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틸라 왕의 말을 훔친 아이
이반 레필라 지음, 정창 옮김 / 북폴리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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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물 밖에서는 공전을 계속하던 해가 서서히 산맥 뒤로 자취를 감춘다. 동시에 우물 속에서 창백한 얼굴과 눈과 이를 드러내게 하던 빛의 커튼에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형은 울퉁불퉁한 흙벽에 계단을 만드는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손가락을 바지춤에 걸고서 대낮의 끄트머리로 아스라하게 사라지는 수수께끼의 답을 찾듯 어떤 생각에 집중한다. 서서히 어둠이 깔린다.

숲 한복판에 깊이가 7미터 정도 되는 우물, 사방이 축축한 흙과 뿌리로 뒤덮인 울퉁불퉁한 벽, 우물 바닥의 시커먼 물 웅덩이, 그 속에 어린 두 형제가 갇혀 있다. 물도, 식량도 없고, 구조 받을 가능성도 거의 없어 보이는 공간에서 그들은 어떻게 살아 나갈까. 형은 축축한 벽을 손으로 파헤쳐 계단 모양의 디딤판을 만들어보지만 번번히 허물어진다. 동생은 바닥에 주저앉아 양팔로 무릎을 감싸 상처 부위에 입 바람을 불며 바들바들 떨고 있다.

"아무래도 불가능해. 하지만 꼭 빠져나가고 말 거야."

엄마의 가방 속에는 빵 덩어리 하나와 말린 토마토 몇 개, 무화과 몇 개, 치즈 한 조각이 들어 있다. 하지만 형은 엄마 거엔 손대지 말라며 우물 안에서 먹을 것들을 구해 동생에게 건넨다. 손으로 짓누른 개미와 퍼런 달팽이, 이름도 모르는 조그맣고 누런 벌레, 보드라운 뿌리, 깨알만 한 유충을. 그렇게 우물 속에서 여러 날이 흘러간다. 형은 틈만 나면 운동을 한다. 팔 굽혀 펴기, 앉았다 일어나기, 윗몸 일으키기.. 더 이상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계속. 동생은 계속 꿈속을 헤매며 배고픔에 지쳐간다. 비가 내리지 않아 나흘째 물 한 방울 구하지 못하자, 탈수 증상까지 생기며 오줌까지 말라붙어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를 죽이는 상상을, 꿈을 꾸며 갈증과 굶주림에 죽어간다. 그 즈음 폭풍우가 몰아쳐 그들을 살리지만, 폭우는 이틀이나 퍼부어 우물은 습지로 변해버린다. 습기에 노출된 옷이 썩고, 동생은 고온에 혼수상태에 빠지고, 형은 그럼 동생에게 몸을 비벼주고, 안아준다. 

동생은 아무 때나 묻는다.

"우리가 왜 여기 있지?"

"세상이 이런 거야?"

"우리가 진짜 어린애야?"

형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렇게 동생은 차츰 죽어가고, 형은 죽어가는 동생의 목숨을 지키고 있다. 죽음의 놀이에 홀린 아이들처럼. 그런데 대체 이들은 왜 이 우물 안에 갇히게 된 걸까. 왜 우물 바깥에 있는 그들의 부모는 그들을 찾지 않는 걸까. 이들은 과연 다시 세상으로 나갈 수 있게 될까. 누군가 이들을 구해내 줄까. 그때까지 이들이 우물 속에서 살아낼 수 있을까.

여러 날이 지나고 동생의 몸에서 열이 빠져나가고, 기침도, 가래도 멎어 총기가 되살아나고, 기력도 회복이 되지만 고열이 남긴 후유증이 심각하다.

"여기가 어디야" 동생은 주위를 둘러본다.

그 모습이 흡사 어린애를 먹어 치운, 수천 년의 광기에 점염된 어른 같다.

형은 동생에게 분노와 평정, 의지에 대해 가르친다. 내가 죽지 않기 위해서 다른 이들을 죽여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선 분노가 필요하고 그걸 표출시키기 위해선 사흘을 견뎌야 한다고. 그리하여 죽임의 날에는 민첩하고 잔혹하고, 정정당당하게 해치워야 한다고.

중반 이후에 밝혀지는 그들이 우물에 갇히게 된 이유는 충격적이지만, 작품의 후반 동생을 살리기 위한 형의 계획이 시작되면서 보여지는 결말은 더 놀랍도록 섬뜩하다. 에스파냐의사무엘 베케트로 불리는이반 레필라의 작품은 이번에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은유와 상징을 통해 묵직한 주제를 어렵지 않게 풀어내어 마치 우화처럼 읽힌다. 훈족의 왕인 아틸라에 관해 창작된 작품들은 그 동안도 다소 있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직접적인 내용보다는 은유로 스토리에 녹여내어 쉽지만, 어렵게도 느껴진다. 고난을 통해 어린 소년들이 어른이 되어 가는 모습과 그들의 형제애가 보여지다가도, 사회적 약자에 무관심한 사회에 대한 비판.. 그리고 그들을 그렇게 만든 어른에 대한 복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자세한 내용을 밝힐 수는 없지만, 가볍게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만 막판에 벌어지는 상황은 꽤나 충격적이니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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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은 필요 없다
베른하르트 아이히너 지음, 송소민 옮김 / 책뜨락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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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캐딜락. 천천히 우아하게. 하얀 옷을 입은 노부인이 조심스럽게 승객을 모시고 간다. 검은색이 아닌 흰색. 죽음이 아닌 삶. 블룸은 색다르고 싶었다. 경쟁자 장의사들과 차별화되기를 원했다. 하얀 장의차는 완전히 도발이었다. 블룸의 동료 장의사들의 눈에는 죽음과 어울리지 않았다. 애도는 예전부터 항상 검은색이었다.

블룸은 자신의 양부모가 죽던 날, 배에서 운명처럼 만난 남자 마르크와 첫눈에 사랑에 빠져 함께 살게 된 지 8, 이제는 두 아이와 함께 가정을 이루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녀는 여자이지만 장의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고, 그녀의 남편 마르크는 경찰이다. 2년 전부터 함께 살기 시작한 마르크의 아버지 칼 또한 아이들을 사랑하는 할아버지이자 그들의 든든한 가족이다. <분노, 갈등, 슬픔 이런 것은 전혀 없다. 행복하기만 하다. 고통도 없고, 성가시게 구는 고객도 없다. 오늘 아침, 아이들을 말을 잘 듣는다. 블룸에겐 걱정거리가 전혀 없다. 기분 좋은 하루다> 블룸과 마르크는 서로에게 항상 곁에 있어주고, 떠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그리고 8년이 지난 지금도 서로에게 여전히 설레는 멋진 부부이기도 하다. 물론 요즘 마르크에게 고민과 걱정거리가 있다는 것을 블룸은 알지만, 그들은 각자 서로의 일을 집안으로 가져 오는 것을 원치 않는다. 경찰이 하는 일과 장의사가 하는 일이란 마냥 행복한 일만은 아닐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여느 때와 다름없던 그 날, 오토바이를 타고 자신의 일터로 가는 마르크의 모습을 보며 손짓으로 인사하던 그 순간 쾅 하는 굉음이 난다. 커다란 SUV 차량이 순식간에 마르크를 치고 쏜살같이 떠나버린다. <사고. 아스팔트 위에 망가진 오토바이. 축 늘어진 육체. 육체는 바닥에 누운 채 움직이지 않는다. 아무 소리도 없다. 거기엔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 엄청난 굉음을 냈던 모든 것이 다시 고요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갑작스런 사고로 마르크가 그녀의 눈 앞에서 세상을 떠나 버린다.

덱스터 시리즈. 마르크는 그 시리즈를 좋아했다. 밤새 작업실에 앉아 시리즈를 보면서 법의학자가 자신의 여가를 이용해 어떻게 사적인 심판을 하는지를 지켜보았다.....현실이 결코 드라마처럼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르크가 대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알 수 없었다. 웃기지 마. 블룸은 말하며 그의 옆 소파에 앉았다. 덫에 걸려든 악당을 보살피는 경찰,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정의의 사도가 되어 악을 처단하는 경찰, 모든 게 억지로 갖다 붙이는 이야기였다. 복수의 동화, 비현실적인 구성, 시간 죽이기였다.

이제 그 무엇으로도 행복해질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그저 마르크의 추억에만 빠져 있던 그녀는 어느 날, 그의 소지품을 정리하다 구술용 녹음기를 발견한다. 무심코 녹음기를 작동시키자 마르카가 낯선 여성과 대화하는 녹음이 재생된다.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을 겪은 여자와 나눈 20건의 대화 녹음. 말도 안 되는 범죄가 벌어졌고 그것을 홀로 수사하며 그녀를 도우려고 했던 마르크. 세 사람의 납치, 강간, 감금. 수 년 내내 이어진 공포. 그 녹음 파일들을 들으면서 블룸은 자신의 마음을 갉아 먹던 고통과 그에 대한 그리움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어쩐지 모르게 마르크가 다시 살아난 것만 같기도 하고, 마르크와 무언가를 공유한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블룸은 녹음 속 여자를 찾아 마르크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를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렇게 만난 그녀, 둔야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마르크가 죽은 것이 사고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덱스터 시리즈를 좋아하던 남편 마르크가 그녀에게 함께 보자고 말을 할 때마다 그를 비웃었던 그녀가 이제는 사람을 납치하고, 토막 내고 있다. 마치 연쇄 살인범 시리즈에 나오는 것처럼. 게다가 그녀에겐 장의차와 장례식장, 냉동고와 시체 처리실까지 구비되어 있으니 이보다 더 완벽할 수는 없는 조건이다. 둔야가 겪은 끔찍한 일에 대한 분노는 남편 마르크를 죽게 만든 이들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고, 블룸은 둔야가 묘사한 다섯 명의 남자, 사진사, 사제, 사냥꾼, 요리사, 어릿광대를 차례로 찾아 지체 없이 그들에게 복수를 한다. 얼음처럼 차갑게, 이보다 더 단호할 수는 없도록. 복수란 이렇게 해야 한다는 걸 보여주는 정석처럼 말이다. 평범한 여인의 몸으로, 이렇게나 무자비하게, 건장한 남자들을 살해할 수 있는 걸까 싶을 정도로 한 방향을 향해 군더더기 없이 달려가는 플롯은 매우 간결한 만큼 임팩트가 강하다. 블룸이 어떻게 장의사 일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과거가 처음부터 보여지지 말고, 좀 나중에 나왔더라면 이야기가 주는 충격이 더하지 않았을까 살짝 아쉽긴 하지만 나는 이렇게나 심플하면서 군더더기 없는 복수극은 본 적이 없다. 복수란 이렇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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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렁크
김려령 지음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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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괜찮았어?"

"생각보다. 당신은?"

"나도."

그렇구나. 서로 괜찮았다는데 무슨 할 말이 더 있나.

남편과의 마지막 밤, 적당히 친절하고, 적당히 거리를 두었던 남자라 직장생활 편했다고 추억하는 여자. ..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일까. 시작부터 독자들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설정으로 이 작품은 시작한다. 혼인서약을 하고 부부가 되어 일년이나 함께 살며 같이 먹고 마시고, 섹스하고, 민낯을 보여주며 생활을 공유하는 것이 그저 직업이 될 수 있다니. 이 무슨 해괴망칙한 시스템이란 말인가. 그렇게 주인공 정인지는 남편과의 생활을 종료하고 트렁크를 가지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녀는 올해 스물아홉으로 결혼정보회사의 VIP 전담부서 소속으로 근무하고 있다. 웨딩라이프(W&L) VIP 전담부서 NM(new marriage) 는 와이프팀과 허즈번드팀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지는 와이프팀 FW(field wife)로 현장근무를 하고 있다.

물론 인주 또한 처음 W&L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처음 받았을 때는 기간제 배우자라는 것이 체계적으로 변형된 성매매 아닌가 싶었다. 단어만 다르지 4대 보험을 적용 받는 고액 연봉 접대부와 뭐가 다른가 싶었으니까. 하지만 스카우터는 이것이 접대부 렌탈이 아니라고, 회원은 섹스리스도 있고, 그저 조금 다른 결혼을 하고 싶은 사람들일 뿐이라고. 회원들은 각자 필요한 조건으로 기간제 배우자를 선택하고, 일생을 건 결혼이 아니기에 무리수를 두지 않는다. 오직 사랑만 배재 되었을 뿐, 실제 결혼 생활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마치 쇼핑몰에서 필요한 물건을 고르듯이 배우자를 골라서 함께 사는, 너무도 삭막한 삶. 대신 부부싸움이나 이혼, 아이, 육아 등의 과정이 전혀 필요 없으니 그만큼 피곤하지 않고, 담백한 삶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 저를 스카우트하는 거예요?"

"화류계 기질 없이 예쁘잖아요."

한번쯤 결혼해보고 싶은 여자. 그녀는 내가 그 범주에 속한다고 했다. 이제는 배우자도 임대하는 세상이 됐구나. 고액의 연회비와 혼인성사자금을 지불하는 NM 회원들에게, 이런 아내는 어떠신가요? 하고 내미는 기호품이 된 기분이었다. 몰랐고, 끝까지 몰라도 됐을, 모르는 게 더 나았을 그런 세계가, 내 손을 그렇게 잡았다.

인지는 네 번째 결혼을 막 끝냈고, 전 남편으로부터 재결합 신청을 받아 다섯 번째 결혼을 시작한다. 별다른 일이 없었더라면 그녀는 다섯 번째 결혼을 지나, 여섯 번째, 일곱 번째 결혼을 하면서 트렁크를 들고 다니는 삶을 계속해서 이어갔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친구 시정의 부탁으로 잠깐 만났던 엄태성이라는 남자가 그녀의 인생에 등장한 것이다. 그가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아 단칼에 그를 거절하고 모진 말도 해봤지만, 그는 인지에 대해 거의 집착에 가까운 호기심을 품고 거의 스토킹에 가까운 행동을 하다 결국 남편과 함께 사는 집까지 찾아오기에 이른다. NM보안팀이 보낸 구조대가 그를 제압해 데려가서 격리시켜버린다. 그녀는 남편의 도움을 받아 불법으로 납치되어 기도원에 감금되어 학대 받던 그를 풀어주지만, 그는 그녀의 인생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지 않는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3포 세대를 지나 내 집 마련과 인관 과계가 더해진 5포 세대, 그리고 최근에는 꿈과 희망까지 포기한다는 7포 세대라는 단어까지 등장했다. 결혼할 생각이 없는, 아니 사는 게 결혼을 생각할 여력이 없는, 비혼주의자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요즈음 김려령의 이번 신작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사실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떠밀리듯 결혼을 결심하게 되기도 하고, 적절한 사람이 없는 경우 결혼을 해야 하는데 못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던 예전 세대에 비해, 하기 싫으면 하지 않겠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요즘 세대가 더 자유로운 건지는 글쎄 단언하기 어려울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주인공 인지도 엄마로부터 남자친구를 거절 당하지 않고, 학창 시절 친했던 친구의 자살이란 것도 겪지 않았더라면, 그렇다면 평범한 이삼 십대처럼 일반적인 결혼을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이혼 후 각각 기간제 계약결혼으로 배우자를 찾으면서도 친구처럼 지내는 정원과 서연, 젊은 오빠에게 빠진 사랑지상주의자 할머니, 특별한 직업 없이 취미 활동만 하며 소개팅 했던 인지를 스토킹하는 태성, 인지를 몰래 사랑하고 있는 동성애자 친구 시정... 각자가 선택한 삶의 모습은 이리도 다르다. 그런데도 모두 획일적으로 같은 모습의 사랑을 해야 하고, 비슷한 모습의 결혼을 해야 한다는 건 어쩌면 너무도 슬프다는 생각도 든다. 김려령 작가가 이번에 선택한 것은 너무도 파격적인 소재이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는 우리네 삶과 사랑에 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보편성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결국 인지가 트렁크를 다시 싸게 될 일이 또 생길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다음 번에는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어디론가 떠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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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황금방울새 - 전2권
도나 타트 지음, 허진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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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그저 초반 몇 페이지만 읽어도 결판이 난다. 이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하는지 아닌지. 이 책을 여러 번 읽어야 하는지, 대충 한번 읽어야 하는지 말이다. 도나 타트의 <황금방울새>는 명백히 전자이다. 나는 이 책의 초반 백 여 페이지를 여러 번 계속해서 읽었다. 거기까지의 내용이라고 해 봤자, 고작 미술관에서 사고가 나는 것까지 정도 밖에 없다. 그런데도 나는 뭔가에 홀린 듯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못하고 이 장면들을 읽고 또 읽느라 이야기의 진도를 한참이나 넘어가지 못했다. 너무도 유려한 문장은 마치 물이 흐르는 듯 자연스러웠고, 장면들이 그림처럼 눈앞에 보이는 것 같은 묘사는 책장에서 눈을 뗄 수가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소년과 엄마가 함께 도로를 걷고, 미술관에 들어서고, 그림을 감상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그리고 사고가 난 직후 어린 소년의 눈을 통해 보이는 황폐한 풍경들은 끔찍한 사고라는 자각이 들지 않을 만큼 몽환적이고 매혹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엄마의 죽음은 내 삶을 전과 후로 가르는 표시였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인정하려니 참 쓸쓸하지만, 나는 엄마가 날 사랑했던 것만큼 나를 사랑하는 듯한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엄마와 함께 있으면 모든 것이 살아났다. 엄마가 비추는 마법 같고 연극 같은 빛 때문에 엄마의 눈을 통해서 보면 무엇이든 평소보다 밝게 보였다.

14년 전 4 10일 뉴욕, 지극히 평범한 날이었지만 이제는 녹슨 못처럼 달력 위로 불룩 튀어나와 있는 그날. 지난밤에 폭풍이 불고 큰비가 내려 상점가에 물이 들어차고 지하철 역 두 곳이 폐쇄되었던 날, 비를 품어 부푼 구름들이 마천루 위 높은 하늘에서 빠르게 움직이고, 축축하고 부드러운 봄바람이 불던 그날. 당시 열세 살이었던 테오가 학교에서 정학을 받는 바람에 엄마와 함께 학교로 가는 길이었다. 학교의 회의만이 참담한 걱정거리였던 그때, 어린 소년에게는 곧 다가올 어두운 미래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그들은 택시를 탔지만 곧 택시 에서 나는 악취 때문에 엄마가 멀미를 하고 중간에 내려 걷게 된다. 그러나 하늘은 급속도로 흐려지고 어두워지더니 차가운 비가 쏟아져 내리며, 거대한 돌풍이 몰려왔고, 거리의 사람들은 신문과 서류 가방으로 머리를 가리고 비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 미술관 현관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들 역시 비가 멎을 때까지 미술관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기로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달라진다.

그림을 보고 나가기 전, 엄마는 얼른 가서 <해부학 강의>를 한 번만 더 보고 오겠다고 말한다. 테오는 전시실에서 만났던 마음을 빼앗긴 소녀에게 말을 걸 기회다 싶어 엄마와 헤어져 기념품 가게에서 보기로 약속을 한다. 그렇게 빠른 걸음으로 전시실을 지나가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사람들이 양팔을 들고 비명을 지르고 뛰쳐 나오더니, 엄청나게 큰,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이 전시실을 뒤흔든다. 폭탄 테러로 미술관에 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테오는 그곳에서 결코 엄마를 찾을 수 없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스스로에게 무엇이 옳은지 어떻게 알까? 우리는 반박의 여지없는 상투적인 문화를 어린 시절부터 계속 주입받는다. 윌리엄 블레이크부터 레이디 가가까지, 장 자크 루소부터 잘랄라딘 무함마드 루미까지, <토스카>부터 <로저스 씨의 동네>까지-상류층부터 하류층까지-이상하게도 똑같이 받아들여지는 메시지를 전한다. 정신과 의사와 진로 상담사, 디즈니 만화의 공주들은 모두 답을 안다. "너 자신을 잃지마.""네 마음을 따라가렴."

하지만 내가 정말로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은, 신뢰할 수 없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몇 달 전 엄마와 테오를 버리고 떠난 아빠는 돈도, 양육비도, 연락 받을 주소도 남기지 않은 채 갑자기 사라져버렸고, 엄마와 단 둘이 살았던 테오에게 엄마의 죽음이란 아마도 세상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엄마가 죽고 난 이후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은 (전부 자신의 선택이었으므로) 자신의 잘못이었지만, 그는 엄마를 잃어버린 순간부터 자신의 삶을 이끌어줄 지표가 사라져 버렸다고 말한다. 자신을 더 행복한 곳으로 이끌어줄 지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우러져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줄 지표 말이다.

사고 현장에서 그는 죽어가는 노인의 부탁으로 얼결에 그림 하나를 가지고 오게 되고, 그것은 그 이후 그의 인생은 그가 의도치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세상은 사라진 그림 <황금방울새>를 추적하기 시작하고, 그는 처음에는 그림을 돌려주려고 했지만 기회를 놓치고, 결국에는 자신이 평생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림을 자신의 것이라 여기게 되어 집착하게 된다. <황금방울새>는 네덜란드 델프트의 화약창고 폭발사고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카럴 파브리티우스(1622~1654)의 실제 그림이라고 한다. 그림에서 시작한 미스터리는 소년의 성장담과 연결되고, 미술관에서의 사고 이후 더 이상 평범하게 살 수 없게 된 소년이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매혹적인 풍경과 더불어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아마존 킨들의 완독률 98.5프로라는 압도적인 수치가 괜히 나온 게 아니었구나 싶을 만큼 쉽사리 책장을 놓을 수가 없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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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라는 남자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최민우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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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살 오베,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삿대질을 하고, 다그치고, 노려보는 남자. 평생 자명종 없이 6 15분 전에 눈을 떴고, 40년 가까이 매일 아침마다 정확히 똑같은 양의 커피를 내려 마시고, 항상 동네 시찰을 하러 거리로 나가는 남자. 뭐든 간에 발길질을 하면서 물건들의 상태를 점검하고, 분리수거가 제대로 되지 않은 쓰레기통을 차며 욕설을 내뱉는 남자. 그렇게 까칠한 그는 여느 때처럼 동네 시찰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커피를 마시고 전화국 가입과 신문 구독을 취소한다. 수도꼭지며, 문손잡이를 수리하고, 다락방과 헛간에 있는 도구들을 정리한다. 그리고 라디에이터, 커피 여과기, 전등을 모두 꺼버린다. 그는 지금 자살을 하려는 중이다.

"여유를 좀 가지세요." 그들은 그에게 그렇게 말했다. 컴퓨터로 일을 하고 제대로 된 커피를 마시길 거부하는, 건방이나 떨고 앉아 있는 수많은 서른한 살짜리들이. 아무도 트레일러를 후진시킬 줄 모르는 이 사회 전체가. 그러더니 자기한테 더 이상 당신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왜냐하면 한 세기의 3분의 1을 한 직장에서 보낸 그는 며칠 전 조금 느긋하게 사는 것도 좋을 것 같다며 해고를 당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인생에서 유일한 친구이자, 그의 편이었던 아내가 죽은 지 벌써 6개월이 지난 참이었다. 사실 아내의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죽음을 실행했었어야 하지만, 그 당시 그에게는 챙겨야 할 직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살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사방에서 출근하지 않는다면 세상이 어떤 꼴이 되겠냐고 생각한 그는, 아내가 금요일에 죽고, 일요일에 장례를 치르고, 바로 다음 월요일에 출근했던 것이다. 고지식하게 보일 정도로 그렇게 세상에 성실했던 그지만, 결국 나이에 밀려 직장에서 해고 당하고 말았지만 말이다. 물론 그도 그의 인생이 이렇게 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내가 자신보다 먼저 죽어 그의 삶이 다 멈춰 버릴 거라고, 그 와중에도 직장에 출근했지만 나이가 많다고 해고 당할 거라고는 몰랐을 것이다.

이제 그는 책임져야 할 일도 없고, 자신이 보살펴야 할 가족도 없고, 세상에 낙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상태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죽음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 장의사에게 돈도 내고, 교회 묘지에 묻힌 아내 옆에 자기 묏자리를 만드는 것도 동의하고, 변호사를 불러 유언장도 쓰고, 청구서도 다 지불하고, 융자도 빚도 없고, 집에 이사올 누군가를 위해 집 수리도 끝냈고, 신문 구독도 끊고, 하물며 설거지 거리들도 모두 다 씻어놨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저 평화롭게 죽는 것 뿐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진지하게 자살을 하려던 그 순간, 뭔가 길게 찌익하고 긁히는 소리가 들린다. 어떤 머저리가 자동차를 몰다가 오베의 집 외벽을 긁어 버린 것이다. 화가 나서 커튼을 열어 젖히자, 키 크고 비쩍 마른 금발의 사내와 검은 단발 머리의 임산부를 발견한다. 그의 집 맞은편에 위치한 오베의 집과 똑같이 생긴 주택에 이사온 아이가 딸린 외국인 가족이었던 것이다.

"아저씨 웃겨요!" 세 살배기가 웃었다.

오베는 세 살배기를 보고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 저기, 자기를 너무 못되게 보이려 하진 마세요."

그렇게 이웃집에 이사온 이상한 외국인 가족 덕분에 죽는 것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오베. 그는 매번 그들에게 휘말려 자신의 자살을 하루 뒤로, 그 다음 날로 계속 미루게 된다. 독특한 이웃들과 성가신 고양이와 그가 계속 싸워온 하얀 셔츠들은 그가 아내 곁으로 가는 것을 매번 방해한다. 항상 규칙적이고, 변하지 않는 일상을 사랑했던 그인데 새로운 이웃이 이사온 뒤로 단 한 순간도 평화롭지 못하게 시끌 벅적 어수선해지고 만다. 오베가 6개월 동안 준비했던 그 계획은 그가 시도할 때마다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방해하는 덕분에 번번이 제대로 시작도 해보지 못한다.

매 순간 세상 전부와 싸우고 있는 듯한 오베는 동네에서 지나가다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은 까칠한 이웃이다 가도, 아내를 잃어버리고 종일 그녀를 그리워하는 외로운 노인으로 보이기도 한다. 누구든 걸리기만 해봐 라는 식으로 버럭버럭 아무한테나 소리 지르고 화를 내지만, 그 모습이 마냥 미워 보이지 만은 않아 더 재미있는 캐릭터이다. 이야기는 자살을 하려는 오베와 그를 방해하는 이웃들의 현재와 그가 아내를 만나게 되고 그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과거와 교차되어 진행된다. 아내를 비롯해 사람들은 그를 보며 세상 모든 것에 시비를 건다 말하지만, 하지만 그는 시비 따위를 거는 게 아니라 그저 옳은 건 옳은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에게 세상은 흑과 백. 자신이 정의라고 믿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내가 챙겨줘야 할 사람과 상관없는 사람들,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과 자신이 동의할 수 없는 일로 명확하게 구분된다.

"날 속이면 안 돼요, 여보. 아무도 안 볼 때 당신의 내면은 춤을 추고 있어요, 오베. 그리고 저는 그 점 때문에 언제까지고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당신이 그걸 좋아하건 좋아하지 않건 간에."

오베의 죽은 아내 또한 오베 만큼이나 독특하고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사람들이 오베와 오베의 아내가 밤과 낮 같다고 말할 정도로, 그들은 전혀 다른, 상반된 사람들이었다. 오베 조차 그녀가 왜 자기를 택했는지 결코 이해하지 못했을 정도로 말이다. 오베의 아내는 음악이나 책이나 이상한 단어 같은 추상적인 것들을 사랑했고, 오베는 드라이버와 기름 여과기처럼 손에 쥘 수 있는 것들로만 채워진 남자 였다. 따라서 오베의 친구들 또한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더 나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었는데, 왜 오베 처럼 심술 궂은 사람을 만난 건지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정의와, 페어플레이와, 근면한 노동과, 옳은 것이 옳은 것이 되어야 하는 세계를 확고하게 믿는 남자라는 걸 한눈에 알아보았던 것이다. 오베가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했듯이 그렇게 서로는 서로를 알아본 것이다.

"우린 사느라 바쁠 수도 있고 죽느라 바쁠 수도 있어요, 오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해요."

오베와 그의 아내가 만나게 된 사연, 그리고 그의 아내에게 사고가 생기고, 이후 오베가 세상 전체와 싸워야 했던 이야기들은 현재의 까칠하고 독불 장군 같은 그의 성격에 설득력과 타당성을 부여해주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밉지만 짠한, 무섭지만 뭉클한 이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이렇게 유쾌하면서도 울컥하는 기분이 들게 하는 작품은 너무 오랜만이라 어느 연령대의 독자라도 모두 만족시킬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캐릭터, 데뷔작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의 노련한 스토리, 그리고 입에 척척 달라붙는 음식처럼 눈에 쏙쏙 들어오는 문장들은 잠시도 한 눈을 팔 수 없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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