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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내성적인
최정화 지음 / 창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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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같이 반복되는 하루가 무의미하고 지루해서 회사만 그만둔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던 때가 있었고, 외부의 상황으로 인한 남자 친구와 위기의 순간에는 그저 평생 그를 볼 수 있는 것만이 유일한 소망인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긋지긋한 회사를 관두고 전업주부가 되었고, 사랑하는 그의 곁에서 매일 아침을 시작하지만 내가 회사를 다닐 때보다 더 '행복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 지옥에서 탈출하고 싶다던 간절한 바람은 대체 어디로 사라져버린 걸까. 최정화의 소설은 그렇게 우리의 인생에서 더 낫거나 덜한 것, 그때 원했던 것과 지금 원하는 것, 그때 충족되지 못했던 것과 지금 충족되지 못한 것들에 대해 그리고 있다.

그는 그녀가 왜 행복한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자기가 한 말을 믿고 있었다. 그게 그녀가 다섯 음이나 높은 톤으로 말을 하고, 그토록 웃음이 많아지고, 그리고 거짓말을 계속하고 싶어하는 이유였다. 그녀는 지금 어엿하게 제 앞길을 닦아나가는 장성한 아들을 두고 있었고, 우연히 마주친 남자의 관심을 받을 만한 요조숙녀였다. 게다가 생전 처음으로 남에게 주목을 받고 있었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 그녀를 궁금해했고 그녀는 그들을 만족시키는 대답을 할 수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더 이상 미안해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즐거워 보이는 게 아니라, 즐거웠다.

                                                                                            -'홍로' 중에서

 

<구두>의 주인공은 가사 도우미 면접을 보러 온 여자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한다고 느낀다. 산 지 적어도 오 년은 지나 보이는 낡은 구두를 신고 온 여자는 마치 주인공의 집과 남편과 아이를 자신의 집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일자리를 구하러 온 사람의 머뭇거림이나 위축된 모습이 아니라 새집에 첫발을 디디는 이의 설렘 같은 게 묻어 있는 여자의 흡족한 미소가 주인공을 불안하게 만든다. <팜비치>에서 오 년째 승진에서 쓴 물을 마시고 있는 남편이 피서지에서 겪는 일련의 일들은 그와 아이, 아내 사이에 뭔가 소통의 벽 같은 것을 느껴지게 만들고 있다. <오가닉 코튼 베이브>에서 끊임없이 강박적으로 자신에게 부족한 것에 탐닉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아내는 여러 상황에 따라 그 폭을 넓혀 가지만 충족되지 못하고 여전히 악몽을 꾼다. 끝도 없이 모습을 바꿔가며 평온한 현재를 위협하는 온갖 두려움의 요소들에 시달리는 그녀의 모습에는 현대인의 불안 심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틀니>의 아내에게 남편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월등했고 존경스런 존재였다. 남편은 오 년 전 교통 사고로 여러 차례 대수술을 한 뒤 구조상 임플란트가 불가능해 틀니를 끼우게 되었는데, 아무도 없는 어둠 속에서만 틀니를 빼는 그의 모습이 안쓰러웠던 그녀는 집에서는 틀니를 빼고 있으라고 말한다. 하지만 막상 틀니를 뺀 그의 해괴망측한 모습을 보게 되자, 그녀의 마음속에는 한심하다는 어떤 감정이 일어나더니 점점 그를 무시하게 된다.

<홍로>에서 계약으로 아내 역할을 하고 있는 여자를 동창 모임에 데려가야 하는 남자는 그들의 관계가 친구들에게 드러날 까봐 노심초사한다. 말이 없고 순종적이고, 살짝 주눅이 든 태도에 마치 태어날 때부터 오십 대였을 것 같은 표정의 그녀가 삼십 년 전에 사고사한 아내에 비해 부족한 점이 너무 많은 것 같아서 찜찜했던 것이다. 하지만 친구들의 질문에 조심스럽게 대답을 하던 그녀에게 그가 무심코 거짓말을 보태자 그것에 호응하기 위해 시작한 말이 그녀를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버린다. 평상시 그녀의 목소리보다 다섯 음 정도 톤이 높아지고, 쉴 새 없이 떠들어대고, 하이톤의 웃음소리로 한껏 들떠 있게 된 것이다. 이랬으면 좋겠다 싶었던 바램이 거짓말로 현실이 되자, 마치 자신이 진짜 그 세계 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된 것이다. <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경우>는 시골에서 여름 한 철을 보내며 작품을 쓰는 소설가와 그녀가 묵고 있는 집의 주인 여자와의 기묘한 우정(?)을 그리고 있다. 소설가와 가깝게 지내게 되면서 그녀의 원고를 읽어주고 모니터링 해주다 점점 자신의 말에 좌지우지 되는 선생님의 모습에 우쭐해진 집주인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 앞에서 흔들리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묘한 장난기가 발동하게 되고, 스스로의 의도와는 달리 점점 선생님과 거리가 멀어지고 만다. 그녀의 집착과 피해의식이 어쩌면 '내성적인 살인'으로 까지 가게 될지도 모르는 그 과정은 너무 차분하고 담담해서 오히려 섬뜩하게 느껴진다.

여기서 포기할 순 없었다. 내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으니까. 인생이란 언제나 원하지 않는 것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하는 인형 뽑기 기계다. 시은으 제한되어 있고, 집게는 헐거우며, 인형은 모두 하나같이 조악하다. 나는 오백 원짜리 동전을 쥐고 있다. 가장 작고 가벼운 인형이 뽑힐 확률이 가장 높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동전을 넣지 않을 이유가 무어란 말이냐. 타협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인가.

                                                                                        -'대머리' 중에서

 

선망과 열등의식이 만들어낸 집착에 휩싸인 여자, 자신이 한 거짓말을 사실로 믿어 버리게 되는 여자, 잘 안다고 믿었던 자신의 딸이 불가해한 타인처럼 낯설게 느껴진 남자, 남편의 망가진 모습에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게 시작하는 아내, 신경증과 피해망상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은 여자 등 이 작품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열등감이나 죄책감, 혹은 피해의식 때문에 다른 이들을 조금씩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극중 어떤 인물도 온전하게 '믿을 수' 없다. 모든 상황이 그럴 듯하지만, 사실 그 어느 것도 진실이라 단정할 수는 없는 불투명한 세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균열과 파동을 예민하게 그려내고 있는 작가는 우리의 평범할 수도 있는 일상을 매우 예민하고, 섬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때는 그 혹은 그녀만 곁에 있다면 세상에 다 내 것이 될 줄 알았지만, 어느 순간 해서는 안될 말들이 오가고 서로 잡아먹으려고 으르렁거리는 짐승처럼 변하기도 하는 것이 사람들의 관계이기도 하다는 것이 서글프지만, 사실 다들 그렇게 살고 있지 않나. 우리가 과거에 원했던 것과 현재 바라는 것이 항상 같을 수는 없고, 당시에 충족되지 못했던 것과 지금 충족되지 못하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인생에서 더 낫거나 덜한 것을 구분하기란 이렇게 어렵기만 하다. 그러니 내가 조금 어긋나고 조금 비뚤어진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거나 달라질 거라고 믿는 건 정말 순진한 일이다. 냉정하지만 담담한 시선으로, 예리하지만 섬세한 시선으로 현대인의 불안한 내면을 그려내고 있는 작가는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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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 되는 법
모신 하미드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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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기계발서는 그야말로 서점가의 '스테디셀러'이다. 종합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항상 자기계발서는 몇 권씩 순위에 있고, 매년 가장 많이 팔린 책을 집계할 때도 역시나 자기계발서를 빼놓을 수가 없다. 그런데 과연 '자기를 계발하기 위해' 자기계발서를 읽을 필요가 있는 걸까? 글쎄, 나는 의문이다. 사실 자기계발서는 거의 읽지도 않거니와, 읽어야 할 상황이 생겼을 때는 독서하는데 이삼십 분이면 충분하다. 왜냐하면 그저 정보의 나열, 요약, 정리가 되어 있는 노트 같다는 느낌이라 깊은 사유 같은 건 할 필요도 없고, 대충 훑어 보기만 해도 대략적인 내용 이해가 가능하니 말이다. 물론 누군가는 자기계발서가 개인의 삶을 향상시키고, 스스로의 능력을 계발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도와준다고 믿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독자들은 저자들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위해 일할 뿐이다. 조금 식상한 표현이라는 건 알지만, 바로 여기에 독서의 풍부함이 있다. 또한 바로 여기에 부를 가리키는 손가락이 있다. 당신은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가 되고 싶어 하며, 이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이야기했다. 당신은 스스로를 위해 일해야 한다. 노동의 열매는 달콤하지만 영양가가 높지는 않다. 그러니 당신의 열매를 남과 나누지 말고, 기회가 닿는 한 남의 열매에 눈독을 들여야 한다.

 

이 책은 신간 평가단 추천 페이퍼를 작성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제목 때문에 당연히 자기 계발서인줄 알았으나 소설이란다. 자기계발서를 유쾌하게 비판하는 글로 각 장이 시작되는 '소설'이라고 해서, 자기계발서의 존재에 대해 회의적인 나였기에 제목만큼이나 도발적이고 거침없는 글 일거라 기대가 되었다. 모신 하미드는 우선 자기계발서라는 말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며 이야기를 시작해놓고는, 이 책은 자기계발서라고 말한다. 제목 그대로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 되는 법'을 보여주겠다고 말이다. 2인칭 소설의 주인공은 '당신'으로 지칭된다. 아시아 어느 나라의 가난한 시골 집안에서 태어난 당신은 도시에 나가 가족들 중 유일하게 대학에 다니고, 사업을 해서 '더럽게 부자'가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계발'해야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열두 단계에 이르는 '자기계발'을 해야 한다. 저자는 그 열두 단계를 각 장으로 나누어 이야기를 진행한다. 당신은 우선 도시로 나가, 교육을 받고, 사랑에 빠지지 않으며, 이상주의자를 멀리하고, 고수에게 배우고, 스스로를 위해 일하며, 폭력 사용을 마다하지 않고, 관료와 친구가 되며, 전쟁 기술자들을 후원하고, 부채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고, 기본에 충실하며, 출구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이렇게 엄청난 단계를 거쳐, 부지런히 자기계발을 하면 과연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 우리가 이 책을 읽으면 과연 우리도 부자가 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당신이 이 이야기를, 내가 이 이야기를 창조하는 동안, 당신에게 그 동안 어땠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당신의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당신의 손을 잡아줄 사람, 당신과 함께 비를 피해 달려가던 사람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다. 나는 잠시 여기서 당신과 함께 머물고 싶다. 만약 그게 불가능하다면 당신의 허락 아래 공간을 초월해, 당신의 창조물 속에 머물고 싶다. 그것은 나를 애타게 하는 미지의 세계다.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해서 상상조차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런 상상은 참으로 묘한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감정이입이라는 것은 정말 흥미로운 능력이다.

마지막 장에 이르면 저자는 '사실 이 책이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가 되기 위한 가장 완벽한 지침서는 아니다'라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이 책은 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건가. 소설의 형식을 빌고 있는 자기계발서? 아니면 자기계발서를 흉내 낸 소설? 중요한 것은 아시아 어느 나라의 가난한 시골 집안에서 태어난 당신으로 시작한 이야기가 지금 한국에서 책을 읽고 있는 독자인 당신으로 끝난 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나의 이야기이기도, 당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3분 만에 상대를 설득하고, 7가지 습관으로 승자가 되며, 수세기 동안 단 1퍼센트만 알고 있는 부와 성공의 비밀을 알려주겠다는 책들을 읽으며 성공하고 싶다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한다. 그렇게 더 나아지고 싶다는 동기가 항상 바라는 것을 다 이루게 만들어주지는 않겠지만, 과정 자체에서 또 다른 삶의 의미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니 그대여, 굳이 자기 계발서 따위에 의존해서 타인의 도움을 구하려고 애쓰지 말라. 자신의 삶은 오로지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바뀔 수 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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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엄마 그림책이 참 좋아 33
백희나 글.그림 / 책읽는곰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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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엄마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 일이 바로 '육아'라 가끔은 누구나 하는 걸 과연 힘들다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들고 어려운 건 어쩔 수가 없다. 돈과 경력을 포기할 수 없어 눈물겨운 워킹맘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엄마도, 종일 집에서 아이만 돌봐야 하는 전업 주부인 엄마에게도 말이다. 직장 생활을 하는 것도 모자라 퇴근 하자마자 집에 와서 제2의 일을 시작해야 하는 워킹맘의 고달픔이야 실제 엄마가 아닌 사람들도 어느 정도 알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24시간 아이와 함께 지내느라 온 마음과 시간을 다 투자해야 하는 독박육아에 시달리는 맘들의 고충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오죽하면 매일같이 그만둬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했던 직장 생활을 다시 하는 게 아이를 종일 돌보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하겠는가.

 

서울에 엄청난 비가 쏟아진 어느 날, 직장에 있던 호호 엄마에게 연락이 온다. 호호가 열이 심해 조퇴를 했다는 것이다. 엄마는 호호를 부탁하려고 여기저기 전화를 걸지만, 전화는 연결되지 않고 점점 걱정이 된다. 그러다 어렵게 전화 연결이 되고 엄마는 통화 속 상대가 호호의 할머니라 생각하고 호호를 부탁한다. 일 끝나자마자 곧장 갈 테니, 집에 가서 아픈 호호를 좀 돌봐 달라고.

 

'나더러 엄마라니..... 잘못 걸려 온 전화 같은데.

아이가 아프다니 하는 수 없지.

좀 이상하지만 엄마가 되어 주는 수밖에.'

 

그렇게 해서 '이상한' 엄마는 호호네 집을 찾아 내려온다.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호호는 낯선 아주머니를 보고 조금 겁이 났지만, 따스한 목소리에 어쩐지 마음이 놓인다.

이상한 엄마는 호호네 집 안 곳곳을 뒤져 냉장고에서 달걀을 발견해, 호호가 먹고 싶다는 달걀국과 프라이를 만들어 준다.

따뜻한 음식을 먹고 기분이 조금 나아진 호호를 이상한 엄마는 가장 크고 푹신한 구름을 골라 눕혀준다.

걱정 말고 한숨 푹 자고 나면 엄마가 올 거라고.

하루 종일 호호를 걱정하느라 호호 엄마는 얼마나 신경이 쓰였을까. 아마 마음은 호호에게 가 있어서 일도 제대로 못하고, 퇴근하자 마자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이상한 엄마를 만난 호호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이상한 엄마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호호 엄마는 집으로 가 무사히 호호를 만나게 되었을까.

 

"호호야!"

잠결에 엄마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호호야! 어딨니?"

 

아이가 아프게 되면 거의 하루 종일 정신이 나가 버리곤 한다. 특히나 아직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가 아플 때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밤새 뜬 눈으로 지새우는 건 다반사고, 일분 일초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혹시라도 아이가 잘못 될 까봐 밥 먹는 것도 잊어 버리고, 해야 할 일도 전부 미루고, 걸려오는 전화 소리도 들리지 않고, 눈이 시뻘개지도록 종일 조바심을 내며 아이 곁을 지킨다. 엄마에게 아이란 그렇게 생의 모든 것. 전부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백희나 작가의 이번 신작은 일하는 엄마들, 고달픈 워킹맘들을 위한 스토리이긴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부분들을 그려내고 있다. 아이가 바로 눈앞에 있다고 해서 걱정이 되지 않고, 힘들지 않은 건 아니니 말이다. 아이들을 위한 동화지만, 나는 이 짧은 이야기가 마치 나를 위한 것 같아서 읽고 또 읽고, 보고 또 보았다. 그냥 이 짧은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그냥 위로가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엄마들은 이렇게 힘들게 아이를 키우고 있다고. 비록 당신이 생각하기에는 부족한 것 투성이라도 사실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이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여. 태어날 때부터 여자이기 때문에 당연한 수순처럼 겪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조건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자. 생물학적으로 엄마가 되었으니 아이를 케어하는 능력까지 한꺼번에 갖추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의심하지 말자. 당신은 엄마이기 이전에 한 명의 사람이다. 당신도 힘들 때는 위로 받아야 하고, 지칠 때는 응원이 필요하고, 아플 때는 의사가 있어야 하며, 어려운 일 앞에서는 도와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잊어 버리지 말자. 엄마는 슈퍼 우먼이 아니다. 엄마라면 당연히 무슨 일이든 척척 해내고, 무슨 일이든 견디고 감수해야 하고, 어떤 상황에서든 참아야 하고, 언제나 모든 걸 희생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현실을 살고 있는 엄마들에게, 백희나 작가는 조용하고 따뜻한 위로를 안겨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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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 온 스노우 Oslo 1970 Series 1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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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의 여자를 처리하라는 명령을 받은 킬러는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 보스의 명령에 불복종한 그는 쫓기는 신세가 되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여자를 지켜야 한다. 이 작품은 클리쉐가 난무하는 전형적이고 상투적인 범죄 소설이지만, 이상하게 가슴 시리고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이다. 책장을 덮고 그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랬더니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원래 미스터리 소설에서는 언제나 플롯보다는 캐릭터가 우선이지 않았나. 물론 모든 작품이 그런 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미스터리 형식으로 만들어지는 소설이라면 캐릭터로부터 플롯이 도출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실 위대한 미스터리는 그냥 캐릭터 그 자체이다. 복잡하고 정교한 플롯이 아니더라도, 엄청난 반전이나 한 방이 없더라도, 그저 매력적인 캐릭터 하나만으로도 완성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바보 같은 남자, 올라브와 사랑에 빠진 게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작품에서는 전작에서 보아왔던 완벽하게 짜여진 구성과 치밀하게 계획된 플롯도 없고, 긴장감 넘치게 매우 실감나는 수사 과정도 없고, 수많은 인물들을 엮어내는 기막힌 퍼즐도 없으며, 꼼꼼한 복선과 감탄사를 불러 일으키는 반전도 없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엄지를 척 올리며 별 다섯 개를 주고 싶어진다면, 이유는 딱 하나. 바로 캐릭터 때문이다.

어쨌든. 요약하자면 이렇다. 나란 인간은 천천히 운전하는 데 서툴고, 버터처럼 물러터진 데다 금방 사랑에 빠지며, 화나면 이성을 잃고, 셈에 약하다. 책을 좀 읽기는 했지만 아는 게 별로 없고 쓸 만한 지식이라곤 더더욱 없다. 내가 글을 쓰는 속도보다 종유석이 자라는 속도가 더 빠를 것이다.

그러니 대체 다니엘 호프만이 나 같은 인간을 어디에 써먹겠는가?

그 답은 (여러분도 이미 짐작했겠지만) 해결사다.

운전할 필요도 없고, 대부분 죽어 마땅한 인간들을 죽이며, 복잡하게 계산할 것도 없다. 지금부터는 얘기가 달라지지만.

올라브는 해결사로 일한 지 4, 킬러지만 천성이 유약하고 예민한 남자이다. 그는 셈에 약하고 집중력도 떨어진다. 난독증을 겪고 있지만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글로 쓰고 싶어 한다. 너무 빨리 사랑에 빠지고, 사랑에 빠지게 되면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약점도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아빠에게 폭력을 당하는 엄마를 지켜봐 왔기에, 여자를 때리고, 붙잡아 겁주는 일은 절대 못하고, 다른 남자들이 여자를 때리는 것도 참지 못한다. 누군가를 죽이는 일도 그에겐 그저 의뢰 받은 일에 불과하다. 그저 해야 하는 일을 하되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않기가 그의 신조인데, 이제 문제가 생긴다. 그의 보스 호프만이 자기 아내를 죽여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여자가 불쌍하거나 일 자체가 어려운 건 당연히 아니었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그가 여자를 처리한 후에, 경찰의 조사가 시작되면 자신이 보스의 미래를 좌우할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보스는 평소 그가 받던 보수의 다섯 배를 주겠다고 한다. 뭐 어차피 그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그렇게 걱정을 해본다.

그리고 보스의 아파트 건너편 호텔에 작은 방 하나를 빌려, 며칠간 그 여자를 지켜보기로 한다. 그런데,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지고 만다. 그녀의 얼굴, 입술, 금발 머리, 가는 팔, 햇빛에 반짝이는 것 같은 눈까지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였고, 그렇게 그는 사랑에 훅 빠져 버린다. 그는 지나치게 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다. 그리고 사랑에 빠지게 되면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구라도 짐작이 갈 것이다. 올라브는 보스의 여자 대신, 그녀의 젊은 남자를 해치우기로 한다. 그리고는 보스에게 보고한다. 사모님 대신 애인을 보냈다고. 사모님은 그 놈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그러나 이어지는 것은 상상도 하지 않았던 보스의 대답. "네가.... 하나밖에 없는....내 아들을 죽여?" 아들이라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올라브는 당황하지만, 애초에 그가 보스 대신 그녀를 선택할 때부터 상황은 그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엄마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나는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냈고. 그렇다고 누구의 이야기가 맞는지 알아내기 위해 니테달 호수에 뛰어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가 그런 대접을 받으면서도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내게 사랑에 대해 한 가지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아니, 그렇지 않다.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 사실은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나는 이 작품을 프리뷰단으로 작년 연말에 원고로 먼저 만났었는데, 처음 이 원고를 읽고는 굉장히 놀랐었다. 분명히 내가 알던 그 작가가 맞는데...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작가가 맞나? 싶을 만큼 낯선 요 네스뵈를 만날 수 있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분위기며 스타일이 기존 그의 작품과 너무 달라서, 만약 작가를 모르고 텍스트만 먼저 만난다면 그의 작품인지 전혀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색다르다. 몇 몇 장면에서 요 네스뵈가 즐겨 쓰는 익숙한 문장들만 아니라면, 그 어디에서도 그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작품이라니 새삼 그의 실력에 놀라울 따름이었다. 짧고 간결한 문장, 군더더기 없는 최소한의 단어들. 이야기의 길이가 줄어들수록 밀도는 더 진해져 진한 에스프레소 처럼 묵직한 향을 남겨준다. 굉장히 진한 에스프레소도 그 맛을 알게 되면, 달게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요 네스뵈의 이 작품은 마치 갓 내린 원두로 뽑아낸 찐한 에스프레소에서 쓴 맛을 알아야만 느낄 수 있는 그 소중한 단맛 같은 느낌이었다.

이 작품은 명백하게 '스릴러의 가면을 쓴 멜로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올라브의 인생에는 두 명의 여인이 있다. 우선 마리아 미리엘. 약쟁이 남자친구 대신 빚을 갚으려던 그녀는 농아에 절름발이다. 호프만 밑에서 포주로 일하는 피네가 그녀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고 그를 때려눕히고 마리아를 구하고, 그녀 대신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그녀의 빚을 갚아 준다. 그리고 올라브는 가끔씩 슈퍼마켓에서 일하는 그녀를 찾아가 무슨 문제는 없는지, 약쟁이 남자친구가 다시 나타나 깽판을 부리는 건 아닌지 확인한다. 하지만 그가 그녀를 사랑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녀의 초대에 응하지도 않고, 그녀가 사소한 호의라도 보일라치면 질색하며 물러섰으니 말이다. 나머지 한 명은 보스의 아내이자 자신이 없애야 할 대상인 코리나 호프만. 올라브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보스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도망자 신세가 되지만, 그녀와 함께 파리로 떠날 계획을 세우며 행복에 부푼다. 물론 그것조차 그에게 허락된 행복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이 고독한 남자의 사랑은 물론 비극으로 점철된 그의 인생처럼 순탄하지가 않다. 난독증을 겪고 있는 그는 책은 자신의 마음대로 해석해서 읽어내는데 아무 문제가 없지만, 세상과의 소통만은 그렇게 쉽지가 않다. 그리하여 클라이막스를 넘어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은 슬프고, 먹먹하고, 쓸쓸하고, 애처롭지만, 눈부시게 아름답기도 하다. 희디흰 눈, 붉디붉은 피. 눈을 뒤집어쓴 남자. 둑으로 막아뒀다가 터진 물줄기처럼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랑조차 구원할 수 없었던, 피를 흠뻑 빨아들인 눈사람. 이상하게 아름답고, 마치 실제로 보고 있는 것처럼 눈이 시린 기분이 들게 만드는 특별한 장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이젠 죽을 수 있어요, 엄마.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더는 이야기를 지어낼 필요가 없어요. 이보다 더 좋은 이야기를 지어낼 순 없을 거예요.

펄프 소설은 1920 - 1955년 사이에 값싼 목재 펄프종이에 인쇄되어 간행되던 대중소설을 말한다. 요 네스뵈는 그 동안 공공연히 짐 톰슨의 <내 안의 살인마>를 좋아한다고 말해왔기 때문에, 어쩌면 그가 펄프 소설에 한번쯤 도전하리라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영화 <컨버세이션> 또한 요 네스뵈의 애정 리스트에 항상 있던 작품이었다. 요 네스뵈는 그렇게 자신이 사랑했던 펄프 픽션과 자신이 항상 매혹되곤 했던 1970년대의 음울한 분위기를 이 작품에서 유감없이 선보이고 있다. 그는 이 작품을 미국에서 도쿄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대략 12시간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마치 무언가에 취한 것처럼, 스스로 올라브 요한센이라는 인물이 되어서 말이다. 게다가 실로 그의 초기작인 초기작인 <헤드헌터> 이후로는 오랜만에 만나는 1인칭 화자라, 굉장히 감성적이고 멜로드라마적인 느낌마저 물씬 풍기는 스릴러가 탄생했다. 세상에. 요 네스뵈가 이렇게나 멜로를 잘 쓰는 작가였다니 놀랍기 그지 없다.

일류 킬러에게 보스가 자신의 부인을 죽이라는 명을 내리고, 킬러가 그 목표와 사랑에 빠진다는 너무도 단순하고, 전형적인 플롯이 요 네스뵈라는 작가를 만나면 어떻게 감각적이고 아름답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지 놓치지 마시라. 1970년대의 아름다운 오슬로를 배경으로 마치 영화 <펄프픽션>같은 느낌의 누아르를 만들어낸 그의 솜씨에 이어지는 연작인 <미드나잇 선> 또한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미드나잇 선>에서는 같은 시대, 다른 주인공이 등장해 연관된 사건을 펼친다고 한다. 그의 1970 오슬로 시리즈가 어떻게 완성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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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69 2016-04-24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리얼리티가 느껴지네요.
다음에도 좋은 감상평 부탁드리겠습니다

피오나 2016-04-25 00:26   좋아요 0 | URL
하핫. 리얼리티라니 감사합니다^^
 
정신병원을 탈출한 여신 프레야 프레야 시리즈
매튜 로렌스 지음, 김세경 옮김 / 아작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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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페이지에서 흥미롭게 읽고 있는 작품!! 북유럽 신화 속 존재가 현대의 이야기 속에서 어떻게 어우러질까 궁금했는데, 초반 스토리 진행부터 매우 흥미진진하다. 이런 여성 캐릭터 너무 좋다. 표지 이미지부터 확 시선을 잡아끌지 않나. 아작에서 출간되는 작품들은 일단 믿고 구매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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