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정의 라드츠 제국 시리즈
앤 레키 지음, 신해경 옮김 / 아작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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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장르 중에 SF, 그리고 스페이스 오페라는 어렵다. 그래서 추리, 스릴러 등의 장르 분야보다도 더 소수의 독자들만 읽는다. 왜냐하면 과학의 발달된 미래를 그리고 있고, 황당무계한 과학적 공상은 재미를 보장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작가가 구축한 세계의 설정들을 이해했을 때 가능한 지점들이 많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들 작품들은 시작부터 처음 듣는 낯선 용어들이 잔뜩 등장해 겁에 질리게 만들고, 인물들 간의 관계를 파악하기도 전에 완전히 새롭게 구축되어 있는 특정 세계관을 이해하도록 거의 강요한다.

앤 레키의 데뷔작인 <사소한 정의> 역시 첫 페이지부터 행성, 함선, 보조체, 닐트인, 라드츠 우주, 저체온 세트, 케프, 병력 수송선.... 등등 낯선 단어들로 빼곡하다. 평범한 배경의 소설만 읽어왔던 당신이라면, 내용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해'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저 단어들을, 문장들을 머릿속으로 읽고 흘려 보내면 된다. 그렇게 읽더라도 어느 순간 극중 화자에게 감정 이입해 광활한 우주를 체험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테니 말이다. 이 작품의 놀라운 점이 바로 그것이다. SF나 스페이스 오페라를 처음 접한 독자들에게도 매혹적인 작품이라는 것.

세이바든을 눈 구덩이에서 끌어내려고 가뜩이나 빠듯한 시간과 돈을 들였는데, 대체 무슨 소용일까? 자기 뜻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면 세이바든은 또 어디 가서 얻어맞거나 케프를 할 테고, 그 지저분한 술집 같은 데에 제 발로 기어들어가 이번엔 정말로 죽어 버릴 텐데. 그게 세이바든이 원하는 바라면 내가 막을 권리는 없다. 그러나 죽고 싶다면 왜 남들처럼 자신의 뜻을 당국에 알린 다음 의사에게 가는 깔끔한 방법을 쓰지 않았을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엄청나게 많고, 인간인 체하며 지내온 지난 19년도 생각만큼 많은 것을 가르쳐주지는 않았다.

먼 미래 우주. 인간의 몸으로 무려 19년 동안이나 살아왔지만, 여전히 인간들이 하는 행동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엄청나게 많다고 생각하는, 이 작품의 일인칭 화자는 바로 인공지능이다. 당연히 AI는 실체, 즉 몸이 없기에 합병된 지역 사람들의 죽은 신체에서 만들어져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브렉은 우주선에서 떨어져 나온 보조체로, 스스로를 그 함선의 인공지능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기에 인간처럼 행동하며 살고 있기도 하다. 라드츠 제국은 전 우주 인류를 병합하려 했던 그 날 이후, 19년이 지났고 닐트 행성에 홀로 나타난 브렉은 과거 그 현장에 함께 있었던 대위, 세이바든을 우연히 구해준다. 브렉은 현재 라드츠 제국의 지배자이자 자신의 창조자이기도 한 아난더 미아나이에게 복수를 하려고 무기를 찾아 다니고 있는 중이다. 아난더 미아나이는 3천 년 동안 라드츠 우주를 다스린 절대군주로 수천 개의 몸을 가지고 있어 병합 현장마다 존재했다.

그렇게 이야기는 라드츠의 지배자에게 복수를 꿈꾸고 있는 현재와, 그녀가 행성 궤도를 도는 병력 수송선이던 19년 전의 과거가 교차되어 진행되고 있다. 폭발의 유일한 생존자로 천 년 동안 냉동되어 있다가 깨어난 세이바든 대위의 현재가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오만한 확신을 하던 과거와 대립하며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정작 그녀를 구한 브렉은 세이바든을 돌봐주긴 하지만 연민하지는 않는다. 브렉은 창조주인 라드츠 군주의 명령에 따르고 충성해야만 하지만, 일련의 사건에 의해 그 누구의 명령도 따르지 않는, 그래서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행동을 하게 된 상태에 있다. 물론 이것은 그저 인공지능의 능력상 오류로 읽을 수도 있지만,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그것이 '자아'처럼 느껴진다는 데 방점이 있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도는 인간과 고장난 프로그램이라는 유사성. 인공지능에 의해 사회 바깥으로 밀려나는 인간과 그런 인간을 뛰어 넘는 인공 지능의 자아와 인간성이라는 아이러니.

"브렉은," 내가 미처 대답하기 전에 단에서 내려와 성큼성큼 걸어서 지나치던 미아나이가 끼어들었다. "슬픔으로 미쳐버린 인공지능의 마지막 남은 조각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공지능이 흥미로운 이유는 바로 '인간처럼' 감정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점일 것이다. 세상에, 슬픔으로 미쳐버린 인공지능이라니... 작가는 어떻게 이런 기가 막힌 설정을 했을까. 감탄스럽기 그지 없다. 브렉은 감정이 없으면 사소한 결정을 내리는 일조차도 끝없이 이어지는 하찮은 사항들을 비교해야 하는, 몹시 괴로운 일이 된다며, 오히려 감정을 가지고 처리하는 편이 훨씬 쉽다며 그것을 논리적인 필요에 의한 실용성으로 가볍게 정리하고 있지만, 극중 가장 열렬하게 누군가를 '사랑'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이렇게 인간과 인공지능의 역할과 공존에 대해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특히나 인상적인 것은 3인칭 대명사를 모두 '그녀'로 통일한 부분인데, 사실 그래서 초반에는 읽으며 인물들이 그인지, 그녀인지 헷갈려 의아해하기도 했다. 라드츠 제국에서 쓰는 언어는 성별을 구별하지 않는 다는 설정 때문인데, 남성처럼 보이는 대상에게 여성 대명사를 사용할 때의 문맥상 느껴지는 것은 소박한 충격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책 전반에 등장하고 잇는 여성 대명사의 퍼레이드는 스토리를 해석하는데 다소의 어려움을 주기도 하지만, 행간의 여백을 생각지도 못하는 것들로 채워주어 더욱 다채로운 이야기로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생각은 덧없고, 생각은 일어나는 즉시 휘발된다. 생각이 행동을, 물질적인 형태를 낳지 않는다면. 희망이나 의도도 마찬가지다. 이런저런 선택을 하도록 등을 떠밀고, 어떤 행위를 이끌어내는 대의나 명분이 되어주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게 아무리 하찮은 행동이더라도 말이다. 행동으로 이어지는 생각은 위험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생각은, 아무것도 아니라기보다는 비겁하다.

최근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이슈는 단연 인공지능일 것이다.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이 만나 성사된 세기의 대결, 즉 인공지능과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그 대결 덕분에 막연했던 인공지능이라는 개념의 실체를 목격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인간이 잘 살기 위해 만들어낸 기술이, 언젠가는 인간의 삶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이제 기정사실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들고 말이다.

얼마 전 일본에서 인공지능이 쓴 소설이 문학상 1차 심사에 통과했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컴퓨터가 소설을 쓰는 날'이라는 제목으로 인공지능의 고독한 심정을 묘사한 A4 3장 분량의 단편 소설인데, 실재로 읽어보니 사실 그다지 흠잡을 만한 부분이 없는 작품이었다. 물론 수많은 패턴을 분석하고 이야기 구조를 종합해서 만들어낸 글이겠지만, 감성을 건드리는 문장까지 인공지능이 썼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섬뜩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기술이 아닌 예술은 인간이라는 존재만 할 수 있는 영역인 줄 알았는데, 기계에게 감성 마저 생긴다면 이제 멀지 않은 미래에는 정말로 기계가 인간을 넘어설 수 있는 순간도 오게 되는 것이 멀지 않았다. 이 짧은 소설을 읽는 동안에도 인공 지능에게 자아라는 게 있는 듯한 기분이 마저 들었으니 말이다. 최근에 국내에 내한했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인공지능은 지능은 획득했지만 자신의 개인성 즉 '자아'를 가지지는 못했다" "지능은 그 자체로 흥미롭지 않고, 더 중요한 건 자아로서의 인식"이라고 말하며, "로봇이 '나는 컴퓨터다, 나는 소프트웨어다'라고 인식하는 단계부터가 핵심"이라며 "SF적 얘기지만 언젠가는 이렇게 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공지능에 대해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인공지능에게 자아와 감정을 부여한 기가 막힌 소설이 출간되었다. 바로 앤 레키의 <사소한 정의>이다. 얼마나 놀라운지, 기가 막힌 지는 직접 읽어 보아야 한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건, 앤 레키는 2005년에 지역 글쓰기 모임에서 옥타비아 버틀러의 지도를 받으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바로 그녀의 스승인 옥타비아 버틀러의 작품 <> <블러드 차일드>도 곧 출간될 예정이라는 거다. 엄청난 스승과 그만큼 더 뛰어난 제자의 작품을 한꺼번에 만나 볼 수 있다니, SF 장르의 팬들에게는 올해가 굉장한 한 해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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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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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가, 나중에야 그 모든 것을 확실히 이해하곤 하는 경험은 아마도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젊은 법학 교수 안토니오 얌마라가 우연히 만나 한때 시간을 같이 보내었던 남자 리카르도 라베르데에 대해 기억하고 그의 삶을 추적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이 소설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떤 일을 경험했던 당시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들의 의미를 나중에야 제대로 이해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많은 세월이 흐른 현재, 당시에는 없었던 이해력에 기반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현재, 그 대화를 되새기고 있는 나는 당시 내가 그 대화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우리가 현재 순간에 대한 최악의 심판관이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하고 있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사실 현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것은 기억인데, 내가 방금 전에 쓴 이 문장도 이제는 기억이 되고, 독자 여러분이 방금 전에 읽은 이 단어도 기억이 되기 때문이다.)

얌마라가 리카르도를 처음 만난 것은 스물여섯 살 생일을 맞이하기 직전의 크리스마스를 얼마 앞둔 어느 날이었다. 얌마라는 이년 전에 변호사 자격증을 받았으며, 실제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은 아주 적었지만, 이론적 세계에 관해서는 속속들이 알고 있던 (혹은 그렇다고 믿었던) 젊은 대학교수이기도 했다. 그와 짧은 우정 (혹은 그 비슷한 관계)을 맺고, 그가 거리에서 정체 모를 괴한에게 살해당할 당시에 함께 있었던 탓에 자신도 역시 총에 맞아 부상을 당하고, 정신적으로도 심각한 상처를 입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 사건에 대해서 벗어나지 못하고, 미스테리한 이력을 지닌 리카르도의 과거를 밝혀내는 일에 매달리게 된 것이다.

그렇게 리카르도의 삶을 추적하던 어느 날, 그의 딸에게서 연락이 온다. 당신은 아빠와 함께 며칠을 보냈으니까, 당신이 아빠의 마지막 며칠에 대해 이야기해주면 좋겠다고. 그렇게 리카르도의 딸 마야를 만난 얌마라는 자신이 리카르도 라베르데에 관해 알고 있던 모든 것과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 그리고 기억하고 있던 모든 것과 잊어버렸다고 두려워하던 것, 리카르도가 자신에게 들려준 모든 것과 그가 죽은 뒤에 자신이 조사한 모든 것을 그녀에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녀를 통해 수많은 서신과 기록을 살펴보게 되고, 그녀와 함께 리카르도의 삶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며 그를 점차 이해하게 된다.

미국의 교도소에 갇혀 있는 사람은 자신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 상태에서 갑자기 죽어가죠. 그게 가장 쉬워요. 가족들 가운데 그런 아둔패기가 있다는 것 때문에 느끼는 수치심, 굴욕감과 싸우는 것보다 더 쉬운 거라고요. 그런 경우가 부지기수예요. 가짜 고아가 수백 명인데, 나는 그 가운데 한 명일 뿐이에요. 그게 바로 콜롬비아가 지닌 좋은 점인데요, 누구든 자신의 운명을 결코 혼자 떠맡지는 않죠.

시시한 칼부림과 아무데나 마구잡이로 쏴대는 총질, 싸구려 장사치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폭력 등등... 각종 뉴스 채널과 신문을 통해 놀라울 정도로 규칙적으로 전달되는 이미지들 덕분에 사람들은 폭력에 매우 익숙해져 있었다. 오죽하면 범죄를 이 나라가 지닌 일종의 특이성, 혹은 시대가 자신들에게 남겨준 유산이라고 체념하고 애석해하며 살았을까. 공포가 지배하던 시대의 절정을 살다간 이들의 상처와 그 시대가 남긴 것들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이들은 모두 시대의 희생양이다. 역사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었던 한 개인의 삶을 통해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는 어둡고 부패한 시대를 살아간 인간 군상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이후 콜롬비아 문학을 대표하는 신진 작가로, 이 작품을 통해 수많은 상을 받으며 세계 비평계의 호평을 받고 있는 작가이다. 마약과 폭력, 광기와 야만으로 점철된 콜롬비아의 현대사와 그러한 공포의 시대를 살아낸 개인의 운명을 절묘하게 교차시켜 직조한 작품으로, 의문에 휩싸인 한 남자의 죽음과 그의 과거를 되짚어가는 과정을 통해 콜롬비아 암흑기의 잔상을 완벽하게 재현해 내고 있다. 콜롬비아의 80, 90년대처럼 폭력의 시대를 직접 겪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상상도 못할 상황들이 버젓이 자행되는 이 세계가 낯설었지만, 문학을 통한 간접 경험만으로도 공포가 느껴져서 이 작품의 묵직함을 어느 정도는 체감할 수 있었다. 특히나 등장 인물들이 역사 속 한 개인의 삶을 추적하면서 각자의 기억을 통해 그것을 구축한다는 점이 매혹적이었다. 삶이란 한 사람이 살았던 것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 그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라는 마르케스의 말처럼 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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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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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살아 있는 것 같다는 안도는 잠시, 병원에서 눈을 뜬 오기는 자신이 눈꺼풀을 움직이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전신 불구 상태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내와 짧은 여행을 떠나려던 차에 벌어진 교통사고로 아내는 죽고 오기만 겨우 살아 남았다.

어떻게 삶은 한 순간에 뒤 바뀔까. 완전히 무너지고 사라져서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릴까.

이 작품은 한 남자의 삶이 한 순간 달라져버린 그날 이후를 그리고 있다. 살면서 단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풍경 속으로 말이다. 하지만, 아무 이유 없이 벌어지는 일이란 세상에 없다. 평온해 보이던 그의 일상에 스며있던 불길한 그것을 자신만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다.

묵묵히 슬픔을 끌어 올리는 장모를 보면 오기는 함께 울고 싶어졌다. 턱을 움직여 소리 낼 수 있다면 같이 울었을 것이다. 제 슬픔을 장모에게 전달하지 못해 안타까웠다. 아내는 죽고 자신이 살아남은 일을 사과하고 싶었다. 함께 아내에 대해 말할 수 없어 미안했다. 가슴속에서 통증이 일었다. 뜨겁게 끓었고 토할 것처럼 목구멍이 꽉 막혀왔다. 그 때문에 오기는 제가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눈물이 흐르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침이었다. 오기의 턱이 조금 움직였고 마른 입이 벌어졌고 그리로 슬픔 대신 침이 흘러내렸다. 오기는 계속 침을 흘렸다. 벌어진 턱을 제 힘으로 아물 수 없어서 그렇게 했다.

사고 전 오기는 유명한 교수였고, 정원을 갖춘 타운하우스에서 갈고 있었다. 하지만 아내는 이미 죽었고, 어머니는 자신이 어린 시절 자살했으며, 아버지 또한 결혼하기 3년 전 돌아가셨으니, 그에게 남아 있는 가족이란 말수가 적어 속을 알 수 없는 장모 한 사람뿐이었다. 장모는 하루에 한 번씩 들러 오기를 염려하는 표정으로 보았고, 오기가 집으로 돌아오게 되자 입주 간병인도 구해주었다. 장모는 정체 모를 종교 모임의 목사님과 기도원 사람들을 집으로 물러 기도와 찬송을 들려주며 오기를 위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기에게 필요한 것은 기도가 아니라 꾸준한 재활이었지만, 물론 그가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 방법이란 없었다.

간병인은 장모가 없을 때 게을렀으며, 오기를 함부로 대했고, 철없고 무례한 젊은 아들을 데려와 술을 마시게 하는 등 오기를 불편하게 한다. 그러다 간병인이 반지를 훔친 걸 계기로 그녀를 내쫓고, 당분간 간병비를 줄여야겠다며 장모가 직접 오기의 간호를 하게 된다. 하지만 장모는 점점 더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 오기를 찾아온 동료들에게 무례한 언사를 한다거나, 오기의 재활훈련을 못하게 한다거나,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고, 인부들을 불러 좁은 정원에 엄청나게 크고 깊은 구덩이를 만들기 시작한다.

어떤 가정도 낙관적이지 않았다. 이 순간을 무사히 넘기더라도 얼마 후 비슷한 일이 끝없이 반복될 것 같았다.

오기는 무력해졌고 내부의 공동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것을 느꼈다. 그 구멍 속으로 자신이 아예 빠져버릴 것 같았다. 시야를 가로막은 커다란 앞차가 구멍처럼 보였다. 호흡하기 힘들어졌고 가슴의 압박감이 심해졌다. 어지럽고 탈진할 것처럼 의식이 흐려졌다. 오기는 삶에 애착이 심했지만, 그 순간의 무력감 역시 오기의 것이었다.

사고가 나기 전 아내가 쓰던 '한 인간에 대한 고발문'이 유일하게 이 모든 상황에 대한 설명을 가능하게 해주는 부분이다. 아내는 그것을 인간이 어떻게 속물이 되는지, 그 관찰기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사실 극중에서 그 고발문의 내용을 우리는 알 수 없다. 그저 전개되는 상황으로 미루어 짐작할 뿐. 대학 후배 제이와의 불륜을 끊임없이 의심하던 아내, 자신이 그토록 싫어했던 아버지의 단점을 그대로 닮아가며 아내에게 훈계하던 오기의 모습 등 그들 부부의 관계는 결코 '행복'이라는 모습과 닮아 있지 않았다. 그저 오기 자신만 자각하지 못했을 뿐. 아내가 알고 있던 걸 장모도 이미 알고 있었을까. 영국식 정원을 만들겠다며 정원 만들기에 몰두하던 아내의 공간은 그녀의 죽음 이후 아무도 관리하지 않아 황폐한 곳으로 바뀌어 버린다.

남겨진 오기의 삶 역시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 덩굴식물과도 같이 서서히 변해버리고 만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에 대해서 우리는 대부분 살면서 한 번도 고민해보지 않는다. 일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법한 일들이 벌어지고 나서야, 우리는 삶을 돌아보게 마련이니 말이다. 특별한 일 없이 매일 계속되던 일상이,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엉망이 되어 버리기도 하는 게 삶이다. 누구나 상상해본 적도 없는 구멍 속으로 단숨에 끌려갈 수도 있는 일상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섬뜩함과 그로테스크함은 빛을 발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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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도시 케이 스카페타 시리즈 18
퍼트리샤 콘웰 지음, 권도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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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행사로 사람들이 붐비던 숲에서 개를 산책시키러 나온 20대 남자가 심장마비로 즉사했다. 맥박도 뛰지 않았고, 생명의 징후도 없었기에 구급대원은 사망상태로 확인하고 영안실로 보낸다. 그런데 밤새 냉장실에 있던 그 시신은 아침에 피를 꽤 많이 흘린 상태로 발견된다. 시신이 인계될 당시만 해도 남자에게선 피가 흐르지 않았었는데, 죽은 사람이 그런 식으로 피를 흘릴 수도 있는 걸까. 구급대원들이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던 걸까. 만약 영안실 냉장실 안에서 남자가 죽었다면, 그렇다면 아직 살아 있는 남자를 시트로 덮어, 영안실에 보관했다는 말이 된다. 이건 뭐 공포 영화도 아니고 말이다.

'숨기지 마.' 난 그에게 말한다.

하지만 그는 내게 숨기고 있다. 벤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앞만 쳐다보고 있다. 어둑한 계기판 불빛에 날카로운 옆모습이 비친다. 우리는 항상 이렇다. 비밀스러운 특정 정보들은 피한다. 우리는 비밀의 주위에서 춤을 춘다. 가끔은 거짓말도 한다. 처음부터 우리는 서로를 속였다. 그때 벤턴이 다른 사람과 결혼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우리 두 사람은 상대방을 속이는 법을 잘 알고 있다. 그건 자랑할 일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직업적인 필요에 의해 서로를 속이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바로 지금 이 순간처럼. 벤턴은 비밀의 주위에서 춤을 추고 있다. 난 진실을 원한다. 내겐 진실이 필요하다.

마침 스카페타가 6개월간 군법의관으로 근무 후 이제 복귀하려는 차에 이런 사건이 생겨 버렸다. 복귀 전 그녀가 막 부검을 마친 사체는 아프가니스탄으로 파병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폭발 사고로 희생된 흑인이다. 아들의 어머는 죽은 아들의 정자를 추출해 살아 있는 사람에게 주입하는 일을 하게 해달라 요구하고, 그걸 거절하자 그녀에게 인종차별주의자라며 항의를 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건. 자기 집 뒷마당에서 놀던 여섯 살짜리 아이의 머리에 누군가 못을 박아 죽인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범행을 자백한 사람의 어머니가 편지로 하소연을 한다. 아들이 아스퍼거 증후군이라 사람들의 압력에 못 이겨 거짓 자백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하버드에서 조니는 무인 정찰 차량에 관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을 했는데,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무인 정찰 차량이란 심장마비로 즉사했던 남자의 아파트에서 나온 모트와 같은 군대용 로봇이었기 때문이다. 스카페타는 이들 사건들 이면에 대량 살상을 유발할 수 있는 음모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점차 깨닫게 되고, 자신이 싸우고 있는 적이 누구인지 실체를 쫓아가기 시작한다.

죽은 사람이 피를 흘렸다는 파격적인 설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 작품은 케이 스카페타 시리즈, 그것도 무려 18편이다. 국내에 출간된 시리즈로 아마 가장 많은 편수가 아닐까 싶은데, 법의학 스릴러가 독자들에게 얼마나 흥미로운 분야인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재미있는 건,  이 시리즈에서 콘웰이 서술하는 기술들은 실제 법의학에서 사용되는 최첨단 기술들이라 매우 리얼하고, 복잡하고, 때로는 어렵기까지 하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려운 정보들로 가득한 법의학 스릴러의 시리즈가 이렇게까지 지속될 수 있다는 건, 분명 이 작품에 대단한 무언가가 있다는 말일 것이다. 이 시리즈가 미드 CSI의 모태가 되었다는 사실 또한 그것에 힘을 더해주고 있고 말이다.

처음으로 죽은 환자의 차갑고 아무 느낌이 없는 몸에 메스를 대고, 처음으로 Y자형 절개를 했을 때 나는 뭔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다시 의사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신이나 영웅일 수도 있고, 죽음조차 이겨낼 수 있는 재능을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버렸다. 나 자신을 포함한 어떤 생명체도 치료할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을 거부했다....아마 병리학을 선택한 덕분에 나는 대부분의 의사보다 정직해졌을 것이다. 죽은 사람들은 내가 아무리 정성껏 도와줘도 나나 내 의사로서의 태도에 감동받지 않는다. 그전과 똑같이 죽은 상태일 뿐이다. 그들은 감사 인사를 한다거나,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낸다거나, 아이들에게 내 이름을 붙여주지 않는다. 그건 병리학을 선택했을 때부터 이미 알고 있던 사실들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들을 실감한다는 건, 해군에 입대해서 아프가니스탄 산맥에 배치되고 나서야 진짜 전쟁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과 똑같다.

이번 시리즈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10년 만에 부활한 스카페타의 1인칭 시점 서술 방식일 것이다. 시리즈의 팬 입장에서야 수년간 듣지 못했던 목소리를 만나게 되는 반가움이 있을 테지만, 만약 이 작품으로 시리즈를 시작한다면 이 방식이 조금의 어려움을 야기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실제로 벌어지는 사건의 진짜 이면을 그녀가 발견하게 되기까지 숨겨진 부분들이 많고, 엄청난 정보들과 복잡한 인물들의 관계와 그들간의 이익 관계 등이 얽혀 있어 플롯을 파악하는 것이 극중 화자인 스카페타와 거의 비슷한 속도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반부의 진행에선 다소 긴장감이 떨어지고, 몰입감도 좀 약한 편이다. 중반부까지 스카페타에게 감정을 이입해 읽어 나가다 보면, 대체 여기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던 거냐고 그녀처럼 소리지르고 싶어지니 말이다. 물론 다소의 지루함을 참아낸다면 스카페타 시리즈 특유의 탄탄한 재미를 결국 만날 수 있지만, 이번 시리즈는 조금의 인내는 필요하다. 연구실을 둘러싼 모종의 음모와 군대와 연관된 숨겨진 과거의 기억 등 그 동안 시리즈를 차근차근 읽어왔던 이들만 파악하기 쉬운 부분들이 꽤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리즈물 만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장점. 바로 인물들의 성장과 변화, 그리고 그들과 함께 시간을 쌓아가면서 맛볼 수 있는 재미는 그 어떤 작품보다 스카페타 시리즈가 최고 아닐까 싶다. 처음, 마흔 살의 나이로 법의국장에 부임한 스카페타 박사와 그녀에게 사사건건 트집을 잡던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의 강력반 형사 피트 마리노, 스카페타의 조카인 열살 컴퓨터광 루시, 점잖은 FBI 프로파일러인 벤턴 웨슬리에서 시작했던 이 시리즈는 18편까지 진행되면서 인물들이 나이를 먹고, 관계를 쌓고, 변하기도 하면서 그들만의 ''을 구축해나간다. 스카페타를 자신의 '롤모델'로 삼았던 루시는 어느 샌가 그녀의 곁에서 업무를 서포트해 주는 든든한 인력이 되었으며, 내연의 관계로 발전했던 벤턴과는 결혼해 부부로 생활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 외에도 수많은 스카페타 주변의 인물들이 등장해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그녀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면서 이들은 점점 페이지 바깥으로 나와 살아 쉼 쉬는 캐릭터들로 성장하고 있다. 그것이 앞으로의 시리즈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고, 책장에서 잠자고 있는 기존 시리즈들을 다시 한번 꺼내보게 될 계기가 되기도 할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사망했어도 시신 자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역시나 콘웰의 스카페타 시리즈 역시 독자를 배신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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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샐러드 - 밥반찬이나 술안주로도 제격인 야채 듬뿍 가정식 샐러드 100가지
노구치 마키 지음, 김성은 옮김 / 황금부엉이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요즘은 매일같이 샐러드를 만들고 있다. 채소를 원래 좋아하냐고? 노노. 샐러드 바에 가더라도 절대 풀 종류는 가져오지 않는 나이기에, 채소랑 원래 친하지 않다. 그런데 요즘 샐러드랑 억지로 친해지려고 하는 이유인 즉, 업무 특성상 점심을 자주 거르곤 하는 남편을 위해 도시락으로 샐러드를 만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남편이 워낙 채소를 좋아하기도 하고, 샐러드야 아무 때나, 업무를 하는 와중에도 간편하게 먹을 수 있어서 시작한 건데, 어느덧 4개월째이다.

 

이번에 만난 책은 야채 듬뿍 가정식 샐러드가 무려 100가지나 있다고 해서, 읽기도 전부터 호기심이 생겼다.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샐러드 레시피가 꼭 필요한 나에게 멋진 팁이 되어주길 바라며, 가정식 샐러드 레시피를 살펴 보았다.

기존에 보아왔던 샐러드 레시피북들이 거의 국내 저자들의 책이었던 탓에, 일본 저자가 쓴 <오늘의 샐러드>는 일본 가정식 특유의 심플함이 돋보이는 메뉴들이 많았다. 서양식 샐러드와 퓨전 샐러드도 구분되어 있었지만, 일본식 샐러드의 비중이 높다는 점이 다른 레시피 북들과의 차별화가 아닐까 싶다.

 

자 샐러드, 당근 보리 샐러드, 고등어 통조림 샐러드, 토마토와 아보카도 바질 샐러드 등.. 반찬으로 사용할 수 있는 메뉴들도 돋보였고, 굴 오일 샐러드, 문어와 대두 파슬리 샐러드 등의 메뉴도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저자 만의 개성이 돋보이는 메뉴였다. 일본식 샐러드 메뉴는 더욱 독특했는데, 유부 고명 샐러드, 파 두부 낫토 샐러드, 참마와 오이 매육 샐러드 등은 생각도 해보지 못한 재료들이라 그들이 섞여 어떤 맛을 낼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샐러드에 어울리는 드레싱도 10가지나 소개되어 있는데, 흔히들 자주 사용하는 시저 드레싱이나 요거트 드레싱, 레몬드레싱, 발사믹 드레싱, 사우전 아일랜드 드레싱, 머스터드 드레싱등은 이 책에 소개되어 있지 않다. 대신 참깨 드레싱, 초밥식초 드레싱, 고추냉이 마요네즈, 양파 드레싱, 태국식 드레싱등 주로 일본식 드레싱들이 소개되어 있어 새로운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책에 소개된 레시피 중에 30가지는 뜯어서 레시피 카드로 쓸 수 있도록 별도로 수록되어 있다. 요리할 때마다 책을 펼쳐놓고 레시피 확인하느라 번거로웠던 주부들을 위한 굿 아이템이 아닌가 싶다.

남편 도시락으로 시작한 샐러드는 이제 가끔은 다이어트 중인 동생을 위해서도, 그리고 아이 때문에 제대로 끼니를 챙겨먹기 힘든 나를 위해서도 만고 있다. 그러다 보니 온갖 종류의 드레싱이며, 재료들이며, 다양하게 만든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샐러드 레시피북을 여러 권 뒤적여보고, 인터넷 레시피를 찾아보기도 하고, 티비 레시피를 따라해 보기도 하지만 여전히 매일같이 샐러드를 만드는 입장에서는 색다른 레시피가 필요했다. 나처럼 웬만한 샐러드는 다 만들어보거나 먹어본 사람들에게, 이 책은 특별한 메뉴들을 많이 소개해주고 있어 활용도가 높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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