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맞은 자전거
우밍이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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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그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버지는 평생 자기 생각을 입 밖에 낸 적이 없다. 신문을 보아도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논하지 않았고, 옛이야기도 하지 않았으며 어머니가 옛일을 얘기할 때 거든 적도 없다. 마치 인생을 누군가에게 팔아버려 과거의 모든 것과 무관한 사람 같았다. 나는 지금도 시간의 구체성과 추상성에 대해 사색할 때마다 그 사건을 떠올린다.          p.24

 

지평선 위로 올라온 여명, 갖가지 색이 이어진 논밭, 해풍에 출렁이는 작은 어선이 바둑알처럼 풍경 속 점점이 놓여 있는 곳, 마을 너머로는 백사장과 바다가 보인다. 어디선가 찰카당찰카당, 찰카당찰카당. 허브, 바퀴축, 체인 자전차가 달리기 시작한다. 하늘에서 검은 비가 내리자 안개가 햇빛을 가려 검은 망사가 사방을 뒤덮은 것만 같다. 비 냄새가 느껴지고, 만져지는 듯 눈 앞에 펼쳐진 풍경 속에서 천천히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야기는 자전거, 정확히 말하면 도둑맞은 자전거에서 시작된다. 1992년 타이베이의 가장 큰 상가가 허물어지던 날, 주인공 ‘청’의 아버지가 자전거와 함께 사라진 것이다. 어머니는 툭하면 철마가 우리 가족의 운명을 바꿔놨다고 말하곤 했다. 까막눈이었던 외증조부는 자전차를 도둑맞았다는 신문의 아주 짧은 기사를 소중하게 보관했고, 자전차 한 대를 갖고 싶다는 꿈을 오래도록 가지고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소박해 보이는 그 소망은 외할아버지의 죽음과도 맞닿아 있었다. 당시만 해도 자전차 한 대는 지금의 벤츠, 아니 집 한 채와 맞먹는 큰 재산이었다.

 

이야기의 화자인 '청'은 부모가 딸만 내리 다섯을 낳고서야 얻은 아들이었다. 그는 자라 각종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작가가 되었는데, 어느 날 자신이 쓴 소설에 대한 독자의 편지를 받게 된다. 소설의 결말에서 주인공의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가 사라지는데, 그 자전거는 어디로 갔느냐는 질문이었다. 소설의 진실이 사실을 기반으로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따금 '진실의 기둥'이 나타나는데, 잃어버린 자전거가 바로 그가 소설에 세워놓은 '진실의 기둥'이었던 것이다. 독자의 말 한마디가 그물처럼 그를 휘감았고, 아버지의 실종 이후 감정적으로 묻어 두어야했던 상실감과 마주하기로 한다. 사라진 아버지와 자전거의 행방에 대해, 그 자전거가 거쳐온 여정을 거슬러 가보기로 한 것이다.

 

 

압바스는 그 일을 겪는 동안 자신이 점점 라오쩌우의 자전거와 한 몸이 되어가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자전거뿐만 아니라 더 추상적인 무언가가 느껴지기 시작했다고.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난 정말 그렇게 느꼈어요. 이렇게 자전거를 타는 건 한 사람의 인생과 진정으로 만나는 것과 같아요."
"바쑤야의 인생을요? 아니면 라오쩌우?"
"둘 다요. 어쩌면 더 많이." 압바스가 말했다.     p.233

 

대만 최초로 맨부커상에 노미네이트되었던, 대만의 국민작가 우밍이의 작품이 국내에 처음으로 출간되었다. 사라진 자전거의 행방을 쫓으며 아버지의 과거 발자취를 더듬어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가족의 서사를 중심에 두고 식민 시대의 역사와 전쟁 등 대만 100년사가 함께 펼쳐지는 묵직한 이야기는 다양한 시대별 자전거를 통해 더욱 입체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자전거는 만들어진 시대에 따라 그 시대만의 것이 되는데, 지역성을 갖고 있어 자전차, 철마, 자행차 등으로 지역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달라지기도 한다. 작가는 실제로 이 소설을 쓰기 위해 행복표 자전거 일곱 대를 수집해 직접 수리하고 조립하기도 했으며, 대만의 역사에 대해서도 철저히 고증하고 연구해 이 작품을 탄생시켰다고 한다.

 

소설 속에도 중간중간 바이크 노트라고 해서 여러 자전거 모델들을 아름다운 일러스트를 통해서 만나볼 수 있도록 했다. 어느 날 사라져 버린 아버지, 도둑맞은 자전거, 누군가의 운명을 바꾸고, 삶을 지켜주고, 살아 남게 해주었던 물건의 역사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잊혀진 시대를 소환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누구도 태우지 않은 허구의 빈 자전거가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내가 절대로 가볼 수 없는 곳으로 나를 데려'가는 듯한 기분이 들 것이다. 서정적이고 우아한 언어로 시처럼 쓰인 이 섬세한 작품을 통해 신비하고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으로 페달을 밟아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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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왕 - 트랙의 왕, 러닝슈즈의 왕
이케이도 준 지음, 송태욱 옮김 / 비채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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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내서 밖으로 나가면 자연히 걷게 되니까요/"

"신발은요?"

아리시마가 웃었다.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가죽 구두든 뭐든요. 갑자기 무리하지 않고 조금씩 시작하는 것. 그게 부상당하지 않고 오래 지속하는 비결입니다."

어쩐지 그것은 회사의 경영 방침과 일맥상통한 것 같았다.          p.53


교다 시는 일본식 버선인 '다비'가 일상적으로 신는 물건이던 무렵, 수많은 제작업체가 밀집해 있던 다비의 고장이었다. 하지만 시대와 복식이 변함에 따라 수요가 감소해 지금까지 남아 있는 업체는 손에 꼽을 정도가 되었다. 이곳에 백 년 동안 다비 제작을 생업으로 이어온 영세 기업 '고하제야'가 있다. 직원 스무 명, 평균 연령은 오십칠 세, 숙련공 중의 숙련공들만 남아 있지만 수요도, 매출도 하락만 거듭하고 있는 실정이다. 장래성이 전혀 없는 사업을 운영하느라 힘겨운 미야자와 사장은 거래처 직원의 제안으로 회사의 미래를 위해 신규 사업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눈에 들어온 것은 발 모양을 그대로 재현한 러닝슈즈였다. 그 상품이 인기가 있는 것은 '맨발 감각'으로 달릴 수 있기 때문이었는데, 고하제야의 주력 상품인 지카타비 역시 맨발 감각으로 지면을 디딜 수 있었다. 기존의 제작 노하우를 활용한다면, 이런 러닝슈즈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미야자와는 과감히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지만, 현실은 결코 만만하지가 않다. 상품화하기 위한 샘플을 개발했지만, 번번히 대기업과의 경쟁에서 밀리면서 높다란 시장의 벽 앞에서 번번히 좌절한다. 실적도 없고, 돈도 없고, 노하우도 없는 영세 업체가 세계적 스포츠용품 회사를 넘어설 수 있을까. 





"세상에서 돈이라는 가치관을 없애면 정말 필요한 것, 소중한 것만 남겠지요." 모기는 생각을 순순히 입 밖에 냈다. "알아챌 수 없을 만큼 당연한 것 중에 정말 소중한 게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유대도 그런 것 아닐까요?" 울컥 복받치는 것을 참으며 모기가 말을 이었다. "여러분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절대 후회 없는 레이스를 펼치고 오겠습니다. 응원해주십시오!"             p.458


이케이도 준은  '소설은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는 명제를 가장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작가이다. <한자와 나오키> 시리즈는 무려 네 권짜리로 엄청난 분량의 작품이었지만, 단 한 페이지도 지루할 틈 없이 '읽는 재미'를 안겨주는 소설이었고, 이후에 나온 <변두리 로켓> 시리즈와 <일곱 개의 회의>, <루스벨트 게임>, <하늘을 나는 타이어> 등 출간된 모든 작품들이 탄탄한 구성과 생생한 캐릭터를 통해 완벽한 재미를 선사했었으니 말이다. 그의 작품들은 매번 아주 두툼한 페이지에 등장인물도 많지만, 군더더기가 없고 구성이 짜임새가 있어 가독성이 좋다. 언제나 기본적인 구도는 영세한 중소기업이 대기업과 맞서 싸우는 식이지만, 은행, 자동차, 운송회사, 로켓 부품 등 소재가 달라지기 때문에 그 속에서 펼쳐지는 드라마도 매번 새롭게 느껴진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직장인들의 통쾌한 반란과 도전이야말로 이케이도 준의 특기인데, 이번 작품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재미를 선보인다. 일본식 버선만 백 년째 만들어온 영세 기업이 러닝슈즈를 개발해보겠다고 무모한 도전을 시작하고, 한때 유망주였지만 부상으로 인해 재활 훈련 중인 육상선수와 회사의 이익보다 선수들과의 신뢰를 더 중요하게 여기다 직장을 잃게 된 러닝슈즈 전문가의 이야기가 함께 어우러져 시련에 좌절하더라도 꿈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이케이도 준은 언젠가 길고 고된 싸움이 끝나면 밝은 미래가 찾아오는 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서서 꿈을 향해 전진하는 모든 일하는 사람에게 존중과 응원을 보내는 따뜻한 드라마를 그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작품은 일본에서만 누적 60만 부 이상이 판매되었고, TBS에서 10부작 드라마로 제작되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엔터테인먼트 소설과 스포츠 소설의 장점을 잘 버무려 이케이도 준 특유의 감동과 재미를 동시에 담고 있는 작품이 만들어진 것 같다. 인생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매일을 성실하게, 물러서지 않는 열정으로 정진하는 이들의 뭉클한 이야기를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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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일리아스 - 트로이의 노래 한빛비즈 교양툰 22
동사원형 지음 / 한빛비즈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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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고전 작품들은 이미 읽어 보았거나, 언젠가 읽으려고 책장에 두었거나, 반쯤 읽다가 지루해서 덮어 두었거나 하는 식으로 구매를 했든 빌려 보았든 한 번쯤 접한 적이 있다. 하지만 전혀 읽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이다.  일단 두껍고, 어려워 보이기 때문인데, 이번에 이런 부담을 단번에 해결해주는 책을 만났다. 바로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를 웹툰 형식으로 재구성한 교양만화다.  




이 책은 10년간 이어진 트로이 전쟁 막바지 51일 동안에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룬 총 15,693행의 위대하고도 장대한 서사시 <일리아스>를 제대로 된 고증과 화려한 작화, 그리고 탄탄한 각색을 통해 '교양툰'으로 재탄생시켰다. 지식웹툰플렛폼 이만배에서 10주 연속 1위를 기록한 화제의 교양툰이자, 한빛비즈의 교양툰 시리즈 스물두 번째 작품이기도 하다. 


작가인 '동사원형'은 고대 서양의 문명을 동경하는 역사 덕후다. 고대 로마사를 좋아해 학회 참석 등 다방면으로 공부하는 작가인 그는 이 작품의 구성과 각색에만 1년 이상 걸렸을 정도로 충실히 고증했다. 덕분에 이 책을 통해 <일리아스>를 처음 읽는다면, 전혀 어렵지 않게, 쉽고, 재미있게 서양문학에서 가장 오래된 위대한 서사시를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일리아스>의 주제는 바로 '분노'이다. 원작의 1권 1장 1절의 첫 구절 또한 이렇다.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이다. '사소한 다툼과 오기로부터 시작된 작은 분노, 이로 인해 생겨난 고통과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분노, 분노의 연쇄 끝에서 분노를 수용하고 용서를 통해 평온을 찾는 일련의 과정'이 <일리아스>의 주제라고 이 책은 말한다. 


저자는 <일리아스>가 높으신 분들의 현학적인 문학이 아니라 마치 현대에 사는 우리가 TV 드라마를 보듯 평범한 고대 그리스인들이 듣는 서사시였기 때문에 이러한 주제와 요소들을 넣었다고 설명한다. 덕분에 영웅들을 쉽게 감정이입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과 가까운 존재로 묘사했는데, 내용을 읽다 보면 각종 치정극과 막장 스토리에 깜짝 놀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왜 2천7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일리아스>가 칭송받는 고대 그리스 문학이며, 우리는 대체 왜 <일리아스>를 읽어야 하는 걸까. 이 책이 바로 그러한 의문에 대한 명쾌한 답이 되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일리아스>는 수백 년 동안 입을 통해 내려온 것을 호메로스가 집성, 정리해 완성한 것이라 분량도 방대하지만 등장하는 인물과 내용도 복잡하기 그지 없다. 트로이 전쟁을 중심 사건으로 온갖 전설들이 덧붙여지면서 완성되었기에 그야말로 길고 긴 이야기라 문턱을 넘기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니 <일리아스>를 처음 읽는다면, 전체적인 구조와 흐름을 잘 설명해주고 있는 이 만화로 먼저 시작하면 어떨까. 


이 책은 복잡한 인물 관계도와 주요 캐릭터 설명, 그리고 그리스군과 트로이군의 지휘관, 민족, 함선의 수, 지역을 도표로 알아보기 쉽게 정리했고,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지도에 표기해 고전 중의 고전인 <일리아스>의 문턱을 제대로 낮춰주고 있으니 말이다. 초판 한정으로 캐릭터 설정, 작업 구상노트, 채색 전 스케치 등이 수록되어 있는 제작 노트를 특별 부록으로 받을 수 있으니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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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에디터스 컬렉션 15
메리 셸리 / 문예출판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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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은 이제는 살인자의 손길을 느끼지 않아. 잔디가 그 아이의 부드러운 몸을 덮으면, 녀석은 더는 고통을 느끼지 않을 거야. 그러니 녀석은 더는 불쌍한 존재가 아니야. 산 사람들에겐 흘러가는 시간만이 위로가 될 거야. ‘죽음은 악이 아니다’, ‘인간의 마음은 사랑하는 대상의 영원한 부재에도 절망감을 초월한다’ 따위의 스토아철학자들의 격언을 굳이 꺼낼 필요도 없겠지. 카토도 죽은 형제의 시신 앞에서 흐느끼지 않았나.        p.128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이미 다양한 버전으로 소장하고 있고, 여러 번역본으로 읽었지만, 이번에 나온 문예출판사의 '에디터스 컬렉션' 버전은 정말 소장하고 싶은 책이다. DC 코믹스, 마블 코믹스의 전설적인 일러스트레이터 버니 라이트슨이 7년에 걸쳐 완성한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펜화 작품 45점을 더한 아름다운 버전이기 때문이다. 정말 디테일하고 섬세한 묘사가 일품인 삽화들은 원작의 깊이를 더해주고, 장면들을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특히나 이번 버전이 특별한 이유는 작가의 의도가 더 잘 보존된 1818년 초판본을 우리말로 옮겼기 때문이다. <프랑켄슈타인>은 1818년에 익명으로 출간된 초판과 메리 셸리가 초판을 수정해 1831년에 출간한 개정판, 두 가지 판본이 있는데, 여성 작가의 창작 활동이 자유롭지 않았던 시대였기에 익명으로 출간한 버전이 더 날카롭고 대담하다고 평가받는다고 하니 말이다. 또한 작품의 착상과 집필 과정, 작가의 의도가 드러나는 ‘스탠더드 노블스 판 저자 서문’과 역자의 ‘작품 해설’을 수록해 작품의 이해를 도왔다. 

 

 

그 놀라운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나는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혔소. 그토록 강하고 고결하고 훌륭한 인간이 그렇게 사악하고 비열하단 말인가? 인간은 어느 때는 순전히 악의 근원에서 태어난 자식 같기도 하고 어느 때는 고귀하고 신과 같은 존재로 보이기도 했소. 위대하고 고결한 인간이 되는 것은 감각이 예민한 존재에게 있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 같았소. 많은 역사적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비열하고 사악한 인간이 되는 것은 가장 비천한 타락, 눈먼 두더지나 나약한 벌레보다도 더 비참한 지경의 인간처럼 보였소.           p.228

 

<프랑켄슈타인>은 영화로 여러 번 각색되었을 뿐 아니라 이후에 등장한 여러 과학소설과 공포영화에 큰 영향을 끼친, 최초의 과학소설이다. 극중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창조해냈고, 프랑켄슈타인을 창조한 메리 셸리는 그야말로 괴물 같은 소설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은 이후에 등장한 거의 모든 미치거나 사악한 과학자 캐릭터의 전형이 되었으니 말이다. 1818년 메리 셸리가 맨 처음 이 작품을 익명으로 발표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불과 스물한 살이었다. 그녀는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묘한 두려움을 건드려 오싹한 공포를 일깨우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 '무서워서 주위를 둘러볼 수도 없게 만드는, 읽으면서 피가 얼어붙고 가슴이 두근대는 그런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던 그녀의 의도대로 놀라운 작품이 탄생했고, <프랑켄슈타인>은 1931년에 영화로 제작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이 처음부터 악한 존재였던 것은 아니다. 보기 흉한 모습 때문에, 사람들과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인간들로부터 외면 당하고, 핍박 받으며 고립되어 살게 만든 사회가 그를 진짜 괴물로 만들어 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괴물이 저지른 행동들을 정당화할 수는 없겠지만, 그의 분노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을 만하니 말이다. 비록 고통만 더해 가는 삶이라도, 산다는 것이 괴물에게도 소중한 일이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애초에 선하고 따뜻한 존재였으나, 절망으로 인해 악마가 되고 만 존재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생명 과학과 생명 복제 기술이 발달한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프랑켄슈타인은 단순히 공포를 불러오는 괴물로만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 말이다.

 

고전이 왜 끊임없이 다시 책으로 출간되고, 왜 여러 매체를 통해서 계속 변주되는 것인지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프랑켄슈타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원작을 읽지 않았더라도 친숙한 캐릭터와 스토리이지만, 이번 기회야말로 원작 소설을 제대로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메리 셸리의 소설과 버니 라이트슨의 아름다운 삽화가 만나 그 어떤 영화보다도 흥미진진하고, 그 어떤 책보다도 세련되고 우아하며, 그 어떤 음악, 뮤지컬 등으로도 표현해내지 못할 감동을 안겨주는 버전이 탄생했으니 말이다. <프랑켄슈타인>이 궁금했다면, 꼭 이번 에디터스 컬렉션 버전으로 만나보길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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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문구점에 갑니다 - 꼭 가야 하는 도쿄 문구점 80곳
하야테노 고지 지음, 김다미 옮김 / 비채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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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여행일기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그리고 문구에 진심인 문구 덕후인 하야테노 고지가 도쿄의 문구점 80곳을 소개하는 탐방기이다. 나 역시 예쁜 문구들만 보면 일단 사고 보는 편이라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내 서재 곳곳에 연필, 지우개, 노트, 포스트잇, 마스킹테이프, 다이어리 등등 아기자기한 문구들이 가득한데, 한정판이 붙거나 책을 사야 받을 수 있는 굿즈들도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책만큼이나 문구류에 관심이 많아서, 이 책은 출간 전부터 기대하며 기다렸었다.

 

 

도쿄의 숨겨진 문구점들을 순례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무엇보다 포근한 손 그림으로 이 모든 것들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위치를 알려주는 지도부터, 각 문구점의 풍경, 그리고 각종 잡화와 문구류까지 디테일한 일러스트로 재탄생해서 페이지를 넘기면서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해진다.

 

문구 마니아 일러스트레이터가 사심을 듬뿍 담아 그렸기에 애정이 느껴지는데다, 사진과는 다르게 손 그림이 주는 아기자기한 감성이 더해져서 개성 넘치고, 매력적인 문구점 탐방기가 만들어졌다.

 

 

백화점, 브랜드의 로드숍 등으로 버라이어티한 긴자의 문구점부터 오피스빌딩이 늘어선 도쿄 역 주변의 문구점, 미술, 사진, 패션 등을 배울 수 있는 학교가 많은 신주쿠 역의 문구점, 기술자들이 모여드는 '제작의 거리'로 알려진 구라마에의 문구점, 젊은이들이 북적거리는 기치조지의 다양한 문구점 등이 소개되어 있다.

 

도쿄의 문구점 순례로 여행 스케줄을 짜도 좋을 만큼 각각의 문구점이 모두 특색이 있다. 작가가 애용하는 원고지를 파는 가게, 명품 종이들이 가득한 곳, 이탈리아 왕실에 쓰이는 제품을 취급하는 곳도 있고, 나만의 노트를 만드는 곳, 수동식 활판 인쇄기를 이용해 자기 작품으로 엽서를 만드는 곳 등 직접 체험을 해볼 수 있는 곳들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유니크한 디자인의 문구와 잡화가 가득한 고베 감성 문구점 노이에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래 모양 페이퍼나이프, 생선 볼펜, 안경 모양 미니 가위 등 재미있는 문구와 잡화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책갈피, 스티커, 마스킹 테이프, 트레이, 칼과 펜, 블랙윙 연필, 노트, 포스트잇플래그, 문진 등 아끼는 물건들로 가득 찬 내 책상을 좋아한다. 가끔 마음 잡고 정리를 싹 해도 며칠만 지나면 원상태로 복구가 되어 버려서 이제는 각종 문구류로 복닥거리는 그대로 놔두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나만의 우주 속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혹자는 '예쁜 쓰레기'라고도 하는 쓸데없는 것들의 가치를 믿는다. 언젠가 <아무튼, 문구>라는 책에서 '생필품들은 삶을 이어나가게 해주지만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것은 쓸모 없는 물건들이다'라는 문장에 밑줄을 좍 그었던 적이 있다.

 

이 책은 문구점을 테마로 한 여행 가이드로도 훌륭한 역할을 해준다. 상세 가게 정보를 담은 QR코드를 이용한다면 도쿄 거리에서도 간편하게 문구점 정보를 확인할 수 있으니, 도쿄에 가게 된다면 꼭 챙겨가면 좋을 것 같다. 게다가 판형과 두께도 딱 적당해서 짐이 늘어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결코 실용성만으로 돌아가지 않는, 꼭 필요에 의해서만 구매하는 것이 아닌, 쓸모는 없지만 보는 것만으로 내 기분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문구의 세계를 사랑한다면 이 특별한 문구점 탐방기를 놓치지 말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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