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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을 내는 철학책 - 삶의 궤도를 바꾸는 전방위적 철학 훈련
황진규 지음 / 철학흥신소 / 2024년 9월
평점 :
철학은 사람을 어떤 의미를 찾는 존재로 이끕니다. 고대부터 철학의 출발점은 거기였고, 지금처럼 물질문명이 발달한 시기야말로 철학이 사람의 삶 중심에 다시 놓여야 할 때입니다. 여태 무심히 봐 넘겼던 일상도 사물도 자연도 철학이라는 필터를 입히면 다르게 보입니다. 그저 착시가 아니라 나의 둔한 눈을 틔워 주고, 여태 생각지 못했던 바를 일깨웁니다. 저자 황진규 선생님처럼 많은 이들에게 철학을 가르치는 일을 하시는 분들의 삶이 보람으로 가득한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p76에는 관계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관계는 평등한 관계도 있고, 일방이 타방에 종속된 경우도 있습니다. 종속이면서도 불가항력적인 관계 중 자발적인 것도 있고 비자발적인 것도 있는데, 후자는 부모-자녀 사이가 대표적입니다. 책에는 선생-학생도 예로 나오는데 이건 초중등학교에서 무작위로 배정되는 경우가 그렇겠습니다. 그럼 전자의 대표는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분명 불가항력적이지만 자발적입니다. 이 미묘한 모순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 감정인데도 헷갈려하고 올바른 관계 설정을 어려워합니다. 이처럼 철학의 프레임으로부터 도움을 받으면, 내가 직면한 문제의 성격이 더 분명히 보입니다. 우리에게 아마 영원히 낯설 미래,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이처럼 남겼습니다.
"구경은 보는 것이지만, 사랑은 '하는' 것이다.(p120)" 사랑만큼 개념, 관념에 머물길 거부하는 그 무엇도 없습니다. 사랑을 책으로 배웠냐는 우스개도 있지만, 사랑은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프랑스의 평론가 기 드보르는 구경만 하는 행위의 한계와 취약점을 지적합니다. 사태의 변천에 주인공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자가 구경꾼으로 머물고 소외되는 건데, 그래서 이 병든 사회에 리얼리티 예능이 그처럼 판을 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본주의 발달 이전에는 으뜸되는 감각이 지금처럼 시각이 아니었고, 사람이 주체가 되어 직접 만져 보고 관계를 설정할 수 있게 하는 감각이 바로 촉각이었다고도 합니다. 그래서 관계를 완성하는 사랑이란, 몸소 "하는" 형태라야 비로소 제값이 쳐 지는 셈입니다. 이제 더 이상 온갖 요상한 상업적 이미지로부터 자극만 받지 말고,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사랑을 해 보자는 게 저자의 제안입니다.
300여년 전 동프로이센의 철학자 칸트를 보면 어쩌면 한 인간이 이처럼이나 박학다식하고 철두철미한 탐구정신을 지녔을까 하는 감탄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습니다(올해는 칸트 탄생 300주년이 되는 연도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는데, 그 중에는 인간의 미성숙을 다룬 대목(p143)도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한 인간이 나이에 걸맞지 않게 미숙하다고 하면, 머리가 모자라다, 지성이 부족하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칸트는 지성이 설령 정상이라고 해도, 그 지성을 활용할 용기가 부족하면 역시 미성숙한 사람으로 머문다고 합니다. 대개 사람이 자기 현실을 똑바로 직시할 자신이 없고 말도안되는 망상에 사로잡히길 좋아한다면, 이 역시도 미성숙의 뚜렷한 증명이 됩니다. 물론 이런 사람은 대체로 머리 역시도 모자라며, 그 아들 손자 대에도 그런 특성이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진실은 힘이 강합니다. 진실이 위대한 이유는, 별반 가공을 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많은 문제를 통짜로 해결해 버리는 무서운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아무리 불편하다 해도 그대로 진실을 까발겨버리면 그 복잡하던 문제가 저절로 해결책을 찾기도 합니다.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너무도 솔직하게, 인간은 본래가 폭력적이며 존재 자체가 폭력(p180)이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솔직합니까? 말만 번드르르하게 늘어놓고 문제를 호도하기보다 이처럼 대놓고 솔직해지는 언명을 보면 속이 다 시원해집니다. 삶의 조건 자체가 폭력인데 뭘 옳고 그름을 따집니까? 우리가 공기, 심장, 눈, 물에 대해 언제 찬반을 가린 적 있습니까? 폭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사람이 동물과는 다른 탓에, 어떻게 해야 그 행사하는 폭력이 조금이라도 더 인간적으로 순화되고 공리적일 수 있을지 고민할 뿐입니다.
결단주의 정치학자 카를 슈미트는 국가의 존재 이유에 대해 지도자의 과감한 결단이라는 행위로 그 논의의 출발점을 잡았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인간은 나 외에 모두를 적으로 삼으려는 본능(p303)을 가졌습니다. 이러니 정치판뿐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싸움이 그칠 날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자들은 근거없이 특정 지역을 폄하하고, 그 과정에서 개인의 내밀한 믿음을 비난하기도 합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규정(헤겔은 규정에 대해, 부정의 부정이라고 말한 바 있죠)하길,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연속"이라 했습니다. 적을 없애버리는 근원적 방법 중 하나가 모두를 적으로 돌리는 자발적 고립이라는 역설을 통해, 대체 개인을 둘러싼 조직, 사회, 국가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