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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행복 - 버지니아 울프와 함께 정원을 걷다 ㅣ 열다
버지니아 울프 지음, 모명숙 옮김 / 열림원 / 2025년 5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느릅나무의 레몬색 잎들. 과수원의 사과들. 잎들이 속삭이고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나를 여기에 멈추게 하고, 인간의 힘이 아닌 얼마나 많은 힘들이 우리에게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빛이 타오른다. 사과는 반짝이는 녹색을 띤다. 나는 온몸으로 반응한다. 하지만 어떻게? 나의 창문 아래에서 작은 올빼미 한 마리가 울어댄다. 나는 다시 반응한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생각하는 바를 스냅사진 같은 이미지로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감각들 위를 표류하는 물이 새는 배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광선들에 노출되어 있는 감광판이다. p.31
거장들의 품격 있는 문장과 사유를 소개하는 열림원의 '열다' 시리즈, 그 세번째 책이다. 헤르만 헤세의 <미친 세상과 사랑에 빠지기>, 빈센트 반 고흐의 <싱싱한 밀 이삭처럼>에 이어 이번에 나온 것은 버지니아 울프의 <모두의 행복>이다. 에세이, 시, 소설, 편지 등 다양한 장르의 글과 사유의 흔적들을 찾아 모으고 엮은 것이 이 시리즈인데, 이번 책은 버지니아 울프가 정원과 풍경에 대해 쓴 글들을 모았다. <밤과 낮>, <댈러웨이 부인>, <등대로>, <올랜도>, <파도>, 세월> 등 버지니아 울프의 문학 작품 속에 묘사된 정원과 자연에 대한 대목들도 따로 엮어 더욱 의미가 있다.
버지니아 울프의 삶은 그의 작품만큼이나 드라마틱했다. 남성 중심 사회에 살면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가졌고, 페미니즘 비평의 선구자이기도 했으며, 출판사를 운영하며 당대의 작가들을 발굴했고, 모더니즘 소설의 실험적인 작가로서 비평가와 독자 모두에게 인정받았다. 하지만 부모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는 딸이었으며, 만성적인 정신 분열증을 평생 겪었고, 결국 스스로 강으로 걸어 들어가 생을 마감했다. 평소에 버지니아는 별일 없는 한 매일같이 혼자 산책을 나서곤 했다. 콘월의 세인트아이브스, 켄싱턴 가든스, 하이드 파크와 큐 가든, 리젠트 파크 등 런던의 공원과 정원들에 대한 묘사가 담담하게 펼쳐진다. 자줏빛 일본산 아네모네가 무리 지어 피어 있는 잔디의 푸름, 정원을 온통 가득 채운 두툼한 금빛 크로커스, 꽃이 만발한 파이프 나무, 색종이를 오린 모양으로 꼿꼿하게 곧추서 있는 백일초와 금련화, 덩굴을 뻗으며 높이 자라는 무수히 많은 하얀 메꽃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정원을 걷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원 문의 돌쩌귀는 녹이 슬어서 아들이 문을 비틀어 열었어. 노새들이 뾰족한 발굽으로 때각거리며 들어오고 이탈리아 여자들이 어깨에 숄을 두르고 머리에 카네이션을 꽂고 샘물가에서 수다를 떨 때, 어린 시절의 강렬한 열정들, 지니가 루이스에게 키스할 때 내가 정원에서 흘린 눈물, 소나무 냄새가 나는 교실에서 느낀 나의 분노, 낯선 곳들에서 느낀 나의 외로움 등은 안전함과 소유와 친밀함으로 보상을 받지. 나는 평화롭고 성과가 많은 세월을 살았어. 주위에 보이는 것은 다 나의 소유야. 나는 씨앗들을 심어 나무들을 키웠어. p.277~278
실제로 버지니아 울프는 일평생 정원을 가꾸었고, 자연을 가까이 하며 살았다. 버지니아 울프가 남편과 함께 1919년부터 1941년까지 22년간 살았던 몽크스 하우스에도 정원이 있었다. 이 집은 토지가 약 3000제곱미터에 달했는데, 고풍스러운 주택 한채 외에 과수원과 온실, 물고기연못, 정원 등이 별도로 있었다. 울프는 매일 아침 꽃이 황홀하게 피어 있는 정원을 가로질러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온종일 잡초를 뽑고 화단을 만들며, 그게 행복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묘한 감격을 맛보았다'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울프는 정원 가꾸기에 진심이었다. 정원의 작은 움직임에 생에 대한 감각을 붙잡고, 전쟁이라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산책로에서 행복에의 가능성을 좇았다.
이 책은 총 5개의 장으로 이루어져있다. 유년 시절 세인트 아이브스의 여름 별장에서 경험한 자연을 시작으로, 평생 가장 애정을 가졌던 집이자 후기 대표작 대다수를 썼던 몽크스 하우스의 추억, 그리고 울프가 태어난 도시 런던에 관한 장면들이 이어진 뒤, 울프가 쓴 문학 작품들 속의 자연과 풍경을 만나본뒤, 마지막으로 유럽 각지를 여행한 울프의 여정이 등장한다. 영국,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까지 낯선 공간에서 느꼈던 여행자로서의 경험 또한 매우 흥미로웠다. 보통 버지니아 울프를 떠올릴 때, 침울하고, 핏기 없는 안색의 신경쇠약증 환자 같은 이미지를 먼저 생각하게 마련인데, 이 책을 읽으며 정원과 식물들, 그리고 계절을 느끼는 모든 감각들을 통해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된 것 같다. 무엇보다 하늘과 새와 꽃, 나무 등 자연에 동화된 울프의 모습이 행복해 보여서 너무 좋았다. 이 책을 통해 '정신병에 시달리다가 자살한 불행한 여성'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울프의 또 다른 면모를 만나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정원에 대한 묘사들이 어찌나 완벽하고, 우아한지 가보지 못했지만 눈 앞에 보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 버지니아 울프와 함께 정원을 걸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