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기다릴게
스와티 아바스티 지음, 신선해 옮김 / 작가정신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엄마는 오로지 자신의 두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 남편의 학대를 참고 견딘다. 아들은 그럴 때마다 나서서 아빠에게 말대꾸를 하고 화를 돋운다. 오로지 엄마를 보호하기 위해서. 아빠의 화가 엄마가 아닌 자신에게 향하기를, 그래서 자신이 아빠의 손찌검과 폭력을 대신 견디기 위해서. 왜냐하면 그때 그의 나이는 고작 열한 살이었기 때문이다. 철없는 동생은 여섯 살, 자신의 키는 이제 겨우 아빠의 어깨에 닿을 정도였고, 그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것 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가정폭력에 관한 이 끔찍한 이야기가 정말 무서운 것은, 이것이 비단 허구의 이야기로만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에 12년 동안 가정폭력에 시달려온 40대 여성이 남편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해 그를 살해하자, 징역 4년이 선고되었다는 기사를 봤다. 당시 그녀는 친정 집에 다녀왔다는 이유로 주먹과 발로 온몸을 때리던 남편의 폭행을 견디다 못해 범행을 저질렀으나, 비록 피고인이 가정폭력에 의한 희생자라고 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이라는 가장 존귀한 가치를 침해하는 중대한 결과를 가져온 점에서 그 죄질이 무겁다며, 이는 정당방위는 물론 과잉방위로도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무려 12년 동안이나 잦은 폭행, 폭언 등 가정폭력을 당해 육체적·정신적으로 고통을 받아왔고, 범행 또한 우발적으로 벌어졌지만 말이다. 게다가 그녀는 장기간 지속된 가정폭력으로 인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 무슨 개뼉다귀 뜯어먹는 소리인지. 정말 이 나라의 사법 체계는 약자를 위한 것이 아님을, 새삼스레 깨달으면서 화가 났던 기억이 난다.

친애하는 아버지.

어차피 당신도 내가 원하던 아버지는 아니에요.

그 집에서 내쫓아줘서 고마워요.

스와티 아바스티의 (무려) 데뷔작인 <엄마를 기다릴게>는 아버지의 폭력으로 얼룩진 두 형제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열여섯 소년 제이스가 오 년 동안 연락 한번 없었던 형 크리스천을 찾아가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어린 자신의 기억 속에서 늘 엄마를 대신해 아버지의 폭력을 견뎌야 했던 형, 그런데 어느 날 형은 자신과 엄마를 내버려 둔 채 홀로 집을 뛰쳐 나오고 말았다. 아버지의 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무기력한 엄마, 그리고 그런 폭력의 위험 속에 자신을 버려두고 혼자 달아나 버린 형. 물론 그들에겐 각자의 사정이 있다. 엄마는 자신이 남편을 떠날 경우 그가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올 거라는 걸, 그리고 자신의 두 아이들에게 그 해꼬지를 할 거라는 걸 너무도 잘 알았고, 형은 아버지가 동생에게만은 손찌검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기에 엄마에게 함께 도망치자고 했었지만 결국 혼자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집을 떠나왔던 그 기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동생은 찢어진 입술에 부어 오른 턱에, 이마를 가로지른 시뻘건 상처자국을 한 채 자신을 찾아온다.

그리고 제이스는 몇 평 남짓한 형의 작은 아파트에서 새로운 학교에 다니고,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하고, 새로운 여자친구를 만나면서, 시카고의 집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행복할 수 없다. 그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외모도, 성격도 아버지를 꼭 빼 닮은 자신이 바로 그 끔찍한 폭력적인 부분 또한 고스란히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전 여자친구인 로런에게 자신도 모르게 끔찍한 폭력을 가했던 그것을 지울 수 없었던 그는, 일상에서도 불쑥불쑥 자신 안에서 마구 분출하려고 하는 그 욕망을 내리 눌러야 했다. 사실 아동학대의 피해자였던 이가 자신이 부모가 되어 다시 그 자식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악순환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당사자는 그것을 범죄의 행위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 끔찍한 것인데, 극중 제이스는 좀 다르다. 그는 끊임없이 후회하고, 고민하고, 벗어나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아버지가 아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노려보면서, 도대체 내가 엄마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곱씹어본다. 추수감사절에 희망을 거는 내가 잘못된 것인가? 위험을 무릅쓰고 탈출하는 것보다 그렇게 갇혀 사는 게 더 나쁘다는 것은 확실한데.

하늘에서 시커먼 구름이 서서히 걷히고 태양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나는 달리러 나간다. 지평선에 시선을 두고 나의 맥박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박자에 맞춰 주문을 외워본다.

엄마는 온다. 엄마는 반드시 온다.

형제는 다가오는 추수감사절에 그들이 있는 곳으로 오겠다는 엄마의 약속을 손꼽아 기다리지만, 엄마가 과연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집을 탈출할 수 있을 지는 알 수 없다. 이들의 이야기는 가정폭력이라는 문제가 현실적으로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매우 감..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가정폭력이야기에 웬 감성적인 부분이냐고 의아해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 가정폭력을 견디다 못해 집을 나왔지만 내내 아버지가 자신을 쫓아올 지도 모른다는 (실제로 찾아와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공포에 시달려야 했던 크리스천, 형이 집을 떠난 후 엄마에 대한 아빠의 폭력을 내내 견디다 결국 그에게 반항할 수밖에 없었던, 게다가 자신이 끔찍하게 생각하는 아버지의 그것을 자신 또한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괴로운 제이스, 그리고 이들 주변에서 형제에게 도움을 주려는 사람들인 크리스천의 여자 친구 미리엄과 여전히 그를 잊지 못하는 제이스의 전 여자친구 로런과 그의 새 여자친구인 다코타. 이들 형제가 무사히 엄마를 만날 수 있을 것인지, 아빠의 폭력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있을 것인지, 제이스는 아빠를 닮은 자신의 폭력적인 성향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지.

이 작품은 두 형제가 스스로 일어서며 성장하는 스토리와 함께 그들 주변의 여러 인물들이 내뿜는 따뜻함이 함께 어우러져 단단한 서사를 이루고 있다. 마치 청소년 성장 드라마인 것처럼 진행되는 이야기가 어느 순간 묵직해지고, 또 어느 순간 먹먹한 감정을 선사하는 이유 또한 바로 이들 인물들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그 어떤 순간에라도 우리가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대체 어떤 인간이 자신의 아들을 죽을 지도 모르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폭력을 가할 수 있는 걸까. 갈비뼈가 부러져 폐를 찌르고 응급수술을 받아야 했던 아이는 아빠가 자신을 죽이겠다는 협박을 온 몸으로 느끼고는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요즘 한창 화제인 장기결석 아동에 대한 전수조사를 실시 과정에서 충격적인 사실들이 밝혀져 한 동안 떠들썩했었다. 장기결석 초등생이 아버지에게 맞아 숨진 사실이 3년여 만에 드러났고 가출신고 된 여중생이 11개월 만에 백골상태로 발견돼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또 최근에는 딸을 학대해 사망에 이르게 하고 시신을 암매장까지 한 어머니가 붙잡혔단다. 대체 이놈의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과연 이들을 사람이라고 불러도 되는 건지 나는 알 수가 없다. 학대, 폭행 등을 당해도 신고는커녕 파악조차 쉽지 않았던 아동들에 대한 대책이 마련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정폭력은 완전히 해결하기가 쉽지 않은 우리 사회의 병폐 중 하나이다.

엄마가 왜 아빠 곁을 떠나지 않는지는 틀린 질문이다. 도대체 우리 아빠는 왜 아내를 때리는 걸까? 내 의문은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아빠로부터, 나 자신으로부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트레이얼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산다는 건 놀라움의 연속이다. 공인회계사인 로빈은 모로코 여행에서 자신이 전혀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놀라운 일들을 겪게 된다. 믿었던 남편의 배신에 당황하고, 그의 숨겨졌던 과거에 경악하고, 낯선 남자에게 강간을 당할 뻔하기도 하고, 경찰에 쫓기다, 사막에서 쓰러져 사경을 헤매기도 한다. 단어 그대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게 된 것이다. 삶이 정말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만 같은 기분, 발 밑이 아득한 낭떠러지 같은 기분이었을 거다. 사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을까. 너무도 평안하고 탄탄대로 삶이 흘러갔다면 모를까, 대부분은 어느 정도의 굴곡을 겪으며 살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것은 가까운 친구의 배신일 수도, 연인과의 이별일 수도, 가족과의 트러블 일수도 있고, 재정적인 타격이나 커리어의 바닥일 수도 있겠다. 누군가의 말처럼 행복한 모두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반해, 불행은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 '불행이 닥쳤을 때 대응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각기 다르기' 마련이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방식도 사람마다 각기 다른 것처럼 말이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작품 속에서는 언제나 아무 걱정 없이 잘나가던 우리의 주인공이 삶의 바닥 끝까지 추락하고는 한다. 특히나 이번 작품에서는 기존의 미국이나 유럽의 도시와는 달리 북아프리카의 모로코가 주 배경이라 그런지 더욱 주인공의 모험과 변화의 기폭이 커서 마치 거대한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폴이 책임감이 크게 결여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껏 저는 한 가지 믿음으로 살아왔어요. 폴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죠. 저의 미래에 대한 계획 속에는 언제나 폴이 포함돼 있었어요. 그런데 정작 폴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은 게 큰 실수였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어요. 이 세상에서 더없이 끔찍한 남자와 결혼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우리가 연애를 할 때 가장 많이들 갖게 되는 착각이 바로 이것 아닐까. 바로 내가 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 사람은 웬만해서는 변하지 않는다. 그것도 수십 년 넘게 구축된 성격이나 취향, 사고방식, 자아 등은 절대로 바뀔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사랑할 때마다 착각을 하곤 한다. 이번에는 다를 거야. 나로 인해 이 사람의 모습이 조금은 달라질 거야. 라고 말이다. 하지만 바로 그런 믿음이 결국에는 관계가 파탄이 되는 시발점이 되고는 한다. 우리의 주인공 로빈도 그렇다.

결혼 4년차에 접어든 로빈과 폴은 현재 카사블랑카로 향하는 중이다. 회계사인 로빈은 자신의 엉망인 재정 상태를 수습하기 위해 회계사무실에 찾아온 화가 폴을 사랑하게 된다. 그녀는 천편일률적인 일상에서 탈피해 다른 인생을 모색해보고 싶었기에, 자신과는 다른 예술가의 삶을 동경했고 매력적이지만 재정적으로는 한없이 무능했던 자신의 아버지와 닮은 그가 자신의 삶에 변화를 이루어줄 거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결혼 후 폴은 자신의 소비습관을 고치겠다고 약속했지만 빚은 오히려 더 늘어나기만 했고, 결국 채무 징수 대행회사에서 사람이 찾아오기에 이른다. 아무리 예술적인 감성이 뛰어나고 매력적이라고 하더라도, 낭비벽이 심각하다면 그건 배우자로서는 정말 최악이 아닐 수 없다. 그의 부채가 결국 그들의 결혼생활 자체를 근본적으로 흔들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미 한 번 실패한 결혼의 경험을 갖고 있는 로빈은 자신과 폴의 아이를 갖고 싶었다. 게다가 전 남편과의 원활하지 못했던 섹스에 비해 폴과의 섹스는 항상 원활했고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나이 올해 마흔인데, 아직도 아이를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재정적으로 조금 여유가 생겼고, 잠시 일상을 벗어나보기로 결정해 여행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아버지가 말하길 밤하늘의 별들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이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지 느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별들이 내 귀에 대고 다른 의미의 말을 속삭였다.

거대한 우주에 빗대어 인간이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는 건 사실 억지에 불과해요. 미미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들이 모두 모여 거대한 우주를 형성하니까 각각의 존재들은 다 나름의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죠.

각각의 존재, 각각의 삶, 각각의 이야기를 빼면 우리에게 무엇이 남을까?

굉장히 이국적인 풍경만큼이나 카사블랑카에서의 생활은 멋들어진 나날로 시작된다. 폴은 그림을 그리는데 몰두하고, 로빈은 호텔에 머무는 동안 프랑스어를 배우면서 낯설지만 규칙적인 여행의 여유를 즐기게 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로빈은 남편의 충격적인 배신을 마주하게 된다. 함께 아이를 갖도록 노력하자고 얼마 전까지 약속했건만, 그가 몇 달 전에 자신 모르게 정관수술을 했다는 증거를 찾게 된 것이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가던 삶이 온갖 거짓이었다니?

그녀는 낭떠러지에서 떨어진 기분에, 엄청난 충격을 받고 만다. 처음부터 폴이 책임감이 없는 남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보헤미안 같은 매력과 로맨틱함, 환상적인 섹스를 놓치기 싫어 그에 대한 모든 의심을 모른 척 해왔다는 걸 이제는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가 자신을 만나 바뀔 수도 있을 거라는 제멋대로의 환상은 그렇게 무참하게 깨어지고, 이제는 자신이 그에 대해 뭘 안다고 자신할 수조차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그녀가 그곳에서 겪게 되는 정말 파란만장한 그 모든 일들에 비하면 말이다. 그녀는 그곳에서 인간이 견딜 수 있는 극한의 상황을 경험하고 (무려 살기 위해 누군가를 죽이게 되기까지 하며) 그 모든 고통을 견디고 살아남을까. 배신한 뒤로 갑자기 행방을 감춘 그녀의 남편 폴은 대체 어떻게 된 것이며 그들은 결국 만나게 될까.

인생이 바뀌는 것은 사실 한 순간이다. 굉장히 사소한 일로도 달라질 수 있고, 극한의 상황에 처해서 죽도록 고생하면서 변하게 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스스로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강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대체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짐작도 못할 만큼 엄청난 어드벤처를 느끼게 만들어준 화려한 스토리만큼이나, 매혹적이고 이국적인 풍경 묘사가 기억에 남지만, 더글라스 케네디의 작품이 언제나 그렇듯 마지막 장에 이르면 내 삶을 한 번쯤 돌아보게 된다. 내가 과거에 했던 선택들은 옳았던 건지, 나는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건지, 내 삶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건지 말이다.

꿈은 스스로 이루어야 한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 행복해지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애인의 애인에게
백영옥 지음 / 예담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크리스마스 이브, 런던의 누추한 곳에 살던 한 남자가 자살을 한다. 고독했던 그는 옆 방 여자를 짝사랑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옆 방에서 신음과 삐걱거리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여자의 쾌락에 겨운 그 소리는 그에게 너무도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고, 결국 그는 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런데 다음 날 그녀 역시 주검으로 발견된다. 남자가 들었던 소리는 쾌락이 아니라 독약으로 인한 고통스런 몸부림의 소리였던 것이다. 그녀 역시 고독과 삶에 대한 혐오 때문에 생을 마감했다는 유서가 발견된다. 이것은 로맹가리의 단편 < - 짤막한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스토리인데, 나는 '사랑'에 관한 이보다 더한 비극을 아직까지 읽어본 적이 없다. 그만큼 짧지만 강렬한 이야기였는데, '사랑'이란 언제나 각자의 상황만 볼 수 있을 뿐, 상대방의 입장을 전부 알기는 어려운 관계이기 때문이다. 행복해 보이는 그 혹은 그녀의 모습 뒤에 있는 진짜 얼굴을 우리는 짐작만 할 뿐 알 수 없다.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 혹은 그녀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우리는 '믿고 싶을 뿐' 사실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증명해줄 수 없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너는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라는 말은 공감할 수 있는 말이긴 해도 옳은 문장은 아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건, 나와 별개의 문제일 수 있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해서, 너도 나를 사랑해야 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 자명한 사실에 사람들은 한 번 더 상처받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동시에 나를 사랑하는 일, 이것보다 더한 기적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릴리는 보통의 사람들처럼 기적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을 뿐이다.

한 남자를 짝사랑하는 여자가 그의 집에 서블렛을 통해 한 달간 렌트해서 살게 된다. 그는 부인 외에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고, 그들 부부는 곧 이혼할 예정이다. 그가 사랑하는 여자는 어렵게 아이를 가졌지만 유산하고,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여자로 살며 불행해한다. 이들은 각자 자신만의 사랑을 할 뿐, 어느 누구도 두 사람이 서로 상대방을 바라보며 같은 사랑을 하고 있지 않다. '나는 나의 사랑을 한다. 그는 그의 사랑을 한다. 내가 그를 사랑하고, 그가 나를 사랑할 뿐, 우리 두 사람이 같은 사랑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얼마나 외로운 문장인가. 인간은 그렇게 각자의 사랑을 할 뿐이다. 서로를 향한 진실과 진심은 종종 어긋나곤 하니 말이다

뉴욕에서 유학중인 정인은 강의를 듣다 포토그래퍼 성주를 짝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그들이 함께 듣고 있는 강의의 강사를 짝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아내와 이별여행을 떠나며 자신들의 집을 한 달간 세를 놓고, 정인은 그의 흔적을 쫓아 그 집에 한 달간 머물게 된다. 유명 화랑의 갤러리스트인 마리는 한국에서 온 젊은 포토그래퍼 성주와 동거를 시작하고, 그의 비자를 위해 비밀리에 결혼까지 하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다른 여자에게 가 있는 상태이다. 독립 큐레이터인 수영은 뉴욕에서 만난 젊은 포토그래퍼의 유혹에 잠시 흔들렸지만, 이내 뉴욕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돌아온다. 하지만 어렵게 얻은 아이를 유산하고, 불행한 결혼 생활을 정리하기로 한다. 한 명의 남자를 둘러싼 세 명의 여자가 1, 2, 3부로 나뉘어 각각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를 짝사랑한 여자, 그와 결혼한 여자, 그가 사랑한 여자는 모두 사랑 앞에서 홀로 쓸쓸해하고, 외로워 한다.

"결혼이란 건, 말하자면 앞으로 저 사람이 네게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온갖 고통을 주게 될 텐데, 그 사람이 주는 다양한 고통과 상처를 네가 참아낼 수 있는지, 그런 고통을 참아낼 정도의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를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이 될 거야. 살아가는 동안 상처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어. 하지만 누가 주는 상처를 견딜 것인가는 최소한 네가 선택할 수 있어야 하고, 선택해야만 해. 그러니까 이 남자가 주는 고통이라면 견디겠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결혼해. 그러면 최소한 덜 불행할 거야.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말은, 정말로 사랑하지 않는 남자라면, 때때로 견디는 일은 상상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이 될 거란 얘기야.

 

실패로 끝난 누군가의 사랑 이야기에 유독 마음이 간다는 백영옥 작가의 신작 <애인의 애인에게>는 그러니까 결국 '실패'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결혼이나 섹스처럼 누군가와 함께 행복해져야 하는 것은 사실 굉장히 어려운 일이니 말이다. 남자의 아내는 남편이 짝사랑하는 여자를 찾아가 결혼이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원망도, 의심도, 슬픔도, 희망도 없이. 하지만 그녀 역시 남편의 외도를 용서가 아니라 그저 받아들이고 살고 있었기에, 외롭기는 마찬가지였다. '누구도 없기 때문에 오랜 시간 외로웠던 여자에게, 누군가 옆에 있기 때문에 더 외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쉽게 설명할 수 없듯이, 개별적 인간의 행동은 언제나 상상 저 건너편에 있다'는 것이 삶의 비극이기도 하다. 진심을 전달하는 무심함 때문에 무섭게 외로워하며 살아야 했던 여자와 누군가 딴 사람을 바라보며 곁을 주지 않는 남자의 등을 바라봐야 하는 여자 중에 누가 더 외로운 걸까. 그리고 상대가 자신이 짝사랑하는 지도 모르는데, 그의 흔적을 쫓아 다니며 살고 있는 여자는 또 얼마나 고독한 걸까.

이 책은 세상의 선의와 사랑을 믿고 싶어질 만한 러브 스토리는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사랑을 믿고 싶게 만드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니 매번 누군가의 등만 바라보았던 당신이라면, 매번 마음을 주고도 돌려받지 못했던 당신이라면, 그리고 사랑에 상처받은 세상의 수많은 당신들, 이 책을 통해서 자신처럼 미련하고, 바보 같은 사랑을 하는 이들을 보며  로 받고, 공감하며 조금만 더 힘을 내어 보자. 사랑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오로지 자신의 감정이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그들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에게 조이스 캐롤 오츠의 작품은 매번 궁금해서 보기는 하지만 두 번 다시는 '체험하고' 싶지는 않은 종류에 속하는 작가였다. (물론 <멀베이니 가족>이나 <블론드>를 읽었다면 또 달랐겠지만, 어쩌다 보니 나는 그녀의 작품 중에 고딕 풍의 독특한 색깔을 자랑하는 작품들만 읽었던 탓이기도 하다) , 어쨌든 여기서 방점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체험한다'고 표현한 부분이다. 그녀의 작품 중에 <좀비>의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 <대디 러브>의 소아성애자 유괴범처럼 악인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들이 유독 그랬는데, 그녀는 독자로 하여금 책을 읽는 동안 그 악인이 직접 되어보도록 한다. 그러니까 책을 읽는 동안 사이코 패스의 눈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관찰해야 한다는 건데, 사실 그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 굉장히 불편함을 동반하는 행위이다. 정상적이고 평범한 시선이 아니라 폭력적이고 광기 어린 시선으로 보는 세상이라니, 보통 사람들이라면 살면서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그것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블 아이>에서의 일그러진 사랑과 관계, 그리고 <악몽>의 불안과 우울, 광기를 넘나드는 꿈과 현실 속을 헤매는 것 또한 매우 불편했다. 그래서 이번 신작 <그들>을 읽는 내내 그렇게 기분이 편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작품 중에 처음으로 정상적인(?) 사람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만난 느낌이랄까. 혹자는 이 작품의 어마어마한 두께와 특유의 서사를 풀어가는 방식 때문에 지루함을 느낀다고도 했지만, 나는 기존에 만났던 그녀의 작품들을 떠올리며 이 정도면 천국이 따로 없다는 심정이었던 터라 700페이지의 두께도 술술 넘기며 읽었던 것 같다.

1937 8월의 어느 따뜻한 저녁, 사랑에 빠진 소녀가 거울 앞에 섰다.

그녀의 이름은 로레타. 그녀가 사랑하는 것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었다. 이 꿈 같고 즐거운 사랑에서 불안하고 맹목적인 설렘 같은 것이 솟아났다. 이 마음이 어디로 움직일까?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이야기는 열여섯의 소녀 로레타에게서 시작한다. 그녀는 주중에 에이젝스 세탁소에서 일했고, 오늘은 무슨 일이 벌어질까 설레 이는 토요일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몇 년 전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10년 전부터 실직 상태라 늘 침대에 누워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워댔고, 그녀의 오빠인 스무살 브룩은 신경질적인 악의로 눈을 반짝이는 한심한 청춘이었다. 한 마디로 그녀의 가족은 형편이 어려웠고, 가족 중 그녀의 보호자로서 뭔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오빠 또한 세상에 불만 많은 형편없는 인간에 불과했다. 그녀는 오빠의 밥을 차려주고 그가 가지고 있는 총에 대해 한 마디 하지만, 그는 자신이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다며 허세를 부린다. 그리고 그녀는 원래 일정 대로 친구의 집으로 향하지만, 가는 도중에 남자친구 버니를 그야말로 '우연히' 만나게 되고 그와 어울리다 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게 된다. 어차피 집에는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자신의 방에서 버니와 관계를 맺게 되는데, 요란한 소리에 잠에서 깨어 보니 옆에 누운 버니가 죽은 채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단번에 자신의 오빠 짓이라는 걸 알게 된 로레타는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러 나갔다 경찰인 하워드를 만나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그는 버니가 어차피 어디서든 저렇게 죽을 줄 알았다며 욕을 퍼붓다가, 순간의 열정에 휩싸여 로레타를 강제로 범하게 된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를 설레 이며 기다리던 꿈 많은 열여섯 소녀가 남자친구와 처음으로 잠자리를 한 날, 오빠에 의해 그를 잃어버리고, 절망과 공포에 휩싸여 있다가 경찰에 의해 성폭행을 당하는 엄청난 스토리는 어처구니없게도 로레타에 의해 이렇게 정리되고 만다. '하워드가 어느날 아침에 경찰관 제복을 입고 불쑥 나타나서, 그녀를 구해주고, 사랑해주고, 결혼까지 해서 그녀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고' 말이다. 그녀는 그렇게 임신했고, 하워드와 결혼해서 곧 유부녀가 되었던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비극이었을 수도 있었던 상황이, 누군가에게는 그저 '자신에게 심각한 문제가 생겼을 때 그에게서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이어지는 그녀의 삶은, 역시나 평탄하지만은 못하다. 남편이 죽고, 시어머니의 간섭에서 도망쳐온 그녀는 디트로이트 빈민가에서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하지만, 역시나 삶은 그녀에게 녹록하지 못하다. 그리고 이야기는 바톤은 그녀의 아이들인 모린과 줄스가 이어받게 되는데, 사실 전체 이야기의 분량에서 보자면 로레타보다는 모린과 줄스의 비중이 훨씬 더 크다.

1966 4. 사랑에 빠진 소녀가 거울 앞에 서 있다. 꼼짝도 않고. 그녀의 시선은 자신의 모습에 고정돼 있다. '모린 웬들'이라는 이름이 그 모습에 붙어 있다. 싸구려 화장대 거울에 흐릿하게 비친 모습이다. 그녀가 이 모습을 빤히 바라보는 것은, 그녀가 가진 것이 이것뿐이기 때문이다. 사랑. 그녀는 사랑에 빠졌다, 사랑에 푹 잠겼다......

1937년 여름, 열여섯의 로레타로 시작했던 이야기는 1966년 봄, 스물여섯의 모린으로 이어진다. 두 여인 모두 자신의 이름에 속한 구석을 벗어버리고 싶어 했다. 하지만 엄마와 딸, 그 두 여인 사이의 간극은 두터운 시간의 폭만큼이나 엄청나다. 1937년 여름부터 1967년 디트로이트 흑인 폭동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디트로이트 빈민가에서 격동의 삶을 살아낸 한 가족의 연대기를 서술하는 이 작품은, 폭력으로 얼룩진 가난한 디트로이트에서 살아내고자 애썼던 사람들의 애처롭고 안타까운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여자들은 자라면서 남자들한테 온갖 짓을 당하고 부서지는 법이라며, 원래 세상이 그런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로레타와는 달리 그녀의 딸 모린은 엄마의 인생은 전부 잠들어 있다며, 자신은 항상 깨어 있는 의미 있는 인간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폭력과 범죄로 점철된 삶을 살았던 줄스는 여자 친구가 쏜 총에 죽을 뻔하고,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매춘으로 돈을 벌려고 했던 모린은 새아버지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겪고 거의 죽다 살아난다. 어떤 꼴을 당하든, 어떤 일을 겪었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한다. 라는 명제가 무색해질 만큼, 이들이 겪은 일은 무시무시하다.

조이스 캐롤 오츠는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이 책은 소설처럼 구성한 역사 기록'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녀가 디트로이트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쳤을 때, 학생 중 하나였던 이가 바로 극중에 등장하는 모린이다. 그녀의 삶에 대해 듣고 오츠가 처음 느꼈던 감정은 '이런 것이 현실일 리가 없어!'였지만, 사실 우리네 현실에서는 소설보다도 더 끔찍하고 엄청난 일들이 실재로 버젓이 일고 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모린의 고백을 통해 그려진 이야기라, 실제 극중에 오츠가 등장하기도 한다. 오츠는 자신이 서두에 인용한 존 웹스터의 비극 <하얀 악마>에 나오는 '우리가 가난하므로 사악해질까'라는 질문에 대한 긴 답변이 바로 이 작품이라고 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난이란 때로 모든 것을 넘어서게 만드는 것이니 말이다. '그들'이 우리 모두를 가리키는 문학적인 기법으로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그들'인 웬들일가를 지칭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어쩐지 우리 모두 '그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당신도 '그 사람들'중 하나이고, 이들이 겪은 비극 또한 삶을 살아내는데 어떤 식으로든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조이스 캐롤 오츠의 작품을 이미 여러 권 읽었었지만, <그들>을 읽고 나니 마치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녀의 작품일 으제야 처음 만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당신이 아직 그녀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다면 꼭 <그들>에서 시작해야만 한다두툼한 두께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당신에게 뭔가를 남겨줄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인]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카인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살면서 신의 존재를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신을 믿든, 믿지 않든 말이다. 누구나 막막하고 힘겨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한 번쯤은 생각할 것이다. 신이시여, 왜 나에게만 이런 시련을. 혹은 불공평하고 억울한 상황에 처했을 때도 생각할 것이다. 대체 신이라는 존재가 있기는 한 거야? 라고 말이다. 나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아 신이라는 존재를 맹목적으로 믿지는 않지만, 가끔은 나 역시 신의 존재를 의심하거나, 부정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주제 사라마구의 <카인>은 어떤 점에서는 매우 통쾌하기까지 한, 그럼에도 어딘가 편하지만은 않은 이상한 작품이었다. 왜냐하면 이 작품에서 주제 사라마구는 '카인'의 입을 빌어 시종일관 하나님이 행한 정의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 그의 존재를 되묻고 있기 때문이다.

이삭이 물었다, 아버지, 제가 아버지한테 무슨 짓을 했기에 아버지는 저를, 아버지의 독자를 죽이고 싶어 하셨나요. 너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다, 이삭. 그런데 왜 마치 제가 어린 양이라도 되는 것처럼 제 목을 따고 싶어 하셨나요, 아들이 물었다, 만일 그 사람, 여호와께서 그 사람을 축복하시기를, 그 사람이 나타나 아버지의 팔을 잡이 않았다면, 아버지는 지금 시체를 안고 집에 가시는 중일 겁니다. 그건 여호와의 생각이었다, 시험을 해보시려는 거였지. 무엇을 시험하는데요. 나의 믿음과 나의 복종을. 도대체 무슨 하나님이 아버지더러 자기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합니까.

 

카인, 인류 최초의 살인자로 알려진 아담과 하와(이브)의 큰아들로 그의 어린 동생을 죽이고 영원히 헤매는 벌을 받게 된 인 물이다. 주제 사라마구는 바로 그 다음부터 상상력을 발휘한다. 카인이 십여 년 간 떠돌면서 창세기 속 사건을 곁에서 보고 느끼며 경험하는 이야기 형식으로 전개되는데, 카인을 통해 보여지는 하나님의 형상은 기존의 그 어떤 모습과도 달리 너그럽지도 자애롭지도 않아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구약에 기록된 시공간을 떠도는 카인은 일종의 시간여행자가 되어 아브라함이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장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노아의 방주 등등.. 이른바 구약의 명 장면들을 가까이서 보고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느낀 것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듯 하나님에게 이야기한다.

불에 타버린 소돔과 다른 도시들에도 아이들처럼 죄가 없는 사람들이 있었을 거라고, 여호와가 자신을 믿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는데 왜 사람들이 여호와를 신뢰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반발한다. 그에 대해 하나님은 소돔을 멸한 것이 아주 깨끗하고 능률적으로 훌륭한 작업이었다고 하고 말이다. 특히나 책의 후반에 카인이 노아의 방주 계획을 망쳐 버린 후 하나님과 나눈 대화는 압권이다.

"누군가 당신에게 당신의 진정한 얼굴을 보여줄 날이 와야만 했습니다."

"너는 진실로 카인, 아우를 죽인 그 비열하고 악한 자로구나."

"당신만큼 비열하고 악하지는 않습니다. 소돔의 아이들을 잊지 마십시오."

이 장면은 마치 주제 사라마구의 직접적인 목소리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는 가톨릭 교회, 유럽연합,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한 목소리로 비판 받은 공산주의자 작가이다. 공산당 활동을 했던 그에게 가톨릭 교회와 가톨릭이 국교인 포르투갈의 정부는 갖가지 탄압을 가했고, 그는 노벨상 수상 후 자신은 신앙인들은 존경하지만 그 기관에 대해서는 존경하지 않는다고 응수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여호와는 전에도 말한 적이 있어 외우고 있는 말을 되풀이하듯이 대답했다, 세상은 부패하여 폭력이 가득하다, 내 눈에는 세상에서 폭력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곳에 사는 모두가 길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사람의 사악함이 크고, 그가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을 향하고 있다, 나는 땅 위에 사람 지은 것을 한탄하고 있다, 사람 때문에 마음에 근심하게 되기 때문이다, 모든 혈육 있는 자의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종하겠다,

 

카인은 우리의 하나님, 하늘과 땅의 창조자가 완전히 미쳤다고 말한다. '오직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는 미친 자만이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이 자신의 직접적인 책임이라고 인정하고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할'테니 말이다. 아무리 하나님이라고 해도 '단지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아버지에게 자식을 죽여 장작 위에 올려놓고 태우라고 명령하는 건 옳을 수가 없다'는 그의 말은 너무도 공감할만해서, 이 말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동생을 단지 질투심 때문에 죽인 카인이 맞는지 의심하고 싶어질 정도이다. 하늘의 불로 타서 재가 되어버린 소돔의 아이들 역시, 사실 결과 그 자체만 보자면 그의 주장이 완전히 억지라고 볼 수도 없으니 말이다. 여호와의 정의는 '인간의 정의가 어때야 하는지 조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자의 관념'이라며, 하나님이 행한 정의에 문제 제기를 하는 카인의 태도는 너무도 불경스러워 신앙을 믿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 다면 분개할 것만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저 이것을 문학적 텍스트로 읽어보자면, 주제 사라마구 특유의 환상적이고 우화적인 수법으로 구약성서 속 주요한 사건들을 읽어가며 '그분'의 정의에 대해 제대로 딴지를 거는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매우 놀랍기 그지 없다. 하나님은 완전히 미쳤다? 그럴 수도 있지 않나. 세상에 완벽한 '절대 정의'가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요즘처럼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 말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