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문제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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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는 사람을 보는 눈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모든 가정이 나름대로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일상에서는 조금도 그런 티를 내지 않고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다들 어른이네."

나오와 둘이서 감탄했다. 자극도 되고 격려를 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서른두 살의 회사원 준이치는 이제 결혼한 지 두 달밖에 안된 신혼인데, 퇴근 시간 무렵이 되면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 결혼 전 오랜 기간 혼자 독립해서 지내서 그런지, 휴일에도 꼼꼼하게 청소며 집안일을 하고, 손이 많이 가는 요리들을 정성 들여 준비하며, 야근하고 늦게 들어가도 매번 밤참을 만들어 내오는 완벽한 아내가 어쩐지 부담스럽기만 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야근 핑계를 대고 동료들과 마작을 하거나, 집 근처 커피숍에서 시간을 때우면서 늦게 귀가하는 일이 잦아지는데, 어느 날 아내가 그걸 알아차리고 말았다. 이들 신혼 부부는 과연 위기를 어떻게 넘기게 될까. 임신 6개월인 주부 메구미는 남편 회사 소프트볼 대회에 응원 차 갔다가, 남편이 동료들로부터 찬밥신세라는 걸 알게 된다. 아이를 가지면서 자신은 회사를 그만둬서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완전히 기대고 있는 데다, 곧 아이까지 태어나는 상황이라 그녀는 남편이 정리해고를 당하게 되지는 않을까 고민한다. 그리고 남편이 회사에서 실제로 어떤 상황에 놓인 것일지 상상하며, 점심은 누구와 먹을지, 상사에게 혼나고 있지는 않을지, 동료들에게 험담을 듣고 있지는 않을지 걱정한다. 그러다 마침내 그녀가 내린 비장의 방법은.. 소박하고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녀가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 작은 마음이 점차 남편의 회사 동료들 마음까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수십 년을 넘게 다른 환경에서 전혀 다른 생활 방식으로 살아온 두 남녀가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벌어지게 되는 신혼 생활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 대부분의 중년 남성들, 그리고 우리의 아버지들이 겪어왔던 샐러리맨의 애환, 부모의 이혼을 눈치 채고 고민하는 사춘기 딸의 마음, 도시에 사는 신혼부부가 명절이 되어 각자의 고향에 다녀와야 하는 귀성 전쟁과 남편이 유명 소설가라 돈을 벌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도 어느 정도 자라 더 이상 손이 가지 않는 전업주부의 정체성 찾기 등... 일본 작가가 그리고 있는 가정사들이지만, 한국의 어느 가정과 견주어도 그다지 다를 게 없어 보이는 삶의 편린들이다.

미나코는 의논 상대가 필요했다. 혼자 껴안고 있기에는 너무 버거운 문제였다. 하지만 가족에게는 말할 수 없다. 친정 엄마에게 말했다가는 걱정하느라 바싹바싹 마를 것이다. 동네 엄마들도 안 된다. 몰려다니기는 하지만 우정은 없다. 입방아거리를 제공할 뿐이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는 관계가 소원해지고 말았다. 동창회는 5년 전에 나간 게 마지막이다.

이런 일이 닥치고 보니 전업 주부는 고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락을 함께할 전우가 없다.

하여간 힘을 내는 수밖에 없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족이다. 미나코는 아자! 하고 힘차게 외쳤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각각 다르다'는 안나 카레리나의 그 유명한 문구를 굳이 떠오르지 않더라도, 우리네 삶은 사실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고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닌 이유로 불행해하는 순간들로 채워진다. 타인이 보기에는 아무 것도 아닌 걸 참지 못해 부부가 이혼을 하기도 하고, 부자 사이가 냉랭해지기도 하며, 고부 관계가 위태로워지기도 한다. 당사자에게는 죽을 만큼 힘든 일이지만, 남이 보기에는 그것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우리 집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쿠다 히데오는 특유의 해학적이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여러 가정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어떻게 이런 사소한 문제들까지 예리하게 짚어내는지, 실제 작가 자신의 가족 이야기가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이들의 이야기는 격하게 공감을 할 수밖에 없는 에피소드들이다. 남편이 잘 나갈수록 집안일만 하던 아내가 소외감을 느끼게 되고, 어느 날 갑자기 UFO와 교신했다는 황당한 소리를 하는 남편이 알고 보니 직장에서 곤란에 처해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고, 서로의 고향이 먼 거리만큼이나 성격도 가풍도 달라 귀성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신혼 부부의 고민도 너무 있을 법했고 말이다. 무엇보다 이 모든 나름 진지한 주제들에 대해서 심각함보다는 위트와 유머를 잃지 않는 시선으로 그려내는데 이 작품만의 장점이 있다. 비슷한 상황에 한 번이라도 처해 본 적이 있다면, 혹은 이웃이나 가족들이 유사한 고민을 하는 걸 본 적이 있다면 더더욱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말이다. 거기다 심각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이들의 귀여운 고민에 슬그머니 미소 짓게 되는 순간도 있고,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얻게 되는 은근한 위로도 있다. 이런 저런 가정의 대소사들로 인해 지치고 스트레스 받는 이들에게, 이 작품을 적극 추천한다. 당신네 집 문제도 결국 우리 집 문제와 다르지 않다.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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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이 죽이다 데이브 거니 시리즈 3
존 버든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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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이 너무 길었다. 5년 만에 만나는 존 버든의 신작. <658,우연히>, <악녀를 위한 밤>에 이은 데이브 거니 시리즈 그 세 번째 작품이다.

거니는 매들린이 그를 관찰하고 있었고, 그의 마음을 읽는 놀라운 능력을 다시 한 번 발휘했음을 깨달았다. 매들린은 눈빛만 보고도 그의 생각과 기분을 읽을 수 있었다. 마치 그가 소리 내어 말한 것처럼. 결혼 초기에는 그녀의 그러한 능력이 두려웠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 두 사람이 함께하는 삶에서 가장 따듯하고 소중한 진실로 느껴졌다.

냄비에서 지글거리는 소리가 났고 그윽한 향이 거실로 풍겨왔다.

 

평화로운 전원에서의 은퇴 생활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퇴직 형사 데이브 거니. 그러나 그는 전작 <악녀를 위한 밤>에서 얻은 부상에서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고, 후유증으로 귀에서 이명이 들리기 시작했으며, 우울하고 적대적이고, 그 무엇에도 연루되고 싶어 하지 않는 상태로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게 보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강력계 형사 시절 알게 되었던 저널리스트 코니 클라크에게서 연락이 온다. 자신의 딸이 희생자의 유가족을 다룬 <살인의 고아들>이라는 미니시리즈를 기획했는데, 그녀를 좀 도와달라는 거였다. 그녀가 다루고 있는 사건은 십 년 전에 벌어졌던 착한 양치기 사건이었다. 메르세데스 벤츠 운전자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했던 여섯 차례의 총격 사건으로 당시 범인은 두 번의 총격사건 이후 경찰에게 20여 페이지의 선언문을 보냈었다. 돈에 대한 사랑, 즉 탐욕이 모든 악의 근원이므로 그것을 척결해서 선을 달성하겠다는 것이 그 요지로 범인은 결국 잡히지 않았고, 그 사건은 범죄 역사상 가장 상징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자리매김했었다. 사회의 병폐를 나열하고 살인을 통해 그 병폐를 해결하겠다는 논리로 부유층과 특권층에 대한 극적인 공격을 보여줘, 그 사건은 심리학과 범죄학 강의의 가장 인기 있는 주제가 되기도 했고 말이다.

 

거니는 너무도 명백하게 정의된 '착한 양치기 사건'을 조사하면서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킴과 거니 주변에 사소하지만 위협적인 이상한 일들이 하나씩 벌어지기 시작한다. 그들은 방송 준비를 위해 희생자의 유가족들을 한 명씩 만나 인터뷰를 하고, 거니는 형사 시절 동료인 하드윅의 도움으로 하나씩 사건을 되짚어 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사건이 사악한 부자들에 대한 정의로운 처단의 문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렇다면 십 년 전 그 사건은 완전히 처음부터 다른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얘기였다. 당시 사건 수사를 종결했던 FBI로서는 거니의 의견이 달가울 리가 없을 것이고, 그들의 눈을 피해 거니는 자신의 의심을 증명시킬 무언가를 찾아야만 한다. 그리고 문제의 그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자 인터뷰를 했던 유가족이 처참하게 살해된 채 발견되고, 십 년 만에 착한 양치기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인터뷰에 응했던 유가족들이 차례로 살해되고, 범인은 킴과 거니에게 도전적인 편지를 보내온다.

"좋아요. 그럼 왜죠? 뭐에 끌린 거죠?"

"이 사건에는 트럭 한 대가 지나가고도 남을 만큼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어요. 날 잠 못 들게 할 만큼 커다란 구멍. 더구나 킴의 프로젝트를 무산시키고 내가 연루되는 걸 막으려는 의도로 보이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어요. 그런 일이 일어나면 난 정반대로 나갑니다. 누군가 문밖으로 날 밀어 내려 하면 어떻게든 방 안에 남아 있고 싶어지죠."

 

데이브 거니는 시리즈 첫 번째 작품에서부터 현직에서 은퇴한 전직 형사로 등장했지만, 매번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끊임없이 사건에 휘말려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하고 일에 휘말리고 또 굴복하고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줘 왔다. 데이브 거니, 그는 대체 어떤 캐릭터인가. 우선 천재적인 추리력을 가진 전직 형사이다. 균형 감각, 집중력, 냉철한 분석, 엄격한 객관성을 가진 에이스 형사였지만.. 현재는 가끔 자기 연민에 빠지고, 부상 후유증에 시달리고, 형사라는 신분과 명성 없이는 시시한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는 생각에 빠져들기도 하는 평범한 중년 남자이기도 하다. 사고 후 십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자신이 당시에 지켜주지 못한, 네 살 때 죽은 아들을 잊지 못하는 아버지이며, 눈부신 직업적 성공 조차 몇 가지 사소한 실수에 대한 죄책감으로 고통을 겪느라 빛을 발하지 못하는, 도무지 맘 편히 쉴 줄 모르는 남자이다. 항상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고 항상 무자비할 정도로 문제를 파헤치는 남자로 경찰 시절 그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어떤 순간에나 침착하고, 가장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줄 아는 거였다. 어려운 일일수록 더 끌리는 성격으로, 난관은 그에게 일종의 자석과도 같으며, 불가능은 저항할 수 없는 유혹이 된다. 일을 하는 순간에는 집요하고 강박적인 면이 있으며, 감정의 표출에 상당히 냉정한 편이다. 주목 받는 걸 좋아하지 않으며, 영웅이 되는 것에도 관심이 없다.

 

데이브 거니 시리즈가 특별한 이유 중 하나는 단순히 범인과의 두뇌싸움이나 사건해결 과정에만 치우지지 않고,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좌절을 맛본 중년 남자의 고뇌가 스토리의 또 다른 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범죄 소설 히어로의 감성적인 면모, 영웅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삶이 사실적이고 밀도 있게 그려진다는 것은 분명 여타의 스릴러 소설들에서는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존 버든 만의 장점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가 은퇴한 전직 형사라서 매 사건마다 항상 아내인 매들린에게 자신의 생각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장면 또한 이 시리즈만이 가지고 있는 멋진 대목 중 하나이다. 타고난 밝은 천성으로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항상 그보다 낙관적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태도를 지닌 매들린은 거니에게 언제나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사건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연쇄살인마에게 위협을 받는 순간에조차 긍정적인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상태에서 최선을 다하는 그녀의 태도는 거니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며, 사건 해결에 지대한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너무도 인간적이고 여러 가지 불완전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다시 만난 데이브 거니는 여전히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시리즈 다음 작품인 <피터팬은 반드시 죽는다> <늑대 호수>도 어서 빨리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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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바람 진구 시리즈 4
도진기 지음 / 시공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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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뭐 잘못한 거야?"

"아니." 김민준은 고개를 저었다.

"진구야...." 김민준은 입을 열어 조용히 말했다.

그건 진구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마치 자기한탄처럼 들렸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는 '남과 다르다는 것'이란다."

진구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아빠를 빤히 쳐다보았다.

진구는 대형 벤처투자회사의 회장에게 아들의 애인에 대한 뒷조사를 의뢰 받는다. 회사에서는 자신의 유능한 비서이지만, 아들의 대상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그녀에게 흠이 있는지 찾아봐달라는 거다. 결혼을 반대할 이유가 될 만한 그녀의 약점을 찾아달라는 그 제안을, 진구는 거절한다. 그저 일 내용이 썩 내키지 않는다며. 이유는 그 대상이 바로 어린 시절 둘도 없는 단짝이자 라이벌이었던 유연부였기 때문이다. 당시 진구와 연부는 학교에서 공인된 라이벌이었다. 성적도 그랬지만, 두 사람의 아버지가 같이 역사학을 전공하는 교수였고, 그들부터가 오랜 친구이자 라이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구와 연부 두 사람은 딱히 서로 라이벌이라는 생각이 없었는데, 주변에서 그렇게 만들어 불렀다. 그들은 아버지들이 참여했던 실크로드 탐사를 위해 함께 사막에 갔었고, 거기서 진구의 아버지는 풍토병으로 사망하고, 연부의 아버지는 행방불명으로 역시 사망했다. 그 사건 이후로 둘 사이는 서먹해졌고, 서서히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하지만 진구의 여자친구이자 동료인 해미는 두 사람 사이를 궁금해했고, 당시 사건에 대해 알 수 있는 책을 주문해 읽어보기로 한다. 진구가 그 동안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유독 예민해했었고, 과거에 대한 것도 역시 그랬었기 때문이다.

해미가 구한 책은 당시 조사단이 실크로드를 따라 이동하는 경로대로 써나간 탐사 일지 형식의 글이었다. 두 명의 교수와 자녀들인 진구, 연부, 그리고 젊은 역사학자들 대원과 현지 통역인까지 9인의 부대가 북경에 도착해 탐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당시의 에피소드들과 현재의 이야기가 교차 진행되며, 그 동안 숨겨져 있던 진구의 과거가 조금씩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 수학 천재 소리를 듣던 수재가 애정을 쏟아 부었던 수학을 버리고, 대학마저 중퇴 한 뒤 백수처럼 빈둥거리며 탐정 일을 하게 되었는지, 뚜렷한 목적 없이 살아가게 되었는지. 그리고 지적 유희에만 반응하는 천재성, 선악에 대한 모호한 구분으로 상식에 벗어난 판단을 하는 진구가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에 대한 미스터리도 어느 정도 해소된다. 어릴 때부터 남들과 다른 사고를 했던 그와 그런 그를 유일하게 이해하고 세상과 섞일 수 있도록 해줬던 아버지와 미모와 성적 모두 뛰어났지만 역시나 평범하지 않았던 친구 연부 모두 현재의 진구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들이었다. 

"사람들이 왜 살인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살다 보면 정말 저 인간만은 죽여버리고 싶다, 그런 마음을 먹는 대상이 한두 명쯤 있게 마련인데. , 양심 때문에? 아니, 모순이지. 죽이고 싶은 마음이 벌써 들었는데 다시 또 무슨 양심 때문에 그걸 안 한다는 거야. 이유는 간단하고 유일해. 잡힐까봐서야. 범행억지에는 강한 처벌보다 높은 검거율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어. 들키면 패가망신하는 불륜, 뇌물, 그런 것들이 왜 일어나겠어? 들키지 않을 거라는 믿음 때문에 하는 거거든. 들킬지 모른다는 두려움만 없애주면 어떤 범죄든 일어날 수 있어."

그 동안 도진기 작가의 작품들을 꽤 읽어 왔는데, 거의 '막장드라마'스러운 이들의 비밀, 폭로, 속마음들은 너무도 리얼해서 가끔은 얼굴이 화끈거리고, 당황스럽기 그지 없는 내용들이 많았다. 그런데 남들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마치 일일연속극과도 같은 이들의 스토리는 비현실적이면서도, 어처구니없게 현실적이었다. 온갖 작위적인 상황 설정들과 비도덕적인 인물들의 행동은 뭐 저렇게 까지 하나 싶어 혀를 차다가도, 실제 저만한 돈이 눈앞에 있다면 나라도 저럴까 싶을 만큼 섬뜩하기도 하고 말이다.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실제 현실에서는 티비 속 막장드라마보다 더한 일들이 숱하게 일어난다는 것을. 이 작품에 등장하는 재벌 회장과 비서, 그리고 그녀를 좋아하는 회장의 아들간의 관계, 재산싸움 등 역시 마찬가지로 티비만 틀면 연속극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설정이었지만, 진구와 연부라는 독특한 캐릭터들 덕분에 전혀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도진기 작가의 네 번째진구 시리즈는 그간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던 진구라는 캐릭터에 대한 비밀을 어느 정도 해소한다는 점에 있어서, 앞으로 진행될 시리즈의 반환점 같은 느낌도 든다. 진구 시리즈들은 읽는 내내 지루할 틈 없이 페이지가 넘어가는 것도 좋았지만, 특히 막판에 가서 그 동안의 모든 사실들을 뒤엎어버릴 만한 진구의 엄청난 추리가 매번 인상적인 반전으로 이어지며 '도진기 월드'를 구축시켜 왔다. 이번 작품 역시 기대를 져버리지 않는 전개와 결말이 인상적이었다. 데뷔 7년 차를 맞은 도진기 작가는 법조계에 몸을 담고 있지만 결코 직접 처리한 사건을 소재로 삼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한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리얼한 범죄 기법과 치밀한 추리 과정은 매번 감탄스러울만큼 탄탄하다. 최근 20여 년간의 판사 생활을 정리한 후 변호사로 돌아온 작가의 행보가 그의 작품 활동에 더 새로운 전개를 가져오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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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의 시간 - 인생을 생각하는 시간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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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다 미리는 한 인터뷰에서 '주로 카페에서 작품에 대한 영감을 얻곤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번 작품에서 그녀는, 느긋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카페에서 잠시 마음을 놓아도 좋다고, 우리를 위로해 준다. 삶에서 '차의 시간'은 꼭 필요하다고 말이다.

"한 개 3,000엔짜리 쇼트케이크 같은 걸 먹으면, 엄마한테 혼날 것 같아요. 칼로리도 높을 것 같고, 마흔다섯이나 되어서 이런 걸 먹어도 될까요.......그래도 하루하루 늙어가니까, 가장 젊은 오늘 먹는 것이 베스트일지도요." 등등, 구차한 변명을 하면서, 3,000엔짜리 쇼트케이크를 주문했습니다.

누구나 가끔 이런 적 있지 않을까. 식사는 가장 저렴한 걸로 대충 때우고, 커피숍에 가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며 밥보다 더 비싼 케이크와 커피를 마셨던 경험 같은 것들. 남자들은 그런 여자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곤 하지만, 중요한 건 '비싸다'는 것보다 그것과 함께하는 '시간에 대한 가치'에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나는 가끔 생각한다.

하루하루 늙어가니까 가장 젊은 오늘.... 무언가가 생선 가시처럼 걸렸습니다.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이라면 내일은 뭐야? 내일은 오늘보다 늙은 날인가? 돌아본 과거만이 인생의 아름다움이란 건가? ..... 인생을 역산하면 오늘이 가장 젊은 나. 그래서 오늘의 내가 가장 가치가 있다? 그런 건, 뭔가 딱 와 닿질 않네. 어떤 자신이건 똑같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

오늘이 내 생애 가장 젊은 날이니까, 오늘 그 순간을 즐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자는 말에는 사실 이런 의미도 담겨 있었다. 마스다 미리가 이렇게 말해주기 전까지는 미처 자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나이를 먹어서도, 오늘의 나처럼 그렇게 여유롭게 시간의 가치를 즐길 수 있다는 걸 우리는 아직 깨닫지 못하고 산다. 마흔 다섯이라는 마스다 미리 역시 아직 그렇게 늙었다고는 볼 수 없는 나이지만, 이십 대 초반의 누군가가 보기에는 너무도 먼 미래의 지점에 있는 거니까. 그런 그녀의 깊은 혜안은 종종 단순한 만화 컷들 사이에서 반짝반짝 빛이 난다.

이 책 속에는 카페를 즐기는 마스다 미리만의 깜찍한 에피소드들이 가득한데, 사실 거의 백프로 다 공감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라 읽는 내내 기분이 좋아졌다. 맞아, 나도 그랬어. 다들 그러는 구나. 싶은 기분이 들어서 위로도 되었고 말이다.

매우 사소한 것들. 이를 테면 카페 안의 모든 테이블에 각자 한 사람씩만 앉아서 차를 마시다 보니, 얼핏 상대방이 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짝짓기 파티 같은 분위기로 보일 때가 있다거나. 아이스 카페오레가 커피와 우유 2단으로 나오면 섞기 전에 먼저 우유 부분만 살짝 마시고 싶어진다거나, 카페 안에서 자신도 모르게 옆 자리 사람들의 대화에 깊이 빠져 든다거나,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때 누군가 저기 빌 것 같다는 눈으로 보면 이유없이 일어서기 싫어진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너무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 순간 비슷한 경험을 해봤을 누군가라면 나도 몰래 미소짓게 만들고야 마는 그런 순간들.

여행 방법은 사람마다 제각각. 공항에서 한두 시간 어슬렁거린 적이 있다고 하면 다들 놀라요. 전철을 타고 삿포로로 이동. 야마자키 도요코의 '지지 않는 태양'을 읽으면 내 인생은 마시멜로 처럼 달콤하고 부드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득 고개를 드니, 맑은 가을 하늘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물통을 들고) '잠시 차의 시간.'

 

차의 시간이라는 것이 별게 아니다. 꼭 유명한 카페에 가서 화려한 음료나 케이크를 먹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란 거다. 마스다 미리처럼 전철에서 책을 읽다 물통을 들고도 잠시 차의 시간을 가질 수 있고, 집에 가서 가족 모두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차의 시간을 가질 수도 있다. 직장 동료와 일 이야기를 나누며 차의 시간을 가질 수도 있고, 어딘가에서 혼자 일을 하면서 차의 시간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니 '차의 시간'이란 인생을 생각하는 시간, 잠시 번잡함을 내려놓고 느긋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다.

카페에서 마스다 미리가 하는 일 대부분은 '관찰' '멍 때리기'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그냥 문득 떠오른 뭔가를 생각하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거나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 그냥 아무거나 생각하고 말해도 되는 것이 바로 차의 시간이 아닐까. 이 책은 마스다 미리 버전의작가로 산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녀의 자전적 만화가 기존에 출간된 <평범한 나의 느긋한 작가생활>에 이어 두 번째가 되는 셈이다. 그녀가 작가로 살면서 생각하는 것들, 작가로 일하면서 겪었던 상황들이 모두 카페에서 벌어지는 버전이 바로 이번 작품이니 말이다.

일주일 중에 단 하루라도 카페에 가지 않는 여자들이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시간이 없어 그저 테이크 아웃을 하더라도 커피를 마시지 않는 경우란 거의 없을 만큼, 우리들은 커피와 차와 카페 문화에 익숙해져 있다. 빡빡한 일상 속에서 잠시 쉴 수 있는 시간을 만들기 위함이기도 할 것이고 말이다. 그리고 이건 커피를 마셔야, 잠시라도 티타임을 가져야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바쁜 현대인들의 삶의 고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습관이기도 하다.

40대를 인생의 반환점이니, 뭐니 하지만 반환한 사람이 있나? 저들에게 보이는 내 쪽 풍경은 어떨까? 중년이 빵을 먹고 있다라는 '사실' 뿐일까.

 

가끔 카페에 혼자 있는 순간이 생기면 나도 모르게 주위를 한 번 둘러보게 된다. 노트북을 가지고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사람도 있고, 스마트폰을 보는 사람도 있고, 친구와 열심히 수다를 떠는 사람도, 서로를 바라보며 애정을 표현하는 커플도 있다. 그러다 보면 옆자리에서 유난히 큰 목소리로 떠드는 누군가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게 되기도 하고,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나를 돌아보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아주 가끔은 생각한다. 저들이 둘러보는 풍경 속 내 모습은 어떻게 보일까 하고

이번 작품을 만나면서 내린 결론은 역시 '마스다 미리는 언제나 옳다!' 라는 것. 여자들의 마음을 콕콕 찝어 내어 그려주는 그녀의 작품들은 매번 마음을 움직이곤 했는데, 이번에는 매 페이지마다 맞아. 맞아.를 연발할 수밖에 없는 에피소드들이 가득했다. 거기다 카페에서의 이야기들이라 그만큼 디저트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등장했는데, 일본의 유명한 카페와 디저트가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어 더욱 흥미진진했다.

나처럼 카페에서의 시간을 좋아하고, 차와 커피를 사랑하는 당신에게 마스다 미리와 함께하는 티타임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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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6-28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재밌게 읽었던 책이었습니다.
역시 마스다 미리 !

피오나 2017-06-28 11:55   좋아요 0 | URL
그죠? 마스다 미리책은 항상 대만족!ㅋㅋ
 
진작 알았어야 할 일
진 한프 코렐리츠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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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자신의 부모, 혹은 형제 혹은 자식에 대해서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가? 가족이란 세상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존재이다. 하지만 누구나 가끔 자기 옆에 누워 있는 사람의 진짜 모습을 의심하게 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믿음과 의심 사이의 그 조그만 간격은 사실 종이의 양면과도 같다. 사소한 행동, 말투들이 쌓여 오해를 만들고, 견고하게 쌓인 세월을 넘어 믿음을 깨트린다. 그런데 만약, 이 모든 것이 처음부터 예정된 거였다면? 애초에 내가 그 혹은 그녀를 잘못 선택한 거였다면 어떨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결혼을 하고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법에 관한 이런 책들을 읽는 독자들이 그녀의 상담소를 찾아와, 만신창이가 된 자기 인생과 자기 자신의 결함을 고백했다. 제대로 결혼을 하지도, 결혼 생활을 유지하지도 못한 게 자신들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이 다른 여자들에게 추파를 던진 것도 자기 체중이 늘어서라고 생각했다. 아기한테(그리고 친정 식구들과 아내의 친구들과, 우연찮게도 아내 본인에게도) 남자가 차갑게 대하면, 그게 다 자기가 직장에서의 출세 길을 포기했기 때문이며, 둘째 아이가 생길 경우 회사의 중역으로 승진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일이 다 여자 탓이었다. 사실이든 착각이든, 범죄도 다 여자 책임이었다. 더 치열하게 생각지 못해서, 더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서,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가 낮아서. 여자들이 팔을 더 열심히 퍼덕거리지 않아서 비행기가 떨어졌다는 거나 다를 바가 없었다.

 

부부 생활 상담 전문 심리 치료사로 활동하는 그레이스는 이번에 책을 출간하게 되어 잡지사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중이다. 그녀의 책 <진작 알았어야 할 일>은 절대 자기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을 남자들과 결혼할 뻔한 수많은 여자들을 위한 내용을 그리고 있다. '애초에 일을 망치지 마라, 그러면 나중에 이런 수많은 문제들이 생기지 않을 테니까' 라고 노골적으로 말하는 것이 이 책만의 장점이라고 기자는 말한다. 그레이스는 자신 만만하게 이야기한다. 우리는 누군가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하면 늘 무슨 수로 알았겠냐고 기겁을 하지만, 사실 우리는 책임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불행한 결혼 생활의 근본적인 원인은 '애초에 잘못된 남자를 선택한 여자'에게도 있다고 말이다. 많은 여성들이 남자를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알고 있던 문제들을 외면했기 때문에 지금의 불행한 삶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잘못된 사람을 선택하지 말아야 한다고, 단호하게 냉철하게 그녀는 조언한다.

 

대학 시절 만난 그레이스의 남편 조너선은 소아 종양학과 의사로 일하고 있으며, 열두 살짜리 아들 헨리는 뉴욕의 명문 사립 학교에 다니는 모범생이다. 그레에시는 자신의 커리어만큼이나 가정에서도 완벽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선택을 단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평화로웠던 어느 날, 아들이 다니던 학교의 학부형이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녀는 모임에서 우연히 한 두 번 봤을 뿐인 학부형에 대해서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는다. 그런데 경찰이 그녀를 찾아와 남편에 대해 묻기 시작한다. 그리고 학회에 간 줄 알았던 남편은 갑작스레 연락이 되질 않고, 남편의 핸드폰 마저 집에서 발견된다. 대체 조너선은 핸드폰도 놔두고,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지나온 모든 시간 동안, 단 한번도 조너선이 자신을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던 그레이스는 충격에 휩싸인다. 결혼한 지 18년이 됐고, 수많은 환자들의 인생 문제를 상담해 왔으며, 이제 막 결혼 생활에 대한 대범한 책을 발간한 심리 치료사인 그녀의 삶은 모래성처럼 하루 아침에 무너져 내린다.

 

내가 뭘 알고 있지? 그리고 내가 모르는 건 뭐지?

우리 환자만 그런 건 아닐 테고 네 환자들도 다 그렇겠지만 말이야. 가끔 치료받으러 오면서 단 한 번 자기가 <대실수>를 저질렀고 그 실수로 인해 현재의 위기에 봉착했다는 믿음에 철저히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어. 내가 늘 <대실수>라고 분류하는 환자들이지. 대체로는 처음 마신 한 잔의 술, 아니면 첫 번째 마약 경험, 이런 거야. 가끔은 인간관계일 때도 있고. 아니면 다른 사람의 나쁜 조언을 들은 것일 수도 있고. 그리고 나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다 그 순간이나 그때의 결정으로 돌아가는 거지. 그때 딱 한 번 실수하지 않았다면 모든 게 괜찮았을 거라고 생각해. 그런데 늘 그 앞에 앉아서 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 있잖아요, 그런 건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늘 그렇죠. 실제 삶은 그런 식이 아니란 말이에요. 항상 노란 숲 속에 난 두 개의 갈림길에 봉착하게 되는 건 아니란 말이야, 안 그래? 그리고 많은 경우에, 과거에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을 했든, 똑같이 지금 이 자리에 와 있게 되곤 해. 그때 그게 실수가 아니었다는 얘기가 아니야. 그보다 좀 복잡하다는 얘기를 하는 거지. 삶에 멋진 일들을 가져다 준 결정을 내렸다면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서는 안 되는 거야. 예를 들어서 네 아들처럼.

 

성공한 변호사의 외동딸로 심리 치료사라는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하버드 의대 출신의 종합 병원 의사인 남편을 둔 주인공 그레이스는 뉴욕의 전형적인 중산층이다. 그리고 그녀가 뉴욕의 명문 사립 학교에 아들을 보내면서 만나게 되는 학부형들은 부유한 금융 자산가 계층까지 맨해튼 상류층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유복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삶의 이면에 숨어 있는 허위와 어두운 진실의 맨 얼굴은 끔찍한 살인 사건만큼이나 무시무시하다. 아이들의 교육을 두고 벌어지는 치열한 돈과 정보의 전쟁, 자산가와 전문직 종사자들 간의 보이지 않는 간극과 미묘한 열패감, 자기 위안과 질시로 얼룩진 욕망의 이면까지. 특히나 시종일관 그레이스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스토리라 끔찍한 일을 겪고 난 뒤, 모든 허세와 위선이 벗겨지고 난 다음 그려지는 그녀의 내면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적나라하고 리얼하다. 당연한 듯 여겨 왔던 평화로운 삶이 사실은 환상에 불과할 수 있다는 사실,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마저 허구의 인물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한 번쯤 살면서 겪을 수도 있는 시련이기에 더욱 섬뜩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은 가끔 우리를 완벽하게 배신하곤 한다. 그 사람의 말투, 행동, 평상시 습관, 그를 둘러싸고 있는 배경들이 그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거나,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거짓말쟁이라던가 하는 문제는 아니다. 누구나 여러 가지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고,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전부 보여줄 수는 없다는 선택과 다양성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특히나 부부, 부모 자식 관계 등 가족간에 발생할 때 더욱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아무리 가까운 친구나 연인 사이라고 하더라도, 가족이 되기 전에는 어쨌거나 남남이기 때문에, 받아야 할 상처가 조금 덜할 수 있으니 말이다. 내가 너무도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이에게서, 내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할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엄청난 충격을 가져올 수 있다. 내가 그 동안 믿고 있던 모든 것이 산산이 깨져버리는 경험은 단순히 '배신'이라는 단어로 치부하기엔 어딘가 부족한, 한 세계가 끝나는 경험일 테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은, 때로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다는 거다. 내가 상대에게서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기대하는 바가 상대를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신이 누군가를 만났을 때 거의 알지도 못하는 상대에게 직관적으로 본 뭔가를 모른 척 하지 말라. 우리는 늘 자기 일일 때는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 봐주곤 한다. 하지만 결단코 자신에게도 같은 기준을 들이대야 한다. 인생이라는 덫에 걸리기 전에, 그 후가 아니라. 당신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당신이 외면했던 그것이 언젠가는 당신의 인생에 가장 파괴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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