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하드보일드를 읽는다 김봉석의 하드보일드 소설 탐험 2
김봉석 지음 / 예담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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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다른 사람의 리뷰를 굳이 찾아서 읽지 않게 되었다. 너무 줄거리 요약만 하는 글은 지루하고, 그렇다고 자기 감상에 빠져 작품과 관계없는 내용만 이어지는 글은 재미가 없고, 지나치게 분석적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들을 늘어놓는 글은 목적이 리뷰가 아니라 잘난 체 같아서 볼 필요성을 못 느낀다. 뭐 그렇다고 내가 쓴 리뷰를 다시 읽어보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책을 열심히 읽고 리뷰를 쓰는 것은 아직 그 책을 읽지 않은 미지의 독자에게 책을 소개하는 목적이기도 하지만, 스스로에게 책을 기억하기 위한 메모를 남기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리뷰를 읽게 되는 건 아주 최소한이다. 그렇지만, 가끔 전혀 관심이 없던 책인데 우연히 보게 된 리뷰 때문에 구매하게 되고, 결국 그 작가의 팬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몇몇 리뷰는 꾸준히 챙겨보게 되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김봉석 평론가의 글이다. 그의 글이 매번 감탄을 자아내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몇몇 글들은 기어코 책을 구매하게 만드니 말이다.

책을 볼 때, 제일 먼저 표지를 본다. 다음은 뒤 표지를 보고 작가 소개와 차례 순으로 넘어간다. 존 하트의 <아이언 하우스>를 봤을 때, 표지에 적힌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지옥이라도 가겠다"라는 문구에 혹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 중 하나는 연인이나 가족 등 무엇인가를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이야기다. 절망적인 상황이라면 더욱 좋다. 영화 <맨 온 파이어> <킬 빌>처럼.

    -'누구도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도망칠 수 없다' 존 하트의 <아이언 하우스> 서평 중에서

이 책은 영화평론가이자 대중문화평론가 김봉석의 하드보일드 소설 서평 집으로, 2012년 출간된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을 잇는 두 번째 권이다. 이 책을 위해 새로 쓰여진 건 아니고, 기존에 그가 범죄소설 서평을 연재하는 분량의 모음집 정도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그는 하드보일드가 일종의 애티튜드, 태도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세상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 내가 진리를 알고 있다며 마구 판결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일단 물러나서 지켜보는 것... 그리고 결국은 '태도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사실 그의 글보다, 이런 그의 생각과 태도가 더 마음에 든다.

언젠가 오프라인에서 그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생각보다 참 말을 두서 없게 하셔서 살짝 놀란 적이 있다. 하긴 글을 잘 쓰는 사람이 꼭 언변까지 좋다는 법은 없으니까. 알고 계신 사실은 많은데, 그걸 조리 있게 전달하는 건 좀 서툴어 보여 오히려 인간적으로 보였달까. 그가 가지고 있는 이름값이 있으니 같이 갔던 친구는 기대했던 강연이 지루하다며 투덜거렸지만, 나는 뭐 나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여성 탐정을 상상해보자. 경찰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가 묻는 말에 답할 의무는 없다. 심증이 있다 해도 용의자나 참고자로 강제 소환할 수도 없다. 물리력으로 굴복시키지 않는 이상은. 그러니 탐정이라면 자신만의 장점과 무기가 있어야 한다. 뛰어난 증거 수집력과 두뇌, 웬만한 상대와는 싸워 이길 수 있는 물리력도 갖춰야 한다. 새러 패러츠키가 쓴 <제한 보상>의 주인공 V.I. 워쇼스키 역시 그렇다. 얼 스마이슨이라는 깡패 두목이 똘마니 둘을 보냈을 때, 워쇼스키는 그들을 꽤 고생시킨다. 갈비뼈도 부러뜨리고 최대한 저항을 한다.

               -'현실을 직시하고 정면으로 맞서라' 새러 패러츠키의 <제한 보상> 서평 중에서

이 책에 실린 서평 도서 중에 읽지 않은 책 한 두 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미 읽은 책이라 글을 읽는 재미가 있었다. 내가 바라보는 시각과 그의 시각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보는 맛도 있었고, 색다른 견해로 흥미로울 때도 있었고 말이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책들이라 서평의 글 내용 자체보다는 멋진 제목들이 더 눈에 들어왔다. 몇 가지 골라보자면 이런 식이다.

허술한 사회가 괴물을 키워낸다(지우, 혼다 테쓰야)

잔인한 세상, 그러나 어딘가에 인정이 있다(귀동냥, 나가오카 히로키)

때로는 직관이 증거보다 낫다(데드 조커, 안네 홀트)

지옥 속에서도 알고 싶은 것은 진실(IN,기리노 나쓰오)

책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기도 하고, 분위기를 읽어내기도 하고, 호기심을 자아내기도 하는 멋진 제목들이다. 책을 홍보할 때도 카피가 중요하듯이, 사실 서평도 제목이 꽤나 중요하다. 쏟아지는 무수한 글들 속에서 누군가에게 읽힐 운명의 글이 되려면 눈에 띌 만큼 인상적이어야 하니 말이다.

하드보일드가 무엇인지 궁금하신 분들, 하드보일드 소설을 읽어보고 싶은데 어떤 작품을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는 분들, 그리고 이미 너무 많은 하드보일드 소설들을 만나봤기에 다른 사람의 견해가 궁금한 분들에게 이 책이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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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 다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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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에 <어둠의 저편>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던 이 책은 내게 굉장히 모호한 이미지로 남겨져 있다. 마치 등장 인물의 행동이 지문으로 설명되어 있는 연극 대본 같기도 했고, 영화 시나리오 분위기며, 카메라 같은 시점 또한 난해하고 어렵기만 했다. 그래서 다른 하루키의 책들과 달리 대충 읽고 어딘가 던져 놓았던 기억이 난다. 당시의 나는 직장 초년생으로 매일매일이 전쟁 같이 바빴고, 퇴근 후에는 또 연애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와중에도 틈틈이 책을 읽기는 했지만 스토리가 뚜렷하고, 캐릭터가 명확한 이야기만 즐겨 읽었다. 왜냐하면 그래야 두서 없는 내 일상이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분명해지는 것 같았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이 책은 감각적인 일러스트와 세련된 제목을 달고 개정판으로 다시 출간되었고, 마냥 스스로에게 집중하며 살던 직딩에서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다. 그만큼의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난 이 작품은 내게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다가왔다. 그건 어쩌면 내가 나이를 그만큼 먹어가면서 달라진 시선의 깊이 차이일 수도 있고, 그 동안 쌓아온 독서 이력으로 보는 눈이 달라진 걸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이렇게 다시 출간되지 않았더라면, 내게 이 책은 평생 모호한 이미지로만 기억됐을 거라는 점이다. 당시에 대충 읽고 던져둔 이후로, 벌써 몇 번의 이사와 책 정리 시간을 거쳐왔던 탓에 책을 다시 찾을 수는 없었지만, 새로운 옷을 입은 이 책만 산뜻하게 기억해도 좋을 것 같다. 다시 만난 이 책 속의 무라카미 하루키는 여전히 근사했다.

방 안은 어둡다. 하지만 우리 눈은 차츰 어둠에 익숙해진다. 여자가 침대에서 자고 있다. 아름다운 젊은 여자, 마리의 언니 에리다. 아사이 에리.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어째선지 알겠다. 어두운 물이 흘러 넘친 양 검은 머리가 베개 위에 펼쳐져 있다.

우리는 하나의 시점이 되어 그녀를 보고 있다. 어쩌면 훔쳐보고 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시점은 공중에 뜬 카메라가 되어 방 안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작품은 이렇게 누군가를 관찰하는 우리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소설의 전지적 작가 시점이 아니라 마치 영화의 카메라처럼 말이다. 이야기는 밤 11 56분에 시작해서 아침 6 52분에 끝이 난다. 어두운 한밤중부터 새벽이 밝아오기까지의 그 몇 시간 동안 우리는 마리와 에리, 두 자매를 관찰한다. 심야 레스토랑 데니스에서 책을 읽고 있는 소녀 마리는 언니 에리의 고등학교 동창인 다카하시를 만난다. 형제가 없는 그는 형제라는 것이 어디까지 비슷하고 어디서부터 달라지는 건지 궁금해한다. 한 자매라도 인생을 사는 자세가 꽤 다를 수 있고, 외모며 성격이며 판이하게 다를 수 있으니 말이다. 똑똑하지만 언니에게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동생 마리와 너무도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는 언니 에리는 언젠가부터 사이가 멀어진 상태이다. 게다가 에리는 한동안 계속 '잠들어'있는 상태이다. 뭐랄까. 마치 죽은 것처럼 말이다. 얼굴 근육 하나,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는, 그저 순수한 ''의 형태로 완결되어 있다.

어두운 방, 죽은 듯이 침대에 누워있는 아름다운 소녀, 전원 플러그가 꽂혀 있지 않은 텔레비전 화면. 차갑게 한밤중의 침묵을 지키고 있어야 할 텔레비전은 죽지 않았고, 특정한 영상을 내보이기 시작한다. 화면 에는 어느 방의 내부가 비춰져 있고,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다. 선명하지 않은 화면에서 보여지는 이상한 기운.

그 방에서 분명히 무슨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다. 십중팔구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뭔가가.

동생 마리가 러브호텔 알파빌에서 만나게 되는 중국인 매춘부, 왕년의 레슬러, 중국인 조직, 기묘한 이름의 종업원들을 겪는 모험보다 언니 에리를 둘러싼 주변의 변화가 더욱 기묘하다. 하룻밤 동안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대화를 하고, 거리를 방황하는 마리의 이야기가 더 생동감 넘치고 궁금증을 자아내는데, 두 달째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에리의 상황이 더 수수께끼 같은 것이다. 예전에 이 작품을 만났을 때는 특히 에리가 등장하는 장면들이 너무 모호하고 몽환적이라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고 느꼈는데,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는 반대로 에리의 장면들이 너무도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신기했다. 제목인 애프터 다크의 뜻처럼 긴 어둠의 시간이 지나가고 나서 다가오는 새벽의 분위기가 에리라는 인물이 겪는 '세계를 넘나드는' 기분과 묘하게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어두운 방에 누워 있는 소녀의 세계와 그 방 안에 홀로 켜져 있는 텔레비전 속 세계가 어느 순간 뒤바뀌는 것조차 이상하다거나, 어색하지 않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전에는 이 책을 읽으며 참 하루키스럽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군더더기 없는 문장과 담백한 어투가 너무도 하루키스럽다고 느껴지니 그것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아까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요.” 마리는 말한다. “왜 호텔 이름이알파빌이죠?”

“글쎄, 왜려나. 아마 우리 사장이 지었을 텐데. 러브호텔 이름이야 하나같이 대충 붙인다고. 결국은 남녀가 그걸 하러 오는 데니까, 침대하고 욕실만 있으면 오케이고 이름 같은 건 아무도 신경 안 써. 비스름한 것 하나만 있으면 돼. 왜 그런 걸 묻는 거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거든요, <알파빌>. 장 뤽 고다르의.”

“못 들어본 제목인데.”

“꽤 오래된 프랑스 영화예요. 1960년대.”

한때 프랑스 영화에 미쳐서 문화원이며 영상회를 찾아 다닌 적이 있는데 (무려 이십여 년 전이라 요즘처럼 파일 공유나 디비디 구매를 할 수 없던 시절이다), 당시에 가장 많이 보았던 영화가 바로 장 뤽 고다르의 작품들이었다. 영화에서 가장 잘 보이지 않는 것은 바로 카메라인데, 우리는 종종 영화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화면이 아니라 카메라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한다. 카메라로 찍어낸 허구의 세계가 아니라 진짜 세상이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 영화의 목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고다르의 영화에서는 카메라라는 것이 두드러지게 읽힌다. 영화라는 것이 이야기와 주인공의 감정이 전부가 아니라, 카메라로 찍는 그 무엇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한참 빠져 있었던 고다르의 작품 이름으로 호텔 이름을 지은 걸 보니, 무라카미 하루키의 <애프터 다크>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가 왜 이 작품에서 이런 방식으로 (그러니까 카메라의 시선으로) 글을 쓰려고 했는지. 그의 데뷔 25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이라고 하는데, 기존 작품들과의 차별성, 그리고 그의 작품 세계에서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고 하니 말이다. 특히나 '알파빌'이라는 영화는 미래라고 설정되어 있지만, 실제 보여지는 모습은 영화가 만들어진 당시 1965년의 현실을 그리고 있어 현실과 미래가 모호하게 뒤섞이고, 연결되어 있는 듯한 작품이다. 하루키의 이 작품에서 어둠과 빛, 밤과 새벽, 그리고 이쪽과 저쪽의 세계가 교묘하게 섞이는 것처럼 말이다.

하루키의 작품을 읽을 때 마다 종종 생각한다. 이건 마치 '아무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그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이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이냐고? 아무것도 아닌데 어떻게 모든 것이냐고 할 수도 있겠다. 궁금한 사람들은 이 작품을 읽어보라. 하루키의 작품 중에서도 두께가 얇은 편에 속하지만, 숨겨져 있는 이야기는 가장 많은 작품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분명 당신도 나처럼 이 작품을 읽으면서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렇다면 조금 시간을 두고 다시 만나보길 바란다. 아마도 당신이 놓친 어떤 것이 시간이 지난 뒤에 새록새록 눈에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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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느와르 M 케이스북 - OCN 드라마
이유진 극본, 실종느와르 M 드라마팀.이한명 엮음 / 비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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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너무도 없는 시간 쪼개어 가며 책을 읽어야 하는 처지라 드라마 관람은 물 건너 간지 오래다. 하지만 그런 나도 범죄, 미스터리에 관련된 드라마는 방영 시간 이후에라도 찾아서 보는 편이다. 왜냐하면 이미 BBC 드라마 <셜록>을 통해서 드라마가 얼마나 완성도 있는 미스터리 물이 될 수 있는지 확인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영화만큼 스릴러 분야가 독보적 이진 못해서, 드라마로 만들어졌을 때 성공하기란 쉽지 않다. 그 중에서도 올 초에 방영됐던 <실종느와르 M>은 개인적으로 기대가 많이 컸던 드라마였다. 케이스북의 띠지에 새겨진 문구 "이제 우리도 이런 드라마를 가질 수 있다!"와 같은 심정이랄까.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셜록> 같은 매력적인 캐릭터가 등장하는 수사 물을 기대하기도 했고 말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만 8분에 한 명꼴로 사람이 실종되고 있다고 한다. 물론 그 중에는 단순 가출도 포함되어 있겠지만, 대부분은 심각한 범죄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고, 그렇게 밝혀진 이들은 대부분 사체로 발견되곤 한다. 그렇게 도처에 널려있는 '실종'이라는 테마로 모든 에피소드가 만들어진 이 드라마는 재미있게도 개인적인 원한이나 복수가 아니라 사회적인 범죄를 다루고 있다. 정리해고 노동자, 내부 고발자 은폐, 가출, 권력형 비리 등등 우리가 숱하게 뉴스에서 만나볼 수 있는 그런 일들 말이다.

 

<실종 느와르 M>은 누군가의 사라짐으로 시작됩니다. 잃어버린 사람을 찾기 위해 그들의 삶을 따라 가다 보면 우리가 진정 잃어버린 것들이 무엇인지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범죄'라는 것은 소중한 것을 잃을 때 발생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범죄'로 인해 소중한 것을 잃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한 번쯤 생각해볼 수 있는 이야기를 다루고 싶었습니다. 누구도 책임지려는 사람 없으며 개인의 고통이 고스란히 사회적 그을음으로 남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으니까요.

                                                                                   -작가 이유진

 

특히나 이 드라마가 흥미로웠던 것은 굉장히 독특한 방식의 살인 방식이었다. 첫 회였던 '감옥에서 온 퍼즐'에서 등장했던 폐쇄된 정신 병원에서 온 몸에 링거를 꽂은 기괴한 모습의 남자부터 아기의 유괴에서 비롯된 이중 납치, 사체만 숨기면 정황증거만으로는 처벌할 수 없다는 법의 아이러니를 이용한 범죄도 있었고 말이다. 물론 공소시효, 심신상실자 처벌 불가능, 무죄추정 원칙 등 법의 허점으로 인해 구현되지 못한 정의에 관련된 이야기는 그 동안도 숱하게 만들어졌지만, 이 작품은 조금 더 세련되고 과학적으로 만들어졌다고나 할까. 에피소드 자체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이 이야기라 그런지 더욱 공감이 되고,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부분들이 많았다.

그렇게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드는데 두 명의 주인공이 단단히 한 몫을 했는데,  IQ 187의 전직 FBI 요원 길수현 역의 김강우 배우분과 실종 수사만 7년인 베테랑 토종 형사 오대영 역의 박희순 배우 분의 케미는 너무도 놀라웠다. 다만 연기가 매우 리얼하고 좋긴 했지만, 베네딕트 컴버배치 만큼의 독특한 색깔이 부족해 더 화제가 되지는 못한 게 아닐까 싶어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말이다. 차갑고 이성적인 길수현은 자신만의 정의와 주관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는 캐릭터이고, 오대영은 감정적이고 수사 시에도 편법을 쓰는 걸 전혀 개의치 않는 인간적인 캐릭터이다. 이렇게 극과 극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의 조화는 예상외의 재미를 주면서 극을 유쾌하게 만들어준다.

특히나 이 케이스북은 드라마를 보지 못했던 독자들에게는 색다른 즐거움을, 드라마를 재미있게 봤던 시청자들에게는 특별 선물 같은 행복함을 안겨줄 수 있을 것 같다. 일곱 개의 각각 에피소드에 맞춰 스토리와 대본 스크립트, 주요 장면, 추리 과정과 단서들에 대해 자세히 수록되어 있어 드라마를 보지 못했더라도 스토리를 읽는데 전혀 문제가 없기도 하고, 이미 드라마를 봐서 내용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덧붙여진 제작노트를 통해서 드라마의 뒷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게다가 촬영장의 뒷모습과 세트장 스틸, 그리고 드라마의 주된 배경이자 [실종느와르 M] 미술 팀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길수현의 집' '부검실'이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어 드라마가 끝나 아쉬웠던 이들에게 멋진 선물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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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 없는 한밤에 밀리언셀러 클럽 142
스티븐 킹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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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서둘러야겠다. 잠 못 드는 밤이면 그 기억이 몇 번이고 되풀이되니까. 몸부림 한 번, 기침 한 번, 핏방울 하나까지, 몹시도 천천히. 그러니 빨리 이야기를 끝내야겠다.

우리는 침실로 들어섰다. 내가 고기 써는 식칼을 들고 앞서 걸었고, 내 아들 헨리는 포대를 들고 뒤에 따라왔다.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었지만 아예 심벌즈를 치면서 들어왔다고 해도 아내는 깨지 않았을 것이다.

                                                                                -'1992' 중에서

아버지는 식칼을 들고, 아들은 포대를 든 채 두 사람은 아내가 자고 있는 침실로 향한다. 그는 아내의 코 고는 소리와 머리맡에 있는 자명종 시계의 째깍째깍 소리를 함께 들으며 그들이 꼭 지체 높은 환자의 임종을 지켜보는 의사들 같다는 생각을 한다. 죄책감과 두려움에 덜덜 떨면서. 오로지 피가 너무 많이 나면 안 되는데. 라고 중얼거리면서. 어린 아들은 그 상황에서도 울지 않는다. 두 사람이 아내를 살해하는 장면은 매우 잔인하고 끔찍하게 그려진다. 아내가 장인에게 유산으로 상속받은 땅을 자신이 소유한 농장과 합치고 싶었던 그는 그 땅을 팔고 싶어 하는 아내와의 의견 충돌로 지독하게 싸웠다. 1922년 겨울부터 봄까지. 그러다 법으로 해결할 생각도 했으나, 아내에 대한 증오가 커져 그녀가 죽었으면 하고 바랄 지경에 이르자 소송보다는 직접 행동으로 옮기기로 한 것이다. 그것도 열네 살 어린 아들을 꼬드겨 살해에 가담하게 하고. 이렇게 쎈 이야기로 시작한 이 스토리는 결국 그를 파멸에 이르게 만드는데 그 과정이 어마어마하다. 쥐들의 공격은 초현실적인 공포를 자아내기도 하고, 그가 저지른 끔찍한 행동만큼이나 무시무시한 인과응보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게 무슨 말이죠? 혹시... 그러니까 지금 본인이.... 불사신이라는?"

"확실히 엄청 오래 살기는 했지. 선생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도 아마 그 덕분일 거요. 선생이 원하는 건 십중팔구 수명 연장일 것 같은데."

"힘들겠죠, 아무래도?"

스트리터가 물었다. 머릿속으로는 자기 차까지의 거리와 뛰어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계산하면서.

"당연히 가능하지..... 대가만 치른다면."

                                                                                  -'공정한 거래' 중에서

암에 걸려 시한부를 살고 있던 남자는 텅 빈 4차선 도로를 건너가다 한 뚱뚱한 남자를 만난다. 그는 자신과 조촐한 거래를 해보는 게 어떨까 하고 제안을 한다. 자신이 파는 것은 '연장'이라고 말하면서. 사람은 누구나 연장을 원한다고, 신용카드 기한을 연장하거나, 키를 늘려 달라고 하거나, 머리 숱을 늘리려고 하거나, 혹은 애정을 연장해주거나, 대출 기한을 연장해주기도 한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수명을 연장해주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며, 미워하는 사람이 있냐고 물어본다. 몸 속에 있는 암 덩어리를 들어내고 싶으면 다른 누구한테 옮겨야 한다며. 남자는 자신의 가장 친한 불알친구를 미워하는 것 같다고 그를 선택한다. 그렇게 남자의 암은 기적처럼 완치가 되고, 이후 톰에게는 줄기차게 불행이 이어지기 시작한다. 그와 그의 가족들에게 벌어지는 악운들의 퍼레이드는 꽤나 섬뜩하다.

누군가 다른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대신, 내 수명을 15년 늘려주겠다고 말한다면, 나는 선뜻 그 다른 사람의 이름을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불행해지는 것을 보며, 그래도 내가 저 상황에 있지 않아서 다행이야. 라고 생각하게 될까. 이 작품집에 실린 이야기 중에 <공정한 거래>만 단편이고, 나머지 세 편은 중편 분량인데, 짧지만 강렬한 여운을 남겨주는 단편이었다. <빅 드라이버>는 그의 작품 <미저리>를 연상시키는 도입부가 인상적이었고, <행복한 결혼 생활>은 연쇄살인마 남편을 둔 아내의 매우 충격적인 스토리가 펼쳐진다.

스티븐 킹은 이 작품들을 쓰면서 <어떤 절박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저지를지도 모르는 일, 또 그들이 선택할지도 모르는 행동 방식을 기록하려고> 했다고 말한다. 가끔 세상은 우리가 가진 가장 간절한 희망조차도 물거품이 되어 버리곤 하니까 말이다. 스스로도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이 독하다고 말하는 그는 '독자에게 달려 들어서 공격하는 소설이야말로 최고의 소설이라고 생각'한다며 언제나 그런 작품들을 독자들과 만나게 해주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사람들의 근본이 대개는 착하다고 믿는' 그의 소설 속에서 언제나 무시무시한 등장 인물들이 등장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하지만, 때로는 이렇게 피도 눈물도 없이 밀어 붙이는 이야기가 재미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언제나 스티븐 킹은 '역시'라는 감탄사를 끌어내는 멋진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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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9-23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완동물공동묘지..가 막 떠오르는!^^

피오나 2015-09-24 09:17   좋아요 1 | URL
아.저는 그 작품은 읽어보지 못했어요. 이 작품집과 비슷한 분위기인가 봅니다ㅎㅎ

[그장소] 2015-09-24 09:18   좋아요 0 | URL
음..좀 짬뽕..이랄까요? ^^

cyrus 2015-09-23 2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정오 네이버 검색어 순위에 ‘살인’과 관련된 단어가 세 개나 나왔어요. 오원춘, 량첸살인기, 이태원 살인사건. 오늘은 유난히 스티븐 킹의 소설 서평을 자주 보네요. ^^

피오나 2015-09-24 09:17   좋아요 1 | URL
오. 그랬군요. 가끔 보면 세상이 소설만큼이나 끔찍할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시노부 선생님, 안녕 오사카 소년 탐정단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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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마루 상점과 마쓰모토 상점이 친선 야구 경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니시마루가 마쓰모토에 8 3으로 큰 점수차로 이기고 있는 중에, 지고 있는 마쓰모토 상점의 응원석에서 환성이 터져 나온다. 그런데 투수 마운드에 올라선 것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 그녀가 등장하자 초등학생과 중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의 힘찬 응원소리가 들린다. 웅성거리던 관중석은 그녀가 워밍업 차원에서 공을 두세 번 던지자 조용해지고 만다. 그녀는 지금까지의 투수가 던진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힘차고 빠른 공을 던지며 타자 들을 삼진으로 물리치고 당당하게 마운드에서 내려온다. 영화처럼 등장한 그녀의 이름은 바로 다케우치 시노부이다.

신도의 설명을 들으며 시노부는 설레는 마음으로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있었다. 이렇게 자극적인 일과 맞닥뜨리는 건 정말이지 오랜만의 일이다.

"그럼 범인은 요네오카 씨를 밀어서 떨어뜨린 후 우리가 그곳으로 가는 동안 도주했다는 거네요. 아무도 목격한 사람이 없었을까요?"

<오사카 소년 탐정단>의 히로인 시노부가 유학을 떠난 지 3년 만에 다시 등장했다. 전작에서 가는 곳마다 사건과 엮이며 특유의 행동력으로 형사보다 먼저 사건을 풀어나가던 그녀였다. 파견 유학 형식으로 대학에 진학하면서 끝이 났었는데, 독자들의 열렬한 후속편 요청에 쓰여진 작품이 바로 이번 <시노부 선생님, 안녕!>이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교단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이 시리즈는 막을 내린다고 하니, 이 작품이 인기가 더 많아져야 시리즈가 이어질 가능성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이 작품만의 독특한 매력은 시노부라는 전무후무한 말괄량이 캐릭터이다. 스물다섯의 초등학교 교사인 시노부 선생은 학창시절 소프트볼 팀의 투수 겸 4번 타자로 활약했을 정도로 손이 빠르고 운동 신경이 뛰어나다. 호기심도 유별나고, 불의를 보면 절대 참지 못하고, 모험을 위해서는 앞뒤 가리지 않고 사건에 뛰어 들고는 한다. 그녀는 어린이와 노인들의 교통사고 사가 급증하고 있다는 뉴스를 보고는 아이들을 교통사고로부터 지키기 위해 자동차에 대해 알고, 사고가 발생하는 원인을 파악하고자 운전면허를 따기로 결심한다. 한마디로 의협심 강하고, 오지랖 넓은 시노부의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인데, 운전 교습을 받으며 교관이 옆에서 계속 구박을 하며 잔소리를 하자 똑부러지게 할말 다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운전 연수를 하며 남편이든 학원에서든 잔소리를 한껏 들어봤던 여성들이라면 속이 다 시원하다고 느낄 정도로 말이다

"에이. 시끄러워서 운전을 못하겠네."

시노부는 길 중간에 차를 세운 후 몸을 틀어 교관 쪽을 본다.

"그렇게 잔소리만 해 대면 어떻게 해요? 초보가 잘 못하는 게 당연하지. 그런 사람을 가르치는 게 그쪽 일 아니에요? 친절하게 대하면 어디가 덧나나. 아니, 그리고 공짜로 배우는 것도 아니고 비싼 돈 주고 배우는 거잖아요. , 나는 손님이다 이거예요. 그런데도 시시콜콜 잔소리만 하고 둔하다고 핀잔이나 주고. 내 참."

사나운 표정으로 성을 내자 마침내 대머리 교관도 멈칫한다. 지금까지 학생이 이렇게 호통을 친 적은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전작에서부터 등장하는 장난꾸러기, 말썽쟁이 제자들이 중학생으로 성장해 시노부 선생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고, 그녀를 쫓아다니는 신도 형사와 엘리트 회사원 혼다는 여전히 시노부에게 애정공세를 퍼붓는다. 물론 그녀는 그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고 있지만 말이다. 이야기는 연작 단편처럼 여섯 개의 에피소드로 진행되는데, 각 사건마다 추리보다는 수수께끼를 푸는 것 같은 미스터리가 등장한다. 우연찮게 사건에 엮이게 되고, 호기심이 발동한 시노부 선생과 그녀의 제자들이 수사에 나서게 되고, 좌충우돌 하다 보면 어느새 사건을 풀 수 있는 중심에 가까이 가게 된다. 심각한 상황에서도 유쾌한 인물들과 톡톡 튀는 유머를 품고 있는 그들의 대사, 그리고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인간적이고 따스한 시선이 한데 모여 가벼운 시트콤을 보고 있는 기분도 든다.

기존 히가시노 게이고의 히로인인 가가 형사나 구사나기 형사, 유가와 교수 등이 등장했던 작품에 비해 조금 가볍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초등학교 여교사와 그녀의 장난꾸러기 제자들이 팀을 이뤄 사건을 해결하는 이 스토리는 뜻밖의 따뜻한 여운을 남겨주기도 한다. 진지한 미스터리 물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을 때, 따분하고 무거운 작품을 읽다가 잠시 쉬고 싶을 때, 이 작품을 읽어보자. 책을 읽는 다는 것의 행위를 한다기 보다, 편안하게 누워서 한 편의 티비 시트콤을 보는 것처럼 여유롭고 편안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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