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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 ㅣ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이세욱 옮김 / 비채 / 2014년 4월
평점 :
"네가 너를 사랑하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절대로 그의 꿈을 망가뜨리지 말아야 해"
꿈을 향해 전력을 다하고 싶어도 좀처럼 그럴만한 여유를 내어주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특별히 우리의 능력이 뒤떨어지거나, 우리가 무언가를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란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거라는 걸 다들 알 것이다. 죽기살기로 매달리는 누군가의 꿈에는 그만한 대가가 필요하며, 그들 인생에는 대부분 고통과 좌절, 비난과 조롱이 가득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소중한 꿈을 결국 포기하고 만다. 왜냐하면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아무리 혼자 미친 놈 소리 듣는 게 상관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가족, 친구들을 힘들게 만들면서까지 얻어내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어렵게 말을 꺼내는 누군가가 사실 내 꿈은 이런 거야. 나는 언젠가 이런 일을 해 볼 거야. 라고 자신의 꿈을 내보이면, 주변 사람들은 건성으로 열심히 해보라고 대꾸는 하지만, 대부분 아직도 저런 허황된 생각을 하다니 언제 철이 들래나 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한다. 물론 그런 주변 사람들이 나쁘다고만은 볼 수 없다. 현실에서 벗어난 꿈이란 의심스러운 게 당연한 것이고, 그들 또한 매일매일 열심히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이들이니 말이다. 그래서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믿어 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무모해 보이더라도 그것을 시간 낭비라고 탓하지 않고, 그리는 꿈을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변함없이 격려해주는 사람 말이다. 믿어주는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어도 꿈은 이어지니까 말이다.
몇 해 동안 다른 것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죠. 무엇을 보든 내 눈에는 그것이 길로, 자동차가 달리는 길로 보였어요. 그건 내 아버지가 주신 선물이었고 오로지 우리 머릿속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었어요...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길을 보았고 상상 속에서 그 길들을 달렸습니다. 믿기지 않으실지 모르지만, 나는 소년 시절에 머릿속에 숱한 길을 그리고 그 길들 위로 자동차를 몰고 다니면서 시간을 보냈어요. 나는 그런 방식으로 나만의 세계를 만들었어요. 그 시절에 나는 이런 식으로 미래를 그렸어요. 세상엔 수많은 길들이 있을 것이고, 우리는 엔진의 힘을 이용해서, 그리고 우리의 상상력과 용기를 또 다른 동력으로 삼아 그 길들을 주파하게 되리라고 말이에요.
알레산드로 바리코의 '이런 이야기'에서 바로 그렇게 끝까지 꿈을 포기하지 않고 기어이 도달하려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이 작품은 ‘자동차’로 상징되는 물질문명을 처음으로 맞이한 20세기 초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마을에서 처음으로 자동차 정비소를 차린 아버지 리베로와 그의 곁에서 자동차가 질주하는 길에 매혹을 느끼게 되는 어린 소년. 그리고 자동차 경주에 열광하는 담브로시오 백작이 울티모네 가족과 만나게 되면서 리베로와 담브로시오는 랠리 경기에서 엄청난 스타가 되기도 한다. 울티모가 꿈꾸는 길은 아무도 상상해본 적 없는 길, 시작하는 곳에서 끝나는 길, 세상 어디로도 통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로 통하는 길, 지상의 모든 길을 하나로 아우르는 길, 길 떠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다르고 싶은 자동차 서킷이다. 모두가 자동차에 열광하고 랠리에 빠져들던 그 시절, 울티모는 자동차가 아니라 '길'에 매혹된 것이다. 그런 그의 눈에 몇 해 동안 다른 것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는 언제 어디서든 길을 보았고, 상상 속에서 그 길들을 달린다. 그렇게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던 울티모는 세상엔 수많은 길들이 있을 거라고 믿고, 엔진의 힘과 더불어 상상력과 용기를 또 다른 동력으로 삼아 그 길들을 주파하게 될 거라고 꿈을 꾼다.
이 작품은 여러 화자가 이야기를 이어가는 서사 기법을 보여주는데, 이는 형식적인 면에서 독특한 것은 물론 아니다. 예를 들어 오쿠다 히데오의 '소문의 여자' 혹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올리브 키터리지'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 단편집처럼 제 각각의 스토리가 이어지는데, 각각 스토리의 화자 혹은 주요 인물이 매번 바뀌면서 전개되는 형식이다. 물론 주인공은 매번 스토리에 등장하며, 어떤 때는 주요 사건의 키로, 어디서는 배경으로, 다른 곳에서는 조연이나 단역으로 종종 이야기를 함께 꾸려나가는 것이다. 알레산드로 바리코의 이야기에서는 울티모가 아버지 리베로와 함께 자동차와 길에 대한 꿈을 키워가는 스토리에 이어, 울티모가 전쟁터에서 만난 두 전우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가 사랑했던 엘리자베타와 함께 피아노가 실린 유개트럭을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시절, 활주로를 함께 걷던 울티모 형제, 고향마을 술집의 여주인과의 만남 등등으로 전개된다. 언어로 만들어진 음악이라는 평을 듣는 바리코의 작품답게 언어는 매우 아름답고, 스토리는 유기적으로 짜여 마치 오케스트라의 연주처럼 삶을 펼쳐낸다.
내가 보기엔 사람들이 오래 사는 것 같아도 사실은 안 그래. 사람들이 진정으로 사는 시간은 그 긴 세월의 작은 부분일 뿐이야. 다시 말해서 자기가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지를 알고 그것을 성공적으로 해내는 시기에만 진정으로 살았다 할 수 있어. 그런 시기에 사람들은 행복해. 나머지 세월은 기다리거나 추억하는 시간이야. 기다리거나 추억하는 때에는 슬프지도 행복하지도 않아. 슬퍼 보이기는 하지. 하지만 그건 그저 기다리고 있거나 추억하고 있기 때문이야. 기다리는 사람들은 슬프지 않아. 추억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그들은 그냥 멀리 있는 것뿐이야. 나는 기다리고 있어.
울티모는 자신이 하나의 서킷을 건설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오로지 경주용 자동차들만 달리는 길 말이다. 아무데로도 통하지 않고 닫혀 있는 길, 돌고 또 돌지만 어디에도 이르지 않는 길.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자기만의 길을 만들어보려고 하는 것이 바로 그의 꿈이다.
"나는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 태어났어. 그 일을 하는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지."
울티모가 어린 시절 겪은 아버지의 사고와 인간성을 말살하는 전쟁 통에 겪은 친구의 배신, 그리고 어설프고 어긋났던 사랑은 그의 인생에 굽이굽이 길을 만들어낸다. 아버지 리베로와 아들 울티모는 20년 가까운 시차를 두고 엘리자베타에게 똑같은 말을 하는 걸 보면 그들 부자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들 두 부자는 어떤 계기를 통해 자기가 무엇을 하기 위해 태어났는지를 깨닫고 그 운명을 끝까지 밀고 가려는 사람들 인 것이다. 아주 먼 세월이 흐른 뒤 엘리자베타는 울티모가 만든 서킷을 찾아낸다. 수 십 년의 시간에 걸쳐 그의 꿈이 현실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울티모가 서킷을 만들어내려는 것이 어느 젊은이의 덧없는 꿈이 아니라 한 어른의 차분한 결심에서 비롯된 거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그녀 또한 그처럼 인내심을 잃지 않고 해마다 계절의 어김없는 순환을 믿는 사람들처럼, 터무니없는 상상을 실제 눈에 보이는 결과물로 만들어낸 것이다. 오로지 하나만 바라보고, 그것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노력하고 포기하지 않는 이들의 눈부신 이야기는 누구라도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주게 하기에 충분하다. 어디선가 꿈꾸는 자가 나타나면 다른 곳에서는 그것을 비웃는 자가 등장하게 마련이다. 꿈을 향해 달려간다는 것은 굉장히 외로운 일이다. 그러나 의심하지 말자.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세상에 단 한 명만 있어도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