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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잃어버린 심장
설레스트 잉 지음, 남명성 옮김 / 비채 / 2025년 5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요즘 아버지는 언어에 대해 별로 말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도서관에서 눈알이 빠지도록 고되게 일해서 피곤했다. 아버지는 침묵에 싸여 집으로 돌아온다. 잔뜩 쌓인 책, 서늘하고 들큼하고 퀴퀴한 공기, 통로에 하나씩 달린 조명으로는 밀어낼 수 없는, 어깨 위를 맴도는 어둠에서 온 침묵이 아버지에게 배어든 것 같다. 버드는 아버지가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로 엄마 얘기를 묻지 않는다. 두 사람 모두 되돌릴 수 없는 일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p.23
검열과 침묵이 일상이 된 근미래의 뉴욕, 미국 전통문화 보존법 ‘PACT’을 지키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모두 배척된다. 이는 미국의 가치를 보호하기 위한 사회적 약속으로 미국답지 않은 생각과 미국에 이롭지 않은 이념, 미국적이지 않은 얼굴은 모두 탄압의 대상이 된다. ‘PACT'에 반대하거나 저항하려는 사람들은 집에서 쫓겨나 재배치되었고, 가족들과 떨어져 살아야 했다. 사람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PACT'가 상황을 평화롭고 안전하게 만든다고, 그에 반하는 것은 비애국적인 행동이라고 배우고, 믿으며 살아왔다. 아버지와 단 둘이 살고 있는 열두 살 소년 버드는 어느 날 편지를 한 통 받는다. 발신인 주소도 없이, 오직 그림으로만 채워진 종이 한 장이었지만 버드는 편지를 보낸 사람이 자신이 아홉 살이 되던 해에 갑자기 사라져 버린 어머니라는 걸 알아본다. 버드는 편지 속 그림을 보며 어릴 적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린다.
‘PACT'는 십 년도 전에 만들어진 법으로 압도적 다수의 찬성을 얻어 통과되었고, 기록적인 속도로 선포되었다. 이후로 파괴적 시위는 과거가 되었었는데, 지난 몇 달 동안 곳곳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위나 행진, 폭동처럼 교실에서 배운 파괴 행위는 아니었지만, 뭔가 새롭고 이상한 행동이었다.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기묘한 행동, 신고할 필요도 없는 해괴한 짓들이 이어졌던 것이다. 누가 한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전부 ‘PACT'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버드는 의문의 편지를 받고 얼마 뒤, 거리에서 '우리의 잃어버린 심장을 돌려달라'는 문구를 발견한다. 그 문구는 아시아계 출신 무명 시인이었던 어머니가 쓴 구절 중 하나였다. 어머니도 어디선가 시위를 조직하고, ‘PACT'에 맞서 싸우기 위해 뭔가 하고 있는 것일까. 버드는 편지를 단서 삼아 왜 떠났는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는 어머니를 홀로 찾아 나서기로 한다. 버드는 과연 어머니를 찾아내 숨겨진 진실을 마주할 수 있을까.

아이가 이해할 수 있을까? 희미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탁자에 펼쳐둔 노트를 내려다본다. 줄지어 적힌 다른 사람들의 온갖 이야기. 그들의 기억과 후회, 실패와 사랑, 다시는 만나지 못할 수도 있는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그냥 삶이 아닐까, 그녀는 생각한다. 기쁨과 저울질하지 않고 단순히 그 위에 덮어씌우는, 끝없이 이어지는 죄의 목록. 두 가지 목록이 서로 섞이고 합쳐지면서 모든 작은 순간이 사람을, 관계를, 인생을 모자이크처럼 이루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버드는 무엇을 배우게 될까? 엄마도 실수할 수 있다는 것. 그녀도 그저 인간에 불과했다는 것. p.380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라는 작품으로 만났던 설레스트 잉의 신작이다.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는 대단히 영리하고, 굉장히 놀라운 작품이었다. 군더더기 없이 예리한 문장, 탄탄하게 짜임새 있는 구조, 페이지를 바삐 넘기게 만드는 미스터리로서의 긴장감, 그리고 그 속에 담겨 있는 삶에 대한 질문들까지 묵직한 울림을 남겨 주었다. 인물들의 대사, 사소한 행동, 그들이 맺고 있는 관계, 그들이 품고 있던 생각들이 여기저기 흩뿌려져서 뒤에 이어질 사건의 단서가 되고, 복선이 되었다. 마치 티비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특별할 것 없는 일상들이 전개되는데, 인물 한 명 한 명의 사연들이 모두 공감되고, 이해되는, 그래서 나의 이야기이기도, 혹은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그런 작품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오랜 만에 만나는 이번 작품 역시 매우 궁금했다.
이번 작품은 근미래를 배경으로 그려지는 디스토피아로 인종, 공동체, 화합의 문제를 깊숙이 탐구한다. 셀레스트 잉은 어린 시절 학교에서 유일한 아시아계 학생이었고, 비교적 평범하게 보냈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조금 다른 존재’처럼 느껴졌다고 말한다. 그렇게 내부자이면서 외부자인, 경계인으로서의 감각을 간직해왔고, 팬데믹이라는 위기가 덮쳤을 때 이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팬데믹 이후 더욱 선명해진 아시아계 차별을 중심으로 정교하게 설계된 이 작품은 시대를 관통하며 깊은 울림을 남겨 준다. “젠더에서 인종으로, 《시녀 이야기》의 충격을 다시 쓰다”는 평가처럼 대단히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미국적이지 않은 것은 모두 추방하라'는 오직 미국인만을 위한 미국, 이라는 설정은 바로 지금 현재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듯한 통찰과 시대성을 담고 있어 더욱 인상적이었다. 나날이 견고해지는 분리의 장벽 앞에서 소설은 언어와 이야기만이 되살릴 수 있는 힘과 기억이 있음을 증명해 보인다. 디스토피아라는 장르적 외피를 통해 오늘날 사회 곳곳에 스며든 폭력과 고립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이 아름답고, 놀라운 작품을 놓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