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왕
마자 멩기스테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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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스테르는 여자의 말에 격노한 나머지 그 기묘한 햇빛을 보지 못했지만 뭔가 변했음을 감지한다. 그녀는 다시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경청을 당연시하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한다.

스스로를 그저 누군가의 아내나 누이나 어머니로 치부할 때가 아닙니다. 아스테르가 말한다. 우리는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마지막 말은 악사들이 멋들어진 마센코의 현에 활을 그으며 찬가 혹은 후렴처럼 노래할 것이다. 우리는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p.177


'보이는 것이 존재하는 것을 다 설명하지는 못한다'는 말은 아마도 기록된 역사에서 가장 잘 보여지는 아이러니일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굵직한 사건과 영웅들과 주요 인물들이지만, 실상 그 서사를 채우는 것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삶이니 말이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와 에티오피아 사이의 전쟁을 배경으로 남자들 옆에서 함께 싸운 에티오피아 여자들, 지금까지도 빛바랜 서류 속에서 엇나간 선으로만 남아 있는 이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작가는 '전쟁 이야기는 늘 남자들의 이야기였지만, 그 어떤 형태의 투쟁도 남자들만의 이야기였던 적은 없다'고 말하며, '그곳에는 늘 여자들이 있었다'고 이 작품이 시작된 계기에 대해 말한다. 그리하여 수년에 걸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쓰인 이 작품은 역사의 격동기를 뚫고 지나온 여성의 삶을 생생하게 소환한다.


1935년, 부모를 잃은 히루트는 어머니의 친구였던 군 총사령관인 키다네의 집에서 하인으로 일한다. 키다네의 아내 아스테르는 사사건건 히루트의 행동에 트집을 잡는데, 어느 날 목걸이가 사라졌다고 히루트를 추궁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아버지가 남겨주신 유품인 소층을 빼앗기게 된다. 아버지가 가장 소중히 여기던 물건이었기에, 소중히 보관하며 만지작거리다 잠들기도 했던 낡은 소총이다. 전쟁이 다가오고 있는 시점이었고, 어떻게든 무기를 모아야 하는 시점이었다. 키다네는 황제께서도 누구나 무기를 기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며, 총을 가져간다. 그 일로 인해 히루트는 작은 물건들을 계속해서 훔치고, 그것들을 마구간 옆에 구덩이를 파고 묻어 둔다. 결국 아스테르에게 발각되어 혼쭐이 나기 전까지 그 일은 계속된다. 히스테리컬한 성격으로 등장하는 아스테와 일방적으로 당하는 히루트의 관계는 이후 전쟁이 시작된 뒤 적군의 포로로 만나게 되면서 달라진다. 히루트와 아스테르를 비롯한 마을 여자들이 밤낮으로 훈련에 매진해 전사로 성장하는 과정 또한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소음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머리를 때리고, 그는 제대로 보기 이해 눈을 깜박인다. 하지만 눈앞의 광경은 현실이다.

쏘지 마! 사격 중지!

이게 뭐지? 에토레는 군모가 획 젖혀질 정도로 빠르게 고개를 든다. 저 여잔 누구지?

혼자 달리고 있는 병사는 이목구비가 섬세한 군복 차림의 소녀다. 홀로 풀밭 위에서 기병들 사이를 날듯이 달리는 매혹적이고 초현실적인 아비시니아인.                    p.471


1935년 10월 2일,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 정권은 에티오피아를 침공하며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시작한다. 당시 무솔리니는 아프리카 확장을 통해 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살리고자 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이 피해를 입었으며, 당시 이탈리아군의 화학 무기 사용은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았다. 이 전쟁은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으로 여겨진다. 작가는 남동생을 대신해 전쟁에 나간 증조모의 실화에 착안해 소설을 집필했다고 한다. 주인공인 소녀 히루트뿐만 아니라 총사령관의 아내와 첩자로 활동하는 매춘부, 자유를 꿈꾸는 요리사 등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펼쳐진다. 작품의 제목인 '그림자 왕'은 에티오피아 황제가 영국으로 망명하면서 패색이 짚어지자, 황제를 닮은 병사를 대신 그림자 왕으로 내세우는 계획을 뜻한다. 계획을 세운 것이 히루트였고, 그림자 왕의 호위병이 되어 활약한다.


불타는 도시와 불붙은 산, 폐허가 된 집과 허물어지는 교회, 누렇게 마른 들판과 끓어오르는 강물, 독으로 오염된 땅과 쓰러진 나무, 펑펑 터지는 폭탄과 질식하는 사람들, 갈가리 찢긴 사지.. 이토록 참혹하고 끔찍한 전쟁의 풍경 속에서도 사람들은 살아야 했다. 부모를 잃고 에티오피아군 총사령관의 집에서 하인으로 일하던 어린 소녀가 군대를 따라 전쟁터에 나가고, 죽음의 공포와 여성에게 가해지는 위협에 굴하지 않고 어엿한 전사로 거듭나는 과정은 우리를 역사 속 한 장면으로 데려간다. 1974년 현재와 1935년 과거가 교차되는 구성으로 숨가쁘게 진행되는 이 이야기는 수척하고 굶주린 얼굴의 어린 소년, 두려움에 일그러진 젊은 여자 등 사진으로만 보았던 전쟁의 풍경들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만들어 준다. 특히나 이 작품이 돋보이는 지점은 서사 그 자체보다 그것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 고대 그리스 연극을 연상시키는 구성과 서정적이고 시적인 문체가 독보적인 매력을 발휘한다. 실제 역사를 기반으로 현실의 개연성과 픽션의 재미를 모두 보여주는 이 아름다운 작품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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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택시에서 우주가 말을 걸었다
찰스 S. 코켈 지음, 이충호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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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건 다 이해하겠어요, 하지만 런던에서 승객을 태우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면, 소행성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전혀 없어요. 그렇지 않나요?」 옳은 말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는 한낮에 뻔뻔하게도 이런 것들을 생각하며 시간을 보낸다. 물론 그의 말이 맞다. 우리는 우주를 생각하면서 평생을 보낼 수는 없다. 쇼핑이나 집안 청소 등 그밖에도 해야 할 일이 많고, 그리고 직장에서 일도 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시간을 내 우주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고 믿는데, 그러면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더 넓은 시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p.83~84


때로는 심오한 질문이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바로 이 책처럼 말이다. 우주 생물학자인 저자는 어느 날 런던의 킹스크로스 기차역에서 다우닝가 10번지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그는 영국의 우주 비행사 팀 피크를 위해 총리가 주최한 파티에 초대받았는데, 그곳으로 향하던 중 호기심 많은 택시 기사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외계인 택시 기사도 있나요?" 이 질문은 겉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그 속에 훨씬 더 흥미로운 질문이 숨어 있었다. 외계인 택시 기사가 존재하려면, 우선 어느 행성에서 생명이 출현해야 하고, 그 생명체가 지능이 있어야 하고, 경제와 택시를 발명해야 하며... 등등 그 택시 기사는 자신도 모르게 다른 세계에 생명이 존재할 가능성과 우리 사회의 본질에 대한 비밀이 담긴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된 것이다. 이 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 책은 총 18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의 장은 공항에서 우주 비행 센터로 가는 길에서, 강연을 위해 대학교로 가는 길에서, 행성 탐사차 시험을 감독하기 위해 광산으로 가는 길에서 이루어졌다. 일상의 장소에서 평범한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로 진행되기 때문에 누구나 궁금했던 것들에 대해 쉽게 공감할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저 밖의 우주 어딘가에 나 같은 사람이 또 존재할 것인가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물론 지구 외의 장소에서 생명체의 흔적이 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은 아니지만, 가장 최신의 과학 데이터를 알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무심코 넘겨 버릴 수도 있는 이러한 의문에 대해 저자는 우주가 처음 생겨났던 순간부터 시작해 생명 출현의 역사를 차근차근 짚어 나간다. 35억 년 역사를 그렇게 단 몇 페이지만으로 임팩트있게 설명해주니 지루할 틈이 없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과연 우리가 우주에서 택시 기사가 있는 유일한 세계에 살고 있을 가능성과 우리 은하와 다른 은하들 곳곳에 촉수가 달린 채 수다를 떨기 좋아하는 택시 기사들이 승객을 태우고 외계 도시들을 달리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모든 장들이 그렇다 소소하게 시작해서 깊이 있게 파고들다가 생각할 거리들을 툭 던져준다. 이것이야말로 과학적 사고의 시작 아니겠는가.




사실, 우주 애호가인 나는 가끔 지구인이 펼치는 의식 행위를 기묘하게 바라볼 때가 있다. 우주 한쪽 구석의 이곳에 작은 암석 덩어리가 있는데, 그 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그중 일부는 크리스마스를 축하한다. 그들은 서로 어울리면서 잔을 들어 올리고, 칠면조를 입속에 집어넣고, 나무 밑에 선물을 숨겨 두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데, 그동안 이들이 서 있는 암석 덩어리는 우리은하의 다소 외딴 장소에 위치한 평범한 별 주위를 돈다. 나는 천문학적 생각으로 사람들의 기를 죽이고 싶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행동이 얼마나 무의미한지까지는 언급하지 않으려고 했다.                 p.216


이 책은 복잡하고 전문적인 용어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솔직하고 단순한 질문으로부터 출발해 우주와 생명,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우주에 대한 지극히 사소하고 농담 같은 질문들에 대해 매우 진지하고도 유머러스한 답변이 이어지는데, 어느 순간 과학적 사유가 펼쳐지는 것이다. 지구 밖에서 지적 문명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확실한 증거가 발견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우주에 대한 관심이 우리가 지구에서 겪는 고민도 해결해 줄 수 있을까, 만약 외계인이 지구에 오면 그들과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할까, 만약 화성에서 온 외계 미생물을 발견한다면 소독해서 박멸해야 할까, 만약 우주에서 우리만 유일한 생명체라면, 우리는 더 특별한 존재가 될까 등등 흥미로운 호기심에 대한 가장 지적인 대답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인간이 처음 달에 도착하고, 화성 탐사에 민간 기업들이 참여하는 모습을 보며 언젠가는 정말 공상 과학 영화나 소설 속 이야기처럼 달 여행이 일상적인 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사실 달보다는 화성에서 휴가를 보내는 것이 덜 어려울 것이다. 화성에는 적어도 대기가 있고, 여러 면에서 달보다 환경이 덜 혹독하니 말이다. 하지만 화성은 훨씬 먼 곳에 있다. 달 여행은 주말 휴일을 좀 연장해서 다녀올 수 있지만, 화성 여행은 1년 이상이 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일반인들에게도 우주여행이 가능한 일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렇게 막연하게 생각만 해왔던, 꿈같던 상상의 단계가 조금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가까운 미래의 가능성을 생각하는 단계로 옮겨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택시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우연히 마주친 상대와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의 짧은 이동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 대화라는 설정도 독특한 현장감을 부여해 책을 읽는 동안 내가 마치 택시에 함께 타고 달리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이렇게 정말 기발한 구성으로 쓰인 과학책인데, 놀랍도록 통찰력있고, 박식한 책이기도 하다. 우주를 다루고 있는 책 중에서 가장 호기심 넘치고, 현실적이며, 명쾌한 책이 아닐까 싶다. 과학을 좋아하지만 어려운 책은 부담스럽다면, 우주 생물학에 대해 쉽고 재미있게 접근해보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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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로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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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에는 비가 많이 내릿 탓인지 호수의 물이 춘흥루 바로 옆까지 찰랑찰랑하게 올라와 있었다. 신주로는 ─ 물론 당시에는 아직 이름을 알지 못했지만 ─ 실제 호수 바닥에서 올라온 요정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비틀거리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 그때 그의 보기 드문 아름다움을 어떻게 형용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바라보는 사이에 이가 딱딱 부딪치고 뼛속까지 차가워지는 듯한,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혔던 것을 지금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너무나 빼어난 아름다움은 서늘한 귀기를 불러온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p.61~62


X 대학 영문과 강사인 시나 고스케는 동료인 오쓰코쓰와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다 함께 여름휴가를 보내기로 한다. 오쓰코쓰는 시원한 산속에서 조용히 지내며 정리하고 싶은 연구가 있다고 신슈 지역에 가볼 예정이라고 말한다. 도쿄에서 머무는 것보다는 비용이 저렴할 거라는 그의 말에 시나도 함께 하기로 하는데, 그렇게 그들은 첫 열흘 정도는 부근의 온천장에서 보낸다. 그러다 아름다운 경치로 유명한 N 호반의 집을 소개받게 된다. 호수 바로 옆에 있는 그 집의 주인은 의사인 우도 씨로, 20년도 더 전에 은퇴해서 책만 읽으며 지낸다고 한다. 3,4년 전에 도쿄의 여학교를 나온 조카딸과 두 사람만 있다 보니 여름만이라도 객식구를 들이자는 말이 나왔다고 해서 두 사람은 그곳으로 향한다.


그런데 가는 길에 버스에서 거지보다 못한 복장에다 새처럼 날카롭고 새된 목소리로 말하는 한 노파를 만나게 된다. 그 노파는 두 사람에게 그곳에 가봤자 좋은 일은 아무것도 없을 거라며 "당신들 주변에 이제 곧 무서운 피의 비가 내릴 거야. N 호수가 피로 새빨갛게 물들 거야."라는 기분 나쁜 예언을 남긴 채 사라진다. 우도의 저택에 도착해 휴가를 즐기기 시작한 두 사람은 곧 조카딸 유미와 주인인 우도 외에 다른 사람의 기척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얼마 뒤 물에 젖은 미소녀의 모습을 보게 된다. 실제 호수 바닥에서 올라온 요정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은 어딘가 비현실적이어서 기괴한 느낌마저 들었다. 금빛의 물방울이 안개처럼 뿔뿔이 흩날렸고, 그의 낭창한 몸에서 마치 얼음처럼 차가운 아지랑이가 하늘거리며 솟아오르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뭐라 말할 수 없는 으스스함이 느껴졌던 것이다. 두 사람은 미소년에 대해 우도에게 이야기하고, 어쩐 일인지 우도는 심하게 놀란 모습을 보인다. 사실 전대미문의 미소년에게는 무서운 비밀과 음모가 숨겨져 있었는데, 그렇게 두 사람은 무시무시한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그 묘하게 표독스러운 색채로 칠해진 그림판이 한 장, 툭 떨어지면 일순 눈앞의 세계가 싹 변하고 마는 느낌...... 그때의 내 기분이 바로 그러했다. 유미를 안아 든 신주로가 사박사박 내리는 눈을 밟고 울타리 밖으로 사라짐과 동시에 나는 단숨에 몸을 잠식하는 공허감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공포나 절망을 훨씬, 훨씬 초월한, 일종의 허무한, 징...... 하고 전신에 취기가 도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치 여우가 빙의했다가 그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한동안 나는 망연한 기분으로 그 창가에 우뚝 서 있었다. 사박사박, 사박사박사바가...... 무심한 눈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자꾸만 내린다.                 p.187


에도가와 란포와 함께 전후 일본 추리소설의 토대를 쌓은 거장 요코미조 세이시는 일본의 국민 탐정이자 명탐정의 대명사로 불리는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로 유명하다. 이 시리즈는 국내에도 꽤 많이 소개되었는데, 총 총 77편의 작품에서 활약한 '긴다이치 고스케' 전에 요코미조 세이시가 탄생시킨 또 다른 명탐정이 있었다는 사실은 처음 알게 되었다. 이번에 국내에 소개되는 <신주로>부터 <나비 부인 살인 사건>까지 10여 년간 활약한 또 하나의 명탐정 '유리 린타로'이다. 경시청 수사과장을 지낸 백발 머리를 하고 있어 얼핏 노인처럼 보이지만, 날카로운 눈매와 건장한 몸의 40대로 온후한 성격의 명탐정이다. 유리 린타로 시리즈는 첫 번째 작품과 마지막 작품이 특히 백미로 손꼽히는데, 마지막 작품도 곧 국내에 소개될 예정이다. 


이 작품은 무서울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년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참혹하고 피비린내 나는 살인 사건을 그리고 있다. 진주처럼 아름다운 아이라는 뜻의 신주로라는 이름을 가진 미소년은 이름에 걸맞게 눈부시게 아름답지만 시골과 도시를 종횡무진하며 피의 지옥도를 그리는 수수께끼의 살인귀이기도 하다. 풍성하게 이마에 늘어뜨린 금발 머리, 비단벌레처럼 끈끈한 빛을 머금은 눈동자, 젖어 있는 듯한 입술... 하지만 영혼의 순수함과 정신적인 선함이 결여 되어 있는 미소년의 탄생 비화는 더 오싹한 비밀을 가지고 있다. 일본에선 세 차례나 영상화되었다고 하니, 미소년 역할을 누가했을 지도 궁금해질 만큼 독특한 캐릭터였다. 이 작품은 논리적인 추리와 탐미적인 묘사가 잘 어우러져 독특한 재미를 선사하는데, 신비하고 기괴한 분위기가 자아내는 공포감이 일품이다. 오래 전에 쓰인 작품이기에 고전적인 트릭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요코미조 세이시의 작품을 좋아한다면 이 작품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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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행복 - 버지니아 울프와 함께 정원을 걷다 열다
버지니아 울프 지음, 모명숙 옮김 / 열림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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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릅나무의 레몬색 잎들. 과수원의 사과들. 잎들이 속삭이고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나를 여기에 멈추게 하고, 인간의 힘이 아닌 얼마나 많은 힘들이 우리에게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빛이 타오른다. 사과는 반짝이는 녹색을 띤다. 나는 온몸으로 반응한다. 하지만 어떻게? 나의 창문 아래에서 작은 올빼미 한 마리가 울어댄다. 나는 다시 반응한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생각하는 바를 스냅사진 같은 이미지로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감각들 위를 표류하는 물이 새는 배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광선들에 노출되어 있는 감광판이다.                   p.31


거장들의 품격 있는 문장과 사유를 소개하는 열림원의 '열다' 시리즈, 그 세번째 책이다. 헤르만 헤세의 <미친 세상과 사랑에 빠지기>, 빈센트 반 고흐의 <싱싱한 밀 이삭처럼>에 이어 이번에 나온 것은 버지니아 울프의 <모두의 행복>이다. 에세이, 시, 소설, 편지 등 다양한 장르의 글과 사유의 흔적들을 찾아 모으고 엮은 것이 이 시리즈인데, 이번 책은 버지니아 울프가 정원과 풍경에 대해 쓴 글들을 모았다. <밤과 낮>, <댈러웨이 부인>, <등대로>, <올랜도>, <파도>, 세월> 등 버지니아 울프의 문학 작품 속에 묘사된 정원과 자연에 대한 대목들도 따로 엮어 더욱 의미가 있다. 


버지니아 울프의 삶은 그의 작품만큼이나 드라마틱했다. 남성 중심 사회에 살면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가졌고, 페미니즘 비평의 선구자이기도 했으며, 출판사를 운영하며 당대의 작가들을 발굴했고, 모더니즘 소설의 실험적인 작가로서 비평가와 독자 모두에게 인정받았다. 하지만 부모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는 딸이었으며, 만성적인 정신 분열증을 평생 겪었고, 결국 스스로 강으로 걸어 들어가 생을 마감했다. 평소에 버지니아는 별일 없는 한 매일같이 혼자 산책을 나서곤 했다. 콘월의 세인트아이브스, 켄싱턴 가든스, 하이드 파크와 큐 가든, 리젠트 파크 등 런던의 공원과 정원들에 대한 묘사가 담담하게 펼쳐진다. 자줏빛 일본산 아네모네가 무리 지어 피어 있는 잔디의 푸름, 정원을 온통 가득 채운 두툼한 금빛 크로커스, 꽃이 만발한 파이프 나무, 색종이를 오린 모양으로 꼿꼿하게 곧추서 있는 백일초와 금련화, 덩굴을 뻗으며 높이 자라는 무수히 많은 하얀 메꽃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정원을 걷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원 문의 돌쩌귀는 녹이 슬어서 아들이 문을 비틀어 열었어. 노새들이 뾰족한 발굽으로 때각거리며 들어오고 이탈리아 여자들이 어깨에 숄을 두르고 머리에 카네이션을 꽂고 샘물가에서 수다를 떨 때, 어린 시절의 강렬한 열정들, 지니가 루이스에게 키스할 때 내가 정원에서 흘린 눈물, 소나무 냄새가 나는 교실에서 느낀 나의 분노, 낯선 곳들에서 느낀 나의 외로움 등은 안전함과 소유와 친밀함으로 보상을 받지. 나는 평화롭고 성과가 많은 세월을 살았어. 주위에 보이는 것은 다 나의 소유야. 나는 씨앗들을 심어 나무들을 키웠어.               p.277~278


실제로 버지니아 울프는 일평생 정원을 가꾸었고, 자연을 가까이 하며 살았다. 버지니아 울프가 남편과 함께 1919년부터 1941년까지 22년간 살았던 몽크스 하우스에도 정원이 있었다. 이 집은 토지가 약 3000제곱미터에 달했는데, 고풍스러운 주택 한채 외에 과수원과 온실, 물고기연못, 정원 등이 별도로 있었다. 울프는 매일 아침 꽃이 황홀하게 피어 있는 정원을 가로질러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온종일 잡초를 뽑고 화단을 만들며, 그게 행복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묘한 감격을 맛보았다'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울프는 정원 가꾸기에 진심이었다. 정원의 작은 움직임에 생에 대한 감각을 붙잡고, 전쟁이라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산책로에서 행복에의 가능성을 좇았다. 


이 책은 총 5개의 장으로 이루어져있다. 유년 시절 세인트 아이브스의 여름 별장에서 경험한 자연을 시작으로, 평생 가장 애정을 가졌던 집이자 후기 대표작 대다수를 썼던 몽크스 하우스의 추억, 그리고 울프가 태어난 도시 런던에 관한 장면들이 이어진 뒤, 울프가 쓴 문학 작품들 속의 자연과 풍경을 만나본뒤, 마지막으로 유럽 각지를 여행한 울프의 여정이 등장한다. 영국,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까지 낯선 공간에서 느꼈던 여행자로서의 경험 또한 매우 흥미로웠다. 보통 버지니아 울프를 떠올릴 때, 침울하고, 핏기 없는 안색의 신경쇠약증 환자 같은 이미지를 먼저 생각하게 마련인데, 이 책을 읽으며 정원과 식물들, 그리고 계절을 느끼는 모든 감각들을 통해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된 것 같다. 무엇보다 하늘과 새와 꽃, 나무 등 자연에 동화된 울프의 모습이 행복해 보여서 너무 좋았다. 이 책을 통해 '정신병에 시달리다가 자살한 불행한 여성'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울프의 또 다른 면모를 만나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정원에 대한 묘사들이 어찌나 완벽하고, 우아한지 가보지 못했지만 눈 앞에 보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 버지니아 울프와 함께 정원을 걸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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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늙어간다는 것 - 80대 독일 국민 작가의 무심한 듯 다정한 문장들
엘케 하이덴라이히 지음, 유영미 옮김 / 북라이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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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렇게 빼앗기는 것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 박탈당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에 살지 말고 현재에 살아야 한다. 나이가 들면 과거의 일들이 자꾸 생각나면서 종종 과거를 미화하고 낭만화하기도 한다. 하지만 과거를 자꾸 돌아본다고 해서 현재가 더 견딜 만해지는 것은 아니다. 깨어서 적극적으로 현재를 살 때 현재는 의미를 획득하고 더 살 만해진다.            p.117


누구나 나이를 먹는다. 늙는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이다. 나이가 들수록 시력이 나빠지고, 흰머리가 나며, 기억력이 감퇴하고, 주름도 많이 생기고, 면역력도 떨어진다. 생물학적으로 늙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이지만, 그 늙어 가는 모습은 모두 제각각이다. 건강한 생활 습관을 유지해왔다면 조금 더 육체적으로 편할 것이고, 육체적으로는 쇠약해졌지만 인생을 대하는 태도는 여전히 유쾌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생물학적으로 늙는 대신 연륜과 지혜를 얻게 되었으니 그것 나름대로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거라면, 어떻게 나이 들고 싶은가,에 대한 생각을 한 번쯤 해보면 좋을 것 같다. 


이 책은 독일 문단에서 오랫동안 영향력을 발휘해온 소설가이자 문학평론가인 엘케 하이덴라이히가  ‘나이 듦’이라는 주제에 대해 쓴 것이다. 올해 82세에 접어든 저자의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아마존 종합 1위를 기록하며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저자는 어린 시절이 암울했기에 자녀를 두지 않았고, 결혼 생활이 잘 맞지 않아 두 번 이혼 했으며, 살아오면서 이렇다 할 운동을 한 적도 없고, 평생 담배도 숱하게 피우고 술도 많이 마셨다. 그렇게도 수많은 베스트셀러 책을 썼기에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고, 지금 책으로 가득한 집에 앉아 있으니 정말 멋진 인생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러다보니 나이를 먹었는데, 거둬둘 가족도 없고, 지금의 파트너는 스물여덟 살이나 어린 세상 물정 모르는 예술가라 자신을 돌봐줄 것 같지도 않아, 자신의 힘으로 생활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면 간병인을 구해서 가능하면 자신의 집에서 지내려 한다고 명쾌하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는 생각한다. 온종일 그 모든 뉴스와 부당한 요구, 쓸데 없고 사소한 것들에 시달리며 살다가 간혹 담배 한 대 피우고 약간 과음을 한들 무슨 큰일일까? 한 번쯤 안전벨트를 매지 않고 운전하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 늘 한결같이 안전과 건강을 따지고, 시시콜콜 정치적 올바름을 따지고, 원리원칙을 따지는 사람들이 나는 가끔 신경에 거슬린다. 에고, 이런 말을 했으니 또 분노에 찬 편지들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뭐, 알아두시라. 편지에 답장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긋나긋한 노인이 아니니. 언제나처럼 나는 나일 따름이다.                p.202~203


이 책은 독일의 한저 출판사가 10개의 주제로 10권의 에세이집을 기획했는데, 그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다. 첫 번째 작가로 선정된 엘케 하이덴라이히에게 주어진 주제가 '나이 듦'이었고, 처음에는 시큰둥했다고 한다. '뭐야, 날 더러 늙어가는 이야기를 쓰라고? 아, 싫어.'라고 생각했다니 말이다. 하지만 곧 '흠, 내 나이가 80이니 나이 듦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게 맞겠군.'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이 멋진 책이 탄생하게 되었다. 저자는 나긋나긋한 할머니라는 사회적 틀을 단호히 거부하고, '평생 그러했듯 냉소적이고 고집스럽고 투쟁적으로 늙어갈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노년은 인생의 아주 멋진 시기이고, 세상에 더 이상 자신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나이이자 기쁨이 되는 일만 할 수 있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 책은 노년을 아름답게 포장하거나 두려움으로 물들이지 않고, 나이 든 사람 특유의 용기와 솔직함으로 ‘나답게’ 늙어갈 수 있는 법을 유쾌하게 보여준다. 


나는 20대 까지는 한해, 두해 나이를 먹는 것을 체감했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30대부터는 숫자에 조금씩 무감각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서류에 나이를 기재할 일이 있거나, 누군가 나이를 묻는 상황이 생기면 꼭 나이를 세어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이제껏 인류사에서 그 누구도 살아본 적 없는, 평균수명이 긴 시대를 살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내 나이'는 '나'라는 사람을 어떻게 설명해주고 있을까에 대해서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우리 부모세대와는 다르게 늙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부모 세대보다 더 오래 정신적으로 민첩하며 양질의 의료 서비스도 누리고 있다. 옛날의 오십대와, 오늘날의 팔십대는 완전히 달라졌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늙어가는 것을 배울 수 있을까? 연약해져만 가는 걸, 그럼에도 살에 달라붙어 살아가는 걸 배울 수 있을까. 삶을 대하는 저자의 태도로부터 나는 늙어가는 것을 배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노년이 온갖 덫으로 가득한 비극적인 운명이 아니라 '삶의 기술'이 되어줄 수도 있다고 말이다. 이 세상에는 새로운 것들이 계속 태어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어떤 세계가 꾸준히 사라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이 들어야 할까. '나이 드는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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