절은 언어의 문화적 진화에도 정확히 그대로 적용된다.          p.332

 

이 책의 두 저자는 언어는 체계적인 문법 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우연의 결과물이며 즉흥적으로 행하는 제스처 게임과도 같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언어를 제스처 게임으로, 즉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는 협력 게임으로 보기 위해서는 언어에 대한 기존 관념을 비틀고, 관점을 전환해야 한다. 의사소통의 본질과 관련해 한 세기 이상 지속되어 온 오래된 사고방식을 완전히 뿌리 뽑아야 한다. 언어가 '그 순간의 필요가 이룬 서툴고 무질서한 산물'이라는 것이 대단히 흥미로웠다. 이에 대한 근거로 이 책은 다양한 사고실험과 사례들, 그리고 연구 결과를 제시하며 독자들을 설득시킨다. 언어가 유전자나 뇌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며, 생물학적인 진화가 아니라는 것은 고정불변의 법칙으로 자리 잡았던 “언어는 체계적인 문법을 바탕으로 진화되어 왔다”라는 연구 결과들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어서 더 흥미진진했다.

 

아이들은 왜 별 노력 없이도 언어를 쉽게 습득하는 걸까. 미취학 아동은 하구에 열 개 이상씩 새로운 단어의 의미를 습득하며, 이 단어들을 활용해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의미를 잘 이해한다.  아이들은 이 단어들을 사용해 좋거나 싫고, 맞거나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의견을 표현한다. 대체 아이들은 어떻게 이 단어들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걸까.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 또한 아주 재미있는데, 이 책은 이를 제스처 게임으로 풀어 나간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아무도 언어를 설계하지 않았다는 것. 언어의 복잡성과 질서는 무수한 언어적 제스처 게임이 빚어내는 혼돈 가운데서 출현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야말로 넋을 놓게 할 정도로 놀라운 발견이다. <이기적 유전자>를 쓴 리처드 도킨슨이 이 책을 왜 강력 추천했는지 이해가 될 만큼 흥미로운 책이었다. 리처드 도킨스는 언어의 기원이 진화생물학자들에게도 아직 3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고 하며, 크리스티안센과 채터가 이 문제를 놀랍도록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의사소통은 모든 종에 걸쳐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일 수 있지만, 언어는 인간에게만 나타나는 고유한 특징이다. 우리는 구어와 수어를 통해서건, 촉각 언어를 통해서건 간에 언어적 제스처 게임을 벌일 수 있다. 이는 우리에게 내재된, 선천적인 소통의 욕구가 언어의 근본적인 유연성과 결합할 수 있었던 덕분이다. 138억 년 전부터 시작된 언어의 기원에 대한 경이로운 여정이 궁금하다면, 언어를 통한 인류의 발자취를 짚어보고 싶다면, 이 책을 통해 언어의 기원을 둘러싼 비밀을 만나 보자. 왜 언어가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인지 완벽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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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작별
치넨 미키토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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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의사는, 너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내 환각이라고....."
─아마 그 말이 옳을 거야. 나는..... 네 뇌가 만들어낸 환상이야.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너는 가이토야!"
다케시는 윗몸을 벌떡 일으키고 왼손을 얼굴 앞으로 가져왔다. 가이토와 마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이토는 낮게 웃었다.
─내 영혼이 네 왼손에 깃들었다고? 오컬트 같은 얘기네.       p.21

 

다케시와 가이토는 똑같은 얼굴을 한 쌍둥이 형제였다. 줄곧 함께 자랐고, 서로에게 의지했던 분신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4개월 전, 다케시는 형 가이토를 오토바이 뒷자리에 태우고 산길을 달리던 중이었다. 산 정상의 전망대에 가서 할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꼽친구라 셋이 늘 어울렸던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형과 두 사람이 사귀는 중이라는 걸 우연히 알게 된 거였다. 그런데 길고양이를 피하려다 핸들을 놓쳐 가드레일 바깥쪽, 절벽으로 형이 떨어지고 만다. 마지막까지 형의 손을 붙잡고 있었던 기억이 나지만, 결국 형이 손을 먼저 놓았고 그대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얼마 뒤, 형 가이토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바로 자신의 왼손에서.

 

가이토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왼손이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움직였기에, 다케시는 형이 자신의 왼손에 깃들었다고 생각하지만, 그걸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병원에서는 ‘에일리언 핸드 신드롬’이라는 무슨 SF영화 제목 같은 이름의 질환이라고 진단했고, 뇌질환이나 정신질환을 계기로 한쪽 팔이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병이라고 설명한다. 결국 억지로 병원에 입원시키려는 가족들을 피해 가출을 한 다케시는 도쿄에 도착하는데, 우연히 살인 사건 현장과 마주하게 되고 용의자가 되어 도망치는 신세가 되고 만다. 다케시와 가이토는 살인사건 용의자라는 누명을 벗기 위해 범인을 찾기로 하는데, 이성적이고 판단력이 뛰어난 가이토와 권투를 해서 운동신경이 좋은 다케시는 서로 협력하며 도피행을 시작하지만 현실이 만만치가 않다. '사파이어'라 불리는 마약과 수수께끼의 여성, 뒷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조직과 그 조직을 뒤쫓는 형사까지 다케시와 가이토 형제에게 계속해서 위기가 닥쳐온다.

 

 

 

이 거리에도 완전히 익숙해졌네. 사파이어 거래에 입회한 날 심야, 지하철 히비야선 개찰구를 나와 지상으로 올라온 다케시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이 오가는 롯폰기 교차로를 바라봤다. 아야카에세 이끌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기이하고 위험한 분위기를 자아내면서도 마음의 말랑말랑한 부분을 간질이는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도시의 흐릿한 공기에 살짝 혐오감까지 느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도쿄를 동경했는데.           p.202

 

몇 개월 전만 해도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학교에 다녔던 다케시는 도쿄에 도착해 한 남성의 시체를 발견한 뒤 삶이 완전히 달라져 버린다. 살인범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도망치다가, 범인을 찾으려다 보니 어느새 불법 약물 매매에 손을 대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다 사파이어에 중독된 한 소녀를 도와주려고 약물을 건넨 것이 오히려 소녀를 죽게 만들고, 경찰 수사망은 점점 다가오는데다, 약물 제조 루트를 캐다가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 와중에 조직을 쫓는 형사는 다케시에게 스파이 역할을 떠맡기고, 스트레스와 압박으로 인해 결국 다케시까지 사파이어에 중독이 되고 마는데... 끝이 없는 어둠 속으로 추락하게 되는 다케시는 과연 범인을 찾고 누명을 벗을 수 있을까.

 

치넨 미키토는 이 작품에 대해 "기존과는 조금 다른, 새로운 경지를 시도한 작품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실제로 의사로 활동했다는 이색적인 경력을 가지고 있는 작가이다. 그래서 그 동안 병원과 의료 현장이 배경인 작품들이 많았다. <차가운 숨결>, <무너지는 뇌를 끌어안고>, <가면병동> 등 그 동안 만나왔던 작품들 모두 자신만의 장점을 잘 살려 생사의 생사의 갈림길을 매일 마주하는 의사로서의 고뇌와 병원에서 지내는 환자들의 모습을 현실감있게 그려냈었으니 말이다. 최근에는 작가 데뷔 10주년을 기념해 처음으로 도전한 본격 미스터리 <유리탑의 살인>이라는 작품도 흥미롭게 읽었다. 이번에 만난 작품은 동생과 죽은 형이 한 몸을 공유하면서 살인사건에 휘말리는 이야기를 그린, 신감각 미스터리이다. 기존 작품들이 의학 미스터리, 감동 판타지, 로맨스 등 가슴 뭉클한 휴먼 드라마적인 요소가 강한 이야기들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시종일관 상당히 무겁고, 어둡다. 그럼에도 그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인간다움과 구원의 손길을 잊지 않는다. 형제의 유대 관계를 주요 플롯으로 삼고 있지만, 그것조차 전혀 평범하지가 않다. '외계인 손 증후군'이라는 독특한 병을 소재로 동생에게만 들리는 죽은 형의 목소리, 동생의 왼손에 깃든 죽은 형의 영혼, 그리고 사고 당일의 숨겨진 진실과 죽은 형의 진짜 의도 등 미스터리한 장치를 잘 배치해 페이지 넘기는 속도를 빠르게 만들어 준다. 이제껏 본 적 없는 새로운 미스터리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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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래 복순이
김란 지음 / 소미아이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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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남방큰돌고래들이 하루종일 관광선박에 시달리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사람들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돌고래들을 따라다니며 돌고래들의 먹이활동 시간과 휴식 시간을 단축시키고, 무리를 떼어놓아 문제가 된 것이다. 함께 실린 사진 속에는 등지느러미가 잘린 돌고래의 사진이 있어 더 마음이 아팠다. 왜 사람들은 돌고래들이 마음껏 넓은 바다를 헤엄치며 뛰노는 것을 지켜주지 못하는 것일까. 해양보호생물로 지정이 되어 있어도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현실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번에 만난 그림책은 제주에서 태어나 마을 앞바다에서 뛰노는 남방큰돌고래를 보면서 자란 작가가 실제 일어난 ‘돌고래 불법 포획 사건’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다. 고향 앞바다에서 잡혀 좁은 수족관에 갇힌 채 4년 동안 강제로 돌고래쇼를 하던 돌고래 제돌이가 고향 바다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게 된 작가가 그 기적같은 이야기를 작품으로 쓰기로 한 것이다. 게다가 이 이야기는 제주 남방돌고래뿐만 아니라 아직도 좁은 수족관에 갇혀서 묘기를 부려야 하는 다른 모든 돌고래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제주 섬 바다에는 남방큰돌고래 마을이 있었다. 입이 엇갈린 채 태어난 복순이를 비롯해 돌고래들은 마음껏 헤엄치고 신나게 놀았다. 오월의 햇살에 바다가 반짝반짝 빛나던 날이었다. 복순이는 제돌이, 태산이랑 마을 앞바다에서 놀고 있었다. 그때 고등어 떼가 몰려왔고, 신이 난 세 돌고래는 제일 좋아하는 고등어를 빠르게 따라갔다. 고기잡이배를 조심하라는 어른들의 말은 잊은 채 말이다. 결국 복순이와 친구들은 어두컴컴하고 좁은 수족관에 갇히게 된다.

 

사람들은 돌고래들을 서울에 있는 돌고래쇼장으로 끌고 갔고, 그들은 억지로 돌고래쇼를 위해 동원되었다. 그렇게 죽은 물고기를 먹이로 먹고, 겨우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좁은 수족관에 갇힌 채로 몇 년 동안이나 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일부 사람들이 돌고래들을 바다로 돌려보내자는 운동을 시작한다. 과연 복순이와 친구들은 다시 푸른 바다로 돌아갈 수 있을까.

 

 

살아 있는 물고기를 먹고 살았던 돌고래들이 썩은 냄새가 나는 죽은 물고기를 먹으며, 넓은 바다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는 대신 좁은 수족관에 갇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된 채로 고통스럽게 살게 된 것이다. 다행히 돌고래들이 처한 열악한 환경을 본 환경 운동가의 1인 시위를 통해서 돌고래들을 바다로 돌려보내기 위한 운동이 시작된다. 이후 ‘핫핑크돌핀스’라는 돌고래 환경 단체가 만들어졌고 마침내 2012년 3월, 서울시는 서울대공원의 남방큰돌고래를 바다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돌고래들은 야생 적응 훈련을 거쳐 제주 앞바다의 자연으로 돌아가게 된다.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던 복순이와 태산이까지 붙잡힌 지 6년 만에 바다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뭉클한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아이들은 이 그림책을 통해 자연스럽게 동물권에 대해 배우게 될 것이다. 해양 생태와 동물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할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여 보호하고 지키려는 노력을 할수록 동물들이 학대 당하지 않고,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돌고래 복순이를 통해 아이에게 자연과 환경의 소중함을 가르쳐 주는 시간이 되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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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핏 쇼 워싱턴 포
M. W. 크레이븐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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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대부분 날 처음 보죠. 난 워싱턴 포 경사입니다. 다들 내가 약자를 괴롭히는 인간들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두는 게 좋을 겁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용납하지 않았다. 이름도 이상한 데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완전히 괴짜라는, 이 치명적인 삼중주 덕분에 그는 학교에서 단골로 괴롭힘을 당했다. 오래지 않아, 포는 살아남으려면 자기를 괴롭히는 녀석이 누가 됐건 그놈도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걸 놈에게 알게 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쳤다.        p.78

 

영국 컴브리아 카운티에 최초의 연쇄살인범이 등장한다. 선사시대 유물인 '환상열석' 중 몇 곳에서 불에 타 죽은 시신들이 발견된 것이다. 언론에서는 그를 '이멀레이션맨'이라 부르기 시작한다. 한편 수사에 참여한 중범죄분석섹션에서는 세 번째 피해자를 조사하던 중 정직된 경관 '워싱턴 포'의 이름이 시신에 새겨져 있다는 것울 알게 된다. 섹션은 포가 다음 희생자가 될 수도 있다는 판단 아래 그의 업무 복귀를 결정하고, 그렇게 워싱턴 포와 데이터 분석가 틸리 브래드쇼가 만나게 된다.

 

이멀레이션 맨은 피해자의 가슴에 왜 '워싱턴 포'라는 두 단어를 새겨 넣은 것일까. 이름과 함께 새겨진 숫자 5 때문에 그들은 포가 다섯 번째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아직까지 발견된 것은 셋이었으니, 이멀레이션 맨이 네 번째 피해자를 고르는 동안, 그가 다섯에 도달하기 전에 찾아야만 했다. 컴브리아 지역은 영국에서 환상열석, 선돌, 헨지, 거석, 고분이 가장 밀집된 곳이었다. 그 돌들이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 학계에서는 다양한 설이 있었지만, 그것이 희생 제의를 위해 쓰인 적은 없었다는 데 모두 동의했다. 그렇다면 이멀레이션 맨은 굳이 왜 그런 장소를 골라 피해자들을 불에 태워 죽인 것일까. 피해자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전부 같은 나이대에 다들 부유했다는 것뿐이었다. 서로 알고 지냈다는 증거는 없었다. 수사에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포에게 악몽이 다시 돌아왔다. 너무 똑똑하고 체계적이어서 전혀 흔적을 남기지 않은 치밀한 연쇄살인범은 곧 네 번째 피해자를 선보이는데, 사건의 흔적을 열심히 뒤쫓지만 여전히 포가 이 사건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는 불투명했다.

 

 

 

"우리가 함께라면 얼마나 무시무시했을지 생각해봐. 네 친구들을 위해 정의를 구현했을 거야. 놈들한테 가망 따위 없었을 거라고."
"정의 때문에 하는 게 아냐, 포. 정의를 위한 일이었던 적은 한순간도 없어. 이건 복수야."
복수.... 포는 중국의 격언이 떠올랐다. "복수를 추구하는 자는 무덤을 두 개 파야 한다. 하나는 적을 위해 하나는 자신을 위해." 포는 남은 이야기를 거의 짐작할 수 있었다.         p.421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 M. W. 크레이븐은 이 작품으로 '골드 대거상'을 수상했다. 이어지는 시리즈 2편과 3편 모두 골드 대거상 후보로 선정되었으며, 이 시리즈는 현재 5권까지 출간되었고, 곧 TV 드라마로도 만들어질 예정이다. 이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밀레니엄>을 넘어설 강력한 수사 듀오의 탄생이다. 데이터 분석가인 틸리 브래드쇼는 뛰어난 지능에 박사학위가 두 개 있었고, 옥스퍼드 대학교 수학연구소 회원일 정도로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지만 사회성이 부족해 어딜가나 외톨이다. 브래드 쇼는 뛰어난 직관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수사관이지만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때문에 동료들과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다. 틸리와 포는 완전히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각자 다른 이유로 친구가 없었고 두 사람은 이상하게 마음이 잘 맞았고, 그렇게 색다른 수사 듀오가 탄생하게 된다.

 

특히나 틸리라는 여성 캐릭터는 <밀레니엄>의 리스베트를 떠올리게 할만큼 아이큐가 뛰어난 천재인데,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인생의 기술을 전혀 갖고 있지 못했다. 한 번도 현실 세계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기초 규범을 전혀 체득하지 못했고,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대로 그대로 말을 해 상대를 당황시키며, 소통에 너무 서툴러 한 번도 친구라는 존재를 가져보지 못했다. 어리숙하게 보일 정도로 순수하지만, 의외로 베짱은 두둑하고, 통계 분석과 수학에서는 놀라운 능력을 선보인다. 그 어떤 작품에서도 만난 적 없는 전무후무한 캐릭터라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에서의 활약이 정말 기대된다. 그리고 포가 자신의 직관을 이용해 수사하는 과정이 특히나 인상적이었는데, 작가가 차곡차곡 쌓아온 단서들이 퍼즐 조각들이 되어 하나로 맞춰지면서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너무 흥미로웠다. 작고, 겉보기에는 무의미해 보이는 사건이 어느 순간 눈덩이처럼 점점 커져서 하나의 결과를 만들어 내는 과정을 너무도 짜임새있게 그려내고 있어 왜 3회 연속으로 골드 대거상 후보에 선정되었는지 저절로 수긍이 되었다. 이 작품의 제목이 '이멀레이션맨'이 아니라 '퍼핏 쇼'인 이유에 대해서는 후반부에 가서야 알게 되는데, 탄탄한 서사와 겹겹의 반전, 그리고 독특한 캐릭터의 매력이 그 과정을 더욱 흡입력있게 만들어 준다.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가 더 기대되는 작품으로, 역시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원서부터 주문했다. 다음 작품도 어서 빨리 만나보고 싶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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