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을 위한 길고양이 안내서
이용한.한국고양이보호협회 지음 / 북폴리오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살다가 길에서 죽는 것이 길고양이의 운명이지만, 한국에서는 그들의 삶이 유난히 힘겨운 게 사실이다. 한국에서 길고양이의 평균 수명은 길어야 3년 안팎에 불과하다. 집고양이가 평균적으로 15년 안팎을 사는 반면, 길고양이의 수명은 그것은 5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 동네에서도 거의 매일 길고양이들을 만난다. 아이가 한참 동물에게 관심이 많을 시기라 길에서 고양이를 만나게 되면 걸음을 멈추고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물론 대부분의 길고양이들은 아이를 피해 훌쩍 어디론가 달아나 버리곤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고양이와 인사를 나누고서 돌아서 가는데 아이가 말한다. "근데 야옹이 엄마는 어디갔어?" 어린 아이의 눈으로 보기에도 추운 날씨에 혼자 다니는 고양이의 모습이 안쓰러웠나보다. 길고양이들을 만날 때마다 생각한다. 제대로 쉴 곳은 있는지, 충분히 먹을 수는 있는지.. 저들의 집은 어디인지.. 저들은 왜 이런 날씨에 길거리를 떠돌아 다녀야 하는지.

 

지금 이 순간, 우리 주변에서 가장 멸시받으며 사는 생명체가 있다면 바로 길고양이들일 것이다. 잘못된 속설 탓에 미움의 대상이 되어 왔고, 관절염에 효능이 있다는 근거 없는 미신으로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으며, 쓰레기봉투를 뜯고 시끄럽게 운다는 이유로 잡혀가 안락사를 당하거나 텃밭을 파헤쳤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기도 한다.

 

그러나 길고양이가 수난을 당하는 만큼 그들을 지키려는 활동이 활발한 나라도 우리나라라고 한다. 길고양이를 돌보는 캣맘, 캣대디들이 바로 그 최전선에 있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거나, 학대에 맞서 감시자 노릇을 하기도 하며, TNR을 통해 고양이에 대한 민원을 해결하기도 한다. 이들은 고양이를 적대시하는 사람들과 길고양이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함으로써 사람과 고양이의 공존을 모색하는데, 이 책 또한 그 일환으로 쓰여졌다고 볼 수 있겠다.

 

 

고양이 작가이자 10년차 ‘캣대디’인 이용한 작가는 이 책에서 길고양이의 특징, 성장 과정, 고양이 용어 같은 개괄적인 부분을 쓰고, 고양이 보호 시민단체인 ‘한국고양이보호협회가 길고양이 구조, 치료, 포획 등 TNR과 의학적인 부분을 책임 집필했다. 거기에 더해 이용한 작가의 애정이 담긴 생동감 넘치는 길고양이 사진들과 일러스트레이터 봉지 작가의 귀여운 고양이 그림이 길고양이에 대해서 조금 더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게다가 이 책의 수익금 일부는 길고양이 구조, 치료 지원에 쓰인다고 하는데, 내용도 그렇지만 책의 의도 또한 어딘지 뭉클한 부분이 있다. 길을 걷다 지나다니는 길고양이들을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한 번이라도 관심있게 지켜본 적이 있는 이들이라면 아마 대부분 그러지 않을까 싶다.

 

 

길고양이를 입양하기에 앞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 고양이와의 교감과 성격 파악이다. 가끔 SNS나 인터넷 고양이 커뮤니티에는 아무런 준비나 교감의 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무작정 길고양이를 데려다 키우겠다는 글들이 올라오곤 한다. 야생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길고양이는 그들 나름의 자유와 질서가 있고, 길 위에서의 삶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마땅히 존중 받아야 한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수년에 걸친 길고양이 돌보기 경험에서 얻은 노하우를 전해주고 있다. 길고양이 밥 주기나 인도적인 TNR 방법, 길고양이를 입양하기 전 확인해야 할 사항들은 물론 길고양이로 인한 다툼에서 상대를 설득하는 법과 최근 대두되고 있는 애니멀 호더 문제, 고양이 톡소플라즈마까지 우리가 알아야 할 다양한 정보와 전문 지식들이 담겨져 있다. 각 챕터가 끝날 때마다 길고양이를 돌보며 마주하게 될 여러 상황에서 궁금한 점들이 질문, 답변 형식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길고양이 밥을 주지 말라는 공문이 붙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 고양이에게 해로운 음식은 어떤 게 있느냐, 길고양이들을 보호소에 보내주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과 길고양이 사진 찍기, 고양이에 관한 명언들까지 수록되어 있어 자칫 무겁거나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부분들까지 재미있고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로버트 앤슨 하인라인은 "지구에서 고양이를 대하는 당신의 태도가 천국에서 당신의 처지를 좌우하게 될 것이다" 라고 했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인생에 고양이를 더하면 그 합은 무한대가 된다"고 했으며, 찰스 디킨스는 "고양이의 사랑을 받는 것보다 더 큰 선물은 없다"고 말했다. 고양이에 관한 명언들을 보면 유독 작가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샘 칼다의 <그 남자의 고양이>라는 책에서도 느꼈지만, 예술가들, 특히 작가들이 고양이를 편애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 그들 만큼은 아니더라도, 길고양이들을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아주 조금씩만 그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는 귀여운 고양이가 그려진 스티커와 길고양이 먹이 안내 스티커, 독극물 살포 경고 스티커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프다.

 

"길고양이에게 사료를 주는 것은 불법이 아닙니다."

"잔인하게 동물을 죽이는 행위는 동물보호법 위반에 해당되며,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벌금 2,000만원 이하에 처해지는 범법 행위입니다."

 

실제로 올해 3월부터 동물학대 시, 동물법 제8조 및 제46조 규정에 의해 이런 처벌이 가능하다고 하니, 그나마 위안이 된다고 할까. 뉴스 보도에서 접하게 되는 정말 말도 안 되게 잔인하고 끔찍한 동물학대를 볼 때 마다 분노에 휩싸이곤 했는데, 그래도 조금씩 좋은 방향으로 우리 사회가 바뀌어 나갈 수 있기를 바래본다.

 

요즘은 수많은 고양이 집사와 고양이 콘텐츠가 생기면서 애묘인들이 늘어나 고양이에 대한 인식 자체도 놀랄 만큼 향상된 시대이지만, 그럼에도 대다수의 길고양이 들은 우리나라에서 천대받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은 길고양이를 위해 길 위에서 분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힘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과 더불어, 그들을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관심이 전혀 없었던 이들 조차 조금씩 마음을 열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역할을 해주었으면 한다. 고양이와 사람이 함께 공존하는 삶을 위해서, 더 많이 가진 인간들이 더 많이 인정을 베풀 수 있는 따뜻한 사회가 될 수 있도록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대한 중서부의 부엌들
J. 라이언 스트라돌 지음, 이경아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1월
평점 :
절판


 

계산대의 직원은 설마하니 그녀가 화장실에서 이걸 먹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상관없어, 괜찮아. 그녀는 손가락을 집어 넣어 따듯한 녹색 덩어리를 한 움큼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 맛있어!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난생처음이었다. 아마 이 젤리를 먹은 일이 지금껏 한 일 가운데 가장 잘한 일 같았다. 그녀는 또 한 움큼 떠서 혀에 짓이기듯 집어넣었다. 믿을 수 없는 맛이었다. 지금껏 무엇을 기다렸단 말인가? 무엇을?

레스토랑 셰프인 라르스는 요리 재료에 관심이 많은 웨이트리스 신시아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그들은 딸 에바를 가졌고, 라르스는 생후 몇 달밖에 안 된 딸의 이유식 식단을 짜며 몇 주를 보낸다. 생후 3개월된 아기에게 돼지 항정살로 만든 퓌레를 주고, 4개월된 아기에게 당근 케이크를 먹이겠다는 아빠라니.. 어쩌면 이 때부터 에바의 천부적인 재능이 싹 트기 시작한 건지도 모르겠다. 에바에게 온통 마음이 빼앗겨 있던 라르스와 달리 겨우 스물다섯이던 신시아는 집에서 아기만 보는 생이 지겨워죽겠다며 육아 휴직기간도 채우지 않고 복직을 선언한다. 결국 소믈리에를 꿈꾸던 그녀는 자신이 엄마로서 적당하지 않은 것 같다며 자유로운 삶을 찾아 떠나 버린다. 홀로 남겨진 라르스는 지극정성으로 에바를 기르지만, 얼마 안 가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숨을 거두고, 에바는 삼촌과 숙모가 부모인줄 알고 자라게 된다.

 

어느덧 10소녀가 된 에바는 남들보다 덩치가 크고 어린데 비해 똑똑하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서 괴롭힘을 당하곤 했다. 삼촌 부부는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에바의 요리에 대한 재능 같은 부분들까지 헤아려주지는 못했다. 에바는 여덟 살 때 사촌오빠에게 선물 받은 재배 도구로 할라폐뇨를 키우기 시작해, 열한 살을 앞둔 지금은 멕시코 레스토랑의 대표 요리에 들어가는 이국적인 고추들을 공급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에바는 한 세대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놀라운 미각을 지닌 소녀였다. 유명 레스토랑에 갔다가 음식을 먹어 보고 들어간 재료들을 알아맞히면서 그곳의 셰프가 제안해 주방 인턴으로 일을 하게 된다. 본격적으로 진짜 요리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 그녀가 셰프의 꿈을 키워나가는 과정이 시작된다. 대부분 요리나 음식을 소재로 하는 이야기의 경우, 음식 자체에 집중하거나, 주방에서의 생활 등이 리얼하게 그려지게 마련인데, 이 작품은 굉장히 독특한 방식과 구성을 취하고 있다. 단지 놀라운 미각을 가진 천재 셰프의 성공기였다면 어느 정도 식상한 부분도 있었을 텐데, 이 작품은 그녀의 고향인 미국 중서부 지역 사람들의 생활 속에 담겨 있는 음식들의 이야기가 메인이라 독특한 구성에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았다.

 

에바 토르발은 그녀가 로브 크레이머의 주방에서 처음 보았던 괴상한 풋내기가 더 이상 아니었다. 모든 면에서 그녀는 진화를 한 게 분명했다. 두 팔은 나뭇가지처럼 튼튼하고 입술은 안젤리나 졸리처럼 육감적이며 양손은 주방장답게 흉터로 뒤덮였고 두 발은 콘크리트 블록처럼 든든하고 가슴은 풍만하고 그녀의 엉덩이를 주제로 랩의 가사를 쓰면 좋을 것 같은 스물네 살의 에바는 눈이 부실 정도로 당당했다. 그녀는 그저 소녀에서 여자로 성장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바로 뒤에 커다란 느낌표가 달린 여자였다. 강인하든 허약하든 모든 여자의 원류인 까마득히 먼 과거의 원시인의 강인하고 야만적인 여성성이 고스란히 발현한 여자였다.

이 작품은 전체 여덟 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는 에바의 부모 이야기, 두 번째는 에바의 어린 시절 이야기이고, 나머지 챕터들은 모두 그녀의 주변 인물들의 관점으로 진행된다. 에바의 관점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겨우 한 챕터에 불과하다. 따라서 각 챕터마다 해당 챕터의 주요 인물들의 삶과 관련 음식들의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그 속에서 에바의 모습이 가볍게 스쳐 가기도 하고, 에바와 직접적인 에피소드로 연결되기도 하는 등 다양한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 듣게 되는 한 사람의 인생이 굉장히 재미있었다. 특히 초반부 에피소드에서 에바가 살인적으로 매운 칠리 고추들을 재배하면서 매운 음식을 잘 먹게 되어, 어른들도 먹기 힘든 매운 음식 먹기 대회에서 승리하는 모습, 그리고 자신을 괴롭히던 남자아이들을 그 매운 고추를 이용해 혼내주는 모습은 유쾌하기도 했고, 음식을 통해서만 빚어낼 수 있는 이야기라 흥미롭기도 했다. 특히나 말린 대구를 삭혀 만든, 톡 쏘는 냄새의 노르웨이 전통 요리인 루테피스크나, 세상에서 제일 매운 고추로 알려진 칠리 고추인 초콜릿 아바네로, 피망에 식초, 설탕, 과일 펙틴 등을 넣어 만드는 음식인 스위트 페퍼 젤리 등 한국에선 쉽게 접하기 힘든 독특한 요리나 식재료들이 등장해서 미식 여행을 즐기게 해주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요리와 일상을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인데다, 한참 먹방이니 쿡방이니 방송 프로그램들이 인기를 끌면서, 바야흐로 대세는 요리하는 남자인 시대이다. 그래서 유명 셰프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나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까칠하지만 매력적인 남자 셰프들이었는데, 이 작품 속 에바는 천재 여성 셰프로서 그들만큼이나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의 인생 여정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다양한 인물 군상들의 삶 속에서 보이는 과정으로 진행되는 스토리라 더욱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작품이 가진 또 하나의 매력은 읽는 동안 눈을 즐겁게 하는 요리의 향연이 아니었나 싶다. 낯선 식재료와 이해하기 힘든 레시피도 있었지만, 새로운 음식 문화와 그것을 즐기는 풍경 만으로도 뭔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이 뭐 먹으러 갈까였으니, 정말 음식을 '보는 즐거움'이 최고였던 작품이기도 했다. 요리가 멋진 일이라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여러 가지 감각을 활용하는 거라는데 있는데, 예를 들면 소스가 타면 냄새로 알 수 있고, 생선이 다 구워지면 소리로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글로 표현되는 감각적인 부분이 실제로 먹고 보는 것만큼이나 멋진 경험을 하게 해주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작품은 따뜻하고, 위로되고, 유쾌하고, 맛있는 작품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스터 미드나잇 스릴러
로저먼드 럽튼 지음, 윤태이 옮김 / 나무의철학 / 2018년 1월
평점 :
절판


그때 그가 몸에 걸친 근사한 이탈리아산 리넨 셔츠와 싸구려 폴리에스터 넥타이가 눈에 들어왔어. 둘 사이의 괴리가 너무 커서 한 사람이 고른 물건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지. 둘 중 하나는 선물로 받은 게 틀림없어. 선물로 받은 게 넥타이라면 선물한 사람의 성의를 무시하지 않았으니 좋은 사람이라는 뜻일 거야. 네게 이야기한 적이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언제부터인가 눈앞에 닥친 상황을 모면하고 싶을 때면 머릿속으로 자꾸만 엉뚱한 생각을 하는 버릇이 생겼어.

그날, 뉴욕에 사는 비어트리스는 남편 토드와 함께 집에서 손님들에게 일요일 점심식사를 대접하고 있었다. 그들 부부는 비어트리스의 임원 승진을 축하하며 로맨틱한 휴가를 보내고 막 돌아온 참이었다. 그때 엄마에게 전화가 온다. 나흘 째 여동생 테스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소식이었다. 비어트리스는 정신 없이 비행기에 올라 고향 런던으로 향한다. 비어트리스와 테스는 매일 전화와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던, 굉장히 가까운 자매였다. 하필 지난 주에 집을 떠나 며칠 여행을 간 곳이 산속이라 휴대전화도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이 동생과 유일하게 연락을 할 수 없었던 텀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아무런 짐작 가는 일도 없이 동생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거기다 테스는 임신 중이었고, 예정일이 삼 주 뒤인 상태였다. 테스의 실종을 둘러싼 정황들을 조사하고 알게 될수록 비어트리스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잘 안다고 여겼던 동생의 낯선 모습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공원의 폐쇄된 화장실에서 동생의 시신이 발견되고, 모든 정황 증거들은 테스가 현실을 비관해 자살한 것처럼 보인다. 경찰 역시 자살로 안정하고 수사를 종결하려고 하지만, 비어트리스만은 테스가 절대 자살할 리 없다고 확신한다.

가족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란 어렵다. 거기다 그것이 자살이라는 형태로 다가온다면, 현실을 부정하고 그 죽음에 대해 원망할 누군가를 찾고자 하는 마음 또한 당연할 것이다. 경찰 역시 비어트리스의 반응을 동정심 가득한 눈빛으로 보지만, 그들의 태도는 단호했다. 게다가 남편 토드 역시 그녀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당신이 그렇게 믿고 싶다고 해서 그게 진실이 되는 건 아니라고. 이제 그만 현실을 직시하라고. 하지만 비어트리스는 동생이 살해당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테스는 절대로 자살할 리 없었으니까.

크롬메드 사옥을 나와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 동안 운명에 대해 생각했어. 인간의 삶이라는 실을 잣고 그 길이를 잰 뒤에 싹둑 자르는 보이지 않는 손길에 대해. 그리고 또 인간의 DNA에 대해 생각했어. 우리 몸 구석구석 모든 세포 속에 우리의 운명에 대한 코드를 담고 있는 이중나선구조에 대해. 그러고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과 과학이 결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라는 사실을 떠올렸어.

마치 온 세상이 담합이라도 한 듯, 입을 모아 비어트리스의 의심들을 부정한다. 테스의 죽음에 얽힌 진상을 보기 위해선 오로지 비어트리스 혼자 뭔가를 찾아내야만 하는 상황인 것이다. 사람들은 매일 같이 병사든, 사고든 어떤 이유로든지 죽는다. 그리고 누군가 또 새로 태어나고, 그렇게 세계는 순환한다. 하지만 매일같이 벌어지는 죽음이란 것도 당사자와 그 가족에겐 일상이 될 수 없다. 게다가 이런 종류의 죽음이란 마음의 준비를 전혀 할 새 없이 그저 맞닥뜨리게 되는 일들, 이해하고 감당할 수 없어 그저 견뎌내야만 한다. 남겨진 가족들은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고, 극복해야만 한다. 비어트리스는 춥고 어두운 화장실에서 홀로 죽어간 동생을 위해서라도 진상을 밝혀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로 인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말이다. 주변 사람들 모두가 그녀의 위험한 추적을 반대하지만, 그녀는 홀로 꿋꿋하게, 포기하지 않고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애쓴다. 그 과정에서 속속 모습을 드러내는 진실의 무게는 점점 무거워지고, 결국 그녀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홀로 감당하기 어려운 그것이었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비어트리스가 동생에게 말하는 형식의 편지로 진행된다. 사라진 동생의 뒤를 쫓으며, 죽음에 대한 진상을 추적하며 써 내려간 편지와 그녀가 국선 변호사인 라이트씨에게 진술하는 부분이 교차로 보여지고, 과거 동생과 나누었던 대화들이 회상으로 등장하고, 그렇게 이야기는 점점 사건의 진상에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범인이 검거된 건지, 그가 누구인지, 테스가 자살이 아니라 살해된 것이 맞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저 비어트리스가 이 사건을 직접 수사했을 뿐 아니라 주요 증인이라 그녀의 증언으로 사건을 마감할 수 있다는 것 정도만 드러나 있을 뿐이다. 시종일관 사라진 동생을 그리워하면서 써내려 간 애달픈 편지 형식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여느 범죄소설이나 스릴러와는 달리 진행이 매우 느린 편이다. 서정적인 문장과 세밀한 감정 표현, 호흡이 긴 서사 구조가 낯설거나 지루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류의 장르에 기대하는 것이 빠른 전개와 강렬한 한 방이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느리게, 천천히 읽어야만 제대로 느끼고 볼 수 있는 작품이다. 그래야 후반부의 반전에 이르러서 차곡차곡 쌓아온 감정의 둑이 터지고 말 테니까. 나는 그 순간 이해했다. 작가가 왜 인물의 성격과 감정 묘사에 그렇게 공을 들이며 호흡을 천천히 가져가려고 했는지. 서늘하고, 아름답고, 오싹하고, 가슴 뭉클해지는 작품이었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엇이든 쓰게 된다 - 소설가 김중혁의 창작의 비밀
김중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글을 쓴다는 것이 가언을 만드는 일과 표어를 찢어버리는 일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글을 통해 끊임없이 어떤 명제를 만들거나 정의를 내리고 싶어 한다.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글을 쓰지만, 그 글로 자신이 온전하게 표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단언하듯 문장을 만들지만 그 문장이 얼마나 불안정하며 바보 같은 것인지도 알고 있다. 바보 같은 줄 알면서 계속 쓰고, 단언하지 않으려 하면서도하얀 눈 위의 구두 발자국같은 문장을 끊임없이 찍어낼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 속에서 흔들리며 글을 쓴다.

책을 읽는 것을 즐겨 하는 이들은 대부분 글쓰기에도 관심이 많다. 하지만 읽어본 수많은 작법서, 글쓰기, 문장 등에 대한 책들은 사실 다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라는 건지, 일단 잘하라는 건지, 즐기다 보면 잘하게 된다는 것인지, 잘하기 위해서는 먼저 즐기라는 것인지' 유명한 잠언이나 경구 들은 하나 마나 한 말들이거나, 어쩌라는 것인지 난처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을 테니까 말이다. 이번에 만난 이 책은 조금 다르다. 소설가 김중혁이 처음으로 밝히는 글쓰기 비법과 창작의 비밀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장난기 어린 태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의 절반 이상은 문법, 문장, 이야기 구성 등등에 관한 비법이 아니라 작가라는 존재의 신변잡기에 가까운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창작의 도구들이라고 해서 글을 쓸 때 필요한 물품들의 나열로 시작해서 글을 쓸 때의 일상, 쓰지 않을 때의 일상, 서점의 발견과 글을 쓸 때 듣는 음악 리스트에 이르기까지 잡다한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그러고는 창작의 시작 단계를 거쳐 실전 글쓰기 항목에 이르지만, 뭐 딱히 작가 만의 창작 비법이라든가 글쓰기에 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처럼 느껴지진 않는다. 다만 우리는 소설가라는 인물의 머릿속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을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작가라는 존재는 뭔가 대단히 창조적인 영감이 번뜩이는 순간을 마주하고, 갑자기 뭔가에 영향을 받아 마구 글을 써내려 갈 줄 알았던 이들이라면 실망할 수밖에 없는, 지극히 평범하고 공감되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보여지는 것이다. 하지만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미 여러 권의 책을 집필한 그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평소에도 김중혁 작가의 소설을 즐겨 읽었고, 그가 진행하는 팟캐스트도 자주 들었던 나 같은 독자들이라면 그 친근함이 이 책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는 느낌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종이 위의 문장들은, 일종의 평행 우주다. 종이 위의 문장들은 실재하는 현실과 무척 닮아 있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글을 쓰는 사람은 종이 위에서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고, 가보지 못한 길을 상상할 수 있다. 픽션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글이 그렇다. 우리는 글 속에다 새로운 우리를 창조할 수 있다. 우리는 글을 통해 우리가 더 좋은 사람인 척할 수 있다. 더 현명하거나 더 세련된 사람인 척할 수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나 그럴 수 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더 나은 사람인 척하는 것은 아주 다른 일이다. 글쓰기는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른다.

작가는 인생을 두 배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한다. 길에서 만나는 여느 사람들처럼, 건널목을 건너고 아침에 출근하는 그런 일상생활이 첫 번째 인생이고, 글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아 모든 것을 곱씹는 순간들이 두 번째 인생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김중혁 작가는 이 책에서 바로 그 첫 번째 인생으로 농담처럼 이야기를 시작해, 점점 두 번째 인생을 보여주며 작가로서의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내용이 너무 가벼워서 책장이 쉽게 넘어 가는데, 이상하게도 책의 후반부에 이르게 되면 어떤 글이든, 무엇이든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게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심각하지 않고, 어렵지 않고, 딱딱하거나 복잡하지 않은 글쓰기에 관한 두서 없는 생각들이 결국 목적지로 도달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은, 이 모든 것들이 다 작가의 명백한 의도라는 얘기일 것이다. 글쓰기란 머리 아프고, 심각한 것이 아니라는 것, 항상 바쁘고 시간이 없다고 핑계 대는 것은 변명일 뿐이라는 것,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생각만으로 뭔가를 창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다 헛소리라는 것, 그리하여 우리가 실제로 손을 계속 움직여 써 내려가는 과정을 시작할 수 있게 만들고 있으니 이 책은 자신의 제목을 고스란히 책임지고 있는 대단한 경험을 하게 해주는 것이다.

'읽기는 쓰기를 낳고, 쓰기는 다시 읽기를 낳는다'고 생각하는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글쓰기에 관련된 책 좀 읽어봤다 싶은 이들에게는 듣도 보도 못한 독특한 경험을 하게 만들어 줄 것이고, 글을 쓰고 싶지만 첫 문장을 어떻게 써야 되는 건지 에서부터 막막한 이들에게는 뭐라도 시작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테니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간의 탄생 - 순간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시간과 문명의 역사
알렉산더 데만트 지음, 이덕임 옮김 / 북라이프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가 측정하는 시간은 객관적이다. 원칙에 따르는 모든 이들이 같은 결과를 얻기 때문이다. 주관적 시간이란 우리가 느끼는 시간을 말하며 이것은 개인적인 것이다. 우리는 생각하는 동안, 또 신체의 작용을 통해 주관적 시간을 경험하며 자연의 흐름이나 사건의 패턴을 통해 외부적 시간을 경험한다. 이 시간은 우리 기억의 형태로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저장되거나 돌이킬 수 없다.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은 항상 현존하며 멈출 수 없고 한 방향으로 저항할 수 없이 나아간다.

시간이란 무엇일까. 현재 시간이 새벽 1 55분인데, 런던은 오후 4 55, 벤쿠버는 오전 8 55, 두바이는 저녁 8 55분이다. 평소에는 시간이라는 것에 대해 그다지 자각하면서 살고 있지 못하지만, 이렇게 여러 나라의 동일 시간대를 보게 되면 새삼 시간이라는 개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는 것 같다. 이렇게 시간이란 인간이 편의상으로 수치로 나눈 개념이기도 하지만, 단순히 과거와 현재로 이어지는 달력의 연대기로만 볼 수만은 없는 개념이기도 하다. 시간에 대한 정의는 각양각색인데, 시간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하는 쪽과 시간은 필요에 의해 정의된 거라는 쪽으로 대립되고 있다. 물론 어느 쪽이든 시간을 인정하는 주체는 인간이지만 말이다. 현재의 시간 개념에 도달하기 위해 인류는 얼마나 먼 길을 여행해왔는가. 1년을 12개월로 나누기 시작한 것은 3천여 년이 넘었지만 달력에 주 단위로 표시하기 시작한 것은 이제 겨우 20년이 넘었다. 그 동안 시간을 이해하기 위해 무수한 방법과 실험, 우회와 오류, 퇴행이 거듭 이루어져 온 것이다.

이 책은 고대에서 현대사회까지 3천여 년의 문명사 동안 '시간'이라는 개념과 그것을 대하는 관점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밝히고 있다. 일상적인 계획을 비롯해 시간을 셈하는 방식, 7일을 한 주로 구성하고, 각 날에 요일을 붙이고, 달마다 이름을 붙이며, 달력을 만들고 절기와 나이 그리고 영원의 개념을 만든 것들 모두 고대의 유산에 포함된다고 저자인 알렉산더 데만트는 말한다. 그는 '사람들이 관심을 둘 만한 가치가 있는 방식으로 역사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목적에서 이 책을 썼다고 말하고 있는데, 시간이라는 복잡한 관념을 고대의 문명사를 통해 이야기하는 것은 대단히 매혹적인 방식인 것 같다. 고대사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나조차도 너무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도록 만들었으니 말이다. 현대사를 거의 반세기 동안 연구해온 역사학자로서 저자의 면모가 돋보이는, 굉장히 쉽고 재미있는 역사서가 아니었나 싶다.

시계를 은유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비단 세상과 유지 관리 체계 혹은 국가만이 아니다. 시간에 대한 다양한 비유적 표현도 역시 존재한다. 가령 '12 5분 전이야!'라는 표현은 때가 무르익었다는 의미다. 누군가를 위해 '종을 울리면' 그 사람은 죽을 것이다. 1940년에 쓴 헤밍웨이의 소설에서 종소리는 죽음의 신호였다. 막스 피콜로미니가 이미 알고 있던 것처럼 운이 좋은 이에게는 결코 종이 울리지 않는다.

시간이 항상 삶에 관한 것이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시간은 돈이다'라는 미국인들의 신조나 의미 없는 일을 하거나 그저 빈둥거릴 때 우리는 시간을 잃어버린다고 한다거나, 괴테의 말처럼 시간은 하느님과 자연이 주신 가장 큰 선물이라는 식의 표현들 말이다. 우리가 '나는 다른 일을 하고 있거든요'라고 말하는 대신 '나는 시간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 또한 너무도 익숙한 표현이라 공감이 되었다. '시간'이라는 단어의 언어적 역설은, 시간이 의인화되었으나 물체처럼 구체적으로 다루어진다는 사실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시간은 단위가 작아도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은데, 이는 종종 인생의 은유에도 적용된다. 하루 중의 시간이나 한 주의 요일, 계절이나 시대가 전체적으로 역사를 구분하는 단위가 되곤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루의 시간 혹은 매 시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역사 속에서도 볼 수 있다. 성경에서는 아침과 저녁의 비유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이후의 문학작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 주를 왜 7일로 정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은 달의 순환 주기가 28일이라는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한 달의 순환을 반으로 나누게 되면 크게 네 시간으로 나눌 수 있게 되는데, 이 간격을 계산해보면 7일이자 한 주가 된다. 그런가 하면 오늘날 달력은 빵이나 꿀, 미네랄워터 같은 생필품뿐만 아니라 시장과 지급일, 등록과 마감일, 계약과 유효 기간 혹은 복역 기간, 직무수행 기간, 세금납기일 등 모든 영역을 망라해서 지배한다. 그 외에도 가장 긴 시간인 영원이라는 개념, 고대의 달력과 기독교의 달력이 만들어진 과정과 그 진화, 한 해의 시간을 파악하게 되면서 구분된 사계절, 인간이 살 수 있는 최대한의 기간과 최장수 사례에 대한 기록, 인생의 단계 등등... '시간'이라는 테마를 축으로 펼쳐지는 이야기가 너무도 다양하고 광범위 해서 마치 '시간'을 초월한 우주를 여행하고 있는 듯한 기분 마저 들었다. 책 표지에 '시간에 대한 이야기 속에 빠져 시간을 잊어버리는 것은 하나의 축복'이라는 문구가 있었는데, 이 책을 읽다 보면 정말 어느 순간 그렇게 되고 만다. 하드커버 양장으로 700여 페이지의 책이지만, 그 속에 담고 있는 것의 가치는 그 이상일 거라는 기분이 드는 멋진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