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미스터리 스토리콜렉터 39
리 차일드 외 지음, 메리 히긴스 클라크 엮음, 박미영 외 옮김 / 북로드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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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드웨이에서 허드슨 강으로 이어지는 웨스트 84번가에는 에드거 앨런 포 가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포가 '갈까마귀'를 집필했을 때 살던 집이 바로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1844년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진짜 에드거 앨런 포가 내 앞에 나타난다면 어떨까. 은행강도 스타크는 경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리버사이드 파크의 낡은 철문 옆에 앉아 허드슨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낡은 철문이 옆으로 미끄러지더니 죽은 사람처럼 퀭한 장발의 남성이 철문으로 덮여 있던 구멍 속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그는 자신을 엗거 앨런 포라고 밝힌다. 그리고 바위에 난 구멍 속의 사다리를 따라 내려가 백 년 전의 그리니치 빌리지를 보여준다. 와우, 세상에. 기본 플롯을 듣기만 해도 이야기가 마구 궁금해진다. 에드거 앨런 포가 실제로 눈 앞에 나타나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할 수 있게 해준다니 말이다. 이것은 이 책에 실린 단편 중 저스틴 스콧의 <더할 나위 없는>의 이야기이다. 제목 그대로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설정이 아닐 수 없다.

 

그 애가 거짓말쟁이, 사기꾼, 도둑이었을까? 나는 모른다. 그날 라나를 슬쩍 밀치던 그 애의 행동을 내가 완전히 오해한 걸까? 그것 역시 나는 모른다. 시간이 지난 뒤에 아이들이 인식하고 기억하는 것은 어른들이 아는 것과 완전히 다를 수 있으니까. 혹은 어른들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 어떠면 그 애는 애초에 그렇게 살게끔, 그 암울하고 불 꺼진 곳에서 죽게끔 운명 지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아닐지도. 나는 알 수 없다. 내가 아는 건 단 한 가지다. 내게 있어, 그리고 모든 부모에게 있어, 피해를 최소화할 방법이란 그저 어둠 속을 더듬어 나아가는 것뿐임을.

                                                           -토머스H. <지옥으로 돌아온 소녀>

리 차일드, 제프리 디버, 그리고 토머스H.쿡까지!! 내가 사랑하는 최고의 작가들이 모였다. 거기다 뉴욕의 곳곳을 여행하면서 즐기는 미스터리라니! 미스터리 작가 17명이 뉴욕의 상징적인 장소들을 하나씩 골라 이야기를 만들었다. 참여 작가 17명 중 10명이 뉴욕에서 태어났거나 뉴욕에 살고 있다고 하니 더욱 그럴듯한 이야기가 탄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센트럴 파크, 헬스 키친, 유니언 스퀘어, 타임스 스퀘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월 스트리트, 차이나 타운 등등.. 뉴욕 곳곳은 미스터리하고, 매혹적인 장소로 변신한다. 게다가 해당 장소에 대한 사진과 위치를 표시한 지도도 함께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뉴욕을 아는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이야기에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이야기의 시작은 우리의 히어로 잭 리처이다. 리 차일드는 뉴욕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플랫아이언 빌딩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만들었는데, 23번가 지하철역에서 나온 잭 리처가 텅 빈 거리에 온통 폴리스라인으로 막혀져 있는, 평소와는 너무도 다른 뉴욕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이다. 제프리 디버는 보헤미안들의 수도인 그리니치 빌리지를 배경으로 평범해 보이는 제빵사의 이중 생활, 즉 스파이에 관한 미스터리를 만들었다. 리 차일드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과 제프리 디버의 <블리커 가의 베이커>는 단편이라 아쉬울 정도로 짧게 느껴졌던 이야기였는데, 그도 그럴 것이 우리 모두 이들이 시리즈 물에 얼마나 강자인지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장편 미스터리의 최고 작가들이 써낸 단편은 너무도 매혹적이었지만, 사실 그 자체로도 완벽한 이것들은 장편으로 만들면 더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토머스H.쿡의 <지옥으로 돌아온 소녀>는 소재와 스토리 자체보다는 그것들로 문장과 단락을 만들어서 빚어내는 분위기 자체가 더 매혹적인 작가답게, 단편이지만 여운을 남기는 결말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사건보다는 인물의 내면과 관계에 더욱 집중하게 만드는 그의 유려한 문장들은, 이렇게나 짧은 이야기 속에서도 빛을 발한다. 맨해튼 주민들의 휴식처인 평화로운 유니언 스퀘어를 배경으로 한 메리 히긴스 클라크의 <5달러짜리 드레스> 또한 토머스H.쿡의 작품처럼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러 간 손녀가 마주하게 되는 비밀이란, 생각보다 무시무시했다. 가족이란 세상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존재이지만, 사실 우리는 그들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고 있는 줄도 모른다. 평생을 한 침대에서 살아온 부부에게도 이렇게 엄청난 비밀이 있을 수 있다면 말이다. 미국에서 평방미터당 가격이 가장 높은 동네인 어퍼 이스트 사이드를 배경으로 한 마거릿 메이런의 <빨간머리 의붓딸>에서는 뉴욕 상류층 자제들이 다니는 비싼 사립학교에서 난데없이 유행하는 머릿니를 통해 짧지만 임팩트 강한 미스터리를 선보이고 있다. 숨쉬고 있는 공기처럼 늘 곁에 있어서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는 가족이기에, 질투와 비밀 등 미스터리로 풀어낼 수 있는 여지가 가장 많은 단골 소재가 아닌가 싶다

"다음에는 어떤 책을 쓸 거요?"

"다시 미스터리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포가 말했다. "베스트셀러까지 됐죠. 그래서 제 에이전트가 책에 아낌없이 자금을 쏟아 부어줄 출판사를 찾고 있어요. 무조건 미스터리를 쓰라 더군요. 그렇게 해야 하는 현실이 씁쓸하지만."

"미스터리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좋아해요. 하지만 에드거를 수상할 수 없다는 걸 아니까요."

                                                                     -저스틴 스콧 <더할 나위 없는>

그 외에도 차이나타운을 누비는 아줌마 탕정 부터, 수상한 뉴욕의 환경미화원, 이탈리아계 마피아 가족의 비극과 브로드웨이의 미결 사건, 이웃 간의 사소한 다툼이 만들어낸 죽음, 시한부 선고를 받은 여인의 버킷리스트에서 시작된 소동 등등... 뉴욕이라는 도시만큼 이나 다양한 미스터리 단편들이 눈을 즐겁게 만들어 주고 있다. 각 이야기마다 뉴욕의 특정 장소에 대한 설명과 사진이 담겨 있어, 미스터리 단편 앤솔러지인 동시에 뉴욕 여행 가이드 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흥미롭기도 하다. 특히나 국내에 그 동안 작품이 소개된 적이 없던 미스터리 작가들과의 만남도 미스터리 팬들에게는 마치 이 책이 종합선물세트인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애거서 크리스티가추리소설의 배경을 뉴욕으로 잡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뉴욕은 그 자체로 하나의 추리소설이니까.” 라고 말했을 정도이니, 뉴욕이 얼마나 미스터리와 잘 어울리는 곳인지 짐작이 될 것이다. 오늘날의 미스터리는 누가 범인이고, 어떻게 범죄가 발생했으며, 그가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가 이상의 무엇이다. 왜냐하면 사실 미스터리는 우리의 복잡하고, 고단한 삶 그 자체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고마워, 친구." 여자는 한 모금 더 마시고 말했다. "천국이 따로 없어, 그렇지?"

정말 그랬다. 보석 같은 미스터리 단편들이 모여 있는 이 책 속의 이야기들은 시종일관 내게 그렇게 말을 걸었다. 극중 에드거 엘런 포의 작품에 대한 논평을 빌려보자면, 이 책은 '흥미진진하다는 말로는 미처 다 표현할 수 없는, 너무나도 멋지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사실적인' 미스터리 모음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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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양이 3 - 야!야!야!
네코마키 지음, 장선정 옮김 / 비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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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16개월이 된 아이에게 매일같이 책을 읽어 주느라 본의 아니게 요즘 유아용 그림책과 동화책들을 즐겨 읽고 있다. 그러다 보니 새삼 느끼게 된 건데, 아이들을 위한 대부분의 책은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나, 가끔은 사물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뽀로로도 그렇고, 폴리도 그렇고 아이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에서도 언제나 사람은 그들을 보조하는 역할에 그친다. 그러니 어릴 때는 자연스레 동물도 말을 하고 생각을 하며, 사물에게도 의지와 감성이 있다고, 믿게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나도 분명 그랬던 시기가 있을 테고 말이다. 어른이 되면서 점점 각박하게 살아내다 보니, 마음의 문을 닫고, 동심의 세계와는 멀어지게 되었지만. 아이덕분에 그동안 잊고 살았던 것들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네코마키의 <콩고양이> 시리즈를 읽으면서 마음이 따뜻해지곤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동안에도 고양이나 강아지를 주인공으로 하는 책이나 만화가 있었지만, 그들과는 다르게 이 작품은 '사람'이 아니라 '고양이'의 행동과 생각이 스토리의 중심에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은 동물을 키우는 사람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곤 하니 말이다. 하지만 <콩고양이> 시리즈에서는 전적으로 콩알이와 팥알이의 행동과 생각으로 모든 에피소드가 전개된다. 그들과 함께 사는 주인의 식구들은 그저 조연일 뿐, 진짜 주인공은 고양이라는 점이 마치 유아용 그림책을 읽을 때처럼 우리를 동심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특히나 이번 세 번째 이야기에서는 새로운 등장 인물(?) 덕분에 더욱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전개되는데, 제일 재미있었던 것은 마담 북슬씨와의 바로 이 장면이었다. 평소에 고양이를 너무 싫어해 틈만 나면 팥알이와 콩알이를 내보내려고 하거나, 아예 무시하거나 호통만 치던 그녀였는데, 어느날 개인기가 가능한 고양이를 티비에서 보고는 샘이나서 팥알이와 콩알이에게도 개인기를 마스터해보겠다고 도전하게 된 것이다. 티비에 나온 고양이가 할 줄 아는 것은 손! 반대쪽! 했을 때 자신의 손을 내밀고, 음식 앞에서 애교~ 그리고 빵~ 하면 꽈당 넘어지는 시늉을 하는 것인데, 과연 우리 팥알이와 콩알이가 그걸 따라할 것인지.. 아 진짜 이들의 반응이 얼마나 귀여웠던지, 볼때마다 너무 재미있는 장면이었다.

사고뭉치 팥알이와 콩알이가 벌집을 건드리는 바람에 벌의 공격을 받게 되었을 때, 내복씨가 마치 자신의 목숨이라도 던질듯이 팥알이와 콩알이를 데리고 도망가는 장면은 웃기지만 뭉클하기도 했다. 뭐 비장했던 내복씨에 비패 결과는 마담 북슬이 신문지로 타악, 쳐서 벌을 간단하게 무찌르는 걸로 끝나 버리지만. 내복씨와의 에피소드는 언제나 이렇게 웃기지만, 감동적이다. 꼭 말썽꾸러기 손자들을 혼내려는 부모를 피해서 몰래 응원하는 진짜 할아버지처럼 말이다.

새롭게 등장한 식구인 '아기 참새' 덕분에 색다른 이야기 거리들이 풍부해졌는데, 무려 다음 네 번째 시리즈에서는 강아지가 등장한다는 소식에 벌써부터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자기가 고양이인 줄 아는 시바견 '두식'이 새로운 식구인데, 고양이와 개가 만나면 늘 투닥 거린다고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어떤지, 너무 재미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번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그들 덕분에 항상 철부지처럼 보였던 팥알이와 콩알이가 자신들의 엄마에 대해 생각하는 장면이었다.

 

있지, 밥 주는 사람이 엄마인 거냐옹?

그건 그렇지 않나?

그럼 우리 엄마는....? 근데 왜 하나도 안 닮았냐옹?

 

비둘기도 참새도 다 엄마랑 자식이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왜 우리는 엄마랑 안 닮았을까. 에서 시작한 그들의 고민은, 그렇다면 우리도 어른이 되면 '사람처럼' 다리가 두개, 털은 머리에만 있는 그런 모습이 되는 걸까. 로 발전해 사실은 살짝 기억하는데 진짜 엄마는 폭신폭신하고 진짜진짜 좋은 냄새가 났다며... 다들 어떻게 지내려나 보고 싶다고 말이다.

 

강아지를 십여 년 넘게 키우면서 거의 식구가 되어 버렸지만, 가끔은 나도 우리집 강아지가 자신의 진짜 엄마를 그리워하진 않을까. 기억은 하고 있을까. 궁금했던 적이 있었기에, 마지막 이 장면은 정말 뭉클했다. 그들이라고 왜 자신의 진짜 엄마를 떠올리지 않겠는가. 다만 주어진 환경에 적응해서 살아갈 뿐이지.

 

꽤 길었던 설 연휴가 끝나고, 내일부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직 봄이 되려면 한참 멀었고, 날은 아직도 너무 너무 춥다. 연휴가 끝나고 회사로 가는 발걸음이 너무도 무겁다면, 혹은 으슬으슬한 추위에 외출할 엄두도 못 내고 있다면, 이렇게 따뜻 발랄한 만화책과 함께 해본다면 어떨까. 이 책은 답답한 지하철 속에서 킥킥 거릴 수 있는 여유를 줄 것이고, 따뜻한 이불 속에서 가슴 뭉클한 감동을 줄 것이다. 그리고 팥알이와 콩알이 덕분에 남은 겨울은 기분 좋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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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스톰
매튜 매서 지음, 공보경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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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터넷 등 정보통신망은 국가와 사회의 기본 틀이다. 세계는 이와 같은 기본 틀을 흔드는 총성 없는 사이버 전쟁 중이며,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한컴 오피스 업데이트 파일로 위장한 악성코드가 대량 유포되고, 청와대 사칭 해킹메일부터 삼성그룹 메신저 위장 악성코드까지 북한발 사이버 테러 주의보를 내린 것이 바로 최근의 일이다. 사이버 테러 관련해서 가장 많이 뉴스에서 언급된 것이 바로 북한인데, 그들은 과거에도 디도스 공격으로 주요 정부기관·포털·은행사이트·외국기관 등을 일거에 무력화시킨 적이 있으니 말이다. 청와대 홈페이지, 언론사 서버, 은행 전산망, 서울메트로 및 코레일 전산망들이 죄다 해킹 공격을 받았으니 사이버 공격으로 인한 테러는 생각보다 더 심각한 문제이다. 실제로 나도 전 직장에 근무할 때, 회사가 사이버 공격을 받아 난리가 났던 일을 직접 경험했기에 사태의 심각성을 체감한 적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뉴스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자신이 직접 피부에 체감하는 일을 겪지 않는 이상 이런 일들로 인해 세상이 파괴될 수도 있다는 걸 믿지 못한다.

그저 마우스 클릭 한 번만으로 세상이 얼마나 끔찍해질 수 있는지 말이다.

"사람들은 사이버 전쟁에 대해 나름의 이미지를 갖고 있어. 사이버 전쟁이라고 하면 비디오게임이나 떠올려. 아주 깨끗한 전쟁이라고 여기면서 말이야. 실상은 그렇지도 않은데."

....."대량 살상이 가능한 새로운 사이버 무기를 개발 중이고 아무도 테스트를 하지 않은 것뿐이야. 핵무기라고 하면 일단은 너부터도 겁을 내지. 히로시마나 비키니 섬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사건은 잘 알려져 있으니까. 그런데 사이버 무기라고 하면 파괴력이 얼마나 되는지 아무도 몰라. 그러니까 양국의 정부 기관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서로의 사회기반시설을 사이버 무기로 공격할 수 있는 거라고. 크리스마스트리에 지팡이 모양 사탕을 매달 듯이 가볍게 최후의 심판 일을 도래시키는 거야."

여느 때와 같았던 추수 감사절, 뉴스에서는 미국 정부의 웹사이트가 해킹됐고, 항공모함을 두고 중국해군과 미 해군이 대치중인 상황에서 양국의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는 뉴스가 들려온다. 크리스마스 이틀 전, 마트의 바코드 스캔 장치가 작동을 멈춰 한 시간이 계산대에서 기다리던 성난 사람들은 돈도 내지 않고 물건을 들고 나가버린다. 이어서 보도되는 뉴스는 중국 전투기의 추락, 바이러스로 인해 모든 물류 시스템이 멈춰버리고, 조류 독감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는 소식들이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내리기 시작한 작은 눈송이들마저 사람들을 불길한 기분에 휩싸이게 만들고 있었다. 휴대폰 네트워크며 인터넷이 다운되고, 전국의 응급 의료 서비스가 엉망이 되고, 눈보라를 시작으로 폭풍우가 몰려온다는 소식까지 들려온다. 사람들은 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정확히 알 수 조차 없는 상황이다. 테러리스트들의 짓인지, 중국인들의 공격인지, 그냥 지나가 버릴 사소한 문제들인지 말이다.

크리스마스 이브, 아침에 일어났더니 전기가 끊어져있고, 창 밖으로는 눈이 휘날리고, 눈 섞인 돌풍이 창문을 두드리고 있다. 미국의 비상사태통제 시스템의 90퍼센트를 한 회사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사실 회사 하나만 해킹하면 이렇게 전 세계를 혼란에 빠뜨릴 수도 있는 것이다. '정부가 하는 일을 교란시키고, 보급선을 끊고, 대중교통을 마비시키고, 통신을 두절시키고, 민간인들을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겁을 주고, 산업 기지를 박살내고, 전기 공급이 차단되고, 사이버 공격은 이렇게 무시무시한 형태를 띠고 사람들의 삶을 서서히 파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은 무려 두 달 가까이 지속된다. 과연 혹독한 겨울 추위와 눈 폭풍 속에 고립되어, 전기, 난방, 수도가 끊기고 통신도 모두 두절된 상태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버텨낼 수 있을까.

복도에 앉아 있는데 이상한 기시감이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았다. 기시감이라고는 하지만 내 인생에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이레나가 70년 전 레닌그라드 포위전 때 겪었다고 한 일을 내가 여기서 다시금 겪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사이버 전쟁은 미래와는 무관하게 이미 과거의 일부인 듯했다. 마치 병에 걸린 벌레처럼, 서로에게 끝없이 고통을 가해온 인류의 본질 속으로 파고 들었다.

미래를 알고 싶으면 과거를 돌아보면 된다.

결혼 전 원룸에 살 때, 가끔 두꺼비 집 차단기가 내려가 정전이 되곤 했었다. 요즘 시대에 웬 정전이냐 싶겠지만, 어이없게도 강남 한복판에서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곤 했다. 건물 자체가 워낙 낡기도 했거니와, 오래 거주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터라 종종 일어났던 상황이었는데, 그럴 때마다 굉장히 난감했던 기억이 난다. 전기가 차단되거나, 인터넷이 끊기거나, 해킹으로 인해 개인정보가 털리거나 다들 한번쯤은 겪어 봤을 것이다. 사소해 보이지만 우리를 너무도 불편하게 만드는 그것들은, 현재의 사회 기반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가 그런 세상에 어떻게 익숙해져 있는지 여실하게 깨닫게 만들어 주곤 한다. 하물며, 이렇게 사소한 일들도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죄다 마비가 된다면 얼마나 무시무시할까.

매튜 매서의 <사이버 스톰>은 그렇게나 현실적으로 리얼한 지옥의 풍경도를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을 '극사실주의 종말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로 구분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여타의 종말소설, SF소설과는 다르게 실제 사이버 보안 및 컴퓨터 나노 기술 등 IT 전문가인 저자의 장기가 유감없이 발휘되어 정말 '있을 법한' 일들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품이 더욱 무시무시한 재미를 선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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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세누 몬테이루의 잃어버린 머리/안토니오 타부키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작품 세계로 알려진 타부키의 '실제' 벌어졌던 살인사건을 소재로 쓰인 이 작품은 그의 작품 중에 드물게 환상을 빌리지 않고 부패한 사회를 비판한 작품이란다. 사실은 제목 때문이기도 하고, 그저 궁금한 작품이다.

 

 

 

 

 

 

 

 

 

오에 겐자부로/오에 겐자부로

 

일단 현대문학의 세계문학 단편선은 믿을 만하다.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책이기도 하고 말이다. 특히 이 작품집은 오에 겐자부로가 소설 집필을 그만둔 뒤 기존에 발표했던 작품들을 추려 모으고 꼼꼼히 손본 단편집이라고 하니, 무조건 읽어봐고 싶어진다.

 

 

 

 

 

 

 

 

캐나다/리처드 포드

 

줄거리 만큼이나 강렬한 첫 문장때문에 궁금해진 작품이다. “나는 우선 우리 부모가 저지른 강도 사건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다음에는 나중에 일어난 살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뭐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러브 레플리카/윤이형

 

국내 작가들의 단편집에 관심이 많기도 하고, 윤이형 작가의 문장들을 좋아해서 읽고 싶은 작품이기도 하다.

 

 

 

 

 

 

 

 

 

캐롤/패트리샤 하이스미스

 

극찬을 받고 있는 동명의 영화 때문에 궁금해진 원작 소설이지만, 기존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작품을 떠올려 보자면, 사랑을 그리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궁금해지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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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 램의 선택
제인 로저스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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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곳곳에서 모체사망증후군 MDS(Maternal Death Syndrome)라는 바이러스가 나타난다. 여성이 임신을 하게 되면 감염되는 이 바이러스는 임산부와 태아 모두를 죽게 하는 무시무시한 병이다. 따라서 여성들은 임신하지 않기 위해 피아 이식형 피임제인 임플라논 시술을 받는다. 임신하고도 살아 있는 여자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은 MDS가 돌기 전에 임신한 것이라, 그들이 출산하고 나면 다시는 아기가 태어날 수 없다.  이게 무슨 끔찍한 소리일까. 결국 이 얘기는 현재 살아 있는 가장 어린 사람이 나이가 들면 그 사람이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사람이 될 거라는 거다. 더 이상 세상에 아이들은 없을 테고, 언젠가는 죄다 노인밖에 남지 않게 되고, 그들 마저 죽고 나면 인류는 멸종할 거라는 말이다. 무시무시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게 바로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MDS는 하나의 균열로 시작되었지만 이제 온 세상을 산산조각 내고 있었다.

냉동 배아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어미를 죽이며 태어나야 하는 그 아기들만이 희망이었다.

제인 로저스의 이 작품을 단순히 허구의 공상 과학 SF물이라고만 치부하기엔 조금 섬뜩한 것이, 바로 요즘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지카 바이러스 때문일 것이다. 중남미를 중심으로 확산되던 지카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퍼지고 있다는 뉴스가 연일 보도 되고 있으니 말이다. 지카 바이러스는 면역력에 문제가 없으면 감기처럼 살짝 앓다가 지나가거나, 아예 증상이 없는 경우도 다반사인데, 문제는 임산부라고 한다. 임산부가 감염이 돼서 태아에게 바이러스가 전이되면 신경계 세포를 공격해 소두증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소두증 태아는 임신 중이나 출생 직후 사망하거나 생존하더라도 뇌성마비, 시각 또는 청각 장애 등을 겪을 수 있다고 한다. 게다가 우리는 작년 한해 메르스 사태를 겪어봤지 않나. 해외에서 감염된 사람이 걸러지지 않고 입국하고, 그 대응에 실패하게 되면 확산하는 것은 시간 문제일 테니 말이다.

그래서 임산부를 공격하는 바이러스 때문에 인류가 결국 멸망하게 될 거라는 세기말적 설정이 너무도 현실적으로 다가와서 더욱 두렵게 느껴졌다. 특히나 이 작품이 독특한 것은 배경은 분명 '공상과학' 어딘가에 있는데, 진행되는 스토리는 '청소년성장' 드라마라는 점이었는데, 그 덕분에 더욱 공감대 형성이 쉽다는 장점도 있다. 열여섯 소녀 제시 램의 목소리를 통해서 이야기가 진행되어 세계가 직면한 문제를 굉장히 단순하게 판단하고 받아들이는데, 사실 정치적인 여러 부분들을 걸러낸 그것이 바로 일반 시민들의 피부에 와 닿는 진짜 이니 말이다.

제가 원하는 게 뭔지 아는 것뿐이에요."

"아니, 넌 몰라. 환상에 사로잡혀서 영웅이 되고 싶은 거야."

"제가 선택한 일을 할 거예요."

"세상을 구하겠다, 그거구나."

"그러면 안 돼요?"

아빠가 과장스럽게 한숨을 쉬었다. "넌 아직 어려서 이해 못 해.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가게 마련이야."

"대충 살고 싶지 않아요. 제 삶이 쓸모 있기를 바라요."

제시 램의 아빠가 인공수정 전문 병원에 있는 배아 연구소에서 일하는 덕분에, 그들 가족은 누구보다 발 빠르게 현재 진행되는 상황과 대응책에 대한 소식을 접하게 된다. 과학자들이 MDS에 대처하는 해결책으로 만들어낸 것은 일명 '잠자는 숲 속의 미녀'라는 방법이었다. 임신 초기에 MDS 증상을 약화시키고 마취제를 투여하게 되면 아기가 살 수 있다는 것이다. , 약으로 산모는 혼수상태에 빠지고, MDS는 임신중인 임산부의 두뇌를 파괴한다. 그렇게 임신 막바지에 의사들이 죽은 산모로부터 제왕절개수술로 아기를 꺼낸다는 것이다. MDS가 아기가 아니라 엄마를 공격하므로, 아기는 엄마 몸에서 필요한 것을 계속 얻을 수 있다는 논리인데, 사실 누군가 태어나게 하기 위해 죽어야 한다는 논리는 끔찍하기 그지 없다. 이어서 마련된 두 번째 대책은 MDS 백신인데, MDS가 나오기 전에 시험관아기 시술을 위해 냉동실에 보관된 깨끗하고 건강한 배아에게 예방접종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MDS가 전세계 모든 사람에게 퍼진 상태라 이 방법을 시도하려는 여자들 역시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만 한다. 어미를 죽이며 태어나야 하는 아기들만이 유일한 희망인 세상이라니. 소름이 끼친다.

그렇게 미래가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세계를 살아내고 있는 열여섯 소녀 제시 램은, 인류의 역사를 바꿀 수 있는 결정을 하게 된다. 그녀의 생각은 단순했고, 순수했다.

"세상이 나아지기를 바란다면, 남한테 이래라저래라 해봐야 소용이 없어요. 아빠가 말한 것처럼 누군가는 첫 시위를 당겨야 해요."

왜냐하면 이것 말고 세상을 다시 정상으로 되돌릴 방법이 없었기에. 어린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바로 대리모가 되어 아기를 탄생시키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떠들기만 하고, 걱정만 하는 것은 사실 아무 소용도 없다. 그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으니까. 유일한 해결책은 바로 '새롭게 시작하는 것'뿐이다. 실제로 일어나게 '행동'하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이다. 제시 램의 부모와 친구들은 그녀의 선택을 말리지만, 그녀는 스스로의 결정에 대해 이건 절대 미친 짓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라며 자신의 소신을 꿋꿋하게 밀어 붙인다. 그 결과 아버지에 의해 감금 당하기까지 하지만 말이다.

'나만 아니면 돼'가 만연한 현대 사회에서 '나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이 어린 소녀의 결연한 의지는 무모해 보이지만, 그만큼 묵직한 감동을 준다. 나라면 그럴 수 있을까. 당신이라면 그럴 수 있을까. , 이렇게 여운이 길게 남는 SF 문학은 처음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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