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 (모노 에디션) 열린책들 세계문학 모노 에디션
허버트 조지 웰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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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다시 웅크리고 앉은 하얀 석상을 쳐다보았습니다. 그순간 나는 내 여행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를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저 우박 장막이 완전히 걷히면 무엇이 나타날까? 인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 잔인성이 평범한 감정이 되었다면 어떡하지? 그사이에 인류가 인간다움을 잃고 냉혹하고 몰인정하고 엄청나게 힘센 동물로 진화했다면 어떡하지? 그들에게는 내가 구세계의 야수처럼 보일지도 몰라.                  - '타임머신' 중에서, p.44


<시간 여행자>는 심리학자, 의사, 저널리스트 등의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자신이 사차원 기하학을 연구한 결과 시간도 일종의 공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시간이 정말로 공간의 네 번째 차원이라면, 왜 시간 속에서는 돌아다닐 수 없는 걸까 의문을 품었고 결국 공간과 시간 속을 어떤 방향으로든 이동하는 기계를 만들기에 이른다. 르네상스 시대였고,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시간 속에서는 움직일 수 없다고, 절대로 현재의 순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시간 여행자는 만드는 데 수년이 걸린 기계장치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자신이 직접 미래로 시간 여행을 다녀온 경험을 들려준다. 그가 도착한 세계는 무려 802701년의 미래였다. 


시간 여행자가 미래에서 만난 생명체들은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난쟁이들이었다. 엘로이라는 종족은 부드러운 친절함과 어린애 같은 태평함을 가지고 있었는데, 매우 연약해 보이기도 했다. 도자기 인형처럼 예쁘장한 그들은 시간 여행자가 기대했던 것만큼 그에게 관심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낯선 생명체와 의사소통을 하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은 채 그를 둘러싸고 낮고 부드러운 소리로 자기네끼리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미래라고 하면 발전된 과학 기술과 지식으로 인해 모든 면에서 현재의 인류보다 진보해 있을 거라고 예상했었는데,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수준 높은 윤리나 놀라운 진보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인류는 현대인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화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래의 모습은 이들 인류가 전부가 아니었고, 시간 여행자는 곧 다른 종족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과연 그는 이 아득한 미래에서 어던 경험을 하게 될까. 




저게 뭐지? 그는 넋을 잃을 만큼 놀라서 그 유령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의심하고, 눈을 깜박거리고, 눈을 비비고, 다시 바라보고, 믿었다. 그것은 고체의 실물이었고, 그림자가 딸려 있었고, 두 사람을 태우고 있었다. 그 안에는 대낮의 햇빛 속에서 백열광을 내는 마그네슘처럼 눈부시게 빛나는 하얀 금속과 햇빛을 빨아들이는 흑단 막대기, 문질러 닦은 상아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하얀 부속품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것은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그것은 무질서한 꿈의 기계처럼 확정적이 아니라 암시적이었다.                 - '<크로닉 아르고> 호' 중에서, p.181~182


사실상 웰스가 그린 이 미래는 이 작품이 쓰일 당시의 19세기의 사람들에게도, 이 책을 읽고 있는 21세기의 우리에게도 상상하기 어려운 아득하게 먼 세상이다. 그래서 그 어떤 상상을 하더라도 전혀 예상치 못한 미래를 만날 수 있는데, 웰스의 독창적인 상상력은 과학적인 통찰을 바탕으로 쓰였기에 더욱 흥미로웠다. 1895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최초로 과학적인 수단으로 가능한 시간 여행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웰스는 문학사상 최초로 과학적 가설을 원용한 시간 여행의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옛날부터 있어 왔던 미래 여행의 성격을 꿈과 마법에서 '있을 법한' 현실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 책에는 「타임머신」을 비롯해서 그 원류격인 작품 「<크로닉 아르고>호」를 비롯하여, 웰스의 기막힌 상상력을 여실히 드러내는 「수정 알」과 「맹인들의 나라」 등 총 4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웰스는 런던의 과학사범학교에거 생물학자 헉슬리로부터 과학을 배웠고, 이후 과학 교사 생활을 하기도 했다. 문학과 과학, 그리고 정치 분야에서 큰 발자취를 남겼을 정도로 다양한 일들을 해온 다재다능한 인물이기도 하다. 


<타임머신>은 발표와 동시에 평판을 얻었고, 옛날부터 있었던 미래 여행의 성격을 바꾸어 놓은 작품이라는 평을 들었다. 인류 사회를 미래나 과거의 시점에 서서 바라볼 수 있게 된, 그야말로 SF의 출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웰스 이전에도 시간 여행을 다룬 소설은 있었지만, 꿈 속에서 경험하는 방식으로 시간 여행을 하거나, 긴 수면 후 다른 시대에서 깨어난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과학적인 기계 장치를 이용한 시간 여행이 구체적으로 제시된 것은 웰스가 처음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웰스가 그려낸 상상의 세계는 굉장히 먼 미래이기 때문에, 우리 인류에 대한 전망과 우주적 차원의 유토피아에 대한 사유도 가능하게 만든다. 실제로 극중 시간 여행자가 미래 사회에 도착해서 그들에 대해 알아내고자 나름의 논리와 사고를 펼치는 과정 조차 매우 과학적이고, 철학적이기도 하고 말이다. 웰스 이후로 시간 여행을 다루는 SF작품들이 엄청나게 많이 나왔고, 나 역시 다수의 작품들을 읽어 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 오래 전에 쓰였지만 여전히 놀라움을 안겨주는 고전의 매력이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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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채기하다 갈비뼈가 부러졌을 때 깨달은 것들
악셀 하케 지음, 배명자 옮김 / 21세기북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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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냄새가 또 있다. 나는 어린 시절 매주 새로운 책을 찾아 시립도서관에 갔는데, 거기에는 선명하게 구분되는 종이 냄새와 잉크 냄새, 먼지 냄새, 독서에 빠진 사람들의 냄새가 있다. 아, 언젠가 내 차가운 몸이 무덤에 들어갈 때, 내 기억의 거대한 건물도 가져갈 수 있도록 갓 깎은 잔디와 갓 볶은 커피, 시가 한 대, 그리고 책들도 같이 넣어주기를! 하지만... 해골에는 코가 없다. 냄새를 맡는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뜻이다. 이제부터 다른 감각과 구별되는 후각만의 특징, 즉 코에서 뇌로 가는 직통 경로에 대해 얘기해보자.                  p.187


<삶은 당신의 표정을 닮아간다>라는 작품으로 만났던 악셀 하케의 신간이다. 전작에서 철학, 심리학, 예술, 대중문화를 넘나들며 '유쾌함'에 대해 탐구했던 그는 이번 책에서 더 이상 젊지 않은 자신의 몸에 새겨진 시간, 세월, 그리고 이 시대에 관해 이야기한다. 예순 여덟 살인 그는 노화로 인해 웃지 못할 사건들을 겪었고, 그 덕분에 평생의 동행자인 '몸'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피부, 뼈, 검지, 치아, 폐, 무릎, 뇌 등의 카테고리로 나누어 중년 남자의 시선으로 나이든 몸과 노년이라는 시간에 대해, 그리고 삶의 본질에 대해 탐구한다. 


흉터, 주름, 생채기 등의 개인적인 경험은 보통 몸에 새겨진다. 우리는 나이를 먹으며 키가 줄어들고, 주름이 선명해지며, 크고 작은 부상과 질병의 흔적들을 갖게 된다. 그 모든 것들은 매일 거울 앞에서 마주하게 되기도 하고, 특별하지 않다고 잊어 버리기도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살아간다. 악셀 하케는 지극히 내밀하고도 개인적인 기억들을 몸이라는 '작은 우주'를 통해 읽어 낸다. 재채기로 인해 갈비뼈가 골절된다거나, 주머니칼로 멋을 내려다 손가락 부상으로 끝난 게 천만다행이었을 정도로 아찔한 사고를 겪기도 하고, 톨스토이 때문에 왼쪽 무릎 연골이 영구적으로 손상되기도 하며, 살면서 원하는 만큼 날씬해 본 적이 없었던 식습관을 돌아보고, 유독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해서 생긴 아찔한 에피소드도 들려준다. 사진첩 속 아기 시절부터 68세에 이르기까지, 성장과 노화, 크고 작은 부상과 질병, 그리고 몸이 보내는 신호에 귀 기울이며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들어 준다. 




세상의 진부함과 아름다움, 역겨움과 온갖 현상은 오로지 몸으로만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몸 없이 어떻게 하겠는가? 몸은 인생을 전체적으로 보라고 끊임없이 요구한다. 인생은 아름다우면서도 역겹고 우리를 고통스럽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몸에 좋은 일을 할 수 있고, 몸이 적절히 기능하도록 살 수 있으며, 몸의 기계적 특성을 볼 수 있다. 아니, 그렇게 해야만 한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몸을 더 큰 무언가의 일부로, 몸이 상호작용하고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는 어떤 세계의 일부로 이해한다면 어떨까?                   p.247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자칫 견디기 어렵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감정과 수치심, 두려움 조차 유머러스하게 엮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전작에서 인생의 어려운 시기에도 유쾌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악셀 하케는 우리가 안전하다고 믿었던 많은 것들이 무너지고 있는 세상 속에서 두려움을 넘어 긍정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번 작품에서도 역시 내용 자체는 매우 유쾌하게 읽히지만, 그 속에 담긴 성찰은 결코 가볍지 않아서 더 가슴 찡한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몸의 변화와 약함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드러내며 유머로 승화 시키고 있으니 말이다. 늙어가는 몸을 두려워하거나 외면하지 않기란 사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은 흉터 하나, 주름 하나에도 이야기가 담겨 있고, 그 모든 흔적들이 자신의 삶을 고스란히 증명해주는 기록이 된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들려준다. 


개인적으로는 냄새와 후각을 다룬 장을 특히 흥미롭게 읽었다. 냄새는 일반적인 외부 자극과는 달리 비서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뇌에 도달하기 때문에 시상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 후각은 뇌의 아주 오래된 영역이자 감정과 기억을 담당하는 변연계에 속하는데,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가장 오래된 감각이기도 하다. 냄새는 의식뿐 아니라 무의식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마르셀 프루스트의 그 유명한 작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대목을 소개하기도 한다. 추억의 냄새와 특별한 의미가 있어 잊을 수 없는 냄새에 대한 부분도 인상깊게 읽었다.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가져온 변화와 점점 더 흐려지는 개인의 기억력에 대한 부분도 흥미로웠다. 나이 든 신체란 볼품없어 지게 마련이지만, '나'의 모든 역사를 간직한 공간이라는 점에서 그 안에 축적된 시간만큼의 가치를 지닌다. 이 책을 통해 몸이 보내는 신호에 귀 기울여보고, 스스로의 존재 의미를 돌아보는 시간이 된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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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태어나는 곳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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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극에서 "엄마 딸로 태어나서 다행이에요"라고 에이미 역의 파비안느가 말하는 것은 '상냥한 거짓말'이다. 어머니는 딸에게 '상냥한 거짓말을' 하고 나서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닫는다. 홀로 대본을 읽으며 머리를 끌어올려본다든지. 그러면서 내일 그 장면을 다시 연기해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픽션과 현실이 파비안느 안에서 교차해 '진실'에 다다른다.... 이러면 제목에 들어 있는 '진실'이라는 말의 의미가 중층적으로 작용한다고 할지, 시니컬한 느낌을 함유하게 된다.... 단편적이었던 점들이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됐다. 오늘이 '그날' 이었나.......                  p.116~117


<환상의 빛>, <걸어도 걸어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등의 작품으로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는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육성을 고스란히 들어볼 수 있는 책이다. 2011년부터 2019년까지 카트린 드뇌브, 쥘리엣 비노슈, 이선 호크 주연의 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에 이르는 8년간의 기록을 중심으로 영화 안팎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고레에다 감독이 직접 찍은 현장 스케치 사진부터 손그림으로 그린 스토리보드와 인물구상도, 그날그날의 촬영 기록, 이선 호크에게 보내는 편지, 틈틈이 영화를 보고 배우를 연구하고, 책을 읽으며 쓴 일상 단상, 스태프들에게 보낸 새해 연하장, 고민을 담은 일기 등 그의 영화 세계를 엿볼 수 있는 풍부한 자료가 이 책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 




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회고록 발간을 앞둔 전설적인 여배우와 그것을 축하하기 위해 오랜만에 엄마의 집에 온 딸의 이야기를 그린다. 엄마의 회고록을 읽은 딸은 책 속 내용이 거짓으로 가득 찼다는 것을 알게 되고, 엄마에게 말한다. 이 책에 진실이라고는 없다고. 전설적인 여배우 파비안느 역은 까뜨린느 드뇌브, 그녀의 딸 뤼미르는 줄리엣 비노쉬, 사위 역은 에단 호크가 맡았다. 지난 시간에 대한 기억들을 두고 티격태격하는 모녀의 서사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가장 잘 만드는 장르인 '가족'을 소재로 하고 있다. 갈등과 화해를 반복하며 서로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는 모녀의 변화를 섬세하게 그려내었다. 국내에서는 2019년에 소개되었었는데, 이 영화를 인상깊게 봤었다면 그 비하인드를 만날 수 있는 이 책 또한 아주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상영이 끝나고 상영 기사가 내려와 "어땠어? 좋았지?" 라며 악수를 청했다. 그래, 영화제에는 매번 이 의식이 있었다. 영화 만들기에서 사라진 필름을 교체하는 시간, 무거운 기재, 상영에서 사라진 필름을 교체하는 수고, 필름 교체를 표시하기 위해 필름에 각인되던 마크. 그것들이 영화 및 영화 만들기의 시간과 공간을 일종의 '축제'로 바꿔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이제 영화관의 어둠까지 사라져가고 있다. 내게는 종이가 아니면 책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관을 잃으면 영화는 영화가 아니게 될 것 같다.                 p.296


2011년부터 2019년까지의 촬영일지와 일상 단상을 적은 글에, 2023년에 쓴 프롤로그와 작가 후기를 붙여, 가장 최근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생각을 담은 책이 되었다. 한국에서 촬영한 <브로커>에 대한 이야기와 최근작 <괴물>에 대한 기대 등도 솔직하게 담겨 있다. 배우, 영화 들의 숱한 고유명사가 등장하는데, 350여 개의 짧은 각주를 수록해 이해를 도와준다. 


영화 안팎에 대한 거장의 생각을 비롯해, 영감의 원천이 된 도서와 영화 목록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배우에게 보내는 감독의 편지, 그리고 배우와 감독의 대화 또한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내용이라 흥미진진했다. '영화감독이란, 영화 찍기란 힘들지만 재미있는 일이구나.'하고 생각해준다면 좋겠다는 감독의 말처럼 이 책을 읽다 보면 영화를 촬영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영화감독이 디렉팅외에도 어떤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인지 차츰 깨닫게 된다. 




사실 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원래 도쿄 시부야의 파르코 극장에서 연극 무대에 올릴 생각으로 준비한 이야깃감이었다고 한다. 첫 제목은 ‘이렇게 비 오는 날에’. 인생 말년을 맞이한 노년의 여배우 이야기로, 마지막 상연 날 무대 전후의 분장실이 배경이었다. 그로부터 십오 년이 흘러 시나리오는 제목도 배경도 테마도 캐스트도 모두 바뀌어 새로 태어나게 된 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인 것이다. 연극으로 구상되었던 작품이 어떻게 영화로 태어나게 되었는지, 그 모든 과정 또한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관심이 많다면 이 책을 통해 간접 경험을 제대로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들은 평범하고 심심한 듯한 서사인 것 같은데도 이상하게 집중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등장하고, 그들간의 갈등과 상처를 사려 깊고, 섬세하게 묘사하면서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무엇이며, 삶이란 어떤 것인지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의 영화들을 보면서 어딘가 친근하면서도, 지독하게 인간적인 감정을 극대화시키는 세밀한 디테일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 궁금했다면,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다. 꼼꼼히 현장 스케치 사진을 찍고, 스토리보드를 직접 그리고, 세트가 될 집에 머물며 장소에 맞게 대사의 길이를 조정하고, 배우의 해석을 경청하여 장면을 수정하고, 틈틈이 영화를 보고 책을 읽으며 영화를 배우고 인간을 연구하는 등 성실하고 열정적인 모든 과정을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을 통해 고레에다 히로카즈라는 우주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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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모노 에디션) 열린책들 세계문학 모노 에디션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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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좋은 일은 오래가지 못하는구나,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차라리 이게 꿈이었더라면. 저 고기를 낚지 않고 차라리 신문지를 깐 침대 위에 그냥 누워 있었더라면.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야.」 그가 말했다.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 거야.」            - '노인과 바다' 중에서, p.96


멕시코 만류에서 조각배를 타고 혼자 낚시하는 노인 산티아고는 벌써 84일째 고기를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 희망과 자신감은 사라지지 않았고, 마침내 낚싯줄이 팽팽해지면서 신호가 온다. 아주 단단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중량이었다. 노인은 애를 썼지만 그놈을 단 1인치도 끌어올리지 못했고, 결국 거대한 물고기를 뱃전에 매달고 그 상태로 돌아가기로 한다. 하지만 그것조차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고기는 자꾸 공중으로 뛰어올랐고, 낚싯줄이 빠르게 풀릴 때마다 배도 함께 움직였다. 하지만 노인은 포기하지 않았고, '누가 이기나 한판 붙어 보자'는 마음이다. 그렇게 엄청난 고통을 감내하며 물고기와 사투를 벌인 끝에 물고기를 잡는데 성공하지만, 피 냄새를 맡은 상어들이 다가오기 시작한다. 노인은 상어로부터 물고기를 지키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이 책에는 표제작인 <노인과 바다> 외에도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 도움이 되는 단편 일곱 편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아프리카로 사파리 여행을 떠난 헤밍웨이의 자전적 작품이기도 한 <킬리만자로의 눈>과 <프랜시스 매코머의 짧고 행복한 생애>를 비롯해서 생전 마지막 단편집에 수록되었던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 하루키가 영감을 얻은 것으로 유명한 단편집에 수록되었던 <하얀 코끼리 같은 산>, <살인자들> 등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헤밍웨이 문학의 본령은 단편소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만큼, 하나하나의 작품들이 다 좋았다. 특히나 모노 에디션은 그동안 있던 판본에서 많이 눈에 띈 오역도 바로잡았다고 한다. 원작의 의미나 작가의 의도를 오해할 수 있는 요소를 배제하려 의역을 가능한 한 줄여 번역 작품을 읽는 독자와 작품 사이의 거리를 최소화하려 노력했다고 하는데, 덕분에 간결하고 정확한 헤밍웨이의 문체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가질 수도 있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아니, 그 외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어요. 하지만 날마다 그것을 점점 더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어요.」

「무슨 소리야?」

「우리가 이 모든 것을 가질 수도 있었다고요」

「우린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어.」

「아니요. 우린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우린 어디든 갈 수 있어.」

「아니요. 우린 갈 수 없어요. 여긴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에요.」              - '하얀 코끼리 같은 산' 중에서, p.228


마거릿은 프랜시스 매코머와 결혼한 지 올해 십 년하고도 일 년이 되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아프리카로 수렵 여행을 온 참이다. 매코머는 매우 키가 크고 체력이 좋으며, 코트에서 하는 게임을 잘하고, 낚시질에서도 큰 고기를 낚는 남자였다. 하지만 백인 수렵가 윌슨과 함께 하는 사자 사냥에서 그만 겁쟁이의 모습을 드러내고 만다. 직업 사냥꾼인 윌슨이 손님 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벌리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매코머는 소문이 퍼져 나갈까봐 전전긍긍한다. 사자 앞에서 토끼처럼 도망쳐 버린 자신의 모습이 계속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다음 번 일정으로 물소 사냥을 하기로 했는데, 과연 그는 내일 물소를 잡을 때는 자신의 명예를 만회할 수 있을까? 이 이야기는 헤밍웨이 스스로 '자신의 최고 걸작 단편'이라고 평한 작품인 <프랜시스 매코머의 짧지만 행복한 생애>이다.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 남자 매코머의 삶이 왜 가장 행복한 것인지는 이야기를 끝까지 읽으면 알 수 있게 된다. 


<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가 실제로 청새치 낚시를 하며 구상했다고 한다. 이 단순하고 짧은 이야기는 소년과의 짧은 대화와 노인의 독백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읽히며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겨준다. 사실 아주 어릴 때 이 작품을 처음 읽으며 노인이 청새치, 상어와 벌이는 싸움이 조금 무모하고 의미없게 느껴졌었는데, 시간이 더 많이 흐른 뒤에 읽었을 때는 처절하게 고독한 노인에게 소년 마놀린같은 존재가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었고,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는 드넓은 바다 한가운데서 홀로 싸움에 임하는 노인의 의지와 마음가짐에 대해 더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를 죽이는 일인 동시에 나를 살게 해주는 일이 무엇인지, 나는 과연 매 순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왔는지 말이다. 고전이 가진 최고의 가치는 이렇게 다시 읽을 때 비로소 만날 수 있다. 간결하고 가벼운 장정으로 만나는 모노 에디션으로 쉽고 부담없이 고전을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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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3부작 - 그래픽노블
데이비드 마추켈리 외 그림, 황보석 외 옮김, 폴 오스터 원작, 폴 카라식 각색 / 미메시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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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은 언제나 자신을 혼자 있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여겨 왔었다. 이제 그는 고독의 본질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 한 가지는 자기가 추락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만일 추락하고 있었다면 어떻게 자신을 붙잡는 것까지도 가능했을까? 동시에 꼭대기와 밑바닥에 있는 일이 가능할까? 그것은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았다.                - '유리의 도시' 중에서, p.119


폴 오스터의 거의 모든 작품들을 다 읽었는데, 매번 한번도 같은 스타일을 복기 하지 않는, 독특한 자신만의 색깔을 가지고 있는 작가로 기억한다. 폴 오스터가 우리 곁을 떠난 지 어느 새 한 해가 흘렀다. 최근에 그가 투병 중에 집필한 생애 마지막 장편소설을 읽었었는데, 이렇게 초기작을 다시 만나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빵굽는 타자기>, <달의 궁전>, <뉴욕 3부작> 등 그의 초기작들은 국내에서도 꽤 많은 사랑을 받았었는데, 나 역시 그 작품들로 그를 처음 만났었다. 


초기작들 중에서도 <뉴욕 3부작>은 이후 그의 작품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의 원형이 담겨있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미스터리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고, 실종과 추적이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이야기임에도 결말이 모호하기 때문에 명확한 서사를 좋아한다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만한 작품이기도 하다. 




그래서 <뉴욕 3부작>이 그래픽 노블 버전으로 나온다고 해서 매우 궁금했다. 얼마나 짜임새있게 압축해서 각색했을지, 원작의 모호한 서사를 이미지로 어떻게 그려냈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래픽 노블이라는 장르는 소설이 지닌 깊이 있고 탄탄한 스토리라인과 만화가 지닌 시각적 효과를 동시에 즐길 수 있다는 점에 있어 굉장히 훌륭한 장치이다. 어른들의 만화라고도 불리며 만화와 소설의 중간 형식을 띠고 있다고 보면 되는데, 보통은 매우 길고 복잡한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있고, 함축적이고 은유적인 이미지로 전개가 빠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촘촘히 글자가 박힌 소설책보다는 눈의 피로도 덜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좋은 반면에, 조금 내용이 어렵게 느껴지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원작 소설이 이미 존재하고, 그 뒤에 그래픽 노블이 나온 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래픽 노블이 가진 장점과 소설의 단점이 적절하게 손을 잡은 느낌이랄까. 그래픽 노블의 장르적 특성이 빡빡한 지면 구성, 때론 실험적인 내용들인데, 원작이 있는 경우에는 그런 점이 오히려 매력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드디어 그의 마음에 와닿는 문장을 하나 발견한다. <책은 쓸 때 고심해서 묵묵히 쓰는 만큼 읽을 때도 그렇게 읽어야 한다.> 문득 그는 천천히 읽는 것, 과거 그 어느 때의 독서보다 천천히 읽는 것이 비결이라는 사실을 이해한다... 책이 요구하는 마음가짐으로 독서할 인내심을 찾을 수 있다면, 점차 점차 완전한 이해에 다다를 수 있겠지. 자신에 관해. 그리고 블랙, 화이트, 이 사건, 모든 것에 관해. 그러나 붙잡은 기회만큼 놓친 기회도 인생의 일부이고, 이야기는 일어나지 않은 일에 미련을 가져서는 안 된다.              - '유령들' 중에서, p.180


첫 번째 작품 <유리의 도시>는 잘못 걸려온 전화 한 통에서 시작된다. 필명으로 추리 소설을 쓰는 작가 퀸은 한밤중에 엉뚱한 사람을 찾는 전화를 여러 번 받는다. 탐정 회사를 하는 폴 오스터 씨를 찾는 전화였다. 그런 사람은 없다고, 여기는 탐정 회사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전화는 여러 날로 이어졌고, 결국 퀸은 자신이 폴 오스터라고 말하며 의뢰인을 만나 보기로 한다. 그리고 남편의 아버지가 접근하는 걸 막아 달라는, 감시 업무를 의뢰 받게 된다. 그렇게 퀸은 탐정 업무를 하며 노인을 감시하는 일을 하게 되는데, 그의 삶을 지켜보면서 점차 자신을 잃어 버리고 있다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두 번째 작품인 <유령들>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블루는 화이트로부터 블랙이라는 이름의 남자를 쫓아다니며 지켜봐 달라는 의뢰를 받게 된다. 블루는 블랙이 사는 건물 정반대 편에 있는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하고, 그를 몰래 지켜보기 시작한다. 블루는 길 건너편의 블랙을 엿보면서 단순히 타인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자기 자신도 바라보는 것만 같다고 느낀다. 삶의 속도가 급격하게 줄어들자 전에는 주의를 비껴가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사건에 진척은 없고, 아무 일도 없는 나날이 계속되는 가운데 블루는 블랙에게 접근해 그와 대화를 나누기도 하며 보고서를 작성해나가지만, 끝이 없는 숨바꼭질을 얼마나 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세 번째 작품 <잠겨 있는 방>은 어린 시절 친구의 실종에 대한 소식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내와 아들을 남겨둔 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친구가 남긴 원고를 읽고 그의 글을 출간하는 작업을 하며 그가 남긴 흔적들을 뒤쫓는 과정에서 나는 친구의 아내와 점차 가까워진다. 세 편의 연작 소설은 각자 독립된 인물들이 누군가를 추적하고, 쫓는 서사를 가지고 있다. 끝없이 감시하고 뒤쫓는 과정이 이어지지만, 그에 대한 결과는 명확하지 않다. 좇으면 좇을수록, 대상에게 가까워지면 가까워질 수록 모든 것이 더욱 흐릿해진다고 할까. 그러면서 탐정과 작가 등 추적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조금씩 잃어 간다. 


원작 소설이 채워주지 못하던 부분을 시각화 작업을 통해 보여주고 있어 아무래도 소설보다는 그래픽노블 버전이 가독성은 훨씬 좋았던 것 같다. 특히나 세 작품을 각기 다른 작가가 그림을 맡아 작업했기에, 완전히 다른 작법과 다른 방식으로 그려진 삽화들이 재미를 더해준다. 폴 오스터의 소설 세계를 각기 다른 세 작가가 자신만의 시선으로 해석해 그려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을 그래픽 노블 버전으로 만나야만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원작의 느낌을 잘 살리면서도, 또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보여주고 있어 같은 작품을 읽는 듯한 익숙함과 새로운 작품을 만나는 듯한 설레임을 함께 안겨주고 있으니 말이다. 폴 오스터의 작품을 좋아했다면, 그래픽 노블로 만나는 완전히 새로운 폴 오스터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적극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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