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의 야식
하라다 히카 지음, 이소담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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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도쿄 교외에서 작은 도서관을 운영합니다. 도서관의 이름은 따로 없습니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밤의 도서관'이라고 불러 주세요. 실제로 저녁 7시부터 자정까지 문을 엽니다. 근무 시간은 오후 4시부터 심야 1시까지. 휴식 시간이 한 시간 있습니다. 일반 도서관과 다르게 평범한 책은 놓아두지 않았습니다. 도서관에서 다루는 책은 전부 이미 세상을 떠난 작가의 장서뿐...... 작가가 작고한 뒤 책을 기부받아 우리 도서관에서 전시하고 정리하는 일이 주요 업무입니다.               p.25


도쿄 교외의 한적한 곳에 작은 도서관이 있다. 저녁 7시부터 자정까지 문을 여는 이곳에 살아 있는 작가의 책은 없다. 오직 죽은 작가들의 책만 모여 있는 책의 박물관 같은 곳이다. 10시가 되면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식당에 모여 야식을 먹는다. 음식 또한 특별한데, 바로 책 속에 나오는 요리를 재현했다는 것이다. <시로밤바>에서 오누이 할머니가 만드는 카레라이스, <빨강머리 앤>에서 앤과 다이애나가 맛있게 먹었던 버터오이샌드위치, 그 외에도 정어리쯤과 당근밥, 통조림 요리 등 실제로 책에 등장하는 요리를 야식으로 먹을 수 있다.


책과 관련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오랜 꿈이었던 오토하는 교원 채용 시험에 떨어진 뒤로 출판사, 에이전시 회사, 대형 서점 등에서 전부 떨어지고,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 계약사원으로 서점에 들어갔다. 일 자체는 즐거웠지만 무급 야근은 당연했고, 월급도 너무 적었으며, 점장과 잘 맞지 않아 점점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다.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버티기 어려운 상황이 점점 늘어가던 차에 오토하는 다이렉트 메시지를 받게 된다. 밤의 도서관을 운영하는 오너로부터 제안을 받게 된 오토하는 면접을 보고 이곳에서 일하게 되었다. 지방 도서관 사서로 근무하다 이곳 밤의 도서관에 오게된 미나미는 일할 때 필요한 책만 읽고 그 이상은 책을 더 찾아서 읽거나 공부하지 않았다. 업무 특성상 필요한 책이 많으니 독서가처럼 보일 뿐 자신은 책에 대한 열의가 전혀 없었다. 책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다른 동료들에게 언제 자신의 가면이 벗겨질까 늘 두려워한다. 공립 도서관에서 근무했던 마사코는 필사적으로 책을 읽었고, 업무를 위해 책을 외워가며 일해 왔는데.. 그러다 보니 정말 좋아했던 독서를 잃어 버리고 말았다. 예전만큼 즐겁게 책을 읽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각자 자신만의 비밀과 고민을 간직하고 있는 직원들이 모여 밤의 도서관을 운영해나간다.





"오늘은 <빨간 머리 앤>의 밤이야."

", 좋네요. 그런데 <빨간 머리 앤>에 음식 이야기가 있었나. 생각보다 없는 것 같네요?" 오토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앤이 바닐라 향신료로 착각하고 진통제를 넣은 건 젤리를 넣은 레이어 케이크고, 다이애나가 학교에 가지고 간 건 나무 딸리 파이였죠? 디저트라면 잔뜩 있는데요."               p.174~175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있는 도서관 직원들 외에도 아무도 실제로 만나 본 적은 없는 도서관 오너를 비롯해 매일 밤 도서관에 방문하는 할머니, 갑자기 나타나 특정 작가의 책을 다 찾아내라는 유명 작가, 인기 작가의 사후에 그의 책을 처분하려는 가족과의 만남, 도서관의 장서인이 찍히지 않은 등록되지 않은 책의 등장 등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기다리고 있다. 무엇보다책을 다루는 직장인의 현실을 디테일하게 그려내고 있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서점의 잇따른 폐업과 사서의 비정규직 고용 등 책에 대한 애정만으로 버텨내기엔 결코 쉽지 않은 현실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낮술>, <호로요이의 시간>, <우선 이것부터 먹고>, <할머니와 나의 3천 엔> 등의 작품으로 만나온 하라다 히카의 신작이다. 3권으로 출간되었던 <낮술>이라는 작품을 특히나 좋아한다. 지킴이 일을 하는 삼십대 여성이 하루 중 유일하게 제대로 된 끼니를 챙길 수 있는 점심에 맛있는 음식과 거기에 어울리는 술 한 잔을 곁들이는 소소한 기쁨과 행복을 그렸던 작품인데, 음식에 대한 묘사가 이야기에 푹 빠져들게 만들었었다. 하라다 히카는 소설을 통해서 좋은 재료로 만든 맛있는 음식이 줄 수 있는 온전한 행복을 만끽하게 해준다. 그래서 이번 작품 역시 매우 기대가 되었다. 밤에만 문을 여는 도서관과 그곳에서 먹을 수 있는 야식이라니... 그 설정 만으로 읽기 전부터 반해버렸으니 말이다. 이 작품은 책 속에 등장하는 요리를 실제로 만들어 책을 좋아하는 이들이 먹는다는 판타지를 구현시켜준다. 책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 봤을 법한 상상이다. 내가 좋아하는 등장 인물이 맛있게 먹었던,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멋들어지게 묘사했던 그 음식을 함께 먹어보고 싶다는 로망이 나에게도 있었다. 그래서 만약 '밤의 도서관'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연간 이용권을 끊어서 자주 가게 될 것 같다. 이야기의 힘은 고단한 하루의 피로를 잊어 버리게 해준다. 독서가 완벽하게 휴식이 되는 시간이 필요하다면, 하라다 히카의 작품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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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 작은 독서 모임
프리다 쉬베크 지음, 심연희 옮김 / 열림원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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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이 여러분 독서 모임에서 첫 번째로 읽을 책인가요?"

퍼트리샤가 묻자, 도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골랐어요. 당신은 어떤 책을 좋아하시나요?"

퍼트리샤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독서는 자신의 삶에서 몇 안 되는 즐거움이었다. 현실이 괴로울 때마다 항상 책 속 세상으로 도망칠 수 있어서였다. 외로울 때마다 책이 위로하며 함께 있어주었고, 그렇게 책을 읽는 동안에는 모든 문제에서 한발 물러날 수 있었다.            p.82 ~83


고등학교 서무실에서 일하는 퍼트리샤는 어느 날 하얀 봉투에 담긴 우편물을 하나 받게 된다. 발신인이 없는 우편물의 소인은 스웨덴이었고, 봉투 안에는 작은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동생 매들린의 열여덟 살 생일에 선물한 거였다. 스웨덴으로 떠났던 날 매들린은 이 목걸이를 하고 있었고, 그곳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지 30여 년이 지났다. 목걸이를 보낸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매들린의 행방을 알고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퍼트리샤는 그렇게 낯선 나라 스웨덴으로 향한다. 그곳은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스웨덴의 작고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 유셰르였다. 매들린은 30여 년 전 유셰르의 자유 교회에서 인턴 자리를 얻었고, 일을 하던 중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과연 퍼트리샤는 동생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상관을 조르고 졸라 얻어낸 특별 휴가의 기한은 3주였다. 퍼트리샤는 어떻게는 그 안에 동생의 실종에 관련된 단서를 찾아야 했다. 이야기는 현재 퍼트리샤의 시점과 30년 전 동생 매들린의 시점으로 교차 진행된다. 독자들은 페이지를 넘길 수록 당시에 매들린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조금씩 알게 되지만, 현실의 퍼트리샤는 동생에 대한 실마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 너무 오래 전이라 당시의 기억은 매우 모호하고 불확실했으며, 그 사건을 기억하는 이들도 많지 않았다. 혹시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모두들 매들린이 자발적으로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는 모습을 목격한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러던 중 퍼트리샤는 묶고 있는 호텔의 주인 모나가 친구들과 함께 시작한 작은 독서 모임에 참여하게 된다. 워낙 책을 좋아했기도 했지만, 동네 주민인 독서 모인 친구들에게 사연을 말하고 도움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퍼트리샤는 작은 창문 앞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물결치는 파도와 목 놓아 우는 갈매기를 바라보고 있는 이 순간이 어쩐지 마법에 걸린 것만 같았다. '모나의 책이 있는 B&B'에서 또 환상적인 아침 식사를 할 채비를 마친 그녀는 다시금 빠르게 머리를 빗었다. 매일 아침 모나는 오븐으로 폭신폭신한 호밀빵을 갓 구워내어 그 위에 버터를 발라 사르르 녹인 다음 시럽과 등자 열매, 크림치즈, 홈메이드 마멀레이드를 같이 내놓았고, 거기다 시장에서 방금 사 온 훈제 고등어와 이웃 농장에서 조달한 커다란 갈색 달걀도 곁들여 아주 멋진 아침상을 차렸다.             p.356


독서모임이 이루어지는 장소인 '모나의 책이 있는 B&B'는 경쾌한 건축 양식이 특징인 오래되고 노란 저택이다. 모나는 단지 편안해 보인다는 이유로 호텔을 책으로 가득 채우고 싶어 했는데, 덕분에 호텔에 들어서면 마치 나이 지긋한 사서의 거실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창문에 둔 이상한 화분 사이, 다 해진 소파 옆 협탁 위, 온갖 그릇과 장식품들 사이마다 책이 흩어져 있었으니 말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호텔은 유셰르 마을의 공식 기관 같은 곳이 되어 사람들이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 되었다. 사방에 책이 가득한 작고 아늑한 호텔, 모나가 구워주는 맛있는 빵과 음식들, 생각만 해도 설레이는 장소가 아닐 수 없다. 동생의 실종이라는 미스터리가 중심 서사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지만, 사실 이 작품은 결과보다 '과정'에 더 방점을 두고 있다. 독서 모임의 회원들인 중년 여성들 각각의 이야기를 들려 주고, 퍼트리샤가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가는 과정 속에서 그들로부터 서로 고민을 털어놓고, 위로를 받고, 의지가 되어주는 치유의 시간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서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 혹은 독서 모임이 소재가 되는 작품은 언제나 설레임을 안겨 준다. 이 작품은 <템스강의 작은 서점>이라는 작품으로 만났던 프리다 쉬베크의 신작이다. 전작이 낡고 오래된 서점을 다시 살려내려는 이야기였다면, 이번 작품은 실종된 여동생을 찾는다는 미스터리를 한 축으로 호텔 주인이 여는 작은 독서 모임이 또 다른 한 축을 구성하고 있는 따뜻한 드마라를 그리고 있다. 완두콩 색으로 칠한 오래된 계단 난간, 계속 새로 천을 씌워 긴 세월 동안 사용해온 해진 소파, 녹색 대리석 장식 선반이 달린 낡은 벽난로, 한 세기도 전에 직접 손으로 짠 짙은 색 나무 서가, 고집불통 늙은 고양이, 그리고 창밖으로 보이는 환상적인 템스강 풍경까지 들어서는 순간 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느낌을 주었던 작은 서점만큼이나 이번 작품의 배경 또한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럽다.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스웨덴의 아름다운 도시 유셰르에서 펼쳐지는 작은 독서 모임과 문학 축제, 아늑한 공간과 맛있는 음식을 통해서 따스한 위로의 시간을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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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밤
안드레 애치먼 지음, 백지민 옮김 / 비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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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전의 삶. 그 이후의 삶.

클라라 이전의 모든 것은 생기 없고, 텅 비고, 임시방편처럼 여겨졌다. 클라라 이후는 나를 전율시키고 겁먹게 했다. 방울뱀들의 골짜기 너머 물바다의 신기루처럼.

나 클라라예요. 그 한마디는 내가 가장 잘 아는 것이었으며, 그녀를 떠올리고 싶을 때마다 돌아갈 수 있던 단 한 가지였다. 기민하고 따스하며 신랄하고 위험한 그녀를. 그녀에 관한 모든 것이 이 한마디에서 퍼져 나왔다.            p.13


크리스마스 이브, 홀로 참석한 파티에서 나는 아무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은 채 크리스마스트리 뒤편의 창가에 서 있다. 그때 누군가 한 손을 불쑥 내밀고 말한다. "나 클라라예요." 세상에서 가장 당연한 사실처럼 퍼뜩 내뱉은 그 말 한마디로 인해 그날 밤 모든 것이 달라진다. 나는 클라라와 함께 테라스로 가 뉴욕의 밤 풍경을 보고,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그녀에 대해 더 알고, 더 듣고, 더 가까워지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후 나는 매일 밤 클라라를 만나 영화를 보고, 술을 마시고, 이야기하고, 음악을 듣는다. 이 소설은 두 사람이 만난 날부터 딱 여드레 밤 동안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누구나 사랑에 빠졌을 때 가장 생각이 많아지지 않을까 싶다. 알 수 없는 상대의 마음을 추측해보고, 지난 과거의 상처를 돌아보고, 같은 실수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상대를 향한 갈망과 희열에 이르기까지 온갖 감정들이 소용돌이 치며 마음속을 휘젓는 시기이니 말이다. 안드레 애치먼은 더없이 섬세한 문장으로 그 순간의 감정들과 어지러운 생각들을 그려내고 있다. 한쪽이 다가서려 하면 다른 한쪽이 한 걸음 물러서는, 좀처럼 상대의 마음을 알 수 없어 진척이 느린,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온갖 생각의 소용돌이를 경험할 수 있는 그런 시간들이다. 안드레 애치먼은 〈롱리즈〉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소설 속 인물들을 ‘서로 사랑에 빠졌으나 선뜻 행동에 나서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을 시작할 때 비슷한 경험을 해보지 않았을까. 불처럼 타올라 첫 눈에 반하는 사람을 만난다고 해도 말이다. 메시지를 보낼지 말지 고민하고, 상대가 하지도 않은 행동을 미리 짐작하고 걱정하며 우리는 끊임없이 생각한다. 사랑에 빠져 있는 내내 말이다. 




나는 클라라와 함께했던 모든 것들이, 맨 첫 번째 밤부터 마지막 밤까지, 심술과 자존심으로, 또 그 사이에는, 상당량의 두려움과 경고로 지배되었던 한편, 가장 중요해야 마땅했던 그 하나의 단어는 말없이 남아 있으리라는 선고를 받은 단어였다가는 이윽고 그것 역시도 단단하고, 빙하 같고, 또 바위같이 되어버렸던 일을 생각했다. 나는 그 단어를 한 번도 말하지 않지 않았는가? 눈에다가는, 밤에다가는, 공원의 동상에다가는, 내 베개에다가는 말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단어를 말할 것이다. 내가 당신을 놓쳐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클라라, 내가 당신을 사랑해서 놓쳐버렸기 때문에, 내가 당신과 영원을 보았기 때문에, 사랑과 상실 역시도 틀림없는 동반자이기 때문에.                 p.683



클라라를 만나고 다음 날, 나는 하루 종일 그녀 생각을 한다. 눈 속에서 헤어진 일부터 코트를 입었다가 입지 않은 일, 악수와 함께 작별 인사를 하고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서 배웅해 준 일, 그녀가 빌렸던 우산을 수위에게 건네준 일, 마지막 순간에 뒤를 돌아보던 일... 나는 완전히 넋을 잃은 채 온종일을 보낸다. 두 사람은 함께 영화를 보고 바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담요처럼 덮은 눈을 보며 걷는다. 나는 그 산책이 절대 끝나지 않기를 소원한다. 책을 읽다 보니 어느 새 눈 내리는 뉴욕의 밤거리를 걷는 두 남녀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 했다. 특별히 큰 사건 없이 잔잔하게 진행되는 이야기이지만, 전혀 지루할 새가 없었던 것은 그들의 세상에 독자인 내가 초대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사랑에 빠진 남자가 되었다가 그를 안달 나게 만든 여자가 되었다가 그렇게 두 사람과 함께 여드레 밤을 보낸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파인드 미>, <하버드 스퀘어> 등의 작품으로 만나온 안드레 애치먼의 신작이다. 그 동안 만나왔던 작품들에 비해 분량이 압도적으로 많은 편인데, 768페이지 내내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내면을 현미경 들여다보듯 세밀하게 탐구하는 소설이다. 안드레 애치먼은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의 설레임과 불안한 마음을 섬세하게 포착해 서로 사랑에 빠졌으나 선뜻 행동에 나서지 못하는 두 사람의 아주 특별한 연애소설로 완성시켰다. 특유의 시적이고 아름다운 문장들로 인해 이들과 함께 하는 여덟 번의 밤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사랑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보편적 감정을 그려내고 있어 공감하고, 이해하며 읽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드라마틱한 전개 없이도 이렇게 뛰어난 몰입감을 안겨준다는 것이 안드레 애치먼의 장점이 아닌가 싶다. "나는 사랑을 원해요, 다른 이들이 아니라. 나는 로맨스를 원해요. 나는 반짝임을 원해요. 나는 우리 삶에 마법을 원해요."(p.189) 당신도 그렇다면, 이 황홀하고 우아한 연애소설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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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생각하고 싶은 너에게 - 나를 깨닫는 일기 쓰기의 힘
고가 후미타케 지음, 나라노 그림, 권영주 옮김 / 미래엔아이세움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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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아냐. 의논할 사람이 없거나 누구랑 의논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나 자신과 의논하면 돼."

"스스로랑요?"

"그래, 예를 들어 네가 학교 문제로 고민한다고 치자. 그런 자기 자신을 발견하면 가만히 말을 걸어 줘. '무슨 일 있어? 내가 들어 줄까?' 하고 말이야."

...."자신한테 말을 걸다니, 어떻게요?"

"글을 쓰는 거야... 글을 쓴다는 건 나 자신과 대화를 하는 거란다."                  p.50


문어도리는 공부도 못하고, 운동도 못하며, 말솜씨도 없다. 긴장하면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기 때문에 친구들에게 '삶은 문어'라고 불리고, 중학교에 올라온 뒤로 내내 괴롭힘을 당했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언젠가는 끝나게 마련이라고 누군가는 말하지만, 지금 문어도리에게는 이 시간이 영원이나 다름없게 느껴진다. 그러던 어느 날, 도저히 학교에 가지 못하겠다는 마음이 들어 내리지 못하고 버스의 종점인 '바닷속 시민 공원'까지 와 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곳에서 소라게 아저씨를 만나게 된다. 자신이 땡땡이 치고 학교에 가지 않은 것이 창피했던 문어도리에게 소라게 아저씨는 내일도 내일모레도 학교에 안 가고 싶으면 안 가도 된다고, 괜찮다고 말을 건넨다. 그리고 문어도리를 자신의 껍데기 안으로 초대해, 혼자를 즐기는 방법과 어른의 쓸쓸함에 대해 알려 준다. 


혼자가 될 수 있는 시간으로 글쓰기를 제안하는 소라게 아저씨는, 글을 쓴다는 건 나 자신과 대화를 하는 거라고, '또 하나의 나'를 만날 때까지 딱 열흘만 일기를 써 보라고 제안한다. 어떻게 하면 글쓰기를 좋아할 수 있을 지부터 시작해 표현력을 늘리는 방법, 메모하는 습관과 자신만의 주제 발굴하기, 고민을 둘로 나눠 사고하기, 일인칭을 삼인칭으로 바꿔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등 하나씩 글쓰기를 배워가며 문어도리는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글쓰기와 말하기의 차이점에 대해 알려주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는데, 생각하는 것과 사고하는 것의 차이에 대해 예를 들어가며 설명해준다. 같은 경험도 생각나는 대로 글로 옮긴 것과 좀 더 정리해서, 사고하면서 쓴 글이 어떻게 달라지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자신이 어떤 상황이었고, 무슨 일이 있었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사고를 해야 한다고, 사고하는 건 답을 찾으려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이다. 




"어른이 될수록 우리는 상황에 맞춰 각각 다른 얼굴로 살아가게 돼. 딱히 연기하는 건 아니고, 원래 그런 거야."

"벤치에 있던 어른들도요?"

"그래. 회사에 있는 나, 일로 만난 사람과 있는 나, 부모인 나, 남편인 나, 아내인 나. 여러 모습이 있어. 그렇게 살다가 가끔씩 이렇게 공원을 찾아. 사람들한테서 벗어나 혼자만의 장소에서 아무것도 아닌, 다른 사람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자신을 되찾는 거지. 네가 이 공원에 온 것도 같은 이유 아니었을까?"               p.100


학창 시절에는 모두 글쓰기를 숙제로 먼저 접하게 된다. 일기도, 독서 감상문도 모두 그렇다. 그래서 아이들은 글쓰기가 매우 어렵고, 재미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이 작품 속 문어도리 역시 일기 정도는 써 본 적이 있지만, 하나도 재미없었고 자신에 대해 알게 된 것도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먼저 한다. 매일 일기를 쓰느니 차라리 글짓기가 낫겠다고 말이다. 매일 특별한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니 일기는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매일 똑같은 내용을 쓰게 된다는 문어도리의 말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누구나 날마다 무슨 생각이든 하면서 살아간다. 아주 사소한 일에도 자신한테 질문을 이거 가다 보면 사고가 점점 깊어지고, 일기에 날마다 다른 내용을 쓸 수 있게 된다는 거다. 글쓰기를 통해 혼자가 되는 시간을 갖는 다는 것, 노트를 펼치면 나만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학업에 시달리는 학생에게도, 일상이 지친 직장인들에게도 든든한 위로가 되어줄 것 같다. 


문어도리가 소라게 아저씨와 대화를 나누면서 하나씩 글쓰기에 대해 배워가고, 그 중간 중간 문어도리의 일기가 수록되어 있다. 문어도리의 일기가 어떻게 달라지는 지를 따라서 읽어가는 과정도 매우 흥미로웠다. 바닷속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우화방식으로 진행되는 글이라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운 삽화들을 만나는 재미도 있었다. 인스타그램, 트위터, 틱톡, 페이스북,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 등 요즘의 청소년들에게는 빠르게 변해가는 SNS 세계가 너무도 익숙할 것이다. 유행만 빠르게 따라가다 보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거나, 깊이 사고할 수 있는 경우가 없게 마련이다. 이 책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고 단단한 자존감을 가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외톨이였던 문어도리가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점차 변화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 책은 한 편의 동화처럼 읽히지만, 훌륭한 글쓰기 책이기도 하다. <미움받을 용기>의 저자 고가 후미타케가 청소년들에게 건네는 다정한 이야기는 어른들에게도 위로가 되어준다. 진정한 나 자신의 모습과 마주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만큼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이 책을 통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 '혼자가 될 용기'를 얻게 된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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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산가옥의 유령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4
조예은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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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외증조모에게 삭막한 시멘트 건물을 밀고 작은 온실을 짓자고 조르기도 했다. 하지만 외증조모는 늘 온화하게 웃으며 거절했다. 별채의 주인은 다른 사람이라는 아리송한 핑계를 대면서. "그곳은 우리의 것이 아니야. 안에 누군가 살고 있는데 건물을 부술 수는 없지 않니?"

이 정도면 내가 별채에 가지는 공포심에 어느 정도의 설명이 됐으리라고 생각한다. 그곳은 나에게 늘 두려움의 공간이었다.            p.17


우박이 쏟아지고 강풍이 몰아치던 10월의 어느 새벽, 외증조모는 50년을 넘게 살아온 적산가옥의 별채에서 쓰러진 채 발견된다. 혼자서 일어설 수도 없었던 외증조모가 폭풍우가 몰아치는 새벽, 홀로 별채에 갈 수 있었던 것도 의아했고, 꼭 소리를 들으려는 듯처럼 바닥에 한쪽 귀를 댄 자세였던 것도 기이했다. 이후로 적산가옥은 방치되었고, 운주는 10년 만에 그곳에 도착한다. 외증조모의 유언으로 일제강점기에 지어지는 붉은 담장의 적산가옥과 비밀로 가득한 별채로 돌아온 운주는 그곳에서 수십 년을, 수 세대를 거슬러 존재할 망령과 조우한다. 가엽고 끔찍한 망령은 별채에 감춰진 비밀로 운주를 이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이야기는 음산하고 서늘한 기운을 내뿜으며 우리를 피와 비명이 깃든 그 집으로 데려간다. 


1930년대에 지어진 적산가옥의 첫 주인은 가네모토라는 성을 가진 일본인 무역상이었다. 그는 지주와 농민들에게 빼앗은 땅으로 곡식을 수출해 어마어마한 부를 이루었다. 그가 손을 대는 사업은 크든 작든 모두 성공했고, 발을 빼는 분야는 귀신같이 악재가 생기곤 했다. 덕분에 그에게 조언을 구하려는 풋내기 사업가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했다. 간호사였던 외증조모는 그 집에 간호사로 들어가 살며, 몸이 허약해 집에만 있던 도련님을 보살피게 된다. 소년은 주의가 산만하고 성격이 포악해 몸에 상처를 자주 만들고, 작은 동물들을 해부해 바닥에 늘어놓고는 했다. 외증조모가 실제로 겪었던 과거의 경험들은 운주에게 현실의 악몽이 되어 돌아온다. 운주는 꿈 속에서 외증조모가 되어 적산가옥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일들을 지켜보게 되고, 소년의 유령은 현실에 나타나 백일몽의 나날을 보내게 만든다. 하지만 운주는 당장 짐을 싸서 저주받은 집을 벗어날 생각은 하지 못한 채, 망상에 사로잡혀 별채로 계속 향하게 된다. 




유타카는 무척 재밌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활짝 웃었다. 그런 뒤 맑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럴 일은 없어. 나도 아머지도 곧 죽을 거거든."

소년이 내게 바짝 얼굴을 붙여 왔다. 손목을 붙잡고, 귓가에 짓궂은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나는 그때 그가 한 말을 얼마가 지나서야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내가 죽일 거야."               p.95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과 함께하는 <현대문학 핀 장르>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이다.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은 인간이었던 흡혈인과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인조인간이 기계에 대항하는 사투를 보여주었던 정보라 작가의 <밤이 오면 우리는>이었다. 두 번째 작품은 단요 작가의 <케이크 손>, 그리고 세 번째 작품은 이희영 작가의 <페이스>였다. 이번 작품은 <스노볼 드라이브>, <만조를 기다리며>, <입속 지느러미> 등의 작품을 발표해 온 조예은 작가의 <적산가옥의 유령>이다. 언제나 강렬한 임팩트가 있는 작품으로 이야기가 끝이 나도 긴 여운을 남겨주는 서사를 보여주었던 작가이기에 이번 작품 역시 매우 기대하며 읽었다. 호러라는 장르적 요소를 매우 섬세하게 풀어내며 조예은표 새로운 호러 소설을 만들어냈다. 


피처럼 붉은 벨벳 소파와 꾸불꾸불한 내장을 훤히 드러내고 있는 잉어 한 마리, 화려하고 아름다운 본채와 차갑고 어두운 별채, 그리고 나무가 빽빽한 정원까지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숨과 기억을 주고받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적산가옥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끊임없이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까 궁금해하며 페이지를 넘기게 되는 작품이었다. "오직 호러만이 죽은 자가 죽은 입으로 자신의 소리를 낸다."고 말하는 조예은 작가는 요즘 같은 계절에 읽기 딱 좋은, 정말 무서운 이야기를 탄생시켰다. 유독 길고 덥다는 이번 여름을 함께 하기에 너무 좋은 작품이다. 죽은 자들이 가지는 그 지독함과 애달픔으로 빚어낸, 기괴하지만 아름다운, 서늘하지만 온기를 품고 있는 이 특별한 이야기를 만나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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