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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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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서른한 개 다리 가운데 가장 투신자가 많아 한때 '자살대교'라고 불리기도 했던 마포대교 위, 누가 봐도 저 사람 저러다 투신자살을 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한 남자가 있다. 나이는 쉰 살이 넘어 보였으나 막 산골에서 걸어 내려온 소년 같은 인상의 한 남자. 그는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이었다. 투명인간이라니? 그는 어떻게 투명인간이 된 걸까? 이 작품은 김만수라는 이름을 가진 그가 태어나던 순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일생을 이야기한다. ‘큰 머리에 비해 가느다란 몸통에 유난히 길어 보이는 팔다리를 가지고 태어나 유독 몸이 허약했던 만수는 말도 늦고 매사에 이해가 더디지만 마냥 착하고 순박하기만 하다. 재미있는 것은 숱하게 화자가 바뀌면서 여러 명의 등장 인물들이 등장해 만수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만, 정작 만수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지는 않는 다는 것이다. 주인공의 주관적인 시선이 아니라, 타인의 입으로만 들려지는 한 인간의 삶은 마치 모자이크처럼, 퍼즐처럼 한 조각씩 맞춰진다. 그의 가족을 비롯해 친구, 동료 등 그를 둘러싼 수많은 인물들이 각자의 처지에서 각자의 시선으로 김만수라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준다. 물론 챕터가 따로 나뉘어 진 것도 아니고, 인물 별로 화자가 명확히 구분되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처음에는 스토리를 따라잡기에 다소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차근차근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는 특별한 재미가 있다.

 

만수야, 나는 점쟁이들을 믿지 않고 관상을 보지도 못한다만 그래도 네 얼굴이 유난히 크고 훤해서 멀리서도 잘 보이기는 한다는 건 알겠다. 그러니 너는 웃어라. 소문만복해라, 웃는 집에 만복이 들어오고 일소일소 일노일로라, 한번 웃을 때마다 하루 젊어지고 한번 화낼 때마다 하루씩 늙어지나니 네가 웃음만 잃지 않으면 평생 없는 복도 받아가며 살리라. 웃는 얼굴에 침 뱉는 사람 없느니라.

 

타고난 영특함으로 집안의 희망이었던 큰형 백수, 어리숙하고 바보 같았던 둘째 만수, 영리하고 악착같았던 셋째 석수, 큰누나 금희, 여동생 명희, 막내 옥희까지 육남매이다. 농사꾼으로 가족을 먹여 살리는 아버지, 가족들을 위해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어머니와 누이들, 늘 만수를 무시하고 괴롭히는 동생.. 만수의 가족들은 어려웠던 그 시절 사람 냄새 나는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텔레비전도 전기도 없던 시절의 스토리는 지금의 우리에겐 너무도 낯선 시절이지만, 성석제 작가 특유의 입담은 마치 영상을 보고 있는 듯 생생하게 이야기 속으로 이끌어준다.

 

명석함으로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자상한 큰형은 베트남전에 파병되어 고엽제로 인해 목숨을 잃고 가족들이 서울로 이사하면서부터 어려운 일들이 이들 가족에게 시련이 닥친다. 변두리 단칸방 생활을 지탱하기 위해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누이들, 연탄가스 중독과 같은 갑작스러운 사고에다 상경 이후 무능력한 술꾼으로 전락한 아버지를 대신해 만수는 실질적인 가장이 된다.

 

만수는 관리직으로는 특이하게 생산직들하고 사이가 좋았다. 나도 인상 좋다는 말을 자주 듣지만 만수 역시 늘 웃는 얼굴인 게 사람 좋은 하회탈을 연상케 했다. 그런 점 때문에 노무부 창립 멤버가 되면서 사년제 대졸 직원보다 빨리 승진해 과장대리가 되었을 것이다. 승진을 하고도 전처럼 여전히 생산직 사원들하고 형, 동생하며 지냈다. 구내식당에서 생산직들하고 섞여서 같이 밥을 먹고 식사 뒤에 족구도 같이 했다. 공장장도 그런 대접을 받지 못했다.

 

만수는 뭐든지 한가지를 열심히, 성실하게 하면 언젠가 빛을 볼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다니던 회사가 경영난에 빠져 사장마저 공장을 버려도 마지막까지 공장을 지키려 하고, 답답해 보일 만큼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돌아오는 것이라고는 사장대신 떠안게 된 엄청난 액수의 손해배상, 끝없이 이어지는 고된 노동,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매몰찬 외면뿐이었다. 이렇게 미련한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람 좋던 그가, 가족을 위해서 모든 걸 끝없이 희생했던 그가, 하루에 스무 시간 가까이 일하며 잠은 십 년 동안 하루 다섯 시간 이상 자본 날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던 그가, 제대로 된 밥상을 마주하는 경우는 일년에 몇 차례가 될까 말까 한 그가 대체 무슨 잘못을 한 걸까. 세상이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걸까.

 

가끔 살다 보면 팍팍한 세상살이에 투명인간이라도 되고 싶은 경우가 생긴다. 보통은 있는 듯 없는 듯한 사람을 투명인간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저 끔직한 상황을 모면하고자 사라져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물론 극중에서 만수는 입고 있는 옷 밖으로 드러나는 신체의 일부분, 그러니까 손이나 목이나 얼굴이나 머리카락 등은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이 되었다고 설정되어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공상과학 소설이 아니므로 그것에 과학적인 근거를 따지는 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저 스스로를 투명하다고 믿는 것뿐일 수도 있다. 죽는 게 낫겠다, 혹은 아무도 모르는 데로 가서 새로운 생을 개척해보자는 마음이 들었을 때, 혹은 다리 위에서 투신을 했을 때 투명인간이 되는 것일 수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사는 게 아무리 끔찍하고 힘들고 어려워도, 죽는 것 또한 절대 쉽지 않다는 것을. 그러니까 마음속에서 무엇인가 뚝, 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더라도 절대 생을 포기하지는 말자. 만수의 마지막 말, "죽는 건 절대 쉽지 않아요. 사는 게 오히려 쉬워요, 나는 포기 한 적이 없어요."가 오래도록 머리에 남는다.

 

한번만 더 가보자. 한번만 더 만나고 한번만 더 맛보고 한번만 더 듣고 한번만 더 안아보자

그렇게 한번만 더 생각해보자.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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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유전자 전쟁 - 신고전파 경제학의 창조적 파괴
칼레 라슨 & 애드버스터스 지음, 노승영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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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신입생인 나는 옥스퍼드 대학의 춥고 칙칙한 교실에 앉아 마르크스주의 사상가 에릭 스빈헤다우 교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교수가 커피 한 잔을 손에 든 채 불쑥 들어서더니 뚜렷한 벨기에 억양으로 물었다. <이 커피 보이나?> 물론 <당연히 보입니다>라고 대답해야 마땅하겠지만 의문이 들었다. <무슨 속셈이지?>

하지만 교수의 다음 말은 경제학 수업에 대한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커피는 보이지만, 콰테말라 농장도 보이나? 유럽연합 관세는? 커피 노동자들의 급여 명세서는 어디 있지?> 교수의 <속셈>은 분명했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사람과 법률, 취합이 지금의 세상을 만들었다.

 

다들 제 앞가림만 하려 들고 이윤이 모든 사람에게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는데, 물론 돈 버는 일 자체가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책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버는 것은 좋지만, 그 돈을 우상으로 섬겨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사람들을 착취하지 말고 지구를 엉망으로 만들지 말고 자신을 고립시키지 말고 섬이 되지 말라.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존재다" 라고 말이다. <문화 유전자 전쟁>이라는 제목 뒤에 붙은 소제목 <신고전파 경제학의 창조적 파괴>에서 보여지듯이 이 책은 문화 유전자 전쟁의 최전선인 경제학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경제학과 행복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경제학이 다루어야 할 주제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그래서 돈이 곧 전부이자 주인인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환경오염과 이상 기후, 끊임없는 소음과 정서적 고문 속에서 하루 3,000개의 광고 메시지가 우리 뇌에 자신도 모르게 주입되고 있는 세상이다. 유명 상업 광고의 패러디 광고로 유명한 '애드버스터스'지의 창립자이자 편집장인 칼레 라슨은 이 책에서 경제학을 점령하자고 제안한다. 주류 경제학의 논리에 도전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 더 나은 미래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충격적인 이미지들이 조지프 스티글리츠, 조지 애컬로프, 만프레드 막스네프, 허먼 데일리, 데이비드 오럴 같은 여러 경제학자들의 글과 어우러진 이 책은 우리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주류 경제학의 사상과 개념을 낯설게 드러내며,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생명과 진보, 존재의 의미를 다시 묻게 한다.

 

경제학은 극대화를 추구하는 학문입니다. 우리는 주어진 한계 안에서 효용을 극대화하고 성장을 극대화하고 소득을 극대화하고 생산을 극대화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자본가가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경제학에서는 이 같은 고삐 풀린 극대화로 인한 경제적 비용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는 지금 보시는 대로입니다. 지구는 규제를 벗어난 이 모든 경제 활동을 지탱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고 우리는 심각한 생태 위기를 맞았습니다. 이제는 극대화만을 추구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최소한 극대화에 조건을 내거는 방안을 고민해야 합니다. 경제학을 처음부터 다시 사고해야 합니다.

인류의 엄청난 소비 문화 덕분에 지구의 환경이 위험해지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다만 문제점에 대해 인지하고 있어도, 누군가는 이렇게 문화 유전자 전쟁을 펼치려고 하고, 누군가는 라떼 거품이나 쪽쪽 빨고 있는 것이 다를 뿐이지 말이다. 특히나 우리의 소비가 GDP에 기여하는 사례를 매우 놀랍게도 경제학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해준다.

 막힌 도로에서 휘발유를 허비하고 배기가스에 콜록거리다 결국 주유소에 들러 기름을 넣어야 한다고 가정해 보자. 교통 체증은 GDP에 기여한 셈이 된다. 교통사고가 나서 차가 박살 나고 보험료가 인상되고 거기다 사고 때문에 심각한 교통 체증이 일어난다면 GDP는 훨씬 증가할 것이다. 부상을 입어서 몇 주 동안 입원해야 한다면 GDP는 더더욱 증가할 것이다. 그날 아침에 값비싼 이혼 수속을 밟고 저녁에 집이 화재로 내려앉아 법률 비용이 발생하고 보험금을 받고 가재도구를 새로 샀다면 GDP 관점에서는 최고의 하루일 것이다.

대기 오염, 담배 광고, 고속도로에서 시신을 수습하는 구급차, 감옥, 벌목으로 인한 자연의 유실, 도시의 폭동을 진압하기 위한 경찰차, 텍사스 저격수의 소총, 연쇄 살인마의 나이프, 폭력을 조장하는 티비 프로그램 모두 GNP에 합산된다. 그러나 아이들의 건강, 교육의 질, 놀이의 즐거움, 시의 아름다움, 공직자의 청렴, 재치와 용기, 공감과 애국심 등은 하나도 GNP에 합산되지 않는다. 우리는 무엇보다 GNP GDP가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많은 것이 합산되고,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많은 것이 제외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이 책은 시종일관 독자에게 강렬한 이미지로 말을 걸며 모든 것을 근원에서부터 다시 생각해 볼 것을 권유한다. 페이지를 넘기면 쓰레기 더미에서 쓸 만한 물건을 찾고 있는 흑인 아이들의 사진을 배경으로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음을 보여 주는세계 인구 성장그래프가 나오고, 다음 페이지는 오늘 돈 좀 썼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남자의 말에 너무 멋지다며 좋아 어쩔 줄 몰라 하는 여자의 캐리커처와 함께 기울기가 급해지는 [종의 소멸] 그래프가 등장하는 식이다. 이는 20년간 자본주의 소비문화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전 세계적 네트워크를 표방해 온 [애드버스터스]지가 즐겨 써온 전략이라고 한다. 현란하게 펼쳐지는 도박적인 이미지들은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는 경제적 사유 방식에 균열을 내는데 성공하고 있다. 매우 흥미로운 책이고, 두툼한 분량만큼이나 멋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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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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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학적으로 말하자면,

1960년대 소웨토에서 태어난 까막눈이 여자가 자라나서,

어느 날 감자 트럭에서 스웨덴 국왕과 수상을 만나게 될 확률은

45,766,212,810분의 1이다.

이는 위에서 말한 까막눈이 여자의 계산에 의한 것이다.

 

다섯 살 때부터 공동변소에서 똥을 치우며 생계를 이어야 했던 놈베코.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잉태된 지 20분 뒤에 사라져버렸고, 현실을 잊어버리려 환각제와 알코올에 의존했던 어머니마저 세상을 일찍 떠나버린다. 공동변소의 관리소장이 해고되면서 어린 그녀가 그 자리를 이어가게 되지만, 까막눈이인 주제에 수에 대한 감각으로 셈을 할 줄 아는 능력을 타고났기에 결국 위생 국 직원의 눈에 거슬리게 된다. 문학애호가인 옆집 호색한과 라디오를 통해 글과 말을 깨우친 놈베코는 강도에게 습격 당해 죽은 호색한의 집에서 수백만 달러어치의 다이아몬드를 발견해 그걸로 빈민촌을 탈출하고야 만다. 그러나 놈베코의 열다섯 번째 생일 다음 날, 그녀가 길을 떠난 지 약 여섯 시간 만에 엔지니어의 차에 치이고 만다.  엔지니어는 브랜디를 잔뜩 마신 상태에서 운전을 했지만, 법정은 그녀가 백인의 차에 치인 죄를 범했기에 운전자에게 정신적 피해를 끼친 데에 대한 벌금, 훼손된 차체에 대한 수리비를 지불하라는 것으로 판결이 떨어진다. 놈베코에게 다이아몬드는 있었으나 그것은 훔친 것이었으므로 자칫 절도 혐의로 투옥될 수도 있었기에, 그녀에겐 수리비를 지불할 능력이 없었고, 죗값을 치르기 위해 엔지니어가 책임자로 있는 이중 철책으로 둘러싸인 비밀 핵무기 연구소에서 청소부로 일하게 된다

 

 

이렇게나 많은 일이 일어나지만, 이야기에 할애된 분량은 겨우 이 책의 15프로 정도에 해당되는 분량이다. 그러니까 진짜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라는 말이다. 어떻게 해서 까막눈이에 공동변소에서 똥을 치우던 어린 소녀가, 지금은 연구소에서 청소부로 7 3개월 20일을 죄값으로 일해야 하는 처지인 그녀가, 스웨덴 국왕과 수상을 만나게 되는 걸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상상이 안 될 정도의 상황인데, 이야기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속도로 굴러간다. 이 스토리는 흔히 예상할 수 있는 전개를 완전히 벗어나면서 전개가 되는데, 기발한 상상력은 우리를 포복절도하게 만들면서 페이지를 쓱쓱 넘어가게 만들어준다. 킬킬대며 웃다가, 다음 상황이 궁금해서 조바심을 내다가 보면 어느 샌가 작품의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한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비록 꼼짝 못 하고 갇혀 있는 신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얼마든지 삶에서 밝은 부분들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게 놈베코의 생각이었다. 예를 들어 저 사기꾼 판 데르 베스타위전이 얼마나 더 사람들을 속일 수 있는지를 지켜보는 것도 꽤나 재미난 일이 아니겠는가?

따지고 보면 그녀의 현재 삶은 괜찮은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는 책을 읽고, 복도를 몇 군데 청소하고, 재떨이를 몇 개 비우고, 연구팀의 분석 자료를 읽고, 또 엔지니어가 이해할 수 있게끔 쉬운 내용으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게 그녀의 일과였다.

 

솔직히 공동변소의 우울한 일상으로부터 탈출하자마자 술에 취한 운전자의 차에 치이고, 손해배상을 받아보 모자랄 판에 억울한 판결을 받고 7년이 넘는 기간 동안 청소부 일을 해야 죄값을 치를 수 있는 상황이라면, 열다섯 놈베코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앞으로의 삶에 희망을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놈베코는 단순히 영리한 것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긍정적인 캐릭터였다. 어쩌면 그래서 그녀의 삶이 그렇게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쑥쑥 흘러갈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가끔은 당황스러울 만큼 그 어떤 것도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이 작품이 가진 최고의 장점이다. 놈베코 주변에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특이한 인물들이 잔뜩 모여 있다. 남아공 최고의 핵 전문가이지만 정작 간단한 수식조차 모를 만큼 멍청했던 술꾼, 둘 중 하나만 주민등록이 되어 있는 쌍둥이 형제 홀예르 1, 홀예르 2, CIA가 자신을 쫓고 있다는 불안 증에 걸린 미국인,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짝퉁 사기〉를 일삼는 중국 여자들, 세상 모든 일에 분통을 터뜨리는 소녀, 자신의 태생은 백작부인이라는 환상에 젖어 살아온 감자 농사꾼 등등.. 이들은 핵폭탄을 매개로 서로 얽히게 되는데 그 중심에는 신분적으로 가장 낮은 존재인 까막눈이 흑인 소녀가 있다. 이들의 균형을 맞춰가며, 세계 평화를 지켜내기 위해서 말이다.

 

 

연구소에서 청소를 하는 놈베코가 핵폭탄 개발에 관여하게 된 계기도 매우 재미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핵폭탄 하나를 그녀가 떠안게 된 상황에도 상상을 초월하는 사연이 숨어 있다. 물론 그건 직접 책을 읽어봐야만 한다. 전작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서 급변하는 현대사의 주요 장면마다 본의 아니게 끼어들어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는 요절복통 스토리를 선보였던 것만큼이나, 이번 작품에서도 기대를 져버리지 않으니 말이다. 솔직히 전작보다 이번 작품이 쬐끔 더 재미있었다고 말하고 싶을 만큼, 유쾌하고 재미있는 작품이다. 특히나 놈베코는 최근에 만난 캐릭터 중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멋진 여성 캐릭터가 아닐까 싶다. 자신 앞에 연이어 나타나는 불행한 사건들을 너무도 아무렇지 않고, 어쩌면 그리 지혜롭게 헤쳐나가는지 독자들이 그 복잡한 상황에 우울해할 틈도 없이 어려움을 타개해나가는 모습은 박수를 보내고 싶을 정도였다. 사실 세상의 진정한 아이러니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 틈에서 어수룩해 보이고, 모자라 보이지만, 실제로 세상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누구인지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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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두 도시 이야기/찰스 디킨스/창비

 

찰스 디킨스의 작품 중에 가장 좋아하는 작품!!! 물론 여러 출판사의 버전으로 읽었지만, 창비세계문학으로 표지를 바꿔입었으니 당연히 다시 읽고 싶어지는 욕구!!

 

'창비세계문학' 34권. '단행본 역사상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린 작품'이라는 진기한 기록을 가진 찰스 디킨스 소설. 찰스 디킨스는 똘스또이, 도스또옙스끼, 버나드 쇼우, 조지 오웰 등 내로라하는 작가들로부터 '19세기 최고의 문호', '셰익스피어와 더불어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라는 찬사와 존경을 받았으며, 당대 대중으로부터도 유례없는 열렬한 인기를 누린 작가이다

 

 

 

 

백조도둑/엘리자베스 코스토바/알에이치코리아(RHK)

 

<히스토리언>에 이어 두번째 출간되는 엘리자베스 코스토바의 작품!!

 

남부러울 것 없는 재능과 명성의 중년 화가가 공격한 내셔널 갤러리의 그림 '레다'. 제우스가 백조로 변신해 인간 여자 레다에 대한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순간을 묘사한 이 그림은 왜 한 화가를 미치광이로 만들었을까?
올리버를 치료하기 위해 나선 정신과 의사 말로우가 올리버의 정신세계를 탐구하면서 시작되는 <백조 도둑>은 이러한 미스터리적 설정에서 출발하여 올리버와 말로우, 그리고 올리버를 사랑한 여인들에 대한 심리소설로 나아가다가 19세기말 인상주의 미술 세계에 대한 묘사까지 발전하는 독특한 형식의 작품이다.

 

 

몽위 - 꿈에서 달아나다/온다 리쿠/노블마인

 

열대야가 잠못이루게 하고, 어정쩡한 장마가 불쾌지수를 높여주는 이 계절, 서늘하고 오싹하고, 미스터리한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 온다 리쿠의 신작!!

 

다양한 장르의 미스터리를 보여주며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일본의 대표 작가 온다 리쿠의 장편소설. 인간이 자신이 가진 최고의 공포를 숨겨 놓는 '무의식과 꿈'을 바탕으로, 신선한 공포의 세계를 보여준다. 온다 리쿠만의 특기로 평가 받는 '아름다운 공포'의 극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146회 나오키상 후보에 오르고, 일본에서 드라마로도 만들어지는 등 큰 호응을 받았다.

 

 

 

 

무의미의 축제/밀란 쿤데라/ 민음사

 

밀란 쿤데라의 신작 장편소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무조건 읽고 싶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작가 밀란 쿤데라의 장편소설. 2000년, <향수>가 스페인에서 출간된 이후 14년 만의 소설이다. 첫 소설 <농담>에서 시작되어, <참을 수 없는 존재>에서 전 세계를 사로잡은 그의 문학 세계는 <무의미의 축제>에서 그 정점을 이루며("쿤데라 문학의 정점." -「퍼블리셔스 위클리」) '쿤데라 시대'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자비/토니 모리슨/문학동네

 

흑인 여성 작가라는 정체성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인종과 성의 문제에 대해 문학적인 이의를 제기하는 작가, 그녀의 신작 궁금하다.

 

1680년대 아메리카 대륙. 미국이라는 나라가 건국되기 이전, 신분제도도 사회제도도 없는 신천지. 흑인과 백인이 대농장에서 함께 노동을 하고, 인종을 불문하고 노예가 될 수 있었던, 아직 인종주의가 발현되기 이전의 시대.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살아 있는 미국문학의 대모 토니 모리슨이 2008년 발표한 장편소설 <자비>는 바로 식민지 시대 아메리카 대륙을 배경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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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진짜 메이저리그다
제이슨 켄달.리 저지 지음, 이창섭 옮김 / 처음북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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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회초 1사 만루의 상황에서 중심 타선인 5번타자, 6번타자가 모두 삼진 아웃 당한다. 그렇게 득점을 실패하고 이어진 1회말, 상대팀은 쓰리런 홈런과 더불어 폭풍의 7득점. 스코어 0:7. 경기는 이제 시작인데 7점차라는 점수는 어쩐지 응원하는 기분을 사그라 들게 만들고 만다. 혹시나 기대했던 선발 투수에 대한 역시 나의 실망감. 경기를 관람하는 집중력은 흐트러지고, 읽고 있던 책을 다시 펼쳐 들고 만다. 간간히 티비에서 들려오는 중계 소리만 들으며 책 속으로 빠져드는데, 3회부터 조금씩 따라붙던 점수가 결국 5회에 이르러서는 역전이 되고 만다. 맙소사. 결국 이날 경기의 스코어는 0:7에서 10:8이 되고 만다. 이런 게 바로 야구의 묘미다. 예를 들어 수비 실책 남발에, 선발 투수의 제구 난조에, 상대팀의 운 좋은 안타까지 이어지면서 경기가 안 풀리더라도 야구는 9회말 끝까지 가보기전에는 그 누구도 모르는 것이다. 진짜는 9회말 투아웃부터 라는 얘기처럼, 실제 다 잡은 경기를 9회말 투아웃에서 끝내기로 지는 경우도, 마무리투수가 블론 세이브를 하고 연장으로 넘어갔지만 다시 이기거나, 결국 지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각본 없는 드라마'라는 진부한 표현도 야구 경기에 있어서만은 무릎을 치게 만드는 감탄사가 되는 것이다.

 

야구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했다. 야구장엔 내가 몰랐던 경기 속의 경기가 존재했다. 난 항상 코앞에서 야구를 지켜봤지만 누군가 알려준 후에야 경기장에서 진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게 됐다. 예전엔 야구가 느리고 때때로 지루한 경기라고 생각했지만, 진짜 야구에 대해 배운 이후론 경기장에서 수많은 사건들이 쉴 새 없이 펼쳐져서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모를 정도가 됐다. 이젠 주목해야 할 것들이 수십 가지로 늘어났고, 단 한 번의 타격도 여러 개의 줄거리로 이루어진 흥미로운 결투처럼 느껴졌다.

이 책은 야구 팬이자 기자인 리 저지가 선수의 관점에서 야구를 기술하고 싶어서 시작되었다. <선수가 의미 있게 생각하는 것들에 주목하고, 선수가 하는 행동의 이유를 설명하고, 감독이 평소보다 이르게 내야수에게 전진 수비를 지시한 이유와 3루 코치가 주자에게 3루를 지나 홈으로 뛰게 한 이유 혹은 볼카운트 3볼인 상황에서 주자가 2루를 훔친 이유 같은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16년 동안 선수로 뛰었던 베테랑 포수인 제이슨 켄달은 메이저리그 경기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선수들이 어떤 경기를 펼쳐야 하는지, 야구와 야구를 하는 선수들을 이해하려면 어디에 주목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그것을 리 저지가 지면에 옮긴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수많은 야구팬들이라면, 꼭 봐야만 하는, 볼 수밖에 없는 책이라고 하겠다. 게다가 류현진 선수와 윤석민 선수, 그리고 추신수 선수 덕분에 요즈음은 메이저리그 중계를 정규 방송에서도 편성해서 보여줄 정도이니 책 속 내용들이 더욱 친숙하고, 쉽게 느껴질 것 같기도 하다.

야구장 밖에서는 알 수 없는 메이저리그의 생생한 진짜 이야기. 도대체 진짜 메이저리그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진짜 프로선수들은 경기를 어떻게 보는 것일까? 홈플레이트에서 포수와 구심은 어떤 대화를 나눌까? 팀원끼리 어떻게 의사 소통하는 걸까? 필드 밖에서 바라보는 야구가 아니라, 필드 안에서 바라보는 진짜 야구 이야기가 그렇게 펼쳐진다. 경기가 시작 되기 전에 어떻게 몸을 풀고, 선수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부터 시작해서, 투수, 포수, 내야수, 외야수, 타자, 주자, 감독으로 나뉘어서 각각의 포지션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리고 경기를 잘 풀어가려면 어떤 부분을 공략해야 하는 지에 이르기까지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다.

 

야구는 정말 빨리 진행되지만, 직접 경기해 보지 않으면 - 혹은 필드에서 경기를 관람하거나 - 야구가 얼마나 빠른 스포츠인지 알 수 없다. 타구, 투구, 송구. 필드에서 보면 이 모든 게 완전히 달라 보인다. 야구가 길고, 느리고,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TV에서 볼 땐 야구는 정말 쉬워 보인다. 하지만 메이저리그 내야수들의 능력은 상상도 안 될 만큼 뛰어나다. 터무니없을 정도다. 훌륭한 내야수는 본능이 남다르다. 투구와 타자의 스윙을 읽을 후에 타구가 날아오기도 전에 몸을 움직인다.

선수들은 "상대하기 가장 힘들었던 투수는 누구죠?"라는 질문에 항상 똑같이 대답한다고 한다. "상대해 본 적이 없는 투수요."라고. 상대 투수가 어떻게 경기하는지, 공이 어떻게 움직이고, 그 공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모르면 그만큼 불리하다는 얘기다. 야구는 철저하게 데이터 분석을 통해서 진행되는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야구 만큼 기록도 많고, 경기 규칙도 많은 스포츠가 또 있을까 싶을 만큼, 야구는 알면 알 수록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고, 그만큼 더 재미있어지는 신기한 종목이다. 야구를 하는 것도, 보는 것도 마찬가지로 '아는 만큼 더 보인다'는 것이다. 야구에 흥미가 이제 막 생겼다면, 혹은 야구를 너무 좋아하는데 더 재미있게 즐기고 싶다면 이 책이 아주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대부분의 야구에 관련된 책들이 야구를 오래 보아온 소위 선수들에게는 다 그렇고 그런 아는 얘기들을 정리해놓은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책은 나 야구 좀 봤다. 싶은 이들에게도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으니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경우의 수가, 두 세 시간짜리 야구 경기 안에서 전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매번 신기하기도 하고, 색다른 쾌감을 주기도 한다. 야구에서는 벌어지는 매 순간의 선택. 그 사소한 선택 하나가 그날의 경기 결과를 바꾸기도 하고, 한 선수의 운명을 바꾸기도 한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이걸 먹을까. 저걸 먹을까. 하는 사소한 고민에서부터 회의 때 이걸 발표해야지.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해야지. 오늘 이걸 입을까. 아니야 저걸 입어야겠어. 이쪽 길이 빠를까. 저쪽 길이 빠를까에 이르기까지. 매 순간 벌어지는 우리의 선택.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 뒤에 벌어지는 모든 상황은 모두 스스로의 책임이다. 아쉬운 건 이미 결정된 선택은 다시 돌이킬 수가 없다는 거. 하지만 야구에서는 데이터 분석을 통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거나, 오히려 상황을 역전시킬 묘안을 만들어낼 수 있다. 선택을 통해 배우고, 그걸 활용해서 멋진 드라마를 새로 쓸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럴 려면 감독, 코치, 선수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하지만 말이다. 진짜 야구를 만나고 싶다면 지금 당장 야구장으로 가보라. 그게 여의치 않다면 시원한 집에서 이 책을 펼쳐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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