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한 십자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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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동물 장례사로 일하고 있는 나카하라는 형사로부터 헤어진 전부인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그들 부부가 헤어진 원인은 20년 전, 빈 집에 침입한 강도로부터 딸인 미나미가 죽게 된 사건 때문이었다. 이혼 후 그들은 서로 연락하지 않은 채 각자의 삶을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당시 사건 조사를 했던 형사로부터 연락이 온 것이다. 당신의 전 부인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고. 나카하라의 딸과 아내 사요코가 모두 아무 이유 없는 우발적인 범행 동기로 살해당했다. 이 무슨 우연의 일치일까? 혹시 누군가 그에게 원한을 품고 저지른 사건일까? 하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숱한 사건과 사고 모두, 우연히, 아무 이유 없이, 단지 그 순간 그 자리에 있었던 이유로 벌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 그렇다면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 작품에서 독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은 무엇일까?

사형은 정의의 실현인가, 개인적 복수인가?

범죄자는 죄를 뉘우치고 갱생할 수 있는가?

사요코를 죽인 범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수를 한다. 일흔 살 정도된 백발이 무성하고 야윈 노인이었고, 사요코의 가족들과도, 나카하라와도 전혀 일면식이 없는 노인이었다. 범행 동기에 대해서는 돈이 필요해서, 그저 우발적으로 저질렀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의 사위로부터장인의 범행을 용서해달라는 편지가 도착한다. 딸도 아니고 사위가 피해자 가족한테 용서를 구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나카하라는 그녀의 장례식에 조문을 가고, ‘사요코는 최근까지 도벽증 환자들에 대해 취재하는 일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아내가 가장 마지막에 쓴 원고를 읽게 되고, 그녀의 주변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어딘가 석연치 못한 의문점을 발견하게 된다.

"사요코가 친언니처럼 이야기를 들어준 사오리의 고향이 후지노미야이고, 후미야의 고향도 후지노미야. 그 후미야가 근무하는 병원의 안내장을 사요코가 가지고 있고, 후미야가 상담실에 나온 것이 사건이 일어나기 사흘 전. 또한 사건이 일어나기 열흘 전에는 사요코가 수해를 촬영하러 가고, 사오리의 방에도 수해 사진이 걸려 있고."

"취재하기 위해 당신을 만난 사요코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길거리에서 살해당했다, 그 범인은 옛날에 당신이 사귀었던 남자의 장인이다....... 난 말이죠, 이게 단순한 우연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아니, 나만이 아닙니다. 누가 봐도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죠. 사오리 씨, 혹시 아는 게 있으면 말씀해주시겠어요?"

 

전혀 상관없어 보이던 의문점들이 하나씩 모여서 거대한 퍼즐이 완성된다. 퍼즐의 조각을 맞추는 것은 책을 읽는 독자의 몫이므로 자세한 줄거리를 나열하는 것은 사실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던지는 질문이다. 과연 사람을 죽인 범인에게 어떤 처벌을 내리는 것이 마땅한 것인지 말이다. 사실 극중 히루카와 처럼 사형 판결을 받았으나 사형을 형벌로 여기지 않고 주어진 운명으로 받아들여, 아무런 반성도 없이, 유족에게 미안한 마음도 없이, 다만 사형이 집행될 날을 기다리는 범죄자들이 숱하게 많은 것이다. 혹은 사형 선고를 받지 않더라도, 수감되어 있는 동안 진정한 의미의 반성에 이르지 못했기에 출소 후에 또 비슷한 범죄 행각을 벌이게 되는 재범들이 많은 것일 테고 말이다. 징역의 효과가 거의 없다는 것은 재범률이 높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니 갱생했느냐 안 했느냐를 완벽하게 판단할 방법이 없다면, 갱생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형벌을 생각해야 하지 않느냐, , 사람을 죽이면 사형에 처한다는 형벌을 내리면, 그 범인은 다시는 그 누구도 죽이지 못하는 것이 되니 말이다.

"내 딸을 죽인 사람은 히루카와 지만, 그를 살려서 다시 사회로 돌려보낸 것은 국가이다.

, 내 딸은 국가에 의해 살해된 것이다."

강력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사형제도 존폐에 관해서 논란이 일고는 한다. 갈수록 흉악한 범죄들이 많아지니, 사람들 모두 보다 강력한 처벌로 재범 방지와 유사한 다른 사건을 막고 싶어한다. 물론 국가가 사람을 죽일 권한은 없고, 사법부가 오판을 할 가능성도 있으며, 범죄자의 인권도 보장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사형제도의 법적 근거는 헌법에 기초한 것이고, 그 법적인 근거를 믿지 못한다면 애초에 사법부가 존재하는 의미가 없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형폐지론자들은 죄값을 목숨을 빼앗는 걸로 치르는 것이 피해자 가족들에게 보상을 하는 것은 아니므로 정의실현이라고는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억울한 누명을 쓴 이들이 있을 경우 사형이란 결국 또 다른 피해자를 낳는 것이고, 사형제도고 존속이 된다고 하더라도 강력범죄가 근절되는 것은 아니므로, 굳이 국가의 이름으로 살인을 행해야 할 그 어떤 이유도 없다고 말한다. 반대로, 사형존치론자들은 억울한 사형이 문제가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수사하는 과정에서의 문제이지 사형제도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고 말한다. 피해자 유족들도 물론 알고 있다. 살인범이 죽는다고 해서 죽은 가족이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니라는 걸. 하지만 죄에 대한 응당한 대가가 치뤄 지지 않고, 법이 피해자를 보호하지 않는다고 느끼면 그들은 과거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수 십 년간 매일, 매 시간, 죽은 가족을 떠올리며 그리워하는 그들에겐 내일이 없으니까 말이다. 사형수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그들은 증오하는 감정을 흘려 보내고, 슬픔과 회환, 안도의 감정과 함께 미래를 볼 수 있게 된다는 말도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는 간다.

사형제도는 무고한 국민을 국가가 합법적으로 살해하는 일이 될 수도 있고, 극적인 정의 실현으로 인해 이후 벌어질 각종 범죄들에 대한 예방책이 될 수도 있다. 사실 가해자의 인권에 대해서는 떠들면서, 정작 피해자의 보상이나 인권에 대해서는 언론이든 경찰 측이든 배려가 그만큼 되고 있지 못한 게 현실이니 말이다. 그래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무조건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사형으로 판결이 나는 것도 아니고, 죄질에 따라서 합당하게 판결이 나는 것이므로, 사형제도는 정의의 실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범죄자가 뉘우치게 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혹시 모를 개과천선만을 기다리며 피해자가 받아야 할 상처와 고통, 그리고 사회적 혼란을 묵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살인자를 그런 공허한 십자가로 묶어두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사람을 죽인 사람의 반성은 어차피 공허한 십자가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 의미가 없는 십자가라도, 적어도 감옥 안에서 등에 지고 있어야 되지 않을까. 반대로 교도소에 들어가도 반성하지 않은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텐데,  교도소에서 반성도 하지 않고 아무런 의미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과 구속은 되지 않았지만 현실 속에서 다른 사람을 구하면서 사는 것, 무엇이 진정한 속죄라고 할 수 있을까? 히가시노 게이고는 극중 인물의 말을 빌려 처음에는 사형 제도가 피해자 가족들의 마음을 풀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말하다, 결국에는 사형을 넘어서 진정한 처벌의 의미에 대해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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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이야기꾼들
전건우 지음 / 네오픽션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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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 야화에서 천일 하고도 하룻밤 동안 셰헤라자데가 샤리아 왕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모두 기억할 것이다. 왕은 왕비의 부정에 충격을 받아 매일 밤 처녀와 잠자리를 하고 날이 밝으면 그 처녀를 죽였는데, 셰헤라자데는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왕에게 밤마다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매일 밤 이어지는 그녀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흥미진진하고, 에로틱하고, 달콤하고, 자극적이어서 왕은 그녀를 죽일 수가 없게 된다. 그녀는 밤마다 이야기를 끝맺지 않고 멈췄기 때문에 나머지를 듣기 위해 왕은 하루하루 처형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야기가 남은 목숨이었던 셰헤라자데의 스토리만큼이나 매혹적인 이야기꾼들이 등장하는 작품을 만났다. 왕에게 저당 잡힌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 그녀가 풀어놔야 했던 이야기 보따리만큼이나 완벽하게 재미있고, 오싹하고,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작가는 맛깔 나는 한 상 차림으로 차려낸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끔찍할 정도로 낡은 집, 목련 흉가에 '월간 풍문'의 두 기자가 취재를 목적으로 도착한다. '월간 풍문'은 세상에 떠도는 온갖 해괴한 이야기, 귀신, 유령, 흡혈귀, 심령사진, 도시괴담, 연쇄살인마, 돌연변이, 미신 등을 주로 다루는 잡지이다. 그야말로 황당하고 무서운 이야기, 끔찍하면서도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는 잡지라고 할 수 있겠다. 목련 흉가에서는 이름도 나이도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밤의 이야기꾼들'이라는 기괴한 비밀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매년 한 번씩, 같은 날 저녁에 멤버가 모이고, 서로의 이름을 묻지 않는 이들이 모여, 이야기를 하되 반드시 자신과 관련 있는 이야기를 한다고 한다. 목련 흉가에 깃든 귀신들을 몰아내겠다며 호언장담하던 퇴마사 한 명이 자살한 이후로 근처에서 유독 실종 사고가 많다고 하는 장소라.. 오싹한 분위기를 풍기며 모임이 서서히 시작된다. 그날 모인 사람은 모두 여섯이었고, 사회자인 노인과 이야기를 들려줄 다섯 명이 한 명씩 돌아가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래는 밤의 이야기꾼들 모임의 선서 이다. 그들은 함께 이 내용을 복창하고 모임을 시작한다.

 

"우리는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의 이야기는 살아 있다. 우리가 곧 이야기다"

 

첫 번째 이야기 <과부들> 에서는 고집과 오만을 갑옷처럼 두르고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괴롭히는 남자 K가 등장한다. K는 자신이 수학강사로 출근하는 학원의 접수창구 경리였던 S와 불륜 관계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녀가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만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문자에도 답이 없어 그녀의 집을 찾아가보지만, 역시 찾을 수가 없고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자 아내가 그에게 할 말이 있다며 부른다. 평소에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일이 잦던 아내가, 어머니에게 듣게된 이야기의 실체는 생각보다 무시무시하다. 마치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에서나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판타지가 느껴지기도 하고, 어쩌면 정말 그럴 지도 몰라 하는 공감이 들면서도 소름이 끼치는 이야기이다.

 

두 번째 이야기 <도플 갱어> 자신의 도플 갱어를 만나게 되고 상대방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성형중독에 빠진 한 여인이 등장한다. 발견하면 상대방을 죽여야 하는 도플 갱어를 만난 것이 망상인지, 누군가와 닮았다는 것에서 도망치려고 끊임없이 성형수술을 하는 것 자체가 정신 질환인지는 글쎄 각자 판단해야 하겠지만, 이 역시 결말은 매우 오싹하다.

 

"이곳에서는 그 어느 것보다도 이야기가 우선입니다. 이야기가 진리이고, 이야기가 곧 생명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이 절도범이건, 희대의 살인마건,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건 상관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 이야기 <, 스위트 홈>은 언뜻 공포 영화 <숨바꼭질>을 보았을 때의 으스스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새 집에 이사를 가면서 기존 주인과 만나게 되는데, 그는 빚더미에 올라서 결국 집을 나가게 됐던 사람이었다. 집을 지켜내지 못한 한 가장의 지독하리만큼 섬뜩한 광기는 영화의 한 장면만큼이나 섬뜩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가 결국 새집에서 벌이게 되는 그 일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만큼 충격의 여파가 크다.

 

네 번째 이야기 <웃는 여자>에서는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이웃들에게마저 왕따를 당해, 세상 유일한 친구 피에로와 함께 동물 조립을 하는 한 여자가 등장한다. 미친 아빠에 대한 소문 덕분에 학교에서도 늘 외톨이였던 그녀는 학교 친구들에게 자주 괴롭힘을 당했고, 그걸 해소하는 걸로 점점 더 동물들을 학대하는 데에 집착하게 된다. 왕따가 만들어낸 광기는 생각보다 끔찍하지만 슬프다.

 

"요사스러운 것들은 말이야, 사람의 두려움을 먹고 사는 거야. 우리가 무서워하면 할수록 그것들은 좋아서 날뛰지. 그러니까 지금은 정신 단단히 차리고 살아 돌아갈 궁리만 하자고. 정신만 바짝 차리면 눈 귀신인지 뭔지도 우리를 어쩌지 못할 거야. "

 

다섯 번째 이야기 <눈의 여왕> 은 오노 후유미의 <흑사의 섬>을 떠올리게 한다. 외지인에게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마을에서 벌어지는 눈의 저주와 맹목적인 미신의 무시무시함. 사랑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던 한 연인, 수와 설의 이야기는 안타깝게 펼쳐진다.

 

이렇게 총 다섯 가지 이야기로 완성된 옴니버스 구성의 이 작품은 '월간 풍문'의 취재 시리즈로 이어져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완성도 있고, 흡입력 있는 단편 공포물의 진수를 선사한다. 지루할 틈 없이 전개되는 스토리 전개는 물론이고, 단편이지만 여운을 남기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전건우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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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
양국일.양국명 지음 / 네오픽션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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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나무로 둘러싸인 초록의 숲, 사람들은 그곳을 바람의 숲이라고 부른다. 아주 먼 옛날 나무꾼이 전나무 몇 그루를 베다가 땔감으로 사용했는데, 화가 난 숲의 정령이 하얀 여우를 보내 사내의 일가족을 모두 죽이게 한다. 간신히 혼자 목숨을 건진 사내는 복수를 꿈꾸며 산에 올랐지만 가족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허기에 피로까지 겹쳐 숲 한가운데서 쓰러진다. 그때 얼굴이 하얀 여인이 나타나 그를 구해주고, 정신을 차린 사내는 여인에게 반해 그녀와 함께 살기로 한다. 행복한 나날이 이어지지만, 어느 날 그는 여인이 자신의 가족을 몰살한 여우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하지만 사내는 이미 단검 하나조차 들 기력이 없는 노인이 되어 있었고, 여인은 여우의 모습으로 돌아가 숲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여우는 바람이 만들어낸 환영이고, 사내는 바람에 홀려 숲에서 시간과 기억을 모두 잃어버려, 사람들은 그 숲을 망각의 숲이라고도 불렀다. 이런 전설을 가지고 있는 전나무 숲을 지나 산꼭대기에 자리한 사립 명문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그곳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 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 10시 이후에는 밖으로 나다니지 않는 게 좋아요. 기숙사 복도를 활보하는 유령들이 있거든요."

학생주임은 여전히 가면을 뒤집어쓴 것 같은 딱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치켜 올라간 자줏빛 입술 사이로 살짝 드러난 송곳니가 들짐승처럼 날카롭게 보였다. 학생주임에 대한 두려움과 반감이 최고치까지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번듯함과는 거리가 먼 불량학생 태인은 KM문화예술고등학교로 전학을 온다. 20여 년 전에 세워진 명문 사립 고등학교로 전국에서도 명문대 진학률로는 십 수년간 10위 안에 들 정도로 유명한 학교라고 한다. 교장을 제외한 모든 교사들이 여교사였고, 각 학년에 두 학급씩, 전교생은 150여 명에 불과했다. 학생들은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으며, 까다로운 교칙들이 많아, 외부의 법과 질서가 통용되지 않은 독특한 학교라고 하겠다. 큰 키에 다부진 체격을 지니고, 맞춤복 같은 스커트 정장을 입고는, 마치 가면처럼 느껴지는 미소를 가지고 있는 학생주임부터,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교장까지 전부 마음에 안 들었지만, 태인은 그 동안 여러 학교를 전전하면서 고등학교만은 졸업해야 했기에 우선 학교생활에 익숙해지려고 한다.

태인은 우연히 기숙사 방 천장에 숨겨둔 미지의 노트를 발견하게 되고, 그것이 자신이 오기 전에 실종된 은호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태인은 같이 방을 쓰는 지원에 의해 미스터리 소설 연구회 이니그마에서 클럽 활동을 하게 되고, 그들은 악마의 소굴인 학교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한 클럽이었다. 실종된 은호 역시 이니그마의 회원이었고, 학교에서 마주치는 숱한 수상 함들과 유미라는 아이에 대한 호기심으로 태인 역시 그들과 뜻을 함께 하게 된다.

"그러니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밖에 없는 거야. 각자 머릿속에서 나름대로의 사실을 만들어가는 거지. 죽었다는 소문이 떠돌 만도 해. 이런 곳에서 지내다 보면 가장 발달하는 것 중 하나가 상상력이거든. 이곳은 몸보다 머리를 쓰기에 아주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어. 몸을 쓸 일은 거의 없어. 움직여보려 해도 금방 한계에 부딪히거든. 결국 학교 안에서만 뱅뱅 돌게 되니까. ..모종의 사건이라도 발생하면 상상력의 촉수가 마구잡이로 뻗어나가는 거야."

졸업생들과의 정기적인 만남이라는 명목으로 한 달에 두 번씩 학교를 방문하는 손님들의 정체, 뭔가 반항을 하려고 하거나, 튀는 행동을 하려는 아이들에게 어김없이 찾아오는 학생 주임의 면담 요청, 그리고 면담 이후 갑자기 기존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학생들, 은호의 일기장을 통해 드러나는 학교에서 벌어지는 수상한 상황들은 긴장감을 부여해준다. 학창 시절 친구들 사이에서 한 번쯤은 유행했을 것 같은 괴담처럼 어느 학교에나 존재할 법한 무서운 전설은 생각만큼 무섭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공포소설로서 어느 정도의 분위기는 잘 자아낸 것 같다. '악령'이라는 무시무시한 제목에서도 '상상했는가? 함부로 상상하지 말지어다'라는 카피에서도 꽤 큰 기대를 했던 탓인지, 아니면 어릴 적부터 공포 소설과 영화를 너무 많이 보아온 탓에 단련이 되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무섭지는 않았다. 그래서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공포를 제공하지만, 혹시 우리가 잊고 살던 학창 시절의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오싹한 이야기의 세계로 한번 빠져들어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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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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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어느 날, 파리의 거리를 지나던 알랭은 배꼽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차림의 아가씨들을 보며, 배꼽에 여성의 매력이 집중되어 있다고 보는 남자의 에로티시즘에 대해 생각한다. 뤽상부르 공원을 거닐던 라몽은 샤갈의 그림이 전시된 미술관 매표소에 늘어선 줄을 보고는 샤갈 전을 포기하고 공원을 산책한다. 다르델로는 자신의 몸에서 발견된 의심스러운 증상들이 암 때문이었는지 결과를 들으러 병원에 가고, 그가 죽음을 초대할 일은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는 우연히 만난 직장동료 라몽에게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거짓말을 한다. 샤를은 자고새 사냥에 관한 스탈린의 농담 이야기를 꺼내며 이를 인형극으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꿈을 말한다.

 

"우리는 이제 이 세상을 뒤엎을 수도 없고, 개조할 수도 없고, 한심하게 굴러가는 걸 막을 도리도 없다는 걸 오래 전에 깨달았어. 저항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뿐이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유명한 (물론 이 작품 뿐만 아니지만) 밀란 쿤데라의 신작 소설이 14년 만에 나왔다. 알랭, 칼리방, 샤를, 라몽 등 네 주인공을 중심으로 소소한 이야기가 진행된다. 겨우 150페이지도 안 되는 짧은 분량이라 페이지는 금방 넘어가지만, 삶의 본질을 탐구하는 끊임없는 사유는 책을 여러 번 읽게 만들어준다. 에로티시즘의 상징으로 꼽은 여자의 배꼽 이야기에서 시작해 배꼽에서 태어나지 않아 성()이 없는 천사, 가볍고 의미 없이 떠도는 그 천사의 깃털, 그리고 스탈린의 농담, 그에서 파생된 인형극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파리에 사는 네 남자 알랭, 칼리방, 샤를, 라몽을 중심에 놓고 스토리가 이어진다. 특별한 사건이나 일관된 플롯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인물들이 펼쳐내는 여러 상황과 다양한 사유가 끊임없는 재미를 준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스탈린의 아들 이야기가 등장한 데 비해, 이번 '무의미의 축제'에는 스탈린 자신이 등장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강조했던 삶의 일회성과 우연성은 '무의미의 축제'에서 무의미라는 주제로 연결되며, 사실상 같은 말의 되풀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니 나처럼 쿤데라의 작품 중에 겨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밖에 읽어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번 신작에서 충분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는 얘기다.

 

"오래 전부터 말해 주고 싶은 게 하나 있었어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의 가치에 대해서죠.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쿤데라의 나이를 감안하자면 (어쩌면) 그의 마지막 소설이 될지도 모를 이번 작품은 농담이 거짓말로 받아들여지는 시대에 관한 우화다. 다르델로는 자신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거짓말을 한 뒤 묘한 희열을 느낀다. 거짓말을 한다는 건 보통 누군가를 속이거나 어떤 이익을 얻기 위해서인 데, 생기지도 않은 암을 꾸며낸 것은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그 의미 없음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에 비해 스탈린의 농담은 `역겨운 거짓말`로 받아들여진다. 사냥을 간 스탈린이 자고새 스물네 마리를 발견하는데, 탄창이 열두 개밖에 없다. 열두 마리를 쏘아 죽인 다음 탄창을 가지러 13킬로미터를 왕복하는데, 돌아와 보니 남은 열두 마리가 그대로 있다. 이 경험을 스탈린이 자신의 동지들에게 이야기해 주는데, 그들은 모두 웃지 않고 입을 꾹 다문다. 모두 스탈린의 이야기가 웃자고 하는 농담이 아니라 역겨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농담은 아무도 웃지 않는 장난, 즉 거짓말이 되어 버린다.

 

농담과 거짓말, 의미와 무의미, 탁월함과 보잘것없음, 그렇게 일상과 축제의 경계에서 쿤데라가 하고 싶었던 말은 무의미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결국 인간의 고독과 삶이 아무런 의미 없음의, 보잘 것 없음의 축제 이것이야말로 삶의 본질이니 말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쿤데라는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만 있는 것이며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고 했다.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전부 단 한 번뿐이기 때문에 그 일회성은 가벼움을 상징하는 것이고, 특정한 사건과 직면했을 때 그 의미에 대해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이다.

 

"예전에 사랑은 개인적인 것, 모방할 수 없는 것의 축제였고, 유일한 것, 그 어떤 반복도 허용하지 않는 것의 영예였어. 그런데 배꼽은 단지 반복을 거부하지 않는 데서 그치지 않고, 반복을 불러. 이제 우리는, 우리의 천년 안에서, 배꼽의 징후 아래 살아갈 거야. 이 징후 아래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같이, 사랑하는 여자가 아니라 배 가운데, 단 하나의 의미, 단 하나의 목표, 모든 에로틱한 욕망의 유일한 미래만을 나타내는 배 가운데 조그맣게 난 똑같은 구멍만 뚤어져라 쳐다보는 섹스의 전사들인 거라고."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존재의 본질이다. 우리의 삶에서 벌어지는 숱한 상황들을 무의미라는 이름으로 부르려면 용기가 필요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무의미는 좋은 기분의 열쇠이며 지혜의 열쇠도 될 수 있다. 물론 쿤데라의 이 무의미 예찬이 와 닿지 않거나,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책을 읽으면서 생이 훨씬 간결하고 가벼워진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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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 2015-01-22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피오나 2015-01-23 20:5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미궁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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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인간에게 정말로 악은 가능한 것인가?

 

이 작품은 나카무라 후미노리가 데뷔 10년을 앞두고 발표한 그의 열한 번째 작품이다. 전작에서도 그랬듯이 그는 인간의 내면에 숨어 있는 은밀한 욕망과 숨겨진 악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 ‘R’이라는 다른 인격을 가지고 있었던 주인공은, 의사로부터 이런 제안을 받는다. "너는 선택을 해야 해. 사람들과 그럭저럭 어울려 사는 존재가 되느냐, 아니면 사람들이 모두 등을 돌리는 존재가 되느냐." 지금처럼 살아간다면 다들 너를 싫어하게 될 거라고. 그렇게 살아가면 어른이 되어서 엄청 힘들어질 거라고. 너무도 어렸던 덕인지 신견은  ‘R’이라는 인격에 침몰당하지 않고, '그럭저럭 평범해 보이는' 어른이 된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근무하면서 살아가던 그는 우연히 사나에라는 여자를 만나 함께 잠자리를 하게 된다. 같은 중학교에 다녔었지만 서로 연락처도 묻지 않았고, 그가 다시 찾아가면 더 이상 볼일이 없는 그녀. 하지만 그는 빌린 양복을 핑계로 그녀를 다시 찾아가고, 그날 근처에서 탐정사무실에 근무한다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는 사나에와 친밀한 관계였던, 지금은 실종 상태인 한 남자를 찾고 있던 중이라며 신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면서 그녀가 히오키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지옥’을 목격한 뒤에도 삶은 계속 이어진다.

 

히오키 사건은 그가 열두 살 때 벌어졌던 사건으로 당시 범행현장이 밀실 상태여서 미궁 사건으로 불렸다. 남편과 아내가 모두 예리한 흉기에 의해 목을 찔렸고, 장남은 심하게 구타를 당한 후 독극물에 의해 사망, 장녀는 당시 수면제를 마시고 자신의 방에서 잠든 상태였다. 현장에 흉기는 없었고, 현광, , 모든 곳이 잠겨 있는 상태였다. 당시에 하교 중인 여학생들에게 낯선 남자가 주스 병을 건네는 사건이 빈번했었고, 당시 사나에 역시 그 병을 마시고 잠든 것으로 밝혀진다. 끔찍한 사건 현장에서 혼자만 살아 남은 열두 살 소녀, 과연 지옥을 목격한 뒤에도 계속 이어지는 삶은 어떤 걸까?

 

사나에 또한 지나치게 아름다운 어머니와 그런 아내를 광적으로 감시하는 아버지, 그리고 자신을 성적 대상으로 바라봤던 오빠로 인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같은 것이 있었다. 신견은 살아남은 사나에를 계속 만나면서, 히오키 사건에 대해 탐정과 함께 조사를 해나가기 시작한다. 알 수 없는 궁금증에 휩싸여. 혹시 아직도 잡히지 않은 그 범인이 어린 시절 나와 함께했던 ‘R’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사나에는 범인이 십 년 후에 자신을 다시 만나러 온다고 했다 말한다. 그래서 불안하고, 무서웠다고.

 

"근데 십 년이 지나도 나타나질 않아. 무서웠어. 온다면 오는 대로 좋아. 오지 않는 게, 그 유예가, 괜히 더 무서워. 나한테 말했었어. 네가 행복하지 않다면 그때는 아름답게 죽여주겠다고..... 그래서 나는 행복해지지 않으면 안 돼. 하지만 행복해지는 일 따위, 없었어. 그런데도 오질 않아. 언젠가 틀림없이 올 거면서."

 

신견은 자신이 어릴 적에 음울한 어린애였다고 고백한다. 어떻게 해볼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러웠다고.

 

"어느새 나와는 다른 존재가 내 내면에 존재하게 됐어. 어린 나는 그것에 R이라는 이름을 붙였어. 주위의 어느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아이는 가공의 존재를 만들어내지. 그건 지금 생각해보면, 범죄를 저지르는 소년의 내면과 비슷했어..... 히오키 사건은 말이지, 내게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어. 유족인 너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잘못이겠지만, 어렸을 때,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었어. 내 가족에 대해서. 가족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서. 세계에 대해서."

 

파국으로 치닫는 가족의 뒤틀린 사랑으로 인해 상처 받았던 어린 소녀와 ‘R’이라는 다른 인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행히 스스로 사라져버려 세상 속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었던 어린 소년. 그들은 성인이 되어 만나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눈으로 확인하고, 귀로 듣는 것만이, 즉 보여지는 것들만이진실은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세계는 개인에게 복잡한 미궁과도 같다.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저마다의 삶을 붙들고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부단히 노력한다. 그렇게 사회의 톱니바퀴 안에서 살아야 시시해빠진 존재라도 누군 가에게는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되면 각자의 내면에 가지고 있는 상처 따위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세계가 누구에게나 평등해지면, 누가 죽건 누가 살아가건, 별다를 것 따위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나카무라 후미노리의 작품은 긴장감 넘치는 추리 소설의 서사를 가지고 있지만, 무엇보다 철학적인 메세지를 던져준다. 가벼운 두께의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지만, 언제나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 느껴지는 여운이 긴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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