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구리네 떡집 난 책읽기가 좋아
김리리 지음, 김이랑 그림 / 비룡소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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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랑지는 정성 들여서 도토리떡을 만들었어. 그런 다음 삼신할머니의 편지를 가져와서 도토리떡에 부채질했어. 그러자 신기하게도 편지에서 하얀 연기가 회오리처럼 피어오르더니 도토리떡을 감싸고 뱅글뱅글 돌았어. 꼬랑지는 왕구리의 잃어버린 기억이 모두 돌아오길 간절히 바라면서 더 열심히 부채질했지.

"왕구리야, 빨리 일어나 봐. 너를 위한 떡을 만들었어."          p.17


<만복이네 떡집> 시리즈, 그 열 번째 이야기가 나왔다. <만복이네 떡집>을 시작으로 <장군이네 떡집>, <소원 떡집>, <양순이네 떡집>, <달콩이네 떡집>, <둥실이네 떡집>, <랑랑형제 떡집>, <하하자매 떡집>, <해님달님 떡집>까지 모두 아이와 함께 읽어 왔다. 그래서 이번 <왕구리네 떡집>은 더 기다렸는데, 바로 그 동안 꼬랑지의 든든한 조수로 활동했던 왕구리의 사연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시리즈 일곱 번째 <랑랑형제 떡집>에서 혼자 떡을 만드느라 고군분투하는 꼬랑지의 모습을 지켜보던 삼신할머니가 꼬랑지를 도와줄 개구리 '왕구리'를 보냈었다. 그렇게 왕구리가 등장해 이후 소원 떡 배달에 나서기 시작했었다. 이후 랑랑 형제, 하하 자매, 해님달님 남매 이야기가 계속 등장하며, 주요 캐릭터로 단단히 자리를 잡았었다. 전작에서 겨울잠을 자야 하는 계절이 다가오고, 떡을 배달하는 와중에 참을 수 없는 졸음이 쏟아지는 왕구리의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이번 작품에서 집에 올 시간이 지났는데 오지 않는 왕구리를 기다리는 꼬랑지의 모습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눈 쌓인 언덕에서 몸이 얼음처럼 꽁꽁 얼어 있는 왕구리르 발견한 꼬랑지는 서둘러 떡집으로 돌아와 정성껏 간호한다. 긴 겨울 잠을 자고 깨어난 왕구리는 아무 것도 기억을 못하는데, 꼬랑지는 왕구리를 위해 '잃어버린 기억이 되돌아오는 도토리떡'을 만들기 시작한다. 




"응. 우리 착한 신나라 선생님을 도와줄 수 있는 떡이면 좋겠굴개. 우리 선생님이 교장 선생님한테 자주 혼나거든."

"하지만 어른을 위한 떡은 한 번도 만든 적이 없어. 소원 떡을 만드는 비법 책에도 어른들을 위한 소원 떡이 나타난 적은 없어."

꼬랑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어.             p.59


이번 작품에는 세가지 떡이 등장한다. 잃어버린 기억이 되돌아오는 ‘도토리떡’, 바라는 모습으로 변신하는 ‘모시떡’, 그리고 몸이 좁쌀만큼 조그매지는 ‘조매떡’이다. 왕구리의 사연과 간절한 소원을 들어줄 이 떡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아주 특별한 점이 있다. 바로 그 동안 한 번도 없었던 '어른을 위한 떡'이 나온다는 점이다. 김리리 작가는 '어른도 돕고 싶으니, 어른을 위한 떡도 만들어 달라고' 한 어린이 독자의 따듯한 마음이 담긴 요청을 이야기에 풀어냈다. 어른을 위한 떡은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는 꼬랑지가 어떤 떡을 만들어낼 지 기대하며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왕구리가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었는지, 어떻게 꼬랑지에게 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왕구리의 소원은 무엇이었는지 밝혀지는 것도 흥미진진하지만, 진짜 재미는 왕구리의 깜짝 놀랄 만한 변신이다. 학교에 가게 된 왕구리의 좌충우돌 대 활약도 이번 작품만의 특별한 재미가 되어 준다. 


아이들은 정말 재미있는 책이 아니면 같은 책을 여러 번 읽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복이네 떡집 시리즈는 읽고, 또 읽어도 재미있다고 한다. 이유가 뭘까. 매번 새로운 주인공이 등장하는 것도 이유가 될테고, 꼬랑지가 만들어 내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맞춤형 '소원 떡'이라는 설정 또한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재미를 만들어 내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이야기 자체가 자극적이지 않고, 따뜻하고, 다정해서 이 이야기를 읽는 동안에는 편안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 덕분에 어느 덧 밀리언 셀러를 넘어 누적 판매 160만 부를 돌파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아이들을 위한 힐링 판타지 동화로서 가장 선두에 있는 것이 바로 이 시리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에 다음 번 작품의 예고를 해주는 것도 특징인데, 다음 번 이야기는 <장돌이네 떡집>이라고 한다. 꼬랑지와 같은 반이된 장군이 동생 장돌이에게는 또 어떤 소원이 있을지, 다음 이야기를 기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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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멜론 슈거에서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처드 브라우티건 지음, 최승자 옮김 / 비채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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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들판과 소나무 숲, 시내를 가로질러 잊힌 작품까지. 모든 게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들판에서 풀을 뜯는 소 떼와 오두막집 지붕, 잊힌 작품의 커다란 더미가 티끌처럼 보였다. 대기 자체가 잿빛이었다. 

이곳 태양엔 재미있는 점이 하나 있다. 태양이 날마다 다른 색깔로 빛난다는 것이다. 왜 그런지는 아무도 모른다. 찰리마저도. 우리는 서로 다른 색깔의 워터멜론을 한껏 잘 키운다.           p.69


'워터멜론 슈거에서'라는 달콤한 제목을 가진 이 작품은 파스텔톤의 알록달록한 솜사탕 구름들로 가득한 아름다운 표지부터 시선을 사로잡는다. 시인 최승자가 미국의 헌책방에서 발견해 직접 번역까지 맡아 소개한 작품으로 국내에는 2007년에 출간되었는데, 이번에 새로운 표지와 장정으로 다시 나왔다. 이야기는 요일마다 다른 색의 태양이 뜨는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이곳에서는 일곱 가지 햇살을 먹고 자란 일곱 가지 색의 워터멜론 즙을 끓여 필요한 모든 것을 만들어 쓴다. 


워터멜론 공장에는 커다란 통에서 끓고 있는 달콤한 슈거 냄새가 허공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온갖 모양과 빛깔의 슈거들이 가로로 층층히 쌓여 있다. 강에는 송어들이 살고 있고, 한쪽에는 잊힌 물건들의 커다란 더미가 산처럼 쌓여 있는 '잊힌 작품'이라는 장소가 있다. 이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는 '아이디아뜨’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브라우티건이 만든 'iDEATH'라는 합성어는 ‘i’와 ‘DEATH’ 혹은 ‘idea’와 ‘DEATH’로 해석되는데, 어느 쪽으로 읽든  ‘DEATH’을 내포한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가장 이상향의 장소를 만들면서 '죽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뭘까. 아마도 그것은 유토피아적 공동체에서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꿈조차 유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다. 실제로 극중 인보일 일당이 아이디아뜨로 찾아와서, 사실 아이디아뜨란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의 환상일 뿐이라고 폭로하며 문제를 일으키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잊힌 작품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가볼 수 없는, 그리고 가보길 원치도 않는 먼 곳까지 뻗쳐 있기에.

잊힌 작품 아주 멀리까지 들어가본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찰리가 말한, 그곳에 관한 책을 썼다는 그 사람 외에는. 그 사람의 고민거리는 무엇이었을까. 거기 들어가서 몇 주일을 보내다니. 

잊힌 작품은 자꾸 자꾸 자꾸 자꾸 자꾸 자꾸 자꾸 자꾸 자꾸 이어질 뿐이다. 그러면 상상이 갈 것이다. 그곳은 크다. 우리보다 훨씬 크다.              p.112


이 작품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는 아이디아뜨 근처의 한 통나무 오두막에서 살고 있다. 작지만 즐겁고 편안한 통나무 오두막 역시 소나무와 워터멜론 슈거와 돌로 만들어져 있다. 창밖으로 차갑고 맑은 강이 보이고, 강물에는 송어가 살고 있다. '나'는 워터멜론 씨앗으로 만든 잉크에 펜을 적셔 향긋한 냄새가 나는 목판지에 글을 쓰고 있다. 이 마을에서 마지막 책은 삼십오 년 전에 쓰였고, 지금 쓰고 있는 책은 스물네 번째 책이 될 예정이다. 이곳의 다른 책들은 태워서 땔감으로 쓰이거나, 잊혀진 작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장소인 '잊힌 작품'에 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일상이 잔잔하게 이어지다, 한때 마을 주민이었던 인보일 일당이 들이닥치면서 소동이 벌어진다. 주어진 풍요에 만족하며 사는 이들과 그들의 낙원을 부정하는 이들 사이의 난장은 결국 누군가의 죽음으로 연결되지만, 그것조차 이 작품 속에서는 비극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대표작인 <미국의 송어낚시>가 1967년에 출간되었고, 이 작품은 바로 그 다음 해인 1968년에 출간되었다. 전작과는 완전히 다른 기법과 상상력으로 쓰여 문학적인 신선함을 안겨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목가주의자들의 유토피아적 사회 공동체를 연상케 하는 이 마을에서도 사람들 사이에 다툼이 있고,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기도 하며, 영원하지 않은 유한한 삶을 산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 어쩔 수 없는 거리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설탕으로 만들어진 세계’라는 동화같은 설정에 시적인 문장들로 쓰인 작품이지만, 줄거리라고 할 수 있을 만한 내용이 없어 여러 번 읽어도 모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분명하지 않음과 이해할 수 없음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움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조금 어렵게 느껴진다면 <미국의 송어낚시>를 우리말로 옮겼던 김성곤 교수가 작품 해설을 썼으니 참고해도 좋을 것 같다. 시처럼 리드미컬한 산문으로 쓰인 이 작품을 통해 목가적인 꿈이 보존되어 있는 브라우티건 표 달콤쌉싸름한 환상의 세계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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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패거리
필립 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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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국민들의 삶 중 어떤 부분에서도 불의를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리스펙트풀 기자. 우리는 공정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부자와 특권층뿐만 아니라, 가장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공정한 사회입니다. 요즘 흑인의 힘이니 여성의 힘이니 이런저런 힘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태아의 힘은 어떨까요? 비록 세포에 불과하다 해도, 그들 역시 권리를 갖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들에게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권리를 위해 싸울 겁니다.                p.30


이 작품은 '개인적 종교적 신념에 의거하여 나는 인구통제의 수단으로서 낙태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미국 제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실제 연설 내용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의 생명 또한 법적으로 인정되는 권리를 분명히 갖고 있다는 그의 말은 극중 미국 대통령인 트리키와 국민과의 대담에 의해 보다 더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보여진다. 트리키는 당사자의 의사에 따른 낙태 또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문제이며, 세포에 불과한 태아 역시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권리를 위해 싸울 거라고 주장한다. 급기야 태아에게도 투표권을 주게 될 헌법 수정안을 제안하겠다고 나서는데, 태아들이 어떻게 투표를 할 수 있다는 건지, 태아들이 야당인 민주당 후보보다 대통령에게 표를 줄 것이라고 믿는 근거가 뭔지 질문하는 기자들에게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답변을 늘어놓는다. 


이러한 대통령의 얼토당토않은 주장에 국민적 반감이 거세지며 정부를 향한 소요 사태까지 발생하자, 그는 백악관 지하 로커룸에 측근들을 모아 작전회의를 열기로 한다. 정치 코치, 마음 코치, 군사 코치, 법률 코치, 교양 코치가 모여 대책 회의가 시작된다. 대통령을 비방하는 무리를 모두 총으로 쏴버리자고 하고, 죄를 뒤집어씌울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다섯 명의 명단을 만들어 정의를 실현하자더니 야구선수와 보이스카우트가 국가를 위협하는 폭도 무리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얼마 뒤, 대통령이 아침 7시에 시신으로 발견된다. 사망 원인이나 발견 장소에 대해서는 아무런 발표가 없었고, 언론은 대통령의 사망에 관련된 여러 추측을 보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백악관 앞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들은 제각각 자신이 대통령을 죽였다고 주장하는데, 급기야 서로 자기가 범인이라면서 주먹을 휘두르는 사태까지 벌어지며 나라는 대혼란 상태가 되어 버린다. 온갖 평범한 사람들이 대통령을 죽인 범인이 자신이라고, 체포해달라면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이상한 상황의 진실은 무엇일까.





음, 저는 그냥 여기 서서 제 볼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대통령을 살해한 범인이 바로 저라고 경찰관에게 자백하려고 했죠. 그때 단춧구멍에 꽃을 꽂은 화려한 남자가 리무진을 타고 나타나서 저와 경찰관 사이에 끼어들어 자기가 범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다음에는 어떤 흑인 남자가 나타나서, 저는 흑인 남자들한테 전혀 불만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정말 건방졌어요. 그놈이 하는 말이 우리 둘 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 자기가 바로 범인이다, 이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운전기사가 그 남자한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라고 말했는데, 그게 시발점이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남자 열다섯 명이 서로 자기가 범인이라면서 주먹을 휘두르고 있더라고요.             p.212~213


미국 제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실제 발언을 모티프로 삼은 이 작품은 필립 로스의 초기작이다. '대통령이라는 강력한 직위에 부여된 존엄성, 그 갑옷을 깨부술 생각'이라고 이 작품의 집필 의도를 밝혔던 필립 로스는 미국 대통령을 ‘사기꾼’이라는 의미의 ‘트리키Tricky’로, 국방장관을 ‘돼지기름’을 뜻하는 ‘라드Lard’로 지칭하며 출간 당시 대통령이었던 닉슨과 당대 내각을 향한 조롱과 풍자를 조금도 숨기지 않는다. 자기과시적 성격과 부족한 지능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대통령과 그에게 과잉 충성하는 장관들의 대화는 일종의 코미디처럼 느껴질 정도로 노골적이고, 폭소를 유발시킨다. '이 나라가 위대해지는 데 필요한 것이 바로 대량의 무지입니다.'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대통령이라니, 수파 진영의 표를 끌어모으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일도 아무렇지 않게 하는 후안무치한 모습에 그저 기가 막혔다. 


낙태를 ‘인구 통제 수단’으로 규정하고, 태아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하겠다는 주장을 비롯해 나라가 위대해지는 데 필요한 것이 바로 대량의 무지라는 발언에 이르기까지 오직 재선만을 바라보는 대통령의 파렴치한 행보는 사실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지금의 정치판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것은 이 작품이 미국의 정치판을 그리고 있고, 출간된 지 반세기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바로 지금, 우리에게 도착한 이유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오직 재선만을 바라보는 대통령의 처절하고도 우스꽝스러운 행보는 다소 극단적이라고 느껴질 정도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허구보다는 현실에 가깝다는 것이 서글픈 진실이다. 실제로 이 작품이 출간되고 3년이 지난 뒤, 사상 초유의 워터게이트 사건 발발로 리처드 닉슨은 탄핵안이 가결된 이후 자진 사임하는 일이 있었으니 그야말로 이 작품이 무능한 지도자를 향한 필립 로스의 문학적 테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인지 터무니없이 불공평하고,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상식을 말살하는 이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통쾌한 지점들이 있다. 현실에 만연한 정치 언어의 교묘한 변용과 조작을 문학적으로 실연한 필립 로스의 놀라운 작품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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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w2700 2024-06-16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둘도 없는 사이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백수린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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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색한 침묵이 감돌고, 기트 언니가 쌀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린애들은 자기가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니야.”

앙드레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웃었다. 나는 난처해하며 앙드레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내가 이해하는 사랑은 하나밖에 없었다. 앙드레를 향해 내가 품고 있던 사랑.             p.46


오랜 시간 동안 '둘도 없는 사이'로 지내는 관계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 친구일 수도 있고, 대학 때 만난 사이일 수도 있고, 사회 생활을 하며 만나게 된 관계일 수도 있다. 우리는 평생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때로 그 관계는 나를 변화시키고, 가치관을 완성시켜주고, 삶을 달라지게 만들기도 한다.


이 작품 속 두 주인공, 실비와 앙드레는 아홉 살에 학교에서 처음 만난 단짝 친구다. 실비는 처음부터 앙드레가 마음에 들었다. 다른 모든 아이들이 자신을 지겹게 한데 비해, 앙드레는 자신을 웃게 만들었다고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실비는 앙드레의 집에 드나들기 시작하고, 방학 동안에는 엽서를 쓰고, 그러면서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모범생이었던 실비는 선생님들이 정말 바보 같다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들이 곤란해할 질문들을 던지는 것을 즐겼으며 반항을 하거나 선생님들의 충고를 건방진 태도로 받아들였다. 살면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말처럼, 어떤 친구를 사귀느냐에 따라 삶의 많은 부분들이 바뀌게 마련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아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고, 둘도 없는 친구 사이로 우정을 나눈다. 하지만 실비 앞에 무한한 세계가 열리는데 반해, 앙드레는 죽음을 향해 간다. 영원히 지속되는 관계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앙드레가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으면 앙드레를 대신해 네가 결정해서는 안 되지." 내가 말했다.

"아냐, 앙드레 자신으로부터 앙드레를 지켜 주는 게 내 역할이야. 앙드레는 너무 관대하니까 사랑 때문이라면 지옥에라도 떨어지려 할 거야."

"불쌍한 앙드레! 모든 사람들이 앙드레를 구원받게 하고 싶어 하는구나. 앙드레가 그토록 원하는 것은 이 지상에서 조금이라도 행복해지는 것인데!"               p.166~167


이 작품은 시몬 드 보부아르의 미발표 유작이다. 생전에 출간되지 못했다가 그녀의 입양 딸인 실비 르 봉 드 보부아르에 의해 2020년에야 비로소 세상에 공개되었다. 사후 40년 가까이 흐른 지금, 소설가 백수린의 국내 첫 완역으로 만나보게 되었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던 보부아르는 현대 페미니즘의 선구적 역할을 한 작가이다. 국내에는 <제2의 성>을 비롯해 공쿠르상을 수상한 <레 망다랭> 등의 작품으로 소개가 되었다. 보부아르는 소설가이기도 했지만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친 선생님이었고, 사르트르와 함께 정치철학 잡지를 창간한 저널리스트이자 극작가, 페미니즘 사상가 등 다양한 모습으로 정열적으로 활동했던 걸로도 유명하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와는 계약 결혼 관계를 맺고,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 연인이자 지적 동반자이기도 했다. 그런 보부아르가 사르트르를 만나기 전, 사랑과 동경의 대상이었던 친구이자 둘도 없는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그리 많이 알려진 사실이 아니다. 그래서 이 작품이 더욱 특별한 것이고 말이다. 


극중 실비와 앙드레는 보부아르 자신과 실제 단짝 친구였던 자자를 그린 것이고, 자자는 스물한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일명 ‘자자’라고 불렸던 보부아르의 단짝 친구는 엘리자베스 라쿠앵으로 재기발랄한 성격과 다양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두 사람은 엄격한 가톨릭 명문이었던 데지르 학교에서 처음 만나 친구가 되었다. 보부아르는 지우고 고쳐 쓴 여러 버전으로 이 소설의 원고를 평생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미발표된 젊은 시절의 소설들과 단편집, <레 망다랭>의 삭제된 페이지까지 총 네 번에 걸쳐서 자자라는 캐릭터를 부활시키려 했었다고 한다. 결국 짧은 소설의 형태로 자자의 이야기를 그린 이 원고만 남았고, 2020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세상에 공개된 것이다. 그만큼 사랑과 동경의 대상이었던 친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자전 소설인 이 작품은 그가 마지막까지 쥐고 있었던,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개된 미발표 유작으로서 가치가 있다. 특히나 국내 번역본에는 책의 후반부에 실존 인물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친필 편지가 부록으로 구성되어 애틋한 마음과 감정들이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느껴지도록 했다. 보부아르가 오랜 세월에 걸쳐 쓰고 간직했던, 영혼의 단짝과의 아주 특별한 우정 이야기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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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움직인 열 가지 프레임 - 현대 문명의 본질과 허상을 단숨에 꿰뚫는 세계사
수바드라 다스 지음, 장한라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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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전된 총이 공기를 가로질러 총알을 전달하듯이, 글로 쓰인 말은 기술, 사상,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누가 썼는가라는 흥미로운 사안을 제기할 수 있었던 까닭은, 어느 정도는 그가 문서 기록에는 비교적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가능했다. 이렇게 남은 공백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으로 채워질 수가 있었다. 스스로의 글을 발표할 수 있는 사람들의 생각도 포함해서 말이다. 이런 점은 글이 지닌 힘과 생각의 본성에 관해 무언가를 알려준다. 살아남는 생각, 전해지는 이야기,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들에 관해서 말이다. 현실에서는 글은 글 자체만을 들려주는 것이 아니다.             p.98~99


누구의 말도 그대로 믿지 말라, 아는 것이 힘이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 정의의 여신은 눈을 가리고 있다, 시간은 돈이다,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등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말들이다. 게다가 이러한 말들은 누구도 그 개념을 믿어 의심치 않는 확고한 진리처럼 통용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보자. 이 신념들이 사실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문명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는 이러한 생각들은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이 책은 그렇게 오랜 시간 지켜온 신념으로 공유되는 열 가지 핵심 가치의 이면을 살펴보고, 그러한 개념들의 생성 과정을 탐구한다. 


과학, 교육, 문자, 법, 민주주의, 시간, 국민, 예술, 죽음, 공동선이라는 중요한 가치를 통해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기도 하다. 셰익스피어를 둘러싼 음모론, 잉카제국의 문자가 역사에서 삭제된 이유, 불평등과 불공정함으로 가득 찬 세상, 단 한 번도 국민에게 권력이 주어진 적이 없었던 민주주의라는 허상, 과학을 독차지한 자들, 서구의 시간 개념이라는 덫 등 우리가 문명화의 증거라 믿었던 것들, 아무런 의심 없이 수용했던 가치들 속에 어떤 권력의 프레임이 숨겨져 있는지 알게 된다면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 세운 문명화의 기준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누가 확립했으며, 결정적으로 누가 이익을 보고 있는지 말이다. 





이 재밌는 이야기를 망치는 것 같아 아쉽지만 사실관계를 확실히 하는 게 역사학자인 나의 임무다. 클레리지스 호텔의 스위트룸이 하루 동안 유고슬라비아가 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기록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보기에 이 이야기는 기껏해야 희한한 동화 정도로 보인다. 난관에 부닥친 왕족이라는 전형적인 등장인물들이, 국민적인 영웅이자 요정인 대부의 너그러운 변덕 덕분에 외교술이라는 마법을 통해서 구원받았다는 동화 말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얘기 외에도 클레리지스 호텔 스위트룸 212호 이야기 속에는 우리가 흥미를 품을 만한, 그리고 지금 논의하고 있는 주제와 관련된 또 다른 요소가 있다. 바로 국민이다.                  p.256~257


대부분의 세계사를 다루고 있는 책들이 연대, 사건, 인물과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 반면에, 이 책은 개념과 생각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어 신선했다. 서양 문명의 역사적 기원을 추적해 거짓말이 지탱하고 있던 세계사라는 파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으니 말이다. 1장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과학이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내용이었는데, '인종'이라는 개념을 정립하는 데 과학과 합리적 사고라는 마법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우생학을 거쳐 홀로코스트 유대인 학살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인종적 특징으로서의 문명이 겉으로 보기에는 객관적인 과학적 진리라는 사실이 이른바 문명사회라는 곳 도처에서 보이는 사회적 불평등의 존재 이유에 대한 답이 되어준다니... 커튼으로 가리고 있던 세계의 한 단면을 마주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2장에서는 이론으로서의 교육과 실제 교육은 서로 다르다는 이야기로 시작해 중립적 교육이라는 환상을 넘어 교육의 핵심이 무엇인지에 이른다. 


3장은 특히나 흥미로웠는데, 셰익스피어가 쓴 것으로 알려진 연극과 시를 누군가 다른 사람이 섰다고 발표한 연구들이 상당히 많이 존재한다는 것으로 시작해 대문호를 둘러싼 음모론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사회학자, 인류학자가 변태적으로 집착하는 대상이 있다면 바로 '글'이라고 하면서 모든 것을 표현하는 게 가능한 마법 같은 수단인 '글'에 대해 잉카 문명부터 시작해 두루 살펴본다. 이후 법과 정의, 민주주의의 역사, 시간과 국민에 대한 개념, 예술과 문화유산, 죽음 문화의 변천사, 그리고 공동선과 개인의 행복에 대해 살펴본다. 어떤 역사 책에서도 다루지 않는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이야기라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이 책은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 세계가 만든 거대한 억압과 착취의 구조를 통해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역사를 보는 자신만의 관점을 얻고 싶다면, 권력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을 되찾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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