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을 때마다 조금씩 내가 된다 - 휘청거리는 삶을 견디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법
캐서린 메이 지음, 이유진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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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이제껏 내가 얼마나 나 자신을 잃어가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아니, 이미 깨닫고 또 깨닫기를 반복했었다. 나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맞서고 고통받고 또 애도했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새로웠다. 그 순간 본래의 내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절실히 느꼈다. 한 아이의 엄마인 내게 세상은 결코 오롯이 나 자신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래의 나로 돌아가야함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p.36

 

캐서린 메이의 전작인 <우리의 인생이 겨울을 지날 때>라는 책을 아주 인상 깊게 읽었었다. 마흔 번째 생일을 코앞에 둔 어느 날, 갑작스런 남편의 맹장염, 건강 문제로 인한 실직, 아들의 등교 거부 등 연거푸 닥쳐온 시련들과 마주하게 되면서 자신이 ‘인생의 겨울’ 한가운데에 서 있음을 직감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겨울을 견뎌내는 것을 담담히 기록한 책이었다. '윈터링(wintering)'에 대한 지적이고도 서정적인 사색의 풍경들이 페이지마다 밑줄 긋게 만들었던 아름다운 책이었다.

 

이번에 만난 그녀의 신작은 서른 아홉에 아스퍼거 증후군을 진단받고, 주말마다 험준하고 가파른 해안길을 수백 킬로미터 걷기 시작하며 자신의 상처와 인생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여정을 기록한 회고록이다. 우연히 숲속에서 길을 잃은 경험을 통해 두려움보다 해방감을 느끼게 되었고, 자신의 삶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영국의 가파르고 험준한 트래킹 코스를 걷기로 다짐하게 된 것이다. 녹초가 될 때까지 가파른 해안길을 오르며 그 동안의 삶을 반추하고 또 반추하는 과정은 놀랍도록 감동적이었다. 한 번도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며 살아 왔는데,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낯선 진단으로 인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자신의 인생을 이해하게 되는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사람들이 자폐인에게서 경험하는 사소한 불편이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경험되는 방식이 중요하다고 거듭해서 말한다. 설명은 몇 번이고 할 수 있다. 나는 자신에 대해서 전에는 한 번도 단언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해 단언한다. 나는 자신을 넘겨버리는 습관을 버리고 있으며, 내가 얼마나 자주 압도당하는 느낌을 느끼는지, 평범한 사건들로 인해 얼마나 극단까지 몰리는지를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 대개, 사람들은 이해한다. 사실, 공감한다. 누구나 그게 어떤 기분인지 어느 정도는 안다.          p.296

 

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 나서야 자신에게 자폐 성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운 일일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애초에 성인이 되어서야 자폐증 진단을 받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 또한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게 된 경우가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더 중요한 것은 기존에 없던 증상이 성인이 되어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그러한 성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진단받지 못한 채 성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친구들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하는 내향적인 성향과 힘든 상황에서 자신만의 공간으로 숨어 버린다거나, 엄마가 되어 아이를 사랑하면서도 도망가고만 싶어 하는 마음들이 모두 그저 예민하고 민감해서가 아니라 아스퍼거 증후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니 말이다. 아마도 그 동안 살아온 전 생애를 부정하고 싶어지지 않았을까, 세상이 완전히 바뀌어 버리는 듯한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서린 메이는 피하지 않고, 더 늦기 전에 자신의 마음속 울음을 들여다보기로 결정한다.

 

그녀는 주말마다 험준한 해안길을 걸으며 깨닫는다. 여태껏 자신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위해 만들어진 삶에 스스로를 끼워 맞추려고 애쓰며 살아왔다는 것을 말이다. 타인의 시선에 비친 내 모습을 위해 억지로 스스로를 감추고, 속이며 살고 있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을 것이다. 타인을 위해 희생하고, 누군가를 돌보는 것은 잘 하면서, 스스로를 다정하게 돌보는 것은 서툰 사람들 말이다. 그렇게 고군분투하느라 '나'를 잃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다.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되찾으려는, 불행을 피하지 않고 맞서는 모습을 통해서 인생의 의미를 돌아볼 수 있도록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2023년 나는 어떤 모습이 되고 싶은지 그려보았다. 조금 더 내면에 집중할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타인을 위하는 것만큼 내 마음도 돌볼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래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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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빛나게 할 일들이 기다리고 있어 - 내가 지금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
황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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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행성은 저마다 중력이 있고, 그 중력의 힘을 이용해 우주선은 이리저리 휩쓸리며 경로를 바꾸면서 여행한다. 그런 우주선의 모습이 우리 삶과 닮았다고 느꼈다. 인간에게도 중력 혹은 운명처럼 절대 거스를 수 없는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가끔은 이런 거스를 수 없는 것들을 이용해 추진력을 얻어서 힘차게 살아갈 때도 있고.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어딘가에 닿게 되겠지. 그곳이 어디일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 힘을 거스르지 못해 음악을 만들고, 그 힘을 동력 삼아 음악을 만들며 살아간다.          p.14

 

온앤오프의 음악을 프로듀싱했고, 동방신기, 소녀시대, 샤이니, 레드벨벳, 세븐틴 등 수많은 아티스트의 곡을 작업한 작곡가 황현의 에세이이다. '한국의 베토벤', '황버지'라는 수식어로 오랜 시간 케이팝 한가운데에서 활동했던 이가 음악이 아닌 글로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뭘까 궁금해졌다. 밤하늘에 별이 쏟아지는 것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표지를 한 겹 넘기면 파스텔 톤의 석양이 지는 바다가 나타난다. 누구나 삶에서 반짝이는 순간을 한 번쯤은 맞이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기쁨과 슬픔, 고통과 후회의 파도를 넘나 들면서 살고 있지만, 가끔은 그저 숨을 쉬며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반짝이는 삶이라고, 우리를 빛나게 할 일들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음악을 직업으로 하고 있어 화려하게만 보이는 삶이지만, 그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한 인간의 반복되는 일상은 우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글들이었다. 노래 가사처럼 감각적인 문장도 있었고, 인간적이고 진솔한 문장들도 있었다. 그가 만든 음악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나처럼 가요를 잘 듣지 않더라도, 음악 얘기만 하는 책은 아니기 때문에 충분히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랑에 실패하고, 잊혀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치여 울고 싶기도 하는 모습들 모두 누구나 한번쯤 겪게 되는 상황들이니 말이다. 그 속에서 누군가는 다양한 감정들을 복기하며 곡을 써냈고, 그렇게 탄생한 음악들이 또 다른 누군가의 하루를 빛나게 해준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는 생각도 들 것이다.

 

 

 

작곡가로서의 내 삶을 말하자면, 늘 재미있지는 않다. 오히려 고민과 고통이 반복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데드라인은 언제나 정해져 있고, 해를 거듭할수록 나의 곡을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탓에 자주 압박감을 느낀다. 자꾸 도망치고 싶을 때는 '이번까지만 하고 그만하자'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만하자 해놓고 나는 또 작업실에서 나를 태우고 있다. 일단 내 몸을 망치더라도 작품을 만들어내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야 내가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이 내 삶을 유지하는 방법이다.          p.271~272

 

누구나 타인의 단편적인 일상을 보며 그 모습이 그 사람의 전부라 착각하며 살아 간다. SNS만 보더라도 불행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겉으로 보여지는 것은 한 사람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니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타인을 부러워할 필요도, 괜한 자격지심을 가질 필요도 없다. 나만의 기준을 지키기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최선을 다하고 있는 스스로를 나 자신은 알아줘야 하는 것이다. 자존감이 뭐 별건가. 내가 지금까지 최선을 다했다는 걸 적어도 내가 알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황현의 섬세한 글을 읽으면서 조용한 위로를 받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누구에게나 인터미션이 필요하다'는 문장이 특히 와 닿았다. 가끔 너무 정신 없이 바쁘게 살다 보면, '랙'걸린 게임 캐릭터처럼 버벅이다 실수를 하게 된다. 그럴 때, 억지로라도 바깥에 나가서 쉬는 시간을 갖으라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그는 바쁜 하루라는 연주회의 인터미션 타임이 되면 근처 카페에 가서 멍하니 바깥 풍경을 바라본다고. 생각을 덜어내고, 일부러 사방을 흐린 눈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조금 쉬는 기분이 든다고 말이다. 이것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도 꼭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쉬는 것을 불안해하지 말고, 그냥 쉴 것. 그 짧은 휴식이 내일을 살게 하는 힘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열심히 산 것 같은데 가끔은 잘 살 고 있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든다면, 위로가 필요한 순간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멜로디의 탄생 배경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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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동 김블루의 친절한 과학 2 - 생물의 기능, 물질의 변화, 에너지 악동 김블루의 친절한 과학 2
오차(이영아) 그림, 조영선 글, 샌드박스 네트워크 외 감수, 악동 김블루 원작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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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동 김블루의 친절한 과학> 그 두 번째 이야기가 나왔다. '힘과 운동, 빛과 파동, 우주' 편이었던 첫 번째 이야기에 이어, 두 번째는 ‘생물의 기능, 물질의 변화, 에너지' 편이다.

 

구독자 170만 명을 보유한 '악동 김블루' 채널의 인기 크리에이터 김블루는 재치 넘치는 입담, 욕설 없는 청정 방송으로 어린이들에게도 인기가 많다. 덕분에 아이들이 읽고 또 읽는 과학 학습 만화 시리즈로 쉽고 재미있게 기초 과학의 세계로 이끌어 준다.

 

 

이 시리즈는 김블루와 친구들이 벌이는 모험과 소동이 만화 형식으로 그려져, 자칫 어렵고,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기초 과학 이론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파란 머리가 트레이드마크인 김블루는 언뜻 까칠하고 불친절해 보이지만, 풍부한 과학 능력으로 친구들을 살뜰히 챙긴다.

 

김블루의 친구들은 착하고 순진한 청소 솔, 잘난 척 대마왕 뚫어 뻥, 매사에 시큰둥한 빗자루, 겁 많은 때밀이 타올, 조용한 명상가 두루마리 휴지, 명랑한 수다쟁이 수세미까지 각종 생활용품들로부터 탄생해 개성 넘치는 모습과 더불어 친근하고, 귀엽다.

 

 

전편에서 김블루와 친구들, 그리고 지구를 정복할 기회를 노리는 외계인 지지는 우주선이 폭발하기 직전에 탈출 캡슐에 몸을 실었다. 탈출 캡슐은 무사히 착륙에 성공했고, 그들은 어떤 장소에 도착한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 비친 것은 낯선 풍경들이었고, 그곳이 지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며 이야기가 끝이 났었다.

 

지구에서 못 보던 식물들이 가득한 외계 행성에 오게 된 김블루와 친구들의 모험에서 시작하는 2권은 그들이 다시 지구로 돌아오고, 불의의 비행기 사고로 무인도에 불시착하는 스토리로 이어진다. 게다가 김블루의 매력에 빠진 외계인 지지는 지구 정복의 꿈도 잊은 채 무인도 생활에 익숙해져가고, 무인도는 김블루의 왕국이 되어 간다. 과연 김블루와 친구들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이 책은 ‘생물의 기능’, ‘물질의 변화’, ‘에너지’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고약한 입 냄새의 정체를 찾아라, 우리 몸에서 뼈가 사라진다면? 높은 산에서 맛있는 밥을 지을 수 있을까? 전기 에너지를 만들어 비행기를 이륙시켜라 등등 어린이들이 궁금해할 법한 일상적인 호기심을 기초 과학 이론과 엮어 흥미롭게 설명해주고 있다. 각 장 끝의 ‘왕친절한 과학 수업’ 코너에서는 풍부한 그림 자료를 곁들여 앞서 배운 개념을 다시 한번 다질 수 있도록 했다.

 

광합성, 소화 효소, 뼈의 구조와 기능, 밀도, 기압과 끓는점, 물의 상태 변화, 전도, 에너지의 형태, 에너지 보존 법칙 등 이 책에서 다룬 18가지 과학 이론은 초등 교과 과정뿐 아니라 중학 교과 과정까지 아우르고 있다. 마지막 페이지에 수록된 교과 연계표를 통해 각각의 단원과 학년을 확인해 볼 수 있다. 기존에 나왔던 대부분의 과학 학습 만화는 초등 교과 과정의 과학 지식들을 주로 다루었다. 그에 비해 이 시리즈는 초등 학습 만화로는 유일하게 난이도 높은 중학 교과 과정의 과학까지 맛볼 수 있도록 만들어져 더욱 알짜배기 학습 만화라고 할 수 있다. 학교 수업보다 더 재미있는 기초 과학 이야기! 지금 바로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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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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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이 집은 뭐가 문제예요?" 목소리가 울먹이며 날카롭게 쇳소리로 나왔다.
"다 괜찮아, 아가! 무슨 말이니?"
엘스퍼스는 당혹스러워 고개를 푹 숙였다.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아버린 느낌이었다. 순간 엄마도 안다는 걸 알아버린 것이다. 이 집과 이 아침의 시간은 어딘가 통째로 잘못되어 있었다. 느끼고 듣고 맛보고 냄새도 맡을 수 있는 불편한 무언가가 있었다. 눈으로 볼 수 없을 뿐이었다.                - '공 튕기기 세계 챔피언' 중에서, p.127

 

제럴딘은 클로로포름 병을 들고 밤새 술 마시고 새벽에 들어와 자고 있는 남편에게 다가간다. 병뚜껑을 열고 작은 헝겊을 흠뻑 적신 뒤 천천히 남편의 코 쪽으로 다가간다. 남편의 맥박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는 낡고 검은 여행 가방을 들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집을 나온다. 버스에 타고 낯선 사람들과 함께 있으니 안전하고 강해진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생각한다. 누군가 관심을 보이며 그녀에게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느냐고 묻는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말해주겠다고. 남편은 그녀를 함부로 대했고,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했으며, 그녀의 모든 행동을 트집잡고, 미워했다. 남편으로부터 멀리 도망치고 싶었던 그녀는 낯선 도시에 도착해 새로운 장소로 향하지만, 그곳에서 고등학교 동창을 우연히 만난다. 그리고 너무 행복해서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던 그녀의 마음은 순식간에 불길한 분위기에 잠식당하게 되고, 끝도 없는 나락으로 추락한다. 이 이야기는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 중 <모빌 항구에 배들이 들어오면>이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작품들은 불안과 강박, 공포와 서스펜스, 평범한 일상 속에서 비어져 나오는 어두운 상상력으로 버무려져 있다.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불길한 분위기가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를 빠르게 해주곤 한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 중 <영웅>이라는 이야기는 시종일관 불안하던 주인공의 강박적인 행동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되는 걸 그리고 있다. 입주 가정교사로 새로운 집에 들어가게 된 루실은 불안한 마음을 다잡으려고 애쓰고 있다. 정신질환을 겪다가 삼 주 전에 돌아가신 엄마로부터 자신도 비슷한 병력을 물려받았을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불안은 급기야 아이들에게 뭔가 위험하고 끔찍한 일이 일어나서 자신의 용기와 헌신을 입증하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고, 결국 그것을 직접 행동으로 하게 되는데... 마지막 장면이 정말 오싹한 작품이었다.

 

 

 

오후에 한번 문득 위층의 방과 그녀 자신의 관계가 생각났는데, 그러자 길 잃은 막막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소유물, 관습적 의무, 고독의 순간 들과 멀어진 사람은 어디에 있게 되는 걸까? 어떤 존재가 되는 걸까? 그녀는 홀퍼트 부인의 팔걸이의자에 앉아서 반쯤 졸고 반쯤은 이상하게 정신을 바짝 차린 상태로 고민했다. 우주에서 떠다니는 티끌이 된 듯 기묘하지만 그리 불쾌하지 않은 감각이었다. 낯선 자유와 이동성에 힘입어 그녀는 자신이 사물을, 그 시야를, 심지어 사물의 향유를 증폭하는 느낌이 들었다.            - '루이자를 위한 초인종' 중에서, p.209

 

이 작품집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출간된, 국내 초역작이다. 그녀의 단편소설들은 여러 차례 출간되었지만, 청년 시절에 쓴 심리소설들만을 모아 선보이는 기획은 이번이 처음이라 더욱 의미가 있다. 하이스미스가 1936년부터 1949년까지 집필한 작품들로 오 헨리 상을 수상한 <영웅>을 비롯해 <세인트 포더링게이 수녀원의 전설>, <공 튕기기 세계 챔피언> 등 이번에 처음 출간되는 작품들도 많이 수록되어 있다. <리플리> 시리즈를 비롯해서 <열차 안의 낯선 자들>, <캐롤>, 아내를 죽였습니까>, <올빼미의 울음>, <유리 감옥> 등 국내에도 하이스미스의 작품들이 꽤 많이 소개되어 있다.

 

하이스미스의 작품들 중 스무 편 이상이 영화의 원작 소설로 쓰였는데, 알프레도 히치콕, 르네 클레망, 토드 헤인즈와 같은 거장들이 그녀의 작품을 영화화했다. 그래서 소설보다는 영화로 먼저 하이스미스의 작품들을 만나본 경우도 많을 것 같다. 영화도 참 좋았지만, 그녀의 진짜 매력은 바로 소설 속에서 더 빛이 나는 것 같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과 어머니의 무관심으로 외로운 유년기를 보냈던 걸로 알려진 그녀는 사람들을 극도로 싫어해서 어울리기를 꺼렸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심리와 본질에 대해서는 비상한 감각을 갖게 되었고,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던 불안과 갈등과 예민함을 작품을 통해서 토해내게 된 것이다. 덕분에 그녀의 작품들은 어두운 내면과 감정의 심연을 섬세하고, 디테일하게 잘 다루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작품집에 수록된 초기 소설 열 여섯 편에도 그러한 하이스미스의 독특한 매력들이 고스란히 잘 드러나 있다. 평범한 일상의 풍경을 위협하는 불길한 분위기가 읽는 이들을 홀린 듯 이야기 속에 빠져들게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영혼을 잠식하는 어두운 상상력의 끝이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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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사랑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모든 것 - 진화인류학자, 사랑의 스펙트럼을 탐구하다
애나 마친 지음, 제효영 옮김 / 어크로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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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기본적으로 일종의 생물학적 뇌물이다. 인체의 신경화학물질은 우리가 살면서 협력해야 하는 대상인 친구, 가족, 연인, 더 넓게는 공동체와 맨 처음 관계를 맺고, 힘을 모으고, 그 관계를 유지하도록 노력하려는 동기를 일으키고 보상감을 느끼게 한다. 다음 장에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화학물질로 발생하는 감각, 즉 우리가 사랑한다고, 혹은 좋아할 때 드는 느낌이라고 말하는 그 감각은 따뜻함과 만족감, 행복감을 선사한다.              p.36

 

우리는 왜 사랑을 할까. 그리고 사랑이란 뭘까? 사랑이란 '절대적인 가치'라기 보다는 '상대적인 의미'에 가깝기 때문에, 누구라도 사랑에 대해 한 마디로 정의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대상이라고 느끼는,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들은 모두 다르게 마련이다. 누군가의 사랑은 타인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사랑은 누구나 흔하게 말하지만 결코 쉽게 가질 수 없는 것이기도 하며,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행복을 안겨주다가도 쓰라린 고통과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학'이 '사랑'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것은 뭘까.

 

진화인류학자인 애나 마친은 이 책에서 애착, 통제, 질투 같은 인간의 복잡한 감정에서부터 연인, 가족, 친구, 반려동물, 신과 같은 다양한 존재와의 사랑까지 두루 살펴보며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사랑의 모든 스펙트럼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간이 사랑을 하도록 진화한 이유, 우리가 사랑을 지키고 유지하도록 설계된 생리학적 메커니즘 등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사랑'을 과학의 언어로 탐구하는 것이다. 물론 기존에도 사랑을 다루는 책들은 많이 있어 왔다. 그에 비해 이 책은 사랑이 왜 생겨났는지, 사랑으로 인해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행동, 심리, 신경학적인 모든 메커니즘을 살펴보고, 사랑하는 방식이 모두 제각각인 이유에 대한 생물학적, 문화적 메커니즘에 대해서도 탐구한다. 사랑이라는 본질적으로 예측이 불가능한 감정에 대해서 다양한 답을 제시한다는 점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우리가 어떻게 누군가에게 사랑을 느끼며, 상대는 어떻게 우리에게 사랑을 느낄까? 사람 간의 사랑에서는 이 질문에 답을 찾기가 매우 어려울 수 있다. 행동, 인지 기능, 심리적, 문화적, 종교적 요소가 작용할 수 있고 그중에는 공통적인 요소도 있지만 상당수는 환경에 따라 독특하게 형성되며 선호도에도 차이가 있다. 그러나 로봇이 인간과 최소한 함께 지낼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하도록 프로그램하려면 그런 요소들 중 어떤 것이 어우러져서 사랑이라는 결과가 나오는지 알아야 한다.        p.149

 

사랑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기도 하다. 여기서 생존이란 절박함이나 집착 등의 감정적인 문제가 아니라, '다음 세대로 유전자를 물려줄 수 있는가'가 달려 있는 문제를 말한다. 사랑은 신경화학물질의 형태로 우리가 생존에 꼭 필요한 관계를 처음 맺고 유지하는 동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인간의 사랑은 매우 복잡한 현상이고, 사랑의 종류도 굉장히 광범위하다. 연인과의 깊은 사랑 뿐만 아니라 자녀를 향한 부모의 맹목적인 사랑, 절친한 친구 관계에서 비롯된 애정과 인간과 반려동물의 애착관계도 모두 다양한 사랑의 모습이다.

 

애나 마친은 사회성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알려진 로빈 던바 교수와 함께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친밀한 사이의 인간관계에 대해 연구해왔다. 그렇게 수천 명을 상대로 관계를 연구하면서 '사랑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사람들의 답변도 모았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나보다 더 상대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 세상의 가장 힘든 순간을 함께 버티는 것, 따뜻하고, 편안하고, 무조건적이고, 말이 잘 통하는 것, 사랑은 두려움의 단짝, 이해할 수 없는 일, 다양한 화학 반응의 결과,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상상의 산물! 등 수많은 답변들이 있었다. 이들의 답변만 보더라도 사랑이 얼마나 주관적인 감정인지 깨닫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 대한 탐구 만으로 거의 사백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 한 권이 쓰이게 된 것일테고 말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사랑'을 과학의 언어를 통해 만나게 되는 특별한 경험을 하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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