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의 심판 모중석 스릴러 클럽 38
프레드 바르가스 지음, 권윤진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어떤 작품은 결말이 너무 궁금해서 미칠 듯이 페이지를 넘기며 숨가쁘게 읽을 수밖에 없고, 또 어떤 작품에선 천천히 배경을 둘러보면서 캐릭터들과 인사를 나누고 구석구석 꼭꼭 씹으면서 책을 읽는 그 순간을 오롯하게 즐기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프레드 바르가스의 <죽은 자의 심판>은 명백히 후자이다. 그 말은 즉, 이 작품이 플롯 중심이 아니라 캐릭터 중심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동안 수많은 스릴러, 범죄 추리 소설들을 읽어왔지만, 나는 그 어디서도 만나지 못했던 정말 이상하기 그지 없는 캐릭터를 이 작품에서 만났다. 바로 주인공인 아담스베르그 서장이다.

"내 형사들 중에는 말입니다, 대위님. 갑자기 픽 쓰러져 잠드는 수면 과다 환자도 있고, 어류 특히 민물어류에 빠삭한 동물학자도 있습니다. 비상식량을 사러 슬그머니 사라지는 허기증 환자가 있는가 하면, 동화와 전설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늙은 왜가리를 닮은 친구도 있고, 백포도주를 입에 달고 사는 천재도 있어요. 다들 그런 식입니다. 그러니 서로 격식을 차리기가 힘들죠."

"그런데도 일이 됩니까?"

"아주 열심히들 합니다."

명백한 사실에 입각한 증거와 논리로 무장해 범인을 찾아야 할 강력계 형사인 그는 무엇보다 본인의 감을 명백한 사실처럼 받아들이는 형사이다. 사건을 해결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건 상관없이 느긋한 성격을 가지고 있고, 까무잡잡한 얼굴에 땅딸막하고 수수한 외모의 소유자이다. 자신이 결백하다고 믿는 용의자를 빼돌려 숨기고 진짜 범인을 찾으려 하기도 하고, 풍만한 가슴을 가진 사건 관계자를 만나러 가서 그녀와 잠자리를 하고 싶은 욕구를 가져 보기도 하는 등... 아무리 보아도 전혀 주인공 스럽지 않은 인물이다. 가끔은 당황스러울 만큼 적나라하게 인간적이고, 강력계 형사라고 하기엔 심각한 결함마저 가진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게다가 그의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당글라르는 그의 애매모호하고 막연한 사고와 일관성 없고 총괄적이지 못한 얼토당토않은 논리를 견딜 수 없어 했고, 형사들은 세월아 네월아 마냥 여유를 부리는 서장에게 보조를 맞추기가 어려워한다. 청장은 그의 수사 방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대놓고 말하며, 수사 방향을 제시하는 데 필요한 구체적인 정보도 없는 그의 방식이 윗사람한테나 아랫사람한테나 감을 잡기 어려운 추상적인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를 처음 만난 에므리는 그가 유명한 이름과 걸맞지 않은 어딘가 조화롭지 못한 모습을 하고 있는 표준을 벗어나는 사람 같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멈춘 듯한 시간 속에 세상에서 가장 귀한 진주가 숨어 있다고 믿는, 세상에서 가장 느긋하고 여유로운 형사.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것도, 천재적인 수사 감각을 가진 것도, 그렇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칭송 받는 멋진 인물도 아닌 우리의 주인공.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나의 이성적인 머리는 주어진 정보로 그를 객관적으로 이렇게 평가하고 있는데, 내 감성적인 머리에서는 어느 순간 마치 홀린 듯 그에게 점점 사로잡히고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를 좋지 않게 평가하는 또 다른 등장 인물이 등장할 때는 남들의 눈에 그렇게 비치는 그에게 연민마저 느낄 정도로 말이다.

"에르비에의 죽음은 그렇다고 할 수 있죠. 리나의 꿈이 현실에서 폭발한 겁니다. 꿈이 배고픈 늑대를 숲 속에서 나오게 한 거랄까요."

"엘르켕 두령이 희생자들을 지목하면, 누군가가 자신에게 희생자들을 죽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보시는 겁니까? 리나가 본 환영이 살인자를 만들어낸 거라고?"

"단순히 환영만은 아닙니다. 천 년에 걸쳐 오르드벡 구석구석에 스며든 전설이죠. 제가 장담하는데, 마을 사람들 중 4분의 3 이상은 죽은 기마병들의 출현을 두려워하고 있을 겁니다."

이상한 캐릭터만큼이나 이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사건 또한 매우 기묘하다. 21세기에 나타난 중세의 유령 기마부대라니, 어쩐지 믿는 사람들이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죄를 짓고도 벌을 받지 않은 자들, 사기꾼, 영혼이 썩은 사람, 착취자, 부패한 재판관, 살인자들을 성남 군대가 직접 나서서 심판한다는 것이다. 분명 이야기의 배경은 현대의 파리인데, 중세의 유령부대가 사람들을 죽일 거라고 예고를 하고, 그들을 강력계 형사들이 수사한다는 발상 자체부터 낯설기만 했다. 아담스베르그가 처음 '성난 군대'에 관해 제보를 받았을 때 "단체 이름입니까? 사냥 동호회 같은?"이라고 반응한 것처럼 말이다. 성난 군대에 관한 전설을 전혀 몰랐던 그는 그걸 알아보기 위해 사람들에게 물을 때 "별난 군대라고 들어봤니?"라고 할 정도니 뭐. 1777년의 중세 유령부대가 출몰한다는 21세기 노르망디의 본느발 숲. 아담스베르그는 자신의 관할 구역이 아닌 데도, 당장 코앞에 닥친 다른 살인사건에만 집중해도 부족할 시간에 그곳으로 직접 가본다. 이유 또한 어이없을 만큼 단순하다. 그가 그곳에 간 건 성난 군대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도전 의지 때문이라니 말이다.

중세의 유령 기마부대가 등장하니 고딕 소설처럼 흘러가지 않을까 싶기도 했는데, 재미있게도 너무도 현실적인 현재의 사건들과 적절하게 병행이 되어 잠시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과학 수사와 초자연적인 범행이라는 어려운 조합은 중세 시대 동물 유해 전문 고고학자라는 이력을 지닌 바르가스이기 때문에 허무맹랑하게 흘러가지 않고, 그럴 듯한 이야기로 탄생한다. 그리고 성난 군대와 별개로 벌어지는 사건 들도 매우 흥미롭다. 잔소리가 심한 아내의 목에 빵 속살을 처넣어 질식사를 시킨 노인이 있는가 하면, 주스 병으로 종조부의 머리를 때리고 달아난 여덟 살 여자아이도 있고, 비둘기 다리를 묶어놓아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죽게 만드는 놀이를 하는 이들도 있다. 재력가가 자동차에서 불에 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평소에도 방화를 일삼는 용의자에게 혐의가 집중되지만, 그의 결백을 믿는 아담스베르그는 진범을 잡기 전까지 그를 자신의 집에 숨겨주기까지 한다.

나는 명성으로만 듣던 프레드 바르가스의 작품을 이번에 처음 만났는데, 내가 이 작품에서 가장 좋아했던 점은 그녀가 인물을 묘사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니까 단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친근감을 불러 일으키는, 그래서 꼭 내가 그 인물을 잘 알고 있고 어디선가 만난 것 같다는 기분이 들게 만드는 것이다. 너무도 이상한 아담스베르그 서장 외에도 강력반 식구들 또한 그 못지 않게 개성이 넘친다. 동물을 치료하는 능력이 있는 거구의 여장부, 모르는 게 없는 만물박사, 음식을 잔뜩 쌓아두어야만 안심이 되는 이도 있고, 수면과다 환자에 말끝마다 고전 시를 읊어대는 경위까지... 하나같이 독특하고, 색깔이 뚜렷하다. 그러니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어느 순간 거리 어디선가 걸어 다니는 그들을 알아볼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존에 국내에 출간되었던 그녀의 작품들이 모두 절판에 품절 상태라는 건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모중석 스릴러 클럽을 통해 그녀의 다른 작품들을 더 빨리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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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의 제자들 밀리언셀러 클럽 140
이노우에 유메히토 지음, 김아영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특정 장르의 책을 많이 읽다 보면 어느 정도는 내용의 전개가 짐작이 되는 경우가 많다. 소재와 간단한 플롯 정도만 알아도, 혹은 첫 문장을 읽거나, 첫 단락만 지나가도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은 전..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는 이야기를 따라 잡느라 두툼한 두께의 페이지가 언제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후다닥 읽어버린 것 같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내용을 전혀 짐작할 수 없는 독특한 제목과 바이러스라는 소재 덕분에 과학 소설처럼 이야기가 풀어지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웬걸 스릴러였다가, SF였다가, 호러 처럼 느껴지는 장면도 있고, 막판에는 액션 스릴러처럼 보이기도 했다. 신종 바이러스, 전염병으로 인한 공포 등은 기존에 다른 작품에서도 만날 수 있었던 장치이다. 그런데 이노우에 유메히토는 이것을 가지고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말 그대로 기발한 상상력, 그리고 넘치는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너무도 매력적인 작품이

애당초 교스케는 초자연 현상이니 초능력 따위와는 관련 없이 살아왔다. 불가사의한 일은 이 세상에 엄청 많다. 평범하게 생각하면 당장 믿을 수 없는 일이 때론 벌어지곤 한다.

하지만 그런 불가사의한 일을 단순히 ''라든가 ''이라는 단어를 붙여 결론짓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저 그래서야 사태를 피하기만 하는 게 아닌가. 설명이 안 되는 걸 전부 한 상자 속에 던져 넣는 셈이었다....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걸 직면하면 자신들을 넘어선 존재나 힘을 탓한다. 그건 결국 회피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여기에 오고 나서 그런 불가해한 일이 자기 몸에서 벌어져 버렸다.

주간지 기자인 나카야 교스케는 대학병원에서 원내감염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취재를 하려 하지만, 시설 내 통행허가증이 있어야만 출입할 수 있다며 길은 막혀 있고, 병원은 완전히 봉쇄된 상태이다. 주변에 몰린 보도차량의 수도 엄청났고, 노란색 가드펜스가 도로를 가로 질러 세워져 있고, 흰 방호복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병원 사이를 오가고 있는 등 마치 SF 영화의 한 장면이라도 보고 있는 듯 현실감이 없는 모습에 당황한다. 현재 격리된 류오 대학병원에는 환자, 방문객, 의사, 간호사 등 약 450명이 있고,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16명으로 늘어난 상황이다. 그는 병원에 들어갈 수 없으니 뭐라도 기삿거리를 찾기 위해 시청으로 향하는데 그곳에서 의대생 약혼자와 연락이 두절되어 걱정하던 메구미라는 여성을 알게 되고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런데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쪽으로 급변한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던 병원으로, 본의 아니게 들어가게 된 것이다. 바이러스 연구소의 연구생이던 약혼자 고바타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 메구미에게서 열이 나고, 빨갛게 부풀어 오른 발진, 기침 등의 증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응급차를 호출하고, 카페에 다른 손님이 없었기에 카페 주인과 교스케, 메구미 세 명은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중 카페 주인은 이틀 후에 사망해버린다. 이후 교스케는 열흘 동안 의식불명상태가 된다. 그로부터 두 달 동안 감염으로 인한 사망자는 372명에 달했고, 어느 정도 유효한 백신이 만들어져 사망률을 조금 낮추고, 세간에서는 이 신종 전염병을 '용뇌염'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그 근저에는 자신이 믿어 온 상식이 뒤집히는 것에 대한 공포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초능력 같은 건 거짓말, 우화일 뿐이라는 상식 말입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초능력에 대해서는 저희도 상식파였죠. 절대로 믿을 수 없다고.... 아니, 그런 바보 같은 얘기엔 관여하고 싶지도 않았죠.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나카야 씨와 연결이 되면서 어쩔 수 없이 저도 초능력과 관계되는 게 생기고 말았습니다.

신종 바이러스의 출현, 그로 인한 전염병 사태는 금방 진정이 되지만, 진짜 문제는 그 이후였다. 초기 감염자 중에 의식이 돌아온 것은 교스케와 메구미, 그리고 메구미와 고바타가 병문안을 했던 노인 오키쓰, 이렇게 세 사람이었는데 문제는 이후 그들에게 나타나는 말도 안 되는 증상들이었다. 우선 93세의 오키쓰는 의사소통도 잘 안 되던 노망난 노인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이가 실감 나지 않는 활기찬 할아버지로, 게다가 외모가 하루가 다르게 점점 젊어지고 있었다. 교스케는 갑자기 환각을 보기 시작했고, 메구미는 물체를 움직일 수 있게 하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회춘, 예지력, 염력이라는 초능력을 가지게 된 이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세상과 소통하려 매스컴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지만 예상치 못한 사고는 비극으로 이어지고 이야기는 점점 엄청난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간다.

바이러스라는 소재와 '마법사의 제자들'이라는 제목이 잘 매칭되지 않아 읽기 전부터 더욱 궁금했었는데, 책을 다 읽고 나서 제목이 만들어진 계기를 들으니 꽤나 그럴 듯하고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프랑스 작곡가 폴 뒤카의 교향시 '마법사의 제자들'에서 따온 제목이라고 하는데, 마법사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의 제자가 어설픈 마법으로 물바다 소동을 일으키고 만다는 내용이 바이러스로 인한 전염병이 세상을 초토화시키고, 이후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초능력이 등장해 더욱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책의 내용과 기묘하게 부합되어 제목의 특별함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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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드런 액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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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법원 가사부 판사 피오나 메이는 35년 동안 한눈 한번 판 적 없던 남편에게 충격적인 말을 듣는다. 여전히 피오나를 사랑하지만, 일에만 신경 쓰느라 성생활 없는 그녀와의 관계에 지쳤다며 죽기 전에 흥분으로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연애를 해보겠다고 말이다. 그들에게 아이는 없지만 그래도 서로 믿고 살아왔다고 생각했었기에 그녀는 충격이 크다. 피오나의 나이 59, 수많은 부부간의 갈등을 재판해왔지만, 그녀 자신이 그런 갈등을 겪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오나는 동료 판사들 사이에서 찬탄의 대상일 정도로 업무적으로는 완벽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남편과의 관계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오죽 하면 남편이 "피오나, 우리가 마지막으로 잠자리를 한 게 언제지?"라고 물었을까. 그녀는 생각한다. 언제였을까? 그제야 기억난다. 남편은 이전에도 같은 질문을 했었다는 걸. 처량하게 묻기도 했고 따지듯 묻기도 했었다. 오랜 시간 타인의 가정사를 들여다보고 조언하고, 판단하고, 결정했던 그녀가 그들과 하나 다를 것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자 그녀는 당혹스럽기만 하다. 그렇게 그녀가 수십 년 동안 지탱해온 결혼생활의 위기를 맞을 그 즈음, 한 소년의 생사가 걸린 재판을 맡게 된다.

"난 우리가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아. 안 그래?"

"떠나는 사람은 당신이야."

"우리 결혼을 깨트리려는 건 내가 아니야."

"그건 당신 말이지."

18세가 되기까지 3개월이 채 남지 않은, 17세 소년이 백혈병에 걸려 긴급 수혈을 해야 하는데 아이와 부모가 동의를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유는 아이와 그의 부모가 여호와의 증인이고, 혈액제제를 몸 안으로 받아 들이는 것은 그들의 신앙에 위배되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재 상황은 수혈을 할 경우 생존 가능성이 아주 높아지고, 수혈을 하지 않으면 죽을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 문제는 죽음의 방식이다. 내출혈이 일어날 수도 있고, 신부전의 가능성도 있고, 시력을 잃거나 뇌졸중을 일으키거나 합병증으로 무수한 신경질환을 앓을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끔찍한 죽음이 되리라는 사실뿐. 당연히 병원에서는 왜 수혈을 하지 않아 환자를 잃을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서 병원 측은 본인과 가족의 의사에 반해 적법한 절차로 수혈할 수 있도록 법원명령을 신청하게 된 것이다.

의료 선택의 자유는 성인의 기본적 인권이지만, 문제는 애덤이 아직 법률상 성인이 아니라는 데 있다. 물론 3개월만 지나면 18세로 법률상 성인이 되지만, 아이의 견해가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부모의 견해가 아닌지, 사이비 종교집단의 교리를 근거로 수혈에 반대하는 것이 자신의 견해가 맞는지 사람들은 의심할 수밖에 없다. 내일까지 수혈을 못 하면 매우 위험한 상태로 접어들 수밖에 없고, 피오나는 양측의 공방과 부모의 입장 만으로는 이 특별한 상황에 대해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해 직접 애덤을 만나보기로 결정한다. 자신의 상황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병원의 청구를 기각하는 판결을 내릴 경우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기로 말이다. 피오나는 애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 마땅히 존중 받아야 할 신앙과, 치료를 거부할 권리에 내포된 개인의 존엄성보다 더 소중한 것이 생명이라고 판단하고, 그를 살릴 수 있도록 수혈을 통해 치료하는 것이 적법하다는 판결을 내린다. 극중 피오나가 읽어내는 판결문은 너무도 정확하면서 아름다워 페이지를 읽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케이크를 먹고도 계속 가지고 있을 수는 없다. 이 속담을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알겠어요. 우리 경우에는 케이크를 먹어버렸는데도 아직도 손에 케이크가 있는 거예요. 부모님은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랐고, 장로님들 말에도 순종했고, 옳은 일은 모두 했으니까 지상낙원에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게다가 동시에 아들도 살렸잖아요. 가족 누구도 회중에서 이탈하지 않았고 말이에요. 수혈을 받긴 했는데 우리 잘못은 아닌 거죠! 판사를 비난하고, 하느님을 믿지 않는 체제를 비난하고, 우리가 가끔 '세상'이라고 부르는 것을 비난하라는 거죠. 이런 구제방법이 있었다니! 아들이 죽어야 한다고 말했는데도 아들을 살릴 수 있었던 거예요. 그 아들이 바로 케이크인 거고요!

, 이 작품이 정말 흥미로운 건 여기까지가 작품의 중반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피오나의 판결로 애덤이 수혈을 받게 되어 건강을 회복하고, 가족들이 의외로 아들이 회복되는 모습에 기뻐하게 되는 것까지 말이다. 중요한 이야기는 이미 다 나와 버렸고, 그에 대한 판결까지 내려졌다. 그런데 피오나가 애덤을 살리는 판결을 하고 난 뒤, 상황은 전.. 예상 밖의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이어지는 작품의 후반부에 진짜 이야기가 들어 있다.

누구에게나 삶이 낯설어지는 순간이 오게 마련이다. 때로는 우리가 믿고 살아왔던 것들의 기준이 무너져 내리기도 하고, 정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게 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기도 한다. 내가 모조리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어느 순간 타인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내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라고 자신했던 바로 그곳에서 함정에 빠져버리기도 하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이다. 전반부의 보여지는 종교의 법의 충돌, 개인의 가치관과 생명의 무게, 그리고 법의 테두리 안에서 판단하기 어려웠던 실제 사례들에 대한 스토리 만으로도 너무 훌륭한 작품이지만, 이언 매큐언의 진정한 장기는 후반부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법이라는 너무도 정..한 테두리 안에서 올바른 판단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믿으며 살아온 한 여인이 어떻게 낯선 삶 속으로 던져 지게 되는지, 삶이란 매 순간 얼마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인지 보여주는 글은 담담하지만 묵직한 울림을 안겨준다.

몇 해전에 여호와의 증인 신도가 자신의 부인이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을 때 종교적인 이유로 수혈을 거부해 결국 아내를 죽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이후 남편은 교통사고로 사망했으니 보험사에 보험금을 요구했고, 보험사측은 살 수 있는 환자를 그렇게 죽게 만든 것은 남편의 책임이니 보험금을 줄 수 없다고 하고, 결국 재판까지 갔으나 보험사가 보험금을 줄 필요가 없다고 판결이 났었다. 여러 종교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를 내세우는 이 종교에서는 수혈이 꼭 필요한 경우에도 거부하다 죽는 경우도, 군입대를 거부하다 감옥에 가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종교적 신념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더 엄청난 거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이언 매큐언은 "아동의 양육과 관련한 사안을 판결할 때 (…) 법정은 아동의 복지를 무엇보다 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영국의 아동법과 개인의 자유인 종교적 신념에 관해 매우 치밀하게 잘 짜인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역시 이언 매큐언의 작품은 한 번도 실망 시킨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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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이 아닌 두 남자의 밤
최혁곤 지음 / 시공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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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바야흐로, 일명 바리캉 맨으로 불리는 범인의 연쇄살인사건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 하던 시기였다. 석 달 사이에 젊은 여자 넷이 죽어나갔는데 희생자들의 머리 한 부분이 바리캉으로 밀린 채 발견되어, 일명 바리캉 맨으로 불린다는 어쩐지 다소 우스운(?) 설정의 범인덕분에 사회부 기자들도, 경찰 들도 비상근무에 수사에 애를 먹고 있던 참이었다. 한국기자대상을 수상하고 꽤나 잘나가는 기자인 박희윤에게 어느 날 갑자기 옛 애인으로부터 연락이 온다. 자신을 구해달라고. 게다가 그녀는 지금 얼굴만 봐도 다들 알 만한 인기 탤런트 채연수였다.

농담인 듯

소문 하나에 죽고 사는 연예인이니 경찰에 신고하기는 부담스럽고, 하지만 납치 임에 분명하니 뭔가 조치는 취해야겠고, 박희윤은 세종문화회관 뒷골목의 카페 '이기적인 갈 사장'을 찾아간다. 그곳의 사장 갈호테는 피의자와의 스캔들로 인해 쫓겨난 전직 강력계 형사다. 하지만 그들의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채연수는 얼굴 없는 시체로 발견되고, 이후 바리캉 맨과 채연수, 그리고 박희윤에 대한 루머성 기사로 한동안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가 바리캉 맨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해 결국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만다. 그리고 카페 '이기적인 갈 사장'에서 빈둥거리며 갈호테와 기자 시절 동료이자 후배 홍예리와 함께 수상쩍은 사건, 사고 조사에 뛰어들게 된다.

“그나저나 우리가 이 짓 해서 남는 게 뭐지? 오지랖 넓은 것도 어느 정도라야지. 용감한 시민상 받을 것도 아니고 사립탐정처럼 의뢰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카페는 손님이 없어 망하기 직전인데. 그냥 대책 없이 본능에 막 끌려가는 기분이야.”

문제는 극중 이들의 말처럼, 목숨을 걸고 범인을 쫓고, 수상한 일을 따라다니며 조사하는 것이 사실 별다른 의미가 없는 일이라는 거다. 누군가 그들에게 의뢰한 것도, 그렇다고 전직 기자, 전직 형사의 신분이니 투철한 사명감으로 정의를 밝혀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농담 아닌

표면적인 스토리는 본격 미스터리 물이지만, 실제 진행되는 이야기는 전반적으로 지나치다 싶을 만큼 가볍게 흘러간다. 실없는 농담과 단순한 유머들은 지방경찰청장까지 지내고 퇴직한 갈호테의 전 상사가 너무도 진지하게 사라진 개를 찾아달라고 의뢰를 하는 순간에 이르면 정점이 된다. 아니 무슨 중동의 테러리스트를 쫓다가 하마 영감이 애지중지 키웠던 개 덕식이를 찾는 것까지 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 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린가. 그러니까 의뢰 내용인즉슨, 집 나간 개를 찾아달라는 거였다. 입안의 커피를 뿜을 뻔했다. 화가 끓어올라 귓구멍과 콧구멍에서 압력밥솥 스팀 같은 게 나올 것만 같았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지만 친구 체면을 생각해 함부로 행동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 작품을 그저 농담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것은 이주 노동자 불법체류, 전직 탈레반의 사제폭탄, 등록금 인하와 취업 대책을 촉구하는 대학생 시위 등등 현실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무거운 내용을 진지하게 전달하는 것보다는 가볍게 풀어내는 것이 오히려 사태의 심각성을 두드러지게 보여주기도 하니 말이다. 마지막 종막에 이르면 그 동안 벌어졌던 사건들이 하나 둘 씩 그 연계성을 나타내기 시작하면서, 바리캉 맨과 박희윤 사이에 벌어졌던 사건, 그리고 박희윤의 주변 인물들에게 생겼던 일들이 동기를 가지고 연결되기 시작한다.

농담같은

하지만 여전히 이 작품을 누군가에게 추천해도 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게 만드는 것은 (아마도 작가가 일부러 그런 거겠지만) 이런 대목들 때문이다. <따로 놀던 의문점들이 자기장에 끌리듯 일직선에 모이기 시작했다>, <..한순간 모든 퍼즐 조각들이 빈틈없이 들어맞았다. 차가운 전율이 등줄기를 핥었다> 등등 사건의 해결을 너무 쉽게 '이지 고잉'하려는 대목들 말이다. 흩어져있던 단서들이 하나로 모이면서 퍼즐을 맞추는 것은 이렇게 말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빠져 '읽고 있는' 독자들이 스스로 깨닫게 해야 그 재미가 더 할 텐데 말이다. 어딘가 나사 빠진 것 같은 인물들이 사건 해결을 너무 편하게, 쉽게 해버리니 단편임을 감안한다고 해도 이야기의 깊이는 물론 추리 소설로서의 긴장감이 확실히 떨어지긴 하는 것 같다.

매년 새로 출간되는 미스터리 소설만 이백여 종, 그 중에 반 이상을 읽어대는 추리 소설 마니아인 나에게 이 책에 대한 첫인상은 "대략 난감"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함이라고는 찾아 볼래야 찾아 볼 수 없는 '이상한' 두 캐릭터부터 연작 단편으로 이어지는 스토리 또한 깃털처럼 가볍기 그지 없는데, 설렁설렁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무심코 지나갈 수만은 없는 묵직함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무거워지려고 하면 우리의 주인공 두 캐릭터가 분위기를 또 확 깨버리는 무슨 농담 같은 소설이라고나 할까. 이 무슨 진지하지 않은 추리 소설이란 말인가. 재미있는 건, 읽는 내내 투덜대는 기분으로 이야기를 따라갔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이들의 다음 스토리가 궁금해진다는 것이다. 그건 아마도 두 명의 아주 명확한 캐릭터가 작품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명력을 얻기 시작했다는 뜻일 것이다. 장르 소설에서 매력적인 캐릭터야말로 사실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닌가. 그러니 '탐정이 아닌' 이 두 남자가 어떻게 진짜 '탐정'이 되어 가는지 앞으로의 이야기를 고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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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작은 집 인테리어 - 좁은 공간을 효율적이고 센스 있게 활용하는
스미노 케이코, 모리 세이카 지음, 안은희 옮김, 마츠나가 마나부 사진 / 황금부엉이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파리는 우리나라 못지않게 주택난이 심각한 도시라고 한다. 100년이 된 아파트는 기본일 정도로 낡고 오래된 아파드 들도 많아, 파리지앵들은 작고 낡은 집을 아늑하고 개성 있는 공간으로 변신시킨다고. 이 책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지만, 또 가장 복잡한 도시 중 하나인 파리에서 35~75제곱미터 규모의 작은 집에서 살아가는 파리지앵들의 집을 방문해 그들의 재치 넘치는 인테리어 아이디어를 보여주고 있다.

 

 

'좁은 거실에 뭔가 자꾸 장식해봐야 어수선하고 복잡해질 뿐이다' 하는 생각이 드는 것 또한 당연지사. 하지만 그렇다고 벽이나 선반 위에 아무것도 장식하지 않는 썰렁하고 삭막한 집에서 살아간다면 일상생활의 재미도 그만큼 반감될 것이다.

......작은 집이라고 해서 원하는 인테리어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파리의 인테리어 고수들의 아이디어를 참고해 나만의 '작고 예쁜 집 꾸미기'에 도전해보자!

이 책은 작은 집에서도 센스 있고 쾌적하게 살아가기 위한 방법으로 아래의 네 가지 힌트를 제시하고 있다.

1.'좋아하는 것'은 확실하게 고수한다!

2.단번에 완성을 꿈꾸지 말고, 살면서 꾸준히 하나씩 고쳐간다!

3.사용법과 정리 법을 조금만 고민하면 얼마든지 공간을 넓고 예쁘게!

4.작은 집에서 여는 파티로 친밀한 분위기를!

요지는 작은 공간이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에 둘러싸여 있다면 자신만의 개성 넘치는 감각적인 인테리어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작은 집은 아무래도 공간적 제한이 크기 때문에 수납 방법에 대한 아이디어와 주변과의 밸런스, 색상의 조화 등이 매우 중요하다.

 

 

"집이라는 게 생활하면서 조금씩 만들어가는 곳이기 때문에 꾸준히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어요. 처음부터 완벽하게 만들려고 하지 않고, 천천히 공을 들여가면서 꾸미는 것이 재미있어요."

공간의 넓이 별로 실제 파이지앵들의 아파트가 소개 되어 있는데, 대담하게 노란색 벽지를 쓰고 라벤더 컬러 커텐에, 부엌의 식기들은 빨강으로 페인트 칠을 하는 등 방마다 색상에 변화를 줌으로써 집도 있고, 흰색을 베이스로 밝은 느낌을 주는 산뜻한 인테리어를 한 집, 직접 DIY를 통해 방의 구조를 변경하고 부엌과 거실을 연결하며, 바닥도 새로 깔고 벽이랑 천장에 새로 페인트 칠도 하는 등 미니멀 한 취향을 잘 살려 자신에게 꼭 맞는 집을 만들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파리의 인테리어 전문가에게 듣는 작은 집을 센스 있게 연출하는 5가지 포인트도 소개되어 있다.

1.'직선,평면'을 고수하되, '곡선'을 악센트로

2.작은 집이야말로 큰 그림이 제격

3.공간의 확장을 일으키는 '거울'의 매직

4.맞춘 듯 맞추지 않는다

5.벽너머에 넓은 공간을 상상하게 만드는 마법의 틈새

세탁기나 냉장고, 책상 같은 생활용품이 대부분 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으니, 다른 부분도 직선적, 평면적이어야 안정감이 있고 눈에도 예쁘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약간 큰 거울이 있다면, 거울 속에 비치는 또 다른 공간으로 인해 훨씬 더 넓어 보이는 효과가 있고, 특히나 벽에 슬릿(틈새 공간)을 넣는 방법은 마술처럼 공간 확장효과를 주기도 한다.

좁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데 관심이 많은 신혼 부부라, 작은집 인테리어에 관련된 책들을 여럿 보았다. 집이 막 넓은 편이 아닌데, 서재도 있고, 아이 방도 있고 해서 정말 짐들이 많은 편이기 때문이다. 가끔 영화 같은 데 보면 파리의 아파트들은 작은 집이 많은 편인데도, 참 아기자기하게 가구들이며 배치가 잘 되어 있었던 기억이 난 것이다. 이 책 덕분에 좁은 공간을 좀 더 효율적이고, 나만의 색깔이 드러나는 센스 있는 인테리어를 할 수 있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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