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 온 더 트레인
폴라 호킨스 지음, 이영아 옮김 / 북폴리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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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레이첼은 매일 아침 8 4분 완행 열차를 탄다. 그녀가 타는 노선은 중간쯤에 신호가 고장 난 곳이 있어 거의 매일 기차가 그곳에 멈춰 서는데, 가끔은 몇 초지만 어떤 때는 몇 분이나 멈춰 서곤 한다. 그녀는 그곳에서 기찻길 옆에 있는 빅토리아 왕조풍의 2층짜리 연립주택인 15호를 바라보기를 좋아한다. 검은 머리에 체격이 좋고 강인해 보이는 남자와 짧게 자른 금발에 피부가 하얀 여자가 살고 있는 곳으로, 그들은 자주 집 밖으로 나와 커피를 마시곤 한다. 그녀는 그들에게 제이슨과 제스라는 이름을 붙여주며, 마치 그들과 자신이 알고 지내는 사이라도 되는 듯 여긴다.

8 4분 기차 안으로 돌아오니 마음이 편안하다. 런던으로 가서 새로운 일주일을 시작하고 싶어 좀이 쑤신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런던에 있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다. 그저 푹 꺼진 폭신한 벨루어 의자에 기대어 앉아, 창으로 흘러 들어오는 햇빛의 온기와 앞뒤로 흔들리는 객차의 움직임, 기차 바퀴가 선로 위를 굴러가는 안락한 리듬을 만끽하고 싶을 뿐이다. 다른 곳에 있는 것보다 이 안에서 기찻길 옆의 집들을 구경하는 편이 더 낫다.

뭐 그럴 수 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지루한 출근 길에 자주 만나는 사람이나, 늘 보이던 풍경 속에서 자신만의 상상을 즐길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주인공 레이첼이 평범한 직장녀가 아니라, 몇 달 전 실직해 출근하는 시늉만 하고 있는 알코올 중독자라는 거다. 게다가 5년 전에 이혼한 남편과 그의 부인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는 스토킹녀라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화자를 만나게 된 것이다. 어제 자신이 뭘 했는지 툭하면 기억이 끊기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해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또 마셔대는 알코올중독자 그녀가 하는 말을 고스란히 믿고, 그녀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따라가야 하는 독자에게는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메건은 몇 집 건너에 사는 가족의 아이를 돌봐주는 일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일이 너무나도 끔찍하게 하기 싫다. 결국 그녀는 일을 그만두고 불안한 마음을 위로받기 위해 심리치료를 시작하지만, 곧 담당 의사와 부적절한 관계에 빠져들고 만다. 애나는 다들 불안정한 아내를 둔 유부남과 얽히는 건 미친 짓이라고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톰을 그만큼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기와 지금도 자신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남편, 모든 게 완벽하다. , 여전히 자신들을 쫓아다니고, 자신의 남편에게 연락을 해대는 남편의 전부인 레이첼만 없다면 말이다.

나 혼자만 불행한 것 같았다. 난 외로워졌고, 그래서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하다가 양이 점점 늘었다. 그러고 나서는 더 외로워졌다. 술 취한 사람 근처에 오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난 사람을 잃고 술을 마셨고 술을 마시고 사람을 잃었다. 내 일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리 잘나가지는 못했다. 설마 잘나갔다 한들, 여자로서는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여자가 가치를 인정받는 기준은 딱 두 가지다. 외모와 엄마로서의 역할. 미인도 아니고 아이도 가질 수 없는 난 그럼 뭘까? 쓸모 없는 인간.

레이첼은 여느 때처럼 기차를 타고 지나가며 15호를 바라보는데 마침 나와 있던 제스가 다른 남자와 키스를 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녀는 제이슨을 배신한 제스를 보며 전남편 톰의 불륜을 알게 되었던 때를 떠올린다. 그들은 제이슨과 제스가 살고 있는 15로에서 몇 집 건너에 있는 집에서 살았다. 그 집에 지금은 톰이 불륜 상대였던 애나와 재혼해서 아기와 함께 살고 있지만 말이다. 다음날 레이첼은 술을 마시다가 무작정 제이슨을 보기 위해 기차에 탄다. 이게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여전히 술을 마시고 있는 중인 그녀를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그녀는 자신의 침대에서 눈을 뜨지만 검은 공포가 파도처럼 밀려드는 걸 느낀다. 머리카락은 피에 엉겨 붙어 있고, 마스카라는 광대뼈 위로 번져 있으며 아랫입술에는 베인 상처와 다리에는 멍 자국이 있으며, 속이 메스꺼운 상태이다. 톰이 남긴 메세지에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우리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라는 소리가 들리고, 그녀는 도대체 자신이 간밤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야기는 이렇게 세 명의 여자, 레이첼, 메건, 애나를 중심으로 차곡차곡 쌓여간다. 재미있는 건 인물들 각각의 날짜와 시간대가 조금씩 차이가 난다는 것. 레이첼의 현재 이야기가 진행되다, 일년 전 메건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식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들의 시간대가 점점 가까워지고, 그럴수록 미스터의 해답에 가까워진다. 누굴 믿어야 할 지 의문스러운 화자들에다, 시점과 시간이 왔다갔다하면서 긴장감을 부여한다. 한번 이야기의 끝을 놓치면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되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출간 전부터 영화 판권이 계약되고, 아마존에서 엄청난 수의 독자 리뷰가 달리고, 영국과 미국에서 무려 500만부가 팔렸다는 화려한 이력만큼이나, 독자들과 제대로 밀당을 하는 작품이다. 마치 폭주하는 기차처럼, 멈추지 않는 이야기의 향연이 아주 매력적이니 말이다. 이 책을 읽은 뒤부터는, 기차를 타게 되었을 때 아마도 예전과는 다른 느낌일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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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으로 오세요
박혜림 지음 / 북뱅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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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코엑스에서 서울키덜트페어가 열렸었다. 하루 만 명 이상이 방문하는 등 성황을 이뤘다고 하니, 우리나라도 점점 키덜트 문화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지고 있는 것 같다. 키덜트는 어린이를 뜻하는키즈kids’ '어른'을 뜻하는어덜트adult’의 합성어로 아이의 순수한 감성을 지닌 어른을 지칭하는 말이다. 다양한 종류의 컬러링 북 중에 키덜트를 위한 '인형의 집'이 있어 궁금해졌다. 여지들이라면 누구나 어린 시절 한때 '인형 놀이'에 푹 빠져 지낸 적이 있을 테니 말이다. 게다가 19세기 유럽의 '인형의 집'을 재현하고 있는 이 책은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은 이들 또한 충족시켜 줄 만한 컬러링 북이라 매우 독특하다.

 

 

동화적인 판타지와 유럽의 빈티지 감성이 어우러진 국내 최초인테리어컬러링북답게, 응접실, 침실, 파우더룸, 다이닝룸, 서재, 무도회장, 테라스와 정원 등 대저택의 곳곳이 일러스트로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응접실의 벽난로, 빅토리안 샹들리에, 꽃병, 액자, 그리고 고풍스런 의자까지.. 어린 시절 동화책에서 항상 등장하는 컨셉이라 마치 동화를 읽는 듯한 느낌도 든다.

 

그리고 특히나 파우더룸이 어마어마하다. 단순한 욕실이 아니라 화장을 할 수 있는 곳이라 그런지 꽤나 넓고 화려하다. 18세기 무렵의 영국에서 가발에 가루분을 뿌리는 것이 유행이라, 상류층에서는 '가루분을 뿌리는 방'이라는 의미의 파우더 클로젯이 마련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파우더룸의 유래이다.

 

 

 

화려한 식기들이 눈길을 사로잡는 다이닝룸이다. 영국의 애프터눈 티타임에 어울릴 듯한 찻잔, 의자, 롱테이블까지... 홍차랑 마들렌을 구워서 먹으면 참 좋을 것 같다.

 

 

 

가장 기대했던 건 바로 '서재'이다. 샬롯ㅅ의 서재에는 책 외에도 예술작품이나, 망원경 같은 과학 도구를 진열되어 있다. 주인의 모습과 개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서재를 갖는 것이 어릴 때부터의 꿈이었는데, 천장 끝까지 빼곡히 책이 쌓여 있는 것이 어린 시절 나의 로망이기도 했다.

 

 

 

무도회장과 테라스, 정원을 거쳐 샬롯의 집을 모두 구경했는데, 그 중에서도 내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바로 파우더룸이었다. 사실 현실에서는 이런 파우더룸을 가지기란 정말 어려우니까 말이다. 그래서 제일 먼저 색칠을 해 볼 공간으로 파우더룸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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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녀굴 - 영화 [퇴마 : 무녀굴] 원작 소설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17
신진오 지음 / 황금가지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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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제주도의 김녕사굴에서 시작한다. 산악자전거 동호회 매드맥스의 일곱 멤버가 제주도 라이딩을 하고 유명한 사굴을 탐험해보기로 한 것이다. 동굴의 안으로 들어갈수록 어둠은 짙어지고, 공간은 좁아진다. 그리고 어느 정도 들어갔을 무렵 어디선가 방울 소리가 들려온다. 한두 개가 아닌, 여러 개의 방울이 동시에 부딪치면서 내는 소리가. 그리고 갑자기 대원들 모두 돌처럼 굳어버린 채 가만히 서서 동굴 안쪽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사람들의 몸은 마네킹처럼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고, 유일한 홍일점인 희진만이 동굴 안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일에 당황하고 있다. 차츠랑- 차츠랑- 차츠랑- 방울 소리는 점점 증폭되듯 크게 들려오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두 다리는 꿈쩍도 하지 않고, 그리고 순식간에 어둠이 모든 것을 먹어 치운다.

그렇게 매드맥스의 멤버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나고 9개월 후. 진명은 대학 선배인 주열의 빈소를 찾아간다. 진명은 레지던트 과정을 하다 중간에 그만두고, 현재는 퇴마사로 일하고 있다. 귀신을 쫓거나 귀신 들린 사람들을 치료하는 일이다. 진명은 병원에 있는 동창에게 부탁해 영안실에서 주열을 만난다. 그리고 주열의 혼령이 자신에게 무언가 말을 하고 싶어하는 걸 보고, 영력을 이용해 사고 당시의 기억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그런데, 교통사고가 난 원인은 다름아닌 무녀 귀신 때문이었던 거다. 무당 귀신은 정말 흔치 않은 존재인데, 귀신의 저주를 받은 건지 진명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주열은 그렇게 진명에게 자신의 아내와 딸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이후 주열의 아내 세연의 주변에서 악몽 같은 일이 시작된다.

너무 무서웠지만 본능은 그만 그녀를 되돌아보게 했다. 그것이 바로 등 뒤에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을 향해 한 쪽 팔을 쭉 뻗고서.....

"꺄악!"

비명은 방 안에서 울렸다.

제주 김녕사굴에서 실종된 매드맥스 회원들 중에 6개월만에 희진이 살아 돌아오지만 상태가 좋지 못하고, 퇴마사를 취재하고 싶었던 케이블 티비의 박혜인과 병원의 관계자들은 진명을 부른다. 아무래도 희진에게 빙의된 귀신이 무당인 것처럼 보이고, 희진이 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꼭 무당이 굿을 할 때 하는 말 같았기 때문이다. 희진의 담당 의사가 은사였기에 진명은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퇴마 의식을 진행하기로 한다. 그리고 시작되는 퇴마 의식 장면에 대한 묘사는 가히 무시무시하다. 희진을 조종하고 있는 원혼의 힘은 매우 강력해 결구 수사 담당이던 형사와 검사를 죽게 만들고, 진명에게도 상처를 입힌다. 그리고 그 원혼이 금주에 대해 말하는 걸 듣게 되는 진명은 당황한다.

 

과연 매드맥스 회원들을 죽게 만든 원혼과 금주의 주변에서 심상치 않은 일들을 벌이는 원혼은대체 무슨 목적인 걸까. 영화로 치자면 한 씬으로 끝낼 장면이지만, 책에 묘사된 꽤 많은 페이지의 퇴마 의식은 굉장하다. 소름 끼치게 무섭기도 하지만, 그것 외에도 매우 흡입력 있게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어 눈을 떼지 못하고 그 장면에 몰입할 수 있었다.

"나를 방해하면 누구든 가만 안 둬. 그게 너라도..... , 잊을 뻔했네. 금주한테는 내가 곧 찾아간다고 전해줄래?"

그녀는 실실 웃었다. 진명은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같은 영가일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직접 그녀의 이름을 듣게 될 줄이야.

"왜 하필 그 사람이지? 말해. 대체 무슨 관계야!"

이 작품은 제주의 김녕사굴 설화를 바탕으로 쓰였다고 한다. 제주의 한 동굴에 은거하던 커다란 구렁이에게 열다섯 살이 된 처녀를 제물로 바치다, 신임 제주 판관이 구렁이를 죽였으나 돌아오는 길에 변을 당했다는 설화이다. 설화를 바탕으로 매우 현대적인 공포 소설이 만들어졌는데, 그 중심에 '퇴마사'라는 이색적인 캐릭터가 있다. 한때 이우혁의 <퇴마록>에 빠졌던 기억이 있지만, 그 이후로는 퇴마 관련된 소설도, 영화도 거의 보지 못했던 터라 우선 소재에서부터 독특함을 발산한다. 아마도 그래서 이 작품을 원작으로 영화가 만들어진 것이겠지만 말이다. 김휘 감독의 영화 <퇴마:무녀굴>은 지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폐막작으로 먼저 상영이 되기도 했는데, 아직 개봉전이라 영화에 대한 기대치가 꽤 높은 걸로 알고 있다. 예고편으로 봤을 때도 꽤나 섬뜩하고 무섭게 보이긴 했다.

워낙 공포, 추리, 미스터리 분야의 작품들을 많이 접해와서 웬만큼의 강도가 아니면 이제 꿈쩍도 하지 않는 나이건만, 이 작품은 일부러 낮에만 읽었을 정도로 오싹했다. 밤에 혼자 방에 앉아서 읽는다면 등골이 서늘해질 만한 대목이 군데군데 눈에 띄어 오랜만에 제대로 된 공포를 느낄 수 있었다. 영화도 책 만큼의 완성도를 보일 수 있기를 바라고, 그래도 올 여름 무더위를 쫓아버리기엔 공포 소설이 제격이라는 걸 잊지 말자. 이 책을 읽다보면 에어컨이 필요없을 정도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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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5-08-01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전 영상으로는 약한데, 활자에는 강해요. 한창때 이우혁 퇴마록 시리즈도 두루 섭렵했었는데 말이죠.추억을 떠올릴수 있어서 잠시 미소지었습니다~^^

피오나 2015-08-01 17:55   좋아요 0 | URL
공포는 영상보다는 활자화된 것이 훨씬 더 무서운 것 같아요. 양철나무꾼님은 대단하신데요^^

cyrus 2015-08-01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새벽에 읽었는데 세 시간 만에 다 읽었어요. 마침 그 시간에 강정호 출전 메이저리그 경기를 중계하고 있었어요. 중계를 보면서 책을 읽었는데, 강정호가 적시타 치는 장면을 놓칠 정도로 이야기 몰입에 푹 빠졌어요. 중계방송 안 보고 제 방에 혼자서 읽었다면 무서운 기분이 들었을 겁니다. 새벽에 책 읽을 때 너무 조용해서 좋긴 한데, 가끔 무서울 때가 있어요. ^^

피오나 2015-08-01 20:52   좋아요 0 | URL
하핫..야구 중계방송 보면서 새벽에 읽는 것 괜찮겠네요ㅎㅎ 이 책 몰입도가 좋더라구요. 저도 시간가는 줄 모르고 페이지가 넘어갔어요 ㅎㅎ 저는 강정호 출전 경기 새벽꺼는 맨날 놓쳐요. 아침에 할때만 겨우 봅니다ㅋㅋ
 
마라 다이어 1
미셸 호드킨 지음, 이혜선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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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글거리는 하이틴 로맨스는 딱 질색이다. 반면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미스터리는 완전 사랑한다. 그런데 그 미스터리가 로맨스랑 만나면 어떨까? 어찌 보면 그렇게 황당무계한 설정으로 쓰인 작품이 바로 이 책이다. 분명 기본 플롯은 미스터리인데, 그 속을 채우고 있는 대부분의 에피소드는 말 그대로 손발이 오그라드는 로맨스이다. 여주인공은 대책 없이 들이대는 남주인공에게 겉으로는 싫다 하지만 설레는 마음을 숨길 수 없고, 그들을 질투하는 친구들 보란 듯이 남주인공이 위기에 빠진 여주인공을 구해낸다. 마치 백마 탄 왕자라도 된 듯. 그런데 그 와중에 우리의 여주인공 주변에서는 이상한 사건들이 끊이질 않는다. 이유 없이 사람이 죽고, 기억나지 않은 시간이 있고, 죽은 사람들이 환영으로 나타나고. 그럴 때는 또 오싹한 호러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또 어느 순간에는 풀리지 않은 비밀이 있는 것 같은 스토리 전개에 미스터리처럼 보이기도 하고,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은 판타지스럽기도 하고, 하지만 꽤 많은 부분은 10대 남녀의 달달한 로맨스에 치중되어 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웃음을 터뜨렸다.

곧바로 고개를 들었는데 피가 얼어붙은 듯 소름이 끼쳤다. 주드의 웃음소리였다. 주드의 목소리도 들렸다. 천천히 일어서서 울타리를, 밀림 같은 미개발 지역을 마주하고 철조망 사이에 손가락을 끼우고서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나무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당연했다. 주드는 죽었으니까. 클레어처럼. 레이첼처럼.

낡은 병원 건물이 무너져 단짝 친구인 레이첼과 남자 친구인 주드, 그리고 그의 동생 클레어까지 모두 죽고 혼자만 살아 남은 마라 다이어. 하지만 그녀는 자신들이 왜 거기에 갔는지, 거기서 뭘 했는지 도무지 그날 밤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후로 마라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악몽을 꾸고 헛것을 보았고, 심리적인 안정을 위해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하기로 한다. 하지만 새 학교에 등교하자마자 마라는 역시 환각을 본다.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 천장이 무너져 내리는 걸 보고, 화장실 거울 속에서 클레어의 모습이 나타나고, 교정의 가장자리에 있는 울타리를 따라 가다가 주드의 웃음소리를 듣기도 한다.

그러던 와중에 모든 여자 아이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노아라는 독특하지만 매력 있는 남학생이 마라에게 관심을 보이며 적극적으로 다가 온다. 마라는 그에게 관심 없는 척 하지만, 그녀도 어쩔 수 없는 여자였기에 서서히 그의 매력에 빠져 든다. 결정적으로 노아의 전 여친이었던 안나가 마라를 질투해 친구들 사이에서 망신을 주려고 하는 순간에 노아가 마라를 구해주고, 그들 사이는 급속하게 가까워진다. 하지만 평소에 너무도 허름한 옷차림으로 다니는 노아의 집이 마치 영화 촬영장같이 호화로운 대저택인데다, 지나치게 적극적인 그의 태도도 어딘지 의문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마라에게 접근했을 수도 있다는 그런 느낌 말이다. 하지만 마라는 자신의 생각과 달리 그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고 있는 중이다.

노아가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겨우 몇 센티미터 앞으로. 꾀죄죄한 턱수염 속에 감춰진 주근깨가 보였다. 노아가 덧붙여 말했다. "점잖게 굴게." 노아가 속눈썹에 살짝 가려진 눈으로 쳐다보자, 나는 황홀해서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나는 노아를 흘겨보며 말했다. "넌 악마야."

그 응답으로 노아가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내 코끝을 살짝 두드렸다.

"넌 내거야."노아가 이렇게 말하고는 저쪽으로 가버렸다.

노아와 마라의 달달한 로맨스 한 편으로 진행되는 플롯은 초자연적인 미스터리, 혹은 판타지 성향을 띤 호러이다. 마라가 학교에서, 집에서 자주 죽은 친구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그렇고, 자신이 증오하거나 미워한 인물들이 바로 자신이 상상한 모습 그대로 죽음을 맞게 되는 사건도 반복된다. 설마, 그들의 죽음에 자신이 무슨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싶어 마라는 점점 두려워진다. 그리고 건물 붕괴 사건이 나던 그날의 기억이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한다. 대체 그녀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 날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이후에 그녀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일들은 또 무슨 이유에서 일까?

<마라 다이어>가 시리즈 3부작의 첫 번째 작품이라, 이야기는 '다음 권에서 계속됩니다'로 끝이 난다. 책을 읽는 내내 시리즈 인줄 모르고 집중해서 읽다가 마지막 페이지에서 순간 당황했다. 2권이 나올 때까지 어떻게 기다리나 싶어서. 모든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 그렇듯 이 작품은 완벽하게 독자들을 미끼로 낚아 궁금증을 한 무더기 남겨 주고 끝이 났다. 두 번째 시리즈를 보지 않을 수 없도록 말이다. 마라의 정신 상태에 이상이 있는 건지, 아니면 마라에게 정말 누군가를 죽게 만드는 능력이라도 있는 건지, 노아가 마라에게 접근한 진짜 이유는 무엇인지, 그녀의 특별함에 이끌리는 마음 말고 다른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닌지, 그리고 사고 현장에서 끝내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던 주드는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건지, 그게 가능하다면 말이다. 궁금한 것 투성이다. 빨리 2권을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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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
하퍼 리 지음, 공진호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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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하퍼 리의 작품이 오로지 <앵무새 죽이기> 단 한 편인 줄 알았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사실 그녀의 첫 작품은 <파수꾼>이었다. 그런데 출판사에서 작중 인물인 진 루이즈의 아버지 애티커스에게 좀 더 초점을 맞추는 게 좋겠다고 조언을 했고, 그래서 그녀는 스카웃이라는 어린이의 일인칭 목소리로 소설을 다시 썼고, 그것이 바로 <앵무새 죽이기>가 된다. 인기와 명성을 바라지 않았던 그녀는 이 작품의 너무나도 큰 성공으로 인해 더 이상 작품 활동을 하지 못했기에, 올해 초까지만 해도 그녀의 작품은 단 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변호사에 의해 이 원고가 발견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파수꾼>이 세상과 드디어 만나게 된다. 그러니 이 작품은 <앵무새 죽이기>의 전작이자 후속작이며, 하퍼 리의 첫 작품이자 최후의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고 <앵무새 죽이기>와 이어지는 이야기이면서도 소소한 설정 상의 차이가 있어 더욱 흥미롭기도 하다. 흑인 청년에 대한 유죄가 무죄로 바뀌고, 손자가 아들로, 여동생이 누나로 바뀌고, 가장 중요한 아버지 애티커스의 가치관이 다르게 보여져 살짝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 덕분에 이 두 작품을 독립적인 작품으로 읽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있기도 하다.

진 루이즈가 생각할 수만 있었더라면, 아주 옛날부터 있던 돌고 도는 이야기라는 관점에서 그날 있었던 일들을 바라봄으로써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와 관련된 중요 사건은 2백 년 전에 시작되어 현대 역사상 가장 피를 많이 흘린 전쟁과 가장 가혹한 평화도 파괴시키지 못한 당당한 사회에서 펼쳐졌고, 이제는 어떤 전쟁도 평화도 구할 수 없을 문명의 황혼기로 되돌아와 개인의 장에서 다시 펼쳐질 참이었다.

흑인 인권 운동의 움직임이 크게 일렁이던 1950년대 중반, 뉴욕에 거주하던 스카웃은 고향인 메이콤으로 돌아와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 보게 된다. 특히나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정의'에 대해서 그녀가 아빠와 맞서는 대목이다. <백인은 백인이고 흑인은 흑인이야. 지금까지 그렇지 않다고 나를 설득시킨 주장을 들어 본 적이 없어>라고 말하는 애티커스라니, <앵무새 죽이기>에서는 상상도 못할 만한 일이지 않나. 전작에서 오누이의 영웅이었던 아버지 애티커스는 미국 전체의 상징적인 멋진 백인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흑인들에게 차별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다수의 백인들처럼 그려지고 있다. 루이즈는 아버지의 그런 모습에서 배신감마저 느끼고 당혹스러움과 실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마도 전작이 어린이의 시점으로 쓰여진 3인칭 소설이라 당시 스카웃의 눈을 통해서 본 아버지는 영웅이었기에 결점이 보일 수가 없었다고 한다면, 뭐 이번 작품에서의 설정이 이해가 될 것도 같다. 아이들은 보이는 그대로를 고스란히 믿지만, 사실 어른들의 모습은 보이는 그대로가 전부가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니 말이다.

이렇듯 이 작품은 많은 부분을 전작에 기대고 있지만, 또 많은 부분이 전작에서 벗어나 있어 재미있다. 게다가 전작에서 우리의 어린 주인공이 그랬듯, 20대가 된 주인공도 역시나 많은 에피소드들에서 그 시절을 되돌아보게 만들고, 빙긋이 웃게 만들어준다. 루이즈가 열두 살 때, 자신이 임신한 줄 알고 불안해하던 에피소드는 사실 너무도 귀엽다. <앨버트는 진 루이즈의 입에 혀를 집어넣었다. 진 루이즈는 임신했다> 친구들을 통해 결혼하지 않아도 생리를 시작한 뒤로는 아기 낳는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사실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은 적이 없기에 그녀는 자신이 정말 임신을 했다고 믿었다. 무려 10개월 동안이나. 매일 아침 갓난아기가 나왔는지 찾아보았고, 계산해 봤을 때 아기가 10월에 나올 예정이었으니, 자신은 9 30일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되겠거니 했다. 그러다 읍내의 물탱크에 뛰어 들려고 하던 때, 헨리가 그녀를 붙들고 뭐 때문에 그리 속상한 거냐는 그의 물음에 <나 아기를 낳게 됐어!> 라고 말하는 순간은 픽 웃음마저 나온다. 그녀의 무지와 지나친 순수함이 너무도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었기 때문이다.

눈이 멀었거나, 그게 내 모습이다. 나는 눈을 뜬 적이 없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려 한 적이 없다. 얼굴만 살짝 봤을 뿐이다. 완전히 눈이 멀었다, 돌처럼... 스톤 목사. 스톤 목사는 어제 예배에 파수꾼을 세웠다. 그는 내게 파수꾼을 세워 주었어야 했다. 손을 잡아 이끌어 주고, 매 정시마다 보이는 것을 공표해주는 파수꾼이 나는 필요하다.이 사람이 이렇게 말하지만 실제로는 저것을 의미한다고, 가운데 줄을 긋고 한쪽에는 이런 정의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저런 정의가 있다고, 그 차이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해 줄 파수꾼이 나는 필요하다.

<파수꾼> <앵무새 죽이기>의 초석과도 같은 작품으로, <앵무새 죽이기>의 주인공인 진 루이즈 핀치(스카웃) 20대가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라고 작품 소개 문구가 있는데 사실 이 작품이 재미있는 이유 중의 많은 부분이 <앵무새 죽이기>에서 나온다. 사실 이 작품이 <앵무새 죽이기>보다 먼저 쓰였으나 안에 담긴 내용은 <앵무새 죽이기>의 후속편이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앵무새 죽이기>를 읽지 않은 독자들에게도 어필할 만한 부분이 많은 작품이기도 하니, 그다지 부담을 갖지는 않아도 될 것 같다.

9살이던 주인공은 이제 26살이 되었고,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를 읽던 초등학생은 지금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만큼의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난 하퍼 리의 두 작품은 당시의 추억과 새로운 깨달음도 함께 안겨 주었다. 어린 나의 시선과 어른이 된 나의 시선은 분명 어떤 부분에서 차이가 날 테지만, 좋은 책이란 그런 것 같다. 어린이의 눈높이에서도 마음을 움직일 수 있고, 어른이 된 시점에서도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것. 수십 년의 시간에 걸쳐 그런 책을 만나기란 사실 쉽지 않은 일이라, 올해 나는 이 두 작품을 '다시' 만나게 되어 참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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