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너무 많은 나에게 - 후회와 걱정에서 벗어나 지금을 살기 위한 심리학자의 마음 수행 가이드
변지영 지음 / 오아시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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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생각이 없어도 문제이지만, 반대로 생각이 지나치게 많아도 행동이 꼬입니다. 이 책 겉표지를 보면 대뜸 이 말이 눈에 띕니다. "항상 당신을 가로막는 건 언제나 생각이었다!" 아마 이 말에 공감이 크게 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결국 타이밍을 놓치고 만사휴의가 되고 마는 난감한 체험, 우리 모두가 한 번 정도는 겪어 보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소중한 정신적 자산인 생각을 포기할 수야 또 없는 일입니다. 이 책은, 어떻게 우리가 생각의 가닥을 잘 정리하고 마음의 안정을 찾아, 우리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을지를 차분하게 가르칩니다. 

p30을 보면 참으로 따뜻한 말 한 마디가 나옵니다. 즉, 우리는 모두가 하나의 작은 텃밭을 갖고 있다는 건데, 그게 바로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일생을 두고 가꾸어 나가는 게 우리의 과제인데, 물론 당사자가 잘못해서 농사를 망치는 것도 부지기수입니다만, 때로는 우리 자신의 책임이라고 할 수 없는 일이 터져 텃밭과 수확을 모두 그르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농사라는 게 본래 그렇지 않겠습니까. 농부가 게으르면 물론 답이 없지만, 반대로 농부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하늘이 돕지 않고, 갑자기 가뭄이나 폭우가 닥치는 일도 흔합니다. 이때 어떻게 텃밭을, 즉 내 작은 마음 한 뙈기를 잘 수습하는지가 우리 모두의 과제입니다.  

우리 자신의 책임이 아닌데도 쓸데없이 자학, 자책하는 건 문제입니다. 물론, 이렇게 자신에게 모든 문제를 귀속시키면서 정말로 숨어 있던 심각한 문제를 찾아내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생각이 괜히 많다"며 지적받는 사람들은, 이 자책, 자학이 과해서 문제입니다. 잡초를 제때 제거하지 않아서, 모를 적기에 옮겨 심지 않아서 농사를 망쳤다, 이러면 그건 분명 농부 자신의 과오입니다. 그런 게으른 농부는 자신이나 타인으로부터 비판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천재지변, 악의를 가진 타인의 난입 등으로 문제가 빚어졌다면, 이건 설령 문제의 확산, 재발을 막기 위해 어떤 대책을 강구해야 할 필요야 있겠으나 지나친 비생산적 자책으로 시간과 역량을 소진할 일은 또 아니겠습니다. 

p104에서는 집착이라는 감정에 대해, 이는 양가적이며 좋음과 싫음을 동시에 표현한다고 책에서는 말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난 너를 좋아한다며 일방적으로 따라다니며 집착한다면, 이는 물론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라 일개 폭력에 지나지 않지만, 이런 나쁜 자는 겉이 아니라 속으로도 상대방(즉 집착대상)을 싫어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너는 왜 내가 갖지 못한 장점을 갖고 있니?라며 그 사람을 졸졸 따라다니며 그 장점을 파괴하려 듭니다. 얼마나 무서운 악한 인간성입니까. 그 죗값은 아마 그 사람의 아들, 정신이 성치 못한 그 손자가 대신 갚을 것입니다.  

책 p136에서는 이런 불건전하고 비생산적인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깊은 명상을 시도해 볼 것을 권합니다. 성공적인 명상은 나 자신을 객관화하고 나의 문제를 마치 남의 상황을 보듯 대상화하고 분석할 수 있게끔 돕습니다. 명상을 통해 우리는 상처입고 괴로워하며 왜 내가 이런 상황에 빠져야 하는지 몰라 방황하는 자신을 저 위에서 바라보게 됩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여러 효과를 낳을 수 있는 명상 기법을 매우 통합적으로, 또 체게적으로,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가르친다는 점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이 나에게 상처를 주고 불편하게 할 때, 왜 저 사람은 나에게 이런 짓을 할까?라며 공연한 생각으로 힘을 빼지 말라고도 합니다.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왜 나에게 악의를 갖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또 알아본들 그게 나에게 무슨 이익을 가져다 주겠습니까? 그보다는, 내가 저 사람의 말과 행동 어떤 부분 때문에 이렇게 상처를 받고 불편해지는 지를 먼저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참으로 타당한 지적입니다. 간단하면서도 실용적인 가르침과 실천 사항이 많아 독자에게 유익한 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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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 익스프레스 - 세계적인 심리학자들의 마음 관리
이동연 지음 / 북카라반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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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 익스프레스 

심리학은 사람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는 과학입니다. 사람의 마음만큼 (자연)과학의 방법론으로 접근하기 부적절한 게 또 어디 있을까 싶은데, 의사 프로이트는 자신의 시대에 꽤나 발전했던 자연과학에서 뭘 그닥 많이 빌려오지 않고도 대단히 치밀하고 따라서 독창적인 이론을 크게 발전시켰습니다. 심리학의 창시자인 그는 여태 인류가 갖지 못했던 유력한 도구를 하나 선사하고 세상을 떠난 셈인데, 그래서 두고두고 후세 사람들이 그를 천재라고 칭송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과연 천재의 이론답게 그의 저술들은 대단히 난해합니다. 그래서 이 주제에 대해 확고한 이해를 지닌 저술가의 솜씨로 쉽게 풀어 쓴 책을 읽는 것도 큰 도움이 됩니다. 이 책에는 우리가 살면서 자주 겪는 여러 난감한 문제들을, 프로이트의 탁월한 이론적 틀을 적용하여 저자가 풀어헤쳐 준 내용들이 가득 실렸습니다. 읽으면서, 아 정말 그렇겠다 싶은 대목도 많았고, 그럴 수도 있겠다 하며 더 깊은 생각을 다짐하게 되는 구절도 있었습니다. 

p61에는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이 몸이 크는 것은 성장인데, 정신이 크는 것은 성숙이라고 부르는 점 우리 모두 잘 압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상하게도 몸이 크면 그에 맞춰 마음도 자동으로 자라겠거니 착각을 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저절로 크는 게 절대 아니기에, 사람은 제 마음을 키우기 위해 인위적인 노력을 해 줘야 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누가 과연 나의 반려자로서 적합한 사람인가?"로 논의를 옮깁니다. 만약 사람이 육체적 성장처럼 정신의 성숙도 태어날 때부터 뭔가 정해진 바가 있다면, 우리가 누군가와 정신적으로 맞고 안 맞고도 처음부터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겠죠. 그러나 성숙은 그 사람이 노력하고 안 하고에 좌우되는 바 큽니다. 그럼 나한테 맞춰 줄 만한 사람, 내 노력에 부응하여 뭔가 노력이라도 해 줄 사람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p121에는 데키무스 유베날리스의 명언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가 인용됩니다. 우리는 이걸 보통 근대 올림픽의 대부 쿠바를 쿠베르탱 남작의 말로 알지만 사실 저 고대 로마 시인이 원 출처입니다. 아무튼 여기서 저자께서 하고자 하는 말은, 사람의 대뇌는 정말로 그 사람이 하고자 하는 일, 평소의 습관, 의지, 취향에 따라 그 구조와 성능, 개성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몸을 일정 용도로 쓰면 정말로 뇌 역시 그에 맞게 가소성있게 변화하며, 예컨대 운동을 하면 그 운동으로부터의 만족감 덕분에 그 사람의 마음과 정신에도 평화가 자리한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p187에서 저자는 1980년대 가수 이은하의 노래 한 소절을 인용합니다. "그렇게 바라보지 말아요. 의미를 잃어버린 그표정" 이 다음엔 "사랑은 끝났으니까 애타게 기다리지 말아요"라는 말도 나오죠(순서는 제가 바꿈). 이 곡은 작사도 이은하씨가 했는데 작곡은 기인 장현씨의 여동생 장덕씨 작품입니다. 여튼 우리는 모두 의미의 구조 속에 사는 동물들입니다. 역시 프로이트의 영향을 크게 받은, 구조주의 철학자인 롤랑 바르트의 논의를 구태여 빌리지 않더라도, 사람은 반드시 금전적 욕망, 식욕, 성욕 등에 끌려서만 행동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명예, 체면, 허영, 충성심, 헌신 등 상징의 영역에 속하는 가치를 위해 심지어 목숨도 거리낌없이 버립니다. 

외모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외모는 안타깝게도 우리 의사 결정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칩니다. 책 p211에는 방통(이명 봉추)의 일화, 또 복룡(?)의 부인 황씨 등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가 마음에 안 들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어떤 면이 그렇게 싫은지 생각을 해 보라고 합니다. 그 사람의 부분적 요소가 그렇게나 마음에 안 들었다면, 그 사람의 전체는 사뭇 다르지 않을지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상식에 비추어 과하게, 연예인이나 정치인 등을 싫어하거나 증오한다면, 그 사람은 아마 누군가에 대해 지나치게 감정적 충성을 바치고 있을 가능성이 크죠(엉뚱한 사람한테 감정적 보상을 구하려 듦). 그 누군가는 아마 그 사람의 생존에 관한 목줄을 쥐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p50). 어린 첩으로 남의 집에서 식모처럼 살림을 살아줬다거나... 물론 이런 걸 지적하면 큰 소리로 부인하겠지만 진실이 목소리의 크기에 비례하여 잘 지워지는 건 아닙니다. 

쉬우면서도 유익한 이야기들이 인생의 이런저런 정곡을 찌르는 책이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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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균렬 교수의 인문핵 - 인문학으로 본 원자핵 철수와영희 생각의 근육 3
서균렬 지음 / 철수와영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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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서균렬 교수께서는 한국 원자핵공학계의 권위자 중 한 분이십니다. 지금은 의치한약수 열풍이 불어 공과대학 선호도가 많이 낮아졌지만 과거에는 우수한 두뇌들이 대거 공대를 진학했었고, 특히 서울대의 경우 원자핵공학과의 입결이 대단히 높았었습니다.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수재들 중에서도 가장 큰 두각을 나타내셨고 어린 나이에 MIT에 진학하셔서 우수한 성적으로 국위 선양을 했다고 볼 수 있는 분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서 교수께서는 저때에도, 문과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언어학에 관심을 보이셨고, 지금 우리 독자들도 아는 대로 그 깊이 있는 인문적 소양이 벌써 저때 맹아를 드러내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드네요. 여튼 핵공학자가 풀어 주는 인문 이야기란 벌써 그 서두만 들어도 흥미롭습니다. 

"미숙한 예술가는 베끼고, 위대한 미술가는 훔친다(p42)." 피카소의 말입니다. 사실 훔친다는 말에는, 그걸 훔쳐서 완전히 내것으로 만든다(제2의 예술품을 새롭게 세상에 내놓는다)는 자신감이 깔린 말이지, 정말로 창의성 0이면서 뻔뻔스럽게 뭘 내세우기만 한다는 뜻은 전혀 아니겠습니다(이런 나쁜 인간들도 세상에는 있습니다). 피카소가 아프리카의 원시 예술(일단 이런 명칭을 쓰겠습니다)로부터 큰 영감을 받았음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인데, 그러나 피카소의 작품에는 세상 어디에도 없고 누구도 논하지 못했던 자신만의 개성과 논리가 새로이 이식되었습니다. 

p43을 보면 한국 핵공학 1세대 개척자들이신 임창생, 강창순 같은 원로들의 성함이 열거됩니다. 이분들, 또 저자 서 명예교수님은 남의 기술을 그저 훔쳐 오신 분들이겠습니까? 솜씨가 나쁘면 훔친 기술을 새로운 환경(한국)에서 써먹지도 못합니다. 43쪽의 "우리 실정에 맞게 정착"이라는 대목을 눈여겨 보십시오. 공학자의 천재성은 저렇게 현지적응성, 응용력에서 증명이 되는 겁니다. 그 결과 우리는 현재 핵시설 수출 시장에서 프랑스를 꺾고 맹활약하지 않습니까. 우리만의 기여가 생겼음을 이제 국제 사회가 다 인정하는 겁니다. 전에 뿌린 게 있어야 지금 거둘 게 생기는 법이지 않습니까. 

"나라가 부르고 겨레가 찾으면 불새가 되어서라도 날아가겠다.(p57)" 이 멋진 말은 과연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의 입에서 나올 만한 표현입니다. 물리학, 화학 등이 괜히 기초과학이 아니라서, 이 분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응용공학에서 진도가 안 나갑니다. 결과만 반복학습을 통해 익히는 정도로는 한계가 있지 않겠습니까. 우라늄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한다? 그걸 누가 모르겠습니까. 실무에서 정말 까다로운 부분은 매번 뭐가 튀어나와도 나오는 수많은 난관을 어떻게 요리조리 닷지(dodge)해 나가느냐 하는 디테일에 있습니다. 이런 건 공부머리를 넘어 거의 일머리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일류 엔지니어들은 그저 공부만 파는 너드들이 아니라 거의 준 경영자라 할 수 있는 인재들입니다. 아무튼 이 대목에서 교수님은, 원자핵공학에서 정말 중요한 소양은 물리학 뼈대 중 하나인 유체역학이라고 합니다. 

p65를 보면 스리마일 사고가 언급됩니다. 구 소련에 체르노빌이 있었다면 미국에선 그에 앞서 스리마일이 있었죠. 이런 이야기를 보면 교수님은 참 혜안이 있으셨던 듯합니다. 이제 미국은 글렀으니, 핵 선진국인 프랑스로 가야겠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래도 미국이 떠오르는 태양(1970년대)이니 정치적 기류가 바뀔 걸 기다리려고 마음먹을 수도 있을 텐데 말입니다. 아무튼 청출어람이라고, 저랬던 프랑스를 이번에 우리가 수주전에서 이겼으니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 대목에선 재미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황태자의 첫사랑> 무대였던 하이델베르크에 들르셨던 추억도 있고, 아름다운 사모님 미모에 끌려 미군[駐獨]들이 접근한 사연 등입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이처럼 공부 잘하면 예쁜 반려자가 생길 가능성이 크니 서균렬 교수님처럼 열심히들 해야 하겠습니다! 

책 앞에서도 프린시피아라는 이름(물론 뉴턴의, 라틴어로 쓰인 과학 고전에서 따온 이름)이 나왔는데 p104에 본격적으로 그 연구소가 세상에 어떻게 나왔는지가 잘 설명됩니다. 여기서도 보듯이 좋은 이름은 일차원적으로만 좋은 뜻을 가지는 게 아니라, 이리 읽어도 저리 보아도 또다른 의미로 해석되어 다차원의 서기(瑞氣)를 풍깁니다. 괜히 작명소를 철학관(?)이라고도 부르는 게 아닙니다. 인문이란 본디 현상의 이면에 흐르는 대 맥락을 짚어내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작년에 맨해튼 프로젝트의 수장 오펜하이머를 다룬 영화가 개봉되어 인기를 끌었습니다(그 원작 논픽션은 십수년 전에 우리말로도 이미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 후반부는 영화보다 재미있게, 20세기 후반 핵공학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어 세계의 모습 자체를 바꿔 놓았는지가 설명됩니다. 역시 천재는 그 입으로 뭘 설명해 줘도 자연스러운 흥이 전체를 지배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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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전략 - 소설의 기초부터 완성까지 오에 컬렉션 4
오에 겐자부로 지음, 성혜숙 옮김 / 21세기문화원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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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 선생은 따스한 주제가 담긴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 준 작가였지만, 그가 남긴 소설들이 이룬 세계를 돌아보면 마치 튼튼한 성벽 주변에 깊은 해자(moat)를 두른 듯합니다. 이는, 동경대 출신 엘리트인 그가 애초부터 치밀한 전략 하에 작품을 창작했음을 뜻합니다. 만약 그가 고유의 소설론을 남기지 않았다면 평론가나 학자들이 그의 내면과 동기를 탐구라느라 진땀깨나 흘렸겠으나, 다행히도 그가 직접 이렇게 정치한 이론을 구성한 바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비교적 손쉽게 오에 월드의 조감도와 도면을 참조하여 그의 작품을 이해하고, 나아가 소설과 문학의 본질과 기능에 대해 더 깊은 성찰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단어(들)의 열거 자체가 문학적 기법의 하나가 될 수 있다(p58)." 이는 이노우에 히사시가 청대 문인 장종지의 글에서 발췌한 바가 묘하게도 그 음성적 효과와 더불어 일본 독자들에게 미학적 쾌감을 선사했다며 오에가 주장한 내용입니다. 글쎄, 우리 한국인들도 (건륭기[乾隆期]의 문장가들처럼) 위장에 통증을 느낄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역시 이 예(例)로부터 외형률의 고유한 느낌을 의도대로 접수하기란 쉽지 않을 듯합니다(한자의 발음이 다르므로). 물론 수사법으로서의 열거법은 꼭 두운, 각운 등의 음성 요소가 개입해야만 성립하는 건 아니며, 적시적소(適時適所)의 열거 그 자체가 레토릭의 효과를 냅니다. 러시아의 평론가 바흐친은 이를 장사꾼의 호객행위와도 닮았다고 했다는 오에의 지적이 p58에 나오는데, 어딜 감히 문학의 기법에 비기냐고 할 수 있어도 사실 그 근본이 같음은 부인 못합니다. 한편으로 저런 바흐친의 언급까지도 꼼꼼히 짚어내는 걸 보면 역시 선생은 박식한 분입니다. 

루마니아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학문적 대성을 이룬 미르치아 엘리아데라는 종교학자가 있으며 해당 분야에서 엄청난 위상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그의 주요 저작들이 이미 빼어난 솜씨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또 엘리아데와 비슷한 처지였던 문장가 에밀 시오랑(아름다운 산문의 매력으로, 한국에도 폭 넓은 독자층을 확보했었죠)이라든지, 부조리극의 대가이자 대명사인 이오네스코(뭐 새삼 소개가 불필요합니다) 같은 이름들이 매우 정겹게 언급됩니다. 사실 이들 문인들과 오에 선생이 직접적인 교분을 나누었던 건 아닙니다. 저 세 사람은 루마니아 혈통인데다 나이도 다들 비슷한 또래지만 오에는 거의 저들의 아들뻘이죠. 다만 이들의 유려한 프랑스어 문장을 선생이 진심으로 사랑하여 깊이 파고들었고, 그 연구의 결과가 이처럼 깊어졌다 할 수 있습니다. p100 이하에 오에 선생의 르상티망(resentiment)론(論)이 짧게나마 나와 독자의 흥미를 부르기도 합니다. 

오에 컬렉션 제3권 리뷰에서 제가 미시마 유키오를 짧게 언급했었는데, 이 제4권에는 미시마 유키오 부부와 오에가 함께 크리스마스 파티를 연 일화가 간접적으로 회고되어 흥미롭습니다. 사실 오에가 노벨 문학상을 탄 데에는 1960년대부터 꾸준히 그의 작품을 영어로 옮겨 온 존 네이던의 역할이 적다고는 못합니다. 그런데 오에는 이 대목에서 한때 친구였던 네이던이 사실을 크게 왜곡하여 자신이 미시마의 부인과 갈등을 빚었다고 거짓말을 서문에 썼다며 불쾌감을 표현합니다. 그러면서도 선생은 네이던이 어떤 극작가 기질이라도 발휘하여 독자의 흥미를 위해 한 편의 소극을 꾸렸겠다며 최대한 좋은 방향으로 이해하려는 관대한 모습을 보입니다. 어쩌면 이 모두가, 본래부터 친한 사이였던 두 분 사전 합의 하에 빚어진 유쾌한 소통극인지도 모르겠네요. 

윌리엄 블레이크는 20세기 후반 들어 토머스 해리스의 스릴러 <레드 드래곤>에서 중요한 모티브 구실을 하는 등 재조명되어 대중 사이에 회자되기도 했습니다. 앞에서 에밀 시오랑도 "인간은 이 험하고 모순 가득한 세상에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나았다" 같은 비관적인 말을 남기기도 했는데, p130에 인용된 블레이크도 "아기는 요람 속에 있을 때..."라며 비슷한 냉소주의를 표명합니다. 그런데 이들과 달리 농도 짙고 진정성 높은 휴머니즘으로 무장한 오에가 이 말들을 인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 독자들도 익히 알듯, 오에에게는 날때부터 신체가 불편했던 아들이 있었기에 일생을 두고 그를 향한 연민과 괴로움에 시달린 바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심원한 달관은 그런 시련에 직면해서도 비관과 염세로 치닫기보다 오히려 초극과 낙관의 진로를 잡았기에 독자에게 감동을 줍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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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로페이스
R. F. 쿠앙 지음, 신혜연 옮김 / 문학사상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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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는 상상력, 여태 백인 문화권이 일궈놓은 모든 문학적 성취를 기발하게 비웃고 뒤틀어놓으며, 헌정인지 조롱인지 알 수 없을 현란한 말빨로 (영어권) 독자들의 혼을 빼놓은 MZ 작가 R F 쿠앙의 최신작(작년 출판)입니다. 이 책 앞날개에도 그녀의 출세작 <양귀비 전쟁>이 잠시 언급되었는데 그걸 쿠앙이 스물두 살 때 쓴 겁니다(이 작품 중 p166 하단도 참조) . 우리 나라에서는 저 <양귀비...>가 마치 노빅의 테메레르 시리즈처럼 청소년 판타지 정도로만 인식되는 경향도 있는데, 그렇게 읽을 수도 있으나 쿠앙의 책은 더 중층적인 독해가 가능하다는 점이 다릅니다. 쿠앙의 작품들을 그리 대접해도 된다는 점, 이 <옐로페이스>가 증명했다고 해도 될 것 같네요. 쿠앙의 성씨는 한자로 匡(광)이라고 쓰는데 송 태조 조광윤의 휘 일부와 같습니다. 참고로, p208에 키큰양귀비 증후군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출판은 느리게 진행된다(p60)." 예나 지금이나 출판 산업의 생리가 그러한 듯도 합니다. 출판 산업은 엔터테인먼트업계만큼이나 대단한 모험 산업이고, 출판사가 관리하거나 컨택하는 여러 작가들은 마치 연예계의 가수나 배우처럼 섬세하게 다뤄야 하는 자산이자 골칫덩이들입니다. 여기에, 21세기 들어 각종 뉴미디어, 개인 소셜 계정 등이 등장함으로써 업계 경영자들이 고려에 넣어야 하는 변수는 훨씬 많아졌습니다. 

p61에는 대단히 속물적 어조로 1인칭 화자 준 헤이워드가 언제나 신경 쓰는(지가 왜?) 메이저 5대 출판사가 언급되는데 버젓이 현실에 존재하는 곳들을 실명으로 저리 늘어놓는 태도가 뻔뻔스럽습니다 ㅋ 사실 더 웃긴 건, 이 작품이 아테나 리우와 주인공과의 관계를 마치 디키 그린리프와 톰 리플리의 그것처럼 설정했는데, 누가 봐도 아테나가 작가 쿠앙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소수 인종 출신이 백인 스타를 언제나 선망하는 처량한 신세를 정반대로 뒤집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흠. 

"아마존이나 굿리즈(Goodreads.com)는 물론이고... 하트가 쌓이는 걸 보니 출간일에 늘 그토록 원했던 세로토닌이 넘쳐흐르는 느낌이었다(p113)." 이런 게 다, 20세기까지만 해도 발랄하게 움직이되 최소한의 체면이나 무게는 잡으려 들었던 출판계나 작가들한테서 상상 못 했던 분위기입니다. 굿리즈에는 물론 좋은 리뷰도 많으나 자극적인 언사를 써 가며 주목만 받으려 들거나 아예 리뷰 등록의 의도가 의심되는 출판 홍위병 같은 유저도 있습니다. 하트고 뭐고 작가나 편집인이 과연 이런 데까지 신경을 쓰는 게 맞는지, 이래서야 참된 시대정신이 현창되는 걸작, 세월의 풍화에 아랑곳하지 않는 명작이 나올 수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미스 사이공>은, 마케팅 용어로 세계 4대 뮤지컬 중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며 한국에서도 여러 차례 공연됩니다. 그런데 코믹하게도 p178에서는  "조지타운에 있는 한 베트남 커피숍"에서 서빙하는 메뉴(커피)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참고로 작가 쿠앙은 조지타운대 출신인데 실제로 학교 근처에 이런 커피숍이 있지 않았겠냐고 독자인 제가 멋대로 짐작해 봅니다. 아, 아무튼 이 장면에서도 확인 가능한 것처럼, 마치 패리스 힐튼을 쫓아다니며 유명한 걸로 유명하던 킴 카다시안이 진짜로 셀럽이 되었듯, 준 헤이워드도 도둑질(참고로, 펄 벅의 <대지>에서 주인공 왕룽도 처음에 우연한 도둑질로 부자가 되었더랬죠)로 이제 스타덤에 올라섭니다. 그러나 악플러의 괴롭힘 등 셀럽 오서의 불쾌한 숙명 역시 그녀가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p308의 캔슬 컬처 역시 좌우 불문 심각한 악습입니다. 

한국의 전상국 작가가 쓴 풍자적 단편 <달평씨의 두번째 죽음>의 내용도 그렇지만, 대중의 관심이나 호기심, 인기란 대단히 변덕스럽고 무상한 것입니다. 셀럽이나 셀럽호소인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은, 이제 내 밑천이 바닥에 가까워졌다 싶으면 없는 말도 지어내어서, 예를 들어 내가 성희롱을 당했다 성범죄의 피해자다 어떻다 하며 아예 스토리를 날조해 대는, 빤한 작태의 수순을 밟는다는 것이죠(p381에 약간의 반전이 있을 듯도 한데...). 자, p285에서는 드디어 충격적인 실상이 드러납니다. 도둑계의 상도덕 1번은 장물을 또 훔치지 않는다는 거라는데(물론 그런 건 있지도 않습니다), 글쟁이라는 사람들이 알고보니 그 직업윤리가 도둑만도 못했던 거죠. 이제 준 헤이워드는 원죄의 사함을 받은 것일까요? 

"훔치려면 좀 나은 걸 훔쳤어야지!(p362)" 음식점 사장님들도 별 한 개짜리 리뷰만 보면 미치기 직전까지 간다는데 아마존 자기 책에 ★가 융단폭격된 걸 보면 게슈탈트가 녹아내리겠죠. "준 헤이워드는 반드시 속죄해야 한다." 어디, 참회의 AV라도 찍으라는 걸까요?(백인 장르도 있습니다) p363에 본문 중 설명으로도 나오지만 미디엄닷컴이라는 출판 플랫폼이 실제로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한국작가 백용운의 <상두놀이>라는 작품을 리뷰했었는데, 그 작품의 플롯도 살짝 생각났습니다. "뒤에 땅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허공이었다.(p427)" 출판계뿐 아니라 인생의 모든 국면이, 알고보면 이와 같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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